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탐정으로부터 연락이 온 건 사흘째 되는 날 오전이었다. 윤하경은 휴대전화 화면을 보며 천천히 눈을 좁혔다. “이거...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데?” 애초에 임수연이 처절하게 몰락하기 전에 충분히 괴롭혀 줄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왔다. 그날 오후, 윤하경은 짐을 싸서 다시 윤씨 저택으로 들어갔고 마침 저녁 시간이어서 가족들이 모두 집에 있었다. 거실에서는 윤수철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고 임수연은 곁에서 차를 우려내며 다정한 부부처럼 보였다. 윤하경은 캐리어를 끌고 들어서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아빠, 아줌마. 두 분 다 집에 계셨네요?” 그녀의 목소리에 거실의 분위기가 묘하게 얼어붙었고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고 윤하경을 바라봤다. 임수연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왔어? 하경아.” 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요? 제가 돌아오니까 불편하세요?” 임수연은 뭐라고 대꾸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불편하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입을 연 건 윤수철이었다. “며칠 전에는 아주 시원하게 나가더니 갑자기 돌아와서 뭘 하겠다는 거야?” 윤수철의 말에도 윤하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손을 잡아 흔들었다. “아빠, 그런 말씀 마세요. 이 집이 제 집인데 제가 안 돌아올 이유가 있나요?” 그녀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이어갔다. “사실 제가 요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앞으로는 아빠한테 더 잘해야겠더라고요. 효도도 좀 하고요.” 물론 속으로는 ‘아주 제대로 된 한판을 벌여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해맑게 웃었다. 임수연은 그런 윤하경을 곁눈질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 여우 같은 계집애가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윤하경은 머리를 긁적이며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강현우를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대략 두세 달 정도 된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정말 슬슬 질릴 때가 됐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에게 붙어 있는 여자들은 한 달을 넘기는 일조차 드물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었다. ‘내가 특별한 것도 아니고...’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 방문이 조용히 두드려졌다. “하경 씨, 저녁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유 집사의 목소리였다. 윤하경은 빠르게 생각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금방 내려갈게요.” 거실로 내려가니 이미 저녁 식사가 시작된 상태였다. 윤수철과 임수연은 각자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녀를 기다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지만 윤하경은 개의치 않고 익숙하게 제 자리에 앉았다. 식사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은근히 임수연을 향했다. 그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임수연은 약간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여보, 들으셨어요? 얼마 전에 이태준 회장의 아들, 이석훈 씨가 사고를 당했대요.” “이석훈? 무슨 사고?” 윤하경은 젓가락을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이석훈?' 그녀는 태연하게 갈비찜 한 점을 집어 들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임수연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차 사고가 났다는데 팔을 심하게 다쳤대요. 거의 못 쓰게 될 정도로 말이에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윤하경을 힐끔 쳐다봤다. 그 눈빛은 마치 '너랑 상관없는 일은 아니겠지?'라고 묻는 듯했다. 하지만 윤하경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임수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하경 씨가 이석훈 씨와 있었던 일은 우리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 이 기회에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또 나를 끌어들이네?’ 눈앞의 여자가 참으로 질기게도 물고 늘어진다
역시나,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임수연은 서둘러 외출했다.윤수철은 서재로 들어가 버렸고 윤하경은 거실 소파에 편히 기대앉아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밤이 깊어지고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킬 무렵, 마침내 임수연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녀는 최대한 소리 없이 움직였지만 소파에서 눈을 감고 있던 윤하경은 인기척을 감지하고 눈을 떴고 천천히 손을 뻗어 방 안의 스탠드 조명을 켰다.“어머, 아줌마 오셨어요?”임수연은 깜짝 놀라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너 아직 안 자고 뭐 하는 거니?”윤하경은 기지개를 켜며 다가갔다.“아, 아줌마가 늦게까지 안 들어오시길래 걱정됐죠. 밤길 위험하잖아요. 혹시 길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요.”그녀는 싱긋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게다가 아줌마가 저 때문에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선물 고르러 다녀오셨잖아요?”