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이 도로 옆에 멈춰 섰고 남하준은 유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세우고는 차에서 내려 지윤과 위치를 바꿨다.지윤은 뒤에 앉아 안전벨트를 당겨 매고 고개를 돌려 자는 척하는 유미를 보았다.‘생긴 것도 멀쩡하고 번듯한 직장 다니는 거 보면 나쁜 여자는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여우야? 에휴. 대쪽같은 도련님이 이걸 알 리가 있겠냐고. 어쩐지 언니 기분이 안 좋더라니!’지윤은 코웃음을 치고는 창문을 내리고 창가에 엎드려 길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차량이 넓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정안은 서서히 자세를 가다듬고 몸이 바짝 조이며 앞길을 바라보니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잠시 후 유미는 눈을 뜨고 찡그린 얼굴로 운전석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다시 눈을 감은 채 자는 척했다.안성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차량이 금원 입구에 주차되었고 바로 맞은편이 유미의 집이었다.유미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차에서 내려 떠났고 남하준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국수 먹을래?”그 말을 들은 지윤은 얼른 차에서 내려 문을 닫고 눈치껏 길가에 서서 기다렸다.정안은 갈등에 쌓여 그를 볼 용기조차 없었다.그녀는 먹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아닌 것 같았다.그렇게 큰일이 생겼으니 남하준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고 매우 바쁠 것이다.“다음에요.”정안이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그녀의 인사치레 말에 남하준은 허탈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그는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다음에 언제?”정안은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남하준은 묵묵히 기다렸다.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그의 뜨거운 마음이 조금씩 식어갔고 결국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그녀의 말 한마디라면 국수가 아니라 하늘의 별이라도 따올 것이다.하지만 정안은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그녀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란 생각에 그는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고 심지어 숨을 쉴
정안은 심호흡을 하고 속으로 최면을 걸었다.‘그래. 내 할머니야. 할머니는 지금 나쁜 여자에게 속았을 뿐이야. 할머니 탓하지 말자.’백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여은수를 죽어라 노려보았다.“너...”집안의 늑대 두 마리에게 잡아먹혀 죽기 전에 조만간 이 어리석은 노파에 의해 화병으로 죽을 것 같았다.어쩐지 손녀가 할머니에게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더라니. 이렇게 멍청한데 어떻게 말해줄까?여은수는 정안을 가리키며 경고했다.“이 영감이든 내 아들이든 절대 헛된 생각 품지 마. 당신 같은 여자를 우리 집에 들인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참고 있으니까.”정안은 어쩔 수 없이 웃었다.“할머니. 진정하세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어서 식사하세요.”여은수는 코웃음을 치더니 젓가락을 들어 밥을 먹었다.백하린은 눈살을 찌푸리고 정안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야, 너 진짜 하준 오빠랑 깨끗이 끝난 거 맞아?”“깨끗하게 정리했어.” “근데 왜 오빠가 나랑 결혼을 약속했다가 다시 마음을 바꾼 건데? 너 때문이 아니면 뭐겠어?”지윤은 밥 먹으면서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렸다.“돈 많은 것 빼면 시체잖아. 도련님이 눈이 먼 것도 아니고 왜 너랑 결혼하겠냐고.”이 말이 나오자 백하린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숟가락을 들고 지윤을 내리쳤다.순간 지윤은 홱 피하더니 던져진 숟가락을 쉽게 피했다.그녀의 민첩한 반응과 솜씨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지윤이 밥상을 탁 치더니 화가 치밀어 올라 백하린을 치려고 하자, 백하린은 그녀의 기세에 지레 겁을 먹었다.정안이 그만하라는 식으로 지윤의 손을 꾹 눌렀다.여태 한마디도 없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백인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정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정안은 백인호가 자신에 대한 의심을 느낄 수 있었다.그때 백진이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밥상 앞에서 소란 그만 피우고 다들 밥 먹어.”아슬아슬한 저녁 식사가 가까스로 끝이 났고 밤이 깊어 조용한 밤이 되었다.지윤은 어둠
