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두 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의사는 두 차례나 위급 통지서를 내렸다.소지연은 너무 놀라 울음조차 잊은 채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다행히도, 의료진의 노력 끝에 김미애는 간신히 고비를 넘겼다.하지만 진료를 마치고 나온 의사는 차갑게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환자는 얼마 전 큰 수술을 받았어요. 흥분하면 절대 안 되는 상태였는데, 가족들은 그런 걸 몰랐던 건가요?”소지연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결국 벽에 기대앉은 채 중얼거렸다.“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윤하경은 그런 지연을 바라보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의사 선생님, 앞으로는 저희가 더 신중히 조심할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환자분 치료에 최선을 다해 주세요. 치료비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의사는 그녀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병실로 돌아온 뒤, 소지연은 여전히 넋이 나간 듯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윤하경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지금 이렇게 자책한다고 뭐가 달라져?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거야?”소지연은 씁쓸하게 웃었다.“아니면 어쩌라고. 안현주는 안씨 가문의 딸이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그 말에 하경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소지연의 말대로, 안현주 앞에서 소지연은 아무 힘도 없는 존재였다.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소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만 가봐. 엄마 옆엔 내가 있을게.”윤하경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려던 순간, 소지연이 덧붙였다.“오늘만큼은 엄마랑 단둘이 있고 싶어.”그 말에 윤하경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알겠어. 내일 다시 올게.”윤하경은 병원을 나와 차에 올라탔고 결국 참지 못하고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들었다.원래 오늘은 임수연의 일로 기분이 좋았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나니 그 기분도 사라졌다.그녀는 핸드폰을 켜 스크롤을 내리던 중, 문득 한 게시물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놀랍게도, 유호천이 게시물을 올린 것이다.사진 속 배경은 어느
우지원은 그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윤하경은 그의 표정을 보고 단박에 알아챘다.‘또 쓸데없는 상상을 하고 있구나.’“유호천 씨 찾으러 왔어요. 어디 있는지 안내해 줘요.”우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분... 왜 찾으시려는 건가요? 비록 우리 대표님의 사촌이긴 해도 대표님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오히려...”“헛소리 그만해요.”윤하경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강현우는 그렇게 과묵한데, 왜 이런 애를 부하로 두는 건지...'.“우지원 씨. 저번에 한밤중에 저 불러내 놓고 빚졌다고 했던 거 기억하죠? 그런데 지금 이 정도도 못 도와주겠다는 건가요?”우지원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따라오세요.”그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슬쩍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 문자를 보냈다.윤하경은 그걸 알아채지 못한 채 그를 따라갔다.‘헤븐'의 어두운 복도는 여전히 불길했지만 윤하경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 우지원은 한 룸 앞에서 멈춰 섰다.“오늘 그분, 기분이 별로라 혼자 있고 싶다고 하셨어요. 정말 들어가실 건가요?”“됐고, 그만 가요.”더는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아 윤하경은 단숨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어두운 조명 속, 술병과 담배꽁초가 널브러진 가운데 유호천이 홀로 앉아 있었다.그는 마치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손에 쥔 술병을 그대로 던졌다.그 술병은 정확히 윤하경을 향해 날아왔고 뒤따라 들어오던 우지원이 황급히 그녀를 끌어당겼다.우지원의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윤하경이 여기서 다치기라도 하면... 대표님이 날 어떻게 벌을 줄지 상상도 안 가네.’“여자분한테 이렇게 대하는 게 말이 됩니까?”유호천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윤하경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아, 윤하경
방 안으로 들어온 건 바로 안현주였다.기세등등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던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윤하경을 훑어보며 비아냥댔다.“또 그 낯짝 두꺼운 친구 대신 고자질하러 온 거예요?”거칠고 모욕적인 말에 윤하경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말조심하세요.”“조심해야 할 건 그 여자죠. 당신 그 잘난 친구가 내 약혼자한테 기웃거리고 있는데, 내가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요?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당신네 쪽부터 조심시키세요.”윤하경은 이를 악물며 침착하게 대꾸했다.“안현주 씨. 당신이 지금까지 한 일들, 전부 불법이라는 거 알고 있죠?”하지만 안현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그래서요? 그게 뭐 어떻다는 건데요?”그 뻔뻔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걸 억누르며 윤하경이 낮게 말했다.“좋아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시죠.”그녀는 등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않아 안현주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를 붙들었다.“잠깐.”윤하경이 멈춰서서 돌아보는 순간, 안현주는 차가운 술을 윤하경의 얼굴에 그대로 끼얹었다.“강현우를 등에 업었다고 해서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마요. 그 사람, 그냥 잠깐의 호기심으로 당신한테 관심 보인 거예요.”안현주의 눈빛엔 조롱과 경멸이 가득했다.“강현우 씨 맞선녀가 벌써 경성에 도착했단 얘기 못 들었나 보죠? 얼마 안 가서, 당신도 버려지겠네요. 쓰레기처럼.”윤하경의 온몸은 술로 흠뻑 젖었다. 머리부터 가슴까지 흐르는 액체가 그녀의 자존심까지도 타고 흘러내렸다.모욕감에 치를 떨며 반격하려는 찰나, 그녀의 뒤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다가왔다.안현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고 목소리가 엉겼다.“강...”그 순간,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현우가 등장했다.“말은 잘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더듬어요?”윤하경이 놀란 듯 뒤돌자, 그의 날카로운 턱선이 시야에 들어왔다.안현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식은땀을 흘렸다.‘혹시... 내가 한 말 전부 들은 건가?'그녀는 다급히 태세
