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강현우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윤하경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저랑 배경빈 씨는 그냥 친구 사이예요.” “그래?” 이건 이미 여러 번 했던 설명이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믿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 남자의 소유욕은 정말 사람이 기가 막힐 정도였다. 강현우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지만 그의 말투는 분명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당연하죠.” 강현우의 깊은 눈동자가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는 부드러운 입술을 덮쳤다. 너무나도 빠른 움직임에 윤하경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윤하경이 반응할 틈도 없이, 강현우는 마치 그녀가 숨을 쉴 수 있는 마지막 공기마저 빼앗겠다는 듯 그녀를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단 한 순간도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 거친 키스였다. 그의 입술이 한 치씩 내려가자, 강현우는 불만스러운 듯 그녀의 허벅지를 감싸 쥐었다. 그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두 다리를 벌린 채 그의 무릎 위에 앉아버렸다. 오늘의 강현우는 유난히 거칠고 참을성이 없었다. 윤하경은 순간 겁이 났다. 입을 열어 ‘먼저 씻고 올게요’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목덜미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원래 작은 통증에도 예민한 편이었다. 금세 두 눈이 촉촉해지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강현우를 올려다봤다. 마치‘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라고 눈으로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강현우는 오히려 비웃듯 피식 웃더니 태연하게 그녀의 코끝을 잡아 장난스럽게 비틀었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그런다고 내가 봐줄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가볍지만 뜻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이러면 오히려 더 힘들어질걸.” 윤하경은 코끝이 찡해지며 약간의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콧김을 내
윤하경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배경빈의 다소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경 씨, 강현우 씨가 데려갔다고 들었어요. 괜찮아요?” 윤하경은 입을 열어 ‘괜찮다’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그 순간, 강현우가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그것도 전보다 훨씬 더 강한 힘으로 이미 멈췄던 동작을 다시 시작했다.“아!” 그녀는 순간적으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놀란 시선으로 강현우를 노려보자, 그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하경은 분노에 찬 눈빛을 보냈지만 그런 반응마저도 강현우는 꽤 즐기는 듯했다. 그는 오히려 더 거칠어졌고 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겨우 참아냈지만 전화기 너머의 배경빈은 이미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하경 씨, 정말 괜찮아요?” 윤하경은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괜찮아요.” 그리고 아무렇게나 핑계를 댔다. “방금 실수로 발을 삐끗해서요.” ‘제발, 이 서투른 변명이 통하기를. 제발, 배경빈이 더 이상 물어보지 말기를.’그녀는 속으로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그렇군요.” 다행히도, 배경빈은 쉽게 믿는 듯했다. “하지만 강현우 씨 성격이 워낙 예측하기 어렵잖아요. 혹시라도 도움 필요하면 말하세요.” 그의 목소리는 크고 또렷했다. 당연히, 그 말을 강현우도 듣지 못할 리 없었다. 강현우는 낮게 웃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어두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강현우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에요, 강 대표님은 잘해 주세요. 지금은 바빠서요,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금이라도 더 늦었으면 강현우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전화를 끊자마자, 강현우가 비웃듯 낮게 웃었다. “왜? 배경빈이 우리가 뭐 하고 있는지 아는 게 그렇게 두려워?” 솔직히 말하면 당연히 두려웠지만 상대가 강현우인 만큼, 그렇게 대놓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윤하경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이 남자, 정말 모시기 어렵다.’처음부터 강현우가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그의 호텔 방 문을 두드리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윤하경은 속으로 깊이 한숨을 내쉬며 강현우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애써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현우 씨께서 워낙 바쁘시다 보니 제가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거죠.”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현우는 더 이상 딴지를 걸지 않았다. 강현우는 마침내 그녀를 놓아주고 침대에서 내려가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때야 윤하경은 그의 등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의 등에 남은 상처를 보고 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좀 심한데?’ 