“그럼 더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응.”“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요. 백하린이 도련님께 덫을 놓으려고 해요.”“무슨 덫?”“두 달 안에 도련님께 시집가고 심지어 임신할 생각이에요.”정안은 움찔했고 눈에는 분노로 가득했다.“혼전임신을 계획하려나 봐요. 아마 조만간 도련님께 약을 먹이고 강제로...”정안은 긴장하며 심호흡을 하더니 시트를 잡고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입을 열었다.“하준 오빠 백하린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사람이야. 그렇게 쉽게 오빠에게 접근할 수 없을 거야.”“하지만 언니 할머니에게도 경계심이 강한 건 아니잖아요. 자기 부하나 집안의 도우미 심지어 도련님 가족분들에게 손을 쓸 수도 있잖아요.”지윤이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백하린은 차고 넘치는 게 돈인데 사람을 매수하는 건 일도 아니죠. 지금으로선 어떤 수단을 쓰는지 모르지만 약을 타려는 게 틀림없어요.”정안은 생각할수록 더욱 불안했다.“언니, 어서 도련님께 전화해서 조심하라고 말하세요.”정안이 긴장해서 물었다.“오빠가 신도 아니고 주위 사람이 누가 포섭됐는지 어떻게 알겠어?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경계하며 아무도 안 만날 수는 없잖아?”“그럼 어떡해요?”지윤은 종아리를 세우고 두 손으로 뺨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정안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했다.“지윤아, 네가 오빠 곁에 가서 24시간 밀착 경호하면 안 될까?”충격을 받은 지윤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고 불쾌하게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언니! 나 여자예요! 어떻게 남자를 24시간 밀착 경호해요? 게다가 내가 원한다고 해도 도련님이 원하지 않죠!”“그럼 어떡하지?”정안은 급해서 시트를 두드리며 마음이 착잡했다.“도련님 옆에 믿음직한 부하 두 명 있잖아요?”정안은 분노한 듯 이를 악물고 물었다.“만약 백하린이 포섭한 사람이 그 두 사람이라면?”지윤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그럼 도련님은 무조건 백하린의 손에 놀아나는 거죠.”정안은 급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고 벌게진 눈으로 침대에
이튿날 아침.정안은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싸고 있었다. 입으로는 남하준 곁으로 가기 싫다고 하면서 누구보다 빨리 움직였다.반면 지윤은 아직도 방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짐을 챙긴 정안은 백진의 방으로 가 작별인사를 했다.백진은 듣는 이가 있을까 봐 별말 못하고 몸조심하라고 한 뒤 블랙카드를 건넸다.정안은 백진의 카드를 받지 않고 인사를 마친 뒤 그의 방을 나왔다.백씨 저택을 나올 때 마침 백인호를 만났다.그는 정안의 길을 가로막으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웬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혼자 짐 챙겨서 어디 가려고? 네 친구는 어쩌고?”정안은 안색이 확 굳어지더니 차갑고 냉랭하게 백인호를 바라보며 마음속의 원한이 점점 짙어졌다.그녀는 꾹 참고 가볍게 입을 열었다.“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오려고요.”“내가 데려다줄게”“괜찮아요.”“내 부모님한테 나 때문에 이 집에 들어왔다고 했잖아? 근데 왜 나한테 이렇게 차가운 거지?”백인호가 추궁하자 정안은 답이 없었다.“다른 목적이 있는 거지?”“미안하지만 제가 시간이 급해서요.”정안은 말을 마치고 캐리어를 끌고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백인호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우리 다시 시작하자.”정안은 갑자기 멍해졌고 이 말에 놀라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돌아보았다.백인호는 싱글벙글 웃으며 정안을 바라보던 그는 뜨거운 눈가에 사악한 기색을 띠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진심이야. 서다인. 우리 다시 만나.”“이거 놔요.”정안은 그의 고백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고 조금 화가 났다.“그쪽이랑 농담할 시간 없어요.”“나랑 결혼해.”백인호는 더욱 진지하게 말했고 눈빛은 한껏 이글거리고 있었다.정안은 등골이 서늘하고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전에는 백인호가 자신의 전 남자친구를 사칭한 것이 그녀의 기억 회복 여부를 테스트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는 완전 미치광이였다.어떻게 자기 삼촌과 결혼하라고 말할까?아무리 혈연관계가 없다고는 하
