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장소에서 이렇게 강현우에게 안긴 채로 있자니 윤하경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강현우가 그녀의 귀에 바짝 다가와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렇지 않아?” “...” 반대편에 서 있던 여자의 시선이 윤하경을 꿰뚫을 듯 강렬했다고 윤하경은 당장이라도 숨고 싶었다. 그녀는 진해리의 사촌 동생이고 집안도 탄탄하고 성격도 안 좋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윤하경은 그녀를 무서워하지는 않았지만 그 애가 꽤 까다로운 상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강현우가 자기 때문에 저 여자를 거절해 버렸다. ‘분명 어디선가 뒤끝을 남기겠지.’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며칠 못 본 사이, 강현우는 또 자기 삶이 너무 평온한 게 싫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비켜줄래?”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으며 윤하경을 끌고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진아린은 떠나는 두 사람을 보며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노려보았고 그녀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강현우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속으로 울분을 삭이고 있는데 옆에서 듣기 좋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멀어졌는데 그만 봐.” 진아린은 고개를 돌려 진해리를 보며 말했다. “언니 현우 씨 눈은 왜 저렇게 낮아?윤하경이 뭐가 그렇게 좋아요? 예전에 구지호랑도 거의 약혼할 뻔했잖아.”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윤하경 같은 사람을, 그녀는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오늘 강현우가 그녀를 위해 자신을 대놓고 거절했다. 진아린은 그걸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진해리는 그런 그녀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윤하경이 외모든 성격이든, 뭐 하나 자기 사촌보다 부족한 게 없었지만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유지한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현우 같은 남자는 네가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강현우는 줄곧 도로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능숙하게 배경빈의 전화를 끊고는 핸드폰을 윤하경에게 던져주었다. 그의 일련의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전화 왜 끊었어요?” 그녀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차는 호텔 앞에 도착해 있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제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기에,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강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사실 오늘은 좀... 불편한 날이에요.” 그러자 강현우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래?” 윤하경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며칠 만에 만났는데 첫 번째 일정이 바로 침대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강현우는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고 시선은 그녀의 아랫배 아래쪽에 멈췄다. 그의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심장이 빨라졌다. “그렇다면 확인해 볼까?”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여기서? 아니면 위에서?”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 윤하경은 평소 눈치 빠른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머릿속이 완전히 멈췄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이미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며 덤덤하게 말했다. “1분 줄게.” 그녀는 이 남자가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윤하경은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니 예전과 같은 방이었고 강현우는 먼저 방에 들어가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두었다. 그녀가 따라 들어서자, 이미 그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상의는 단출하게 검은색 셔츠 하나뿐이었다. 더운지 셔츠의 단추를 세 개나 풀어 놓아, 탄탄한 가슴 근육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아찔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윤하경은 원래 외모를 중요하게 생
