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이석훈이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고 얼굴에 미묘한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그리고 무심코 강현우의 팔을 감싸고 있던 손이 긴장한 듯 살짝 움켜쥐어졌다. 강현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고 얇게 입술을 말아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이석훈 씨가 너무 과대 해석하는 것 같은데요? 윤하경은 제 여자가 아닙니다.” ‘역시나...’강현우가 이런 관계를 인정해 줄 리 없다는 걸 윤하경도 알고 있었다. 그와 자신은 어디까지나 계약 관계이고 항상 갑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었고 그에게 있어 그녀는 단순한 '협력자'일 뿐이었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말이 그렇게 단호하게 들리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씁쓸해졌다.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그의 팔을 놓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짜증이 밀려왔다. ‘도대체 몇 번을 같이 잣 있었는데 그까짓 말 한마디도 못 해주는 거야?’그녀가 지금 단순히 이석훈을 피하기 위해 이러는 것이라는 걸 강현우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여전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고 그녀의 체면이야 어찌 되든 관심조차 없었다. 그 순간, 이석훈이 어둡게 웃으며 말했다. “하경 씨,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거짓말까지 한 거예요? 설마 했는데... 현우 씨께선 애초에 당신한테 관심도 없잖아요?” 그의 목소리에는 얕잡아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떴다. ‘관심이 없었다면 왜 그렇게 자주 찾아왔는데?’그녀는 말을 할 필요도 못 느끼고 그냥 뒤돌아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허리에 느껴지는 묵직한 팔. 강현우가 그녀를 힘껏 끌어당기더니 그녀를 자신의 품속에 완전히 가둬버렸다. 순간적으로 놀라서 고개를 들자 그의 날카로운 턱선과 자신만만한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석훈 씨가 내 말을 오해한 것
“강 대표님, 장 대표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침 민진혁이 다가와 싸늘한 분위기를 풀었다.윤하경은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거두었다. “그럼 전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강현우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고 그 눈빛에는 알 수 없는 비꼬는 기색이 스쳤다. 뭘 비웃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윤하경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강현우가 지나갈 길을 터주었고 강현우는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엔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지?“ 지금 이 자리에서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두세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시간 되시면 저녁에 자세히 이야기할까요?“ 그녀는 매우 진지한 태도로 말했지만 강현우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 사람, 또 무슨 쓸데없는 오해를 하고 있는 거야?’윤하경은 순간 강현우가 속으로 ‘나랑 만나고 싶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좋아.”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뒤로하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윤하경은 강현우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늘따라 의외로 말을 잘 듣네?’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도 차에 올라탔다. 한편 이석훈은 불같이 화가 난 얼굴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임수연은 이태임을 붙잡고 비위를 맞추느라 바빴다. 윤수철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만 봐도 임수연의 행동을 은근히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쾅! 이석훈이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봤다. 이태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석훈아,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스럽게 구는 거야?“ 이석훈은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윤수철과 임수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좋아요. 아주
윤수철은 분노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치 윤하경이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붙잡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런데도 임수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띠며 기름을 부었다. “여보, 하경이를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어차피 알잖아요. 그 애 성격... 한번 반항하기 시작하면 끝까지 가잖아요.” 그녀는 일부러 말을 끊었다가,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래도 결국은 여보 딸인데 너무 강하게 나가면 아버지와의 정까지 다 끊어지지 않겠어요?” 이 말은 겉으로 보기엔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했지만 오히려 윤수철의 분노에 불을 지르는 효과만 낳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최근 윤하경과 부딪혔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언제부턴가 그 애는 자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자신을 아버지로조차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바닥에 내던졌더니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자식이 부모 말을 거역하는 법은 없어! 내 허락 없이는, 그 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 “오늘부터 그 애가 가진 모든 카드를 정지시켜. 대체 내가 없으면 얼마나 잘 살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윤하경에게 전화를 걸었고 화가 난 얼굴로, 그녀를 불러 세워 호되게 혼내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벨이 울리자마자 바로 끊어졌다. 윤수철의 얼굴이 순간 더 검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엔 전원이 꺼졌다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의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반면 임수연은, 이 모든 걸 그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입가에는 여전히 조용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좋아, 아주 잘 되고 있어.’윤하경과 윤수철 사이에 더 깊은 골이 생길수록 결국 이 집안은 그녀와 윤하연이 차지하게 될 터였다. “여보, 하경이 아직 어린데 너무 화내지