“언니 속마음이 너무 훤히 보인다니까?”지윤은 정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이상하게 여긴 지윤이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이번에는 휴대폰 전원이 꺼져 있었다.불길한 예감이 든 지윤은 황급히 방을 뛰쳐나와 1층 도우미에게 물었다.“제 친구가 언제 나갔는지 아세요?”“아마 7시쯤이었죠?”지윤은 더욱 불안해서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긴장해서 남하준의 번호를 눌렀다.벨이 몇 번 울린 후에야 남하준이 덤덤하게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죠?”“도련님, 혹시 지금 언니랑 같이 있어요?”“완이가 날 찾아와요?”“언니 지금 금원에 없어요?”“없는데요?”“그럼 어디 간 거죠?”지윤은 점점 더 조급해 났고 남하준이 긴장해서 물었다.“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봐요.”지윤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사실 오늘 언니가 도련님한테 가기로 했었어요. 도우미 말로는 7시에 집을 나갔다고 하는데 지금 8시예요. 아직 금원에 도착하지 못했을 리가 없잖아요?”“당장 찾아요.”남하준은 조급한 말투로 카리스마 있게 명령했다.“네!”지윤은 전화를 받으면서 백씨 저택의 CCTV 관찰실로 향했다.“만약 언니가 금원에 도착하면 저한테 전화 주세요.”“그러죠.”다급한 남하준은 곧장 전화를 끊었고 지윤은 관찰실로 가서 CCTV 영상을 얻었다.7시경 정안은 캐리어를 끌고 나가 백씨네 별장을 나온 뒤 CCTV가 없는 구역으로 들어간 후로 사라졌다.지윤이 한참이나 영상을 돌려보니 정안의 실종과 관련된 단서는 검은색 고급 차 한 대뿐이었다.그녀는 고급 차를 가리키며 경비원에게 물었다.“이거 누구 차죠?”“둘째 도련님 차입니다.”백인호?지윤은 심장이 멎은 듯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녀는 관찰실을 벗어나 마음이 무겁고 당황스럽고 두려워서 손을 떨며 휴대전화를 꺼내 남하준의 번호를 눌렀다.정안이 그녀의 부모님처럼 살해당할까 봐 너무 두려웠다.이내 남하준의 급하고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찾았어요? 어디 있어요?”지윤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언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부드러운 미소와 서늘한 눈빛을 띠고 있는 그의 모습에 등골이 서늘해졌다.정안은 미동도 하지 않고 얼음장같이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백인호는 그녀 앞에 가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그녀의 얼굴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하얀 목으로, 또 천천히 어깨를 만지고 가슴에 거의 접근했다.정안은 위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았고 너무 역겨워 미칠 지경이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이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그녀의 차가움에 상처받은 백인호는 그녀의 쇄골 아래에 손을 멈추더니 눈 밑에는 매서움이 스쳐 지나갔다.“내가 안 무서워?”수건으로 입이 틀어막힌 정안은 말도 못 하고 아무런 반응도 주지 않았다.이런 변태는 그녀가 반항할수록 더욱 흥분할 것이다.백인호가 천천히 속삭였다.“내가 왜 널 구금했는지 알아?”구금?정안은 이 두 글자를 들으니 덜컥 겁이 났다.납치인 줄 알았는데 구금이라니.백인호는 그녀가 계속 아무 반응이 없자 그녀의 입안에 있는 수건을 뽑았다.입이 풀리는 순간 정안은 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울지도 떠들지도 말도 하지 않았다.“이제 살려달라고 외쳐봐.”정안은 절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리 없었고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왜 날 구금한 거야?”백인호는 그녀의 쇄골에서 손을 올려 그녀의 희고 고운 핑크빛 얼굴을 만지며 속삭였다.“그러게 내가 프러포즈하는데 왜 거절했어?”“난 기억을 잃었어. 우리 사이 과거는 이미 잊었다고. 그러니까 당신은 나한테 낯선 사람이야. 어떻게 나더러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거야?”백인호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살짝 끼워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갑게 웃었다.“진짜 기억 잃은 거 맞아?”“맞아.”정안은 긴장해서 두피가 저렸다.그녀는 백인호의 무서운 수단을 직접 보았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를 진정시키고
금원.지윤이 가져온 CCTV 영상을 본 남하준은 어두운 얼굴로 사색에 잠겼다.CCTV 상으로는 백인호가 정안을 납치해 어디론가 데려갔다는 증거가 전혀 없었다.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지윤은 다급해서 말했다.“도련님, 어서 사람을 보내 찾아주세요. 더 늦으면 언니 목숨이 위험해요.”남하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백인호도 완이를 사랑하니까 해치진 않을 거예요.”“사랑은 개뿔. 그 미친놈이 언니 부모님을 해치고 몰래 수술까지 해서 언니가 기억을 잃었잖아요. 언니가 그런 놈 손에 납치당했으니 얼마나 위험해요. 좀 어떻게 해보세요.”남하준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어두운 시선으로 지윤을 바라보고 냉정한 말투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이미 사람 보내 찾고 있어요. 근데 완이는 왜 짐을 챙겨 금원으로 오기로 했던 거죠?”다급해진 지윤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제가 어젯밤이 백하린의 음모를 들었거든요. 도련님께 시집가기 위해 혼전 임신을 계획하고 있었어요.”남하준은 눈살을 찌푸리고 아연실색했다.지윤은 안절부절못하며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정안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전혀 실마리를 찾지 못했으니 무턱대고 나간다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뿐이었다.