이제껏 정신이 없어서 미처 보지 못했지만 지금 자세히 보니 그의 등은 상처투성이였고 거의 참혹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윤하경은 무심결에 손을 뻗어 그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윤하경의 질문에 셔츠를 걸치려던 강현우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 눈빛이 어딘가 위압적이었다. 순간,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손을 거둬들이며 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아차... 내가 괜한 걸 물었나?’ 하지만 강현우는 갑자기 몸을 숙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그의 목소리는 낮고 나른했다. “그리고 다음엔 이런 질문하지 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면 해.” 그 말을 남긴 채, 그는 욕실로 사라졌고 곧 샤워기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너무 경솔했고 이런 남자는 동정받는 걸 싫어하며 설령 그녀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어도 그는 그것조차도 거부할 것이다. 자존심과 자부심이 그걸 용납하지 않겠지. 그럼 이 상처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걸까? 그녀는 의문을 품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너무 잘해서 문제지.’“아까 볼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얼른 가요.” 이대로 더 얘기했다간, 오늘 안에 이 방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강현우는 낮게 웃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그대로 문을 나섰다. 30분 후 강현우는 그녀를 데리고 한 고풍스러운 찻집에 도착했다. 찻집은 언뜻 보기에는 소박한 느낌이었지만 조금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 봐도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곳 인테리어에는 상당한 정성이 들어간 듯했다. 겉과 속 모두 세속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난, 묘한 고요함이 감돌았다. 윤하경은 옆에 서 있는 강현우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그녀가 궁금한 듯 쳐다보았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앞장서 걸었다. “가자.” 그는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갔고 한 프라이빗 룸 앞에서 멈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설마, 저를 여기 데려온 게 그냥 차 마시자고요?” 윤하경은 예상외의 장소에 다소 놀랐다. 강현우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살짝 짜증 섞인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가 차를 우려내려는 순간 옆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수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안심하세요. 한빛 그룹만 다시 숨통이 트이면 대표님이 보유한 주식은 엄청나게 상승할 겁니다. 그냥 앉아서 돈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옆방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윤수철이 집에서 한빛 그룹을 살려줄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주식을 파는 거였나? 그녀의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막 일어서려는 순간 강현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고 그녀는 중심을 잃고 그만 그의 품으로 그대로 떨어졌다. 윤하경을 내려다보는 강현우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뭐가 그렇게 급한데?” 윤하경은 이를 악물며 몸을 빼내려 했지만
기현수는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문 앞에 서 있었다. 윤하경은 누군가 들어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강현우의 팔을 놓았다. 기현수는 괜히 강현우가 윤하경에게 물려 다치는 건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다. 그는 앞으로 나와 계약서를 강현우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대표님, 원하셨던 계약입니다. 이미 모든 서명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윤하경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 사람이 아까 윤수철과 계약을 맺은 사람이라고?’ 순간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듯 이해가 되더니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무시한 채, 기현수를 향해 말했다. “남은 일은 신경 쓰지 마.” “네.” 기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슬쩍 윤하경을 몇 번이나 힐끗 보았다. 속으로 그녀의 대담함에 감탄하며 동시에 그녀의 운도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강현우 앞에서 이렇게 제멋대로 굴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여자는 없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강현우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앉아서 차라도 한잔할래?” 그제야 기현수는 자신이 너무 오래 서 있었음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회사 일이 많아서 이만...!” 그러고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을 빠져나갔다. 