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우는 윤하경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며 말없이 발걸음을 조금 늦췄다.소지연은 그제야 서둘러 따라갔고 그때 이미 강현우는 윤하경을 뒷좌석에 앉혀두고 있었다.소지연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강현우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했다.그녀는 어리석지 않아서 윤하경과 강현우 사이에 뭔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자 당황했고 그래서 그녀는 말하며 긴장을 풀려 했다.“하경이를 병원에 데려가야 해서.”강현우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시선만 돌린 채 운전석으로 가서 차를 몰기 시작했다.소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며 반쯤 누운 윤하경에게 물었다.“아파?”윤하경은 다소 비꼬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내가 아프다고 했으면 좋겠어?”소지연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사과했다.“미안해. 나 때문에...”윤하경은 고개를 돌리며 눈을 굴렸다.“네가 뭐 어쨌다고. 네 잘못 아니야, 지연아.”소지연은 윤하경이 다친 일을 떠올리며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는 윤하경의 상처를 소독하며 계단에서 크게 넘어져서 여러 군데 깊고 고통스러운 상처가 나 있다는 걸 봤다.소지연은 그런 윤하경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고였다.윤하경은 그 모습을 보고 더 아픈 걸 참으며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강현우는 여전히 윤하경을 안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윤하경은 강현우의 품에 고개를 숙인 채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피했다.의사는 윤하경을 검사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외상은 심하지 않지만 X선 검사를 통해 좀 더 자세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모를 문제를 대비해서요.”강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럼 해야 할 검사는 다 해 주세요.”일이 끝난 후, 강현우는 계산하러 나갔고 소지연은 윤하경의 병상에 앉아 그들을 보며 말을 던졌다.“강현우가 너 대신 이렇게 뛰어다니는 거 처음 봐.”소지연은 장난스럽게 물었다.“너희 사이 뭐 있어? 솔직히 말해.”윤하경은 짧고 간단하
윤하경은 강현우를 보자 잠시 멈칫했다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 끝났어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몇 초 동안 조용히 바라보다가, 그녀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서야 다가갔다.소지연은 자연스럽게 한 발짝 물러섰고 강현우는 윤하경을 잠시 내려다보며 말했다.“나 먼저 갈게. 일 있으면 전화해.”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항상 윤하경은 이렇게, 겉으로는 밝고 사교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강현우와 몇 번을 자고 나서도, 그녀가 그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강현우는 입술을 꽉 다물고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소지연은 조금 놀라며 윤하경에게 물었다.“강현우, 뭔가 화난 거 같지 않아?”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소지연을 바라보았다.“왜, 화났다고 생각해?”소지연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잘 모르겠어... 뭐, 됐어. 검사받으러 가자.”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휠체어에 앉았다. 검사 결과는 다행히 큰 외상은 없었지만 가벼운 골절이 있었다.수술은 필요 없었고 며칠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소지연은 윤하경이 자기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하며 자진해서 돌봄을 자처했다.윤하경은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고 회사 일도 처리하면서 입원 생활을 이어가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일찍, 안현주와 유호천이 선물을 들고 병문안을 왔다.그때 윤하경은 막 일어나 얼굴도 씻지 않은 채, 조금 피곤해 보였다.유호천은 손에 과일 바구니를 들고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미안해, 내 잘못으로 네가 다쳤어.”소지연은 아침을 사러 아래층에 내려갔다.윤하경은 두 사람을 한번 쓱 훑어본 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정말 미안하다면 내 병원비나 내줘.”그녀는 전혀 미안해할 기색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이 일이 이렇게 된 건 원래 유호천이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서였다. 자기 여자친구가 질투가 심한 걸 알면서도, 왜 굳이 소지연과 비밀리에 만나려 했던 걸까.결국 일이 이렇게 된 건 유호천의 책