윤수철이 안내를 받고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윤하경은 느긋하게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대단하네, 윤하경!” 그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빈정거렸고 윤하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오셨어요?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혹시 계약 이야기하러 오셨나요?” 그녀는 순진한 척,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윤수철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네가 오늘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이 사태까지 온 건지 아냐? 이제 윤씨 가문에, 아니 나한테 있어서 이 거래가 얼마나 중요한지 네가 알기는 하냐고!” “잠깐만요.” 윤하경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가로막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윤씨 가문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중요한 거겠죠?”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며 느긋하게 그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또 얼마에 절 팔려고 하셨나요?” 윤수철의 눈썹이 깊게 찌푸려졌다. “네가 어려서 모르는 거야. 다 널 위해서 하는 일이야! 내가 네 아버지인데 내가 널 해칠 리가 있겠어?” 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푸흣.” 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웃겨?” “아버지는 참 뻔뻔하네요.” 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계약 이야기하려고 오신 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제 회사에서 나가주시겠어요? 보다시피 저는 바쁘거든요.” 마치 그녀와 윤수철은 애초부터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윤하경이 단호하게 내쫓았지만 윤수철은 여전히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윤하경, 네 마음속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있기나 하냐?”그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고 어딘가 다급해 보이기도 했다.그러나 윤하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없어요.”그녀의 눈빛은 단단했고그 대답엔 어떠한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혹시 더 물어볼 게 있으신가요?”윤수철은 입을 열려다 말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순간, 그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듯한
윤수철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야?” 임수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보, 그래도 한 번 더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아직 완전히 끝난 일도 아니잖아요.” 윤수철은 냉소를 흘리며 쏘아붙였다. “기회? 무슨 기회가 더 남았다는 거야?” 임수연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일, 저한테 맡겨봐요. 제가 하경이랑 제대로 이야기해 볼게요.” 사실, 그녀는 이미 다른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윤하경이 원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그녀를 그 길로 가게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눈빛이 반짝이며 속으로 계산을 마친 임수연은 빠르게 윤수철의 휴대전화를 낚아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편, 윤하경은 그 두 사람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고 생각을 비우고 싶은데 머릿속은 복잡했고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시간을 맞춰 소지연이 사무실로 들어왔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윤하경을 보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괜찮아? 무슨 일 있었어?”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윤하경은 빠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녀는 소지연이 걱정할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요즘 회사 수익이 꽤 좋잖아. 예전에 유럽 여행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 다녀와. 며칠 동안은 내가 회사에서 버틸 수 있어.” 그러자 소지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됐어. 엄마 수술비도 아직 다 못 갚았잖아.” 윤하경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소지연이 미리 손을 흔들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알아, 네가 무슨 말 하려는지. 하지만 난 원래 철저하게 계산하는 사람이야. 이 돈, 반드시 다 갚을 거야. 네가 안 받겠다면 그냥 나보고 나가라는 거지?” 그 말에 윤하경은 입을 다물었다. 이때 마침 휴대전화가 울렸고 확인해 보니 배경빈이었다. 그가 설계도를 완성했다며 만날 약속을 잡자고 했고 윤하경은 시간
