지윤은 그제야 깨닫고 활짝 웃었다.“그러니까 백인호는 도련님을 고발할 수 없는 거네요?”“맞아.”정안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요?”“하준 오빠한테.”정안이 옷을 잡아당기고 거울 앞에 가서 보며 머리를 다듬었다.“언니 깨어나면 부르라고 하셨어요. 언니 서재에 갈 필요 없어요. 내가 가서 불러올게요.”“괜찮아. 너무 자서 온몸이 불편해. 좀 걷고 싶어.”말을 마친 정안이 방을 나섰고 지윤이 뒤를 따랐다.2층으로 내려가 정안이 서재로 향하는데 지윤이 여전히 뒤를 따랐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손을 내저었다.“나 따라오지 말고 가서 일 봐.”지윤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엄숙하게 말했다.“3년 전에 한 번 실종되고 어제 또 실종됐어요. 나 진짜 너무 걱정돼요. 앞으로 언니가 어디 가든 반드시 24시간 밀착 경호할 거예요.”정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악연하게 그녀를 바라보았고 지윤이 진지하게 말했다.“화장실 가는 것 빼고 다 따라갈 거예요. 앞으로 저녁에도 같이 자요.”정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더니 손을 뻗어 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감동하여 부드럽게 속삭였다.“그래. 앞으로 나랑 같이 자자. 다 네 맘대로 해. 하지만 여기는 금원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금원이 뭐요?”지윤은 코웃음을 치더니 두 손으로 가슴을 두르고 고개를 쳐들고 득의양양하게 말했다.“내가 언니를 금원에서 얼마나 쉽게 납치해갔는데요?”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어 정안은 반박할 수 없었다. “나 서재에 가면 네 시선 범위에는 없지만 하준 오빠 눈앞에는 있는 거잖아. 하준 오빠는 나 다치게 안 해.”정안이 부드럽게 지윤을 위로했고 지윤이 그녀의 뒤를 가리켰지만 정안은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그냥 하준 오빠랑 따로 만나서 고맙다는 인사 하고 싶어서 그래. 금방 나올 거니까 따라올 필요 없어.”“고맙긴.”중후하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정안의 뒤에서 들려왔다.정안은 멍해졌고 심장 박동이 빨라져 홱 돌아서서 뒤에 있는 남자를
정안은 민망하게 그 자리에 멍하니 있다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남하준에게 했던 독한 말들을 떠올렸다.다시 만나지 말자고, 다시는 엮이지 말자고 정중히 거절하고는 이제 와서 뻔뻔하게 그에게 접근하다니. 비록 그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함이지만 그는 정말 믿을까?남하준은 그녀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더 할 말 있어?”남하준이 묻자 정안은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니요. 없어요.”남하준은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그럼 난 남은 일 처리할게.”“네.”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당황해서 말했다.“그럼... 나 먼저 나가 볼게요.”남하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안은 뒤돌아서서 몇 걸음 가더니 고개를 돌려 남하준을 보았다.“나 지윤이랑 위층에 있는 손님방에서 지내고 싶어요.”남하준은 그윽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대답했다.“그래 그럼.”정안은 싱긋 웃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서재를 나온 그녀는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뜨거웠다.예전에 남하준을 짝사랑할 때는 조금의 긴장감과 수줍음만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남하준이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짝사랑했고, 지금도 그녀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니 매번 그를 만날 때마다 긴장감과 수줍음 외에도 심장이 뜨겁고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가슴에서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그를 보면 마음이 들쑤시는 게 너무 이상했다.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이렇게도 가슴 벅찬 일일까?그걸 느끼고 나니 곧 뼈아픈 고통이 뒤따랐다.사랑하지만 가질 수 없으니 고통스러웠다.그녀의 신분은 절대 두 사람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았으니 감히 남하준에게 고백할 수 없었다.그저 지금처럼 그의 평안을 바랄 뿐이었다.정안은 거실 소파에 가서 앉아 책 한 권을 들고 몇 페이지를 넘겨보다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서재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책을 읽으면서 서재 밖에서 남하준을 지키고 있었다.정안은 남하준이 이렇게까지 바쁜 줄 몰랐다.밤이 깊어 조용한 밤, 지윤이 거실로 와서 그녀를