남하준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눈에는 기대가 찼다.“백하린이 혼전임신을 계획하는데 완이가 나 직접 보호하겠다고 나섰다고요?”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남하준은 고개를 숙이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이없어하면서도 마음속에는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그렇다면 나한테 직접 말해도 되잖아요? 주변에 믿을만한 부하가 없는 것도 아니고.”“언니는 아무도 안 믿고 저랑 자신만 믿어요. 원래는 나더러 도련님을 밀착 경호하라고 했지만...”지윤은 어색해서 몇 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건 좀 경우가 아닌 것 같아서 거절했어요. 그래서 언니가 도련님 직접 보호하겠다고 나섰고요. 그런데 언니가 그렇게 일찍 외출할 줄은 몰랐어요. 나한테 미리 말이라도 해줬으면 이런 일은
“연구원이요.”“어느 연구원?”“그냥 평범한 연구원이요. 전 언니 생활 비서이지 업무 비서가 아니에요.”남하준은 들으면 들을수록 떨리고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그럼 업무 비서는 누구죠?”“돌아가셨어요.”“그 업무 비서가 아주 덕망 있는 노교수죠?”지윤은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리고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으로 남하준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이렇게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대답하지 않았고 남하준은 그녀의 표정에서 뜻을 읽었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감히 믿을 수 없었다.그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류청이 문을 열고 들어와 조급하게 말했다.“도련님, 찾았어요.”남하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서랍을 열어 권총을 호주머니에 넣고 재빨리 뛰쳐나갔다.지윤은 그가 권총을 들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즉각 알아 채고 남하준의 발걸음을 쫓아 떠났다....웅장한 군용 전차가 호화로운 개인 별장 앞에 주차되었다.경비원은 늠름한 사내들이 다가오자 막으려 했지만 그들이 권총 한 자루를 내밀었다.이에 놀란 경비원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큰 철문을 열었다.남하준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별장으로 들어가 으리으리한 거실에 서서 사방을 둘러봤고 지윤이 그 뒤를 따랐다.“누구세요?”한 여자 도우미가 나와 노기에 차서 물었다.“왜 함부로 민가에 침입하는 겁니까?”류청이 차가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말했다.“백인호 불러.”도우미가 말을 하기도 전에 백인호는 이미 2층 복도 난간에 서서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태연자약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남하준을 침착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남하준이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마주치니 불빛이 사방으로 번지고 암류가 용솟음쳤다.“하준아,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왔어?”백인호는 의혹스러운 듯 웃으며 물었다.“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남하준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날카롭게 말했다.“서다인 어디 있어?”“서다인이 내 전 여친이고
이다은은 컴퓨터를 켜고 쇼핑몰 관리자 페이지에 로그인했지만, 거래 완료된 주문은 하나도 없고 답장하지 못한 문의 메시지만 가득한 화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답답한 마음으로 하나씩 정성껏 답장을 보냈지만, 새로운 손님은커녕 추가 메시지도 오지 않는 적막한 화면에 멍하니 시선을 두다가 결국 다른 화면으로 넘어갔다.새로 띄운 화면에는 빽빽한 코드와 무인 로켓의 데이터 구조가 가득 떠 있었다.이다은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이마를 짚으며 깊은 고민에 빠진 끝에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 시간 동안 코드를 작성하고 저녁을 먹은 뒤에도 세 시간이나 작업에 매달렸다.밤늦게 작업을 마치고 파일을 보냈지만, 그녀가 손에 쥔 돈은 고작 60만 원에 불과했다.‘학력이 없으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값싼 노동자로만 보이는구나...’그녀는 가끔 이 모든 걸 버리고 싶을 만큼 깊은 절망에 빠지곤 했다. 컴퓨터를 끄고 스트레칭을 하며 욕실로 들어가면서도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한때 그녀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운명이 바뀔 거라 믿었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M국 항공우주대학교 합격 통지서가 도용되면서 그녀는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 일은 그녀의 꿈과 미래를 부숴버렸고 지금까지 체념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다음 날 아침, 약속대로 남우영과 두 번째 만남을 가진 이다은은 드디어 손에 혼인관계증명서를 쥐게 되었다.남우영이라는 잘생긴 남편이 생겼지만 그녀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녀에게 결혼은 그저 누구와 하든 큰 차이가 없는 일이었다.‘결혼이란 건 결국 평생 팀플할 팀원을 고르는 거지. 게다가 부모님 잔소리에서도 해방될 수 있게 됐으니, 이보다 완벽한 일거양득이 어딨어?’구청을 나서며 혼인관계증명서를 내려다보던 이다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남우 씨, 근데 왜 이름이 남우영으로 되어있어요? 남우 아니었어요?”남우영은 순간 표정이 굳더니 억지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주민등록증엔 남우영으로 되어있어요. 어릴 때부터 가족들이 남우라고 불
