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서 구지호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분명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인데 왜 굳이 거짓말을 해서 자신까지 끌어들이는 걸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강현우가 구지호를 잡아 온 이유가 꼭 자신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보다는, 강현우 특유의 자존심과 소유욕 때문이었다. 자신의 것을 절대 다른 사람이 건드리게 놔두지 않는 성격 말이다.그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른 남자가 널 건드리는 거, 난 싫어.” 그리고 어젯밤 강현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본 광경은 구지호가 윤하경 위에 올라타 있었고 윤하경은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 그 장면을 강현우의 시선에서 보면 마치 서로 원해서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을 터였다. 생각할수록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 없지만 진작에 민진혁의 말을 듣고 움직였어야 했다. 그녀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과 이렇게 오래 지냈는데 저보다 구지호 말을 더 믿으시는 거예요?” 하지만 이런 연기는 강현우에게 통하지 않았고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네 말을 믿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윤하경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저는 정말 강제로 끌려갔어요! 약도 구지호가 제게 먹인 거고요!” 그녀는 진심을 담아 손을 들었다. “제가 거짓말하면 하늘에서 벼락을 맞을 거예요!” 정말로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 같아 필사적으로 맹세했다. 하지만 강현우는 태연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너도 알잖아. 난 그런 미신 안 믿어.” 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네가 진짜라면 그만한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그 말을 남기고 강현우는 여유롭게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윤하경은 다급히 따라가며 속으로 절규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이렇게 가다간 정말 목숨이 위험할
윤하경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강한 의지가 남아 있었다. 강현우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입가를 천천히 올렸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아놓고 장난치듯,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느릿하게 손을 풀었다. “네가 아니라니 일단 목숨은 남겨두지.” 그는 여유롭게 소파에 기대며 윤하경을 힐끔 바라봤다. “네가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윤하경은 속으로 몰래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겨우 위기를 넘긴 듯했지만 그녀의 등은 이미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긴장이 풀리는 순간, 뒤늦게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럼, 저는 이제 가볼게요.” 머릿속이 복잡해서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이 자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막 일어서려는 순간, 강현우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겼다. 순간적인 힘에 중심을 잃고 그에게 기대듯 쓰러졌고 뜨거운 체온이 피부에 닿는 순간, 그녀는 재빨리 몸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강현우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놓아주지 않았다. “왜 그렇게 급하게 가려고 해?”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물었다. “다른 일이라도 있으세요?” 평소에는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는데 유독 강현우 앞에서는 항상 긴장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남자를 두려워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감히 구씨 집안의 사람을 잡아다 매달고 감히 이석훈의 팔 하나를 날려버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도, 서울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강현우밖에 없을 것이다. “설마, 나 무서워?” 강현우는 무심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웃자 윤하경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지만 그런 대답을 한 그녀 자신도 믿지 못했다. 강현우는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몸을 뒤로 젖히며 여유로운 자세를 취했다. 방금 전까지 사람을 죽일 듯한 표정을 짓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태도가 달랐다. “구지호를 변호하려
