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 언니. 기다려요.”지윤이 다급하게 외치며 헐레벌떡 정안의 곁으로 쫓아와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고개를 숙여 숨을 몰아쉬었다.정호도 쫓아왔다.정안은 할 말을 잃고 남하준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미안하고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원하는 답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없었다.미안하다는 말 외에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랐다.남하준은 지윤을 힐끗 보더니 정안에게 물었다.“정안? 다른 이름이 있었어?”정안은 얼떨떨해서 자신의 부업들을 생각하며 긴장해서 설명했다.“책을 냈었는데 필명이에요.”책을 냈다니. 그녀는 금기서화에 모두 능통했다.남하준은 그녀를 한참이나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역시 넌 변하지 않았네. 여전히 어렸을 때처럼 훌륭해.”말을 마친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문을 열고 차에 올랐고 정호와 류청이 앞 좌석에 올라 차를 몰고 떠났다.멀어져 가는 차량을 바라보는 정안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숨을 고른 지윤이 정안 곁에 다가서며 속삭였다.“언니 설마 저 사람 좋아해요? 저 사람 M국 군전 그룹 수장이자 M국 국방 장군이잖아요.”정안이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맘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안 좋아해.”“그럼 다행이고요. 어휴, 깜짝 놀랐네. 언니가 정말 저 사람 좋아하면 어쩌나 했어요.”“가자.”정안은 성큼성큼 걸어갔고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넓은 큰길에서 차들이 쏜살같이 지나갔다.분명 초여름이었는데도 차 안은 한기가 엄습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이 감돌았다.칙칙한 얼굴의 남하준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정호는 여전히 분노에 가득 찬 채 운전을 하면서 옆에 있는 류청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정말 너무 화가 나. 도련님은 목숨 걸고 J국에 가서 다인 씨를 구했어. 매번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도련님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다인 씨만 돌봤고. 그런데 이게 뭐야? 기억을 회복하더니 제
남하준이 손을 내려 손목시계를 보더니 류청에게 말했다.“백인호 지난 십 년간 행적을 조사해.”“네, 도련님.”“정호, 넌 백하린에게 사람 붙여서 블랙 섀도우랑 어떻게 연락을 취하는지 조사하고.”정호는 내키지 않았다.“도련님...”남하준이 말을 이었다.“백진 어르신 부부에게도 사람 붙여서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게 잘 지키고.”정호는 화가 나서 온몸이 괴로웠다.“도련님, 회사 일로도 이미 충분히 바쁘십니다. 그룹 일만 해도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데 왜 남 집안일까지 간섭하세요? 다인 씨가 도련님을 어떻게 대했는데, 그럴만한 가치 없어요.”남하준은 정호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금원으로 향했고 정호와 류청도 차에서 내려 그 뒤를 따랐다.남하준은 거실로 들어가 곧장 서재로 향했다.류청과 정호가 걱정스럽게 따라갔고 정호가 조급해서 외쳤다.“제발 방에 가서 좀 주무세요. 제발요.”“안 피곤해.”그는 피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침대에 눕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눈만 감으면 걷잡을 수 없이 그녀 생각이 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마음이 아팠다.남하준은 책상에 앉아 자료를 펼치며 말했다.“가서 일 봐.”“도련님!”정호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고 얼굴이 굳어진 류청은 차마 남하준을 바라볼 수 없었다.남하준은 엄숙하지만 무기력하게 말했다.“나가.”류청과 정호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명령을 받고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금원을 나선 정호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 차를 세게 펑 쳤고 소리를 들은 류청이 화들짝 놀라 그를 노려보았다.“뭐야? 차 망가지면 네가 배상할 거야?”정호는 두 손을 허리에 짚고 노기등등해서 말했다.“넌 이 상황에서도 차 걱정이 되니? 도련님은 신이 아니야.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이라 아프고 힘들고 괴로워한다고. 지금 저 모양이 됐는데 넌 안쓰럽지도 않아?”류청은 한숨을 내쉬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괴로우면 뭐? 술도 안 마시고 자지도 않고 일만 하는데. 미친 듯이 일해야 괴로운 걸 잊을