분명 강현우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윤하경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저랑 배경빈 씨는 그냥 친구 사이예요.” “그래?” 이건 이미 여러 번 했던 설명이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믿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 남자의 소유욕은 정말 사람이 기가 막힐 정도였다. 강현우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지만 그의 말투는 분명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당연하죠.” 강현우의 깊은 눈동자가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는 부드러운 입술을 덮쳤다. 너무나도 빠른 움직임에 윤하경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윤하경이 반응할 틈도 없이, 강현우는 마치 그녀가 숨을 쉴 수 있는 마지막 공기마저 빼앗겠다는 듯 그녀를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단 한 순간도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 거친 키스였다. 그의 입술이 한 치씩 내려가자, 강현우는 불만스러운 듯 그녀의 허벅지를 감싸 쥐었다. 그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두 다리를 벌린 채 그의 무릎 위에 앉아버렸다. 오늘의 강현우는 유난히 거칠고 참을성이 없었다. 윤하경은 순간 겁이 났다. 입을 열어 ‘먼저 씻고 올게요’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목덜미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원래 작은 통증에도 예민한 편이었다. 금세 두 눈이 촉촉해지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강현우를 올려다봤다. 마치‘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라고 눈으로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강현우는 오히려 비웃듯 피식 웃더니 태연하게 그녀의 코끝을 잡아 장난스럽게 비틀었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그런다고 내가 봐줄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가볍지만 뜻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이러면 오히려 더 힘들어질걸.” 윤하경은 코끝이 찡해지며 약간의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콧김을 내
윤하경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배경빈의 다소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경 씨, 강현우 씨가 데려갔다고 들었어요. 괜찮아요?” 윤하경은 입을 열어 ‘괜찮다’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그 순간, 강현우가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그것도 전보다 훨씬 더 강한 힘으로 이미 멈췄던 동작을 다시 시작했다.“아!” 그녀는 순간적으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놀란 시선으로 강현우를 노려보자, 그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하경은 분노에 찬 눈빛을 보냈지만 그런 반응마저도 강현우는 꽤 즐기는 듯했다. 그는 오히려 더 거칠어졌고 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겨우 참아냈지만 전화기 너머의 배경빈은 이미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하경 씨, 정말 괜찮아요?” 윤하경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괜찮아요.” 그리고 아무렇게나 핑계를 댔다. “방금 실수로 발을 삐끗해서요.” ‘제발, 이 서투른 변명이 통하기를. 제발, 배경빈이 더 이상 물어보지 말기를.’그녀는 속으로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그렇군요.” 다행히도, 배경빈은 쉽게 믿는 듯했다. “하지만 강현우 씨 성격이 워낙 예측하기 어렵잖아요. 혹시라도 도움 필요하면 말하세요.” 그의 목소리는 크고 또렷했다. 당연히, 그 말을 강현우도 듣지 못할 리 없었다. 강현우는 낮게 웃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어두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강현우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에요, 강 대표님은 잘해 주세요. 지금은 바빠서요,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금이라도 더 늦었으면 강현우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전화를 끊자마자, 강현우가 비웃듯 낮게 웃었다. “왜? 배경빈이 우리가 뭐 하고 있는지 아는 게 그렇게 두려워?” 솔직히 말하면 당연히 두려웠지만 상대가 강현우인 만큼, 그렇게 대놓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윤하경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이 남자, 정말 모시기 어렵다.’처음부터 강현우가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그의 호텔 방 문을 두드리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윤하경은 속으로 깊이 한숨을 내쉬며 강현우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애써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현우 씨께서 워낙 바쁘시다 보니 제가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거죠.”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현우는 더 이상 딴지를 걸지 않았다. 강현우는 마침내 그녀를 놓아주고 침대에서 내려가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때야 윤하경은 그의 등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의 등에 남은 상처를 보고 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좀 심한데?’ 이제껏 정신이 없어서 미처 보지 못했지만 지금 자세히 보니 그의 등은 상처투성이였고 거의 참혹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윤하경은 무심결에 손을 뻗어 그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윤하경의 질문에 셔츠를 걸치려던 강현우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 눈빛이 어딘가 위압적이었다. 순간,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손을 거둬들이며 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아차... 내가 괜한 걸 물었나?’ 하지만 강현우는 갑자기 몸을 숙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그의 목소리는 낮고 나른했다. “그리고 다음엔 이런 질문하지 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면 해.” 