임수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딘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윤하경의 미소가 영 꺼림칙했다.“됐고 늦었으니까 얼른 들어가 쉬어.”임수연은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발길을 돌리려 했다.그런데 그때, 윤하경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가볍게 냄새를 맡았다.임수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아, 아줌마한테서 좋은 향이 나서요.”윤하경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이거 어떤 향수예요? 전에 맡아본 적 없는 향인데... 혹시 어디 브랜드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저도 한번 써보고 싶은데요?”그 순간, 임수연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그녀는 본능적으로 자기 몸에 밴 향을 맡아보려 했다.그녀의 반응은 충분히 수상했고 윤하경은 그런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그냥 궁금해서요.”윤하경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줌마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써보고 싶어지네요. 하나만 빌려주시면 안 돼요?”“지금 당장은 없다니까. 필요하면 나중에 하나 사서 줄게.”“정말요? 약속하셨어요!”윤하경은 장난스럽게 윙크를 날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임수연이 뒤
임수연은 애써 미소를 유지하려 했지만 입가가 떨리는 걸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찰나, 욕실 문이 열리며 윤수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윤하경이 방에 있는 걸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또 무슨 일로 왔어?” 윤하경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줌마한테 물건 하나 빌리러 왔어요.” 윤하경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덧붙였다. “어제 아줌마한테서 나던 향수가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외출 전에 좀 써보려고 했는데 방에 없더라고요?” 그 말에 임수연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윤하경의 손을 잡았다. “어머, 그거 말이구나! 마침 어제 다 써서 버렸어.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다면 오늘 백화점에 가서 같은 걸 사다 줄게.” 윤하경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점점 길어지자, 임수연은 왠지 모르게 속이 불편해졌다. 임수연은 그러다 자신이 이 상황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윤하경도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입가의 미소가 점점 더 부자연스러워지고 있을 때쯤, 윤하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기대할게요.” 그렇게 말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고 임수연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뭔가 알아챈 걸까?’ 임수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윤하경은 출근 준비를 했다. 그녀는 이틀 연속 집에서 밥을 먹었지만 윤하연을 본 적이 없었고 마치 일부러 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윤하경은 언제나처럼 회사를 향해 출발했고 한편, 임수연은 약속대로 혼자 이석훈을 보러 병원으로 출발했다.윤하경은 임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윤하경도 직접 가서 그 난장판을 구경하고 싶긴 했지만 이석훈의 얼굴을 다시 보는 건 생각만 해도 역겨웠다.윤하경은 이석훈이 자기가 ‘헤븐’에 갔던 걸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번 해보라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걸 알아야 할 이유가 없어요.” 그녀의 무뚝뚝한 반응에 배지훈은 순간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입을 삐죽 내밀며 애써 귀엽게 보이려 했다. 그는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스타일에 깔끔한 패션 감각을 가지고 있어, 이런 행동이 어색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윤하경은 무덤덤하게 그를 힐끗 보고는 다시 관심을 끄는 듯 시선을 돌렸다. 배지훈은 살짝 풀이 죽은 듯했지만 이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요? 이번 디자인 비용을 무료로 해드릴게요.” 이 말에 윤하경의 눈빛이 반짝였다. “정말? 약속한 거예요?” 배지훈의 디자인 비용은 결코 저렴하지 않았다. 자잘한 비용까지 포함하면 수천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배지훈은 배씨 가문의 둘째 아들인데 수천만 원 정도의 돈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왜 이렇게 열심히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을까? 물론, 그런 건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고 남의 사생활을 깊게 파고들 취미도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배지훈은 그녀를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돈에 환장한 사람 같으니라고.” 윤하경은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죠?” 배지훈은 그녀의 앞에서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3일 후, 우리 형 배지훈과 진해리의 약혼식이 있어요. 나랑 같이 가줄래요? 내 파트너로.” “배지훈과 진해리가 약혼한다고요?” 윤하경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니까요.” 배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요? 설마 우리 형한테 관심 있었던 거 아니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그녀는 눈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진해리는 원래 강현우와 약혼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