“상처가 더 심해진 것 같네요.”“그렇지. 그래서 네가 책임져야지.”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젯밤에 네가 너무 날뛰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까진 안 됐을 거야.”윤하경은 말없이 입술을 다물었다.‘꼭 그런 말만 골라서 하네, 진짜.’그녀는 어젯밤의 장면들을 일부러 기억에서 밀어내고 있었는데 강현우가 한마디 꺼내는 순간 그 장면들이 우르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말했다.“상처 제대로 안 처리돼서 그런 거예요. 제가 다시 치료해 드릴게요.”강현우는 별다른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고 윤하경은 조용히 구급상자를 꺼내 들었다.상처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피부는 벌어져 있었고 붉게 부어오른 자국들이 보였다. 오랫동안 방치한 흔적이 역력했고 예전부터 있던 흉터들까지 더해져 그의 등이 보는 사람조차 아찔할 정도였다.윤하경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상처를 닦아내고 약을 바른 뒤, 다시 붕대로 감아 마무리했다. 마치 습관처럼 마지막에 가슴팍에 리본을 묶었는데 그 커다란 가슴 근육 위에 작고 정성스러운 리본이 묘하게도 시선을 끌었다.강현우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귀찮은 기색이 스쳤지만 윤하경이 열심히 리본을 묶는 모습을 보고는 그 불만도 서서히 가라앉았다.“됐어요.”윤하경은 손을 털며 미소를 지었다.강현우는 말없이 셔츠를 입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그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윤하경은 재빨리 몸을 돌려 문을 나섰다.복도를 걷던 중, 끝 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비명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은 구지호가 갇혀 있는 방이었다.그 순간, 강현우의 목소리가 문가 쪽에서 들려왔다.“마음이 쓰이면 말해. 네가 한마디 하면 내가 자비 좀 베풀 수도 있지.”고개를 돌린 윤하경은 문가에 기대 서 있는 강현우를 마주했다. 셔츠 단추를 다 채운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녀
윤하경이 윤하연의 방에 도착했을 때, 윤하연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아마도 전날 밤 술을 마시고 온갖 난리를 치느라 지쳤는지, 침대 위에서 돼지처럼 늘어져 자고 있었다.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침묵을 지키다가, 손에 들고 있던 국을 그대로 윤하연의 침대 위로 쏟아버렸다.“아!”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뜨겁진 않지만 식은 국이라도 몸에 닿으면 충분히 따가운 법이다.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의 고통에 윤하연은 침대에서 벌떡 뛰쳐나왔다.몸을 일으킨 그녀는 곧 윤하경이 창가에 서서 태연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두 눈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윤하경! 너 미쳤어?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러는 거야?”윤하경은 윤하연이 평소 흘리는 눈물 연기를 그대로 따라 하듯,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누가 보면 또 나한테 억울한 일 당한 줄 알겠네. 아버지가 우리 보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라고 하셨잖아. 오래 자면 배고플까 봐 직접 국까지 떠서 가져왔는데 아차! 내가 그만 손을 미끄러뜨렸지 뭐야. 실수야, 그런데 네가 왜 이렇게 날 오해하는 거야?”윤하경은 억울한 듯 두 손을 들어 보였지만 윤하연은 이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들으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몸이 따갑고 욱신거리는 고통도 신경 쓸 겨를 없이,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서 뛰쳐나와 윤하경에게 달려들었다.하지만 전날 있었던 일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고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채 덤볐다가 오히려 윤하경에게 쉽게 제압당했다.윤하경은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어, 무릎으로 그녀의 등을 눌러 바닥에 깔아버렸다.“윤하경! 당장 놔! 너 죽여버릴 거야!”윤하연은 온몸을 비틀며 반항했지만 힘이 빠져버린 몸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피부가 얼얼하게 따가운 데다, 혹여나 얼굴에 흉터라도 남게 되면 인생이 망한다는 생각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반드시 윤하경을 없애야 했다.하지만 윤하경은 태연한 얼굴로 그녀의 팔을 뒤로 꺾어 고정한
윤하경은 윤하연을 비웃듯이 쳐다봤다. 역시 상대가 악랄하게 나오면 그에 맞서야 속이 풀리는 법이다.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녀는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유 집사에게 간단한 반찬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하연도 거실로 내려왔고 윤하경의 독이 잔뜩 서린 눈빛을 보내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윤하경, 내 얼굴에 흉터라도 생기면 너 절대 가만 안 둬. 기다려 봐.”말투만 보면 마치 지금까진 자신이 참아준 것처럼 들렸다.윤하경은 가볍게 눈을 굴리며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그녀가 반응조차 하지 않자, 윤하연은 발을 쾅 내디디며 밖으로 나가버렸다.하지만 윤하경은 그녀가 나가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며 마지막으로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조금 더 서둘러. 여긴 상황이 바뀌었어.]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유 집사가 음식을 가져왔다.“하경 씨, 식사하세요.”“고마워요.”윤하경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식사에 집중했다. 사실 아침에 강현우의 집에서 뭘 좀 먹고 싶었지만 그 남자가 또 이상하게 굴어서 제대로 식사할 기회를 놓쳤다.게다가 어젯밤의 ‘운동’에 이어 아침부터 긴장과 감정 소모가 심했으니 속이 비어 있는 게 당연했다.유 집사는 그녀가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이 어두워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경 씨, 방금 전에 하신 일... 혹시라도 회장님이 아시면 어쩌시려고요?”“아시면 뭐요?”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유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걸 알기에 그 따뜻한 마음은 감사했지만 세상은 그렇게 착한 마음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만약 매번 참고 넘어갔다면 지금쯤 그녀의 존재조차 지워졌을 것이다.“그게 아니라, 이따가 하연 씨가 이 일을 회장님께 말하면... 회장님이 또 하경 씨를 나무라실까 봐요.”“그럴 여유가 있을까요?”윤하경은 국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며