그 말을 남긴 채, 그는 욕실로 사라졌고 곧 샤워기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너무 경솔했고 이런 남자는 동정받는 걸 싫어하며 설령 그녀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어도 그는 그것조차도 거부할 것이다. 자존심과 자부심이 그걸 용납하지 않겠지. 그럼 이 상처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걸까? 그녀는 의문을 품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너무 잘해서 문제지.’“아까 볼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얼른 가요.” 이대로 더 얘기했다간, 오늘 안에 이 방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강현우는 낮게 웃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그대로 문을 나섰다. 30분 후 강현우는 그녀를 데리고 한 고풍스러운 찻집에 도착했다. 찻집은 언뜻 보기에는 소박한 느낌이었지만 조금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 봐도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곳 인테리어에는 상당한 정성이 들어간 듯했다. 겉과 속 모두 세속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난, 묘한 고요함이 감돌았다. 윤하경은 옆에 서 있는 강현우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그녀가 궁금한 듯 쳐다보았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앞장서 걸었다. “가자.” 그는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갔고 한 프라이빗 룸 앞에서 멈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설마, 저를 여기 데려온 게 그냥 차 마시자고요?” 윤하경은 예상외의 장소에 다소 놀랐다. 강현우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살짝 짜증 섞인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가 차를 우려내려는 순간 옆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수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안심하세요. 한빛 그룹만 다시 숨통이 트이면 대표님이 보유한 주식은 엄청나게 상승할 겁니다. 그냥 앉아서 돈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옆방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윤수철이 집에서 한빛 그룹을 살려줄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주식을 파는 거였나? 그녀의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막 일어서려는 순간 강현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고 그녀는 중심을 잃고 그만 그의 품으로 그대로 떨어졌다. 윤하경을 내려다보는 강현우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뭐가 그렇게 급한데?” 윤하경은 이를 악물며 몸을 빼내려 했지만
기현수는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문 앞에 서 있었다. 윤하경은 누군가 들어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강현우의 팔을 놓았다. 기현수는 괜히 강현우가 윤하경에게 물려 다치는 건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다. 그는 앞으로 나와 계약서를 강현우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대표님, 원하셨던 계약입니다. 이미 모든 서명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윤하경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 사람이 아까 윤수철과 계약을 맺은 사람이라고?’ 순간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듯 이해가 되더니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무시한 채, 기현수를 향해 말했다. “남은 일은 신경 쓰지 마.” “네.” 기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슬쩍 윤하경을 몇 번이나 힐끗 보았다. 속으로 그녀의 대담함에 감탄하며 동시에 그녀의 운도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강현우 앞에서 이렇게 제멋대로 굴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여자는 없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강현우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앉아서 차라도 한잔할래?” 그제야 기현수는 자신이 너무 오래 서 있었음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회사 일이 많아서 이만...!” 그러고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을 빠져나갔다. 문을 나선 후,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윤하경은 계약서를 한 번 보고 강현우를 한 번 보고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동안 정적이 흐른 후, 강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갖고 싶다면서? 안 볼 거야?” 그제야 윤하경은 정신을 차리고 계약서를 들여다보았다. 내용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강현우가 한빛 그룹의 40% 지분을 그것도 아주 공정한 가격에 매입했다. 이 정도면 한빛 그룹의 위기를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며 문이 열렸다. 강현우는 조용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기현수는 한층 더 차가워진 강현우의 눈빛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대표님, 이번에도 강현석 놈 그냥 두실 겁니까? 매번 그냥 놔두시니까 점점 더 대담해지잖아요. 이렇게 가다간 앞으로 더 많은 문제가 생길 겁니다.” 