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은 침착하고 느긋하게 말했다.“교수님, 편히 말씀하시죠.”“공기 오염을 정화할 수 있는 이 응축수는 많은 양의 청유액이 필요합니다.”이 말이 나오자 남하준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수군수군 토론하기 시작했다.“우리나라에 청유액이 어디 있어? 전부 수입에 의존하고 있잖아.”“그러게 말이야. 수십억 원으로 겨우 100g을 샀으니 한 근에 수백억 원은 하겠지.”“너무 많은 양이 필요하다면 이건 현실적이지 않아.”남하준은 몇 초간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다.“청유액이 얼마나 필요하죠?”“적어도 100근은 필요합니다.”그러자 군전 그룹의 한 구매부장이 일어나 경악했다.“100근이요? 그럼 8조 원이 넘는 금액인데 우린 그렇게 많은 예산을 배정받지 못했어요. 지금 장난하십니까?”유미가 차갑게 웃더니 조롱하듯 말했다.“그럼 서다인 씨가 제기한 방안은 불가능한 거네요?”유주헌이 다급하게 말했다.“장군님, 십수만 명의 목숨과 관련된 일이니 공기 정화가 시급합니다. 만약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효과도 떨어져요.”“청유액 말고 대체할만한 다른 성분이 있을까요?”남하준이 묻자 유주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국가에서는 이미 2조 원을 보내왔습니다. 재난 구조와 의료 구조 지출 비용을 빼면 남는 돈은 턱없이 부족해요. 이 방법은 안 돼요.”유주헌은 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이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다른 나라에 가격을 흥정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그때 유미가 입을 열었다.“유 교수님, 청유액이 뭐 시장에서 파는 물건인 줄 알아요?”유주헌은 마치 개미가 솥에 올라탄 듯 안절부절못하며 허벅지를 툭툭 치더니 마지못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바로 그때, 정안이 지윤을 데리고 들어왔고 유주헌은 마치 구원자를 만난 표정이었다.“서다인 씨, 마침 잘 오셨어요. 어서 장군님께 말씀드려보세요.”그녀는 손에 방금 인쇄한 자료 뭉치를 들고 남하준에게 건네주었다.남하준은 흠칫 놀라더니 찡그
“설마 진짜 훔친 거예요?”지윤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정안에게 돌아섰다.“내가 말했잖아요. 도와줄 가치가 전혀 없다고. 이제 어떡해요? 훔쳤다는 누명까지 썼잖아요.”정안은 여유롭게 지윤이 들고 있던 자료를 들고 남하준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오빠, 비밀 잘 지켜줘요.”남하준은 뜨거운 눈으로 가볍게 말했다.“그래. 바로 준비할게.”말을 마친 남하준은 직접 도면을 가지고 무기공장으로 달려갔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렇게 중요한 일을 장군님께서는 우리와 상의하지도 않고 저 여자 말만 듣는 건가요?”“대체 어디서 굴러온 인물인지 모르겠네요.”“장군님 전처라네요.”“하는 일은 뭔데요?”“무직이요.”“네? 일개 가정주부가 청유액 기기를 다뤄요? 게다가 자체 제조까지? 우리나라는 이 기술을 10년 동안 연구했지만 아직 마스터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그러게 말이에요.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죠.”잡다한 소리가 정안의 귀에 어렴풋이 들어왔지만 그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그녀가 돌아설 때, 유미가 소리쳤다.“서다인 씨, 그 도면 어디서 났어요? 지금 하준이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진짜 성공할 자신이라도 있는 건가요?”정안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 결과는 내일 점심에 확인시켜드리죠. 좀 기다려보세요.”유미는 차가운 얼굴로 정안의 앞에 다가와 엄숙한 눈빛으로 말했다.“경고하는데 감히 남의 나라 도면과 기술을 훔쳐 양국 간의 전쟁을 일으킨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아요!”정안은 느긋하게 대답했다.“유 부장님께서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인터넷에 한 번 검색해보세요. 이 기기와 기술은 어느 나라에서도 특허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요. 아는 사람이 만들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만드는 거죠.”유미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쥔 채 정안을 노려보며 그녀의 눈에서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 했다.