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윤하경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약한 여자 하나 건드려서 신나셨겠네요.” 전화기 너머에서 상대방이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오늘 회사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의 실수였습니다. 이 일을 수습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좋아요.” 윤하경은 일부러 생각하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내일 오후에는 시간이 날 것 같네요. 직접 찾아오세요.” 그렇게 단호하게 말한 후, 그녀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나자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강현우의 이름을 빌려서 위세를 부렸는데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까? 오늘 그가 보였던 냉혹한 태도를 떠올리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때 문득, 낮에 강현우가 자신을 위해 강현석을 막아섰던 일이 떠올랐다. “아, 맞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한 대 쳤다. “기사님, 강한 그룹 대표님 댁으로 가 주세요.” 한 시간 뒤,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강현우의 저택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하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집사가 문을 열었고 집사는 예상치 못한 방문객을 보며 순간 멈칫했다. 이 집을 스스로 찾아오는 여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기 때문이다. 윤하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현우 씨 계시는가요? 오늘 도움을 많이 받아서 감사 인사드리러 왔어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대표님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윤하경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불쾌한 기색 없이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사실, 낮의 일 이후로 강현우가 조금 무서워졌다. 심지어 침대에 누워서도 '이제 그와 거리를 두는 게 좋을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일어난 일을 떠올리면 그럴 수 없었다. 강현석 같은 인간이 자신을 눈여겨봤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했다. 만약 강현우의 보호가 없다면 그 사람이 또 무슨
윤하경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뭘 말해도 강현우한테는 다르게 해석될 게 뻔했다. 정말이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지금 몸이 녹초가 된 것처럼 힘이 빠져 있었고 더 이상 강현우와 실랑이를 벌일 힘도 없었다. 게다가 강현우는 이런 일에 있어서 끝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계속 이렇게 끌려다니다가는 정말 병원 신세를 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헤븐’에서 현우 씨가 좋아하시는 요리 몇 가지를 포장해 왔어요. 방금 만든 따끈따끈한 음식인데 내려가서 같이 드실래요?” 강현우가 흥미롭다는 듯 윤하경을 바라봤다. 눈앞의 여자는 분명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또 억지로라도 애교를 부려가며 자신을 달래려고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 재미있었다. “용감하네.” 툭 던진 말이었지만 윤하경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오늘 낮 ‘헤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강현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오늘 이후로 네가 도망갈 줄 알았는데 그래도 감히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네.” 그의 말에, 윤하경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찡긋했고 발끝을 들어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가볍게 속삭였다. “현우 씨 곁에 있으려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떻게 하면 강현우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지 감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에게 지금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었다.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아무리 도망가고 싶어도, 지금은 참아야 했다. 강현우는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꽤 오랜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발끝을 세운 채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때야 강현우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계속 그렇게 잘 버텨봐.”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몸을 돌려 드레스룸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예전처럼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내려가 있어.
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턱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그녀의 태도는 무심하면서도 위압적이었고 상대는 분위기에 눌려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듯했다. “하경 씨, 저희가 준비한 작은 성의입니다.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상대가 내민 것은 ‘선물’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한 장의 수표였다. 윤하경은 힐끗 내려다보았더니 금액은 6천만 원 즉 빌린 돈의 10%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이 정도면 나름 신경을 쓴 모양이었지만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홀짝였는데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그녀가 자기에게 따라주는 줄 알고 손을 뻗었다가 머쓱하게 손을 거두었다. 윤하경은 그를 향해 차갑게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이건 무슨 뜻이죠?” 유수철은 그녀의 태도에 움찔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혹시 금액이 너무 적었나? 하긴 강현우와 같이 놀더니 이 정도 돈은...’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를 악물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건 저희 대표님이 준비한 사과의 표시입니다. 혹시 부족한 점이 있다면 말씀만 해주세요. 가능한 선에서 최선을 다해 맞춰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윤하경은 심드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유 이사는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그렇다면... 이전 일은 없던 걸로 해주시는 겁니까?” “없던 일?” 윤하경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나요?” 유수철의 얼굴에 순간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고 끝내는 게 상식인데 윤하경은 그런 방식으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보통 같으면 벌써 화를 냈겠지만 상대가 윤하경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경성에서는 경찰보다 더 조심해야 할 사람이 바로 강현우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유수철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럼 하경 씨는 어떻