문을 나선 후,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윤하경은 계약서를 한 번 보고 강현우를 한 번 보고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동안 정적이 흐른 후, 강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갖고 싶다면서? 안 볼 거야?” 그제야 윤하경은 정신을 차리고 계약서를 들여다보았다. 내용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강현우가 한빛 그룹의 40% 지분을 그것도 아주 공정한 가격에 매입했다. 이 정도면 한빛 그룹의 위기를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며 문이 열렸다. 강현우는 조용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기현수는 한층 더 차가워진 강현우의 눈빛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대표님, 이번에도 강현석 놈 그냥 두실 겁니까? 매번 그냥 놔두시니까 점점 더 대담해지잖아요. 이렇게 가다간 앞으로 더 많은 문제가 생길 겁니다.” 강현우는 말없이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 기현수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강현우의 손으로 향했고 그러자 방금 전까지 몰랐던 상처가 눈에 띄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등에 남은 자국이 점점 더 부어올라 상당히 아파 보였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누가 물었어요?” 그러자 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짧게 답했다. “작은 들고양이.” “근데 이거, 고양이한테 물린 흔적 같진 않은데요? 보통 야생 고양이에게 물리면 더 날카롭고 흐트러진 상처가 남을 텐데...”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우가 무심하게 그를 흘겨보았다. 기현수는 그제야 깨닫고 급히 태도를 바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확실히... 들고양이의 흔적이네요.” 그때,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강현우는 더 이상 불필요한 대화를 하지 않은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람 왔어?” 기현수는 재빨리 표정을 정리하고 보고했다.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곧 도착할 거라고 하네요.” 말이 끝나자마자 기현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기현수는 전화를 받으며 평소처럼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했지만 통화 내용이 들려오는 순간 그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기현수가 곧바로 보고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말을 이었다. “주한석 대표님을 모셔 오던 우리 사람들이 연락이 왔는데 상대 쪽에서
이 장면을 목격하고 나니 윤하경도 조금은 어색해졌다. 하지만 법적으로 부부인 두 사람이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보아하니 오늘 윤수철의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윤하경은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씩 웃었다. “월요일에 한빛 그룹에서 날 보면 그래도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그녀는 속으로 비웃으며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아버렸다. 너무 강하게 닫힌 탓에, 아마 아래층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서재 안에서 몸을 움직이던 윤수철은 순간 움찔하며 멈췄고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임수연은 방금 문을 닫고 들어간 사람이 윤하경이라는 걸 알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윤수철의 목에 매달려 애교를 부렸다. “여보, 이제 한빛 그룹 문제도 해결됐으니 전에 약속한 거 지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약속?“ 윤수철은 순간 무슨 말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듯했고 흥이 다 식은 듯한 얼굴로 하나씩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그러자 임수연은 입술을 삐죽이며 그의 손을 다시 붙잡고 옷을 벗기려 들었다. “그거요!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그 집을 하경이 명의로 넘기고 하연이한테는 새집을 사주겠다고요. 하경이는 이미 집이 있는데 하연이는 없잖아요. 그렇게 불공평하면 안 되죠?“ 그녀는 마치 윤하연이가 윤하경과 같은 걸 가지지 못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이라도 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연기를 윤수철은 너무나도 잘 먹혔다. 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동안 너랑 하연이 고생 많았지.” 임수연은 곧바로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목에 달라붙어 뽀뽀를 퍼부었다. “그럼 집 사주는 거 맞죠?“ “그래, 사줄게.” 그 말이 떨어지자, 임수연은 입꼬리를 더욱 올리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는 윤수철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리며 조금 더 욕심을 부렸다. “그리고 말이에요, 하연이가 지금 그 자리에서 일한 지도 꽤 오래됐잖아요? 슬슬 자리 좀