윤하경은 절대 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두 사람이 병실을 나가고 나서 드디어 조용해졌다. 소지연은 아무런 표정 없이 아침을 차려놓으며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가벼운 음식을 먹으라고 하셔서 간단하게 죽하고 계란만 준비했어. 점심엔 뭐 먹고 싶어? 내가 주문할게.”윤하경은 소지연을 한 번 쳐다보았다. 소지연은 방금 유호천과 안현주를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점심에도 죽 먹고 싶어.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주문해.”“알았어.”소지연은 윤하경에게 음식을 차려주고 그 후 바로 컴퓨터를 켜서 일을 시작했다.사실 소지연은 일에 몰두하는 타입이었다. 윤하경은 몇 번이고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소지연의 얼굴에 감정 변화는 전혀 없었다.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안현주랑 유호천의 약혼식, 너 갈 거야?”소지연은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니.”윤하경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소지연이 갑자기 그런 자리에 가서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했었다. 안현주의 성격은 너무 직설적이고 강해서 그런 자리에 소지연이 가면 분명 불편한 상황이 벌어질까 봐 걱정이었다.하지만 소지연이 가지 않겠다고 하니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윤하경은 한 입 먹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을 이어갔다.“이번에 회사 일은 네가 맡아줘. 나 다른 일로 바쁠 것 같아서.”“뭐 하려고?”소지연은 본능적으로 물었다.그러고 나서야 이 질문이 불필요한 거란 걸 깨닫고는 덧붙였다.“회사 일은 내가 맡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응.”윤하경은 핸드폰을 꺼내 부상 사진을 찍고 SNS에 올렸다.잠시 후, 전화가 걸려 왔다. 윤하경은 발신자를 보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윤수철이 병실로 직접 찾아왔다. 병실에 들어서자 윤하경이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어떻게 다쳤다고 말 한마디 없이 혼자 있을 수 있냐?”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바쁘신 분인데 제가 굳이 왜 알려야 하는데요?
윤수철은 윤하경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녀가 너무 상업적이라고 생각했다.윤하경은 어차피 윤수철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없었기에 그런 시선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엄마가 그동안 쏟은 피와 땀의 결과물인 한빛 그룹이 윤씨 가문에 넘어가는 걸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지금 윤수철은 온갖 신경을 다 쏟아내며 윤하연과 임수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윤하경은 그런 상황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윤씨 가문을 구하려는 바보가 되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건 엄마처럼 결국 앞 사람의 고생을 뒤에서 받는 꼴이 될 뿐이었다.윤수철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윤하경을 쳐다보았지만 그 표정은 여전히 위압적이었다.그가 계산하는 모습이 어찌나 신경 쓰이던지 윤하경은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해졌다.윤하경은 조금도 급할 것 없이 침대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괜찮아요. 천천히 생각하세요. 전 좀 쉬어야겠어요.”그녀는 어차피 지금 당장 급한 건 윤수철이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윤수철은 짧게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네가 말한 조건도 나쁘지 않아.”그는 윤하경을 다시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하지만 조건 하나가 있어.”윤수철은 여전히 고압적인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윤하경은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냥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네가 한빛 그룹으로 돌아온다면 내 주식 일부를 너에게 넘길게. 하지만 회사 자금 문제는 전적으로 네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해. 방법은 네가 알아서 해.”어차피 자기도 겨우 스물 몇 살인 여자에 불과한데 정상적인 아버지가 어떻게 친딸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 윤하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정말 저를 높이 보시네요.”“윤하연도 아빠 딸이잖아요. 저보다 더 적합할 것 같은데 차라리 그 지분을 하연이에게 넘겨주세요. 윤하연은 당신이 키운 딸 아닌가요? 하연이가 더 적합할 것 같은데 차라리 그 지분을 그녀에게 넘겨주는 게 좋겠어요.”윤하경은 말이 끝난 뒤 더 이상 대