남하준은 입술을 오므리고 웃으려 해도 웃을 수가 없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나 야식 안 먹어. 그러니까 돌아가 쉬어.”정안은 고개를 숙이고 몰래 하품을 하며 어렴풋이 말했다.“오빠도 밤새워 일하지 말고 얼른 가서 쉬어요.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전화하고요. 내가 바로 오빠 방으로 갈게요.”순간 남하준은 그녀의 발상이 아주 재밌다고 생각했다.남하준이 이렇게 연약한 여자의 보호를 받는다고?“그래.”“내 번호 원터치 다이얼 버튼으로 설정해 줘요.”정안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고 남하준은 여유롭게 핸드폰을 꺼내 정안의 번호를 원터치로 다이얼로 설정했다.“됐지?”남하준은 휴대폰 설정을 보여주며 조용히 달랬다.“이제 가서 쉴래?”정안은 여전히 불안해서 계속 당부했다.“다른 사람이 준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요. 앞으로 오빠 밥은 나랑 지윤이가 책임질게요. 지윤이 웬만한 요리사만큼 음식 잘해요.”“그래. 네 말대로 할게.”남하준은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줄 몰랐고 마음이 따듯했다.“그럼 난 이만 자러 갈게요. 잘 자요.”정안은 그에게 손을 흔들고는 돌아서서 거실을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남하준은 복잡한 마음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는 지금까지 백하린이 그에게 약을 탈까 봐 걱정한 적이 없었고 아이 때문에 결혼하는 황당한 일은 절대 그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그가 이 일을 중시하는 것은 단지 기회를 틈타 그녀를 곁에 두면 더 많이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이튿날 아침.정안은 알람을 맞추고 일찍 일어나 지윤을 따라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지윤이 아무리 설득해도 그녀는 주방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여태껏 정안은 집안일을 한 적이 없었다.그녀는 사람마다 잘하는 분야가 있다며 그녀는 요리를 잘하지 못하니 이 일에 시간 낭비하지 않겠다고 했다.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금 주방에서 아침 식사를 배우고 있었다.지윤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언니. 그냥 나가서 언니가 좋아하는 일
정안이 젓가락을 들고 남하준을 바라보니 그는 이미 아침 식사 마쳤다.그는 냅킨을 들고 입을 닦으며 부드러운 눈매로 나지막이 말했다.“아주 향긋하고 달콤하고 맛있었어.”높은 후기에 정안은 대체 얼마나 맛있는지 궁금해 브로콜리를 집어 입에 넣었다.순간 달콤한 맛에 브로콜리 향기가 미뢰를 가득 메우더니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맛없지도 맛있지도 않은 그냥 브로콜리 디저트 느낌이었다.그녀는 설탕을 소금으로 알고 잘못 넣었고 또 많이 넣었다.아니나 다를까 육전도 달고 계란 프라이도 달았다.정안은 먹을수록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진짜 맛있었어. 난 좋아.”남자의 말에 위로를 얻었지만 도무지 입맛에 맞지 않아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민망함에 화제를 돌렸다.“오빠 오늘 뭐 해요?”남하준의 안색이 서서히 어두워졌다.“별다른 일은 없고 태준이 형이 퇴원해서 본가에 가 보려고.”정안은 순간 긴장하더니 테이블에 두 손을 얹고 물었다.“태준 오빠 깨어나서 나 한 번도 못 가봤어요. 지금 몸은 좀 어때요? 회복은 잘 됐어요?”남하준은 다급하고 절박한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니 마음이 아프고 불편했다.“같이 가 볼래?”남하준이 묻자 정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당연하죠.”그녀는 남하준을 보호하러 왔으니 당연히 그의 곁을 잘 지켜야 했다.“아침 먹고 바로 출발하자.”정안은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를 만지고 캐주얼한 옷을 힐끗 쳐다보고는 급히 앞치마를 풀었다.“오빠 잠깐만 기다려요. 나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위층으로 뛰어올랐다.남하준은 눈을 늘어뜨리고 침울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초점 없는 시선은 테이블을 응시하고 있었다.‘태준이 형 만나러 간다고 하니 아주 기쁘고 흥분한 것 같네...’10분 후, 남하준은 계단 밑에 서서 기다렸고 정안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그가 고개를 들자 정안은 당고머리를 묶고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씩씩한 소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그녀는 계단을 뛰어 내려오며 황급히 말했