윤하경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지난번에 아버지랑 같이 만난 이후로는 본 적도 없어요.” 윤하경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설사 이석훈이 어디 가서 자기 이름을 거론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날 '헤븐'에서 있었던 일은 당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몰랐고 설령 그가 떠벌리고 다닌다고 해도 결국 창피한 건 본인뿐이니까. 상류 사회에서 체면은 가장 중요한 법, 그러니 이석훈이나 이씨 가문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진 못할 것이다.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물었다.“아줌마, 혹시 어제 준비한 선물이 별로라서 이씨 가문에서 기분이 상한 거 아니에요? 어제 늦게까지 신경 써서 고르셨다던데 이렇게 된 거 보면 참 안타깝네요.” 이 말 한마디로, 모든 책임을 임수연에게 떠넘겼다. 그러자 윤수철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어제 무슨 선물을 준비했길래 이렇게까지 된 거야?” 임수연은 순간적으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대답을 못 했다. 최근 돈이 궁했으니 제대로 된 선물을 준비할 리가 없었다. 고작 몇백만 원 주고 산 산삼 한 뿌리가 전부여서 겉으로 보기에는 꽤 초라했을 것이다. “저... 그래도 정성껏 준비한 선물이었어요. 그런데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나한테 손을 대요?”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고 그 말에 윤하경이 바로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아무리 그래도 폭력은 안 되죠.” 그러더니 일부러 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낫겠네요.” 그 말에 거실이 순간 싸늘해졌다. 임수연과 윤수철이 동시에 그녀를 노려봤다. “닥치고 올라가!” 윤수철이 버럭 소리쳤지만 윤하경은 이미 볼 거 다 본 상태였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임수연이 자초한 일, 한 번쯤 당할 때도 됐다. 그녀는 만족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힐끔 돌아보았다. “근데 아줌마 어제 사주신다는 향수는 샀어요?” 임수연은 순간적으로
윤하연은 윤하경을 보자마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언니.” 윤하경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을 뿐, 별다른 대꾸도 없이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 윤하연과는 말 한마디 섞는 것도 불쾌했다. 자신에게 했던 짓들은 잊은 듯, 태연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이 역겨울 뿐이었다. 연기력 하나는 확실히 임수연에게 제대로 배운 듯했다. 그날 저녁, 임수연은 내려오지 않았고 대신 윤하연이 분주히 윤수철을 챙기며 식사를 도왔다. 그릇을 건네고 반찬을 덜어주며 한껏 애를 쓰더니 이내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윤하경을 쳐다봤다. 꼭 자기가 더 사랑받는다고 과시하는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윤하경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조용히 식사를 마쳤고 그대로 자리를 떠 방으로 올라갔다. 밤 11시쯤, 옆방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별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잠이 오지 않아 발코니로 나왔는데 뜻밖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 키가 크고 반듯한 남자가 서 있었다. 윤하경은 그를 보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구지호?’설마 윤하경을 찾으러 온 걸까? 그러나 다음 순간 윤하연이 별장에서 뛰어나가더니 그의 품에 안겼다. 윤하경은 굳어진 채,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둘이 다시 만나고 있었던 건가?’믿기지 않는 광경에 숨이 막힐 듯했다. “지호 오빠,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윤하연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고 구지호는 미묘한 눈빛을 띠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윤하경이 서 있던 발코니였다. 윤하경은 구지호와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급히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구지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윤하연은 그런 것도 모른 채, 그의 품에 바짝 달라붙었다. “오늘따라 오빠가 더 보고 싶었어.” 구지호는 그녀를 떼어내듯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지나가다 들렀어.” “정말?” 윤하연의 눈빛이 흔
두 사람의 숨결이 엉켜들었다. 구지호가 힘을 주자 윤하연은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곳이 비록 사람이 적은 별장 구역이긴 했지만 완전히 독립된 공간은 아니었다. 누군가 들으면 윤하연은 더 이상 윤씨 집안에서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을 것이다.윤하연은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으며 눈을 흘겼다. “지호 오빠... 좀 살살 해.” 구지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낮게 웃었다.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소리 질러도 돼.” 그의 목소리에는 뭔가 다른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윤하경이 들을 수 있도록 그는 더 깊이 몸을 밀어붙였다. 그러자 윤하연은 점점 더 나른해졌다.