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 변호사를 통해 유지민이 경북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강유진은 바로 그녀에게 만나자고 연락했지만 또 한 번의 단호한 거절만이 돌아왔다. 그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그를 찾아올 때까지 그저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그동안 그는 이혼 합의서와 재산 분할 합의서를 수도 없이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예전 저택의 구조를 떠올리며 가구와 장식품을 하나하나 다시 사들였다. 유지민이 혹시나 자신을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원래의 배치와 분위기를 되돌리려고 애쓰며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서 9월 말이 되었을 때 드디어 엄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유지민이 만나자고 약속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만남의 장소는 구청 앞이었다. 강유진의 한껏 부풀었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래도 그는 약속 장소로 나갔다. 물론 빈손으로. 유지민은 두 손이 텅 빈 그를 보고 한눈에 알아챘다. 이혼에 동의한다고 했던 건 그저 그가 둘러댄 거짓말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에 크게 화나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은근한 짜증이 배어 있었다. “이혼에 동의한다면서 이렇게 빈손으로 온 게 네 성의야?” 한 달여 만에 만나서 이혼 얘기부터 나오자 강유진은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유지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미련이나 슬픔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에게도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이 생길 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했다. 눈빛엔 생기가 돌았고 건강해 보였다. 오히려 이혼 전보다 한층 밝아 보였다. ‘그동안 힘들었던 건 나 혼자뿐이었나.’ 강유진은 가슴속에 바위라도 얹힌 듯 숨이 막혀왔다. “지민아,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좋아. 이혼 서류를 먼저 끝내면 그때는 무슨 얘기든 다 들어줄게.” 그녀는 한마디로 강유진의 미약한 희망마저 완전히 없애 버렸다. 그는 주먹을 움켜쥔 채 쉰
정확히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에서 강유진은 차를 멈추고 무겁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맘에 안 드는 게 아니야. 네가 이혼을 원한다면 난 빈손으로 나가도 괜찮아. 협박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의 많아서 이대로 끝내기 좀 억울할 뿐이야.”강유진의 입에서 ‘억울하다'는 말을 들은 유지민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뭐가 억울한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이혼당해서 억울한 거야? 아니면 내가 먼저 이혼을 말해서 억울한 거야?”“둘 다 아니야. 지민아.”그녀의 의아한 표정을 보며 강유진은 잠시 씁쓸하게 웃고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에 알 수 없는 한숨을 섞어 답했다.“네가 나를 오해한 게 억울했어. 네가 아무 기회도 안 준 게 억울했고 우리가 이렇게 끝나게 된 게 억울했어.”이번엔 유지민이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그녀는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윤연서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나? 이혼한 후에는 바로 고백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이곳에서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 말투도 이렇게 애매하게?’ 그 침묵은 강유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주었다.“지민아, 그 영상 보고 나서 네가 왜 떠났는지 알았어. 내가 윤연서를 아직도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지?”“그렇지 않아?”유지민의 반문에 강유진의 가슴은 더욱 아려왔다. 그는 그 아픈 감정을 누르며 차분하고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사실 이런 얘기는 미리 해야 했는데 미루다 보니까 오해만 생기고 너를 그렇게 오랫동안 아프게 만들었어. 다 내 잘못이야. 정말 미안해. 지민아.”그 사과는 유지민이 듣기에는 너무 흐지부지하게 느껴졌다. 말이 연결되지 않은 듯 이상하게 끝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더 이상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마음속에는 이 모든 걸 빨리 끝내고 완전히 자유를 얻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다. 그의 늦은 사죄를 들을 인내심이 없었다.“넌 확실히 나한테 미안해해야 해. 내게