갑작스러운 전개에 안현주가 뭐라고 따지기도 전에 두 명의 경호원이 한 명은 팔을, 한 명은 다리를 들어 그녀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안현주가 발버둥 치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내가 아니라고, 저 여자를 내쫓아야지!”우지원은 순간 안현주가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한 걸음 다가가 말했다.“여기에서 쓰레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 하나뿐이에요.”“앞으로 다시는 여기 오지 마세요. 우리 헤븐은 당신을 환영하지 않아요.”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 있지? 강현우가 윤하경을 내쫓을 거라고 생각하다니.’어떤 상황이 와도 강현우는 윤하경을 함부로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 자신에게도 침 뱉는 일이나 다름없었다.그때, 안현주가 마지막 악을 쓰며 외쳤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우지원은 짜증이 난 듯 서랍을 열어 실크 수건을 꺼내더니, 그녀의 입에 조용히 구겨 넣었다.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챈 윤하경은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강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그래서 지금 나를 도와주고 있는 건가요?”그녀의 질문에 강현우는 찬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무언가 날카롭고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한심하기로서.”“앞으로 또 이런 식으로 당하고 살 거면, 어디 가서 내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그 말만 남기고 그는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갔다.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비록 그가 나서지 않았어도 안현주를 가만두지 않았을 그녀였다.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줬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안 가? 여기서 유호천이랑 있을 거야?”윤하경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급히 그를 따라갔다.밖으로 나가면서 뒤돌아보니, 이 난리통에 유호천은 여전히 쿨쿨 자고 있었다.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문을 닫고 나섰다.그러나 밖으로 나서자 강현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여기서 길이라도 잃으면 어떡하지...’불안에 휩싸인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하얀 셔츠 아래로 윤하경의 긴 다리가 드러났다.고개를 숙여 자신을 내려다본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이만하면 괜찮겠지.”단정하게 셔츠 매무새를 고치고 방 밖으로 나오자 강현우는 이미 양복 재킷을 벗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긴 오른팔은 느슨하게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손가락으로 소파 가죽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 순간 윤하경의 몸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강현우의 표정은 좋지 않아 보였고 윤하경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 괜찮으면,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강현우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유호천을 찾아간 일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괜히 화가 더 나기 전에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하지만 강현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의 다리를 스쳐보더니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를 띠었다.“잠깐.”문을 열고 나가려던 윤하경은 그대로 멈춰 섰다.그녀는 뒤돌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더 하실 말 있으세요?”그녀는 침착하려 애썼지만 강현우의 눈빛은 점점 냉랭해졌고 손끝으로 오라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윤하경은 꼼짝하지 않고 눈빛을 반짝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냥 여기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내가 갈까, 그럼?”그 말에 그녀는 마지못해 그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은 마치 교무실에 불려 간 학생 같았다.가까이 다가오자 강현우의 시선이 그녀의 하얀 셔츠 너머로 스쳤다.백열등 아래, 셔츠 안 실루엣이 은근히 비쳐 보였다.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장난기 어린 말투로 말했다.“남자 유혹하는 법, 꽤 잘 아나 본데.”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윤하경은 얼굴이 이유 없이 화끈 달아올랐다.강현우의 셔츠 위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다.오늘 이 옷을 고른 건 단지 집에 돌아갈 때 입을 옷이 필요해서였을 뿐인데, 그의 농담 한마디에 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그녀는 황급히 일어서려 했다.“
