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이 엄마가 남긴 물건을 당장 돌려달라고 요구했을 때, 윤수철은 자신이 지금까지 쥐고 있던 마지막 카드, 즉 윤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빼앗기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그 물건을 내주면 윤하경은 더 이상 그에게 휘둘리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떠올린 윤수철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그는 이를 악물며 한참을 생각했고 윤하경이 윤수철이 결단을 내리지 못할 거란 걸 알았다. 그러자 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천천히 생각하세요. 생각해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그녀는 팔을 쭉 뻗으며 하품을 하더니 침대에 몸을 누였다.“먼저 가세요. 저는 좀 쉬어야겠어요.”윤수철은 헛웃음을 한 번 짓고 그녀를 한 번 쏘아보며 아무 말 없이 떠났다.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그녀의 조건은 분명히 너무 과한 요구였고 윤수철이 절대 동의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그렇게 많은 걸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진짜 원하는 것은, 한빛 그룹에서 20%의 지분만이라도 손에 넣는 것이었다. 윤수철이 떠나자, 한쪽에서 계속 주춤하던 유 집사가 슬쩍 다가와 그녀를 만류했다.“하경 씨, 회장님과 잘 이야기하세요. 이렇게 갈등을 심화시키지 마세요. 여자는 결국, 자기가 의지할 곳이 있어야 해요.”윤하경은 유 집사의 말을 듣고 살짝 웃음을 지었다.“의지할 곳? 날 팔아넘겨 돈이나 벌려는 그런 집안에서 의지할 곳이라니요?”그녀는 한숨을 쉬며 다시 말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어차피, 그때부터 나는 혼자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남은 건 다 자신끼리 다 나눠 먹었으니까.'유 집사는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갔다. 그들이 떠나자, 방문이 다시 열리며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윤하경은 처음에 윤수철이 다시 생각을 바꿔서 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눈을 들어보니 그가 아니라, 강현우였다.그는 웃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참, 말도 잘하네. 안 아픈가 보네.”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놀란 표정
윤하경의 말투가 어딘가 차가웠다.강현우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말투로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강현우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짧게 대답했다.“그래.”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어떤 말이든 한 번이면 충분했다.윤하경의 생각이 무엇인지 대략 짐작이 갔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윤하경은 오늘 했던 말 때문에 자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몰랐다.강현우가 떠난 후, 그는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퇴원하는 날, 휴대폰을 켜서 메시지를 확인했다.강현우에게서 온 연락은 단 한 통도 없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빠졌다.‘강현우가 날 버렸나?’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고민하던 순간, 소지연이 병실로 들어왔고 손에는 퇴원 서류가 들려 있었다.“하경아, 의사 선생님이 퇴원해도 된대!”윤하경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기뻐했다. 원래부터 가만히 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기에, 일주일 동안 병원에 갇혀 있는 게 정말 답답했다.“잘됐네. 빨리 퇴원 절차 밟고 점심에 우리 샤부샤부 먹으러 가자! 병원 음식만 먹다가 미칠 뻔했어.”그녀는 신나서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러자 소지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죽 같은 것만 먹으라던데.”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얼굴이 빨개진 채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는데 당분간 그것도 조심하래.”“그것?”윤하경은 신발을 신다가 멈춰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뭘 조심하라고?”소지연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그러니까... 너랑 강현우, 그거... 좀 자제하래.”윤하경은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하하. 걱정하지 마. 강현우가 아무리 차가워 보여도 그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야.”그녀가 말을 마친 순간, 병실 문 앞에서 낮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그렇게 온순한 사람으로 보였나 보네?”윤하경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문가에 서