유동진이 혼자 술을 마시며 여유롭게 대답했다.“아니.”“인생에서 사랑은 하찮은 욕심에 불과해. 사랑과 결혼이 없다고 사람 안 죽어.”유동진은 피식 웃더니 마치 자기가 어릿광대처럼 느껴져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옆 소파에 가서 앉아 다리를 꼬았다.“멋지게 산다 너. 누구 말처럼 깊은 사랑을 한 건 아닌 것 같네. 이혼이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었나 봐?”남하준은 대답하지 않고 책상 위에 있던 술 한 박스를 들고 유동진 앞으로 다가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집에 가서 마셔. 나 너랑 술 마실 시간 없어.”남하준은 술을 내려놓고 책상으로 돌아와 일을 계속했다.한편 유동진은 다리를 꼬고 남하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술을 마셨다.남하준의 술친구를 해주려고 왔는데 결국 유동진만 곤드레만드레 취하고 남하준은 술에 손도 대지 않았다.유동진은 자신이 더 이상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술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에이, 재미없어. 난 너 이혼해서 나 껴안고 눈물 콧물 흘릴 줄 알았더니. 내가 괜한 생각 했네.”남하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유동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며 말했다.“나 간다. 나랑 술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 전화해.”서재 문이 닫히고, 방은 조용하고 소리 없는 정적에 휩싸였다.피곤함이 순식간에 몰려와 남하준의 온몸을 가득 채웠다.그는 펜을 놓고 서류를 덮고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조용한 서재에서 그의 마음은 조금씩 가라앉았다.머릿속에는 온통 백완자의 그림자로 가득 차서 떠나지 못하고 가슴이 은은히 아팠다.극심한 고통은 아니었지만 괴로워 질식할 것 같았고 숨이 차오르지 않았다.상사병은 일종의 만성병으로 야금야금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었다.매 순간 아프고, 힘들고, 갈망하고, 그의 감정과 기분에 영향 줄 것 같았다.그는 백완자가 없어도, 사랑이 없어도, 이 결혼이 없어도 여전히 살 수 있었다.이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그는 서서히 눈을 뜨고 휴대전화를 집어 발신 번호 표시를 보니 낯선 번호였다.수화버
“그럼요.”남하준은 심장이 다시 아파지는 것을 느꼈고 천천히 눈을 감고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학교는 어디 나왔어? 직장은 어디 다니고?”“오빠.”정안은 그의 관심 가득한 질문을 끊고 무거운 마음으로 화제를 돌렸다.“다 지나간 일이에요.”정말 그럴까? 다 지나간 일일까?남하준은 씁쓸하게 입술을 오므리고 더는 묻지 않았다.지난 10년 동안 그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그녀가 잘 지냈는지, 그녀의 삶의 소소한 부분들까지 궁금했다.친구로서 그것도 아니면 이웃 오빠로서 궁금했다.정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오빠, 그럼 안녕히 계세요.”남하준은 대답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았고 전화가 끊겨도 그녀가 다시 말을 걸 수 있기를 바랐다.그녀는 그에게 언제 와서 물건을 정리할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다.그와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한참 후에야 남하준은 휴대전화를 천천히 책상 위에 던지고 창문 앞으로 가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그의 우람진 뒷모습이 고요한 방안에서 유독 쓸쓸하고 고독해 보였다.마치 앙상한 고목처럼 키가 크고 우뚝하지만 녹색은 보이지 않다....이틀 뒤.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온 대지를 물들였다.차량은 금원 입구에 멈추고 지윤은 차에서 기다리고 정안 혼자 금원에 들어갔다.이 익숙한 집에 다시 발을 들여놓자 그녀는 감회가 새삼스러웠지만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금원 안에는 확실히 도우미가 없었고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 안방 문을 열었다.남하준이 그렇게 바쁘니 틀림없이 집에 없을 거로 추측했다.정안은 방안을 한 바퀴 쓱 둘러보고, 쓰던 화장대를 아쉬운 듯 만져보고, 잠시 미련을 둔 후, 옷방으로 가서 캐리어를 꺼내 짐을 챙겼다.그녀는 옷을 챙기고, 증명 서류와 휴대폰을 찾은 후 캐리어를 끌고 떠났다.아래층으로 내려가 거실로 걸어갔을 때, 그녀는 어리둥절했다.남하준이 그녀를 등지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그녀가 캐리어를 끄는 인기척이 아주 컸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정안은 무거운 마음으로 천천히 다
정안은 캐리어를 끌고 금원을 빠져나왔다.지윤이 차에서 내려 그녀의 캐리어를 받아 차 트렁크에 넣었다.정안은 조수석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촉촉해졌고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고통이 밀려왔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수만 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 무너질 듯 아팠고, 머릿속은 온통 남하준의 모습뿐이었다.지윤은 운전석으로 돌아가 시동을 걸고 훌쩍 떠났다.“우리 언제 Z국으로 돌아가요?”정안은 창밖으로 스쳐 가는 경치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상부에 보고했어?”“네. Z국은 언니가 필요해요. 빨리 돌아가길 바라고 있어요.”정안은 쓸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심호흡을 했다.“이렇게 빨리 보고하지 말았어야지.”“왜요?”“아직 처리할 일들이 남았어. 시간이 더 필요해.”“괜찮아요. 당장 돌아가라고 강요하지 않을 거예요.”정안은 이마를 손으로 받쳐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아무도 나 강요하진 않지만 Z국에 스파이가 없다는 보장은 없잖아? 내가 살아 있다는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 있어?”