“그래?”강현우의 낮은 목소리에 윤하경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세요.”그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고 손길은 이전보다 더 강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윤하경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작게 신음을 내며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진짜예요!”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다른 남자 얘기를 하니 기분이 좀 나쁘네.”그는 몸을 일으켜 세운 뒤, 윤하경을 가볍게 안아 침대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순간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제서야 강현우의 진짜 의도를 눈치챘다.‘결국 이게 목적이었구나... 이 남자의 욕망은 도대체 줄어들 줄을 모르는 건가.’강현우가 천천히 몸을 숙이며 다가오자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아직 몸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잖아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 아니면 내 체력이 의심스러워서?”30분 후, 윤하경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아... 그냥 입 다물걸.’그녀는 지친 숨을 몰아쉬며 강현우에게 간신히 외쳤다.“제발... 그만...”하지만 돌아온 건 더욱 깊고 거친 움직임뿐이었다.지친 몸은 강현우의 집요함에 무너졌고 그녀는 결국 녹초가 되어 침대에 축 늘어졌다.반면 강현우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윤하경은 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강현우와 함께한 밤은 그녀에게 있어 전쟁과도 같았다.어쩌면... 전쟁보다 더 치열했을지도 몰랐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현우는 조용히 침대에 누운 윤하경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시선을 거두고 문을 열었다.문 앞에는 우지원이 서 있었다.“대표님. 옷, 가져왔습니다.”강현우는 말없이 옷을 받아들었다.우지원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이따 백화점에 사람을 보내서, 윤하경 씨 사이즈에 맞는 옷도 추가로 구매하겠습니다.”그는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듯 눈을
윤하경의 물음에 우지원은 잠시 망설였다.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 저더러 문 앞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그 말에 윤하경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헤븐’을 나와 자신의 차에 오르자, 윤하경은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긴장이 풀린 듯 핸드폰을 꺼내보니 수많은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여러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 중, 가장 많은 건 다름 아닌 유 집사였다.[아가씨, 아직 밖이에요?][집에 난리가 났어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니까요.]윤하경은 눈썹을 찌푸리며 시동을 걸었다.집에 도착한 건 거의 정오 무렵이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유 집사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아가씨! 어젯밤 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그러다 문득 그녀의 목을 바라본 유 집사의 얼굴에 의문이 스쳤다.“어머, 어디서 주무셨길래 모기한테 그렇게 물리셨어요?”순간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목을 가렸다.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모기 물린 자국이 아니라, 전날 밤의 흔적이었다.‘샤워할 때 미리 봤더라면 파운데이션이라도 발랐을 텐데.’그녀는 얼버무리듯 말했다.“그보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던 게 무슨 뜻이에요? 설마 임수연이 죽은 건 아니겠죠?”‘안돼. 이제 복수를 시작했는데, 이렇게 쉽게 끝나버리면 재미없지.’유 집사는 2층을 슬쩍 쳐다보더니 그녀를 조용히 구석으로 이끌었다.“어젯밤에 회장님께서 지하실로 내려가셨어요. 아가씨께서 저더러 그 여자의 상태를 계속 살피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뒤따라갔는데... 문밖에서도 여자의 비명이 들릴 정도였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떨려 있었다.“어떻게 고문한 건지... 그 소리, 아직도 귀에 맴돌아요.”유 집사는 평생 윤씨 집안에 충직하게 일해온 사람이었다.그녀가 겪어본 가장 큰 일이라 해봤자 임수연의 날 선 말투 정도였기에 어젯밤의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윤하경은 예상치 못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눈앞의 광경에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숨을 헉 들이켰다.과거의 임수연은 비록 절세미인은 아니었지만 윤씨 가문의 재력을 등에 업고 기품 있는 척할 줄은 알았다.하지만 지금의 임수연은 그저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한 마리 죽어가는 개에 불과했다.손과 발은 굵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옷은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원래 색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그 모습을 본 윤하경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그건 희열과 만족감,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혐오감이었다.윤하경이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경호원을 바라봤다.“나가 있어.”싸늘한 목소리가 울리자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던 임수연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벌떡 일어났다.그녀의 두 눈은 마치 원귀처럼 이글거렸고 윤하경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이 개년아! 감히 여길 와?”임수연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디를 크게 다친 건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그런 그녀를 향한 윤하경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 눈엔 동정도 연민도 없었다.과거의 윤하경은 길고양이 한 마리만 봐도 마음 아파하던 따뜻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인간을 동정할 이유는 없었다.임수연이 이를 갈며 발버둥 쳤지만 윤하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 눈빛에 오히려 임수연이 움찔했다.“너, 날 비웃으려고 온 거야?”윤하경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맞아요.”“널 죽여버릴 거야!”임수연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기어오르려 했고 그 모습은 마치 다리가 부러진 짐승 같았다.“당신도 이런 날이 올 줄 몰랐겠죠?”임수연은 대답 대신 이를 갈며 윤하경을 노려보았다.“다 너 때문이야... 다 네년 때문이라고!”그 악다구니에 윤하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당신 스스로 자초한 일이에요.”그녀는 차분하게 대꾸하며 손에 든 약병을 흔들었다.“살고 싶으면, 나한테 빌어요.”임수연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가 이내 독기 어린 눈빛이 번뜩이며 침을 뱉었다.
