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윤하경은 이마를 문지르며 찡그렸다.눈을 들어보니 바로 앞에서 강현우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고 어딘가 비꼬는 듯한 기색이 어렸다.'이 사람, 설마 나 스토킹하는 거 아냐?'어디를 가든 강현우와 마주치는 것 같았다.아직 의문을 던지기도 전에, 강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뭐야, 따라온 거야?”“...”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반박하려고 하는데 그 순간 강현우의 뒤쪽에 있던 룸의 문이 열렸다.“현우 오빠.”문을 연 사람은 25, 26세쯤 되어 보이는 꽤 예쁜 여성이었다. 그녀는 윤하경을 보자마자 순간 멈칫하더니 다시 강현우를 향해 말했다.“오빠, 안에서 부르고 있어요.”그러고 나서 다시 윤하경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오빠 친구분이세요? 같이 들어가서 놀아요.”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강현우를 한 번 흘끗 보고 말했다.“아니요, 옷이 더러워져서 먼저 가봐야 해요.”그녀는 강현우와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서로 필요할 때만 얽힐 뿐, 서로의 사생활에 깊이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아, 아쉽네요.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놀아요.”여자는 여전히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다.윤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바로 옆에서 강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먼저 들어가. 난 오늘 이만 먼저 갈게.”여자는 그의 말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오빠, 벌써 가요? 오늘 우리 언니 생일인데...”하지만 강현우는 늘 그렇듯 냉정했고 그녀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이미 걸음을 옮겼다.여자는 발을 동동 구르더니 결국 윤하경을 흘깃 보며 짜증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룸 안으로 들어갔다.윤하경은 건물을 나와 차 앞에 서서 문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허리를 감싸는 강한 손길을 느꼈다.순간적으로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순간 멍해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현우와 눈을 마주쳤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현우 씨
강현우는 윤하경의 말을 듣고 잠시 동작을 멈추더니 그녀를 쳐다보며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현우 씨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잖아요. 이렇게 인색하게 굴지는 않겠죠?“강현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알잖아, 난 나한테 조건을 거는 사람은 정말 싫어하는 타입.”윤하경은 조금 더 다가가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했다.“정말, 그저 작은 일일 뿐이에요.”그녀는 강현우의 가슴에 살짝 몸을 기대며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교를 섞어 말했다.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그 작은 얼굴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강현우처럼 차가운 남자는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부드럽게 다가가는 편이 더 효과적이다.그녀가 말이 끝나자마자 강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자,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결정할게.”윤하경은 그의 반응에 미소를 지으며 마음속으로 승산이 있다고 확신했다.그녀가 무언가를 하려던 그 순간, 차가 멈추었다.강현우는 가볍게 눈을 움직인 후, 여유롭게 차량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그를 따라 내렸다.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이라면 그만큼 태도도 갖추어야 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그 일이, 오직 강현우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그래서 이번만큼은 그를 놓칠 수 없었다.그녀는 강현우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 순간,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주도권은 강현우에게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윤하경의 생각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결국, 그녀는 그의 압도적인 리드에 휘말리며 신음이 터져 나왔다.그녀는 그 소리조차 부끄러워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있었다.그러나 강현우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더 자극적으로 만들며 점점 더 거세게 다가왔다.결국, 윤하경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목을 감고 간신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그만해요, 제발.”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결국 윤하경은 의식을 잃고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보니 꽤 친밀한 사이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윤하경은 지금까지 저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강현우와 이렇게 가까운 사이인 걸 보니 아마도 금융계나 대기업의 명문가에서 온 사람이겠지. 