사설탐정으로부터 연락이 온 건 사흘째 되는 날 오전이었다. 윤하경은 휴대전화 화면을 보며 천천히 눈을 좁혔다. “이거...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데?” 애초에 임수연이 처절하게 몰락하기 전에 충분히 괴롭혀 줄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왔다. 그날 오후, 윤하경은 짐을 싸서 다시 윤씨 저택으로 들어갔고 마침 저녁 시간이어서 가족들이 모두 집에 있었다. 거실에서는 윤수철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고 임수연은 곁에서 차를 우려내며 다정한 부부처럼 보였다. 윤하경은 캐리어를 끌고 들어서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아빠, 아줌마. 두 분 다 집에 계셨네요?” 그녀의 목소리에 거실의 분위기가 묘하게 얼어붙었고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고 윤하경을 바라봤다. 임수연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왔어? 하경아.” 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요? 제가 돌아오니까 불편하세요?” 임수연은 뭐라고 대꾸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불편하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입을 연 건 윤수철이었다. “며칠 전에는 아주 시원하게 나가더니 갑자기 돌아와서 뭘 하겠다는 거야?” 윤수철의 말에도 윤하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손을 잡아 흔들었다. “아빠, 그런 말씀 마세요. 이 집이 제 집인데 제가 안 돌아올 이유가 있나요?” 그녀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이어갔다. “사실 제가 요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앞으로는 아빠한테 더 잘해야겠더라고요. 효도도 좀 하고요.” 물론 속으로는 ‘아주 제대로 된 한판을 벌여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해맑게 웃었다. 임수연은 그런 윤하경을 곁눈질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 여우 같은 계집애가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윤하경은 머리를 긁적이며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강현우를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대략 두세 달 정도 된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정말 슬슬 질릴 때가 됐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에게 붙어 있는 여자들은 한 달을 넘기는 일조차 드물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었다. ‘내가 특별한 것도 아니고...’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 방문이 조용히 두드려졌다. “하경 씨, 저녁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유 집사의 목소리였다. 윤하경은 빠르게 생각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금방 내려갈게요.” 거실로 내려가니 이미 저녁 식사가 시작된 상태였다. 윤수철과 임수연은 각자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녀를 기다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지만 윤하경은 개의치 않고 익숙하게 제 자리에 앉았다. 식사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은근히 임수연을 향했다. 그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임수연은 약간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여보, 들으셨어요? 얼마 전에 이태준 회장의 아들, 이석훈 씨가 사고를 당했대요.” “이석훈? 무슨 사고?” 윤하경은 젓가락을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이석훈?' 그녀는 태연하게 갈비찜 한 점을 집어 들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임수연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차 사고가 났다는데 팔을 심하게 다쳤대요. 거의 못 쓰게 될 정도로 말이에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윤하경을 힐끔 쳐다봤다. 그 눈빛은 마치 '너랑 상관없는 일은 아니겠지?'라고 묻는 듯했다. 하지만 윤하경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임수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하경 씨가 이석훈 씨와 있었던 일은 우리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 이 기회에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또 나를 끌어들이네?’ 눈앞의 여자가 참으로 질기게도 물고 늘어진다
역시나,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임수연은 서둘러 외출했다.윤수철은 서재로 들어가 버렸고 윤하경은 거실 소파에 편히 기대앉아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밤이 깊어지고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킬 무렵, 마침내 임수연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녀는 최대한 소리 없이 움직였지만 소파에서 눈을 감고 있던 윤하경은 인기척을 감지하고 눈을 떴고 천천히 손을 뻗어 방 안의 스탠드 조명을 켰다.“어머, 아줌마 오셨어요?”임수연은 깜짝 놀라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너 아직 안 자고 뭐 하는 거니?”윤하경은 기지개를 켜며 다가갔다.“아, 아줌마가 늦게까지 안 들어오시길래 걱정됐죠. 밤길 위험하잖아요. 혹시 길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요.”그녀는 싱긋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게다가 아줌마가 저 때문에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선물 고르러 다녀오셨잖아요?”임수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딘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윤하경의 미소가 영 꺼림칙했다.“됐고 늦었으니까 얼른 들어가 쉬어.”임수연은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발길을 돌리려 했다.그런데 그때, 윤하경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가볍게 냄새를 맡았다.임수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아, 아줌마한테서 좋은 향이 나서요.”윤하경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이거 어떤 향수예요? 전에 맡아본 적 없는 향인데... 혹시 어디 브랜드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저도 한번 써보고 싶은데요?”그 순간, 임수연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그녀는 본능적으로 자기 몸에 밴 향을 맡아보려 했다.그녀의 반응은 충분히 수상했고 윤하경은 그런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그냥 궁금해서요.”윤하경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줌마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써보고 싶어지네요. 하나만 빌려주시면 안 돼요?”“지금 당장은 없다니까. 필요하면 나중에 하나 사서 줄게.”“정말요? 약속하셨어요!”윤하경은 장난스럽게 윙크를 날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임수연이 뒤