윤하경은 진태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몇 개월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다.차 안에서 강현우는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하며 덤덤하게 말했다.“진태호 가족들도 오늘 경찰서에 올 거야. 혹시 무섭다면 내 뒤에 숨어.”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 강현우가 이런 식으로 말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그 순간, 잠시 가슴이 뭉클해졌다.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누군가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먼저 나서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하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 정도로 약하진 않아요.”강현우는 노트북을 두드리던 손을 잠시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그렇긴 하지.”그러고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그녀의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를 바라보며 말했다.“자신을 괴롭히는 데는 아주 용감하더라고.”그의 말투에는 묘한 비꼼이 묻어 있었다.그녀는 강현우의 특유의 빈정거림에 더 이상 말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경찰서에 도착한 윤하경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한 여성이 갑자기 뛰어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윤하경 씨, 제발, 제발 저희 아이를 봐서라도 용서해 주세요!”윤하경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몸을 움찔했다.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갑자기 한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 앞을 가로막았다.바로 강현우였다.그녀는 강현우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며 여성을 살펴보았다.“누구시죠?”여성은 초췌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저는... 진태호의 아내입니다.”윤하경은 상황을 단번에 이해했고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남편이 저지른 일은 남편이 책임져야죠. 아내를 앞세워 해결하려는 건 말도 안 돼요.”그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우리 앉아서 차분히 이야기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만약 감정에 호소하거나 도덕적으로 압박하려는 거라면 죄송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저를 움직일 수 없어요.”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진태호의 아내는 잠시 말을 잃었다.그녀는 무언가
윤하경은 이미숙을 바라보며 짓궂게 말했다.“제 아이도 아는데 왜 제가 그래야 하죠? 처음부터 남편을 잘못 선택하셨네요.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를 찾아줬으면 좋았을 텐데요.”윤하경은 원래 직설적인 성격이라, 말이 바로 나왔다.다친 다리를 움켜잡고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지만 경찰서라기보다는 마치 해변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그 옆에 앉아 있는 강현우는 윤하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뒤로 기울이며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여유 있게 말했다.그의 시선은 여전히 윤하경을 향하고 있었고 그의 평소 차가운 표정마저 살짝 풀리면서 마치 뭔가 재미있는 장면을 보고 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하지만 윤하경은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맞은편의 이미숙에게 집중했다.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번 일로 인해 생긴 자신만의 손해를 차근차근 계산하고 있었다.윤하경은 결코 억울하게 손해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이번 일로 인한 손해도 꽤 컸고 자동차만 해도 거의 몇억 원에 달하는 가격이었다.그뿐 아니라 그날 받은 정신적 충격까지 생각하면 생각보다 큰 손해를 본 셈이었다.잠시 고민한 윤하경은 몸을 뒤로 기대며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이미숙 씨, 먼저 보상 문제부터 이야기해 봐요. 당신 남편이 제 차를 부수고 물에 빠지게 만들었어요. 차는 완전히 망가져서 거의 몇억 원의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은 얼마가 적당할까요?”윤하경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미숙은 눈물 섞인 목소리를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당신이 용서를 해주시면 저는 4억 원을 보상으로 드릴게요.”그녀는 다시 윤하경을 쳐다보며 가엾은 표정을 지었다.“이 돈이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제가 지금 내놓을 수 있는 전부입니다.”윤하경은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잠겼다.이미숙이 까다로운 상대임을 알기에, 더 이상 쓸데없이 대화를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진태호가 그런 일을 저지른 이상, 그 결과를 감당
강현우는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완벽했고 특히 얼굴과 몸매는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설령 강한 그룹이 파산하더라도, 윤하경은 강현우가 이 얼굴 하나만으로도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영화를 찍거나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만 해도, 흥행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강현우의 몸매는 진짜...’“헐...”윤하경은 그 생각에 잠시 빠져들었고 그때 강현우가 컴퓨터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강현우는 윤하경이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고 그녀의 정신이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걸 알았다.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윤하경의 시선을 마주하고 물었다.“뭐 보고 있어?”“잘생긴 남자요.”윤하경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다가,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그때 강현우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윤하경은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가볍게 기침을 했다.“그, 그나저나 얼마 남았죠?”운전 중인 민진혁이 짧게 대답했다.