이다은은 남우영이 타고 온 차를 보더니 그 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었다. 그렇게 조수석 문 앞에서 한참 머뭇거리는 그녀를 본 남우영이 다가와 차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다은 씨,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이다은은 차를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몇억은 하는 차 아닌가요? 잘못 긁거나 고장 내면 저희 둘 다 감당 못 해요.”남우영은 잠시 그녀를 보며 생각하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타요. 제가 조심해서 안전운전 할게요.”이다은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차에 올랐다.차가 도로를 달리자, 이다은은 자기 집 주소를 알려주었고, 한 시간이 지나 낡고 오래된 구도심의 허름한 건물 앞에 차가 멈췄다.이다은은 차에서 내린 뒤 남우영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구청에서 봬요.”남우영도 창문을 내려 손을 흔들었지만,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낡고 허름한 건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며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다은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의 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라갔다. 8층 꼭대기 층에 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캐릭터 탈을 구석에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크게 숨을 내쉬었다.“하아... 오늘도 정말 너무 많이 뛰어다녔네.”그때 옥상에서 세탁물을 한가득 담은 빨래 바구니를 들고 다리를 저는 그녀의 아버지, 이적이 내려왔다.“다은아, 이제 퇴근해서 온 거야?”이다은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려가 빨래 바구니를 받아들며 말했다.“아빠, 제가 할게요.”이적은 바구니를 건네고 천천히 거실로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이다은이 빨래를 하나씩 꺼내 정성스럽게 개기 시작하자, 이적도 옆에 앉아 빨래를 개며 무심히 물었다.“다은아, 요즘엔 선 봤던 남자 안 만났어?”이다은은 빨래를 개던 손을 멈추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빠, 저 결혼하려고요.”이적은
이다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기쁨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그동안 선을 보면서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집안 형편이 가난하다느니, 학력이 부족하다느니, 성격이 유치하다느니 하며 그녀의 단점을 들춰내기 바빴다.하지만 이번엔 달랐다.‘그것도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남자가 인정해 주다니... 집이 가난한 건 서로 똑같으니까 오히려 잘된 거야. 적어도 누가 누구를 나무랄 일은 없으니까.’더군다나 이다은의 이모는 이미 그의 고향으로 시집가 그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까탈스러운 이모가 그를 성실하고 착하며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이다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목소리가 낮아졌다.“저도 남우 씨가 맘에 들어요. 우리 그냥 내일 혼인 신고하러 가요.”남우영은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 되물었다.“혼인 신고요? 오늘 선보고 내일 바로 혼인 신고요? 그래도 시간을 두고 서로 좀 더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이다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차피 부부로 살아가는 건 현실적인 문제잖아요. 적당히 맞춰 가면서 살다 보면 되는 거 아닌가요?”남우영은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살짝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그건 그렇지만...”이다은은 남우영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물론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고 싶으시다면 저도 받아들일게요. 다만... 이모에게서 남우 씨 아버님이 암 투병 중이셨다가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남우 씨의 결혼 문제로 걱정을 많이 하신다면서요? 