“하...” 임수연은 이를 살짝 깨물며 속이 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눈빛에는 억울함과 불만이 가득했다. 그러다 이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한편, 윤하경은 방 안의 책상에 앉아 백정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회사 인사 자료랑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 자료 보내줘요.]백정연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고 메시지에는 연달아 놀란 이모티콘이 찍혀 있었다. [하경아, 드디어 회사에 나올 생각이야?] [월요일에 깜짝선물 하나 줄게요.] 그녀는 자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았지만 백정연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현재 한빛 그룹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백정연뿐이었으니 굳이 감출 필요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정연이 요청한 자료를 모두 보내왔다. 윤하경은 언제나 일에 있어서 만큼은 철저한 성격이었다. 비록 지금까지 한빛 그룹의 경영에 깊이 관여한 적은 없지만 사업의 기본 원리는 어디서든 통하는 법. 그녀는 이미 자신의 작은 회사를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료를 분석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회사로 들어가기 전에 현재 한빛 그룹의 내부 상황을 확실히 파악해 두는 게 우선이었다. 백정연은 꼼꼼한 성격답게 단순히 자료만 보낸 게 아니라 각 인물들이 속한 계파까지 정리해 둔 덕분에 윤하경은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그렇게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유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경 씨, 저녁 드세요.” “네.” 그녀는 목을 돌려 굳어 있던 근육을 풀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에는 이미 세 사람이 앉아 있었고 윤수철은 벌써 식사를 시작한 상태였다. 그녀가 내려오자 임수연이 눈을 들어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경아, 오후 내내 방에서 쉬었으니 이제 좀 개운하겠네?” 윤하경은 피곤하다는 듯 눈을 굴리며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조용히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임수연은 그런 그녀의
“너 대체 우리 윤씨 가문을 온 경성의 웃음거리로 만들 셈이냐?”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손이 허공을 가르며 윤하경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 하지만 윤하경은 이미 익숙한 듯 가볍게 몸을 틀어 피했고 대신 그녀의 손이 뻗어 윤하연을 거칠게 끌어당겼고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크게 휘둘렀다. “아버지가 묻고 계셔. 넌 윤씨 가문이 경성의 화제가 되길 바라는 거야?” 윤하연은 손바닥이 얼굴에 닿는 순간 충격에 얼어붙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윤수철 또한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화를 터뜨렸다. “내가 너한테 말한 거야!” 그러나 윤하경은 콧방귀를 뀌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니 참 이상하네요? 집안이 창피해지는 게 싫다면 몸을 이렇게 만든 딸이 창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히려 그에 대해 따지고 드는 저를 창피해하시는 거 보면 혹시라도 아빠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건 아니겠죠?”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윤수철의 얼굴을 훑었다. “확실히 검사 한 번 받아보시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윤수철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윤하경의 말에는 반박할 틈이 없었어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유 집사, 당장 이 아이를 방으로 데려가!” 그동안 조용히 지켜보던 유 집사가 황급히 나섰다. “하경 씨, 이제 그만 올라가서 쉬세요. 밤이 늦었잖아요.” 윤하경은 굳이 더 붙잡고 싸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가볍게 혀를 차며 뒤돌아서는 순간, 뭔가 미련이 남은 듯 되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싸워볼 의지가 가득했다. 그러나 유 집사의 강한 손길에 이끌려 억지로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윤수철과 윤하연만 남았다. 윤하연은 뺨이 화끈거렸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윤수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아빠...” 윤수철은 길게 숨을 내쉬며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한참을 침묵한 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밤 이 일에 대해 누구든 밖에 나가 입을 놀리면 그땐 봐주지 않겠다.” 그의 목소리는 냉정하고 강압적이었고 잠시나마 ‘집안의 가장’다운 위엄이 느껴졌다. 그러나 윤하경은 속으로 비웃었다. “하연이를 방으로 데려가.” 그리고 다시 윤하경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너는 따라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 윤하경은 느긋하게 하품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빠, 여기서 말하면 안 돼요? 한밤중에 굳이 서재까지 갈 필요 있나요? 내일 회사 출근해야 해서 피곤하거든요.” 그러나 윤수철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서재로 와.”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고 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서재 문을 열었더니 윤수철은 이미 걸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어둑한 조명 아래서 더욱 깊어진 주름과 어두운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윤하경은 별로 개의치 않고 소파에 털썩 앉았고 강현우와의 일로 지친 그녀는 다시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빠, 무슨 이야기든 빨리 해요. 저 지금 너무 피곤하거든요.” 그녀가 말하는 태도에 윤수철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하연이가 오늘 이런 꼴을 당한 거, 너랑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어?”