주미나는 경성에서 꽤 높은 지위와 명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윤하경은 강현우가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지원은 후사경을 통해 윤하경의 놀란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엔 미세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몰랐죠? 그때 형이 얼마나 멋졌는지...” 우지원은 마치 강현우의 열혈 팬처럼 열정적으로 자랑하며 말했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물었다. “그 후에는요?” “주미나 씨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어요. 결국 형이 구지호 씨의 목숨을 위협하며 겨우 주소를 말하게 했죠.” 우지원은 그 말을 마치자 웃음을 터뜨렸다. “한 시간 거리였는데 형은 30분 만에 도착했어요. 차 바퀴가 연기 날 정도였죠.” 우지원은 고개를 흔들며 감탄했다. “제가 여자였다면 진짜 우리 형한테 시집갔을 거예요.” 그는 갑자기 윤하경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쵸? 윤하경 씨.” 윤하경은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를 금세 알아챘다. 우지원은 계속해서 강현우를 옹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윤하경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기술이 발전해서 원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죠.” 우지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여자가 된다고 해도 형수님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윤하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우지원이 왜 자꾸 자신과 강현우의 미래를 얘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결혼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라 강현우가 원해야만 이루어지는 일이었다.차가 시내에 도착하자 윤하경은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내려 주세요.” 우지원은 브레이크를 밟고 돌아서서 윤하경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형수님, 잘 가세요.” 말을 마친 그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 윤하경은 바람이 휘날리는 거리 한복판에 홀로 남았다. 바람이 그녀의 치마를 날리며 길가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외로운 그림 같았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어젯밤 일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그에 대해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가볼게요.” 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윤하경은 발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 문을 조용히 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어젯밤 일이 어떻게 처리됐는지가 아니었다. 강현우라면 주미나가 그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바로 자신의 안전이었다. 윤수철은 결코 자신을 위해 구씨 가문과 맞설 일이 없다는 걸 뼛속까지 알고 있었다. 만약 주미나가 정말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겨냥한다면...‘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며 윤하경은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윤하경은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별장 밖으로 나갔다. 생각에 잠겨 걷던 그녀는 어느새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빠르게 다가오는 차에 의해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급히 사과하며 인도로 돌아가려던 순간 차에서 창문이 내려가며 한 마디가 들려왔다. “형수님, 태워 드릴게요.” ‘형수님?’ ‘이게 무슨... 왜 이렇게 불러?’윤하경은 당황한 얼굴로 차를 바라봤다. 사람을 잘못 봤다고 말하려던 찰나, 운전석에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우지원의 얼굴을 보고서야 멈칫했다. 윤하경은 살짝 표정을 굳히고 차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우지원은 피식 웃으며 차에서 내려 그녀의 쪽으로 다가와 차문을 열어줬다. “타세요. 현우 형이 데려다주라고 보냈어요.” 윤하경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거절하지 않았다. 주변 환경이 꽤 괜찮아 보였고 도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장이었기에 거절하면