윤하경이 엄마가 남긴 물건을 당장 돌려달라고 요구했을 때, 윤수철은 자신이 지금까지 쥐고 있던 마지막 카드, 즉 윤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빼앗기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그 물건을 내주면 윤하경은 더 이상 그에게 휘둘리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떠올린 윤수철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그는 이를 악물며 한참을 생각했고 윤하경이 윤수철이 결단을 내리지 못할 거란 걸 알았다. 그러자 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천천히 생각하세요. 생각해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그녀는 팔을 쭉 뻗으며 하품을 하더니 침대에 몸을 누였다.“먼저 가세요. 저는 좀 쉬어야겠어요.”윤수철은 헛웃음을 한 번 짓고 그녀를 한 번 쏘아보며 아무 말 없이 떠났다.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그녀의 조건은 분명히 너무 과한 요구였고 윤수철이 절대 동의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그렇게 많은 걸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진짜 원하는 것은, 한빛 그룹에서 20%의 지분만이라도 손에 넣는 것이었다. 윤수철이 떠나자, 한쪽에서 계속 주춤하던 유 집사가 슬쩍 다가와 그녀를 만류했다.“하경 씨, 회장님과 잘 이야기하세요. 이렇게 갈등을 심화시키지 마세요. 여자는 결국, 자기가 의지할 곳이 있어야 해요.”윤하경은 유 집사의 말을 듣고 살짝 웃음을 지었다.“의지할 곳? 날 팔아넘겨 돈이나 벌려는 그런 집안에서 의지할 곳이라니요?”그녀는 한숨을 쉬며 다시 말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어차피, 그때부터 나는 혼자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남은 건 다 자신끼리 다 나눠 먹었으니까.'유 집사는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갔다. 그들이 떠나자, 방문이 다시 열리며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윤하경은 처음에 윤수철이 다시 생각을 바꿔서 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눈을 들어보니 그가 아니라, 강현우였다.그는 웃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참, 말도 잘하네. 안 아픈가 보네.”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놀란 표정
윤하경의 말투가 어딘가 차가웠다.강현우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말투로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강현우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짧게 대답했다.“그래.”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어떤 말이든 한 번이면 충분했다.윤하경의 생각이 무엇인지 대략 짐작이 갔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윤하경은 오늘 했던 말 때문에 자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몰랐다.강현우가 떠난 후, 그는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퇴원하는 날, 휴대폰을 켜서 메시지를 확인했다.강현우에게서 온 연락은 단 한 통도 없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빠졌다.‘강현우가 날 버렸나?’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고민하던 순간, 소지연이 병실로 들어왔고 손에는 퇴원 서류가 들려 있었다.“하경아, 의사 선생님이 퇴원해도 된대!”윤하경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기뻐했다. 원래부터 가만히 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기에, 일주일 동안 병원에 갇혀 있는 게 정말 답답했다.“잘됐네. 빨리 퇴원 절차 밟고 점심에 우리 샤부샤부 먹으러 가자! 병원 음식만 먹다가 미칠 뻔했어.”그녀는 신나서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러자 소지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죽 같은 것만 먹으라던데.”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얼굴이 빨개진 채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는데 당분간 그것도 조심하래.”“그것?”윤하경은 신발을 신다가 멈춰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뭘 조심하라고?”소지연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그러니까... 너랑 강현우, 그거... 좀 자제하래.”윤하경은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하하. 걱정하지 마. 강현우가 아무리 차가워 보여도 그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야.”그녀가 말을 마친 순간, 병실 문 앞에서 낮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그렇게 온순한 사람으로 보였나 보네?”윤하경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문가에 서
윤하경은 진태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몇 개월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다.차 안에서 강현우는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하며 덤덤하게 말했다.“진태호 가족들도 오늘 경찰서에 올 거야. 혹시 무섭다면 내 뒤에 숨어.”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 강현우가 이런 식으로 말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그 순간, 잠시 가슴이 뭉클해졌다.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누군가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먼저 나서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하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 정도로 약하진 않아요.”강현우는 노트북을 두드리던 손을 잠시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그렇긴 하지.”