“저를요?” 윤하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요?”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상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빚을 갚으라고 하네요.” “빚이요?” 윤하경은 당황해서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전 빚진 적 없는데요. 누군가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려는 거라면 경찰을 부르세요.” 그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확성기로 바꾼 듯, 여러 명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고 이내 전화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이번엔 굵고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하경 맞지?” “들어둬, 네가 나한테 진 빚 6억 원. 당장 갚아. 안 갚으면 이 집, 네가 손댈 생각도 하지 마라. 들리는 말로는 리모델링하려고 한다던데? 그래, 한번 해보시지?” 남자의 말투는 건방지고 거칠었으며 노골적으로 협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윤하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야?” “누군지는 직접 와서 보면 알겠지.” 남자는 비아냥거리듯 웃으며 덧붙였다. “알겠어. 기다려.” 통화를 끊은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일이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 같았고 본능적으로 임수연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녀가 해온 짓거리를 생각해 보면 이 일과도 무관할 리 없을 터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요?” 배경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요.” 그녀는 가방을 챙기며 대답했다. 덜컥! 주차장에 도착해, 운전석에 앉으려던 순간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이미 안전벨트를 착용 중인 배경빈이 보였다. “저기... 급한 일이라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녀는 배경빈의 안전벨트를 힐끗 보며 말했지만 배경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까 전화하는 거 들었어요. 별장 쪽으로 가는 거 맞죠? 마침 저도 며칠 전에 체크 못 한 부분이 있어서 같이 가죠.”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유를
“허허!” 남자는 윤하경의 담담한 태도를 보며 코웃음을 치더니 주머니에서 구겨진 서류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좀 봐. 네 엄마가 이 집을 담보로 내 걸고 내게 4억을 빌린 계약서야. 이자까지 쳐서 이제 6억을 갚아야지.” 그는 가볍게 서류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계약서에 명확히 적혀 있거든? 지금 집 명의가 네 거라지만 우리 돈을 못 받으면 이 집은 내 거야. 그리고 너, 인테리어 공사한다고? 한번 해보라지.” 윤하경은 계약서에 적힌 선명한 검은 글씨와 서명을 보며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삼켰다. ‘역시, 임수연. 너라는 인간은 끝까지 더럽고 치사하구나.’ 이 집을 양도받을 때 명확하게 법적 문제는 없다고 확인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임수연이 집을 담보로 6억을 빌렸다는 사실을 숨겼다니? ‘이 집이 고작 6억짜리인 줄 아나?’ 이곳의 가치가 얼마인데 감히 이렇게 더러운 방법을 써서 자신을 옭아매려는 걸까. 윤하경은 분노를 삭이며 서류를 사진으로 찍었다. 잠시 침묵한 후, 윤하경은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한데. 이 집은 내 명의야. 그리고 계약을 맺은 건 임수연과 윤하연이지, 나랑은 전혀 관계없어. 돈을 받고 싶으면 그 두 사람한테 직접 가서 달라고 해.” 남자는 비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너희 한 가족 아니야? 지난번에도 걔가 담보 잡고 속여서 명의 이전까지 해놓고 이젠 쏙 빠지겠다고? 내가 그 속임수에 또 넘어갈 거 같아?” 그의 표정이 더욱 사납게 일그러졌다. 윤하경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 가족이라고? 미친 소리하지 말고 꺼져.”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순간 말을 잃게 만들 정도로 단단했다. 만약 평범한 여자였다면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벌써 겁을 먹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윤하경은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았다. “누가 돈을 빌렸으면 그 사람한테 가서 받
남자의 주먹이 배경빈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고 윤하경은 깜짝 놀라 배경빈의 손을 잡아당겼다. “경빈 씨, 싸우지 마세요!” 상대는 숫자가 많았고 괜히 개입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그런데 배경빈은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먹을 향해 전진했다. 윤하경의 우려와는 달리 배경빈은 생각보다 훨씬 능숙하게 싸움을 받아쳤다. 첫 번째 공격을 가볍게 흘리더니 상대의 팔을 잡아 그대로 비틀어버렸다. 남자는 고통에 신음을 내뱉으며 휘청거렸다. 배경빈은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고 연속된 움직임으로 차례차례 상대방을 제압해 나갔다. 심지어, 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정확해서 윤하경조차도 그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상대가 숫자로 밀어붙이려 했지만 배경빈은 단 한 번도 밀리지 않았다. 결국, 넘어진 남자들은 겁을 먹고 더 이상 덤벼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눈앞의 남자가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실감할 뿐이었다. 싸움이 끝난 뒤, 배경빈은 넘어진 남자 위에 올라타 그를 꾹 눌렀다. 그러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어때? 이제 좀 얌전히 굴 생각이 들어?”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우리 그냥 돈 받으러 온 것뿐이었어요!”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때, 윤하경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석양빛 아래, 배경빈이 가볍게 웃으며 상대를 내려다보는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그는 여전히 부드러운 인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위압적인 분위기가 있었고 마치 평소의 차분한 모습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입니다! 여기서 불법 집회 및 소란이 있다는 신고를 받았습니다!” 경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윤하경이 빠르게 고개를 돌려 경찰을 향해 말했다. “경찰관님,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제 집을 불법으로 침입해 난동을 피웠습니다. 자세한 건 신고 내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
