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호는 윤하경이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무심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뒤에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하경아...”“닥쳐!”윤하경은 구지호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도 전에, 주미나가 먼저 구지호를 꾸짖었다.주미나는 구지호를 쏘아보고 바로 윤하경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비록 윤하경을 배신한 일이 있었지만 주미나는 마치 그간의 불쾌한 일들이 전혀 없었던 것처 여전히 다정하게 웃었다. 주미나는 다가와서 평소처럼 윤하경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하경아, 이렇게 생각해 줘서 정말 고마워. 우리 지호를 도와줘서 고마워.”윤하경은 살짝 고개를 숙여 주미나의 손을 바라본 뒤 차갑게 웃었다.오랜 세월 부잣집 아내로 살아온 주미나는 가식적인 연기를 정말 잘했다. 윤하경은 감정을 억누르며 주미나의 손을 슬쩍 빼면서 무표정하게 말했다.“괜찮아요.”주미나는 윤하경의 차가운 태도에 잠시 손을 멈췄다.그때, 구정수가 기침하며 말했다.“기자들이 다 도착했어, 하경아. 이제 어떻게 말할지 알지?”구정수는 그동안 권력을 가진 사람답게 누구에게나 자기를 중심으로 대화하는 무게감이 느껴졌다.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아요.”“그럼, 가자.” 구정수는 몸을 가다듬으며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윤수철은 구정수를 위해 아첨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윤하경은 그런 윤수철을 귀찮아하며 마지막으로 문을 나섰다.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구지호가 윤하경을 잡아당기며 다가왔다.그는 몇 걸음 앞서가다, 윤하경 앞에 나타나 질문을 던졌다.“하경아, 우리 정말 끝난 거야?”윤하경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이미 끝났는데 왜 아직도 나를 귀찮게 구는 거야?’“하경아, 내가 아직도 마음에 있어 오늘 온 거야?”윤하경은 그 질문에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비켜줄래?” 윤하경은 차갑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구지호, 네 얼굴 두껍다더니 진짜네? 아니면 저번에 맞다가 머리를 다쳤어?
윤수철은 윤하경이 입을 열지 않자 다시 그녀를 툭 치면서 신호를 줬다.“말 좀 해봐!”윤하경은 아예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뒤에 서 있는 윤하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벌였을까?’그때, 테이블 위의 핸드폰이 진동하더니 화면에 소지연의 이름이 떴다.윤하경은 고개를 숙이며 전화를 받으려 했고 소지연은 급한 일이 있는지 전화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핸드폰 볼 때가 아니잖아.”윤수철은 윤하경의 여유 있는 모습에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구정수와 발표회가 끝나면 바로 계약을 체결한다고 미리 상의했고 윤하경이 이를 망친다면 정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윤하경은 그를 아예 무시한 채, 소지연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 또 전화를 받았다.“잠깐 전화 좀 받을게요.”그녀는 윤수철에게 신경 쓰지 않고 전화를 받으며 몸을 살짝 돌려 소지연에게 물었다.“무슨 급한 일이야?”소지연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네가 보내준 뉴스 좀 봐. 성남에 있는 한 별장에 불이 났다는데 그게 네 엄마가 몇 년 전에 사 준 집 같은 느낌이 들어...”소지연은 윤하경과 오래된 친구라, 그 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윤하경도 예전에 소지연과 함께 그 집을 보러 간 적이 있었고 엄마가 아팠던 이후로는 그 집을 다시 가본 적이 없었다.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윤하연을 바라보았다.‘또 너야? 윤하연.’윤하경은 한동안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약혼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아버지의 무시까지 겪었고 이제야 그녀의 모든 감정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기자들이 많은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 내려가서 윤하연의 옷깃을 잡으며 물었다.“네가 한 거야?”윤하연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언니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아직
“그럼 이제 제가 말할게요. 약혼식 날, 제 친동생이 제 약혼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걸 확인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들었던 소문 다 사실이었어요.”이미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은 모두 사라졌으니 이제는 다 털어놓고 가자는 마음이었다.윤하경은 위에서 구지호와 주미나의 표정을 보지 않았지만 이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기자들 말고는 다들 얼굴이 굳어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원래 구지호의 이미지를 보호하려던 기자회견은 이제 구지호와 윤하연에 대한 심판의 장이 되어버렸다. 기자들은 미친 듯이 카메라를 윤하연의 얼굴에 들이대고 있었다.윤하연은 그제야 진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언니 그만해!