“10분 정도요.”윤하경은 “오“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그런데 아파트 단지에 도착해 내리자, 그녀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을 때, 강현우는 예상치 않게 그녀를 따라왔다.윤하경은 놀라며 물었다.“회사 안 가요?”강현우는 잠시 고민한 후, 단호하게 대답했다.“너 먼저 집에 데려다줄게.”그의 표정은 뭔가 불편해 보였고 윤하경은 그가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강현우는 윤하경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들어갔고 윤하경은 멍하니 그 뒤를 따랐다.엘리베이터가 그녀가 사는 층에 도달하고 ‘딩동’소리가 나자, 윤하경은 복도에서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인 강한 냄새를 맡았다.이 아파트는 최고급은 아니지만 꽤 비싼 곳이었고 관리도 잘 되어 있어서 이런 냄새가 나는 일은 드물었다.윤하경은 얼굴을 찡그리며 엘리베이터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집 문 앞에 가까이 가자, 한 남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집 앞에는 술병들이 널려 있었다.윤하경은 더 가까이 가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구지호는 그제야 비로소 뒤늦게 강현우가 함께 있는 걸 알아챘다. 그러자 술에 취해 있던 그는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강현우, 또 너야?”강현우는 구지호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구지호, 정말 일편단심이네.”구지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지금까지도 윤하경과 강현우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윤하경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누구나 다 알았으니까.그는 일어나서 강현우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강현우, 꺼져. 이건 나랑 윤하경 사이의 일이야.”“오? 그래?” 강현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의 얼굴은 본래도 잘 생겼는데 웃을 때마다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구지호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는 윤하경과 이미...” 그는 일부러 말을 끊고 남은 부분은 구지호가 알아서 생각하게 놔두었다.그러자 구지호의 얼굴이 변했고 그는 윤하경과 강현우를 번갈아 보더니 결국 윤하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하경아, 저 자식 말이 맞아?”윤하경은 입술을 꽉 물고 강현우의 손을 잡았다.다행히 강현우도 거부하지 않았고 윤하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구지호에게 말했다. “그래, 이제 너는 가도 돼.”그녀는 냉정한 얼굴로 주저 없이 그를 쫓아냈다. 구지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의 눈은 갑자기 커지면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듯, 그의 시선이 강현우 손목의 점에 고정됐다.그 점은 너무나도 눈에 띄었고 누구든지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구지호는 갑자기 전에 윤하경이 올린 사진에서 그 남자의 손에 같은 점이 있었음을 깨달았다.그때는 그저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일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 그 증거가 눈앞에 있으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손을 들고 윤하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너랑 강현우는 이미 사귀고 있었던 거야?”윤하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전 남자 친구인 너한테 보고해야 해?”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말했고 구지호는 그녀의 무심한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한 번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별일 없어요."사실 그녀는 궁금했다.사람들은 모두 강현우를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관심하고 일이 끝나면 그 사람과 다시는 엮이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전 처음 강현우를 알았을 때도, 그런 점이 눈에 띄었고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강현우는 조금 달라 보였다.그의 표정에서 예전처럼 무심한 감정 말고도 조금은 따뜻한 면이 보였고 그래서 윤하경은 그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그게 그가 여전히 냉정한 사람이라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은 인간적인 면이 보인다고 할까?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강현우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그때 강현우가 그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윤하경은 당황한 듯 고개를 돌리며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 뭐 마실래요? 차 아니면 커피?"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윤하경은 손을 들어 물건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발을 헛디뎌서 균형을 잃었다.“아!” 그녀는 거의 넘어질 뻔했지만 그 순간 강현우의 손이 재빨리 그녀를 잡았다. 윤하경은 손을 뻗어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대신 강현우의 넥타이를 움켜잡았다.강현우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허둥대며 그만 두 사람은 바닥에 넘어졌다. 하지만 다행히 강현우는 재빠르게 반응해 그녀의 머리가 바닥에 닿기 전에 손을 댔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은 채 넘어졌고 윤하경은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강현우의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나갔고 그의 얼굴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건 처음이었다.강현우가 그녀의 눈을 보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언제까지 쳐다볼래? 차라리 다 벗고 보여줄까?”그의 목소리는 낮고 약간은 농담 섞인 톤이었다.윤하경은 얼굴이 빨개지며 일어날 기회를 찾았다. “아, 그게 아니라... 정말 아니에요, 진짜.”그녀는 당황하면서 강현우를 밀어내려 했지만 강현우는 꿈쩍도 하지 않