그때 창밖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구지호는 몸을 일으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고 창문을 열지 않은 차 안은 곧 연기로 가득 찼다. 윤하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런 뒤 그의 품에 다시 기대며 나직이 속삭였다. “오빠, 우리 이제 가족들한테 말해야 하지 않아? 이제 몰래 만나는 것도 지쳤어. 나도 당당하게 오빠와 만나고 싶어.” 구지호는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고 어둠 속에서 그의 시선은 묘하게 차가웠다. 하지만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답했다. “그래, 그럴까?” 그의 예상외로 빠른 대답에 윤하연의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정말? 오빠 최고야!” 윤하연은 구지호를 끌어안고 그의 볼에 뽀뽀했다.그러나,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구지호가 덧붙였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뭔데?”...새벽 한 시쯤, 윤하경은 옆방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원래 깊이 잠드는 편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눈을 떴고 어두컴컴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윤하경이 방문을 열자, 문 앞에 윤하연이 서 있었다. “언니! 이번 주말 내 생일 파티를 열 거야.” 윤하경은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아, 그래? 그럼 생
차 안에는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 향수 냄새가 감돌고 있었고 이건 강현우의 향수 냄새가 아니었다. 그와 오래 알고 지내면서 윤하경은 그에게서 언제나 같은 향만을 맡아왔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코를 스치는 향은 완전히 달랐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이건 여자의 향수 냄새임을 알 수 있었다.달콤하면서도 묘하게 유혹적인 향 하지만 너무 달아서 역겨울 정도였다.순간,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강현우를 힐끔 바라보았다.‘아마 이런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겠지. 젊고 예쁘고 애교 많고...’그렇게 생각하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고 지나갔다.윤하경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자리로 옮겼다. ‘그러면 내가 앉은 이 자리에, 방금까지 다른 여자가 앉아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강현우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있다가 이 향수를 묻혀 온 걸까?’어느 쪽이든 기분이 몹시 나빴다.이때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윤하경은 이내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저기, 강 대표님. 저 오늘 몸이 좀 안 좋네요. 시간도 늦었으니 다음에 다시 뵙는 게 어떨까요?”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변명을 했다.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향수 냄새가 가득한 상태에서 도저히 그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강현우 앞에서 아무리 낮은 자세를 취한다 해도 대체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나 윤하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강현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두운 눈빛이 그녀를 꿰뚫듯이 바라봤다.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고 강현우는 얕게 웃으며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몸이 안 좋다고?”“네.”“어디가?”강현우의 시선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윤하경은 서둘러 적당한 핑계를 떠올렸다.“그게, 그냥...”윤하경은 원래 거짓말을 잘 못했고 특히, 강현우 앞에서는 더더욱 연기를 못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기침을 한 번 하고 나지막이 덧붙였다.“그냥, 그... 매달 오는 그날이에요.”그
‘또?’윤하경은 입술을 삐죽이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온 이후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며 강현우의 존재조차 잊고 지낼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서 연락이 오니 본능적으로 불안해졌다. 특히, 그와 만날 때마다 보여주는 광적인 집착이 더욱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멍하니 고민하고 있는 사이,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을 보니 ‘온지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윤하경은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쯧, 우리 윤 부대표님. 요즘 너무 바빠서 본인 성도 잊으신 거 아니야?” 온지우의 익숙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하경은 목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고 지금 농담을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돈, 준비 끝났어. 해외로 한 바퀴 돌리고 왔으니까, 흔적 하나도 안 남았어. 카드 번호 줘. 바로 이체해 줄게.” 윤하경은 살짝 멈칫했다. 그제야 이 중요한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마워.” 윤하경은 짧게 생각한 뒤,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기부해.” 윤하경이 처음에 이 돈을 요구한 것은, 그동안 임수연이 윤씨 가문에서 빼돌린 돈을 토해내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임수연의 손을 거친 돈은 더럽게 느껴졌다.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 돈을 전부 기부하기로 했다. 차라리 좋은 일에 쓰는 것이, 최소한 덕이라도 쌓는 길이었다.온지우는 순간 말을 멈추더니 이내 키득거렸다. “와, 통 크네. 손 한 번 휘둘러서 몇십억을 그냥 내놓는다고? 기부자 이름은?” “익명으로.” 온지우는 한껏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역시 부자야. 근데 내 밥값은 잊으면 안 된다?” “네가 장소와 시간 정해서 보내 줘.” 그녀는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고 다시 의자에 기대어 커다란 창밖을 바라보았다. 네온사인이 빛나는 야경이 마치 화려한 외투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누구도 모르는 더러운 진실들이 도사