윤하경은 짧게 침묵한 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강 대표님, 손님이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강현우는 가볍게 눈썹을 움직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말하던 윤하경이 갑자기 차가운 어조로 변한 것이 다소 의외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 나가고 있었다. 현관을 지나가려던 순간, 방금 전 도착한 여자가 우아한 자세로 서서 유심히 걸려 있는 유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윤하경은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굳이 대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오히려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송시안이에요.” 윤하경은 그녀의 이름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딱히 시비를 거는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예의상 대답했다. “윤하경입니다.” 다만 송시안의 친근한 태도와 달리, 윤하경의 말투는 조금 건조하고 냉담했다. 하지만 송시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그녀를 슬쩍 바라보더니 뒤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경 씨, 조금 더 있다가 가지 않으실래요?” 그 말투는 마치 자신이 이 집의 안주인이라도 된 것 같았고 확실히 강현우와 가깝다는 게 느껴졌다. 윤하경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러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하이힐 소리를 내며 그녀를 지나쳐 걸어 나갔다. 송시안은 윤하경의 우아하고 세련된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머금었던 미소를 서서히 지웠다.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고 이내 원래의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로 온 거야?” 송시안은 살짝 놀란 듯했지만 곧바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강현우를 바라봤다. “현우 오
두 사람은 겉으로 보기엔 그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속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송시안이 조그마한 상자를 이 집사의 손에 쥐여 주자, 그녀도 결국 살짝 마음이 흔들린 듯 보였고 잠시 망설이던 이 집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윤하경 씨를 데려오신 건 총 세 번뿐이에요. 그중 한 번은 배지훈 씨 일행과 함께 온 자리였고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기침을 하고는, 송시안을 향해 속삭였다. “하지만 이건 제가 말한 거 아닌 걸로 해 주세요.” 송시안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원래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까요.” “혹시라도 사모님께서 물어보셔도, 절대 이 집사님이 말한 거라곤 하지 않을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힐끗 침대 위를 바라봤다. “저 침구들, 다 치워 주세요.” 침대 위엔 어젯밤의 흔적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강현우와 윤하경이 함께 있었을 장면이 떠올랐다. 속이 뒤틀릴 것처럼 불쾌했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침대 한쪽에 떨어져 있는 작은 귀걸이가 눈에 띄었다. 송시안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는 이 집사를 향해 말했다. “이건 제가 직접 윤하경 씨에게 돌려드리죠.” 이 집사는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한편, 윤하경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소파 위로 던지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몸을 소파에 기댔다. 뭔가 모르게 기분이 나빴지만 그 이유를 딱 꼬집어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곧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며칠 동안 회사에 가지 못한 탓에 업무가 쌓여 있었고 물론 대부분을 소지연에게 맡겨두긴 했지만 여전히 직접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온라인으로 회의를 열어 최근 프로젝트 상황을 점검하고 업무를 조율하던 중,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윤하경이 차를 몰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원래 윤수철 혼자만 나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테이블에는 여러 명이 앉아 있었다. 윤수철과 임수연뿐만 아니라, 이설 주얼리의 대표 부인 이태임과 그녀의 아들 이석훈까지 있었다. 순간, 윤하경의 가슴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며들었다. 이태임과 그녀의 아들을 개인적으로 깊이 알진 못했지만 여러 행사에서 스쳐 지나가듯 얼굴을 본 적은 있었다. 눈빛이 차가워지려던 찰나, 임수연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경아, 드디어 왔구나!” 평소와는 다르게, 그녀의 태도는 마치 친모처럼 다정했다. 이태임은 윤하경을 가볍게 훑어보며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고 그저 잔잔하게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 이석훈은 대놓고 윤하경을 훑어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마치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윤하경은 그런 시선을 느끼자마자 속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함부로 표정을 드러낼 수 없어, 조용히 손을 빼내고는 윤수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이렇게 많은 분이 계실 줄 몰랐어요. 전 아버지와 단둘이 만나는 자리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러자 윤수철이 대답하기도 전에, 임수연이 먼저 나섰다. “아, 그러게. 정말 우연이었어! 우리가 여기 오니까 마침 이태임 사모님과 이석훈 도련님이 계시더라고. 그래서 함께 식사하기로 했지.” 그녀는 마치 이 상황이 정말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인 것처럼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경아, 어서 인사해야지. 이쪽이 이태임 사모님이고 이쪽이 이석훈 도련님이야.” 그리고 이태임을 향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사모님, 이 아이가 저희 큰딸 윤하경이에요.” 그 태도는 정말 한없이 다정하고 친근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진짜 친모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경성에서 그들 집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윤