그들이 별원에 도착했을 때, 도우미가 보이지 않아 남하준은 문을 두드리고 천천히 열었다.방안이 온통 캄캄하고 서늘했으며 조금의 생기도 없었다.정안과 지윤은 집 밖의 경치에 놀라고 또 집 안의 음산함에 놀랐다.“나가!”남자의 허스키한 분노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란 정안은 긴장하여 남하준에게 기대어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남하준은 고개를 숙여 정안의 손을 보더니 꼭 잡아주었다.입구를 통해 들어간 빛에 의해 희미한 그림자가 보였고 남하준은 정안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형, 나야. 하준이.”정안은 용기 내어 캄캄한 거실을 바라보며 말했다.“태준 오빠. 나 왔어요.”곧이어 펑 하는 굉음이 들렸고 지윤은 놀라서 귀를 막았다.정안은 남하준을 와락 껴안고 긴장한 듯 심호흡을 하며 현관에 서서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그러자 남하준은 정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놀란 그녀를 달래고는 남태준을 향해 말했다.“형, 나 완이랑 같이 왔어요. 다른 뜻은 없으니까 우리 들어가게 해줘요.”“나가라고!”마치 정신을 잃은 짐승이 초원에서 울부짖는 것 같았다.곧 물건을 부수는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귀청을 찢는 듯한 식기 깨지는 소리, 가구 넘어지는 소리.이윽고 유리잔이 문밖으로 던져져 정안이ㅢ 앞에 떨어지자 남하준은 그녀를 안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입구를 떠났다.지윤은 어안이 벙벙하여 깜깜한 방안을 놀라서 바라보았다.‘이 안에 설마 무서운 짐승 한 마리를 키우나?’남태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형. 일단 진정해요. 형 기분 좋아지면 우리 다시 올게요.”그는 말하면서 문을 닫았고 돌아서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를 보고 멍해졌다.정안이 마음 아파하며 물었다.“태준 오빠 왜 저래요?”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별원을 떠나 정원 밖의 정자로 가서 앉았다.지윤이 그 뒤를 따랐고 정안 옆에 앉아서 두 손으로 뺨을 괴고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남하준을 바라보았다.굳은 얼굴의 남하준은 어두운 눈빛으로 슬픈 기색을 띠며 말했다.“형
정안은 마음이 무거워 별원의 대문을 돌아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태준 오빠 눈도 안 보이고 두 발도 못 움직이고 성격은 또 저렇게 괴팍한데 누가 오빠를 돌보죠?”남하준은 깊은 눈동자로 입을 열었다.“계속 술만 마셔. 취해서 잠들면 도우미가 와서 방 청소하고 의사도 그때 들어가 영양제를 주입하고 재활 치료도 하고 있어.”정안은 남태준의 자살에 맞먹는 행동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나 들어가 봐야겠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벌떡 일어나 별원 대문으로 향했다.“완아.”남하준이 긴장된 얼굴로 일어나 그녀를 부르려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참았다.그녀가 남태준을 슬럼프에서 구해내고 싶어 하니 그는 기뻐해야 마땅하다.남하준은 눈앞에서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왠지 모르게 의기소침하고 마음이 복잡해졌다.남태준을 향한 그녀의 관심과 사랑은 아주 진실하고 확실했다.지윤은 그의 안색이 복잡하고 보기 흉한 것을 발견했다.“도련님, 언니는 늘 착하잖아요. 그래서...”“설명할 필요 없어요.”남하준이 지윤의 말을 끊었다.그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형이 나아지길 바라고 있었다.그는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공무를 처리하며 그녀가 나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가고 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정안은 여전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뚜뚜 지윤의 휴대전화에서 벨이 두 번 울렸고 지윤이 확인하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언니가 죽 끓여오라고 메시지 보냈어요!”남하준이 급히 일어나 재빨리 몸을 돌리며 말했다.“내가 끓여올게요.”지윤이 그 뒤를 따랐고 30분 후, 남씨 별장의 주방 밖에서 남하준이 지윤에게 죽을 건넸다.“지윤 씨가 갖다 줘요. 형이 완이는 배척하지 않은 것 같으니 완이더러 형 옆에 더 있어 주라고 해요.”“하지만...”남하준은 씁쓸하게 웃었다.“난 괜찮아요. 나보다 형이 더 완이가 필요해요.”“네.”지윤은 죽을 가지고 떠났고 남하준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가라앉고 말할 수
“그게 무슨 말이야?”“남자에게 약을 탄다면 당연히 두 번째 경우겠죠.”정안은 뒤돌아서서 지윤을 바라보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지윤이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언니 지금 도련님 안위를 너무 걱정해서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었어요. 냉정하게 생각해봐요. 백하린이 자기에게 덫을 놓으려 하는걸 알고 있으니 도련님은 분명 대비하고 있을 거예요.”정안은 묵묵히 지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우선, 도련님의 왼팔과 오른팔은 절대 도련님 배신 못 해요. 일단 발각되는 즉시 머리가 잘리겠죠?”“그리고 반드시 남자가 혼미하고 흥분한 상태에서만 남녀 간의 일을 할 수 있어요. 도련님이 진정제를 휴대하고 다니시면 그런 발정 약을 먹어도 두려워할 필요 없겠죠.”“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백하린은 절대 도련님 상대가 안 돼요. 언니가 너무 긴장하고 있어요.”정안은 진정하고 생각에 잠긴 듯 남씨 별장을 나섰고 지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혹시 내가 이번에 오빠 보호하겠다고 나선 게 오빠는 우습고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언니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정안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길가에 서서 차를 불렀다.