“윤 회장님의 위임을 받아, 앞으로 저는 인사부와 재무부를 직접 관리하게 됩니다.”윤하경은 단정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윤수철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불만이 동시에 스쳤다.“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그는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윤하경이 오자마자 한빛 그룹의 가장 중요한 두 부서를 장악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그러나 윤하경은 태연하게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유지했다.“윤 회장님, 정말로 그런 말씀을 안 하셨나요?”그녀의 눈빛에는 분명한 경고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잠시 침묵하던 윤수철은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기현수와 계약을 체결할 당시, 부대표가 인사부와 재무부를 담당하게 되어 있다는 조항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그때는 단순한 거래로 받아들였지만 오늘 윤하경의 등장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그는 짧은 침묵 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맞아. 내가 깜빡했군.”윤하경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윤 회장님께서 기억하셨다니 다행이네요.”그녀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윤수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마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저 직책상의 것일 뿐인 듯했다.윤수철은 어두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회의실을 나섰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하경은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백정연과 재무부장 주주를 향해 말했다.“지난 1년간의 재무 보고서와 자금 내역을 전부 보내 주세요. 앞으로 당분간은 야근이 좀 많아질지도 모르겠네요.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곧장 회의실을 떠났다.그녀가 나가자, 회의실은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윤 회장님한테 딸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강단 있는 분일 줄은 몰랐네요.”“그러게요. 저분, 예전 하 대표님하고 비슷한 느낌이 있어요.”“이제야 우리 회사도 희망이 보이네.”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몰래 윤하연을 쳐다보았고 누가
"같이 해고...”윤하경이 입을 열려는 순간, 윤하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녀의 뒤에는 아까까지 없었던 두 사람이 따라왔다. 바로 이한과 추지운이었다.윤하연은 얼굴을 찌푸리며 회의실로 들어오며 말했다.“겨우 조금 늦었다고 바로 해고라니?”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한 번 훑어보고 표정을 굳혔다.“지금 이의를 제기하는 거야?”윤하연은 주변의 시선을 한 번 훑어보며 입술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그냥 네가 너무 인정사정없는 것 같아서.”“하!”윤하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인정사정없다고?”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내 기억이 맞다면 백 부장님이 이 회의에 대해 한 시간 전에 공지했는데. 그리고 윤 부장의 사무실은 여기서 걸어서 10분 거리잖아. 그런데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어. 이걸 내 권위를 무시하는 거라고 봐도 될까 아니면 윤 부장은 업무 능력도 부족한 데다가, 기본적인 실행력조차 없는 거야?”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렇게 직격탄을 맞자, 윤하연의 얼굴이 붉어졌다.“나는...”“조용히 해. 아직 내 말이 안 끝났잖아.”윤하경은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본 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두 분이 이한과 추지운 부장님이죠? 제가 알기로 두 분은 반년 동안 실적이 전혀 없는 상태더군요. 출퇴근 기록을 봐도 지각과 조퇴가 일상인데... 설마 회사의 규정을 못 읽으신 건가요?”이한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그는 이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았다.“저는 이 회사에서 5년 동안 일했습니다. 저를 이렇게 쉽게 해고할 순 없어요.”“웃기시네요.”윤하경은 냉소하며 말했다.“저는 이 회사의 부대표이고 인사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시면 법적으로 해결하세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두 분은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닙니다. 나가 주세요. 우리 회사의 기밀을 더 이상 들을 필요는 없겠죠.”이한과 추지운은 예상치 못한 강경한 태도에 얼어붙었다.지금까지