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 저녁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발짝도 밖에 나간 적이 없어요. 하연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저도 궁금하네요. 아까 그녀가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이 모든 건 원래 네가 당해야 할 일이었다’라고 하더라고요.” 윤하경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끝에 묻어나는 차가운 기운은 숨길 수 없었다. “아빠, 저한테 이게 무슨 의미인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그녀의 말에 윤수철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 역시 윤하연이 어리석고 경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입술을 굳게
윤하경은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고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오며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입을 가리며 일부러 하품을 하곤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 한밤중에 왜 이렇게 시끄러워. 사람이 자야 살지.” 갓 잠에서 깬 듯한 살짝 갈라진 목소리.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며 거실을 본 순간, 윤하경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거실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유 집사와 다른 가정부들도 다 깨서 거실에 모여 있었고 윤수철 역시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중심에 서는 완전히 망가진 윤하연 있었다. 옷은 찢겨 제대로 몸을 가리지도 못했고 여기저기 남은 상처들이 말해주듯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대로만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강현우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걸어 내려가며 일부러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연아,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들어오는 것도 이상한데 대체 무슨 꼴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적당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담고 있었지만 그런 태도가 윤하연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그녀는 힘없이 서 있었지만 눈빛만은 증오로 이글거렸다. “윤하경... 너지? 이거 다 네가 한 짓이지?” 윤하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천진난만하게 되물었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또 시치미 떼네!” 윤하연은 미칠 듯이 화가 나 있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떠올릴수록, 윤하경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이거 전부 원래 네가 당해야 할 일이었어!” 그 말에 윤하경은 일부러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슬쩍 윤수철 쪽을 힐끔 보며 코끝을 찡긋했다. “하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네가 나를 싫어하는 거야 알지만... 네가 겪은 일은 안타까운 일이야. 그렇다고 나한테 함부로 원망하는 건 좀 아니지 않니?” 그녀의 연기
윤하연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바로 소리쳤다. “거짓말이야! 말도 안 돼!” 하지만 남자는 목을 곧추세우며 끝까지 버텼다. “전부 증거가 있어요. 당신이 보낸 계좌 이체 내역도 있고 문자도 남아 있다고.” 그 말에 윤하연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강현우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전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그러나 이미 우지원이 그녀의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냉소를 머금으며 강현우에게 폰을 내밀었다. “대표님, 여기 보세요. 이게 윤하연 씨가 보낸 메시지입니다.” 윤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삭제하려고 했는데 그럴 틈도 없이 들켜버렸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강현우에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대표님, 저... 저를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뭐든 다 할게요. 원하시는 대로요.”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강현우는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며 문득 비교했다. ‘똑같이 윤씨 집안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클까? 윤하경이 눈물을 흘릴 때는 그 모습조차 매혹적이었는데...’그러다 불현듯 윤하경이 지난번 침대 위에서 흐느끼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그야말로 유혹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하연의 울음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윤하연은 강현우의 반응을 보고 그가 넘어왔다고 착각하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네, 맞아요! 뭐든지 할게요.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그 말을 듣자 강현우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방 한쪽에 묶여 있는 남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윤씨 가문에서 이미 돈도 지불했으니 약속대로 해야 하지 않겠나?” 