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핸드폰을 힘껏 내던졌다. “엄마, 뭐 하는 거야?”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윤하연이 이 광경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임수연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곧장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연아, 너 지금 가진 돈 얼마나 돼?” “돈?” 윤하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으며 머리를 굴렸다. “한... 2억 정도 남아 있을 거야.” “전부 나한테 보내. 급하게 쓸 일이 있어.” 윤하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건 그녀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그 돈을 모두 넘기면 한 달 용돈과 아버지가 가끔 주는 돈으로만 생활해야 한다. 단순한 부탁이 아니란 걸 직감한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엄마, 그동안 아빠한테 꽤 많이 받았잖아.” 별다른 감정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그것이 임수연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렸다. 그녀는 화가 난 듯 다가와 손가락으로 윤하연의 이마를 톡톡 찌르며 쏘아붙였다. “네가 그런 소리를 해? 집안 살림에 돈이 안 드는 줄 알아? 좋은 옷, 좋은 가방, 좋은 차까지 다 해 줬잖아. 그런데 고작 이 돈 가지고 엄마한테 따지는 거야?” 이어 그녀는 한층 더 비꼬듯 말했다. “윤하경 봐. 혼자서 사업도 잘하고 능력 있게 살잖아. 넌 대체 왜 걔보다 나은 게 없어?” 그 말에 윤하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던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차갑게 말했다. “그럴 거면 그냥 윤하경을 딸로 삼아.” 임수연은 그제야 자기가 실수했음을 깨닫고 다급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니야, 엄마가 말을 잘못했어. 그냥 홧김에 나온 말이야.” 그러나 윤하연은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윤하경, 두고 봐. 곧 네가 울 날이 올 테니까.” 그 말에 임수연의 눈이 반짝였다. “왜? 네가 뭔가 방법이 있어?” 하지만 윤하연은 그녀를 흘긋 쳐다보더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됐어. 돈은 이따가 보내 줄게.” 그렇게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윤하경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약한 여자 하나 건드려서 신나셨겠네요.” 전화기 너머에서 상대방이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오늘 회사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의 실수였습니다. 이 일을 수습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좋아요.” 윤하경은 일부러 생각하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내일 오후에는 시간이 날 것 같네요. 직접 찾아오세요.” 그렇게 단호하게 말한 후, 그녀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나자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강현우의 이름을 빌려서 위세를 부렸는데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까? 오늘 그가 보였던 냉혹한 태도를 떠올리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때 문득, 낮에 강현우가 자신을 위해 강현석을 막아섰던 일이 떠올랐다. “아, 맞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한 대 쳤다. “기사님, 강한 그룹 대표님 댁으로 가 주세요.” 한 시간 뒤,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강현우의 저택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하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집사가 문을 열었고 집사는 예상치 못한 방문객을 보며 순간 멈칫했다. 이 집을 스스로 찾아오는 여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기 때문이다. 윤하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현우 씨 계시는가요? 오늘 도움을 많이 받아서 감사 인사드리러 왔어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대표님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윤하경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불쾌한 기색 없이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사실, 낮의 일 이후로 강현우가 조금 무서워졌다. 심지어 침대에 누워서도 '이제 그와 거리를 두는 게 좋을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일어난 일을 떠올리면 그럴 수 없었다. 강현석 같은 인간이 자신을 눈여겨봤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했다. 만약 강현우의 보호가 없다면 그 사람이 또 무슨
윤하경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뭘 말해도 강현우한테는 다르게 해석될 게 뻔했다. 정말이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지금 몸이 녹초가 된 것처럼 힘이 빠져 있었고 더 이상 강현우와 실랑이를 벌일 힘도 없었다. 게다가 강현우는 이런 일에 있어서 끝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계속 이렇게 끌려다니다가는 정말 병원 신세를 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헤븐’에서 현우 씨가 좋아하시는 요리 몇 가지를 포장해 왔어요. 방금 만든 따끈따끈한 음식인데 내려가서 같이 드실래요?” 강현우가 흥미롭다는 듯 윤하경을 바라봤다. 눈앞의 여자는 분명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또 억지로라도 애교를 부려가며 자신을 달래려고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 재미있었다. “용감하네.” 툭 던진 말이었지만 윤하경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오늘 낮 ‘헤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강현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오늘 이후로 네가 도망갈 줄 알았는데 그래도 감히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네.” 그의 말에, 윤하경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찡긋했고 발끝을 들어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가볍게 속삭였다. “현우 씨 곁에 있으려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떻게 하면 강현우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지 감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에게 지금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었다.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아무리 도망가고 싶어도, 지금은 참아야 했다. 강현우는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꽤 오랜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발끝을 세운 채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때야 강현우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계속 그렇게 잘 버텨봐.”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몸을 돌려 드레스룸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예전처럼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내려가 있어.