순간 지윤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긴장하여 멍해졌다.확실히 그녀의 생각이 짧았다.“그럼... 어떡하죠?”정안은 휴대전화를 꺼내 조작하더니 무심코 말했다.“일단 부딪쳐 봐야지.”“우리 이제 뭐부터 하죠?”“돈 벌어서 빚 갚아야지. 일단 이쪽 생활부터 안정시켜야겠어.”지윤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돈 걱정은 추호도 없었다.그녀는 정안이 없어도 Z국으로부터 공금을 신청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행적이 쉽게 드러날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지금 정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정안은 휴대폰에서 3년 이상 봉인된 웹디스크에 로그인하고, 그 안에서 파일을 찾아 지윤의 계정으로 옮겼다.“3년 전에 번역한 나머지 6개 언어판 책이야. 네 계정으로 보냈으니 가서 팔아.”지윤은 정안이 쉴 때면 가끔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도 전문성이 매우 높은 중요한 책들을 번역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근데 권 당 얼마에 팔면 되죠?”정안은 눈살
남하준이 몇 초간 뜸을 들이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응.”정안은 고개를 푹 숙이고 품에 안고 있는 곰인형 털을 문지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계좌로 1억 2천만 원 보냈어요.”“응.”그가 너무 조용하고 담담해서 정안은 가슴이 턱턱 막혔다. 분명 연락도 안 하고 얼굴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속으로는 모순되어 미칠 지경이었다.그가 너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안은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이만 끊을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끊었고 정안은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정안의 반대편에 앉은 지윤은 감자 칩을 먹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언니한테 뭐래요? 왜 갑자기 울어요?”정안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뺨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안 울었어. 눈물샘이 예민해서 자꾸 눈물이 나오는 거 어떡해. 나도 통제가 안 돼.”“그럼 그 남자가 뭐라 했기에 눈물샘을 자극했는데요?”정안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억울한 듯 말했다.“아무 말도 안 했어. 그냥 응 두 마디밖에.”지윤은 어이가 없어 소리 내어 웃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참... 대단하네요. 악몽을 꿔도 울고, 너무 힘들어도 울고, 실험에 실패해도 울고, 운전 배우면서 코치에게 욕먹어도 울고, 배달음식이 너무 맛없어서 울고.”“그런데 이젠 상대방이 응 두 번 했다고 울기까지 해요? 언니 눈물샘 가서 수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정안은 심호흡하고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지 못하게 한 뒤 쓴웃음을 지었다.“그거 알아? 나 어릴 때 더 많이 울었어. 그리고 애교도 엄청 많고.”지윤은 감자 칩을 먹으며 대답했다.“그런 것 같았어요. 부잣집에서 태어나 응석받이로 자라며 어떤 좌절도 겪어보지 않았겠죠. 그러니 조금만 상처받아도 울기나 하지.”정안은 생각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나 어릴 때 하준 오빠한테 엄청나게 애교부렸어. 내가 애교만 부리면 오빤 내가 무슨 요구를 하든 다 들어줬
“그럼 어떡해요?”정안은 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지윤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백씨 저택에 가서 살자.”지윤은 황당했다.“네? 백씨 저택에 묵어요? 미쳤어요?”“그래야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가까이서 보호할 수 있어. 이 방법밖엔 없어.”지윤은 말없이 방으로 돌아가 짐을 꾸렸다.1시간 뒤.으리으리한 백씨 저택에서, 정안과 지윤은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고, 두 사람의 옆에는 캐리어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백씨네 도우미는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낯선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여은수는 두 사람의 캐리어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조금 우습기도 했다.“우리 집이 뭔 수용소인 줄 아나? 감히 우리 집에서 살겠다고? 정말 웃기지도 않지. 대체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정안은 느릿느릿 설명했다.“할머니, 저 지금 이혼해서 갈 데가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며칠만 묵고 싶어요.”여은수는 코웃음을 치며 가소롭기 짝이 없었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손님 내보내게.”정안은 지윤과 몸을 돌려 떠나려 하면서 중얼거렸다.“알겠어요. 그럼 할 수 없이 하준 씨 집에 다시 돌아가야죠 뭐.”여은수가 긴장하며 소리쳤다.“잠깐.”정안과 지우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머금고 돌아서서 여은수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몇 초 동안 망설이더니 말했다.“우리 가문에는 다른 별장도 많으니 아무거나 고르게. 가문 소유의 호텔에 묵어도 되고.”정안은 입술을 오므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전 금원과 여기에만 묵고 싶어요. 할머니께서 여기 못 묵게 하시니 어쩔 수 없이 금원으로 가야겠네요.”여은수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어이없는 표정으로 정안을 노려보았다.“자네 정말 뻔뻔하군!”정안은 못 들은 척 하고 지윤에게 말했다.“지윤아, 하준 씨가 뭐라고 했었지?”지윤은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도련님께서는 언니와 재혼하고 싶다고 하셨죠.”“그래, 사실 불가능할 것도 없지.