윤하경은 불쾌함을 억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자리에서 밥을 먹지 않으면 절대 못 나가겠구나.’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고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대답했다. “알았어요.” 어차피 식사 한 끼 하는 데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핸드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때, 옆에서 뭔가 불쾌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악취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찝찝하고 기름진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듯했다. ‘뭐지?’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이석훈이 그녀를 보며 씩 웃고 있었다. “윤하경 씨, 저는 이석훈입니다.” 그는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고 윤하경은 내심 거부감이 들었지만 예의상 짧게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러고는 다시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소지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지금 엄청 이상한 상황에 갇혔어.]하지만 이석훈은 그녀가 피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말을 걸었다. “하경 씨, 직접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면서요?” “네.” “와, 대단하네요. 이렇게 예쁘신데 사업도 잘하시고.” 그의 웃음에는 지나치게 들뜬 기운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문제는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기름진 피부 때문인지, 여름이라 땀이 섞여 더 역겨웠다. 하지만 이석훈은 그녀가 반응이 없자,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하경 씨?” 그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자, 결국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슬쩍 몸을 옆으로 이동하며 거리를 벌렸다. “혹시 저한테 궁금한 게 있으세요?” 이석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네... 하경 씨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시나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윤하경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녀가 바보도 아니고 이게 어떤 상황인지 모를 리 없었다. ‘아버지가 또 나를 팔아먹을 작정이구나.’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
윤하경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이석훈 씨, 오늘 부모님들이 뭐라고 이야기했든 간에, 저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서 식사나 마저 하세요. 전 바래다줄 사람이 필요 없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곧바로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이석훈은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질척거리는 껌딱지처럼 그녀의 조수석 문을 열고 태연하게 차에 올라탔다. “하경 씨, 그냥 편하게 친구가 되고 싶어서 그래요. 왜 이렇게 도망가려고 하세요?” 그는 스스로 안전벨트를 매며 히죽거렸다. 문제는, 이석훈이 덩치가 커서 스포츠카 조수석에 몸을 웅크린 채 앉아야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윤하경은 속으로 비웃음이 나올 뻔했다. 마침 그때, 그녀의 시야에 낯익은 차 한 대가 들어왔다. ‘강현우다.’ 그녀는 속으로 웃으며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 이석훈은 그녀가 갑자기 내리자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경 씨, 어디 가세요?” 하지만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강현우에게 걸어가더니 그의 품에 안겼다. “현우 씨.” 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깔면서 애교 섞인 어투로 말했다. 강현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이번엔 또 무슨 장난이야?”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차갑기만 하던 여자가, 갑자기 애교를 부리며 안겨 오다니.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냥 그의 소매를 꼭 잡고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저 무서워요! 저 사람이 절 괴롭혀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이석훈을 가리켰고 이석훈은 어이없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강현우도 차 옆에 서 있는 이석훈을 보며 눈을 좁혔다. 두 사람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지만 서울에서 웬만한 재벌가 사람들은 서로 얼굴 정도는 아는 법이었다. 이석훈도 강현우가 꽤 유명한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히 경계해야 할 대상은 아