“내가 전에 우린 친구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영원히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거든. 근데 지금 나 뭐 하는 거니?”“언니 나름대로 고충이 있잖아요? 그리고 도련님도 언니 원망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정안은 너무 씁쓸한 마음에 택시가 그 앞에 서 있는데도 올라가지 않고 머뭇머뭇 물었다.“네 말이 맞아. 하준 오빠는 내 보호 없이도 충분히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어. 그럼 나 지금 금원으로 돌아가는 게 맞을까?”“난 지금 언니가 금원에 사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요.”지윤은 택시 문을 열고 그녀를 밀었다.“일단 차에 타서 말해요.”정안이 차에 탔고 지윤이 따라올라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백인호는 도련님에게 거의 죽을 듯이 맞았지만 죽은 건 아니잖아요? 만약 백씨 저택에 돌아간다면 분명 언니를 가만두지 않을 거고 도련님도 동의하지 않겠죠.
“우리에게 밥을 사준다고요?”지윤은 아연실색했다.요리사의 이상한 말에 정안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요리사를 지나쳐 안으로 뛰어들었고 요리사는 긴장해서 뒤쫓아 들어가려고 했다.지윤이 요리사의 손을 덥석 잡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아저씨 오늘 왜 이렇게 긴장하세요?”요리사는 지윤의 손을 뿌리치며 대답했다.“아닙니다. 저 먼저 가볼게요.”지윤이 요리사의 앞을 가로막았다.“서두르지 말고 조금만 더 계세요.”당황한 요리사는 다시 한번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지윤의 눈에 띄었고 경호원 경력이 풍부한 지윤은 그가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두말없이 요리사를 그대로 땅에 눌러버렸다.거실로 뛰어 들어간 정안은 백하린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오빠, 문 열어요. 나 하린이에요. 하준 오빠.”백하린은 문을 두드리며 끊임없이 외쳤다.“문 좀 열어요. 나 할 말 있단 말이에요.”정안이 벽에 있는 시간을 보니 낮 2시, 점심을 먹은 지 한 시간이 지났다.그녀가 2층으로 뛰어 올라가 보니 백하린은 투명한 망사 스커트를 입고 속치마가 보일 듯 말 듯 섹시한 몸매를 뽐내고 있었다.“지금 뭐해?”정안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백하린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급히 옷을 잡아당겼다.“네가 왜 여기 있어? 넌 분명...”정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분명 뭐?”백하린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정안이 비꼬며 말했다.“내가 백인호한테 갇힌 줄 알았어?”백하린은 한 줄기 미소를 지으며 짐짓 덤덤한 척 땅바닥의 가방을 집어 들고 그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호의 번호를 눌렀다.계속 전화가 연결되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해 물었다.“백인호 어디 있어?”정안은 일말의 감정도 없이 차갑게 말했다.“아마 집에서 죽었을걸? 그런데 넌 왜 그 꼴로 금원에 온 거지? 대체 무슨 속셈이야?”백하린은 덤덤하게 대답했다.“금원은 원래 하준 오빠가 우리 신혼집으로 마련한 거야. 나 여기서 오래 살았어. 집 비밀번호까지
이다은은 컴퓨터를 켜고 쇼핑몰 관리자 페이지에 로그인했지만, 거래 완료된 주문은 하나도 없고 답장하지 못한 문의 메시지만 가득한 화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답답한 마음으로 하나씩 정성껏 답장을 보냈지만, 새로운 손님은커녕 추가 메시지도 오지 않는 적막한 화면에 멍하니 시선을 두다가 결국 다른 화면으로 넘어갔다.새로 띄운 화면에는 빽빽한 코드와 무인 로켓의 데이터 구조가 가득 떠 있었다.이다은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이마를 짚으며 깊은 고민에 빠진 끝에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 시간 동안 코드를 작성하고 저녁을 먹은 뒤에도 세 시간이나 작업에 매달렸다.밤늦게 작업을 마치고 파일을 보냈지만, 그녀가 손에 쥔 돈은 고작 60만 원에 불과했다.‘학력이 없으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값싼 노동자로만 보이는구나...’그녀는 가끔 이 모든 걸 버리고 싶을 만큼 깊은 절망에 빠지곤 했다. 컴퓨터를 끄고 스트레칭을 하며 욕실로 들어가면서도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한때 그녀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운명이 바뀔 거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M국 항공우주대학교 합격 통지서가 도용되면서 그녀는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 일은 그녀의 꿈과 미래를 부숴버렸고 지금까지 체념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다음 날 아침, 약속대로 남우영과 두 번째 만남을 가진 이다은은 드디어 손에 혼인관계증명서를 쥐게 되었다.남우영이라는 잘생긴 남편이 생겼지만 그녀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녀에게 결혼은 그저 누구와 하든 큰 차이가 없는 일이었다.‘결혼이란 건 결국 평생 팀플할 팀원을 고르는 거지. 게다가 부모님 잔소리에서도 해방될 수 있게 됐으니, 이보다 완벽한 일거양득이 어딨어?’구청을 나서며 혼인관계증명서를 내려다보던 이다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남우 씨, 근데 왜 이름이 남우영으로 되어있어요? 남우 아니었어요?”남우영은 순간 표정이 굳더니 억지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주민등록증엔 남우영으로 되어있어요. 어릴 때부터 가족들이 남우라고 불