백하린은 어리둥절했다.“내가 네 남편을 빼앗았다고?”정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울먹이는 척했다.“그래, 네가 내 남편 뺏어갔잖아. 하준 씨 나랑 이혼할 때 계속 너 사랑한다고 했어.”백하린은 깜짝 놀라며 눈살을 찌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눈빛으로 백인호를 바라보았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애써 미소를 짓더니 안경을 고쳐잡았다.“여기 얼마나 있을 생각이야?”“내가 이혼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그래, 그럼 마음 편히 있어.”백하린은 불쾌해서 물었다.“삼촌, 미쳤어요? 분명 여기 들어온 목적이 따로 있다고요!”백인호는 냉랭한 눈빛으로 백하린을 노려보았는데, 그 살기 가득 찬 눈빛에 그녀는 머리를 움츠리고 감히 끽소리도 못했다.백인호는 지윤을 가리키며 물었다.“이쪽은 누구?”정안은 지윤의 손을 잡고 소개했다.“내 친구 지윤이에요. 백수에 집도 없는 불쌍한 가난뱅이죠.”지윤은 정안의 단어 표현에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소개를 마친 정안은 지윤을 데리고 거실을 나갔다.백하린 옆을 지날 때 정안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와 어깨를 등진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백하린, 앞으로 잘 부탁해.”백하린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독설을 내뱉었다. “서다인, 너 이거 지금 양이 호랑이 굴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어. 왜 굳이 자기 발로 지옥문에 들어서는 거지?”정안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누가 양이고 누가 호랑이인지는 지켜보면 알겠지.”말을 마친 그녀는 여유롭게 위층으로 올라갔다.백하린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몸을 돌려 정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크게 당황했다.분명 눈앞의 여자는 서다인이었다. 생김새도 목소리도 여전히 그녀인데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눈빛이나 분위기에서 나오는 아주 미묘한 차이였다. 지금의 그녀는 자신만만하고 여유롭게 또 세상만사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대처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정안과 지윤이 위층으로 올라가 방으로 돌아갔고 백하린이 백인호 앞에 다가가 쏘아붙였다.“왜 허락했어? 저
사람은 기쁜 일이 생기면 기분이 상쾌한 법이다. 하루 종일 바빠도 지우와의 관계를 회복한 생각만 하면 속으로 은근히 기뻐 났다.남태준이 막 차 옆으로 다가갔을 때 임다희가 차 뒤에서 걸어왔다.“태준아.”남태준은 멈칫하고 고개를 돌려 여유롭게 물었다.“임다희? 무슨 일이야?”“할 얘기가 있어. 아주 중요한 얘기야.”임다희는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타.”남태준이 쿨하게 대답하자 임다희는 그의 차에 올라탔고 남태준이 시동을 걸고 떠났다.차 안에서 남태준이 물었다.“어디서 얘기할래?”“너희 집.”남태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그건 안돼.”“아주 중요한 일이야. 반드시 사람 없는 곳에서 얘기하고 싶어서 그래.”임다희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빛을 내뿜으며 엄숙하게 말했다.“마약 거래에 관한 얘기야.”“그럼 지금 얘기해.”남태준은 차를 길가에 세웠다.“차 안에는 우리 둘만 있으니까 안전해.”임다희가 앞뒤를 돌아보니 이 길은 행인도 없고 오가는 차량도 뜸했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남태준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지 않으려 하자 마지못해 핸드백을 열어 그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이 시간에 거래가 있을 거야.”그의 다년간 사건 처리 경험으로 볼 때, 이렇게 명확한 거래 장소와 시간은 임다희가 절대 알 수 없었다.이 정보가 가짜이거나, 누군가가 그녀에게 준 것이 틀림 없었다.“어디서 났어?”남태준이 묻자 임다희는 조금 켕긴 듯 대답했다.“건달인 친구가 알아낸 정보인데 내가 샀어.”남태준은 입꼬리를 꼬며 그녀의 거짓말이 좀 억지스러워서 계속 물었다. “네가 마약 형사도 아니고 이 정보를 왜 사는데?”“너 주려고.”남태준은 움찔하더니 침묵했다.임다희는 애정 어린 눈으로 남태준을 지그시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태준아, 우리 다시 만나자.”남태준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뭐라고?”임다희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울먹였다.“전에는 내가 미안했어. 네