윤하경은 말이 없었다.하지만 다행히도, 그때 강현우가 일어나서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눕혀 놓았다.“나 일이 있어. 구지호는 집에 보냈어. 이제 집에서 편히 쉬어. 그럼 난 먼저 갈게.”불과 몇십 초 사이에, 강현우는 다시 그 차가운, 고상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치 방금 전에 그랬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윤하경은 정신을 차리고 그가 돌아서려 할 때 말했다.“아까 고마웠어요.”그 말은 진심이었다. 만약 강현우가 그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오늘 자신은 아마 구지호를 떼어내지 못했을 거다.강현우는 문손잡이를 잡고 돌아보며 차가운 눈빛에 약간의 조롱이 섞인 채로 말했다.“난 말로 고맙다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그 말이 끝나자 그는 몸을 돌려 우아하게 떠났다.윤하경은 크게 한숨을 쉬고 눈을 굴렸다. 생각해 보면 강현우도 구지호 못지않게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다.며칠 후, 윤하경은 아버지 윤수철에게서 전화를 받았다.“집으로 와.”그 전화를 받으니 예상한 대로였고 그래서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갔다.집에 도착했을 때, 윤수철은 거실에 없었고 그 대신, 임수연이 있었다. 그녀는 윤하경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마치 윤하경이 자기한테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보였다.윤하경은 그 표정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아줌마, 윤하연은 어디 있어요? 왜 안 보이죠?”그녀는 지금 윤하연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윤하연은 지금 모든 걸 잃었고 이 순간 그녀와 임수연은 아마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거다. 윤하경은 그 아픔을 더 느끼게 하고 싶어서 일부러 물었다.임수연은 윤하경의 웃는 얼굴을 보고 더 화가 나서 말없이 눈을 돌렸다.윤하경은 그런 임수연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윤수철은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계단을 오르던 중, 윤하경은 하얀 옷을 입은 윤하연이 계단에 서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휘청거렸고 손잡이를 잡으며 애써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윤하연을 보자마자, 얼굴을 찡그리며
주미나는 경성에서 꽤 높은 지위와 명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윤하경은 강현우가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지원은 후사경을 통해 윤하경의 놀란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엔 미세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몰랐죠? 그때 형이 얼마나 멋졌는지...” 우지원은 마치 강현우의 열혈 팬처럼 열정적으로 자랑하며 말했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물었다. “그 후에는요?” “주미나 씨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어요. 결국 형이 구지호 씨의 목숨을 위협하며 겨우 주소를 말하게 했죠.” 우지원은 그 말을 마치자 웃음을 터뜨렸다. “한 시간 거리였는데 형은 30분 만에 도착했어요. 차 바퀴가 연기 날 정도였죠.” 우지원은 고개를 흔들며 감탄했다. “제가 여자였다면 진짜 우리 형한테 시집갔을 거예요.” 그는 갑자기 윤하경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쵸? 윤하경 씨.” 윤하경은 그의 말 속에 숨은 의도를 금세 알아챘다. 우지원은 계속해서 강현우를 옹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윤하경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기술이 발전해서 원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죠.” 우지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후,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여자가 된다고 해도 형수님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윤하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우지원이 왜 자꾸 자신과 강현우의 미래를 얘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결혼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라 강현우가 원해야만 이루어지는 일이었다.차가 시내에 도착하자 윤하경은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내려 주세요.” 우지원은 브레이크를 밟고 돌아서서 윤하경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형수님, 잘 가세요.” 말을 마친 그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 윤하경은 바람이 휘날리는 거리 한복판에 홀로 남았다. 바람이 그녀의 치마를 날리며 길가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외로운 그림 같았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어젯밤 일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그에 대해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가볼게요.” 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윤하경은 발걸음을 옮겨 집을 나섰다. 문을 조용히 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어젯밤 일이 어떻게 처리됐는지가 아니었다. 