이다은은 남우영이 타고 온 차를 보더니 그 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었다. 그렇게 조수석 문 앞에서 한참 머뭇거리는 그녀를 본 남우영이 다가와 차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다은 씨,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이다은은 차를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몇억은 하는 차 아닌가요? 잘못 긁거나 고장 내면 저희 둘 다 감당 못 해요.”남우영은 잠시 그녀를 보며 생각하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타요. 제가 조심해서 안전운전 할게요.”이다은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차에 올랐다.차가 도로를 달리자, 이다은은 자기 집 주소를 알려주었고, 한 시간이 지나 낡고 오래된 구도심의 허름한 건물 앞에 차가 멈췄다.이다은은 차에서 내린 뒤 남우영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구청에서 봬요.”남우영도 창문을 내려 손을 흔들었지만,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낡고 허름한 건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며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다은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의 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라갔다. 8층 꼭대기 층에 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캐릭터 탈을 구석에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크게 숨을 내쉬었다.“하아... 오늘도 정말 너무 많이 뛰어다녔네.”그때 옥상에서 세탁물을 한가득 담은 빨래 바구니를 들고 다리를 저는 그녀의 아버지, 이적이 내려왔다.“다은아, 이제 퇴근해서 온 거야?”이다은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려가 빨래 바구니를 받아들며 말했다.“아빠, 제가 할게요.”이적은 바구니를 건네고 천천히 거실로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이다은이 빨래를 하나씩 꺼내 정성스럽게 개기 시작하자, 이적도 옆에 앉아 빨래를 개며 무심히 물었다.“다은아, 요즘엔 선 봤던 남자 안 만났어?”이다은은 빨래를 개던 손을 멈추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빠, 저 결혼하려고요.”이적은
이다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기쁨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그동안 선을 보면서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집안 형편이 가난하다느니, 학력이 부족하다느니, 성격이 유치하다느니 하며 그녀의 단점을 들춰내기 바빴다.하지만 이번엔 달랐다.‘그것도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남자가 인정해 주다니... 집이 가난한 건 서로 똑같으니까 오히려 잘된 거야. 적어도 누가 누구를 나무랄 일은 없으니까.’더군다나 이다은의 이모는 이미 그의 고향으로 시집가 그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까탈스러운 이모가 그를 성실하고 착하며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이다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목소리가 낮아졌다.“저도 남우 씨가 맘에 들어요. 우리 그냥 내일 혼인 신고하러 가요.”남우영은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 되물었다.“혼인 신고요? 오늘 선보고 내일 바로 혼인 신고요? 그래도 시간을 두고 서로 좀 더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이다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차피 부부로 살아가는 건 현실적인 문제잖아요. 적당히 맞춰 가면서 살다 보면 되는 거 아닌가요?”남우영은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살짝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그건 그렇지만...”이다은은 남우영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물론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고 싶으시다면 저도 받아들일게요. 다만... 이모에게서 남우 씨 아버님이 암 투병 중이셨다가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남우 씨의 결혼 문제로 걱정을 많이 하신다면서요? 그래서 저는 남우 씨가 저보다 더 급하신 줄 알았거든요.”