유지민은 그를 믿지 않았다. 이건 강유진에게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믿지 않게 된 것은 모두 자신이 그녀의 신뢰를 천천히 깨뜨렸기 때문이며 그는 자책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마음속으로 여러 차례 예감했던 것이었기에 아직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더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 말이 다 진짜라는 걸 증명할게. 지민아, 다시 기회를 줘.” 차는 지하 주차장에 멈췄다. 유지민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며 짜증이 섞인 어투로 말했다. “이혼 증명서만 주면 너가 어떻게 증명하든 신경 안 써.” 말을 끝내고 그녀는 그의 반응도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대화의 주제가 결국 이혼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강유진은 그녀가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임을 확실히 알았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팔에는 선명한 핏줄이 보였다. 하지만 그 아픔을 풀 길은 없었고 그저 그녀의 뒤를 따르며 올라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지민은 고개를 숙인 채 방으로 들어갔고 신발을 갈아 신을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때 신발장 안에서 토끼 모양의 슬리퍼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가 예전 집에서 자주 신고 다녔던 그 슬리퍼와 똑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떠날 때 그 신발을 분명 쓰레기통에 버렸었다. ‘왜 같은 신발이 여기 있을까?’ 의문을 품고 고개를 들었을 때 방 안의 구조를 보고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커튼부터 컵, 옷장, 거실의 결혼사진까지. 방 크기만 다를 뿐 모든 것이 복사해 놓은 듯 예전 집 그대로였다. 시간을 넘나드는 듯한 이 광경을 보고 유지민은 결국 입을 열었다. “왜 집을 이렇게 꾸몄어? 똑같은 물건들은 다 어디서 산 거야?” 강유진은 같이 방 안을 둘러보며 추억에 잠긴 듯 아련하게 말했다. “난 네가 나랑 함께 새 삶을 시작할
불과 10분 만에 유지민은 수집한 정보와 대조해 모든 서류를 찾아냈다. 서류를 꼼꼼히 확인한 후 서류봉투를 들고나와 보니 강유진이 문 앞에 축 늘어진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생각했다. ‘또 뭐 하는 거야?’ ‘설마 아픈 척해서 이혼을 미루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간 그녀는 경계심이 가득한 어조로 의심하며 물었다. “몸이 안 좋아?” 그 말에는 걱정보다도 의심이 가득했다. 강유진이 그걸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 문을 짚고 일어서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 가자.” 그가 문을 열고 나서자 유지민은 그제야 경계를 풀고 그 뒤를 따라나섰다. 구청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유지민은 계속해서 시계를 확인하며 시간을 계산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그의 손을 붙잡고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강유진은 결혼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그녀는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잔뜩 초조해하며 그를 재촉했었다. 그때 그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서두르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고 결혼에 대한 두려움도 조금은 사라졌었다. 하지만 이제 3년이 지난 오늘. 그들이 같은 건물을 다시 찾아온 이유는 이혼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구청 대기실에는 이혼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는 이혼이라는 게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지민이 말한 대로 그들의 결혼이 실수라면 여기서 끝내면 되는 거다. 실수를 여기서 멈춰야 그는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는 결혼이라는 울타리로 그녀를 붙잡고 싶지 않았다. 이혼하면 이제 다른 신분으로 그녀의 곁에 다시 서면 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그녀에게 자신의 진심을 증명해야 할 차례였다. 자신이 그녀에게 기회를 줬던 것처럼 그녀도 자신에게 다시 기회를 줄지 안 줄지는 몰라도 더 이상 헷갈리지 않았다.