“정신이 나갔으면 정신병원에 가. 여기서 미친 짓 하지 말고. 구지호가 어디 갔는지 나한테 묻지 마. 난 몰라.” 윤하경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오히려 윤하연을 더욱 화나게 했다. “분명히 네가 먼저 그 얘길 꺼냈잖아! 너 분명히 알고 있지? 어젯밤 너 또 지호 오빠랑 있었던 거 아니야? 집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씹고 있는데 네가 꾸민 짓이지?” 윤하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진짜 대단하다. 남을 의심하는 능력 하나는 끝내주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알고 있어. 궁금해?” 윤하연은 이를 악물며 다그쳤다. “장난치지 말고 당장 말해! 지호 오빠 어디 있어?!” 윤하경은 천천히 고개를 갸웃하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아, 근데 말이야. 내가 굳이 네가 원하는 걸 그냥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그녀의 느릿한 말투가 윤하연을 더욱 열받게 했다. “그럼 뭘 원해?” 윤하경은 손톱을 매만지며 여유롭게 말했다. “뭘 받을까 고민 중인데... 네가 무릎 꿇고 정중히 부탁하면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윤하경! 적당히 해!” 윤하연이 소리쳤다. 하지만 윤하경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알고 싶으면 무릎 꿇으라고 했잖아. 싫으면 말고. 아, 그리고 가기 전에 내 노트북값부터 보내. 총 600만 원. 계좌 여기야.” 그녀는 계좌 번호를 보여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 윤하연은 치를 떨며 그녀를 노려봤다. 한참을 참았지만 결국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 조건이 뭐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지호 오빠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건데?” 윤하경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봤다. “너한테 받을 만한 게 뭐가 있겠어. 네 물건은 죄다 더러워서 필요 없고.” 그녀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됐어, 그래도 한집에 사는 정이 있으니까 특별히 알려줄게. 어젯밤 지호 오빠가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윤수철은 그녀의 말을 듣고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이전에도 윤하연이 밤마다 몰래 남자를 만났던 일이 떠오른 모양이었다.표정이 어두워진 그를 뒤로하고 윤하경은 가볍게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올라갔다.휴대폰을 확인하니 강현우가 보낸 새 메시지가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아이고 배짱이 제법 커졌네.]‘???’윤하경은 황당한 얼굴로 귀여운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며 답장을 했다.그러자 곧바로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내가 네 비서야? 어떤 쓰레기든 다 나한테 보내서 처리해달라는 거야?]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역시 강현우는 머리가 비상했고 어떤 일이든 다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그녀는 생각을 정리한 후, 침대에 앉아 차분히 메시지를 입력했다.[그럼 수고 좀 해주세요. 굳이 제 체면을 봐서 살살해줄 필요는 없어요.]이번엔 정말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어젯밤 그녀를 끔찍한 일에 말려들게 하려 했던 윤하연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어떻게 응징할까 고민하던 차에, 그녀가 스스로 구지호의 행방을 물으러 온 덕분에 좋은 기회가 생겼다.강현우를 이용하면 확실하고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되니 정말 일거양득이었다.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아주 독하네.]메시지 뒤에 덧붙은 웃는 이모티콘이 묘하게 위압적이었다. 강현우는 짧게 웃으며 꽤 흥미롭다는 듯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곧 방 안을 가득 메운 신음이 그의 기분을 흐트러뜨렸다.“대표님! 제발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제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윤하연이 잔뜩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그녀는 처음엔 구지호를 찾으러 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납치당해 끌려오더니 눈앞엔 피투성이가 된 구지호가 정신을 잃은 채 매달려 있었다.공포에 질린 그녀는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문 앞에 서 있던 강현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켜서지 않았다.강현우는 윤하연이 너무 시끄