“아...”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며 따끔한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고개를 들어 앞을 막아선 배경빈을 짜증이 서린 눈빛으로 쳐다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하지만 배경빈은 그녀의 표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제가 안 막았으면 지금쯤 계단 굴러갔을걸요?”윤하경은 그제야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바로 앞에 계단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정신을 놓고 걷고 있었으니 정말 자칫하면 사고 날 뻔했다.물론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억지를 부렸다.“누가 넘어진다고 했어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일은 여기까지면 됐고요. 이제 퇴근해도 돼요.”그러자 배경빈은 방금 계약서가 담긴 클리어 파일을 흔들며 말했다.“윤 대표님, 저 방금 계약 따낸 거잖아요. 이렇게 빨리 손절하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기왕이면 축하 겸 한 끼쯤은 사줘야죠?”윤하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돈 없어요.”배경빈은 되레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괜찮아요. 전 있어요. 제가 쏠게요.”“됐거든요?”윤하경은 거절했지만 배경빈은 들은 체도 않고 그녀를 차에 밀어 넣었다.애초부터 기분이 어수선했던 터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배경빈의 해맑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윤하경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차는 빠르게 도심을 빠져나갔고 잠시 후 한 대형 포장마차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윤하경도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예약이 어려워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여긴 왜요? 예약 안 했으면 못 들어갈 텐데.”그녀는 돌아서려 했지만 배경빈이 손목을 붙잡았다.“가긴 왜 가요. 자리 예약돼 있어요. 올라가요.”“아까까지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언제 예약을...?”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를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고 창가 쪽 자리에 자리를 잡은 배경빈은 턱을 괴고 윤하경을 바라보며 웃었다.“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요. 오늘은 제가 사는
오후 무렵, 윤수철이 회사에 들렀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부녀 사이엔 차가운 기류가 흘렀고 오늘 오전 그가 회사에 없었던 걸 보면 어디 다녀왔는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분명 윤하연을 구하려고 발을 뻗었던 모양이다.하지만 그 얼굴에 가득한 어두운 기색을 보니 결과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윤하경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얌전히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아버지.”그런데 윤수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윤하경을 쏘아보며 그대로 지나쳤다.그의 어깨가 스치듯 지나는 순간, 윤하경은 분명히 그가 억눌러 뱉은 듯한 콧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조용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층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보다 한발 빨랐다.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배경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까는 일하겠다고 그 난리더니 아직 퇴근도 안 했는데 벌써 도망치려는 거예요?”배경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슬기 비서님이 말씀하시길, 대표님이 곧 외부 미팅 있으시다고 해서 제가 같이 가라고 하더라고요.”“...”‘우슬기, 눈치가 좋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 문제야.’배경빈은 그녀가 뭔가 한 소리 하고 싶은 걸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 넘어갔고 오히려 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대표님 비서잖아요. 고객 미팅에 동행하는 거, 아주 타당한 업무 아닌가요?”강현우가 독처럼 위험하고 치명적인 존재라면 배경빈은 그저 따뜻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그 특유의 해사한 미소는 상대의 날을 무장 해제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윤하경은 지금도 제대로 화를 내기 어려웠다.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왔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던 찰나, 배경빈이 먼저 문을 열고 탑승해 버렸다.“대표님 같은 분이 직접 운전하실 순 없죠.”그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모실게요.”차는 강현우가 선물한, 붉은색이 도드라지는 고급 세단이었다.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랐다
배경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장난을 치겠어요. 요즘 일이 끊겨서 정식으로 밥벌이할 직장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귀사에서 비서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어쩌다 보니 덜컥 붙었어요. 이 정도면 인연 아닌가요?”윤하경은 거의 눈이 뒤집힐 뻔했다.“배씨 집안 둘째 아들이 밥벌이 걱정이라니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으세요? 우리 회사는 그렇게 귀한 몸을 담을 공간과 자격이 없어요.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배웅은 생략할게요.”하지만 배경빈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어요. 특별한 사유 없이는 해고도 불가일 텐데요.”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꼭 강력 접착제 같았고 윤하경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대체 무슨 꿍꿍인데요? 배지훈 씨한테 들키면 혼나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배지훈’의 이름을 꺼내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배경빈의 입꼬리가 확 내려갔다.“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저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요.”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 그 좋은 집안의 둘째 아들이, 멀쩡한 디자인 일을 두고 왜 갑자기 여기서 비서 일을 하겠다는 건지, 이건 배씨 가문 체면에도 안 맞는 일인데 말이다.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배지훈에게 연락해서 이 사람 데려가라고 해야 하나...’그런데 막 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배경빈이 휙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로챘다.