임수연은 애써 미소를 유지하려 했지만 입가가 떨리는 걸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찰나, 욕실 문이 열리며 윤수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윤하경이 방에 있는 걸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또 무슨 일로 왔어?”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줌마한테 물건 하나 빌리러 왔어요.” 윤하경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덧붙였다. “어제 아줌마한테서 나던 향수가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외출 전에 좀 써보려고 했는데 방에 없더라고요?” 그 말에 임수연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윤하경의 손을 잡았다. “어머, 그거 말이구나! 마침 어제 다 써서 버렸어.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다면 오늘 백화점에 가서 같은 걸 사다 줄게.” 윤하경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점점 길어지자, 임수연은 왠지 모르게 속이 불편해졌다. 임수연은 그러다 자신이 이 상황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윤하경도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입가의 미소가 점점 더 부자연스러워지고 있을 때쯤, 윤하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기대할게요.” 그렇게 말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고 임수연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뭔가 알아챈 걸까?’ 임수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윤하경은 출근 준비를 했다. 그녀는 이틀 연속 집에서 밥을 먹었지만 윤하연을 본 적이 없었고 마치 일부러 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윤하경은 언제나처럼 회사를 향해 출발했고 한편, 임수연은 약속대로 혼자 이석훈을 보러 병원으로 출발했다.윤하경은 임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윤하경도 직접 가서 그 난장판을 구경하고 싶긴 했지만 이석훈의 얼굴을 다시 보는 건 생각만 해도 역겨웠다.윤하경은 이석훈이 자기가 ‘헤븐’에 갔던 걸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번 해보라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걸 알아야 할 이유가 없어요.” 그녀의 무뚝뚝한 반응에 배지훈은 순간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입을 삐죽 내밀며 애써 귀엽게 보이려 했다. 그는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스타일에 깔끔한 패션 감각을 가지고 있어, 이런 행동이 어색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윤하경은 무덤덤하게 그를 힐끗 보고는 다시 관심을 끄는 듯 시선을 돌렸다. 배지훈은 살짝 풀이 죽은 듯했지만 이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요? 이번 디자인 비용을 무료로 해드릴게요.” 이 말에 윤하경의 눈빛이 반짝였다. “정말? 약속한 거예요?” 배지훈의 디자인 비용은 결코 저렴하지 않았다. 자잘한 비용까지 포함하면 수천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배지훈은 배씨 가문의 둘째 아들인데 수천만 원 정도의 돈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왜 이렇게 열심히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을까? 물론, 그런 건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고 남의 사생활을 깊게 파고들 취미도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배지훈은 그녀를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돈에 환장한 사람 같으니라고.” 윤하경은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죠?” 배지훈은 그녀의 앞에서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3일 후, 우리 형 배지훈과 진해리의 약혼식이 있어요. 나랑 같이 가줄래요? 내 파트너로.” “배지훈과 진해리가 약혼한다고요?” 윤하경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니까요.” 배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요? 설마 우리 형한테 관심 있었던 거 아니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그녀는 눈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진해리는 원래 강현우와 약혼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
입술을 꾹 닫던 윤하경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동영상 보내주고 퇴근해.”윤하경의 말에 보안 팀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습니다.”보안 팀장은 혹여나 고작 이까짓 증거로 윤하경이 직무 유기라며 자신을 자르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이렇게 넘어갈 줄이야.’인사를 건넨 보안 팀장은 다행이라 여기며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윤하경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퇴근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어쩌다 일찍 퇴근해 별장으로 향한 윤하경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했다. 언제 돌아온 것인지 임수연이 별장에 있었다. 별장으로 들어선 윤하경은 여유롭게 정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임수연을 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윤하경을 보는 임수연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났다. 그러나 임수연은 곧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경이 왔니?”윤하경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임수연에게 다가갔다. “아줌마도 오셨네요.”“축하해.”