윤하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바로 소리쳤다. “거짓말이야! 말도 안 돼!” 하지만 남자는 목을 곧추세우며 끝까지 버텼다. “전부 증거가 있어요. 당신이 보낸 계좌 이체 내역도 있고 문자도 남아 있다고.” 그 말에 윤하연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강현우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전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그러나 이미 우지원이 그녀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냉소를 머금으며 강현우에게 폰을 내밀었다. “대표님, 여기 보세요. 이게 윤하연 씨가 보낸 메시지입니다.” 윤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삭제하려고 했는데 그럴 틈도 없이 들켜버렸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강현우에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대표님, 저... 저를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뭐든 다 할게요. 원하시는 대로요.”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며 문득 비교했다. ‘똑같이 윤씨 집안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클까? 윤하경이 눈물을 흘릴 때는 그 모습조차 매혹적이었는데...’그러다 불현듯 윤하경이 지난번 침대 위에서 흐느끼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그야말로 유혹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하연의 울음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윤하연은 강현우의 반응을 보고 그가 넘어왔다고 착각하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맞아요! 뭐든지 할게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그 말을 듣자 강현우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방 한쪽에 묶여 있는 남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윤씨 가문에서 이미 돈도 지불했으니 약속대로 해야 하지 않겠나?” 남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면... 우리가 윤하경 씨를 찾아서...” 짝! 우지원이 손을 들어 그중 한 남자의
차 안에는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향수 냄새가 감돌고 있었고 이건 강현우의 향수 냄새가 아니었다. 그와 오래 알고 지내면서 윤하경은 그에게서 언제나 같은 향만을 맡아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코를 스치는 향은 완전히 달랐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이건 여자의 향수 냄새임을 알 수 있었다.달콤하면서도 묘하게 유혹적인 향 하지만 너무 달아서 역겨울 정도였다.순간,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강현우를 힐끔 바라보았다.‘아마 이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겠지. 젊고 예쁘고 애교 많고...’그렇게 생각하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고 지나갔다.윤하경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자리로 옮겼다. ‘그러면 내가 앉은 이 자리에, 방금까지 다른 여자가 앉아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강현우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있다가 이 향수를 묻혀 온 걸까?’어느 쪽이든 기분이 몹시 나빴다.이때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윤하경은 이내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저기, 강 대표님. 저 오늘 몸이 좀 안 좋네요. 시간도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뵙는 게 어떨까요?”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변명을 했다.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향수 냄새가 가득한 상태에서 도저히 그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강현우 앞에서 아무리 낮은 자세를 취한다 해도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강현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두운 눈빛이 그녀를 꿰뚫듯이 바라봤다.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고 강현우는 얕게 웃으며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몸이 안 좋다고?”“네.”“어디가?”강현우의 시선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윤하경은 서둘러 적당한 핑계를 떠올렸다.“그게, 그냥...”윤하경은 원래 거짓말을 잘 못했고 특히, 강현우 앞에서는 더더욱 연기를 못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기침을 한 번 하고 나지막이 덧붙였다.“그냥, 그... 매달 오는 그날이에요.”그
‘또?’윤하경은 입술을 삐죽이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며 강현우의 존재조차 잊고 지낼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서 연락이 오니 본능적으로 불안해졌다. 특히, 그와 만날 때마다 보여주는 광적인 집착이 더욱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멍하니 고민하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을 보니 ‘온지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윤하경은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쯧, 우리 윤 부대표님. 요즘 너무 바빠서 본인 성도 잊으신 거 아니야?” 온지우의 익숙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하경은 목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고 지금 농담을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돈, 준비 끝났어. 해외로 한 바퀴 돌리고 왔으니까, 흔적 하나도 안 남았어. 카드 번호 줘. 바로 이체해 줄게.” 윤하경은 살짝 멈칫했다. 그제야 이 중요한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마워.” 윤하경은 짧게 생각한 뒤,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기부해.” 윤하경이 처음에 이 돈을 요구한 것은, 그동안 임수연이 윤씨 가문에서 빼돌린 돈을 토해내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임수연의 손을 거친 돈은 더럽게 느껴졌다.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 돈을 전부 기부하기로 했다. 차라리 좋은 일에 쓰는 것이, 최소한 덕이라도 쌓는 길이었다.온지우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이내 키득거렸다. “와, 통 크네. 손 한 번 휘둘러서 몇십억을 그냥 내놓는다고? 기부자 이름은?” “익명으로.” 온지우는 한껏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역시 부자야. 근데 내 밥값은 잊으면 안 된다?” “네가 장소와 시간 정해서 보내 줘.” 그녀는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고 다시 의자에 기대어 커다란 창밖을 바라보았다. 네온사인이 빛나는 야경이 마치 화려한 외투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누구도 모르는 더러운 진실들이 도사