강현우는 말없이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 기현수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강현우의 손으로 향했고 그러자 방금 전까지 몰랐던 상처가 눈에 띄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등에 남은 자국이 점점 더 부어올라 상당히 아파 보였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누가 물었어요?” 그러자 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짧게 답했다. “작은 들고양이.” “근데 이거, 고양이한테 물린 흔적 같진 않은데요? 보통 야생 고양이에게 물리면 더 날카롭고 흐트러진 상처가 남을 텐데...”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우가 무심하게 그를 흘겨보았다. 기현수는 그제야 깨닫고 급히 태도를 바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확실히... 들고양이의 흔적이네요.” 그때,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강현우는 더 이상 불필요한 대화를 하지 않은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람 왔어?” 기현수는 재빨리 표정을 정리하고 보고했다.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곧 도착할 거라고 하네요.” 말이 끝나자마자 기현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기현수는 전화를 받으며 평소처럼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했지만 통화 내용이 들려오는 순간 그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기현수가 곧바로 보고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말을 이었다. “주한석 대표님을 모셔 오던 우리 사람들이 연락이 왔는데 상대 쪽에서
차 안에는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향수 냄새가 감돌고 있었고 이건 강현우의 향수 냄새가 아니었다. 그와 오래 알고 지내면서 윤하경은 그에게서 언제나 같은 향만을 맡아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코를 스치는 향은 완전히 달랐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이건 여자의 향수 냄새임을 알 수 있었다.달콤하면서도 묘하게 유혹적인 향 하지만 너무 달아서 역겨울 정도였다.순간,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강현우를 힐끔 바라보았다.‘아마 이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겠지. 젊고 예쁘고 애교 많고...’그렇게 생각하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고 지나갔다.윤하경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자리로 옮겼다. ‘그러면 내가 앉은 이 자리에, 방금까지 다른 여자가 앉아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강현우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있다가 이 향수를 묻혀 온 걸까?’어느 쪽이든 기분이 몹시 나빴다.이때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윤하경은 이내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저기, 강 대표님. 저 오늘 몸이 좀 안 좋네요. 시간도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뵙는 게 어떨까요?”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변명을 했다.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향수 냄새가 가득한 상태에서 도저히 그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강현우 앞에서 아무리 낮은 자세를 취한다 해도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강현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두운 눈빛이 그녀를 꿰뚫듯이 바라봤다.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고 강현우는 얕게 웃으며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몸이 안 좋다고?”“네.”“어디가?”강현우의 시선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윤하경은 서둘러 적당한 핑계를 떠올렸다.“그게, 그냥...”윤하경은 원래 거짓말을 잘 못했고 특히, 강현우 앞에서는 더더욱 연기를 못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기침을 한 번 하고 나지막이 덧붙였다.“그냥, 그... 매달 오는 그날이에요.”그
‘또?’윤하경은 입술을 삐죽이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며 강현우의 존재조차 잊고 지낼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서 연락이 오니 본능적으로 불안해졌다. 특히, 그와 만날 때마다 보여주는 광적인 집착이 더욱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멍하니 고민하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을 보니 ‘온지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윤하경은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쯧, 우리 윤 부대표님. 요즘 너무 바빠서 본인 성도 잊으신 거 아니야?” 온지우의 익숙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하경은 목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고 지금 농담을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돈, 준비 끝났어. 해외로 한 바퀴 돌리고 왔으니까, 흔적 하나도 안 남았어. 카드 번호 줘. 바로 이체해 줄게.” 윤하경은 살짝 멈칫했다. 그제야 이 중요한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마워.” 윤하경은 짧게 생각한 뒤,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기부해.” 윤하경이 처음에 이 돈을 요구한 것은, 그동안 임수연이 윤씨 가문에서 빼돌린 돈을 토해내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임수연의 손을 거친 돈은 더럽게 느껴졌다.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 돈을 전부 기부하기로 했다. 차라리 좋은 일에 쓰는 것이, 최소한 덕이라도 쌓는 길이었다.온지우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이내 키득거렸다. “와, 통 크네. 손 한 번 휘둘러서 몇십억을 그냥 내놓는다고? 기부자 이름은?” “익명으로.” 온지우는 한껏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역시 부자야. 근데 내 밥값은 잊으면 안 된다?” “네가 장소와 시간 정해서 보내 줘.” 그녀는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고 다시 의자에 기대어 커다란 창밖을 바라보았다. 네온사인이 빛나는 야경이 마치 화려한 외투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누구도 모르는 더러운 진실들이 도사