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턱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그녀의 태도는 무심하면서도 위압적이었고 상대는 분위기에 눌려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듯했다. “하경 씨, 저희가 준비한 작은 성의입니다.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상대가 내민 것은 ‘선물’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한 장의 수표였다. 윤하경은 힐끗 내려다보았더니 금액은 6천만 원 즉 빌린 돈의 10%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이 정도면 나름 신경을 쓴 모양이었지만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홀짝였는데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그녀가 자기에게 따라주는 줄 알고 손을 뻗었다가 머쓱하게 손을 거두었다. 윤하경은 그를 향해 차갑게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이건 무슨 뜻이죠?” 유수철은 그녀의 태도에 움찔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혹시 금액이 너무 적었나? 하긴 강현우와 같이 놀더니 이 정도 돈은...’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를 악물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건 저희 대표님이 준비한 사과의 표시입니다. 혹시 부족한 점이 있다면 말씀만 해주세요. 가능한 선에서 최선을 다해 맞춰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윤하경은 심드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유 이사는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그렇다면... 이전 일은 없던 걸로 해주시는 겁니까?” “없던 일?” 윤하경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나요?” 유수철의 얼굴에 순간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고 끝내는 게 상식인데 윤하경은 그런 방식으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보통 같으면 벌써 화를 냈겠지만 상대가 윤하경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경성에서는 경찰보다 더 조심해야 할 사람이 바로 강현우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유수철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럼 하경 씨는 어떻
사설탐정으로부터 연락이 온 건 사흘째 되는 날 오전이었다. 윤하경은 휴대전화 화면을 보며 천천히 눈을 좁혔다. “이거...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데?” 애초에 임수연이 처절하게 몰락하기 전에 충분히 괴롭혀 줄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왔다. 그날 오후, 윤하경은 짐을 싸서 다시 윤씨 저택으로 들어갔고 마침 저녁 시간이어서 가족들이 모두 집에 있었다. 거실에서는 윤수철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고 임수연은 곁에서 차를 우려내며 다정한 부부처럼 보였다. 윤하경은 캐리어를 끌고 들어서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아빠, 아줌마. 두 분 다 집에 계셨네요?” 그녀의 목소리에 거실의 분위기가 묘하게 얼어붙었고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고 윤하경을 바라봤다. 임수연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왔어? 하경아.” 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요? 제가 돌아오니까 불편하세요?” 임수연은 뭐라고 대꾸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불편하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입을 연 건 윤수철이었다. “며칠 전에는 아주 시원하게 나가더니 갑자기 돌아와서 뭘 하겠다는 거야?” 윤수철의 말에도 윤하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손을 잡아 흔들었다. “아빠, 그런 말씀 마세요. 이 집이 제 집인데 제가 안 돌아올 이유가 있나요?” 그녀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이어갔다. “사실 제가 요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앞으로는 아빠한테 더 잘해야겠더라고요. 효도도 좀 하고요.” 물론 속으로는 ‘아주 제대로 된 한판을 벌여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해맑게 웃었다. 임수연은 그런 윤하경을 곁눈질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 여우 같은 계집애가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윤하경은 머리를 긁적이며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강현우를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대략 두세 달 정도 된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정말 슬슬 질릴 때가 됐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에게 붙어 있는 여자들은 한 달을 넘기는 일조차 드물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었다. ‘내가 특별한 것도 아니고...’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 방문이 조용히 두드려졌다. “하경 씨, 저녁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유 집사의 목소리였다. 윤하경은 빠르게 생각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금방 내려갈게요.” 거실로 내려가니 이미 저녁 식사가 시작된 상태였다. 윤수철과 임수연은 각자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녀를 기다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지만 윤하경은 개의치 않고 익숙하게 제 자리에 앉았다. 식사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은근히 임수연을 향했다. 그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임수연은 약간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여보, 들으셨어요? 얼마 전에 이태준 회장의 아들, 이석훈 씨가 사고를 당했대요.” “이석훈? 무슨 사고?” 윤하경은 젓가락을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이석훈?' 그녀는 태연하게 갈비찜 한 점을 집어 들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임수연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차 사고가 났다는데 팔을 심하게 다쳤대요. 거의 못 쓰게 될 정도로 말이에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윤하경을 힐끔 쳐다봤다. 그 눈빛은 마치 '너랑 상관없는 일은 아니겠지?'라고 묻는 듯했다. 하지만 윤하경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임수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하경 씨가 이석훈 씨와 있었던 일은 우리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 이 기회에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또 나를 끌어들이네?’ 눈앞의 여자가 참으로 질기게도 물고 늘어진다