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그녀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거 진짜 저 아니에요! 믿지 마세요!”원래 윤하경의 웃음거리를 보려 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윤하경은 미친개처럼, 이득을 보고도 구정수와 윤수철 앞에서 뒤집어 버리며 반격했다.윤수철은 현장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며 심장이 쥐어짜는 듯 아팠다.그는 이를 악물고 윤하경에게 손을 들었지만 윤하경은 차갑게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차라리 저를 죽여보세요.”그리고 그녀는 윤하연을 향해 냉정하게 말했다.“윤하연, 네가 뭘 했는지 나중에 다 밝혀낼 거야. 딱 기다려.”윤하경은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법에 걸리지 않는다면 윤하연을 그 자리에서 그냥 끝장내고 싶을 지경이었다.윤하연은 윤하경의 살기에 움찔하며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마치 자신이 억울한 피해자인 양 서 있었다.윤하경은 이를 악물며 잠시 서 있다가, 돌연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그러자 윤수철은 그녀를 그냥 두지 않고 쫓아 나왔다.“윤하경, 대체 뭐 하는 거야?”“우리가 다 합의한 대로 하기로 했잖아. 왜 또 이렇게 만든 거야?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네가 이렇게 말한 결과를 생각한 적 있어?” 윤수철은 화도 났지만 윤하경이 기자회견을 망쳐 투자 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
강현우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그의 압도적인 키로 윤하경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들고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평온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윤수철은 감히 강현우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윤수철을 막았다면 이미 얼굴이 굳어졌겠지만 강현우 앞에서는 그런 기세가 나오지 않았다.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강현우를 쳐다보며 말했다.“강 대표, 이건 우리 집안 문제입니다.”그 말은 강현우에게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강현우는 그냥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여자가 괴롭힘을 당하는 걸 보고도 그냥 있을 수는 없죠. 그런 건 신사다운 태도가 아니잖아요.”그가 그렇게 말할 때, 윤하경은 강현우의 뒤에서 그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강현우의 키가 워낙 커서 듬직해 보였지만 지금 그를 보니 이상하게 더 안심되었다.윤수철은 강현우를 다시 한번 살펴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윤수철이 말하려던 찰나, 윤하경은 돌연 고개를 돌려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윤하경, 거기 서! 윤하경!”윤수철의 부름에도 윤하경은 전혀 멈추지 않고 걸음을 더 빨리 옮겼다. 윤수철은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잡을 듯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모두 윤 대표님이 젠틀하고 의붓딸을 잘 챙기며 친딸한테는 무뚝뚝하다고 하던데 오늘 보고 나니 정말 그런가 보네요.”강현우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느긋했지만 그 안에 담긴 조롱은 숨길 수 없었다.그는 윤수철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딸을 억지로 참게 했다는 것을 비웃고 있었다.나이로 봐서 윤수철은 분명히 연장자였지만 강현우에게 이렇게 조롱당하자 자연스럽게 화가 났다. 하지만 강현우의 신분을 생각할 때, 그는 그저 그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이건 우리 집안 문제입니다.”강현우는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눈썹을 한 번 치켜올리고 아무 말 없이 그냥 떠났다.윤하경은 차를 몰고 오지 않았고 윤수철과 함께 왔기에 지금은 길에서 택시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택시를 기
강현우는 윤하경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보며 손에 들고 있던 노트북을 닫았다.차가 도착하자, 윤하경은 차 문을 열고 급히 뛰어내렸다.오늘 아침에 왔을 때, 이 집은 아무 이상 없었고 청소만 하면 될 정도로 엄마가 살아 있을 때와 똑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 집에서 굵은 연기가 솟아오르며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소방관들이 물대포로 불을 끄고 있었지만 윤하경은 그들을 무시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위험해요! 안으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한 소방관이 그녀의 행동에 놀라서 급히 외쳤다.하지만 윤하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강현우의 강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에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어? 귀먹었어? 아니면 죽고 싶어?”강현우는 인상이 찌푸려지며 그녀를 억지로 붙잡았고 윤하경은 울먹이며 그를 쳐다보았다.“제발 놔줘요. 들어가야 해요.”강현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행동에 대한 불만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이었다.