“윤 회장님의 위임을 받아, 앞으로 저는 인사부와 재무부를 직접 관리하게 됩니다.”윤하경은 단정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윤수철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불만이 동시에 스쳤다.“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그는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윤하경이 오자마자 한빛 그룹의 가장 중요한 두 부서를 장악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그러나 윤하경은 태연하게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유지했다.“윤 회장님, 정말로 그런 말씀을 안 하셨나요?”그녀의 눈빛에는 분명한 경고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잠시 침묵하던 윤수철은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기현수와 계약을 체결할 당시, 부대표가 인사부와 재무부를 담당하게 되어 있다는 조항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그때는 단순한 거래로 받아들였지만 오늘 윤하경의 등장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그는 짧은 침묵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맞아. 내가 깜빡했군.”윤하경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윤 회장님께서 기억하셨다니 다행이네요.”그녀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윤수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마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저 직책상의 것일 뿐인 듯했다.윤수철은 어두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하경은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백정연과 재무부장 주주를 향해 말했다.“지난 1년간의 재무 보고서와 자금 내역을 전부 보내 주세요. 앞으로 당분간은 야근이 좀 많아질지도 모르겠네요.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곧장 회의실을 떠났다.그녀가 나가자, 회의실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윤 회장님한테 딸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강단 있는 분일 줄은 몰랐네요.”“그러게요. 저분, 예전 하 대표님하고 비슷한 느낌이 있어요.”“이제야 우리 회사도 희망이 보이네.”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몰래 윤하연을 쳐다보았고 누가
"같이 해고...”윤하경이 입을 열려는 순간, 윤하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녀의 뒤에는 아까까지 없었던 두 사람이 따라왔다. 바로 이한과 추지운이었다.윤하연은 얼굴을 찌푸리며 회의실로 들어오며 말했다.“겨우 조금 늦었다고 바로 해고라니?”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한 번 훑어보고 표정을 굳혔다.“지금 이의를 제기하는 거야?”윤하연은 주변의 시선을 한 번 훑어보며 입술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그냥 네가 너무 인정사정없는 것 같아서.”“하!”윤하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인정사정없다고?”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내 기억이 맞다면 백 부장님이 이 회의에 대해 한 시간 전에 공지했는데. 그리고 윤 부장의 사무실은 여기서 걸어서 10분 거리잖아. 그런데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어. 이걸 내 권위를 무시하는 거라고 봐도 될까 아니면 윤 부장은 업무 능력도 부족한 데다가, 기본적인 실행력조차 없는 거야?”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직격탄을 맞자, 윤하연의 얼굴이 붉어졌다.“나는...”“조용히 해. 아직 내 말이 안 끝났잖아.”윤하경은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본 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두 분이 이한과 추지운 부장님이죠? 제가 알기로 두 분은 반년 동안 실적이 전혀 없는 상태더군요. 출퇴근 기록을 봐도 지각과 조퇴가 일상인데... 설마 회사의 규정을 못 읽으신 건가요?”이한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그는 이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았다.“저는 이 회사에서 5년 동안 일했습니다. 저를 이렇게 쉽게 해고할 순 없어요.”“웃기시네요.”윤하경은 냉소하며 말했다.“저는 이 회사의 부대표이고 인사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시면 법적으로 해결하세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두 분은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닙니다. 나가 주세요. 우리 회사의 기밀을 더 이상 들을 필요는 없겠죠.”이한과 추지운은 예상치 못한 강경한 태도에 얼어붙었다.지금까지