역시나,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임수연은 서둘러 외출했다.윤수철은 서재로 들어가 버렸고 윤하경은 거실 소파에 편히 기대앉아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밤이 깊어지고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킬 무렵, 마침내 임수연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녀는 최대한 소리 없이 움직였지만 소파에서 눈을 감고 있던 윤하경은 인기척을 감지하고 눈을 떴고 천천히 손을 뻗어 방 안의 스탠드 조명을 켰다.“어머, 아줌마 오셨어요?”임수연은 깜짝 놀라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너 아직 안 자고 뭐 하는 거니?”윤하경은 기지개를 켜며 다가갔다.“아, 아줌마가 늦게까지 안 들어오시길래 걱정됐죠. 밤길 위험하잖아요. 혹시 길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요.”그녀는 싱긋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게다가 아줌마가 저 때문에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선물 고르러 다녀오셨잖아요?”임수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딘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윤하경의 미소가 영 꺼림칙했다.“됐고 늦었으니까 얼른 들어가 쉬어.”임수연은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발길을 돌리려 했다.그런데 그때, 윤하경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가볍게 냄새를 맡았다.임수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아, 아줌마한테서 좋은 향이 나서요.”윤하경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이거 어떤 향수예요? 전에 맡아본 적 없는 향인데... 혹시 어디 브랜드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저도 한번 써보고 싶은데요?”그 순간, 임수연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그녀는 본능적으로 자기 몸에 밴 향을 맡아보려 했다.그녀의 반응은 충분히 수상했고 윤하경은 그런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그냥 궁금해서요.”윤하경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줌마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써보고 싶어지네요. 하나만 빌려주시면 안 돼요?”“지금 당장은 없다니까. 필요하면 나중에 하나 사서 줄게.”“정말요? 약속하셨어요!”윤하경은 장난스럽게 윙크를 날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임수연이 뒤
임수연은 애써 미소를 유지하려 했지만 입가가 떨리는 걸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찰나, 욕실 문이 열리며 윤수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윤하경이 방에 있는 걸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또 무슨 일로 왔어?”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줌마한테 물건 하나 빌리러 왔어요.” 윤하경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덧붙였다. “어제 아줌마한테서 나던 향수가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외출 전에 좀 써보려고 했는데 방에 없더라고요?” 그 말에 임수연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윤하경의 손을 잡았다. “어머, 그거 말이구나! 마침 어제 다 써서 버렸어.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다면 오늘 백화점에 가서 같은 걸 사다 줄게.” 윤하경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점점 길어지자, 임수연은 왠지 모르게 속이 불편해졌다. 임수연은 그러다 자신이 이 상황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윤하경도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입가의 미소가 점점 더 부자연스러워지고 있을 때쯤, 윤하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기대할게요.” 그렇게 말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고 임수연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뭔가 알아챈 걸까?’ 임수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윤하경은 출근 준비를 했다. 그녀는 이틀 연속 집에서 밥을 먹었지만 윤하연을 본 적이 없었고 마치 일부러 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윤하경은 언제나처럼 회사를 향해 출발했고 한편, 임수연은 약속대로 혼자 이석훈을 보러 병원으로 출발했다.윤하경은 임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윤하경도 직접 가서 그 난장판을 구경하고 싶긴 했지만 이석훈의 얼굴을 다시 보는 건 생각만 해도 역겨웠다.윤하경은 이석훈이 자기가 ‘헤븐’에 갔던 걸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번 해보라고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