그래서 저는 남우 씨가 저보다 더 급하신 줄 알았거든요.”남우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우리 혼인 신고합시다.”이다은은 엄청나게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오래된 숙제를 끝낸 것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필요한 서류 챙겨서 내일 아침 일찍 구청 앞에서 만나요.”남우영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이다은은 여전히 개구리 캐릭터 탈을 품에 안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남자를 발견했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남우영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이다은은 그를 단순히 맞선남 ‘남우 씨’로만 알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을 애타게 찾는 듯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이 마주친 순간 성큼성큼 다가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물었다.“작은 개구리 탈 하나 제작하는 데 도대체 얼마나 드는데요?”“만... 만원이요.”이다은이 대답하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그러면 고작 만원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거예요?”다소 황당하다는 어투가 담긴 질문에 이다은의 표정이 굳어졌고 목소리에는 살짝 짜증이 묻어났다.“마치 고작 몇 푼 때문에 생고생이라도 했다는 식으로 얘기하시네요?”“돈 문제가 아니라면... 그럼 뭐때문에 이렇게 고생하셨단 거죠?”남자가 당황한 듯 다시 묻자, 이다은은 코웃음치며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잘생긴 얼굴이 다는 아니라니까!’조금 언짢았지만 이다은은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고작 만원이 아니에요. 오천 원은 저에게 이틀 치 밥값이기도 하고요. 새벽부터 일어나 두 시간 걸려 도매시장까지 가서 어렵게 가져온 개구리 캐릭터들이에요. 제가 하나하나 기대를 담아 준비한 거라고요. 심지어 단속 공무원들 피해 가며 골목에서 한 시간이나 도망쳤는데 그걸 훔쳐 간 사람이 결국 ‘할머니의 모습’을 한 도둑이었다는 거죠. 제가 그걸 되찾으려고 한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세요?”남우영은 이다은의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개구리 캐릭터 탈을 내려놓고 자기 지갑에서 현금을 몽땅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 정도면 오늘 손해 본 건 다 메꿀 수 있겠죠?”그는 이다은이 더 이상 속상해하지 않길 바랐다. 이런 일로 괜히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피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오늘 소개팅을 잘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이다은은 그의 손에 들린 현금다발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남우영을
안성의 6월은 날씨가 무더웠다.뜨거운 태양 아래, 거리에 행인이 거의 없었다.왕개구리 인형 옷을 입은 한 여자가 커피숍 앞으로 다급하게 다가왔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수십 개의 개구리 ‘자식’들을 구석에 놓고 무거운 개구리‘머리'를 벗고는 땀에 젖은 예쁜 얼굴을 드러냈다. 간판을 올려다보고 큰 눈을 깜빡이며 다급하게 말했다.“아마 여기가 맞을 거야!”개구리 머리를 안고 카페에 들어가 두리번거렸는데 젊은 남자는 한 명뿐이었다.멀리서 보니 얼굴도 아주 잘생겼고 분위기도 우아했다.‘오늘 남자는 좀 괜찮은데? 어쩐지 엄마가 이번에 결혼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고 경고하더라니.’여자는 헐레벌떡 걸어 들어가 남자 앞에 앉은 후 매우 예의 바르게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일 때문에 방금 도시 관리인에게 쫓기다가 길을 잃었어요. 반 시간이나 늦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소리를 들은 남우영은 고개를 들어 반대편에 앉아 있는 반인 반개구리를 보는 순간 멍해졌고 눈 밑에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놀라움이 언뜻 스쳤다.정장 차림의 남자는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며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그녀는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애써 웃으며 설명했다.“아.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저는...”남자가 덤덤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다은.”이다은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반응하고 말했다.“맞아요. 전 이다은이에요. 저희 이모가 말해줬나 보네요. 그래도 예의상 자기 소개를 더 자세히 해야겠어요.”남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이다은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제 이모가 당신을 소개해줬어요. 저는 전문대 졸업에 올해 26살이고 프리랜서 창업자예요. 연애 경험 제로, 적금 제로, 나쁜 습관도 없고 취미도 없지만 꿈은 있어요.”남우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물었다.“꿈이 뭐죠?”이다은은 개구리 손을 덥석 움켜쥐며 흥분해서 말했다.“제 꿈은 달을 여행하는 우주비행사가 되는