“형한테는 말하지 마세요.”결국 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고 그의 집요함 앞에선 아무리 단호해도 소용없었다.그리고 배경빈은 고개를 숙이고 또 특유의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마치 받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 눈빛에 약해지더니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여긴 진짜로 배경빈 씨가 있을 자리가 아니에요. 디자이너잖아요. 디자인 일에 집중해야지, 왜 여기서 비서를 하겠다는 거예요?”배경빈은 가볍게 웃었다.“최근 의뢰받은 디자인 건이 취소돼서요. 덕분에 일이 싹 끊겼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밤중에 도대체 누가 강현우에게 전화를 걸어온 걸까 싶었지만 자신이 그걸 묻는 건 선을 넘는 일이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강현우가 문을 열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그가 떠난 자리엔 먹다 만 음식만 남아 있었고 윤하경은 수저를 다시 집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문득 송시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여자가 있어요.”그게 설마, 진짜 자신은 아닌 걸까?윤하경은 입맛이 뚝 떨어진 채로 두세 입 더 억지로 먹고는 식당을 나섰다.그리고 그날 밤, 강현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백정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이렇게 오래 회사를 비우시면 곤란하잖아요.”그 말에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문자를 남겼다.[저 오늘 회사 좀 다녀올게요.]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윤하경은 문득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굳이 이런 걸 보고해야 하나...’출근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 우슬기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뭐가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요즘 이상할 정도로 영업팀 쪽에 일이 몰리고 있어요. 거의 대부분이 강한 그룹 관련 회사들이고 사전에 대표님께 다 연락드렸다고 하던데요.”“나한테?”윤하경은 놀란 눈으로 우슬기를 바라봤다.“아, 네.”당황스러움을 감춘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알았어. 시간 내서 볼게. 먼저 나가 봐.”우슬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고 윤하경은 손에 든 문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강현우가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고?’생각해 보면 요즘 윤수철에게서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 성격에 자신이 회사에 이렇게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으면 진작에 문제 삼았을 텐데 이번엔 아무 말도 없었다.‘다 강현우 때문이구나.’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눌러 물고 마음이 복잡해졌다.강현
“자. 자자.”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고 어딘가 명령 같아 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체온은 마치 그 성격처럼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가까이 있을수록 숨이 막힐 듯한 뜨거움에, 윤하경은 몸을 조금 떼어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허리에 둔 팔은 단단히 그녀를 감고 있었다.“저, 우리... 그게 어떻게 된 건지...”윤하경은 겨우 말을 꺼냈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 이후의 기억이 아예 비어 있었다. 술을 마신 것까지만 기억나고 그다음은 통째로 사라졌다.그 말에 강현우는 눈을 뜨고 비웃듯 웃었다.“왜? 어제는 그렇게 덮치더니 끝나니까 모르는 척이야?”그 조롱 가득한 말에 윤하경은 화들짝 돌아보며 외쳤다.“그럴 리가요!”‘설마 내가 먼저?’하지만 어젯밤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게 더 불안했지만 다행히 방 안은 어둑했고 강현우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강현우는 다시 코웃음 쳤다.“어제 그렇게 들이대 놓고 지금 와서 모른 척? 기억 안 나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얘기해줄까? 네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현우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따라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의도가 뻔히 느껴지는 그 손길에 윤하경은 다급히 그의 손을 막았다.몸은 이미 온통 쑤시고 아팠고 지금 또 한 번 겪을 자신은 없었다.“저... 저 배고파요.”윤하경은 작은 목소리로 애교 섞인 말투를 꺼내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술만 들이켰으니 속이 허기질 만도 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아슬아슬하게 멈춘 손을 거두며 이불 밖으로 나갔다.그가 조명을 켜고 옷을 챙겨 입는 사이, 윤하경은 침대 속에 몸을 꼭 숨긴 채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한마디 했다.“배고프다며.”“아, 네!”윤하경은 잽싸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얼굴을 씻고 나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회색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었는데도, 다부진 어깨와 선명한 팔근육
“너무 많아...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고개를 들며 휘청거리다시피 일어서려 했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감당 안 돼?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되는데?”윤하경은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술기운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눈앞의 강현우조차 흐릿하게 느껴져 마치 꿈속 같았다.윤하경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아, 진짜네. 현우 씨 맞구나.”술이 겁 많은 사람도 용감하게 만든다더니 지금의 윤하경은 평소 강현우 앞에서 보이던 위축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오히려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꼬집고 뺨을 살짝 잡아당기기도 했다.“근데 왜 이렇게 여러 명이지...”