“아...”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며 따끔한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고개를 들어 앞을 막아선 배경빈을 짜증이 서린 눈빛으로 쳐다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하지만 배경빈은 그녀의 표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제가 안 막았으면 지금쯤 계단 굴러갔을걸요?”윤하경은 그제야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바로 앞에 계단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정신을 놓고 걷고 있었으니 정말 자칫하면 사고 날 뻔했다.물론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억지를 부렸다.“누가 넘어진다고 했어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일은 여기까지면 됐고요. 이제 퇴근해도 돼요.”그러자 배경빈은 방금 계약서가 담긴 클리어 파일을 흔들며 말했다.“윤 대표님, 저 방금 계약 따낸 거잖아요. 이렇게 빨리 손절하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기왕이면 축하 겸 한 끼쯤은 사줘야죠?”윤하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돈 없어요.”배경빈은 되레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괜찮아요. 전 있어요. 제가 쏠게요.”“됐거든요?”윤하경은 거절했지만 배경빈은 들은 체도 않고 그녀를 차에 밀어 넣었다.애초부터 기분이 어수선했던 터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배경빈의 해맑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윤하경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차는 빠르게 도심을 빠져나갔고 잠시 후 한 대형 포장마차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윤하경도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예약이 어려워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여긴 왜요? 예약 안 했으면 못 들어갈 텐데.”그녀는 돌아서려 했지만 배경빈이 손목을 붙잡았다.“가긴 왜 가요. 자리 예약돼 있어요. 올라가요.”“아까까지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언제 예약을...?”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를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고 창가 쪽 자리에 자리를 잡은 배경빈은 턱을 괴고 윤하경을 바라보며 웃었다.“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요. 오늘은 제가 사는
오후 무렵, 윤수철이 회사에 들렀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부녀 사이엔 차가운 기류가 흘렀고 오늘 오전 그가 회사에 없었던 걸 보면 어디 다녀왔는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분명 윤하연을 구하려고 발을 뻗었던 모양이다.하지만 그 얼굴에 가득한 어두운 기색을 보니 결과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윤하경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얌전히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아버지.”그런데 윤수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윤하경을 쏘아보며 그대로 지나쳤다.그의 어깨가 스치듯 지나는 순간, 윤하경은 분명히 그가 억눌러 뱉은 듯한 콧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조용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층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보다 한발 빨랐다.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배경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까는 일하겠다고 그 난리더니 아직 퇴근도 안 했는데 벌써 도망치려는 거예요?”배경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슬기 비서님이 말씀하시길, 대표님이 곧 외부 미팅 있으시다고 해서 제가 같이 가라고 하더라고요.”“...”‘우슬기, 눈치가 좋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 문제야.’배경빈은 그녀가 뭔가 한 소리 하고 싶은 걸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 넘어갔고 오히려 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대표님 비서잖아요. 고객 미팅에 동행하는 거, 아주 타당한 업무 아닌가요?”강현우가 독처럼 위험하고 치명적인 존재라면 배경빈은 그저 따뜻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그 특유의 해사한 미소는 상대의 날을 무장 해제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윤하경은 지금도 제대로 화를 내기 어려웠다.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왔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던 찰나, 배경빈이 먼저 문을 열고 탑승해 버렸다.“대표님 같은 분이 직접 운전하실 순 없죠.”그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모실게요.”차는 강현우가 선물한, 붉은색이 도드라지는 고급 세단이었다.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랐다
배경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장난을 치겠어요. 요즘 일이 끊겨서 정식으로 밥벌이할 직장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귀사에서 비서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어쩌다 보니 덜컥 붙었어요. 이 정도면 인연 아닌가요?”윤하경은 거의 눈이 뒤집힐 뻔했다.“배씨 집안 둘째 아들이 밥벌이 걱정이라니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으세요? 우리 회사는 그렇게 귀한 몸을 담을 공간과 자격이 없어요.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배웅은 생략할게요.”하지만 배경빈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어요. 특별한 사유 없이는 해고도 불가일 텐데요.”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꼭 강력 접착제 같았고 윤하경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대체 무슨 꿍꿍인데요? 배지훈 씨한테 들키면 혼나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배지훈’의 이름을 꺼내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배경빈의 입꼬리가 확 내려갔다.“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저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요.”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 그 좋은 집안의 둘째 아들이, 멀쩡한 디자인 일을 두고 왜 갑자기 여기서 비서 일을 하겠다는 건지, 이건 배씨 가문 체면에도 안 맞는 일인데 말이다.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배지훈에게 연락해서 이 사람 데려가라고 해야 하나...’그런데 막 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배경빈이 휙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로챘다.“형한테는 말하지 마세요.”결국 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고 그의 집요함 앞에선 아무리 단호해도 소용없었다.