윤하경은 이석훈이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고 얼굴에 미묘한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그리고 무심코 강현우의 팔을 감싸고 있던 손이 긴장한 듯 살짝 움켜쥐어졌다. 강현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고 얇게 입술을 말아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이석훈 씨가 너무 과대 해석하는 것 같은데요? 윤하경은 제 여자가 아닙니다.” ‘역시나...’강현우가 이런 관계를 인정해 줄 리 없다는 걸 윤하경도 알고 있었다. 그와 자신은 어디까지나 계약 관계이고 항상 갑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었고 그에게 있어 그녀는 단순한 '협력자'일 뿐이었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말이 그렇게 단호하게 들리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씁쓸해졌다.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그의 팔을 놓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짜증이 밀려왔다. ‘도대체 몇 번을 같이 잣 있었는데 그까짓 말 한마디도 못 해주는 거야?’그녀가 지금 단순히 이석훈을 피하기 위해 이러는 것이라는 걸 강현우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여전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고 그녀의 체면이야 어찌 되든 관심조차 없었다. 그 순간, 이석훈이 어둡게 웃으며 말했다. “하경 씨,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거짓말까지 한 거예요? 설마 했는데... 현우 씨께선 애초에 당신한테 관심도 없잖아요?” 그의 목소리에는 얕잡아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떴다. ‘관심이 없었다면 왜 그렇게 자주 찾아왔는데?’그녀는 말을 할 필요도 못 느끼고 그냥 뒤돌아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허리에 느껴지는 묵직한 팔. 강현우가 그녀를 힘껏 끌어당기더니 그녀를 자신의 품속에 완전히 가둬버렸다. 순간적으로 놀라서 고개를 들자 그의 날카로운 턱선과 자신만만한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석훈 씨가 내 말을 오해한 것
주미나는 경성에서 꽤 높은 지위와 명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윤하경은 강현우가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지원은 후사경을 통해 윤하경의 놀란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엔 미세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몰랐죠? 그때 형이 얼마나 멋졌는지...” 우지원은 마치 강현우의 열혈 팬처럼 열정적으로 자랑하며 말했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물었다. “그 후에는요?” “주미나 씨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어요. 결국 형이 구지호 씨의 목숨을 위협하며 겨우 주소를 말하게 했죠.” 우지원은 그 말을 마치자 웃음을 터뜨렸다. “한 시간 거리였는데 형은 30분 만에 도착했어요. 차 바퀴가 연기 날 정도였죠.” 우지원은 고개를 흔들며 감탄했다. “제가 여자였다면 진짜 우리 형한테 시집갔을 거예요.” 그는 갑자기 윤하경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쵸? 윤하경 씨.” 윤하경은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를 금세 알아챘다. 우지원은 계속해서 강현우를 옹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윤하경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기술이 발전해서 원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죠.” 우지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여자가 된다고 해도 형수님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윤하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우지원이 왜 자꾸 자신과 강현우의 미래를 얘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결혼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라 강현우가 원해야만 이루어지는 일이었다.차가 시내에 도착하자 윤하경은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내려 주세요.” 우지원은 브레이크를 밟고 돌아서서 윤하경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형수님, 잘 가세요.” 말을 마친 그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 윤하경은 바람이 휘날리는 거리 한복판에 홀로 남았다. 바람이 그녀의 치마를 날리며 길가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외로운 그림 같았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어젯밤 일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그에 대해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가볼게요.” 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윤하경은 발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 문을 조용히 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어젯밤 일이 어떻게 처리됐는지가 아니었다. 강현우라면 주미나가 그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바로 자신의 안전이었다. 윤수철은 결코 자신을 위해 구씨 가문과 맞설 일이 없다는 걸 뼛속까지 알고 있었다. 만약 주미나가 정말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겨냥한다면...