강현우라면 주미나가 그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바로 자신의 안전이었다. 윤수철은 결코 자신을 위해 구씨 가문과 맞설 일이 없다는 걸 뼛속까지 알고 있었다. 만약 주미나가 정말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겨냥한다면...‘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며 윤하경은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윤하경은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별장 밖으로 나갔다. 생각에 잠겨 걷던 그녀는 어느새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빠르게 다가오는 차에 의해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급히 사과하며 인도로 돌아가려던 순간 차에서 창문이 내려가며 한 마디가 들려왔다. “형수님, 태워 드릴게요.” ‘형수님?’ ‘이게 무슨... 왜 이렇게 불러?’윤하경은 당황한 얼굴로 차를 바라봤다. 사람을 잘못 봤다고 말하려던 찰나, 운전석에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우지원의 얼굴을 보고서야 멈칫했다. 윤하경은 살짝 표정을 굳히고 차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우지원은 피식 웃으며 차에서 내려 그녀의 쪽으로 다가와 차문을 열어줬다. “타세요. 현우 형이 데려다주라고 보냈어요.” 윤하경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거절하지 않았다. 주변 환경이 꽤 괜찮아 보였고 도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장이었기에 거절하면
그녀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방 안은 조용했다. 강현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이미 한밤중. 머리를 말린 후 침대 가장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려볼까 싶었지만 결국 이불을 들추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늘 하루는 예상치 못한 일들로 가득했다. 몸에 남아 있던 긴장이 서서히 풀리자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대가 미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묵직한 온기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넓은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따뜻한 손길이 가슴 위에 가만히 얹혔다.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눈을 뜨려 했지만 마치 깊은 꿈결 속에 갇힌 듯 쉽게 떠지지 않았다. 그 순간, 악몽이 그녀를 덮쳤다. 작은 집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뒤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분갈할 수 없었고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몸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움직이지 마.” “계속 이러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이 목소리...‘현우 씨?’ 윤하경은 잠결에 익숙한 목소리임을 깨닫자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순간 깊은 곳에서 묵직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치 따뜻한 무언가가 온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비록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옥죄던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윤하경은 몸을 돌려 얼굴을 강현우의 품 속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두 손은 자연스레 그의 단단한 허리를 감쌌다. 강현우는 순간 얼어붙은 듯했다. 그동안 모든 상황을 주도하던 그였지만 윤하경이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손은 공중에서 잠시 멈췄고 예리한 눈빛이 어두운
‘방법을 찾아야 해.’윤하경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그 속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과 공포로 휘몰아치고 있었다.‘이번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하지…’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주미나였다.겉으로 보기엔 상류층 여사답게 우아하고 고상했지만 그 손에 묻은 피를 윤하경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몇 년 전, 구정수의 내연녀가 아이를 가졌을 때 주미나는 그 여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윤하경이었다.잔혹하고 독하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 여자. 그게 주미나의 진짜 얼굴이었다.‘그 수법이 언젠가 나한테 향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생각만으로도 온몸이 떨렸다.무의식중에 손톱을 뜯고 있던 윤하경의 손동작에 강현우가 힐끔 그녀를 바라봤다.“기분 안 좋아?”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슬쩍 웃었다.“혹시 내가 흥을 깨서 그래? 미안한데.”“...네?”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 윤하경은 고개를 들었고 몇 초 후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나서야 얼굴이 벌게졌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강현우는 키득 웃었다.“말도 안 된다고? 나는 네가 날로 부족해서 다른 남자들 불러서 야외에서 색다르게 즐기려는 줄 알았는데?”그 잘생긴 얼굴로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지, 윤하경은 황당함을 넘어 아연실색했다.그녀의 반응이 흥미로웠는지 강현우는 몸을 살짝 기울이며 중얼거렸다.“근데 지금 너, 좀 유혹하는 거 같거든.”익숙한 향기가 스쳤고 그의 눈빛은 장난기와 위협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이 인간은 정말 사람 놀리는 데 재능이라도 있나.’“그만 멍때리고 내려.”강현우가 먼저 차 문을 열었다.공기 속에 긴장이 조금 가셨지만 윤하경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그러자 그가 몸을 숙여 그녀의 눈높이에 맞췄다.“뭐야, 내가 안아줘야 내릴 거야?”“됐거든요!”윤하경이 얼굴을 붉히며 차에서 펄쩍 내렸다.주위를 둘러본 그녀