지하 카지노 사무실.육건우는 자료를 책상에 던지고는 화가 나서 일어나 두 손을 허리에 짚고 임다희를 노려봤다.“너 혹시 남태준 스파이야?”임다희가 미소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그럴 리가 있나요? 우리는 같은 배에 탄 사람이잖아요. 내가 남태준을 도와서 얻을 수 있는 게 뭔데요? 난 단지 애매한 단서만 줬지 실질적인 증거를 준 적은 없어요.”“요즘 사복 경찰이 계속 우리 촬영장 밖을 배회하고 가끔 항공사진 드론이 공중을 선회하고 또...”육건우는 책상으로 가서 서류뭉치를 집어던졌다.“이건 전부 최근 경찰들에게 적발된 물건이야.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젠장!”임다희는 긴장해서 침을 삼키고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육건우는 분노하여 임다희를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네 신분을 잊지 마. 내가 너를 도와 남태준과 그 여자를 갈라놓겠다고 약속했고 그 동생까지 함정에 빠뜨렸어. 그런데 그 여자가 지금 나를 고소했다고. 젠장.”임다희는 웃어 보이며 말했다.“제가 어떻게 사장님의 큰 은혜를 잊겠어요? 다만... 저는 다시 전 남자친구와 재결합하고 싶어요. 그런데 하필 태준이가 마약 경찰이잖아요. 그래서 저... 이 일에서 손 떼고 싶은데 보스에게 사정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육건우는 어이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임다희가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그해 남태준과 요트에서 탈출한 뒤 남태준은 그녀 때문에 다시 잡혀가 바다에 빠져 하마터면 숨질 뻔했지만 그녀는 사실 안전하게 귀국할 방법이 없었다.배후의 빅보스가 바로 그녀를 죽이려고 했지만 육건우가 빅보스에게 사정을 해서 그녀에게 살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그녀의 연예인 신분을 이용하여 마약을 갖고 귀국해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그녀는 마지못해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십여 킬로그램의 마약을 촬영장 카메라 기둥에 숨긴 후 요트를 타고 귀국했다.그 이후로 그녀는 마약밀매 조직의 일원이 되었고 매번 물건을 가져오거나 몸을 헌신해야 했다.임
꽃가게 앞을 지날 때 남태준이 걸음을 멈추었다.“지우야. 나...”남태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우는 재빨리 그를 끌고 나가 그의 팔을 껴안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부질 없는 곳에 돈 낭비하지 말아요.”“여자들은 다 꽃을 좋아하지 않아?”지우에 의해 팔이 단단히 조여진 남태준은 아주 편안했고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안 좋아해요. 굳이 사주고 싶다면 차라리 다육식물을 줘요. 기르기도 쉽고 번식도 할 수 있잖아요.”“가방의 품질, 브랜드, 가격 중 어떤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가격이죠.”남태준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소비 관념과 가치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또 물었다.“다이아몬드와 금 중에 뭐가 좋아?”“금이요.”지우가 고민도 없이 대답하자 남태준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좋아. 알겠어.”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을 때 흥분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우야!”지우가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더니 그녀를 부른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바로 그녀에게 맞선 상대를 소개해 준 중매인이었다.그녀는 빠르게 남태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놀라움과 설렘이 가득해 말했다.“어쩐지 내가 그렇게 좋은 남자들을 소개해줘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니. 알고 보니 눈이 이렇게 높았었네? 남편 어디 사람이야? 누가 소개해줬어?”지우는 어색하고 난처해하며 웃어 보였다.“친구가 소개해줬어요.”말하자면 백완자가 그들을 소개해 준 셈이었다.“외모도 빼어나고 큰 기에 몸매도 좋네. 어디 사람이야? 무슨 일 해?”역시 가십에 관심이 많은 중매인이었다.남태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지 않았지만 지우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안성 사람이에요. 아주머니, 제가 얼른 가서 밥해야 해서요. 다음에 얘기 나눠요.”“안성 좋지! 큰 도시 사람이네!”지우는 남태준의 손을 잡고 서둘러 떠났다.그녀는 매우 급하게 걸었지만 남태준의 얼굴에는
지우는 긴장되어 귀가 빨개졌다.“싫어?”남태준은 그녀의 진심을 떠보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와 재결합하고 싶은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의 허벅지에 몸을 기울여 앉았는데 긴장해서 등이 약간 뻣뻣했다.남태준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덥석 끌어안고 뒤로 기댔다.지우는 그의 튼실한 가슴에 완전히 엎드렸고 몸이 나른해졌다. 수줍고 난처해 감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그의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아주 편안하고 심장이 왠지 모르게 떨리면서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만약 네가 불편하거나 거부감이 든다면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남태준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를 갖고 싶었지만 그녀가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그 말을 들은 지우는 조바심이 났다.