윤하경이 아무리 애원해도 그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제발 들어가게 해줘요. 이 집은 엄마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에요!”윤하경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울먹였다.“이 집은 유일한...”윤하경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지조차 못했다. 강현우가 여전히 놓으려 하지 않자 윤하경은 멈칫하더니 그의 팔을 물어버렸다.하지만 강현우 팔의 근육이 단단해 윤하경은 살짝 당황했다. 게다가 강현우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그녀의 치아가 더 아팠다.윤하경은 포기하지 않고 그의 옷을 꽉 물고 이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걸 강하게 표현했다.그녀의 귀여운 고집에 강현우는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풀었다.그때, 한 소방관이 다가와 강현우에게 말했다.“여기는 너무 위험합니다. 화재 현장에 함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이분을 다른 곳으로
윤하경은 강현우의 말을 듣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엄마가 남긴 유일한 집조차 지킬 수 없었다.순간 무력감이 윤하경을 휘감았다. 그녀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창밖을 바라보다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강현우는 윤하경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옆을 슬쩍 쳐다본 후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진혁이가 남은 일을 잘 처리할 거야.”그 말은 조금 위로가 되었다. 강현우 앞에서 더 고집을 부려봤자 싸움만 날 것 같아 윤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차 안은 금세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어디 가고 싶어?”잠시 후, 강현우가 다시 말을 꺼냈다. 윤하경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잘 모르겠어요.”그녀는 윤수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자신이 살고 있던 집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젠 윤수철마저도 그곳을 알아버렸기에 그곳도 이제 그녀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조용히 몇 초를 생각한 후, 윤하경은 말했다.“호텔로 가 주세요.”결국, 반 시간 후 강현우는 차를 한 호텔 앞에 세웠다.윤하경은 정신을 차리고 호텔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여기 왜 온 거죠?”이 호텔은 강현우와 윤하경이 처음 사랑을 나눴던 특별한 곳이었다. 강현우는 차를 멈추며 덤덤하게 대답했다.“네가 호텔 가자고 했잖아?”그리고 그는 무심하게 차에서 내렸고 몇 걸음 걷다가 윤하경이 아직 차에서 내리지 않자, 돌아서며 말했다.“안 내리고 뭐 할 거야? 차에 있을 거야?”윤하경은 왠지 그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면서 멈칫했지만 그냥 내리기로 했다.이미 강현우와 그런 일을 여러 번 했으니 굳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강현우가 여전히 자신을 도와주고 있고 집 문제도 처리해 주고 있는데 괜히 예민하게 굴지 말자고 생각하며 마음을 내려놓았다.강현우는 여전히 그날 그 방에 들어가더니 욕실 쪽으로
강현우는 미소를 띠며 거대한 몸으로 문을 단단히 막고 있었다.“여기 안 자겠다고 하지 않았어?”윤하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호텔에 방이 없대요. 근처 다른 호텔도 다 찼다고 하구요.”“그래?” 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윤하경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내가 널 먹어버릴까 봐 걱정돼?”강현우의 말투는 농담처럼 들렸다.‘정말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재수 없지.’윤하경은 밖에 나가자마자 스마트폰 배터리가 떨어져 버렸고 지갑에는 현금도 없었다. 택시도 못 부른 채, 결국 강현우 앞에서 이렇게 어쩔 수 없이 꼼짝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강현우가 이제 그녀를 충분히 놀린 듯 눈빛으로 비웃다가, 겨우 문을 열어 들어갈 자리를 내줬다.윤하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눈에 띄는 건 강현우가 소파에 던져놓은 옷이었다.가슴 부분에 큰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제야 윤하경은 아까 강현우가 자신을 안았을 때 옷이 이렇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강현우가 모든 걸 다 계산하고 그럴 거라고 착각했는데 사실 그는 그런 생각 없이 정말 단순히 샤워했을 뿐이다.윤하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충전하기 시작했다.잠시 후, 강현우가 다시 욕실에서 나왔다. 머리는 아직 다 말리지 않았고 평소처럼 깔끔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에서 더 편안하고 여유 있는 분위기가 느껴졌다.지금의 강현우는 평소보다 덜 차갑고 덜 날카로워 보였다.윤하경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가끔 강현우를 슬쩍 쳐다봤다.그는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다루며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화면을 빠르게 스캔했다.핸드폰에 충전이 되자마자 소지연의 메시지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기에 먼저 소지연에게 안부를 전했다.이제 마음을 조금 정리한 윤하경은, 그전처럼 초조하지 않았다.편하게 소파에 몸을 기대고 어떻게 복수할지 생각했다. 윤하경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건드린 윤하연을 용서할 수