남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면... 우리가 윤하경 씨를 찾아서...” 짝! 우지원이 손을 들어 그중 한 남자의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윤수철은 그녀의 말을 듣고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이전에도 윤하연이 밤마다 몰래 남자를 만났던 일이 떠오른 모양이었다.표정이 어두워진 그를 뒤로하고 윤하경은 가볍게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올라갔다.휴대폰을 확인하니 강현우가 보낸 새 메시지가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아이고 배짱이 제법 커졌네.]‘???’윤하경은 황당한 얼굴로 귀여운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며 답장을 했다.그러자 곧바로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내가 네 비서야? 어떤 쓰레기든 다 나한테 보내서 처리해달라는 거야?]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역시 강현우는 머리가 비상했고 어떤 일이든 다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그녀는 생각을 정리한 후, 침대에 앉아 차분히 메시지를 입력했다.[그럼 수고 좀 해주세요. 굳이 제 체면을 봐서 살살해줄 필요는 없어요.]이번엔 정말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어젯밤 그녀를 끔찍한 일에 말려들게 하려 했던 윤하연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어떻게 응징할까 고민하던 차에, 그녀가 스스로 구지호의 행방을 물으러 온 덕분에 좋은 기회가 생겼다.강현우를 이용하면 확실하고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되니 정말 일거양득이었다.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아주 독하네.]메시지 뒤에 덧붙은 웃는 이모티콘이 묘하게 위압적이었다. 강현우는 짧게 웃으며 꽤 흥미롭다는 듯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곧 방 안을 가득 메운 신음이 그의 기분을 흐트러뜨렸다.“대표님! 제발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제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윤하연이 잔뜩 겁에 질려 울고 있었다.그녀는 처음엔 구지호를 찾으러 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납치당해 끌려오더니 눈앞엔 피투성이가 된 구지호가 정신을 잃은 채 매달려 있었다.공포에 질린 그녀는 본능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문 앞에 서 있던 강현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켜서지 않았다.강현우는 윤하연이 너무 시끄
“정신이 나갔으면 정신병원에 가. 여기서 미친 짓 하지 말고. 구지호가 어디 갔는지 나한테 묻지 마. 난 몰라.” 윤하경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오히려 윤하연을 더욱 화나게 했다. “분명히 네가 먼저 그 얘길 꺼냈잖아! 너 분명히 알고 있지? 어젯밤 너 또 지호 오빠랑 있었던 거 아니야? 집에도 없고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씹고 있는데 네가 꾸민 짓이지?” 윤하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진짜 대단하다. 남을 의심하는 능력 하나는 끝내주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알고 있어. 궁금해?” 윤하연은 이를 악물며 다그쳤다. “장난치지 말고 당장 말해! 지호 오빠 어디 있어?!” 윤하경은 천천히 고개를 갸웃하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아, 근데 말이야. 내가 굳이 네가 원하는 걸 그냥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그녀의 느릿한 말투가 윤하연을 더욱 열받게 했다. “그럼 뭘 원해?” 윤하경은 손톱을 매만지며 여유롭게 말했다. “뭘 받을까 고민 중인데... 네가 무릎 꿇고 정중히 부탁하면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윤하경! 적당히 해!” 윤하연이 소리쳤다. 하지만 윤하경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알고 싶으면 무릎 꿇으라고 했잖아. 싫으면 말고. 아, 그리고 가기 전에 내 노트북값부터 보내. 총 600만 원. 계좌 여기야.” 그녀는 계좌 번호를 보여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 윤하연은 치를 떨며 그녀를 노려봤다. 한참을 참았지만 결국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 조건이 뭐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지호 오빠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건데?” 윤하경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봤다. “너한테 받을 만한 게 뭐가 있겠어. 네 물건은 죄다 더러워서 필요 없고.” 그녀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됐어, 그래도 한집에 사는 정이 있으니까 특별히 알려줄게. 어젯밤 지호 오빠가
윤하경은 윤하연을 비웃듯이 쳐다봤다. 역시 상대가 악랄하게 나오면 그에 맞서야 속이 풀리는 법이다.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녀는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유 집사에게 간단한 반찬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하연도 거실로 내려왔고 윤하경의 독이 잔뜩 서린 눈빛을 보내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윤하경, 내 얼굴에 흉터라도 생기면 너 절대 가만 안 둬. 기다려 봐.”말투만 보면 마치 지금까진 자신이 참아준 것처럼 들렸다.윤하경은 가볍게 눈을 굴리며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그녀가 반응조차 하지 않자, 윤하연은 발을 쾅 내디디며 밖으로 나가버렸다.하지만 윤하경은 그녀가 나가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며 마지막으로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조금 더 서둘러. 여긴 상황이 바뀌었어.]