그러고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그녀의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를 바라보며 말했다.“자신을 괴롭히는 데는 아주 용감하더라고.”그의 말투에는 묘한 비꼼이 묻어 있었다.그녀는 강현우의 특유의 빈정거림에 더 이상 말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경찰서에 도착한 윤하경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한 여성이 갑자기 뛰어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윤하경 씨, 제발, 제발 저희 아이를 봐서라도 용서해 주세요!”윤하경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몸을 움찔했다.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갑자기 한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바로 강현우였다.그녀는 강현우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며 여성을 살펴보았다.“누구시죠?”여성은 초췌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저는... 진태호의 아내입니다.”윤하경은 상황을 단번에 이해했고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남편이 저지른 일은 남편이 책임져야죠. 아내를 앞세워 해결하려는 건 말도 안 돼요.”그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우리 앉아서 차분히 이야기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만약 감정에 호소하거나 도덕적으로 압박하려는 거라면 죄송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저를 움직일 수 없어요.”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진태호의 아내는 잠시 말을 잃었다.그녀는 무언가
윤하경은 이미숙을 바라보며 짓궂게 말했다.“제 아이도 아는데 왜 제가 그래야 하죠? 처음부터 남편을 잘못 선택하셨네요.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를 찾아줬으면 좋았을 텐데요.”윤하경은 원래 직설적인 성격이라, 말이 바로 나왔다.다친 다리를 움켜잡고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지만 경찰서라기보다는 마치 해변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그 옆에 앉아 있는 강현우는 윤하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뒤로 기울이며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여유 있게 말했다.그의 시선은 여전히 윤하경을 향하고 있었고 그의 평소 차가운 표정마저 살짝 풀리면서 마치 뭔가 재미있는 장면을 보고 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하지만 윤하경은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맞은편의 이미숙에게 집중했다.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번 일로 인해 생긴 자신만의 손해를 차근차근 계산하고 있었다.윤하경은 결코 억울하게 손해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이번 일로 인한 손해도 꽤 컸고 자동차만 해도 거의 몇억 원에 달하는 가격이었다.그뿐 아니라 그날 받은 정신적 충격까지 생각하면 생각보다 큰 손해를 본 셈이었다.잠시 고민한 윤하경은 몸을 뒤로 기대며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이미숙 씨, 먼저 보상 문제부터 이야기해 봐요. 당신 남편이 제 차를 부수고 물에 빠지게 만들었어요. 차는 완전히 망가져서 거의 몇억 원의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은 얼마가 적당할까요?”윤하경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미숙은 눈물 섞인 목소리를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당신이 용서를 해주시면 저는 4억 원을 보상으로 드릴게요.”그녀는 다시 윤하경을 쳐다보며 가엾은 표정을 지었다.“이 돈이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제가 지금 내놓을 수 있는 전부입니다.”윤하경은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잠겼다.이미숙이 까다로운 상대임을 알기에, 더 이상 쓸데없이 대화를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진태호가 그런 일을 저지른 이상, 그 결과를 감당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윤하경 씨? 저 우지원이에요.”윤하경은 약간 의외라는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우지원이 웃음을 섞어 말했다.“별건 아니고요. 대표님께서 윤하경 씨가 사람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 필요한지 조건이랑 인원수 알려달라고 하셔서요.”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설마 했는데, 강현우가 정말 신경 쓰고 있었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꽤 큰 짐이 덜어진 느낌이었다.“수고 좀 해주세요. 좀 몸 쓰는 일에 능한 사람들로 열 명쯤? 딱 봐도 위압감 느껴지는 사람들로요.”우지원은 작게 탄성을 뱉었다.“오, 꽤 큰일인가 보네요? 사람은 언제쯤 필요하세요?”윤하경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한 시간 안에요.”“한 시간이요?”“네. 이번 일은 빨리 끝내야 해요. 하루라도 늦어지면 제 입장이 위험해지거든요.”