“윤 회장님의 위임을 받아, 앞으로 저는 인사부와 재무부를 직접 관리하게 됩니다.”윤하경은 단정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윤수철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불만이 동시에 스쳤다.“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그는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윤하경이 오자마자 한빛 그룹의 가장 중요한 두 부서를 장악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그러나 윤하경은 태연하게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유지했다.“윤 회장님, 정말로 그런 말씀을 안 하셨나요?”그녀의 눈빛에는 분명한 경고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잠시 침묵하던 윤수철은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기현수와 계약을 체결할 당시, 부대표가 인사부와 재무부를 담당하게 되어 있다는 조항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그때는 단순한 거래로 받아들였지만 오늘 윤하경의 등장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그는 짧은 침묵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맞아. 내가 깜빡했군.”윤하경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윤 회장님께서 기억하셨다니 다행이네요.”그녀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윤수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마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저 직책상의 것일 뿐인 듯했다.윤수철은 어두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하경은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백정연과 재무부장 주주를 향해 말했다.“지난 1년간의 재무 보고서와 자금 내역을 전부 보내 주세요. 앞으로 당분간은 야근이 좀 많아질지도 모르겠네요.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곧장 회의실을 떠났다.그녀가 나가자, 회의실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윤 회장님한테 딸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강단 있는 분일 줄은 몰랐네요.”“그러게요. 저분, 예전 하 대표님하고 비슷한 느낌이 있어요.”“이제야 우리 회사도 희망이 보이네.”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몰래 윤하연을 쳐다보았고 누가
"같이 해고...”윤하경이 입을 열려는 순간, 윤하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녀의 뒤에는 아까까지 없었던 두 사람이 따라왔다. 바로 이한과 추지운이었다.윤하연은 얼굴을 찌푸리며 회의실로 들어오며 말했다.“겨우 조금 늦었다고 바로 해고라니?”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한 번 훑어보고 표정을 굳혔다.“지금 이의를 제기하는 거야?”윤하연은 주변의 시선을 한 번 훑어보며 입술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그냥 네가 너무 인정사정없는 것 같아서.”“하!”윤하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인정사정없다고?”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내 기억이 맞다면 백 부장님이 이 회의에 대해 한 시간 전에 공지했는데. 그리고 윤 부장의 사무실은 여기서 걸어서 10분 거리잖아. 그런데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어. 이걸 내 권위를 무시하는 거라고 봐도 될까 아니면 윤 부장은 업무 능력도 부족한 데다가, 기본적인 실행력조차 없는 거야?”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직격탄을 맞자, 윤하연의 얼굴이 붉어졌다.“나는...”“조용히 해. 아직 내 말이 안 끝났잖아.”윤하경은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본 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두 분이 이한과 추지운 부장님이죠? 제가 알기로 두 분은 반년 동안 실적이 전혀 없는 상태더군요. 출퇴근 기록을 봐도 지각과 조퇴가 일상인데... 설마 회사의 규정을 못 읽으신 건가요?”이한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그는 이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았다.“저는 이 회사에서 5년 동안 일했습니다. 저를 이렇게 쉽게 해고할 순 없어요.”“웃기시네요.”윤하경은 냉소하며 말했다.“저는 이 회사의 부대표이고 인사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시면 법적으로 해결하세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두 분은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닙니다. 나가 주세요. 우리 회사의 기밀을 더 이상 들을 필요는 없겠죠.”이한과 추지운은 예상치 못한 강경한 태도에 얼어붙었다.지금까지