정안은 그녀가 남하준이 안 좋은 일에 연루될까 봐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깜짝 놀랐다.한 달 넘게 걸릴 환경 문제를 정안과 전문팀의 끈질긴 노력으로 5일 만에 완전히 해결했으니 말이다.M국 일부 국제 기자들이 군전 그룹에 취재하러 왔다.그룹은 언론에 대응하기 위해 한 명의 대표 인물만 파견했다.반면 군전 그룹, 기술 부서와 화학 과학 연구 부서의 사람들은 모두 정안을 가장 숭배하는 우상으로 여겼다.매번 식당에 와서 밥을 먹을 때마다 정안은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다양한 질문을 받아야 했다.신상정보와 과거 이력에 관한 것만 빼고 정안은 전부 대답해줬다.그리하여 더 많은 과학자들은 보기에는 귀엽고 가냘픈 여자가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해박한 지식과 강한 전문성을 갖고 있었고 젊은 나이지만 환갑이 넘은 나이 든 교수에 필적하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사무실 안, 류청이 황급히 걸어 들어오면서 말했다.“도련님.”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있던 남하준의 표정이 굳어졌다.“뭐야?”“도련님, 백완자는 확실히 Z국인이고 국방대학교 화학과를 전공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찾을 수 없었어요. 너무 이상해요.”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남하준은 피곤이 가득했다.“그래.”“지금 모든 교수가 서다인 씨가 절대 평범하지 않은 희귀한 보물이라면서 저희 그룹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남하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나랑 이혼하면서 한 푼도 받지 않았어. 할아버지가 M국 갑부지만 재산을 상속받을 생각도 없는 사람이고. 이렇게 돈에 대한 욕망이 없는 여자를 내가 무슨 수로 묶어두겠어?”류청은 생각에 잠기더니 또 입을 열었다.“그리고 하나 더 새로운 발견이 있어요.”“뭔데?”“군사 무기 팀 엔지니어가 다인 씨가 도면을 볼 줄 안다고 했어요. 심지어 자동 핸드휠의 결함까지 지적하며 개선 의견을 냈다고 했어요. 다인 씨 의견대로 업그레이드한 제품은 기존 목표치를 초과했고 검측 정확도도 아주 높다고 하더군요.”남하준은 눈을 번쩍 떴다. 피곤한 눈동자에
남하준은 류청을 데리고 기숙사 건물을 나왔다.허허벌판 길가에 서서 남하준은 걸음을 멈추고 침울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다가 서글퍼졌다. 류청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도련님, 왜 들어가 직접 물어보지 않으세요?”“뭘 물어봐?”“대체 어떤 신분인지 물어봐야죠. 방금 들으셨잖아요? Z국의 화학자이고 이미 15년 계약을 맺었다고요.”남하준은 씁쓸하게 웃더니 류청을 돌아보는 눈빛은 어둡고 침울했다.“국가가 한 과학자와 장기 계약을 맺는다는 건 뭘 의미하는지 알아?”류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남하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오늘 들은 말은 절대 비밀이야. 밖으로 새어나가선 안 돼.”“네, 알겠습니다.”류청은 정안이 대체 어떤 과학자이기에 이렇게 신비로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남하준은 기숙사 건물 쪽을 돌아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정호랑 여기 남아서 뒷수습하고 있어. 난 먼저 안성으로 돌아간다.”“네!”“가서 일 봐.”남하준이 재촉하자 류청은 목례를 하고 몸을 돌렸고 남하준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침착하게 기다렸다.10분 후, 정안과 지윤이 기숙사 건물에서 걸어 나왔다.남하준을 본 순간, 정안은 어리둥절해서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고 서글프고 긴장된 기색이 보였다.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정안이 천천히 걸어갔고 지윤이 캐리어를 끌고 바로 차량으로 향해 트렁크에 넣었다.“하준 오빠.”정안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이 남자만 보게 되면, 이 남자의 앞에만 서게 되면 정안은 늘 소녀의 여리고 수줍은 면모가 드러났다.목소리마저 왠지 더 부드러워지는 느낌이었다.남하준은 따뜻한 시선으로 물었다.“안성으로 돌아가?”정안은 눈을 늘어뜨리고 손가락은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살며시 쥐었다.“네.”“나도 마침 돌아가야 하는데 가는 길에 좀 태워줘.”정안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고 남하준은 싱긋 웃었다.“다들 바빠서 나 데려다줄 시간 없어.”“오빠 운전해서 가면 되잖아요?”정안은 긴장하며 말했지만 말하고 나니