우지원은 작게 중얼거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준비해 둘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그렇게 통화가 끝났고 윤하경은 강현우 쪽 사람들은 믿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주미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주미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미 지난번 일을 겪은 뒤로 주미나와의 관계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락을 피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결국 윤하경은 더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고 대신 우지원에게 문자를 보내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는 카페를 나섰다.한 시간 뒤, 윤하경은 구지호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들어섰다.그리고 놀랍게도 구지호는 이미 깨어나 있었다.하지만 여전히 온몸에 의료기기를 단 채 침대에 누워 있었고 움직일 수 있는 건 손뿐인 듯했다.예전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였던 만큼 그 몰락한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그래서였을까.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진 않았다.구지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윤하경을 가리켰다. 표정엔 놀라움과 분노가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놀란 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체격 좋은 남자들 때문이었고 분노는 아마
윤하경은 찌푸린 이마로 휴대폰을 들어 백정연의 전화를 확인했다.“여보세요?”그 순간 본인의 목소리가 심하게 쉬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어젯밤 강현우가 너무 거칠게 굴었고 그녀는 분명 울면서 몇 번이나 그만하라고 애원했었다.결국 이 목소리도 전부 강현우 탓이었다.사정을 모르는 백정연은 깜짝 놀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윤하경은 민망하게 코끝을 만졌다. 전화라서 다행이지 대면이었다면 얼굴이 벌게진 걸 들킬 뻔했다.헛기침을 한 번 하곤 자연스럽게 둘러댔다.“어젯밤에 좀 쌀쌀했나 봐요.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병원은 다녀오셔야죠. 괜히 더 심해지기 전에요.”“오늘 회의 있잖아요. 그거 끝나고 갈게요. 대신 단체 채팅방에 공지 올려줘요. 오늘도 늦는 사람은 전부 사직서 각오하라고.”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막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백정연의 말투가 어딘가 머뭇거렸다.“대표님... 그게... 오늘 회의는 아마 못 열 것 같아요.”“왜요?”윤하경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윤 이사님께서 오늘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휴가를 내렸어요. 회사에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고요.”순간 윤하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설마 했는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이 사람이... 진짜 제정신이야?”회사 일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짓을 오로지 자신의 분노를 누르기 위해서 하는 짓이었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궁금하네. 도대체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백정연도 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답답하죠. 하지만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다들 난처해요. 아직 이사회 의장은 윤 이사님이니까요.”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게 웃었다.“그래. 아주 잘들 하시네.”그녀가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았기에 곧바로 말했다.“지금 당장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알려줘요. 오늘 회의 회사 앞 카페에서 진행할 거라고. 난 한 시간 후에 갈게요.”백정
“사과할 거면 최소한 진심은 보여야지. 안 그래?”윤하경은 강현우가 이번엔 정말 화가 났다는 걸 알았고 그는 일부러 저러는 거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집요할 땐 뭔가로 분풀이해야만 풀리는 성격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그게... 다른 방법은... 안 될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우의 비웃음이 돌아왔다.“안 되진 않아. 내 앞에서 입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든가.”윤하경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고 전에 있었던 안 좋은 기억이 뇌리를 스치며 본능적으로 판단이 섰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종이봉투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그가 건넨 옷을 입고 나서 거울 앞에 선 윤하경은 얼굴이 금세 토마토처럼 빨개졌다.워낙 체격이 좋았던 터라 뭘 입어도 잘 어울렸지만 이런 종류의 옷은 평생 처음이었다. 지난번 헤븐 클럽에서 입었던 의상이 순진한 교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이건 뭐라 말할 수 없는 수위였다. 