‘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며 윤하경은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윤하경은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별장 밖으로 나갔다. 생각에 잠겨 걷던 그녀는 어느새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빠르게 다가오는 차에 의해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급히 사과하며 인도로 돌아가려던 순간 차에서 창문이 내려가며 한 마디가 들려왔다. “형수님, 태워 드릴게요.” ‘형수님?’ ‘이게 무슨... 왜 이렇게 불러?’윤하경은 당황한 얼굴로 차를 바라봤다. 사람을 잘못 봤다고 말하려던 찰나, 운전석에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우지원의 얼굴을 보고서야 멈칫했다. 윤하경은 살짝 표정을 굳히고 차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우지원은 피식 웃으며 차에서 내려 그녀의 쪽으로 다가와 차문을 열어줬다. “타세요. 현우 형이 데려다주라고 보냈어요.” 윤하경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거절하지 않았다. 주변 환경이 꽤 괜찮아 보였고 도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장이었기에 거절하면
그녀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방 안은 조용했다. 강현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이미 한밤중. 머리를 말린 후 침대 가장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려볼까 싶었지만 결국 이불을 들추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늘 하루는 예상치 못한 일들로 가득했다. 몸에 남아 있던 긴장이 서서히 풀리자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대가 미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묵직한 온기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넓은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따뜻한 손길이 가슴 위에 가만히 얹혔다.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눈을 뜨려 했지만 마치 깊은 꿈결 속에 갇힌 듯 쉽게 떠지지 않았다. 그 순간, 악몽이 그녀를 덮쳤다. 작은 집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뒤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분갈할 수 없었고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몸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움직이지 마.” “계속 이러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이 목소리...‘현우 씨?’ 윤하경은 잠결에 익숙한 목소리임을 깨닫자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순간 깊은 곳에서 묵직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치 따뜻한 무언가가 온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비록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옥죄던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윤하경은 몸을 돌려 얼굴을 강현우의 품 속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두 손은 자연스레 그의 단단한 허리를 감쌌다. 강현우는 순간 얼어붙은 듯했다. 그동안 모든 상황을 주도하던 그였지만 윤하경이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손은 공중에서 잠시 멈췄고 예리한 눈빛이 어두운
‘방법을 찾아야 해.’윤하경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그 속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과 공포로 휘몰아치고 있었다.‘이번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하지…’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주미나였다.겉으로 보기엔 상류층 여사답게 우아하고 고상했지만 그 손에 묻은 피를 윤하경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몇 년 전, 구정수의 내연녀가 아이를 가졌을 때 주미나는 그 여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윤하경이었다.잔혹하고 독하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 여자. 그게 주미나의 진짜 얼굴이었다.‘그 수법이 언젠가 나한테 향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생각만으로도 온몸이 떨렸다.무의식중에 손톱을 뜯고 있던 윤하경의 손동작에 강현우가 힐끔 그녀를 바라봤다.“기분 안 좋아?”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슬쩍 웃었다.“혹시 내가 흥을 깨서 그래? 미안한데.”“...네?”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 윤하경은 고개를 들었고 몇 초 후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나서야 얼굴이 벌게졌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강현우는 키득 웃었다.“말도 안 된다고? 나는 네가 날로 부족해서 다른 남자들 불러서 야외에서 색다르게 즐기려는 줄 알았는데?”그 잘생긴 얼굴로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지, 윤하경은 황당함을 넘어 아연실색했다.그녀의 반응이 흥미로웠는지 강현우는 몸을 살짝 기울이며 중얼거렸다.“근데 지금 너, 좀 유혹하는 거 같거든.”익숙한 향기가 스쳤고 그의 눈빛은 장난기와 위협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이 인간은 정말 사람 놀리는 데 재능이라도 있나.’“그만 멍때리고 내려.”강현우가 먼저 차 문을 열었다.공기 속에 긴장이 조금 가셨지만 윤하경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그러자 그가 몸을 숙여 그녀의 눈높이에 맞췄다.“뭐야, 내가 안아줘야 내릴 거야?”“됐거든요!”윤하경이 얼굴을 붉히며 차에서 펄쩍 내렸다.주위를 둘러본 그녀