윤하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백정연은 쉴 새 없이 불평을 쏟아냈다. “걔가 있는 부서는 우리 회사에서 퇴사율 1위야. 부서장이라면서 팀원들 챙기기는커녕... 맨날 네 아빠만 믿고 직원들 실적이나 가로채고 있지. 사람을 아무리 뽑아도 모자랄 지경이라니까. 진짜 지긋지긋해.” 보통 백정연은 회사에서 웬만한 일에는 신경도 안 쓰는 성격이었지만 윤하경 앞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비웃듯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윤 대표 덕분에 다들 싫어하면서도 아무 말 못 하고 있었거든. 이제 네가 왔으니까, 걔도 오래 못 버틸걸?” 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저한테 그렇게 자신 있으세요? 혹시 제가 와서 대충 자리만 차지하고 놀면 어쩌시려고요?” “쯧.” 백정연이 피식 웃었다. “그럴 거였으면 벌써 나한테 이렇게 많은 자료를 요청하지도 않았겠지.” 그녀는 몸을 살짝 뒤로 기울이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 새로 부임한 부대표님께서는 첫 번째 불길을 어디에 지피실 건가요?” 윤하경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모든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녀가 온 이유는 단순히 ‘부대표’라는 직함을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윤씨 가문을 완전히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윤수철이 계속 저렇게 방만하게 운영하다가는 회사 자체가 망가질 것이 뻔했다. “한 시간 후, 회사의 모든 중고위급 직원들에게 회의 공지를 보내 주세요.” 백정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혹시 일부러 회의에 안 오는 사람들은 어쩌려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일부러 제 체면을 깎아내리려는 사람이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안 오면 간단하죠. 즉시 해고 절차를 밟으면 됩니다.” 그녀의 입가에 얕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구든 예외
윤수철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침묵한 후 윤하연을 향해 말했다. “당분간 집에서 푹 쉬어라.” “왜요?” 윤하연은 상처받은 듯한 얼굴로 윤수철을 바라보았다. “설마 언니가 회사에 왔다고 해서 아빠는 저를 보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내가 굳이 말해야겠어? 집에서 몸이나 잘 추슬러라. 하루 종일 회사에 와서 창피한 짓 하지 말고.” 이렇게까지 강한 어조로 말한 건, 아마도 지금까지 윤수철이 윤하연에게 했던 말 중 가장 날카로운 것이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하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빠, 저... 저 정말 어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직도 나한테 거짓말할 거야?” “이미 임 의사한테 다 들었어. 네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소용없어.” 윤수철은 거짓말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윤하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말해. 그놈들 대체 누구야?” 윤하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임 의사가 전부 다 말했을 줄이야... 분명 입단속을 시켜놨었는데.’ 윤하연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더니 결국 모든 책임을 윤하경에게 떠넘기기로 마음먹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 “저... 제가 말할 수 없는 건, 윤씨 가문에 누가 될까 봐서예요. 게다가 저 사람들, 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어요. 그저 언니가 그곳에 가보라고 해서 갔을 뿐인데 누가 알았겠어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윤하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치 세상에서 가장 큰 억울함을 당한 사람처럼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은 반은 진실, 반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윤수철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짜로 하경이가 그렇게 시켰다는 거야?” “만약 아빠가 못 믿겠다면 언니랑 직접 대질신문을 하셔도 좋아요. 그저... 언니가 저를 그렇게까지 미워할 줄은 몰랐어요.” 윤하연은 흐느끼며 촉촉해진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보았고 눈에는 온통
“아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저한테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윤하연은 윤수철이 자신을 편애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설명? 무슨 설명을 원해?” 하지만 화가 너무 난 나머지, 그녀는 윤수철의 얼굴이 이미 굳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다. 평소 아빠 앞에서 연출하던 순종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책상 위에 손을 짚고 계속 따져 물었다. “왜 윤하경이 회사의 부대표가 된 거죠? 그리고 왜 저한테 한마디도 안 해주셨어요? 저도 회사에서 일한 지 오래됐잖아요. 아무리 실적이 없다 해도, 나름 고생한 건 인정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언니가 저보다 유능한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미리 한마디 정도는 해주셨어야죠!” 윤수철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윤하연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특히, 어젯밤 의사가 한 말이 떠오르자 더욱 불편해졌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나는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네가 충격을 받았을까 봐 걱정했는데. 보아하니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군.” 그는 원래 윤하연이 겪은 일을 고려해 당분간 회사에서 쉬게 할까도 생각했다. 