딱히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도 않았고 머릿속에는 부끄러워서 사람 앞에 못 나가겠다는 딱 하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그래서 윤하경은 욕실 안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 쪽 거울에 비친 강현우의 모습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고 깜짝 놀란 윤하경은 뒤돌아보다가 머뭇거렸다.“그... 그냥 이거 벗을게요...”그녀가 욕실 문을 닫으려던 찰나 강현우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 벽에 몰리게 된 윤하경은 당황해 두 팔로 본능적으로 앞을 가리려 했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손을 제압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모르는 척하긴. 네가 내 침대로 기어들어 왔을 땐 이러지 않았잖아.”그의 말엔 조롱이 묻어 있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감미로웠지만 그 내용은 귀에 거슬렸다.아무리 자신을 낮춰야 한다고 되뇌었지만 그 말에 윤하경은 도저히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눈을 들고 강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뭐라고 반박하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턱을 틀어잡았다.“그러니까 우리
여전히 어젯밤과 같은 방이었다. 윤하경이 들어섰을 때 방 안은 천장의 메인 조명이 꺼져 있었고 침대 옆에 놓인 노란빛 스탠드 두 개만 은은하게 켜져 있었다. 덕분에 넓은 방 안은 흐릿하고도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침대가 정갈하게 정리된 걸 본 순간 윤하경은 무의식적으로 어젯밤 강현우의 광기를 떠올렸다.‘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까지가 끝인지...’허리를 슬쩍 짚는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생각은 좀 정리됐어?”놀라 돌아본 그녀의 눈앞엔 막 샤워를 마친 강현우가 서 있었다. 머리카락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허리엔 흰색 타월 하나만 간신히 두른 채였다. 그 모습은 어딘가 일부러 유혹하려는 듯했다.윤하경은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레 말했다.“그게... 어제는 제가 좀 예민했던 것 같아요. 괜한 말한 거였어요. 화내지 마세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하...”그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윤하경의 턱을 집고 낮게 쏘아붙였다.“네가 거짓말할 땐 너무 티 나거든? 적어도 내 앞에선 제대로 연기라도 해.”윤하경은 억지로 웃으며 그의 허리에 팔을 살며시 감았다.“그래도 현우 씨 눈은 못 속이죠. 제가 뭘 꾸미겠어요.”강현우는 그녀의 아양에도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 눈빛에 마음이 불안해진 윤하경은 결국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그게... 오건우 씨가 그러는데 어젯밤에 다른 여자랑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현우 씨가 부정도 안 하시길래 저도 그냥 그렇게 믿었고...”끝까지 말을 잇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올려 강현우를 똑바로 보며 덧붙였다.“그런데 진짜로 질투한 건 아니에요. 그냥... 좀 껄끄럽고 기분이 그랬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강현우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껄끄러워?”차가운 말투에 윤하경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아, 아니에요. 이제 안 그래요.”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수습하려 했지만 강현우는 말도 없이 그녀를 들어 침대 위에 던졌고 몸을
윤하경은 잠시 말이 막혔으나 곧이어 살짝 웃으며 강현우를 바라보는 눈빛에 조심스러운 애교가 섞였다.“강 대표님, 혹시 저... 당분간만 여기서 지내도 될까요?”강현우는 그녀를 한번 훑어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컵라면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말해.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온 거야?”그의 말은 까칠했지만 이미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넥타이를 느슨히 푸는 모습은 어지간히 피곤해 보였다.윤하경은 손에 든 컵라면을 들고 주방으로 가 남은 것들을 정리했고 다시 돌아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레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단지 머물 자리를 구하러 온 건 아니었고 지금 그녀에게는 강현우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의 사람 중 몇 명만 빌릴 수 있다면 해야 할 일을 훨씬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윤하경은 조용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어설프게 마사지를 시작했다. 손에 힘은 별로 없었지만 강현우는 뜻밖에 그걸 즐기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봐선 일이 꽤 복잡하겠네.”“강 대표님한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이잖아요.”윤하경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혹시 사람 몇 명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강현우는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사람?”