남우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우리 혼인 신고합시다.”이다은은 엄청나게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오래된 숙제를 끝낸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필요한 서류 챙겨서 내일 아침 일찍 구청 앞에서 만나요.”남우영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이다은은 여전히 개구리 캐릭터 탈을 품에 안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발견했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남우영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다은은 그를 단순히 맞선남 ‘남우 씨’로만 알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을 애타게 찾는 듯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이 마주친 순간 성큼성큼 다가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물었다.“작은 개구리 탈 하나 제작하는 데 도대체 얼마나 드는데요?”“만... 만원이요.”이다은이 대답하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그러면 고작 만원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거예요?”다소 황당하다는 어투가 담긴 질문에 이다은의 표정이 굳어졌고 목소리에는 살짝 짜증이 묻어났다.“마치 고작 몇 푼 때문에 생고생이라도 했다는 식으로 얘기하시네요?”“돈 문제가 아니라면... 그럼 뭐때문에 이렇게 고생하셨단 거죠?”남자가 당황한 듯 다시 묻자, 이다은은 코웃음치며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잘생긴 얼굴이 다는 아니라니까!’조금 언짢았지만 이다은은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고작 만원이 아니에요. 오천 원은 저에게 이틀 치 밥값이기도 하고요. 새벽부터 일어나 두 시간 걸려 도매시장까지 가서 어렵게 가져온 개구리 캐릭터들이에요. 제가 하나하나 기대를 담아 준비한 거라고요. 심지어 단속 공무원들 피해 가며 골목에서 한 시간이나 도망쳤는데 그걸 훔쳐 간 사람이 결국 ‘할머니의 모습’을 한 도둑이었다는 거죠. 제가 그걸 되찾으려고 한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세요?”남우영은 이다은의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개구리 캐릭터 탈을 내려놓고 자기 지갑에서 현금을 몽땅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 정도면 오늘 손해 본 건 다 메꿀 수 있겠죠?”그는 이다은이 더 이상 속상해하지 않길 바랐다. 이런 일로 괜히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피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오늘 소개팅을 잘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이다은은 그의 손에 들린 현금다발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남우영을
안성의 6월은 날씨가 무더웠다.뜨거운 태양 아래, 거리에 행인이 거의 없었다.왕개구리 인형 옷을 입은 한 여자가 커피숍 앞으로 다급하게 다가왔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수십 개의 개구리 ‘자식’들을 구석에 놓고 무거운 개구리‘머리'를 벗고는 땀에 젖은 예쁜 얼굴을 드러냈다. 간판을 올려다보고 큰 눈을 깜빡이며 다급하게 말했다.“아마 여기가 맞을 거야!”개구리 머리를 안고 카페에 들어가 두리번거렸는데 젊은 남자는 한 명뿐이었다.멀리서 보니 얼굴도 아주 잘생겼고 분위기도 우아했다.‘오늘 남자는 좀 괜찮은데? 어쩐지 엄마가 이번에 결혼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고 경고하더라니.’여자는 헐레벌떡 걸어 들어가 남자 앞에 앉은 후 매우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일 때문에 방금 도시 관리인에게 쫓기다가 길을 잃었어요. 반 시간이나 늦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소리를 들은 남우영은 고개를 들어 반대편에 앉아 있는 반인 반개구리를 보는 순간 멍해졌고 눈 밑에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놀라움이 언뜻 스쳤다.정장 차림의 남자는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며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그녀는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애써 웃으며 설명했다.“아.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저는...”남자가 덤덤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다은.”이다은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반응하고 말했다.“맞아요. 전 이다은이에요. 저희 이모가 말해줬나 보네요. 그래도 예의상 자기 소개를 더 자세히 해야겠어요.”남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이다은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제 이모가 당신을 소개해줬어요. 저는 전문대 졸업에 올해 26살이고 프리랜서 창업자예요. 연애 경험 제로, 적금 제로, 나쁜 습관도 없고 취미도 없지만 꿈은 있어요.”남우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물었다.“꿈이 뭐죠?”이다은은 개구리 손을 덥석 움켜쥐며 흥분해서 말했다.“제 꿈은 달을 여행하는 우주비행사가 되는