어두운 방.윤하경은 원래 겁 없는 편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태어나 처음이었다.“기절한 건가?”강현우가 다가와 그녀를 발끝으로 툭 찼다.윤하경은 천천히 눈을 떴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아직이요.”그가 코웃음을 쳤다.“내 침대에 기어들 땐 겁이 없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쫄았어?”그 말에 윤하경은 할 말을 잃었다.‘지금 그 소리 할 타이밍인가?’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 쌓였던 공포가 스르르 내려갔다.강현우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공간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었다.뒤에서 우지원이 조용히 물었다.“이놈들은 어떻게 할까요?”강현우는 대답 없이 자신의 재킷을 벗어 윤하경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걸쳐 주었다.그리고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정리해.”그리고 몇 걸음 옮기던 그가 덧붙였다.“깨끗하게 끝내.”그 말이 끝나자, 방 안의 남자들이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강현우의 품에 안긴 윤하경은 문득 깨달았다.이 남자의 품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걸.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윤하연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현우 씨가 오자마자 도망친 건가...’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는 어느새 차 뒷좌석에 앉혀졌고 강현우가 조수석 쪽에서 타려던 순간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 혹시 구해준 은인이라고 감동이라도 한 거야?”원래는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지만 그의 짓궂은 말투에 윤하경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묶인 거, 좀 풀어줄 수 있어요? 움직이기도 힘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손발을 내려다보다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허, 이런 것도 가능하네? 다음엔 이렇게 놀아볼까?”‘진짜, 이 남자 도무지 모르겠어.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 농담이 나와?’윤하경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다행히도 강현우는 장난처럼 웃다가 결국 묶인 끈을 풀어주었다.자유의 몸이 되자 그녀는 급히
어두운 방.희미한 불빛 아래, 남자들의 눈빛이 들짐승처럼 번뜩였다.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그때, 왜 윤하연까지 같이 끝장내지 않았을까. 임수연 그 여자랑 같이 잡아들였어야 했는데.’하지만 이 세상에 후회 약 따윈 없었다.“윤하경 씨, 그럼 재미를 좀 보자고.”비릿한 웃음과 함께 누군가의 더러운 손길이 그녀의 몸 위를 더듬었고,피부에 닿는 그 촉감은 마치 수천 마리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 소름 끼쳤다.탕!그 순간, 묵직한 총성이 바깥에서 울려 퍼졌다.윤하경 위로 올라타려던 남자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누구야?”쿵, 쿵, 쿵.답 대신, 문이 거칠게 열리며 몇몇 남자들이 쏜살같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들 앞에는 짧고 검은 권총을 들고 선 사내가 있었다. 강현우의 오른팔, 우지원이었다.건달들은 아직도 욕망에 취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었고 순간, 우지원이 쏜 총알이 한 건달의 허벅지를 정통으로 꿰뚫었다.“악!”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당신들 누구야!”절박한 외침에, 문 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되받아쳤다.“누구냐고? 네 주제에 감히, 나한테 그 질문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냐?”목소리는 낮고 서늘했으며 단어 하나하나에 살기가 서려 있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다.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문가에 선 그 사람을 보자마자 참고 있던 눈물이 제멋대로 흘러내렸다.강현우였다.그는 조용히, 그러나 모든 것을 압도하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묵직한 존재감이 공기를 흔들었다. 그의 시선이 윤하경을 스치고 그 뒤로 웅크린 남자들을 향했다.“이거 재밌네?”건달들도 강현우를 알아보고 혼비백산해 땅에 머리를 박았다.“아닙니다! 저희는 대표님의 사람인 줄 모르고...”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그 세력이 어떤지 건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윤하경을 내려다봤다.