그녀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방 안은 조용했다. 강현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이미 한밤중. 머리를 말린 후 침대 가장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려볼까 싶었지만 결국 이불을 들추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늘 하루는 예상치 못한 일들로 가득했다. 몸에 남아 있던 긴장이 서서히 풀리자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대가 미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묵직한 온기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넓은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따뜻한 손길이 가슴 위에 가만히 얹혔다.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눈을 뜨려 했지만 마치 깊은 꿈결 속에 갇힌 듯 쉽게 떠지지 않았다. 그 순간, 악몽이 그녀를 덮쳤다. 작은 집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뒤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분갈할 수 없었고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몸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움직이지 마.” “계속 이러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이 목소리...‘현우 씨?’ 윤하경은 잠결에 익숙한 목소리임을 깨닫자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순간 깊은 곳에서 묵직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치 따뜻한 무언가가 온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비록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옥죄던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윤하경은 몸을 돌려 얼굴을 강현우의 품 속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두 손은 자연스레 그의 단단한 허리를 감쌌다. 강현우는 순간 얼어붙은 듯했다. 그동안 모든 상황을 주도하던 그였지만 윤하경이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손은 공중에서 잠시 멈췄고 예리한 눈빛이 어두운
‘방법을 찾아야 해.’윤하경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그 속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과 공포로 휘몰아치고 있었다.‘이번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하지…’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주미나였다.겉으로 보기엔 상류층 여사답게 우아하고 고상했지만 그 손에 묻은 피를 윤하경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몇 년 전, 구정수의 내연녀가 아이를 가졌을 때 주미나는 그 여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윤하경이었다.잔혹하고 독하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 여자. 그게 주미나의 진짜 얼굴이었다.‘그 수법이 언젠가 나한테 향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생각만으로도 온몸이 떨렸다.무의식중에 손톱을 뜯고 있던 윤하경의 손동작에 강현우가 힐끔 그녀를 바라봤다.“기분 안 좋아?”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슬쩍 웃었다.“혹시 내가 흥을 깨서 그래? 미안한데.”“...네?”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 윤하경은 고개를 들었고 몇 초 후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나서야 얼굴이 벌게졌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강현우는 키득 웃었다.“말도 안 된다고? 나는 네가 날로 부족해서 다른 남자들 불러서 야외에서 색다르게 즐기려는 줄 알았는데?”그 잘생긴 얼굴로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지, 윤하경은 황당함을 넘어 아연실색했다.그녀의 반응이 흥미로웠는지 강현우는 몸을 살짝 기울이며 중얼거렸다.“근데 지금 너, 좀 유혹하는 거 같거든.”익숙한 향기가 스쳤고 그의 눈빛은 장난기와 위협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이 인간은 정말 사람 놀리는 데 재능이라도 있나.’“그만 멍때리고 내려.”강현우가 먼저 차 문을 열었다.공기 속에 긴장이 조금 가셨지만 윤하경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그러자 그가 몸을 숙여 그녀의 눈높이에 맞췄다.“뭐야, 내가 안아줘야 내릴 거야?”“됐거든요!”윤하경이 얼굴을 붉히며 차에서 펄쩍 내렸다.주위를 둘러본 그녀
어두운 방.윤하경은 원래 겁 없는 편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태어나 처음이었다.“기절한 건가?”강현우가 다가와 그녀를 발끝으로 툭 찼다.윤하경은 천천히 눈을 떴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아직이요.”그가 코웃음을 쳤다.“내 침대에 기어들 땐 겁이 없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쫄았어?”그 말에 윤하경은 할 말을 잃었다.‘지금 그 소리 할 타이밍인가?’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 쌓였던 공포가 스르르 내려갔다.강현우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공간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다.뒤에서 우지원이 조용히 물었다.“이놈들은 어떻게 할까요?”강현우는 대답 없이 자신의 재킷을 벗어 윤하경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걸쳐 주었다.그리고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정리해.”그리고 몇 걸음 옮기던 그가 덧붙였다.“깨끗하게 끝내.”