그리고 배경빈은 고개를 숙이고 또 특유의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마치 받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 눈빛에 약해지더니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여긴 진짜로 배경빈 씨가 있을 자리가 아니에요. 디자이너잖아요. 디자인 일에 집중해야지, 왜 여기서 비서를 하겠다는 거예요?”배경빈은 가볍게 웃었다.“최근 의뢰받은 디자인 건이 취소돼서요. 덕분에 일이 싹 끊겼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밤중에 도대체 누가 강현우에게 전화를 걸어온 걸까 싶었지만 자신이 그걸 묻는 건 선을 넘는 일이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강현우가 문을 열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그가 떠난 자리엔 먹다 만 음식만 남아 있었고 윤하경은 수저를 다시 집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문득 송시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여자가 있어요.”그게 설마, 진짜 자신은 아닌 걸까?윤하경은 입맛이 뚝 떨어진 채로 두세 입 더 억지로 먹고는 식당을 나섰다.그리고 그날 밤, 강현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백정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이렇게 오래 회사를 비우시면 곤란하잖아요.”그 말에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문자를 남겼다.[저 오늘 회사 좀 다녀올게요.]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윤하경은 문득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굳이 이런 걸 보고해야 하나...’출근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 우슬기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뭐가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요즘 이상할 정도로 영업팀 쪽에 일이 몰리고 있어요. 거의 대부분이 강한 그룹 관련 회사들이고 사전에 대표님께 다 연락드렸다고 하던데요.”“나한테?”윤하경은 놀란 눈으로 우슬기를 바라봤다.“아, 네.”당황스러움을 감춘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알았어. 시간 내서 볼게. 먼저 나가 봐.”우슬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고 윤하경은 손에 든 문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강현우가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고?’생각해 보면 요즘 윤수철에게서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 성격에 자신이 회사에 이렇게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으면 진작에 문제 삼았을 텐데 이번엔 아무 말도 없었다.‘다 강현우 때문이구나.’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눌러 물고 마음이 복잡해졌다.강현
“자. 자자.”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고 어딘가 명령 같아 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체온은 마치 그 성격처럼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가까이 있을수록 숨이 막힐 듯한 뜨거움에, 윤하경은 몸을 조금 떼어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허리에 둔 팔은 단단히 그녀를 감고 있었다.“저, 우리... 그게 어떻게 된 건지...”윤하경은 겨우 말을 꺼냈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 이후의 기억이 아예 비어 있었다. 술을 마신 것까지만 기억나고 그다음은 통째로 사라졌다.그 말에 강현우는 눈을 뜨고 비웃듯 웃었다.“왜? 어제는 그렇게 덮치더니 끝나니까 모르는 척이야?”그 조롱 가득한 말에 윤하경은 화들짝 돌아보며 외쳤다.“그럴 리가요!”‘설마 내가 먼저?’하지만 어젯밤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게 더 불안했지만 다행히 방 안은 어둑했고 강현우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강현우는 다시 코웃음 쳤다.“어제 그렇게 들이대 놓고 지금 와서 모른 척? 기억 안 나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얘기해줄까? 네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현우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따라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의도가 뻔히 느껴지는 그 손길에 윤하경은 다급히 그의 손을 막았다.몸은 이미 온통 쑤시고 아팠고 지금 또 한 번 겪을 자신은 없었다.“저... 저 배고파요.”윤하경은 작은 목소리로 애교 섞인 말투를 꺼내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술만 들이켰으니 속이 허기질 만도 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아슬아슬하게 멈춘 손을 거두며 이불 밖으로 나갔다.그가 조명을 켜고 옷을 챙겨 입는 사이, 윤하경은 침대 속에 몸을 꼭 숨긴 채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한마디 했다.“배고프다며.”“아, 네!”윤하경은 잽싸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얼굴을 씻고 나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회색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었는데도, 다부진 어깨와 선명한 팔근육
“너무 많아...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고개를 들며 휘청거리다시피 일어서려 했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감당 안 돼?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되는데?”윤하경은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술기운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눈앞의 강현우조차 흐릿하게 느껴져 마치 꿈속 같았다.윤하경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아, 진짜네. 현우 씨 맞구나.”술이 겁 많은 사람도 용감하게 만든다더니 지금의 윤하경은 평소 강현우 앞에서 보이던 위축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오히려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꼬집고 뺨을 살짝 잡아당기기도 했다.“근데 왜 이렇게 여러 명이지...”