윤하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백정연은 쉴 새 없이 불평을 쏟아냈다. “걔가 있는 부서는 우리 회사에서 퇴사율 1위야. 부서장이라면서 팀원들 챙기기는커녕... 맨날 네 아빠만 믿고 직원들 실적이나 가로채고 있지. 사람을 아무리 뽑아도 모자랄 지경이라니까. 진짜 지긋지긋해.” 보통 백정연은 회사에서 웬만한 일에는 신경도 안 쓰는 성격이었지만 윤하경 앞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비웃듯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윤 대표 덕분에 다들 싫어하면서도 아무 말 못 하고 있었거든. 이제 네가 왔으니까, 걔도 오래 못 버틸걸?” 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저한테 그렇게 자신 있으세요? 혹시 제가 와서 대충 자리만 차지하고 놀면 어쩌시려고요?” “쯧.” 백정연이 피식 웃었다. “그럴 거였으면 벌써 나한테 이렇게 많은 자료를 요청하지도 않았겠지.” 그녀는 몸을 살짝 뒤로 기울이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 새로 부임한 부대표님께서는 첫 번째 불길을 어디에 지피실 건가요?” 윤하경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부터 모든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녀가 온 이유는 단순히 ‘부대표’라는 직함을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윤씨 가문을 완전히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윤수철이 계속 저렇게 방만하게 운영하다가는 회사 자체가 망가질 것이 뻔했다. “한 시간 후, 회사의 모든 중고위급 직원들에게 회의 공지를 보내 주세요.” 백정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혹시 일부러 회의에 안 오는 사람들은 어쩌려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일부러 제 체면을 깎아내리려는 사람이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안 오면 간단하죠. 즉시 해고 절차를 밟으면 됩니다.” 그녀의 입가에 얕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구든 예외
윤수철은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침묵한 후 윤하연을 향해 말했다. “당분간 집에서 푹 쉬어라.” “왜요?” 윤하연은 상처받은 듯한 얼굴로 윤수철을 바라보았다. “설마 언니가 회사에 왔다고 해서 아빠는 저를 보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내가 굳이 말해야겠어? 집에서 몸이나 잘 추슬러라. 하루 종일 회사에 와서 창피한 짓 하지 말고.” 이렇게까지 강한 어조로 말한 건, 아마도 지금까지 윤수철이 윤하연에게 했던 말 중 가장 날카로운 것이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하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빠, 저... 저 정말 어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직도 나한테 거짓말할 거야?” “이미 임 의사한테 다 들었어. 네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소용없어.” 윤수철은 거짓말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윤하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말해. 그놈들 대체 누구야?” 윤하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임 의사가 전부 다 말했을 줄이야... 분명 입단속을 시켜놨었는데.’ 윤하연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더니 결국 모든 책임을 윤하경에게 떠넘기기로 마음먹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 “저... 제가 말할 수 없는 건, 윤씨 가문에 누가 될까 봐서예요. 게다가 저 사람들, 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어요. 그저 언니가 그곳에 가보라고 해서 갔을 뿐인데 누가 알았겠어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윤하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치 세상에서 가장 큰 억울함을 당한 사람처럼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은 반은 진실, 반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윤수철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짜로 하경이가 그렇게 시켰다는 거야?” “만약 아빠가 못 믿겠다면 언니랑 직접 대질신문을 하셔도 좋아요. 그저... 언니가 저를 그렇게까지 미워할 줄은 몰랐어요.” 윤하연은 흐느끼며 촉촉해진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보았고 눈에는 온통
“아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저한테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윤하연은 윤수철이 자신을 편애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설명? 무슨 설명을 원해?” 하지만 화가 너무 난 나머지, 그녀는 윤수철의 얼굴이 이미 굳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다. 평소 아빠 앞에서 연출하던 순종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는 책상 위에 손을 짚고 계속 따져 물었다. “왜 윤하경이 회사의 부대표가 된 거죠? 그리고 왜 저한테 한마디도 안 해주셨어요? 저도 회사에서 일한 지 오래됐잖아요. 아무리 실적이 없다 해도, 나름 고생한 건 인정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언니가 저보다 유능한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미리 한마디 정도는 해주셨어야죠!” 윤수철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윤하연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특히, 어젯밤 의사가 한 말이 떠오르자 더욱 불편해졌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나는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네가 충격을 받았을까 봐 걱정했는데. 보아하니 괜한 걱정을 한 모양이군.” 그는 원래 윤하연이 겪은 일을 고려해 당분간 회사에서 쉬게 할까도 생각했다. 