강현우는 차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채 눈을 가늘게 떴다.이때 민진혁이 고개를 돌려 그를 한 번 쳐다보며 물었다.“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별장으로 가자.”민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출발시키고 잠시 후 무엇인가 떠오른 듯 말을 꺼냈다.“오늘 들은 소식 하나 있어요.”“뭐?”민진혁은 후면 거울을 통해 강현우를 살짝 살펴본 후 말했다.“오늘 하경 씨가 기자회견에서 꽤 큰 망신을 당했대요. 그래서 구씨 집안에서 그녀를 처리하려고 한다고 하더라고요.”강현우는 손끝으로 가죽 시트를 가볍게 두드리다가 이 말을 들은 순간,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그는 아무 말 없이 차분히 창밖을 바라보았고 민진혁은 그의 반응을 보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하경 씨를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요?”민진혁은 강현우의 모든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지, 강현우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동안 강현우는 남의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늘은 다르다. 회의를 미뤄가며 윤하경을 돕기 위해 그녀를 데려다주고 숙소까지 마련해 줬고 이런 일이 있는 건 처음이었다.윤하경은 강현우가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 중 첫 번째로 이런 대우를 받은 사람이었다.그런데 민진혁이 말을 마친 순간, 강현우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너 한가해?”민진혁은 당황하며 말을 삼켰다.“...아니요.”그러자 민진혁은 속으로 자기가 혹시 잘못 생각한 건 아닌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그냥 하경 씨가 너무 불쌍해서요.”강현우는 여전히 차갑게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한가하네. 내일부터 일 좀 더 줄게. 하루 3시간씩 추가 근무해.”민진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강현우는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더니 잠시 후 생각에 잠긴 듯 미소를 지었다.그날 밤, 윤하경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밝자 소지연이 쉰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지연아, 왜?”소지연은 급하게 말했다.“하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
“아...”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며 따끔한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고개를 들어 앞을 막아선 배경빈을 짜증이 서린 눈빛으로 쳐다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하지만 배경빈은 그녀의 표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제가 안 막았으면 지금쯤 계단 굴러갔을걸요?”윤하경은 그제야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바로 앞에 계단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정신을 놓고 걷고 있었으니 정말 자칫하면 사고 날 뻔했다.물론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술을 삐쭉 내밀며 억지를 부렸다.“누가 넘어진다고 했어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일은 여기까지면 됐고요. 이제 퇴근해도 돼요.”그러자 배경빈은 방금 계약서가 담긴 클리어 파일을 흔들며 말했다.“윤 대표님, 저 방금 계약 따낸 거잖아요. 이렇게 빨리 손절하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기왕이면 축하 겸 한 끼쯤은 사줘야죠?”윤하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돈 없어요.”배경빈은 되레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괜찮아요. 전 있어요. 제가 쏠게요.”“됐거든요?”윤하경은 거절했지만 배경빈은 들은 체도 않고 그녀를 차에 밀어 넣었다.애초부터 기분이 어수선했던 터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배경빈의 해맑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윤하경은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차는 빠르게 도심을 빠져나갔고 잠시 후 한 대형 포장마차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윤하경도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예약이 어려워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여긴 왜요? 예약 안 했으면 못 들어갈 텐데.”그녀는 돌아서려 했지만 배경빈이 손목을 붙잡았다.“가긴 왜 가요. 자리 예약돼 있어요. 올라가요.”“아까까지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언제 예약을...?”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를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고 창가 쪽 자리에 자리를 잡은 배경빈은 턱을 괴고 윤하경을 바라보며 웃었다.“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요. 오늘은 제가 사는