윤하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말과 함께 흐르는 달큼한 숨결이 강현우의 목덜미에 닿자,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조금씩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그 순간, 주저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갑작스러운 키스에 윤하경의 머릿속은 잠시 정지된 듯 멍해졌고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밀착시키고는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그래서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된다는 건데?”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술에 취한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순하고 약해 보였다.“모르겠어...”그녀의 대답에 강현우는 코끝으로 그녀의 코를 슬쩍 스치듯 웃었다.“그럼 제대로 느껴보면 알겠네.”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그녀를 덮쳤고 키스는 점점 깊어지고 지배적으로 변해갔다.평소에도 강현우에게 한 번도 제대로 저항해 본 적 없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술에 취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생각은 흐릿해졌고 몸은 이미 그가 이끄는 감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부끄러움조차 사라진 그녀는 점점 더 나른하게 무너져갔다.“응...”작은 신음이 그녀 입에서
“정말 우연이네요.”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거절했다.“하지만 제가 일이 좀 있어서요. 귀한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오건우는 가볍게 웃었다.“무슨 시간 낭비입니까. 우리 협력 관계잖아요. 같이 타시죠, 마침 협력 얘기도 좀 나눌 수 있겠고요.”윤하경은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예전에 오건우와 마주쳤을 때 강현우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떠올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괜찮아요, 사람 오기로 했어요.”그냥 거짓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옆에 검은 벤츠 한 대가 멈춰 섰고 운전석 창문이 열리더니 용천수의 얼굴이 나타났다.“하경 씨, 강 대표님께서 제가 모시러 오라고 하셨습니다.”그 말과 함께, 그는 오건우를 힐끔 도발하듯 바라봤고 험상궂은 얼굴에 살짝 웃음기까지 섞인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가 나타난 게 의외였는지 잠깐 멈칫했지만, 결국 오건우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보시다시피, 정말 일이 생겼네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협력 관계인 만큼, 괜히 틀어질 필요도 없었다. 윤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오건우 옆을 지나 용천수의 차에 탔다.차에 오르자마자 용천수는 액셀을 밟아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고 오건우는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감시가 아주 철저하군.”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차를 돌렸다.차 안.윤하경은 뒷좌석에 앉아 표정이 꽤 차가웠다.“왜 당신이죠?”용천수에 대한 인상은 좋을 수가 없었다. 어깨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그 모든 시작이 바로 이 남자였고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 했지만, 불쾌감은 숨기기 어려웠다.운전대를 쥔 용천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없이 손에 힘을 주며 한마디 했다.“고마워요.”“뭐라고요?”목소리가 낮아 처음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이번엔 더 또렷하게 말했다.“고맙다고요. 당신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테니까.”윤하경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무슨 소리예요. 저는 그런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윤하연이 그 짓 당했을 땐 그렇게 분노하시지도 않더니요? 설마... 진짜 딸이라도 되는 거예요?”장난으로 던진 말에 윤수철의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고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이성을 잃은 듯 고함쳤다.“무슨 헛소리야, 네가 지금!”“헛소리?”윤하경은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지금 아버지 표정 보세요. 꼭 꼬리를 밟힌 고양이 같잖아요.”윤수철은 말문이 막혀 이를 악물며 분노만 삭일 뿐이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억지로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하경아, 하연이는 아직 어리잖니. 실수할 수도 있지. 한 번의 기회쯤은 줘야 하지 않겠냐.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자매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어?”그는 어딘가 감정이 담긴 듯 말했지만 윤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외면한 채 억지로 말을 이었다.“우리 둘 다 세상 떠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너희 자매뿐이야. 이런 걸로 평생 원수로 남는 건, 너무 안타깝잖니. 하연이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했는데 네가 이러면 걔 인생은 어떻게 되겠어?”진심을 담은 척하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윤하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진 듯 웃어버렸다.“푸하하...”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긴 했지만 그 웃음 속엔 조롱과 냉소가 섞여 있어 윤수철조차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만지작거렸다.윤하경은 웃음을 멈추고 이제야 진지한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봤다.“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하경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줄 알고 얼굴에 희미하게 희망을 띄웠다.“하경아, 혹시 강현우에게 한마디만 해줄 수 있겠어? 그 사람이 도와준다면 가능하지 않겠나 해서..”“...”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이란 걸 왜 몰랐을까 싶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길 향해 ‘남자한테 몸을 팔았다’고 쏘아붙이더니 이제는 그 상대에게 가서 부탁 좀 해달라니.“하하하하...”윤하경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