윤하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백정연은 쉴 새 없이 불평을 쏟아냈다. “걔가 있는 부서는 우리 회사에서 퇴사율 1위야. 부서장이라면서 팀원들 챙기기는커녕... 맨날 네 아빠만 믿고 직원들 실적이나 가로채고 있지. 사람을 아무리 뽑아도 모자랄 지경이라니까. 진짜 지긋지긋해.” 보통 백정연은 회사에서 웬만한 일에는 신경도 안 쓰는 성격이었지만 윤하경 앞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비웃듯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윤 대표 덕분에 다들 싫어하면서도 아무 말 못 하고 있었거든. 이제 네가 왔으니까, 걔도 오래 못 버틸걸?” 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저한테 그렇게 자신 있으세요? 혹시 제가 와서 대충 자리만 차지하고 놀면 어쩌시려고요?” “쯧.” 백정연이 피식 웃었다. “그럴 거였으면 벌써 나한테 이렇게 많은 자료를 요청하지도 않았겠지.” 그녀는 몸을 살짝 뒤로 기울이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 새로 부임한 부대표님께서는 첫 번째 불길을 어디에 지피실 건가요?” 윤하경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모든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녀가 온 이유는 단순히 ‘부대표’라는 직함을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윤씨 가문을 완전히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윤수철이 계속 저렇게 방만하게 운영하다가는 회사 자체가 망가질 것이 뻔했다. “한 시간 후, 회사의 모든 중고위급 직원들에게 회의 공지를 보내 주세요.” 백정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혹시 일부러 회의에 안 오는 사람들은 어쩌려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일부러 제 체면을 깎아내리려는 사람이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안 오면 간단하죠. 즉시 해고 절차를 밟으면 됩니다.” 그녀의 입가에 얕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구든 예외
윤수철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침묵한 후 윤하연을 향해 말했다. “당분간 집에서 푹 쉬어라.” “왜요?” 윤하연은 상처받은 듯한 얼굴로 윤수철을 바라보았다. “설마 언니가 회사에 왔다고 해서 아빠는 저를 보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내가 굳이 말해야겠어? 집에서 몸이나 잘 추슬러라. 하루 종일 회사에 와서 창피한 짓 하지 말고.” 이렇게까지 강한 어조로 말한 건, 아마도 지금까지 윤수철이 윤하연에게 했던 말 중 가장 날카로운 것이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하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빠, 저... 저 정말 어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직도 나한테 거짓말할 거야?” “이미 임 의사한테 다 들었어. 네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소용없어.” 윤수철은 거짓말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윤하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말해. 그놈들 대체 누구야?” 윤하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임 의사가 전부 다 말했을 줄이야... 분명 입단속을 시켜놨었는데.’ 윤하연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더니 결국 모든 책임을 윤하경에게 떠넘기기로 마음먹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 “저... 제가 말할 수 없는 건, 윤씨 가문에 누가 될까 봐서예요. 게다가 저 사람들, 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어요. 그저 언니가 그곳에 가보라고 해서 갔을 뿐인데 누가 알았겠어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윤하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치 세상에서 가장 큰 억울함을 당한 사람처럼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은 반은 진실, 반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윤수철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짜로 하경이가 그렇게 시켰다는 거야?” “만약 아빠가 못 믿겠다면 언니랑 직접 대질신문을 하셔도 좋아요. 그저... 언니가 저를 그렇게까지 미워할 줄은 몰랐어요.” 윤하연은 흐느끼며 촉촉해진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보았고 눈에는 온통
“아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저한테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윤하연은 윤수철이 자신을 편애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설명? 무슨 설명을 원해?” 하지만 화가 너무 난 나머지, 그녀는 윤수철의 얼굴이 이미 굳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다. 평소 아빠 앞에서 연출하던 순종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책상 위에 손을 짚고 계속 따져 물었다. “왜 윤하경이 회사의 부대표가 된 거죠? 그리고 왜 저한테 한마디도 안 해주셨어요? 저도 회사에서 일한 지 오래됐잖아요. 아무리 실적이 없다 해도, 나름 고생한 건 인정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언니가 저보다 유능한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미리 한마디 정도는 해주셨어야죠!” 윤수철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윤하연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특히, 어젯밤 의사가 한 말이 떠오르자 더욱 불편해졌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나는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네가 충격을 받았을까 봐 걱정했는데. 보아하니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군.” 그는 원래 윤하연이 겪은 일을 고려해 당분간 회사에서 쉬게 할까도 생각했다. 