오후 무렵, 윤수철이 회사에 들렀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부녀 사이엔 차가운 기류가 흘렀고 오늘 오전 그가 회사에 없었던 걸 보면 어디 다녀왔는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분명 윤하연을 구하려고 발을 뻗었던 모양이다.하지만 그 얼굴에 가득한 어두운 기색을 보니 결과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윤하경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얌전히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아버지.”그런데 윤수철은 대꾸도 하지 않고 윤하경을 쏘아보며 그대로 지나쳤다.그의 어깨가 스치듯 지나는 순간, 윤하경은 분명히 그가 억눌러 뱉은 듯한 콧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가볍게 눈썹을 올리며 조용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층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보다 한발 빨랐다.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배경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고 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까는 일하겠다고 그 난리더니 아직 퇴근도 안 했는데 벌써 도망치려는 거예요?”배경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슬기 비서님이 말씀하시길, 대표님이 곧 외부 미팅 있으시다고 해서 제가 같이 가라고 하더라고요.”“...”‘우슬기, 눈치가 좋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 문제야.’배경빈은 그녀가 뭔가 한 소리 하고 싶은 걸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 넘어갔고 오히려 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대표님 비서잖아요. 고객 미팅에 동행하는 거, 아주 타당한 업무 아닌가요?”강현우가 독처럼 위험하고 치명적인 존재라면 배경빈은 그저 따뜻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그 특유의 해사한 미소는 상대의 날을 무장 해제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윤하경은 지금도 제대로 화를 내기 어려웠다.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왔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던 찰나, 배경빈이 먼저 문을 열고 탑승해 버렸다.“대표님 같은 분이 직접 운전하실 순 없죠.”그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모실게요.”차는 강현우가 선물한, 붉은색이 도드라지는 고급 세단이었다.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랐다
배경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가 무슨 장난을 치겠어요. 요즘 일이 끊겨서 정식으로 밥벌이할 직장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귀사에서 비서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어쩌다 보니 덜컥 붙었어요. 이 정도면 인연 아닌가요?”윤하경은 거의 눈이 뒤집힐 뻔했다.“배씨 집안 둘째 아들이 밥벌이 걱정이라니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으세요? 우리 회사는 그렇게 귀한 몸을 담을 공간과 자격이 없어요.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배웅은 생략할게요.”하지만 배경빈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어요. 특별한 사유 없이는 해고도 불가일 텐데요.”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 꼭 강력 접착제 같았고 윤하경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대체 무슨 꿍꿍인데요? 배지훈 씨한테 들키면 혼나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배지훈’의 이름을 꺼내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배경빈의 입꼬리가 확 내려갔다.“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저랑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니까요.”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 그 좋은 집안의 둘째 아들이, 멀쩡한 디자인 일을 두고 왜 갑자기 여기서 비서 일을 하겠다는 건지, 이건 배씨 가문 체면에도 안 맞는 일인데 말이다.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배지훈에게 연락해서 이 사람 데려가라고 해야 하나...’그런데 막 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배경빈이 휙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로챘다.“형한테는 말하지 마세요.”결국 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고 그의 집요함 앞에선 아무리 단호해도 소용없었다.그리고 배경빈은 고개를 숙이고 또 특유의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마치 받아달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 눈빛에 약해지더니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여긴 진짜로 배경빈 씨가 있을 자리가 아니에요. 디자이너잖아요. 디자인 일에 집중해야지, 왜 여기서 비서를 하겠다는 거예요?”배경빈은 가볍게 웃었다.“최근 의뢰받은 디자인 건이 취소돼서요. 덕분에 일이 싹 끊겼습니다.