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유 집사가 음식을 가져왔다.“하경 씨, 식사하세요.”“고마워요.”윤하경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식사에 집중했다. 사실 아침에 강현우의 집에서 뭘 좀 먹고 싶었지만 그 남자가 또 이상하게 굴어서 제대로 식사할 기회를 놓쳤다.게다가 어젯밤의 ‘운동’에 이어 아침부터 긴장과 감정 소모가 심했으니 속이 비어 있는 게 당연했다.유 집사는 그녀가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이 어두워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경 씨, 방금 전에 하신 일... 혹시라도 회장님이 아시면 어쩌시려고요?”“아시면 뭐요?”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유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걸 알기에 그 따뜻한 마음은 감사했지만 세상은 그렇게 착한 마음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만약 매번 참고 넘어갔다면 지금쯤 그녀의 존재조차 지워졌을 것이다.“그게 아니라, 이따가 하연 씨가 이 일을 회장님께 말하면... 회장님이 또 하경 씨를 나무라실까 봐요.”“그럴 여유가 있을까요?”윤하경은 국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며
윤하경이 윤하연의 방에 도착했을 때, 윤하연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아마도 전날 밤 술을 마시고 온갖 난리를 치느라 지쳤는지, 침대 위에서 돼지처럼 늘어져 자고 있었다.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침묵을 지키다가, 손에 들고 있던 국을 그대로 윤하연의 침대 위로 쏟아버렸다.“아!”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뜨겁진 않지만 식은 국이라도 몸에 닿으면 충분히 따가운 법이다.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의 고통에 윤하연은 침대에서 벌떡 뛰쳐나왔다.몸을 일으킨 그녀는 곧 윤하경이 창가에 서서 태연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두 눈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윤하경! 너 미쳤어?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러는 거야?”윤하경은 윤하연이 평소 흘리는 눈물 연기를 그대로 따라 하듯,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누가 보면 또 나한테 억울한 일 당한 줄 알겠네. 아버지가 우리 보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라고 하셨잖아. 오래 자면 배고플까 봐 직접 국까지 떠서 가져왔는데 아차! 내가 그만 손을 미끄러뜨렸지 뭐야. 실수야, 그런데 네가 왜 이렇게 날 오해하는 거야?”윤하경은 억울한 듯 두 손을 들어 보였지만 윤하연은 이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들으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몸이 따갑고 욱신거리는 고통도 신경 쓸 겨를 없이,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서 뛰쳐나와 윤하경에게 달려들었다.하지만 전날 있었던 일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고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채 덤볐다가 오히려 윤하경에게 쉽게 제압당했다.윤하경은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내어, 무릎으로 그녀의 등을 눌러 바닥에 깔아버렸다.“윤하경! 당장 놔! 너 죽여버릴 거야!”윤하연은 온몸을 비틀며 반항했지만 힘이 빠져버린 몸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피부가 얼얼하게 따가운 데다, 혹여나 얼굴에 흉터라도 남게 되면 인생이 망한다는 생각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반드시 윤하경을 없애야 했다.하지만 윤하경은 태연한 얼굴로 그녀의 팔을 뒤로 꺾어 고정한
“상처가 더 심해진 것 같네요.”“그렇지. 그래서 네가 책임져야지.”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젯밤에 네가 너무 날뛰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까진 안 됐을 거야.”윤하경은 말없이 입술을 다물었다.‘꼭 그런 말만 골라서 하네, 진짜.’그녀는 어젯밤의 장면들을 일부러 기억에서 밀어내고 있었는데 강현우가 한마디 꺼내는 순간 그 장면들이 우르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말했다.“상처 제대로 안 처리돼서 그런 거예요. 제가 다시 치료해 드릴게요.”강현우는 별다른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고 윤하경은 조용히 구급상자를 꺼내 들었다.상처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피부는 벌어져 있었고 붉게 부어오른 자국들이 보였다. 오랫동안 방치한 흔적이 역력했고 예전부터 있던 흉터들까지 더해져 그의 등이 보는 사람조차 아찔할 정도였다.윤하경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상처를 닦아내고 약을 바른 뒤, 다시 붕대로 감아 마무리했다. 마치 습관처럼 마지막에 가슴팍에 리본을 묶었는데 그 커다란 가슴 근육 위에 작고 정성스러운 리본이 묘하게도 시선을 끌었다.강현우는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귀찮은 기색이 스쳤지만 윤하경이 열심히 리본을 묶는 모습을 보고는 그 불만도 서서히 가라앉았다.“됐어요.”윤하경은 손을 털며 미소를 지었다.강현우는 말없이 셔츠를 입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그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윤하경은 재빨리 몸을 돌려 문을 나섰다.복도를 걷던 중, 끝 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비명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은 구지호가 갇혀 있는 방이었다.그 순간, 강현우의 목소리가 문가 쪽에서 들려왔다.“마음이 쓰이면 말해. 네가 한마디 하면 내가 자비 좀 베풀 수도 있지.”고개를 돌린 윤하경은 문가에 기대 서 있는 강현우를 마주했다. 셔츠 단추를 다 채운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