충격이 컸을 테니 기분 전환도 할 겸 여행이라도 보내줄까 했는데 이렇게 기운 넘치게 회사까지 찾아와 따지는 걸 보니 그의 배려가 얼마나 쓸데없는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아빠의 말에 윤하연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급히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마치 기운이 빠진 사람처럼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 아무리 힘들어도, 일은 소홀히 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띠며 덧붙였다. “아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제야 윤수철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사실 나도 윤하경이 회사에 올 줄 몰랐어.” “네?” 윤하연은 멍해졌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아빠의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윤수철은 표정을 굳힌 채 먼저 앞장서 걸었다.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 그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딸이 자신의 회사에 입사하는데 정작 본인은 마지막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더군다나, 윤하경이 외부의 힘을 이용해 회사에 들어왔다면 앞으로 그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순간 그녀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한빛 그룹에서 준비한 부대표 취임식은 상당히 성대했다. 마치 작은 연회를 연 듯, 최상층 사무실이 파티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중앙에는 와인 바와 핑거푸드가 놓여 있었고 윤수철이 이 새로운 부대표를 환영하기 위해 꽤 공을 들였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기현수가 단상에 올라 짤막한 인사와 함께 윤하경을 소개하고 마이크를 넘겼다. 윤하경은 자연스럽게 무대 위로 걸어나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여유로웠고 입꼬리는 가볍게 올라갔다. “한빛 그룹에서 일하게 되어 기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다들 오늘 와인 많이 즐기시고요.” 그렇게 짧고 간결한 인사 후, 윤하경은 무대를 내려왔다. 그리고 내려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윤하연은 취임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 사이에서 윤하경을 발견하면서 순간적으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그녀는 곧 옆에 서 있는 기현수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 순간, 윤하연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녀는 시선을 살짝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다가갔다. “아빠.” 그러면서 은근히 기현수에게 쳐다보며 웃었다. 하지만 윤수철은 예상치 못한 방문에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몸도 안 좋은데 왜 나왔어?” “오늘 부대표님 취임식이라면서요? 그래도 우리 회사 부대표님인데 제가 빠지면 좀 그렇잖아요.”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기현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윤하연이라고 합니다. 신임
기현수는 윤하경의 표정을 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왠지 모르게, 지금 그녀의 이 묘한 미소가 강현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떤 일이든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은, 그런 표정이었다.하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그냥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애써 웃었다.“윤 부사장님 말씀대로죠.”그가 아무리 계약서에 이름을 올렸어도, 사실상 그는 그냥 얼굴마담에 불과했다.이 자리는 윤하경을 위한 것이었고 그는 단순히 그녀를 돕는 역할일 뿐이었다.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던 기현수는, 윤하경이 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하는 순간 긴장했다.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시간 됐네요. 이제 가죠.”그렇게 두 사람은 한빛 그룹으로 향했다.한빛 그룹에 도착하자, 윤하경은 건물 곳곳이 새로 단장된 듯한 것을 눈치챘다.깔끔하게 정리된 로비며 반짝거리는 대리석 바닥까지, 아무리 봐도, 오늘을 위해 꽤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아버지가 새로 오는 부대표를 위해 이 정도까지 준비하다니.’윤하경은 속으로 비웃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진짜 재미있는 건 이제부터였다.과연 윤수철이 자신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녀는 기대가 됐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로 눈앞에 윤수철이 서 있었고 그는 손을 내밀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어서 오...”하지만 그의 표정은 단 한 순간에 굳어버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사람이 윤하경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그의 얼굴이 마치 멈춘 듯 경직되었다.“네가 여길 왜 왔어?”목소리에는 분노가 스며들어 있었지만 윤하경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왜긴요? 출근했죠.”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오늘부터 한빛 그룹에서 일하게 됐거든요.”윤수철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내가 직접 너한테 회사 오라고 했을 때는 거절하더니 지금 와서 무슨 속셈이야?”그는 주변에 있던 임원들이 듣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쏘아붙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