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 밤중에 도대체 누가 강현우에게 전화를 걸어온 걸까 싶었지만 자신이 그걸 묻는 건 선을 넘는 일이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강현우가 문을 열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그가 떠난 자리엔 먹다 만 음식만 남아 있었고 윤하경은 수저를 다시 집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문득 송시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여자가 있어요.”그게 설마, 진짜 자신은 아닌 걸까?윤하경은 입맛이 뚝 떨어진 채로 두세 입 더 억지로 먹고는 식당을 나섰다.그리고 그날 밤, 강현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백정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이렇게 오래 회사를 비우시면 곤란하잖아요.”그 말에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문자를 남겼다.[저 오늘 회사 좀 다녀올게요.]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윤하경은 문득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굳이 이런 걸 보고해야 하나...’출근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 우슬기가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뭐가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요즘 이상할 정도로 영업팀 쪽에 일이 몰리고 있어요. 거의 대부분이 강한 그룹 관련 회사들이고 사전에 대표님께 다 연락드렸다고 하던데요.”“나한테?”윤하경은 놀란 눈으로 우슬기를 바라봤다.“아, 네.”당황스러움을 감춘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알았어. 시간 내서 볼게. 먼저 나가 봐.”우슬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고 윤하경은 손에 든 문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내가 모르는 사이에... 강현우가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고?’생각해 보면 요즘 윤수철에게서 어떤 연락도 없었다. 그 성격에 자신이 회사에 이렇게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으면 진작에 문제 삼았을 텐데 이번엔 아무 말도 없었다.‘다 강현우 때문이구나.’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눌러 물고 마음이 복잡해졌다.강현
“자. 자자.”강현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고 어딘가 명령 같아 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체온은 마치 그 성격처럼 강렬하고 압도적이었다. 가까이 있을수록 숨이 막힐 듯한 뜨거움에, 윤하경은 몸을 조금 떼어내고 싶었지만 강현우가 허리에 둔 팔은 단단히 그녀를 감고 있었다.“저, 우리... 그게 어떻게 된 건지...”윤하경은 겨우 말을 꺼냈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 이후의 기억이 아예 비어 있었다. 술을 마신 것까지만 기억나고 그다음은 통째로 사라졌다.그 말에 강현우는 눈을 뜨고 비웃듯 웃었다.“왜? 어제는 그렇게 덮치더니 끝나니까 모르는 척이야?”그 조롱 가득한 말에 윤하경은 화들짝 돌아보며 외쳤다.“그럴 리가요!”‘설마 내가 먼저?’하지만 어젯밤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게 더 불안했지만 다행히 방 안은 어둑했고 강현우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강현우는 다시 코웃음 쳤다.“어제 그렇게 들이대 놓고 지금 와서 모른 척? 기억 안 나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얘기해줄까? 네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현우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를 따라 위로 천천히 움직였다. 의도가 뻔히 느껴지는 그 손길에 윤하경은 다급히 그의 손을 막았다.몸은 이미 온통 쑤시고 아팠고 지금 또 한 번 겪을 자신은 없었다.“저... 저 배고파요.”윤하경은 작은 목소리로 애교 섞인 말투를 꺼내며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술만 들이켰으니 속이 허기질 만도 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아슬아슬하게 멈춘 손을 거두며 이불 밖으로 나갔다.그가 조명을 켜고 옷을 챙겨 입는 사이, 윤하경은 침대 속에 몸을 꼭 숨긴 채 눈치만 살폈다. 그러다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한마디 했다.“배고프다며.”“아, 네!”윤하경은 잽싸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얼굴을 씻고 나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회색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었는데도, 다부진 어깨와 선명한 팔근육
“너무 많아...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많아...”윤하경은 고개를 들며 휘청거리다시피 일어서려 했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감당 안 돼?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되는데?”윤하경은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지만 술기운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눈앞의 강현우조차 흐릿하게 느껴져 마치 꿈속 같았다.윤하경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툭툭 건드리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아, 진짜네. 현우 씨 맞구나.”술이 겁 많은 사람도 용감하게 만든다더니 지금의 윤하경은 평소 강현우 앞에서 보이던 위축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오히려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꼬집고 뺨을 살짝 잡아당기기도 했다.“근데 왜 이렇게 여러 명이지...”