그녀는 남태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그의 깊고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불편하지 않아요. 거부감도 들지 않고요.”“그러니까 너 지금...”남태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우가 갑자기 입을 맞추었다.그러자 남자는 움찔했다.지우는 눈을 감고 두 손을 천천히 남자의 어깨에서 뒤로 걸어 목을 감은 뒤 수줍고 서툴게 그의 따뜻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그녀는 심장이 천둥처럼 뛰었다.남태준은 몇 초 동안 멍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마음은 더없이 흥분되었다.그는 지우의 뒤통수를 낚아채 옅은 키스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의 입술과 혀는 그녀의 어금니를 비틀어 열고 곧장 달려들어 여자의 혀와 한데 엉켰다.“음!”지우는 그의 공세에 못 이겨 수줍은 소리를 냈다.그동안의 갈망과 그리움을 남태준은 한숨에 모두 보상받고 싶은 심정이었다.지우를 꽉 껴안고 격렬하고 난폭한 키스를 계속 퍼부었다.긴 키스가 이어지고 지우는 입술이 다 아프고 호흡이 가쁜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남자의 가슴을 밀면서 고개를 뒤로 뺐다.남태준은 아쉬운 듯이 그녀를 놓아주었다.두 사람은 눈을 감고 서로 이마를 맞댔고 거친 호흡을 나누며 뜨거운 기운이 감돌
지우가 부랴부랴 그를 불렀다. “아니요. 나 안 더워요.”남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리모컨을 놓았다.그녀의 영롱한 큰 눈은 여전히 아름답고 맑고 깨끗했으며 매력적이었다.지우는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태준 씨가 임다희와 사귀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남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지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여 남태준에게 건넸다.순간, 지우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이미 헤어진 이상 그와 다른 여자에 관해 물어볼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참지 못했다.확실히 묻지 않으면 그녀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비록 죄책감을 느끼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다만 이때 그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아 보일 수 있었다.모두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저지른 일이지만 그녀는 동생의 취업을 위해 목적을 갖고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뉴스를 본 남태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긴장하며 설명했다.“지우야. 나와 다희 그런 사이 아니야. 나 믿어줘.”현재 임다희는 그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보안 및 기밀 유지 계약으로 인해 임다희의 신분과 작업을 기밀로 유지해야 했으므로 지우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지우가 자신을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하게 이마를 짚고 죽을상이 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또 불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지우를 바라봤다.지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여자가 먹여준 음식 먹었어요?”“그저 보통 친구와 밥 한 끼 먹은 거야. 나와 다희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야.”“안 먹었어요?”“응. 거절했어.”“아.”지우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둘 다 침묵에 빠졌다.남태준이 지우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스쿠터를 타고 남태준의 집에 도착한 지우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출근 중이겠지?너무 일찍 온 것 같아서 그녀는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차를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그녀가 막 떠나려던 참에 남태준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는 지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가며 불렀다.“지우야!”지우는 차를 세우고 그를 뒤 돌아봤다.마음이 격해진 남태준은 몇 걸음 만에 지우 곁으로 달려가 뜨거운 시선을 내뿜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방금까지만 해도 용기가 넘치던 지우는 그를 만난 순간 맥이 풀리며 긴장해서 물었다.“출근 안 했어요?”“오늘 휴식이야.”남태준은 둘 곳 없는 손을 주머니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지우는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마음속에 번져 그녀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어디 나가요?”지우가 묻자 남태준은 고민 없이 말했다.“아니. 나 아무 일도 없어. 들어가 앉을래?”지우가 고개를 돌려 집을 보니 또 긴장감이 감돌았다.