어두운 방.윤하경은 원래 겁 없는 편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태어나 처음이었다.“기절한 건가?”강현우가 다가와 그녀를 발끝으로 툭 찼다.윤하경은 천천히 눈을 떴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아직이요.”그가 코웃음을 쳤다.“내 침대에 기어들 땐 겁이 없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쫄았어?”그 말에 윤하경은 할 말을 잃었다.‘지금 그 소리 할 타이밍인가?’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 쌓였던 공포가 스르르 내려갔다.강현우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공간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다.뒤에서 우지원이 조용히 물었다.“이놈들은 어떻게 할까요?”강현우는 대답 없이 자신의 재킷을 벗어 윤하경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걸쳐 주었다.그리고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정리해.”그리고 몇 걸음 옮기던 그가 덧붙였다.“깨끗하게 끝내.”그 말이 끝나자, 방 안의 남자들이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강현우의 품에 안긴 윤하경은 문득 깨달았다.이 남자의 품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걸.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윤하연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현우 씨가 오자마자 도망친 건가...’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는 어느새 차 뒷좌석에 앉혀졌고 강현우가 조수석 쪽에서 타려던 순간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 혹시 구해준 은인이라고 감동이라도 한 거야?”원래는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지만 그의 짓궂은 말투에 윤하경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묶인 거, 좀 풀어줄 수 있어요? 움직이기도 힘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손발을 내려다보다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허, 이런 것도 가능하네? 다음엔 이렇게 놀아볼까?”‘진짜, 이 남자 도무지 모르겠어.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 농담이 나와?’윤하경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다행히도 강현우는 장난처럼 웃다가 결국 묶인 끈을 풀어주었다.자유의 몸이 되자 그녀는 급히
어두운 방.희미한 불빛 아래, 남자들의 눈빛이 들짐승처럼 번뜩였다.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그때, 왜 윤하연까지 같이 끝장내지 않았을까. 임수연 그 여자랑 같이 잡아들였어야 했는데.’하지만 이 세상에 후회 약 따윈 없었다.“윤하경 씨, 그럼 재미를 좀 보자고.”비릿한 웃음과 함께 누군가의 더러운 손길이 그녀의 몸 위를 더듬었고,피부에 닿는 그 촉감은 마치 수천 마리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 소름 끼쳤다.탕!그 순간, 묵직한 총성이 바깥에서 울려 퍼졌다.윤하경 위로 올라타려던 남자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누구야?”쿵, 쿵, 쿵.답 대신, 문이 거칠게 열리며 몇몇 남자들이 쏜살같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들 앞에는 짧고 검은 권총을 들고 선 사내가 있었다. 강현우의 오른팔, 우지원이었다.건달들은 아직도 욕망에 취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었고 순간, 우지원이 쏜 총알이 한 건달의 허벅지를 정통으로 꿰뚫었다.“악!”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당신들 누구야!”절박한 외침에, 문 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되받아쳤다.“누구냐고? 네 주제에 감히, 나한테 그 질문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냐?”목소리는 낮고 서늘했으며 단어 하나하나에 살기가 서려 있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다.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문가에 선 그 사람을 보자마자 참고 있던 눈물이 제멋대로 흘러내렸다.강현우였다.그는 조용히, 그러나 모든 것을 압도하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묵직한 존재감이 공기를 흔들었다. 그의 시선이 윤하경을 스치고 그 뒤로 웅크린 남자들을 향했다.“이거 재밌네?”건달들도 강현우를 알아보고 혼비백산해 땅에 머리를 박았다.“아닙니다! 저희는 대표님의 사람인 줄 모르고...”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그 세력이 어떤지 건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윤하경을 내려다봤다.
윤하연이 다시 돌아온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윤하경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무슨 짓 하려고.”윤하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예쁘지도 상냥하지도 않았고 그저 뒤틀린 증오로 일그러져 있을 뿐이었다.“무슨 짓이냐고?”윤하연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강현우가 남자들을 시켜 날 그렇게 망가뜨렸을 땐, 자기 여자가 내 손에 들어올 거란 건 상상도 못 했겠지?”“뭐?”“날 무시하고 조롱하고, 깔봤지? 넌 뭐가 잘났다고, 이젠 너도 나랑 똑같이 만들어줄게.”윤하연이 뒤를 돌아 외쳤다.“들어와.”문이 열리자, 덩치 큰 남자들이 하나둘 방 안으로 들어섰고 그중 두 명은 아까 윤하경을 쫓던 자들이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윤하경.”“윤하연, 미쳤어? 지금 그만둬도 늦지 않았어. 이건 범죄라고.”“그만둬?”윤하연이 속삭이듯 말했다.“난 혼자 죽지 않아. 내가 겪은 지옥, 어디 너도 한번 겪어봐.”