너무 비정상이었다.그때 남서연과 백건이 다가왔다.세 사람은 사사로운 일을 제쳐두고 백건과 남서연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그들은 덕담도 나누고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흐름이 남우영에게 흘러갔다.“그러고 보니 우리 집안 애들은 전부 결혼했네. 이제 서연이까지 결혼했으니 우영이만 혼자야. 아내는 고사하고 여자친구도 없어.”“엄마, 내 위에 있는 사촌 형들 전부 서른이 넘었어요. 결혼하는 게 정상 아니에요?”“서연이는 너보다 어린 데도 이미 결혼했어!”남하준이 나서서 말렸다.“조금만 더 기다려. 서두르지 말고 서른이 넘으면 다시 말해. 안 되면 마흔에 해도 되고. 혹시 알아? 오십에 할 수도 있잖아. 아직 몇십 년 더 남았어.”남우영은 어두워진 얼굴로 덤덤하게 웃었다.“아빠는 위로를 참 잘해요.”백건은 정안과 남하준의 걱정을 이해하고 위로했다.“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영이는 확실히 여자를 좋아해요. 얘가 어릴 때...”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우영이 갑자기 달려들어 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어깨동무를 한 채 옆으로 질질 끌고 갔다.“삼촌, 내가 할 말이 있어요.”정안은 긴장하더니 흥분해서 앞으로 다가갔다.“어릴 때 뭐? 야! 가지 마. 똑바로 말하고 가!”남우영은 백건을 꼭 감싸고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삼촌이 헛소리하는 거예요.”“분명 뭔가 있네.”남하준이 엷게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우영에게 비밀이 있네요.”남서연이 목소리를 낮추고 장난스레 중얼거렸다.“작은 아빠, 작은 엄마, 집에 가서 제가 우영 오빠의 비밀을 알아낼게요.”정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좋아. 서연이 네가 돌아가서 꼭 물어봐.”남서연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성대한 결혼식은 이틀 동안 거행되었다.첫째 날의 주제는 결혼식이었고 둘째 날의 주제는 여행이었다.그리고 이 섬은 백건이 사들여 남서연에게 선물했고 스위트 아일랜드라
“그래. 더 이상 의미가 없지.”“두 사람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야? 난 왜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백건은 부드럽게 웃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넌 알 필요 없어. 가자. 부모님이랑 한잔해.”“그래요.”남서연은 주스를 챙기고 진우석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서윤아와 백정우를 향해 걸어갔다.진우석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젖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서윤아는 휠체어에 앉아 적당한 우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백건과 남서연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아버님, 어머님, 저희가 한잔 올릴게요.”서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남서연을 보았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눈빛이지만 그런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지 그녀를 향한 인정은 아니었다.그녀는 마음속 깊이 여전히 남서연의 능력이 그의 아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다만 그녀의 편견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그들 부부의 애정 전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백정우는 크게 기뻐하며 격앙되어 잔을 들며 끊임없이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요점은 아이를 빨리 낳으라는 것이었다.남서연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백건은 이미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입술을 오므리고 몰래 남서연을 바라보며 꿀을 먹은 듯 달콤했다.비밀을 지키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하지만, 그의 어린 아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3개월 후, 태아가 안정되면 모두에게 공개하려 했다.그리고 그녀의 체질도 대단해서 임신 증상이 전혀 없었다. 평소처럼 먹고 자고 출근하고, 어지럽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고, 입덧도 하지 않았다.멀지 않은 곳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남하준, 정안 그리고 그들의 아들 남우영.언뜻 보면 그들은 또래처럼 생겼는데 절대 남우영이 성숙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가 선천적으로 미모를 타고났고 또 관리가 너무 잘 되어 젊어 보이는 것이었다.한 명은 늠름한 국방 장군이고, 한 명은 꽃 같은 미모의 화학자이고, 남우영