충격이 컸을 테니 기분 전환도 할 겸 여행이라도 보내줄까 했는데 이렇게 기운 넘치게 회사까지 찾아와 따지는 걸 보니 그의 배려가 얼마나 쓸데없는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아빠의 말에 윤하연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급히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마치 기운이 빠진 사람처럼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 아무리 힘들어도, 일은 소홀히 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띠며 덧붙였다. “아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제야 윤수철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사실 나도 윤하경이 회사에 올 줄 몰랐어.” “네?” 윤하연은 멍해졌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아빠의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윤수철은 표정을 굳힌 채 먼저 앞장서 걸었다.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 그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딸이 자신의 회사에 입사하는데 정작 본인은 마지막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더군다나, 윤하경이 외부의 힘을 이용해 회사에 들어왔다면 앞으로 그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순간 그녀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한빛 그룹에서 준비한 부대표 취임식은 상당히 성대했다. 마치 작은 연회를 연 듯, 최상층 사무실이 파티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중앙에는 와인 바와 핑거푸드가 놓여 있었고 윤수철이 이 새로운 부대표를 환영하기 위해 꽤 공을 들였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기현수가 단상에 올라 짤막한 인사와 함께 윤하경을 소개하고 마이크를 넘겼다. 윤하경은 자연스럽게 무대 위로 걸어나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여유로웠고 입꼬리는 가볍게 올라갔다. “한빛 그룹에서 일하게 되어 기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다들 오늘 와인 많이 즐기시고요.” 그렇게 짧고 간결한 인사 후, 윤하경은 무대를 내려왔다. 그리고 내려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윤하연은 취임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 사이에서 윤하경을 발견하면서 순간적으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그녀는 곧 옆에 서 있는 기현수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 순간, 윤하연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녀는 시선을 살짝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다가갔다. “아빠.” 그러면서 은근히 기현수에게 쳐다보며 웃었다. 하지만 윤수철은 예상치 못한 방문에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몸도 안 좋은데 왜 나왔어?” “오늘 부대표님 취임식이라면서요? 그래도 우리 회사 부대표님인데 제가 빠지면 좀 그렇잖아요.”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기현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윤하연이라고 합니다. 신임
기현수는 윤하경의 표정을 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왠지 모르게, 지금 그녀의 이 묘한 미소가 강현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떤 일이든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은, 그런 표정이었다.하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그냥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애써 웃었다.“윤 부사장님 말씀대로죠.”그가 아무리 계약서에 이름을 올렸어도, 사실상 그는 그냥 얼굴마담에 불과했다.이 자리는 윤하경을 위한 것이었고 그는 단순히 그녀를 돕는 역할일 뿐이었다.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던 기현수는, 윤하경이 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하는 순간 긴장했다.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시간 됐네요. 이제 가죠.”그렇게 두 사람은 한빛 그룹으로 향했다.한빛 그룹에 도착하자, 윤하경은 건물 곳곳이 새로 단장된 듯한 것을 눈치챘다.깔끔하게 정리된 로비며 반짝거리는 대리석 바닥까지, 아무리 봐도, 오늘을 위해 꽤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아버지가 새로 오는 부대표를 위해 이 정도까지 준비하다니.’윤하경은 속으로 비웃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진짜 재미있는 건 이제부터였다.과연 윤수철이 자신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녀는 기대가 됐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로 눈앞에 윤수철이 서 있었고 그는 손을 내밀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어서 오...”하지만 그의 표정은 단 한 순간에 굳어버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사람이 윤하경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그의 얼굴이 마치 멈춘 듯 경직되었다.“네가 여길 왜 왔어?”목소리에는 분노가 스며들어 있었지만 윤하경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왜긴요? 출근했죠.”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오늘부터 한빛 그룹에서 일하게 됐거든요.”윤수철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내가 직접 너한테 회사 오라고 했을 때는 거절하더니 지금 와서 무슨 속셈이야?”그는 주변에 있던 임원들이 듣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쏘아붙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