윤하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며칠 동안 밖에서 잘 지내셨어요?”이 말은 사실 임수연을 비꼬는 것이었다. 윤하경의 말에 겨우 짓고 있던 미소가 굳어졌다. 임수연은 어쩌면 이번 일은 윤하경이 몰래 꾸민 일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아무리 화가 나도 임수연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감히 윤하경과 갈등을 빚을 수는 없었다. 임수연이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긴. 집보다 편한 곳이 어디 있다고.”“하지만 이번엔 억울하게 당한 거라 네 아빠가 직접 날 데리러 왔잖니. 게다가 나한테 큰 보석도 사주셨어. 봐봐.”말하며 임수연은 손을 뻗어 윤하경의 눈앞에 흔들어보였다. 잔뜩 올라간 어깨가 곧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는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윤하경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임수연 손에 있는 에메랄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순간 윤하경은 임수
“이렇게 여자 대표 코스프레한다고 해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회사에서 누가 실권을 가졌는지 잊지 마.” 윤하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의 말투는 겉으로는 가벼운 농담 같았지만 그 속에는 뼈가 있었다. 그 순간, 보안 팀장이 급하게 사무실로 들어왔고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윤 대표님,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까지 이 층의 CCTV가 모두 작동을 멈췄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누군가 일부러 조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이 어렵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를 보며 보안 팀장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한빛 그룹에 새로 부임한 부대표가 그냥 허울뿐인 자리가 아니라는 걸, 그는 최근 며칠 동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단 몇 주 만에 회사 내의 부실한 인사 구조를 개편하고 재무 문제를 파헤치고 있었는데 오늘 이런 일이 터졌다. 윤하경이 찾아낸 재무상의 허점들을 꼼꼼히 표시해 둔 자료들이, 어제 퇴근하면서 미처 금고에 넣지 못한 채 책상 위에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자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순간 윤하경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 ‘하필이면 내가 재무 쪽을 조사하고 있을 때, 관련 서류가 사라졌다?’그리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이제 너무나 분명했다.“혹시 일을 계속 이렇게 대충 했어? 이 층의 CCTV가 고장 났다고 해서 그냥 덮고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말투는 나직했지만 날카로운 압박이 담겨 있었다. 보안 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오후까지 해결해.” 그녀는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덧붙였다. “그게 안 되면 보안팀에서 빈자리가 생길지도 모르겠네.” 보안 팀장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
‘나를 여기 불러놓고 우아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감상하라는 건가? ’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테이블 너머의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 묘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녀가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순간, 강현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 꽤 됐는데 나한테 보고할 건 없어?” “네?” 윤하경은 순간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강현우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나지? 네가 나한테 한빛 그룹을 넘겨달라고 설득할 때 했던 말. 내 투자가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지. 지금 네가 한빛 그룹에 들어간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 건지, 방향은 정해졌나?” “아직요. 그동안 인사와 재무 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회사 내부에 부정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아서 재무 쪽에서도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났어요. 이걸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식기를 내려놓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 할 문제지. 내가 알고 싶은 건, 네가 약속했던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느냐는 거야.” 윤하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던지는 강현우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항상 여유롭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그였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모습은 또 다른 의미로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다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나를 실망하게 않길 바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계를 흘깃 확인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하경은 속으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이, 이렇게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다니. 일과 사생활을 확실히 구분하는 것도 정도가
윤하경이 눈을 떴을 때, 강현우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밖에는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눈이 부셔서 자연스럽게 찌푸려진 시선이 이불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제야 아직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고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몸에 바짝 끌어안으며 얼굴만 살짝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강현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조심스럽게 발끝을 내디디며 침대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마치 도망치는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옷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여성복으로 가득 찬 옷장을 보자 그녀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지난번 왔을 때보다 훨씬 많아진 여성 의류들. 