유미는 그녀를 싫어하지만 백하린처럼 나쁘지도 않고 그녀와 아무런 원한도 없었다. 이 정도도 도와주지 않는 건 몰인정했다.“그래요. 타세요.”정안이 부드럽게 말하자 지윤이 트렁크를 열었다.짐을 놓고 차에 오른 유미는 기분이 조금 들뜬 것 같았다.“하준아. 너도 있었네?”유미가 다정하게 인사했고 남하준이 덤덤하게 답했다.“응.”차량은 군전 그룹을 떠나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떠 있고, 넓은 도로 양쪽에는 끝없는 육지 초원이 펼쳐져 있고, 기복이 심한 언덕이 있어 풍경이 아름다웠다.정안은 하늘의 아름다운 경치를 내다보며 서글퍼졌다.뒷좌석의 유미는 국가 대사에서 민간 대사에 이르기까지, 실험 실패에서 재해 후 복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야기했고 남하준은 간간이 대꾸했다.“다인 씨에게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는 줄 몰랐잖아!”유미는 갑자기 정안을 언급하더니 호기심에 물었다.“다인 씨 전에 무슨 일 했었어요?”정안은 뜨끔하더니 입을 열었다.“직장 경험은 없어요. 대학교 때 화학을 전공해서 조금 알고 있을 뿐이에요.”유미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청유액을 생산하는 기기를 자체 제작하고 또 청유액을 제작하는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군전 그룹의 과학자들도 전부 다인 씨를 칭찬하고 숭배하고 존경하던데요? 요 며칠 동안 제일 많이 들은 얘기가 다인 씨 얘기에요.”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으며 말을 잇지 않았고 유미는 아무런 미끼도 잡지 못하자 말머리를 돌렸다.“하준아.”그녀의 목소리가 금세 부드러워졌다.남하준은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왜?”“몇 년 전에 우리 야전훈련에 참여했던 거 기억나?”유미는 감개무량해서 말을 이었다.“그때 내가 발을 다쳐서 걸을 수 없었잖아. 그런데 네가 죽어도 나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다며 나 업고 무려 20km를 걸었지. 네가 임무에 실패하더라도 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거야.”남하준은 눈살을 찌푸리고 어떤 전우라도 그는 그렇게 했을 것인데 그녀가 왜 이 일을 언급하
정안이 백미러로 남하준을 보니 그는 지금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시큰둥하고 화가 났지만 가장 많이 화가 난 것은 남하준의 태도였다.예전에 그녀의 신분을 몰랐을 때는 그녀를 10년 넘게 짝사랑했다고 했는데 지금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그녀에게 거절당한 후 복수라도 하는 걸까?유미는 여전히 남하준에게 지난 일들을 쉴 새 없이 속닥거리고 있었다.“나 생일날에 하준이가 직접 국수를 삶아 줬는데 글쎄 전혀 끊어지지 않고 국수 한 줄이 한 그릇이었다니까요. 얼마나 고마웠는지.”정안은 화가 나서 가슴이 답답하고 아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미소 지으며 남하준을 향해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말했다.“하준 오빠.”남하준은 살짝 넋을 잃고 눈을 뜨고 그녀를 마주 보더니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응?”유미는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엄숙한 시선은 정안과 남하준을 바라보며 약간 긴장한 모습이었다.“나도 오빠가 해준 국수 먹고 싶어요. 나도 한번 해줘요.”남하준은 입술을 실룩였다.“그래.”“언제 시간 돼요?”남하준의 눈에는 따듯함이 가득했고 봄바람이 비를 녹이는 듯 부드럽고 섬세한 목소리로 말했다.“국수 한 그릇이야 뭐. 너만 시간 된다면 언제든 가능하지.”“그럼 오늘 밤 어때요?”“좋아.”“나도 안 끊어지는 국수 먹고 싶어요.”정안이 시무룩하게 말하자 남하준이 진지하게 대답했다.“알겠어.”지윤은 씩 웃었고 유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안색이 어두워지고 두 손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차량은 세 시간 동안 달려 휴게소에 멈춰서 휴식을 취했다.정안은 가게에 들어가 간판 음식을 올려다보며 무엇을 먹을지 망설였다.그때 유미의 나긋한 말투가 들려왔다.“하준아, 나 소고기면 먹고 싶은데 양이 너무 많아. 나 요즘 다이어트 중이거든. 나랑 나눠 먹자.”정안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같은 가격으로 소자로 달라고 해.”유미는 어깨로 그의 팔을 툭 쳤다.“바보야. 그럼