머릿속에 지난번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뭐 물어보려고 왔어요. 물어만 보고 갈 거예요.”묻기만 하고 바로 간다?남태준은 너무 아쉬웠다.헤어진 후 지우가 먼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태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여기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너무 더워.”지우도 고개를 들어 눈 부신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이 남자가 햇볕에 약하다고?’그리고 남자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보니 평소에도 햇볕을 많이 쬐는 것 같았다.지우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차를 옆으로 몰고 가서 멈추고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갔다.그러자 남태준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오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다희가 육건우의 범죄 증거를 입수했으니 네가 가서 가져와. 난 오늘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방해하지 마
“육건우가 지금 나랑 같이 거물을 만나러 가자고 하는데 네가 찾는 그 신비로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와볼래?”남태준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주소 보내.”“좋아.”전화를 끊은 남태준은 지우의 메시지를 잊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이 밤.지우는 휴대전화를 안고 남자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밤새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벌써 두 번째였다. 남태준이 그녀에게 두 번이나 답장하지 않았다.지우는 마음이 완전히 뒤숭숭해져서 남태준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었다.그에게 재결합을 청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이틀이 지났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고 지우는 평생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남태준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그와 임다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계속 생각했다.송수빈이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지우를 불렀고 지우는 일할 마음이 없어 컴퓨터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송수빈은 한창 일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문득 송수빈이 소리쳤다.“지우야. 네 전 남자친구 연예 뉴스에 나왔어!”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서 고개를 내빼고 기웃거렸다.송수빈이 핸드폰 액정을 그녀 앞에 널어놓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지우는 그 안의 사진과 글을 보고 움찔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준과 임다희가 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고 임다희가 남태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다정한 장면이 찍힌 것이었다.제목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임다희, 다정하게 음식을 먹여주다.’였다.송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무랐다.“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 남 대장님 너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전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어? 이거 환승 연애 아니야? 쓰레기!”지우는 가뜩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송수빈이 남태준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을 듣자 그녀는 더욱 괴로워하며 감싸기 시작했다.“그냥 밥 한 끼 먹은 것뿐이잖아? 그게 뭐? 요즘 기자들 직업정신 없어서 사진 한 장으로도 아
지우는 눈물을 흐릿하게 머금은 채 일어나서 버럭 소리쳤다.“다른 사람에게 빌붙을 생각만 하지 말고 독립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을 궁리만 해?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욕을 먹은 지성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진효연은 아들이 아까워 남태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우를 야단쳤다.“지금 그게 동생에게 할 소리야? 지성이가 왜 남자답지 못하고 왜 독립적이지 않은데? 지성이는 그저 좋은 직장 찾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태준이가 남이야? 지성이 미래의 매형인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잖아?”남태준은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지우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밥 안 먹어!”