반년 후.남하준은 국경에서 안성으로 돌아왔다.정안과 반년 동안 떨어져 살면서 그는 그녀에게 언제 국경으로 돌아가냐고, 언제 실험실로 돌아가냐고 수없이 물었다. 비록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정안의 옆에 붙어 있으려 했다.그때마다 정안은 이렇게 대답했다.“난 안성에 남아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요.”무슨 중요한 일인지 정안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남하준은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정안은 묵은 원한과 새로운 원한을 함께 복수하고 있었다.유미의 남편은 횡령으로 고발돼 조사를 받다가 낙마했다.유미는 해외에서 남서연의 납치를 지시한 혐의와 직책 뇌물수수 혐의도 함께 추가되어 체포됐다.부부가 나란히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갔다.반년 동안 걷지도 못한 서윤아도 이 일을 알고 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승아를 집에 데려오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건은 그들 가족의 기업에 누를 끼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또 한 가지 큰일이 있었다.바로 백건과 남서연의 성대한 결혼식이었다.갑부의 결혼식은 M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에서 진행되었다. 십여 대의 비행기가 몇 번이고 낭만적인 섬으로 향했다.하늘과 바다가 일색이 되어 단조롭던 해변이 낭만적인 꽃바다로 변하고, 땅에 꽃잎이 깔리고, 수천만 개의 현장 장식이 있고, 가장 호화로운 음식과 술이 있었다.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서연도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장을 보게 되었다. 공기조차 꽃향기로 변했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로맨틱함이 가득했다.남서연은 수억 원짜리 웨딩드레스에 수십억 원짜리 주얼리를 착용한 채 멋지게 차려입은 백건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카펫을 밟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결혼식 무대 중앙으로 다가갔다.하객석은 꽉 찼고 모두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남서연은 행복한 눈물을 흘리며 달콤한 미소로 하객석의 부모님과 큰아버지들, 큰어머니들, 그리고 그녀를 20년 넘게 애지중지한 사촌 형제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신이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다
“백정우, 방금 뭐라 그랬어? 내가 소란을 피워?”서윤아가 울부짖자 핸드폰 저쪽에서 통화를 뚝 끊어버렸다.서윤아는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냅다 던져 박살 냈다.그래도 그녀의 마음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아들과 남편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고, 심지어 자기 딸과 외손자까지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크게 실망했다.백건과 남서연을 이어주려고 주변의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녀와 점점 멀어진다고 느꼈다.유승아는 바닥에 부서진 휴대전화 두 대를 주워들고 그녀 곁에 다가와 앉으며 부드럽게 달랬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그러다 몸 상해요. 건이 결혼 문제는 천천히 해결하세요.”“승아야,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서윤아가 긴장하며 묻자 유승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때 정안이 성큼성큼 병실로 들어오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이제 아무 방법도 쓸모 없어요.”병실 안의 두 사람은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정안은 우아하게 걸어 들어와 보온 상자를 손에 들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건이는 이미 재산의 절반을 서연에게 주겠다고 공증을 끝냈어요. 이혼하면 가족 기업 전체가 흔들릴 거예요.”권력과 재산을 중시하는 서윤아는 고함을 질렀다.“누가 허락했어? 이 자식이 감히 반역을 저질러!”서윤아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포악한 기세가 너무 강렬해 침대에서 벌벌 떨 정도였다.정안은 이제 그녀의 어머니를 걱정하지 않았다. 유일한 걱정은 유승아가 계속 파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도시락을 내려놓은 정안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유승아를 마주 보며 비꼬듯 말했다.“승아는 참 끈질긴 애구나. 건이는 이미 서연이와 결혼했으니 너도 이제 정신 차리고 적당한 선을 지켜. 더 이상 건이에게 환상을 품지 마.”유승아가 황급히 설명했다.“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와 건이는...”정안이 차갑게 웃었다.“오해인지 아닌지는 네가 누구보다 잘 알겠지. 거짓 해명은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