윤하경은 소파 뒤로 돌아가 강현우 앞에 앉았다.“요즘 좀 복잡한 일들이 있어서요. 위험한 건 아니고 그냥 좀 분위기 잡아줄 사람이 필요해요.”강현우는 와인을 천천히 마시며 말을 아꼈고 표정만으로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윤하경은 점점 불안해졌다. 사실 외부에서 사람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강현우 쪽이 훨씬 믿을 수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부탁하고 있는 거였다.“뭔 일인지 말해봐. 들어보고 결정할게.”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강의 상황을 말해주었다.“지난번 구씨 가문의 일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에요. 이번엔 주미나 씨랑 얘기를 좀 해보려고요.”“주미나랑 얘기하겠다고 이사까지 오냐?”강현우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놓고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고 윤하경은 딱히
30분쯤 뒤에 윤하경은 회사 근처 카페에 앉아 있었고 기분이 좋지 않아 달콤한 카푸치노를 시켰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자 마음이 조금은 진정됐다.잠시 후, 한 남자가 맞은편에 앉았다.“하경 씨는 여전히 시간 잘 지키시네요.”“이번엔 뭘 찾으셨어요?”윤하경은 바로 본론부터 꺼냈고 사설탐정인 노강훈은 모자를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이번 의뢰는 정말 죽는 줄 알았네요. 그래도 원하셨던 자료를 찾았습니다.”그는 그녀 앞으로 서류봉투 하나를 던졌고 윤하경은 조용히 받아들여 펼쳐보았다. 예상한 만큼 특별히 놀랄 건 없었고 구씨 일가를 조사했더니 역시 쉽게 드러날 만한 허점은 거의 없었다. 구정수라는 인물은 겉으로는 점잖지만 뒤에서는 수단이 꽤 거칠었다.만약 구지호가 무심코 흘린 말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 정보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이건 지금 자신의 유일한 방패였기에 그녀는 서류를 잘 챙겨 가방에 넣었다.“잔금은 오늘 저녁 여섯 시 전에 송금할게요.”“감사합니다.”노강훈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 말끝을 망설이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우린 오래 협력했잖아요. 돈은 충분히 받았고 그래서 한 가지 정보를 더 드리려고요. 공짜로요.”그가 말을 마치고는 몸을 살짝 숙여 윤하경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피듯 낮은 목소리로 꽤 오랫동안 무언가를 속삭였다.윤하경의 눈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말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노강훈은 그녀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는 걸 보고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하경 씨, 마음 이해합니다. 이게 가족 얘기다 보니 원래는 말씀드릴 생각도 없었어요. 하지만... 못 믿겠다면 그냥 제가 괜한 말 했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그 말만 남기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커피숍을 떠났다.남겨진 윤하경은 긴 시간 동안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딱히 어떤 행동도 없이, 말없이 앉아만 있던 그녀는 한참 후에야 커피잔을 들었지만 그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윤수철이
하지만 그 표정은 기쁨이 아닌 놀람이었다.정확히 말하자면 믿기지 않는다는 놀람 그 자체였다.“이게 한빛 그룹이랑 오건우 씨의 계약서라고?”“네가 이걸 따냈다고?”윤하경은 그를 스윽 쳐다봤다.“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제 나가도 되겠네요.”윤수철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고 기쁨은커녕 흐린 눈동자엔 의심이 가득했다.한참 말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보던 윤수철은 낮게 물었다.“그래서 이게 네가 밤새 안 들어온 이유라는 거냐?”윤하경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윤수철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악의적으로 몰아붙일 줄은 몰랐다.계약을 따낸 딸에게 던진 첫마디가 딸이 잠자리를 해서 따온 거냐는 식의 비아냥이라니...이미 실망은 여러 번 해봤지만 이번엔 아예 달랐고 심장이 꽉 막힌 듯 아팠다.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를 삼킨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천천히 일어나 윤수철 앞으로 걸어가면서 비웃듯 말했다.“제가 어떻게 따냈는지 그건 상관없잖아요. 중요한 건 계약서가 제 손에 있다는 거고요. 필요하면 제가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윤 회장님, 저한테 괜히 성질내지 마세요. 저도 성질내면 다 같이 골치 아플 수 있거든요.”그 말에 담긴 조소와 경고는 너무도 분명했기에 자기 딸에게 그런 말을 들은 윤수철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윤수철은 눈가를 떨며 손을 치켜 올렸지만 이번엔 윤하경이 먼저 손을 들어 그의 손목을 막았다.“회장님, 제발 현실을 좀 직시하세요. 제가 계약서를 따낸 방식이 궁금해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임수연 씨가 지금 어디 있는지나 생각해 보시죠.”말을 마친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나섰다.그가 들여온 신임 부대표 앞에서 잠시 멈춰 선 그녀는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한 시간 안에 아직도 여기에 있으면 제가 직접 내던질 겁니다.”그러자 남자는 움찔하며 얼굴이 굳었다.“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잖아요.”윤하경은 냉소를 터뜨리며 그 말은 무시하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등이 곧게 펴진 그녀