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하고는 식탁을 빠져나와 방으로 가더니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진효연은 그제야 반응하고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남태준을 보았다.남태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두 사람 아직 화해 안 했어?”진효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남태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제 저희 반대 안 하시는 거예요?”진효연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반대 안 해. 내가 허락해서 두 사람 이미 다시 만나는 줄 알았어.”진효연은 말을 잇지 못하더니 문득 쑥스러웠다.남태준이 지우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방금 그녀의 부탁은 확실히 좀 지나쳤다.지금 남태준은 마음속에 돌이 박힌 듯 숨이 막혔다.이따금 전해지는 괴로움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차라리 지우가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그와 헤어졌길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지우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동의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우는 정말 자신의 이유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을까?단순히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어서?남태준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식사를 했다.그가 떠날 때까지 지우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넓은 거리를 무작정 누볐고 마음이 아프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뚜뚜.메시지 벨이 울렸다.
남태준은 당연히 진효연의 뜻을 알았다.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효연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딸은 결국 시집갈 것이고 평생 그녀와 함께할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 것이다.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식적인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본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효연이 남태준은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이든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바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남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아주머니, 지성이가 공무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해요. 통과해야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진효연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만약 공무원이 되기 싫으면 안성에 가도 돼요. 제가 가족들한테 회사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진효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남태준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고마워 태준아. 내가 정말 많이 고마워.”지성도 기뻐했다.“고마워요 형.”지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밥 먹을 기분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아직 남태준의 여자친구가 아닌데 그녀의 가족은 흡혈귀처럼 그에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앞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지 모른다.지우는 지성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너 못 가.”진효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우를 쳐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지성도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내가 왜 못 가? 누나도 내가 나가서 돈 벌기를 바라잖아.”지우는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면접 보고 들어가는 건 되는데 낙하산은 절대 안 돼.”“왜?”지우는 제대로 된 신분으로 자존감을 갖고 남태준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난처한 위치에 처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내가 언제 누나더러 도와 달래? 난 태준이 형에게 부탁했어. 게다가 형도 흔쾌히 수락했고.”“너 바보니? 일자리도 혼자 못 찾아?”“내가 졸업한 대학교가 평범하잖아.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상에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알아?”“그래도 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