윤하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말과 함께 흐르는 달큼한 숨결이 강현우의 목덜미에 닿자, 그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조금씩 다가오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그 순간, 주저 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갑작스러운 키스에 윤하경의 머릿속은 잠시 정지된 듯 멍해졌고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밀착시키고는 얕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기울였다.“그래서 뭐가 그렇게 감당이 안 된다는 건데?”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술에 취한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순하고 약해 보였다.“모르겠어...”그녀의 대답에 강현우는 코끝으로 그녀의 코를 슬쩍 스치듯 웃었다.“그럼 제대로 느껴보면 알겠네.”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그녀를 덮쳤고 키스는 점점 깊어지고 지배적으로 변해갔다.평소에도 강현우에게 한 번도 제대로 저항해 본 적 없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술에 취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생각은 흐릿해졌고 몸은 이미 그가 이끄는 감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부끄러움조차 사라진 그녀는 점점 더 나른하게 무너져갔다.“응...”작은 신음이 그녀 입에서
“정말 우연이네요.”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거절했다.“하지만 제가 일이 좀 있어서요. 귀한 시간 뺏지 않겠습니다.”오건우는 가볍게 웃었다.“무슨 시간 낭비입니까. 우리 협력 관계잖아요. 같이 타시죠, 마침 협력 얘기도 좀 나눌 수 있겠고요.”윤하경은 눈에 띄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예전에 오건우와 마주쳤을 때 강현우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떠올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괜찮아요, 사람 오기로 했어요.”그냥 거짓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옆에 검은 벤츠 한 대가 멈춰 섰고 운전석 창문이 열리더니 용천수의 얼굴이 나타났다.“하경 씨, 강 대표님께서 제가 모시러 오라고 하셨습니다.”그 말과 함께, 그는 오건우를 힐끔 도발하듯 바라봤고 험상궂은 얼굴에 살짝 웃음기까지 섞인 눈빛이었다.윤하경은 그가 나타난 게 의외였는지 잠깐 멈칫했지만, 결국 오건우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보시다시피, 정말 일이 생겼네요.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협력 관계인 만큼, 괜히 틀어질 필요도 없었다. 윤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오건우 옆을 지나 용천수의 차에 탔다.차에 오르자마자 용천수는 액셀을 밟아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고 오건우는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감시가 아주 철저하군.”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차를 돌렸다.차 안.윤하경은 뒷좌석에 앉아 표정이 꽤 차가웠다.“왜 당신이죠?”용천수에 대한 인상은 좋을 수가 없었다. 어깨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그 모든 시작이 바로 이 남자였고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 했지만, 불쾌감은 숨기기 어려웠다.운전대를 쥔 용천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없이 손에 힘을 주며 한마디 했다.“고마워요.”“뭐라고요?”목소리가 낮아 처음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이번엔 더 또렷하게 말했다.“고맙다고요. 당신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테니까.”윤하경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무슨 소리예요. 저는 그런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윤하연이 그 짓 당했을 땐 그렇게 분노하시지도 않더니요? 설마... 진짜 딸이라도 되는 거예요?”장난으로 던진 말에 윤수철의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고 잠시 눈빛이 흔들리더니 곧 이성을 잃은 듯 고함쳤다.“무슨 헛소리야, 네가 지금!”“헛소리?”윤하경은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지금 아버지 표정 보세요. 꼭 꼬리를 밟힌 고양이 같잖아요.”윤수철은 말문이 막혀 이를 악물며 분노만 삭일 뿐이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억지로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하경아, 하연이는 아직 어리잖니. 실수할 수도 있지. 한 번의 기회쯤은 줘야 하지 않겠냐. 그래도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자매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어?”그는 어딘가 감정이 담긴 듯 말했지만 윤하경의 차가운 시선을 외면한 채 억지로 말을 이었다.“우리 둘 다 세상 떠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너희 자매뿐이야. 이런 걸로 평생 원수로 남는 건, 너무 안타깝잖니. 하연이는 이제 막 인생을 시작했는데 네가 이러면 걔 인생은 어떻게 되겠어?”진심을 담은 척하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윤하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진 듯 웃어버렸다.“푸하하...”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긴 했지만 그 웃음 속엔 조롱과 냉소가 섞여 있어 윤수철조차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만지작거렸다.윤하경은 웃음을 멈추고 이제야 진지한 눈으로 윤수철을 바라봤다.“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하경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줄 알고 얼굴에 희미하게 희망을 띄웠다.“하경아, 혹시 강현우에게 한마디만 해줄 수 있겠어? 그 사람이 도와준다면 가능하지 않겠나 해서..”“...”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뻔뻔한 사람이란 걸 왜 몰랐을까 싶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길 향해 ‘남자한테 몸을 팔았다’고 쏘아붙이더니 이제는 그 상대에게 가서 부탁 좀 해달라니.“하하하하...”윤하경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