윤하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말과 함께 흐르는 달큼한 숨결이 강현우의 목덜미에 닿자,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조금씩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그 순간, 주저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갑작스러운 키스에 윤하경의 머릿속은 잠시 정지된 듯 멍해졌고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밀착시키고는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그래서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된다는 건데?”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술에 취한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순하고 약해 보였다.“모르겠어...”그녀의 대답에 강현우는 코끝으로 그녀의 코를 슬쩍 스치듯 웃었다.“그럼 제대로 느껴보면 알겠네.”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그녀를 덮쳤고 키스는 점점 깊어지고 지배적으로 변해갔다.평소에도 강현우에게 한 번도 제대로 저항해 본 적 없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술에 취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생각은 흐릿해졌고 몸은 이미 그가 이끄는 감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부끄러움조차 사라진 그녀는 점점 더 나른하게 무너져갔다.“응...”작은 신음이 그녀 입에서
“정말 우연이네요.”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거절했다.“하지만 제가 일이 좀 있어서요. 귀한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오건우는 가볍게 웃었다.“무슨 시간 낭비입니까. 우리 협력 관계잖아요. 같이 타시죠, 마침 협력 얘기도 좀 나눌 수 있겠고요.”윤하경은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예전에 오건우와 마주쳤을 때 강현우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떠올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괜찮아요, 사람 오기로 했어요.”그냥 거짓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옆에 검은 벤츠 한 대가 멈춰 섰고 운전석 창문이 열리더니 용천수의 얼굴이 나타났다.“하경 씨, 강 대표님께서 제가 모시러 오라고 하셨습니다.”그 말과 함께, 그는 오건우를 힐끔 도발하듯 바라봤고 험상궂은 얼굴에 살짝 웃음기까지 섞인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가 나타난 게 의외였는지 잠깐 멈칫했지만, 결국 오건우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보시다시피, 정말 일이 생겼네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협력 관계인 만큼, 괜히 틀어질 필요도 없었다. 윤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오건우 옆을 지나 용천수의 차에 탔다.차에 오르자마자 용천수는 액셀을 밟아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고 오건우는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감시가 아주 철저하군.”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차를 돌렸다.차 안.윤하경은 뒷좌석에 앉아 표정이 꽤 차가웠다.“왜 당신이죠?”용천수에 대한 인상은 좋을 수가 없었다. 어깨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그 모든 시작이 바로 이 남자였고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 했지만, 불쾌감은 숨기기 어려웠다.운전대를 쥔 용천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없이 손에 힘을 주며 한마디 했다.“고마워요.”“뭐라고요?”목소리가 낮아 처음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이번엔 더 또렷하게 말했다.“고맙다고요. 당신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테니까.”윤하경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무슨 소리예요. 저는 그런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윤하연이 그 짓 당했을 땐 그렇게 분노하시지도 않더니요? 설마... 진짜 딸이라도 되는 거예요?”장난으로 던진 말에 윤수철의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고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이성을 잃은 듯 고함쳤다.“무슨 헛소리야, 네가 지금!”“헛소리?”윤하경은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지금 아버지 표정 보세요. 꼭 꼬리를 밟힌 고양이 같잖아요.”윤수철은 말문이 막혀 이를 악물며 분노만 삭일 뿐이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억지로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하경아, 하연이는 아직 어리잖니. 실수할 수도 있지. 한 번의 기회쯤은 줘야 하지 않겠냐.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자매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어?”그는 어딘가 감정이 담긴 듯 말했지만 윤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외면한 채 억지로 말을 이었다.“우리 둘 다 세상 떠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너희 자매뿐이야. 이런 걸로 평생 원수로 남는 건, 너무 안타깝잖니. 하연이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했는데 네가 이러면 걔 인생은 어떻게 되겠어?”진심을 담은 척하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윤하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진 듯 웃어버렸다.“푸하하...”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긴 했지만 그 웃음 속엔 조롱과 냉소가 섞여 있어 윤수철조차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만지작거렸다.윤하경은 웃음을 멈추고 이제야 진지한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봤다.“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하경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줄 알고 얼굴에 희미하게 희망을 띄웠다.“하경아, 혹시 강현우에게 한마디만 해줄 수 있겠어? 그 사람이 도와준다면 가능하지 않겠나 해서..”“...”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이란 걸 왜 몰랐을까 싶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길 향해 ‘남자한테 몸을 팔았다’고 쏘아붙이더니 이제는 그 상대에게 가서 부탁 좀 해달라니.“하하하하...”윤하경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