충격이 컸을 테니 기분 전환도 할 겸 여행이라도 보내줄까 했는데 이렇게 기운 넘치게 회사까지 찾아와 따지는 걸 보니 그의 배려가 얼마나 쓸데없는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아빠의 말에 윤하연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급히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마치 기운이 빠진 사람처럼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 아무리 힘들어도, 일은 소홀히 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띠며 덧붙였다. “아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제야 윤수철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사실 나도 윤하경이 회사에 올 줄 몰랐어.” “네?” 윤하연은 멍해졌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아빠의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윤수철은 표정을 굳힌 채 먼저 앞장서 걸었다.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 그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딸이 자신의 회사에 입사하는데 정작 본인은 마지막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더군다나, 윤하경이 외부의 힘을 이용해 회사에 들어왔다면 앞으로 그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순간 그녀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한빛 그룹에서 준비한 부대표 취임식은 상당히 성대했다. 마치 작은 연회를 연 듯, 최상층 사무실이 파티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중앙에는 와인 바와 핑거푸드가 놓여 있었고 윤수철이 이 새로운 부대표를 환영하기 위해 꽤 공을 들였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기현수가 단상에 올라 짤막한 인사와 함께 윤하경을 소개하고 마이크를 넘겼다. 윤하경은 자연스럽게 무대 위로 걸어나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여유로웠고 입꼬리는 가볍게 올라갔다. “한빛 그룹에서 일하게 되어 기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다들 오늘 와인 많이 즐기시고요.” 그렇게 짧고 간결한 인사 후, 윤하경은 무대를 내려왔다. 그리고 내려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윤하연은 취임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 사이에서 윤하경을 발견하면서 순간적으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그녀는 곧 옆에 서 있는 기현수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 순간, 윤하연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녀는 시선을 살짝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다가갔다. “아빠.” 그러면서 은근히 기현수에게 쳐다보며 웃었다. 하지만 윤수철은 예상치 못한 방문에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몸도 안 좋은데 왜 나왔어?” “오늘 부대표님 취임식이라면서요? 그래도 우리 회사 부대표님인데 제가 빠지면 좀 그렇잖아요.”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기현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윤하연이라고 합니다. 신임
기현수는 윤하경의 표정을 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왠지 모르게, 지금 그녀의 이 묘한 미소가 강현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떤 일이든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은, 그런 표정이었다.하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그냥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애써 웃었다.“윤 부사장님 말씀대로죠.”그가 아무리 계약서에 이름을 올렸어도, 사실상 그는 그냥 얼굴마담에 불과했다.이 자리는 윤하경을 위한 것이었고 그는 단순히 그녀를 돕는 역할일 뿐이었다.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던 기현수는, 윤하경이 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하는 순간 긴장했다.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시간 됐네요. 이제 가죠.”그렇게 두 사람은 한빛 그룹으로 향했다.한빛 그룹에 도착하자, 윤하경은 건물 곳곳이 새로 단장된 듯한 것을 눈치챘다.깔끔하게 정리된 로비며 반짝거리는 대리석 바닥까지, 아무리 봐도, 오늘을 위해 꽤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아버지가 새로 오는 부대표를 위해 이 정도까지 준비하다니.’윤하경은 속으로 비웃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진짜 재미있는 건 이제부터였다.과연 윤수철이 자신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녀는 기대가 됐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로 눈앞에 윤수철이 서 있었고 그는 손을 내밀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어서 오...”하지만 그의 표정은 단 한 순간에 굳어버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사람이 윤하경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그의 얼굴이 마치 멈춘 듯 경직되었다.“네가 여길 왜 왔어?”목소리에는 분노가 스며들어 있었지만 윤하경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왜긴요? 출근했죠.”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오늘부터 한빛 그룹에서 일하게 됐거든요.”윤수철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내가 직접 너한테 회사 오라고 했을 때는 거절하더니 지금 와서 무슨 속셈이야?”그는 주변에 있던 임원들이 듣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쏘아붙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