분명, 이곳에 오는 ‘여자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것이겠지. 그녀의 머릿속에 어젯밤 차 안에서 맡았던 달콤하고 유혹적인 향수 냄새가 다시 떠올랐고 가슴 한구석이 갑갑하게 조여왔다. 쓸데없이 기분이 나빠진 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발끝으로 원피스를 하나 꺼내 들며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 “하, 역시 개 같은 남자야. 몸이 그렇게 좋으면 벽돌이라도 나르지. 겨우 약속 하나 잡아놓고 나를 이렇게 들볶아야 했냐고.” 그러나 그녀가 원피스를 고른 바로 그 순간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존재감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강현우는 옷장 문 앞에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기대어 있었다. 걸음 소리도 없이, 기척도 없이 다가와 그녀를 보고 있었다니.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반사적으로 손에 든 원피스를 들고 몸을 가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했지만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혹시나 자신이 방금 뱉은 말을 전부 들었을까 싶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하경은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대충 네가 ‘개 같은 남자’라고 욕할 때쯤?”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읏” 그리고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아파요” 진짜 아팠지만 윤하경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고 마치 투정을 부리는 듯한, 혹은 간절히 애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강현우의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 대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위로 올라오더니 그녀의 떨리는 입술을 가만히 덮었다. ‘거짓말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겠지.’ 윤하경은 자신의 잘못을 알기에,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걸 받아들여야 했다. 욕조는 고급스러웠고 물 온도도 변함없이 따뜻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정신은 점점 멀어져 갔다. 마지막으로 윤하경은 강현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힘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만해요, 제발”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의식을 잃었고 결국 욕조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윤하경은 자신이 안겨 어디론가 옮겨지는 걸 느꼈다. 푹신한 침대에 던져지듯 눕혀졌고 몸을 돌려 웅크리며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이내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며칠 동안 쌓인 피로 그리고 오늘 밤 그가 준 벌로 인해 그녀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었다. 강현우는 침대 옆에 서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잠시 후, 코웃음을 치듯 낮게 헛웃음을 흘렸다. “참, 별일이네.” 그는 욕실로 향해 새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바로 그때 똑똑. “들어와.” 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도 차분했다. 방금 전까지 일어났던 격렬한 사랑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더 생기가 도는 듯한 얼굴이었다. 문이 열리고 우지원이 들어왔다. 그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듯한 시선이 우지원을 향해 날아들었다. 우지원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며 애써 모른 척한 채 보고를 시작했다. “대표님, 아까 그 여자 자백했어요. 둘
욕실 문을 열자, 강현우는 이미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고 그의 몸에 있던 상처들도 어느새 거의 다 나은 듯 보였다. 언제나처럼, 그는 완벽한 몸매를 자랑했다. 물 위로 드러난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 근육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지금 누구를 유혹하려는 거야.’ 속으로 눈을 굴리면서도, 윤하경의 얼굴에는 한없이 공손한 미소가 떠올랐다. “강 대표님, 제가 뭔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을까요?” “수건 좀 줘.” 그는 무심하게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손에 들린 수건을 챙겨 그에게 건넸다. 이미 그와 얼마나 많은 밤을 보냈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남자의 얼굴과 몸은, 누구라도 탐낼 만큼 완벽하다는걸. 그저, 차 안에서 맡았던 그 역한 향수가 아니었더라면...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하면 오늘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그녀는 어느새 욕조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수건이요.” 윤하경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손목이 강하게 잡혔고 중심을 잃은 그녀는 그대로 욕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철퍼덕! 욕조가 충분히 커서 두 사람이 들어가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지만 윤하경이 빠져든 순간,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녀의 몸은 뜨거운 물 속으로 파묻혔고 더욱 뜨거운 어떤 것과 맞닿았다. 윤하경의 손바닥은 본능적으로 그 뜨거운 살결 위에 놓였다. 그러나 그 감촉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강 대표님, 이게 무슨...”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가 고개를 숙였고 윤하경은 순간 숨이 막혔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었고 흰 피부는 놀란 기색이 스며들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촉촉한 눈동자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강현우의 눈빛이 서서히 짙어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에 달