너무 비정상이었다.그때 남서연과 백건이 다가왔다.세 사람은 사사로운 일을 제쳐두고 백건과 남서연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그들은 덕담도 나누고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흐름이 남우영에게 흘러갔다.“그러고 보니 우리 집안 애들은 전부 결혼했네. 이제 서연이까지 결혼했으니 우영이만 혼자야. 아내는 고사하고 여자친구도 없어.”“엄마, 내 위에 있는 사촌 형들 전부 서른이 넘었어요. 결혼하는 게 정상 아니에요?”“서연이는 너보다 어린 데도 이미 결혼했어!”남하준이 나서서 말렸다.“조금만 더 기다려. 서두르지 말고 서른이 넘으면 다시 말해. 안 되면 마흔에 해도 되고. 혹시 알아? 오십에 할 수도 있잖아. 아직 몇십 년 더 남았어.”남우영은 어두워진 얼굴로 덤덤하게 웃었다.“아빠는 위로를 참 잘해요.”백건은 정안과 남하준의 걱정을 이해하고 위로했다.“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영이는 확실히 여자를 좋아해요. 얘가 어릴 때...”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우영이 갑자기 달려들어 한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어깨동무를 한 채 옆으로 질질 끌고 갔다.“삼촌, 내가 할 말이 있어요.”정안은 긴장하더니 흥분해서 앞으로 다가갔다.“어릴 때 뭐? 야! 가지 마. 똑바로 말하고 가!”남우영은 백건을 꼭 감싸고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삼촌이 헛소리하는 거예요.”“분명 뭔가 있네.”남하준이 엷게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우영에게 비밀이 있네요.”남서연이 목소리를 낮추고 장난스레 중얼거렸다.“작은 아빠, 작은 엄마, 집에 가서 제가 우영 오빠의 비밀을 알아낼게요.”정안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좋아. 서연이 네가 돌아가서 꼭 물어봐.”남서연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성대한 결혼식은 이틀 동안 거행되었다.첫째 날의 주제는 결혼식이었고 둘째 날의 주제는 여행이었다.그리고 이 섬은 백건이 사들여 남서연에게 선물했고 스위트 아일랜드라
“그래. 더 이상 의미가 없지.”“두 사람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야? 난 왜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백건은 부드럽게 웃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넌 알 필요 없어. 가자. 부모님이랑 한잔해.”“그래요.”남서연은 주스를 챙기고 진우석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서윤아와 백정우를 향해 걸어갔다.진우석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젖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서윤아는 휠체어에 앉아 적당한 우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백건과 남서연이 다가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아버님, 어머님, 저희가 한잔 올릴게요.”서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남서연을 보았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눈빛이지만 그런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지 그녀를 향한 인정은 아니었다.그녀는 마음속 깊이 여전히 남서연의 능력이 그의 아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다만 그녀의 편견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그들 부부의 애정 전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백정우는 크게 기뻐하며 격앙되어 잔을 들며 끊임없이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요점은 아이를 빨리 낳으라는 것이었다.남서연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백건은 이미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입술을 오므리고 몰래 남서연을 바라보며 꿀을 먹은 듯 달콤했다.비밀을 지키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하지만, 그의 어린 아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3개월 후, 태아가 안정되면 모두에게 공개하려 했다.그리고 그녀의 체질도 대단해서 임신 증상이 전혀 없었다. 평소처럼 먹고 자고 출근하고, 어지럽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고, 입덧도 하지 않았다.멀지 않은 곳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남하준, 정안 그리고 그들의 아들 남우영.언뜻 보면 그들은 또래처럼 생겼는데 절대 남우영이 성숙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가 선천적으로 미모를 타고났고 또 관리가 너무 잘 되어 젊어 보이는 것이었다.한 명은 늠름한 국방 장군이고, 한 명은 꽃 같은 미모의 화학자이고, 남우영