그 말이 끝나자, 방 안의 남자들이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강현우의 품에 안긴 윤하경은 문득 깨달았다.이 남자의 품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걸.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윤하연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현우 씨가 오자마자 도망친 건가...’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는 어느새 차 뒷좌석에 앉혀졌고 강현우가 조수석 쪽에서 타려던 순간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 혹시 구해준 은인이라고 감동이라도 한 거야?”원래는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지만 그의 짓궂은 말투에 윤하경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묶인 거, 좀 풀어줄 수 있어요? 움직이기도 힘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손발을 내려다보다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허, 이런 것도 가능하네? 다음엔 이렇게 놀아볼까?”‘진짜, 이 남자 도무지 모르겠어.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 농담이 나와?’윤하경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다행히도 강현우는 장난처럼 웃다가 결국 묶인 끈을 풀어주었다.자유의 몸이 되자 그녀는 급히
어두운 방.희미한 불빛 아래, 남자들의 눈빛이 들짐승처럼 번뜩였다.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그때, 왜 윤하연까지 같이 끝장내지 않았을까. 임수연 그 여자랑 같이 잡아들였어야 했는데.’하지만 이 세상에 후회 약 따윈 없었다.“윤하경 씨, 그럼 재미를 좀 보자고.”비릿한 웃음과 함께 누군가의 더러운 손길이 그녀의 몸 위를 더듬었고,피부에 닿는 그 촉감은 마치 수천 마리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 소름 끼쳤다.탕!그 순간, 묵직한 총성이 바깥에서 울려 퍼졌다.윤하경 위로 올라타려던 남자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누구야?”쿵, 쿵, 쿵.답 대신, 문이 거칠게 열리며 몇몇 남자들이 쏜살같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들 앞에는 짧고 검은 권총을 들고 선 사내가 있었다. 강현우의 오른팔, 우지원이었다.건달들은 아직도 욕망에 취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었고 순간, 우지원이 쏜 총알이 한 건달의 허벅지를 정통으로 꿰뚫었다.“악!”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당신들 누구야!”절박한 외침에, 문 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되받아쳤다.“누구냐고? 네 주제에 감히, 나한테 그 질문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냐?”목소리는 낮고 서늘했으며 단어 하나하나에 살기가 서려 있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다.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문가에 선 그 사람을 보자마자 참고 있던 눈물이 제멋대로 흘러내렸다.강현우였다.그는 조용히, 그러나 모든 것을 압도하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묵직한 존재감이 공기를 흔들었다. 그의 시선이 윤하경을 스치고 그 뒤로 웅크린 남자들을 향했다.“이거 재밌네?”건달들도 강현우를 알아보고 혼비백산해 땅에 머리를 박았다.“아닙니다! 저희는 대표님의 사람인 줄 모르고...”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그 세력이 어떤지 건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윤하경을 내려다봤다.
윤하연이 다시 돌아온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윤하경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무슨 짓 하려고.”윤하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예쁘지도 상냥하지도 않았고 그저 뒤틀린 증오로 일그러져 있을 뿐이었다.“무슨 짓이냐고?”윤하연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강현우가 남자들을 시켜 날 그렇게 망가뜨렸을 땐, 자기 여자가 내 손에 들어올 거란 건 상상도 못 했겠지?”“뭐?”“날 무시하고 조롱하고, 깔봤지? 넌 뭐가 잘났다고, 이젠 너도 나랑 똑같이 만들어줄게.”윤하연이 뒤를 돌아 외쳤다.“들어와.”문이 열리자, 덩치 큰 남자들이 하나둘 방 안으로 들어섰고 그중 두 명은 아까 윤하경을 쫓던 자들이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윤하경.”“윤하연, 미쳤어? 지금 그만둬도 늦지 않았어. 이건 범죄라고.”“그만둬?”윤하연이 속삭이듯 말했다.“난 혼자 죽지 않아. 내가 겪은 지옥, 어디 너도 한번 겪어봐.”윤하경은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는 걸 알아채고 침착하게 남자들 중 가장 리더처럼 보이는 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지금이라도 멈춰. 너희가 한 일, 지금은 그냥 납치일지 몰라도, 이 선 넘으면 인생 끝장이야. 평생 감옥에서 썩는다고.”그 말에도, 남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윤하경 씨 걱정 마세요.”“우린 일 깨끗하게 처리합니다. 증거? 절대 안 남죠.”“그리고...”그중 하나가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비열하게 웃었다.“이렇게 예쁜 여자면 몇 년 감옥에서 썩어도 충분히 가치 있지.”윤하경이 속으로 욕지거리했다.‘이거 완전 미친놈들이네.’윤하연이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걱정 마. 오늘 여기서 벌어진 일 아무도 모를 거야.”그녀는 돌아서며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내 언니, 잘 부탁해.”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멀어질수록 윤하경의 심장은 더 거세게 뛰었다.“윤하연… 내가 살아 나가면 널 반드시 가만 안 둬.”“살아서 나가고 나서 그런 말 해. 지금은 아