윤하경은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는 걸 알아채고 침착하게 남자들 중 가장 리더처럼 보이는 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지금이라도 멈춰. 너희가 한 일, 지금은 그냥 납치일지 몰라도, 이 선 넘으면 인생 끝장이야. 평생 감옥에서 썩는다고.”그 말에도, 남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윤하경 씨 걱정 마세요.”“우린 일 깨끗하게 처리합니다. 증거? 절대 안 남죠.”“그리고...”그중 하나가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비열하게 웃었다.“이렇게 예쁜 여자면 몇 년 감옥에서 썩어도 충분히 가치 있지.”윤하경이 속으로 욕지거리했다.‘이거 완전 미친놈들이네.’윤하연이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걱정 마. 오늘 여기서 벌어진 일 아무도 모를 거야.”그녀는 돌아서며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내 언니, 잘 부탁해.”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멀어질수록 윤하경의 심장은 더 거세게 뛰었다.“윤하연… 내가 살아 나가면 널 반드시 가만 안 둬.”“살아서 나가고 나서 그런 말 해. 지금은 아
“너희 중 누구라도 날 속인 게 밝혀지면 그 대가, 반드시 치르게 될 거야.”주미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부잣집 사모님으로 살아오며 익힌 우아함 뒤에는 결코 적지 않은 더러운 수단들이 감춰져 있었다.그 위압감에 윤하연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푹 숙였다.잠시 후, 주미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오두막을 나섰고 멀리서 자동차 시동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윤하경, 넌 진짜 사람 인생 망치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어.”발을 쾅 내디딘 윤하연이 돌아서며 이를 갈았다.“왜! 왜 지호 오빠가 너 때문에 다쳤다는 걸 인정 안 해?”윤하경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좀 꺼져줄래? 네 목소리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리니까.”쌓인 감정이 고개를 들었고 윤하경은 더 이상 받아줄 여유조차 없었다.“지금 네가 처한 상황, 진짜 모르고 그러는 거야?”윤하연이 몸을 숙여 윤하경의 턱을 잡아 올렸다.“넌 지금 납치된 거라고.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하지만 윤하경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서? 쓸데없는 말 다 했으면 좀 꺼져. 나, 자야 되니까.”그 무심한 말투에 윤하연의 분노가 폭발했다. 손을 들어 그대로 뺨을 내려치려던 순간, 윤하경의 눈빛이 칼처럼 날카로워졌다.“쳐. 마음껏 쳐보라고. 네가 나한테 어떻게 하든, 그 대가는 네 엄마한테 열 배로 돌아갈 거니까.”“뭐?”윤하연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녀는 낮게 으르렁댔다.“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 한 거야?”윤하경은 희미하게 웃었다.“다 말해줄게. 대신 이거 풀어줘. 그럼 너희 엄마가 지금 어딨는지 알려줄게.”윤하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또 날 속이려는 거지? 이젠 안 속아, 윤하경.”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그래. 그럼 말든가. 어차피 난 피곤하니까, 말 걸지 마.”그 말에 윤하연은 치를 떨며 돌아섰고 쾅 소리를 내며 문을 세게 닫았다.오두막 안.정적 속에 홀로 남겨진 윤하경은 천천히 눈을 떴다.‘강현우 씨
“언니가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에요!”윤하연은 다급히 외쳤고 목소리엔 분노보단 불안이 실려 있었다.“얘는 지호 오빠랑 약혼했을 때부터 강현우랑 이미 그런 사이였어요. 강현우가 그런 짓을 한 것도, 전부 언니 말 듣고 지호 오빠한테 복수하려던 거라고요!”“복수?”윤하경은 비웃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윤하연을 바라보았다.“그럼 말해봐. 내가 뭘 복수하려고 했는데?”윤하연의 입이 덜컥 멈췄다.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떼던 그녀는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팠다.“그, 그거야 내가 지호 오빠한테 사람 시켜서 언니를 강간하라고...”순간, 본인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은 윤하연은 입을 틀어막은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미나를 바라보았다.“계속 말해보지 그래.”윤하경은 차갑게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그럼 지난번에 날 노렸던 게 실패해서, 이번엔 아예 어머님을 이용해 날 무너뜨릴 생각이었던 거야?”“하연아. 너 사람이 할 짓을 해야지. 나한테 누명 씌우기 전에 증거라도 들고 오지 그랬니?”“예를 들면 네 엄마가 바람피웠다는 증거, 나 그거 갖고 있거든. 지호 씨가 저렇게 된 게 내 탓이라면 그에 맞는 증거는 있어?”윤하경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그녀는 지금 도박을 걸고 있었다.주미나가 아직 자신에게 남은 믿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에 전부를 건 것이다.“어머님.”윤하경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말했다.“저를 오랫동안 봐오셨잖아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정말 윤하연 말 하나만 믿고 저를 이렇게까지 대하신다면 저도 더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그녀는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대었고 지친 숨결과 조용한 체념이 그 공간에 퍼졌다.윤하연은 그 태도에 질투와 분노가 폭발했다.“뭐야, 지금 연기하는 거야? 네가 한 짓이잖아! 왜 인정 안 해!”화를 주체하지 못한 윤하연은 그대로 발을 들어 하경을 걷어차려 했다.그 순간, 윤하경의 눈이 번쩍하며 살기 띤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윤하연은 본능적으로 움찔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