유미가 작은 그릇을 가져와 남하준과 소고기면을 나눌 때 정안은 마음이 너무 아파서 지윤을 밀쳤다.“나랑 자리 바꿔.”남하준은 눈빛이 흐려지고 허탈한 시선이 정안의 모습을 따라가며 자리를 옮기는 모습을 지켜봤다.정안은 그에게서 좀 더 멀리 떨어졌다.치킨을 시킨 지윤은 정안이 준 매실 주스를 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언니, 차라리 콜라를 주지 웬 매실 주스에요?”정안은 말없이 뚜껑을 열고 고개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맛있네. 네 치킨이랑 잘 어울리겠어.”주스를 내려놓고 그녀는 젓가락을 들어 먹기 시작했다.유미는 국수를 좀 덜고 나머지는 남하준에게 밀었다.“하준아, 먹어.”남하준은 자신의 그릇에는 소고기가 가득하고 유미의 작은 그릇에는 맑은 국수가 조금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미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 그녀가 소고기를 가장 좋아하는 것을 알았지만 오늘은 좀 이상했다.그는 자신의 면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고기도 먹어.”유미는 고개를 젓고 침을 흘리며 그의 그릇에 담긴 소고기 응시했다.“너 요즘 힘들어서 살이 빠진 것 같은데 네가 많이 먹어. 난 안 먹어도 돼.”남하준이 그녀의 표정을 보니 분명 먹고 싶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고기를 집어 그녀에게 건넸고 유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마워. 역시 나 챙겨주는 건 하준이밖에 없다니까.”정안은 입에 들어간 쌀국수가 마치 날카로운 칼처럼 목구멍을 베고 막는 것 같았다.치킨을 베어 문 지윤이 이상하게 여기며 물었다.“둘이 왜 한 그릇 먹어요? 돈 없어요?”유미가 설명했다.“나 다이어트해서 많이 못 먹어요.”“그럼 소자로 시키면 되잖아요. 그렇게 가져가면 도련님도 배불리 못 드시잖아요?”유미는 애꿎은 얼굴로 남하준에게 물었다.“하준아, 너 모자라?”“괜찮아.”지윤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 듯 유미를 바라보다가 다시 남하준을 보았다.그는 성격이 강직하니 나쁜 마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여자의 여우 같은 행동을 왜
차량이 도로 옆에 멈춰 섰고 남하준은 유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세우고는 차에서 내려 지윤과 위치를 바꿨다.지윤은 뒤에 앉아 안전벨트를 당겨 매고 고개를 돌려 자는 척하는 유미를 보았다.‘생긴 것도 멀쩡하고 번듯한 직장 다니는 거 보면 나쁜 여자는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여우야? 에휴. 대쪽같은 도련님이 이걸 알 리가 있겠냐고. 어쩐지 언니 기분이 안 좋더라니!’지윤은 코웃음을 치고는 창문을 내리고 창가에 엎드려 길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차량이 넓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정안은 서서히 자세를 가다듬고 몸이 바짝 조이며 앞길을 바라보니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잠시 후 유미는 눈을 뜨고 찡그린 얼굴로 운전석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다시 눈을 감은 채 자는 척했다.안성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차량이 금원 입구에 주차되었고 바로 맞은편이 유미의 집이었다.유미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차에서 내려 떠났고 남하준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국수 먹을래?”그 말을 들은 지윤은 얼른 차에서 내려 문을 닫고 눈치껏 길가에 서서 기다렸다.정안은 갈등에 쌓여 그를 볼 용기조차 없었다.그녀는 먹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아닌 것 같았다.그렇게 큰일이 생겼으니 남하준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고 매우 바쁠 것이다.“다음에요.”정안이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그녀의 인사치레 말에 남하준은 허탈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그는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다음에 언제?”정안은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남하준은 묵묵히 기다렸다.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그의 뜨거운 마음이 조금씩 식어갔고 결국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그녀의 말 한마디라면 국수가 아니라 하늘의 별이라도 따올 것이다.하지만 정안은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그녀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란 생각에 그는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고 심지어 숨을 쉴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