“너희 중 누구라도 날 속인 게 밝혀지면 그 대가, 반드시 치르게 될 거야.”주미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부잣집 사모님으로 살아오며 익힌 우아함 뒤에는 결코 적지 않은 더러운 수단들이 감춰져 있었다.그 위압감에 윤하연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푹 숙였다.잠시 후, 주미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오두막을 나섰고 멀리서 자동차 시동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윤하경, 넌 진짜 사람 인생 망치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어.”발을 쾅 내디딘 윤하연이 돌아서며 이를 갈았다.“왜! 왜 지호 오빠가 너 때문에 다쳤다는 걸 인정 안 해?”윤하경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좀 꺼져줄래? 네 목소리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리니까.”쌓인 감정이 고개를 들었고 윤하경은 더 이상 받아줄 여유조차 없었다.“지금 네가 처한 상황, 진짜 모르고 그러는 거야?”윤하연이 몸을 숙여 윤하경의 턱을 잡아 올렸다.“넌 지금 납치된 거라고.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하지만 윤하경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서? 쓸데없는 말 다 했으면 좀 꺼져. 나, 자야 되니까.”그 무심한 말투에 윤하연의 분노가 폭발했다. 손을 들어 그대로 뺨을 내려치려던 순간, 윤하경의 눈빛이 칼처럼 날카로워졌다.“쳐. 마음껏 쳐보라고. 네가 나한테 어떻게 하든, 그 대가는 네 엄마한테 열 배로 돌아갈 거니까.”“뭐?”윤하연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녀는 낮게 으르렁댔다.“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 한 거야?”윤하경은 희미하게 웃었다.“다 말해줄게. 대신 이거 풀어줘. 그럼 너희 엄마가 지금 어딨는지 알려줄게.”윤하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또 날 속이려는 거지? 이젠 안 속아, 윤하경.”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그래. 그럼 말든가. 어차피 난 피곤하니까, 말 걸지 마.”그 말에 윤하연은 치를 떨며 돌아섰고 쾅 소리를 내며 문을 세게 닫았다.오두막 안.정적 속에 홀로 남겨진 윤하경은 천천히 눈을 떴다.‘강현우 씨
“언니가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에요!”윤하연은 다급히 외쳤고 목소리엔 분노보단 불안이 실려 있었다.“얘는 지호 오빠랑 약혼했을 때부터 강현우랑 이미 그런 사이였어요. 강현우가 그런 짓을 한 것도, 전부 언니 말 듣고 지호 오빠한테 복수하려던 거라고요!”“복수?”윤하경은 비웃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윤하연을 바라보았다.“그럼 말해봐. 내가 뭘 복수하려고 했는데?”윤하연의 입이 덜컥 멈췄다.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떼던 그녀는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팠다.“그, 그거야 내가 지호 오빠한테 사람 시켜서 언니를 강간하라고...”순간, 본인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은 윤하연은 입을 틀어막은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미나를 바라보았다.“계속 말해보지 그래.”윤하경은 차갑게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그럼 지난번에 날 노렸던 게 실패해서, 이번엔 아예 어머님을 이용해 날 무너뜨릴 생각이었던 거야?”“하연아. 너 사람이 할 짓을 해야지. 나한테 누명 씌우기 전에 증거라도 들고 오지 그랬니?”“예를 들면 네 엄마가 바람피웠다는 증거, 나 그거 갖고 있거든. 지호 씨가 저렇게 된 게 내 탓이라면 그에 맞는 증거는 있어?”윤하경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그녀는 지금 도박을 걸고 있었다.주미나가 아직 자신에게 남은 믿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에 전부를 건 것이다.“어머님.”윤하경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말했다.“저를 오랫동안 봐오셨잖아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정말 윤하연 말 하나만 믿고 저를 이렇게까지 대하신다면 저도 더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그녀는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대었고 지친 숨결과 조용한 체념이 그 공간에 퍼졌다.윤하연은 그 태도에 질투와 분노가 폭발했다.“뭐야, 지금 연기하는 거야? 네가 한 짓이잖아! 왜 인정 안 해!”화를 주체하지 못한 윤하연은 그대로 발을 들어 하경을 걷어차려 했다.그 순간, 윤하경의 눈이 번쩍하며 살기 띤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윤하연은 본능적으로 움찔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