차 안에는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향수 냄새가 감돌고 있었고 이건 강현우의 향수 냄새가 아니었다. 그와 오래 알고 지내면서 윤하경은 그에게서 언제나 같은 향만을 맡아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코를 스치는 향은 완전히 달랐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이건 여자의 향수 냄새임을 알 수 있었다.달콤하면서도 묘하게 유혹적인 향 하지만 너무 달아서 역겨울 정도였다.순간,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강현우를 힐끔 바라보았다.‘아마 이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겠지. 젊고 예쁘고 애교 많고...’그렇게 생각하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고 지나갔다.윤하경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자리로 옮겼다. ‘그러면 내가 앉은 이 자리에, 방금까지 다른 여자가 앉아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강현우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있다가 이 향수를 묻혀 온 걸까?’어느 쪽이든 기분이 몹시 나빴다.이때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윤하경은 이내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저기, 강 대표님. 저 오늘 몸이 좀 안 좋네요. 시간도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뵙는 게 어떨까요?”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변명을 했다.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향수 냄새가 가득한 상태에서 도저히 그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강현우 앞에서 아무리 낮은 자세를 취한다 해도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강현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두운 눈빛이 그녀를 꿰뚫듯이 바라봤다.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고 강현우는 얕게 웃으며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몸이 안 좋다고?”“네.”“어디가?”강현우의 시선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윤하경은 서둘러 적당한 핑계를 떠올렸다.“그게, 그냥...”윤하경은 원래 거짓말을 잘 못했고 특히, 강현우 앞에서는 더더욱 연기를 못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기침을 한 번 하고 나지막이 덧붙였다.“그냥, 그... 매달 오는 그날이에요.”그
‘또?’윤하경은 입술을 삐죽이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며 강현우의 존재조차 잊고 지낼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서 연락이 오니 본능적으로 불안해졌다. 특히, 그와 만날 때마다 보여주는 광적인 집착이 더욱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멍하니 고민하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을 보니 ‘온지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윤하경은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쯧, 우리 윤 부대표님. 요즘 너무 바빠서 본인 성도 잊으신 거 아니야?” 온지우의 익숙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하경은 목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고 지금 농담을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돈, 준비 끝났어. 해외로 한 바퀴 돌리고 왔으니까, 흔적 하나도 안 남았어. 카드 번호 줘. 바로 이체해 줄게.” 윤하경은 살짝 멈칫했다. 그제야 이 중요한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마워.” 윤하경은 짧게 생각한 뒤,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기부해.” 윤하경이 처음에 이 돈을 요구한 것은, 그동안 임수연이 윤씨 가문에서 빼돌린 돈을 토해내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임수연의 손을 거친 돈은 더럽게 느껴졌다.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 돈을 전부 기부하기로 했다. 차라리 좋은 일에 쓰는 것이, 최소한 덕이라도 쌓는 길이었다.온지우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이내 키득거렸다. “와, 통 크네. 손 한 번 휘둘러서 몇십억을 그냥 내놓는다고? 기부자 이름은?” “익명으로.” 온지우는 한껏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역시 부자야. 근데 내 밥값은 잊으면 안 된다?” “네가 장소와 시간 정해서 보내 줘.” 그녀는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고 다시 의자에 기대어 커다란 창밖을 바라보았다. 네온사인이 빛나는 야경이 마치 화려한 외투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누구도 모르는 더러운 진실들이 도사
“윤 회장님의 위임을 받아, 앞으로 저는 인사부와 재무부를 직접 관리하게 됩니다.”윤하경은 단정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윤수철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불만이 동시에 스쳤다.“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그는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윤하경이 오자마자 한빛 그룹의 가장 중요한 두 부서를 장악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그러나 윤하경은 태연하게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유지했다.“윤 회장님, 정말로 그런 말씀을 안 하셨나요?”그녀의 눈빛에는 분명한 경고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잠시 침묵하던 윤수철은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기현수와 계약을 체결할 당시, 부대표가 인사부와 재무부를 담당하게 되어 있다는 조항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그때는 단순한 거래로 받아들였지만 오늘 윤하경의 등장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그는 짧은 침묵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맞아. 내가 깜빡했군.”윤하경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윤 회장님께서 기억하셨다니 다행이네요.”그녀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윤수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마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저 직책상의 것일 뿐인 듯했다.윤수철은 어두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하경은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백정연과 재무부장 주주를 향해 말했다.“지난 1년간의 재무 보고서와 자금 내역을 전부 보내 주세요. 앞으로 당분간은 야근이 좀 많아질지도 모르겠네요.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곧장 회의실을 떠났다.그녀가 나가자, 회의실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윤 회장님한테 딸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강단 있는 분일 줄은 몰랐네요.”“그러게요. 저분, 예전 하 대표님하고 비슷한 느낌이 있어요.”“이제야 우리 회사도 희망이 보이네.”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몰래 윤하연을 쳐다보았고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