“저기... 어제 말했던 그... 누가 현우 씨를 암살하려 했다는 건 어떻게 됐어요?”민진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주위를 둘러본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윤하경 씨, 그 일은... 안 묻는 게 좋습니다.”“네...”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머릿속이 복잡해서였을까.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아홉 시 반이나 되었다.입구에서 우지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왔다.“윤 대표님, 지금 오세요? 회장님께서 찾고 계세요.”“아버지가요?”윤하경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이유도 모른 채 짜증부터 치밀었다.“왜요?”우지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윤하경의 시야에 윤수철이 들어왔다.멀지 않은 곳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고 얼굴에는 마치 온 세상을 빚졌다는 듯한 불만이 가득했다.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무슨 얘기든 사무실에서 하시죠. 여긴 일하는 곳이에요.”윤하경은 윤수철에게 겁이 나서가 아니라 이런 모습을 직원들 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았다.가정사로 사람들 뒷얘기거리 되는 건 질색이었다.그렇게 말하고 윤하경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윤수철도 뒤따라 회장실로 들어왔고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윤하경은 소파에 털썩 앉아 무표정하게 물었다.“뭐 때문에 부르셨어요?”“뭐 때문에 부른 것 같아?”윤수철은 쏘아붙이듯 말했다.“내가 기억하기론 네가 한빛 그룹에 들어온 건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했기 때문이잖아. 그런데 지금까지 한 걸 보면 회사에 해가 되는 짓밖에 안 했어.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고.”윤하경은 아무런 표정 없이 소파 팔걸이에 손가락을 콩콩 두드리며 말했다.“그래서요?”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그녀의 얼굴엔 전투태세를 갖춘 고슴도치 같은 기운이 번졌다.“그래서 말인데...”윤수철은 말끝을 흐리며 손짓했다.그러자 한 남자가 들어왔다.브랜드 슈트에 번듯한 외모를 가진 멀쩡해 보이는 남자였다.하지만 사내에서 강현우를 오래 마주친 윤하경 입장에선 그 남자는 마치 양가죽을 뒤집어쓴 늑대가 아닌 그냥 하이에나처럼
욕망의 전장이 욕실에서 침대로 옮겨졌을 때 윤하경은 이미 기운이 다 빠져 있었다.처음에는 그럭저럭 응해주던 그녀였지만 나중엔 완전히 힘이 풀려버려서 강현우가 어떻게 하든 그냥 이불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사실 언제 끝났는지도 잘 몰랐다.다만 기억나는 건 뜨겁고 묵직한 몸이 밤새도록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렇게 지독하게 휘둘린 밤이었지만 오히려 그날 밤 윤하경은 유난히 편안하게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강현우보다 먼저 눈을 떴다.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를 돌아보려는 순간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 남자의 팔이 다시 허리를 감아 그녀를 끌어당겼다.강현우의 몸은 여전히 뜨겁고 묵직했다.딱히 움직인 것도 아닌데 그녀는 허리 뒤쪽에서 단단하게 눌려오는 감촉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곧이어, 강현우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움직이지 마.”그러자 윤하경은 그대로 얼어붙었다.지금 이 상태에서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어젯밤의 2차전이 벌어질지도 몰랐다.그럴 기력은커녕 이미 온몸이 뻐근해서 제 몸 하나 가누기도 벅찼다.결국 그녀는 얌전히 강현우 품 안으로 몸을 더 말아 넣었다.꼼짝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안기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하지만 속으로는 살짝 불안했다.‘진짜 화가 풀린 걸까?’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강현우가 드디어 깨어났다.몸을 움직이진 않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눈을 떴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걸 느끼자 윤하경도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윤하경의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하게 빛났다.그런 그녀를 본 강현우는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또 무슨 꿍꿍이야?”윤하경은 얌전한 고양이처럼 그의 가슴에 머리를 비비며 말했다.“대표님, 이제는... 화 안 나신 거죠?”그러자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윤하경의 턱을 잡았다. 거칠고 단단한 손끝이 턱선을 따라 닿았고 그녀는 조금 아픈 듯 눈을 찌푸렸다.“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