반년 후.남하준은 국경에서 안성으로 돌아왔다.정안과 반년 동안 떨어져 살면서 그는 그녀에게 언제 국경으로 돌아가냐고, 언제 실험실로 돌아가냐고 수없이 물었다. 비록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정안의 옆에 붙어 있으려 했다.그때마다 정안은 이렇게 대답했다.“난 안성에 남아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요.”무슨 중요한 일인지 정안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남하준은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정안은 묵은 원한과 새로운 원한을 함께 복수하고 있었다.유미의 남편은 횡령으로 고발돼 조사를 받다가 낙마했다.유미는 해외에서 남서연의 납치를 지시한 혐의와 직책 뇌물수수 혐의도 함께 추가되어 체포됐다.부부가 나란히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갔다.반년 동안 걷지도 못한 서윤아도 이 일을 알고 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승아를 집에 데려오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건은 그들 가족의 기업에 누를 끼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또 한 가지 큰일이 있었다.바로 백건과 남서연의 성대한 결혼식이었다.갑부의 결혼식은 M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에서 진행되었다. 십여 대의 비행기가 몇 번이고 낭만적인 섬으로 향했다.하늘과 바다가 일색이 되어 단조롭던 해변이 낭만적인 꽃바다로 변하고, 땅에 꽃잎이 깔리고, 수천만 개의 현장 장식이 있고, 가장 호화로운 음식과 술이 있었다.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서연도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장을 보게 되었다. 공기조차 꽃향기로 변했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로맨틱함이 가득했다.남서연은 수억 원짜리 웨딩드레스에 수십억 원짜리 주얼리를 착용한 채 멋지게 차려입은 백건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카펫을 밟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결혼식 무대 중앙으로 다가갔다.하객석은 꽉 찼고 모두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남서연은 행복한 눈물을 흘리며 달콤한 미소로 하객석의 부모님과 큰아버지들, 큰어머니들, 그리고 그녀를 20년 넘게 애지중지한 사촌 형제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신이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다
“백정우, 방금 뭐라 그랬어? 내가 소란을 피워?”서윤아가 울부짖자 핸드폰 저쪽에서 통화를 뚝 끊어버렸다.서윤아는 자기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냅다 던져 박살 냈다.그래도 그녀의 마음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아들과 남편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고, 심지어 자기 딸과 외손자까지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 크게 실망했다.백건과 남서연을 이어주려고 주변의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녀와 점점 멀어진다고 느꼈다.유승아는 바닥에 부서진 휴대전화 두 대를 주워들고 그녀 곁에 다가와 앉으며 부드럽게 달랬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그러다 몸 상해요. 건이 결혼 문제는 천천히 해결하세요.”“승아야,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서윤아가 긴장하며 묻자 유승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때 정안이 성큼성큼 병실로 들어오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이제 아무 방법도 쓸모 없어요.”병실 안의 두 사람은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정안은 우아하게 걸어 들어와 보온 상자를 손에 들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건이는 이미 재산의 절반을 서연에게 주겠다고 공증을 끝냈어요. 이혼하면 가족 기업 전체가 흔들릴 거예요.”권력과 재산을 중시하는 서윤아는 고함을 질렀다.“누가 허락했어? 이 자식이 감히 반역을 저질러!”서윤아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포악한 기세가 너무 강렬해 침대에서 벌벌 떨 정도였다.정안은 이제 그녀의 어머니를 걱정하지 않았다. 유일한 걱정은 유승아가 계속 파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도시락을 내려놓은 정안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유승아를 마주 보며 비꼬듯 말했다.“승아는 참 끈질긴 애구나. 건이는 이미 서연이와 결혼했으니 너도 이제 정신 차리고 적당한 선을 지켜. 더 이상 건이에게 환상을 품지 마.”유승아가 황급히 설명했다.“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와 건이는...”정안이 차갑게 웃었다.“오해인지 아닌지는 네가 누구보다 잘 알겠지. 거짓 해명은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