윤하연이 다시 돌아온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윤하경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무슨 짓 하려고.”윤하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예쁘지도 상냥하지도 않았고 그저 뒤틀린 증오로 일그러져 있을 뿐이었다.“무슨 짓이냐고?”윤하연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강현우가 남자들을 시켜 날 그렇게 망가뜨렸을 땐, 자기 여자가 내 손에 들어올 거란 건 상상도 못 했겠지?”“뭐?”“날 무시하고 조롱하고, 깔봤지? 넌 뭐가 잘났다고, 이젠 너도 나랑 똑같이 만들어줄게.”윤하연이 뒤를 돌아 외쳤다.“들어와.”문이 열리자, 덩치 큰 남자들이 하나둘 방 안으로 들어섰고 그중 두 명은 아까 윤하경을 쫓던 자들이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윤하경.”“윤하연, 미쳤어? 지금 그만둬도 늦지 않았어. 이건 범죄라고.”“그만둬?”윤하연이 속삭이듯 말했다.“난 혼자 죽지 않아. 내가 겪은 지옥, 어디 너도 한번 겪어봐.”윤하경은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는 걸 알아채고 침착하게 남자들 중 가장 리더처럼 보이는 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지금이라도 멈춰. 너희가 한 일, 지금은 그냥 납치일지 몰라도, 이 선 넘으면 인생 끝장이야. 평생 감옥에서 썩는다고.”그 말에도, 남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윤하경 씨 걱정 마세요.”“우린 일 깨끗하게 처리합니다. 증거? 절대 안 남죠.”“그리고...”그중 하나가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비열하게 웃었다.“이렇게 예쁜 여자면 몇 년 감옥에서 썩어도 충분히 가치 있지.”윤하경이 속으로 욕지거리했다.‘이거 완전 미친놈들이네.’윤하연이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걱정 마. 오늘 여기서 벌어진 일 아무도 모를 거야.”그녀는 돌아서며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내 언니, 잘 부탁해.”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멀어질수록 윤하경의 심장은 더 거세게 뛰었다.“윤하연… 내가 살아 나가면 널 반드시 가만 안 둬.”“살아서 나가고 나서 그런 말 해. 지금은 아
“너희 중 누구라도 날 속인 게 밝혀지면 그 대가, 반드시 치르게 될 거야.”주미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부잣집 사모님으로 살아오며 익힌 우아함 뒤에는 결코 적지 않은 더러운 수단들이 감춰져 있었다.그 위압감에 윤하연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푹 숙였다.잠시 후, 주미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오두막을 나섰고 멀리서 자동차 시동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윤하경, 넌 진짜 사람 인생 망치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어.”발을 쾅 내디딘 윤하연이 돌아서며 이를 갈았다.“왜! 왜 지호 오빠가 너 때문에 다쳤다는 걸 인정 안 해?”윤하경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좀 꺼져줄래? 네 목소리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리니까.”쌓인 감정이 고개를 들었고 윤하경은 더 이상 받아줄 여유조차 없었다.“지금 네가 처한 상황, 진짜 모르고 그러는 거야?”윤하연이 몸을 숙여 윤하경의 턱을 잡아 올렸다.“넌 지금 납치된 거라고.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하지만 윤하경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서? 쓸데없는 말 다 했으면 좀 꺼져. 나, 자야 되니까.”그 무심한 말투에 윤하연의 분노가 폭발했다. 손을 들어 그대로 뺨을 내려치려던 순간, 윤하경의 눈빛이 칼처럼 날카로워졌다.“쳐. 마음껏 쳐보라고. 네가 나한테 어떻게 하든, 그 대가는 네 엄마한테 열 배로 돌아갈 거니까.”“뭐?”윤하연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녀는 낮게 으르렁댔다.“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 한 거야?”윤하경은 희미하게 웃었다.“다 말해줄게. 대신 이거 풀어줘. 그럼 너희 엄마가 지금 어딨는지 알려줄게.”윤하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또 날 속이려는 거지? 이젠 안 속아, 윤하경.”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그래. 그럼 말든가. 어차피 난 피곤하니까, 말 걸지 마.”그 말에 윤하연은 치를 떨며 돌아섰고 쾅 소리를 내며 문을 세게 닫았다.오두막 안.정적 속에 홀로 남겨진 윤하경은 천천히 눈을 떴다.‘강현우 씨
“언니가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에요!”윤하연은 다급히 외쳤고 목소리엔 분노보단 불안이 실려 있었다.“얘는 지호 오빠랑 약혼했을 때부터 강현우랑 이미 그런 사이였어요. 강현우가 그런 짓을 한 것도, 전부 언니 말 듣고 지호 오빠한테 복수하려던 거라고요!”“복수?”윤하경은 비웃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윤하연을 바라보았다.“그럼 말해봐. 내가 뭘 복수하려고 했는데?”윤하연의 입이 덜컥 멈췄다.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떼던 그녀는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팠다.“그, 그거야 내가 지호 오빠한테 사람 시켜서 언니를 강간하라고...”순간, 본인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은 윤하연은 입을 틀어막은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미나를 바라보았다.“계속 말해보지 그래.”윤하경은 차갑게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그럼 지난번에 날 노렸던 게 실패해서, 이번엔 아예 어머님을 이용해 날 무너뜨릴 생각이었던 거야?”“하연아. 너 사람이 할 짓을 해야지. 나한테 누명 씌우기 전에 증거라도 들고 오지 그랬니?”“예를 들면 네 엄마가 바람피웠다는 증거, 나 그거 갖고 있거든. 지호 씨가 저렇게 된 게 내 탓이라면 그에 맞는 증거는 있어?”윤하경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그녀는 지금 도박을 걸고 있었다.주미나가 아직 자신에게 남은 믿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가능성에 전부를 건 것이다.“어머님.”윤하경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말했다.“저를 오랫동안 봐오셨잖아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정말 윤하연 말 하나만 믿고 저를 이렇게까지 대하신다면 저도 더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그녀는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대었고 지친 숨결과 조용한 체념이 그 공간에 퍼졌다.윤하연은 그 태도에 질투와 분노가 폭발했다.“뭐야, 지금 연기하는 거야? 네가 한 짓이잖아! 왜 인정 안 해!”화를 주체하지 못한 윤하연은 그대로 발을 들어 하경을 걷어차려 했다.그 순간, 윤하경의 눈이 번쩍하며 살기 띤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윤하연은 본능적으로 움찔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