유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정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빨리 이혼을 진행하려는 압박일 뿐 그와 깊은 대화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누가 이혼 증서를 받고 전 남편과 뜬금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겠냐고!’ ‘보통 이런 순간엔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며 새출발을 축하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항상 말한 대로 잘 지키는 그녀였지만 오늘 같은 기분 좋은 날에는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핑계를 댔다. “그런 말은 한 적 있긴 한데 지금 당장 얘기하자고 한 건 아니잖아? 나중에 시간이 나면 얘기하자.” 강유진은 손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저번에 네가 이혼 서류로 날 속이고 서명하게 하고는 아무 말 없이 사라졌잖아. 그때 일 덕분에 이제 네 말은 믿기가 어려워. 연락처도 바꿔놓고 오늘 떠나고 또 연락이 안 되면 그때 난 어디서 너를 찾아 약속을 지켜?” 변호사답게 억양이 굳고 강한 말투였기에 유지민은 왠지 모르게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포착하고 계속해서 부드럽게 접근하는 전략을 펼쳤다. “네가 이혼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원했던 건 아니지만 결국 네 뜻대로 했어. 시간을 좀 끌었지만 결국 너에게 맞춰준 거야. 난 이렇게 네 의견을 존중했고 네가 전에 나를 속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지금 그냥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 하고 싶은건데 그 기회도 안 줄 거야?” 이혼 증서를 받은 후 유지민의 마음은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수했던 차가운 태도를 깡그리 잊어버렸다. 한편 강유진이 그녀 앞에서 이런 자세로 자기를 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괜히 연약해지는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알았어. 연락처 줄게. 근데 전처럼 메시지 보내며 귀찮게 하지 마. 말도 예의 바르게 해야 해. 만나는 일은 나중에 보자.” 강유진은 그녀가 반응하기 전에 재빠르게 연락처를 추가하고는 그제
하지만 남편은 모르게 온 로펌이었다.상대편에 앉은 변호사는 형식적인 질문부터 했다.“이혼을 원하시면 이혼 합의서에 사인부터 하시고 한 달 숙려기간 거치시면 이혼하실 수 있어요. 남편분은 같이 안 오셨나요?”변호사의 질문에 유지민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말했다.“사인하라고 할게요.”“그럼 일단 이혼서류부터 작성해드릴게요.”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서류를 받아든 유지민은 요즘 있었던 일들을 되새기며 고개를 숙인 채 계단을 내려갔다.그런데 유지민이 프런트 데스크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음성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지민아, 네가 로펌엔 웬일이야?”그녀를 불러세운 건 다름 아닌 오늘 상담의 대상이었던 유지민이 이혼하고자 하는 그녀의 남편 강유진이었다.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한 남자의 두 눈을 마주한 유지민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지만 어차피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는 남자였기에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애써 긴장을 감추며 담담히 말했다.“볼일이 있어서 왔어. 아, 어머님 아버님이 말씀하신 집 명의 건 서류 작성 다 했는데 사인해.”유지민은 바로 들고 있던 이혼서류를 넘기며 마지막 장을 펼쳐놓고는 강유진에게 펜을 건네주었다.마지막 장에는 서명란만 있었기에 변호사로서 사인은 꼼꼼히 해야 하는 직업병이 있던 강유진은 바로 앞의 내용을 확인하려 했지만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에 한 1초 고민하다가 바로 펜을 받아들고 사인을 해버렸다.“다했으니까 볼일 다 봤으면 이제 그만 가봐. 나 일해야 해.”남자가 사인을 마치자 유지민은 안심하면서도 이 상황이 참 우습게 느껴졌다.앞장을 펼쳐보기만 했어도 명의 이전이 아니라 이혼서류인걸 알았을 텐데 윤연서에게만 정신이 쏠려있던 강유진은 고작 그 정도의 시간도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혼서류에 사인을 해버린 것이다.윤연서의 예쁘장한 얼굴을 본 유지민은 심경이 복잡해져 가방을 든 손에 힘을 준 채 로펌을 나섰다.유지민이 나서고 유리문이 닫히기 전 그 찰나의 순간에 둘의 목소리
밤이 깊어감에도 잠에 들지 못했던 유지민은 고개를 베개에 파묻고 있었는데 그때 허리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그리고 등 뒤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숨결에 유지민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강유진의 입맞춤을 피했다.결혼 3년 내내 항상 먼저 관계를 요구하던 유지민이 자신이 처음 내민 손을 뿌리쳤다는 게 의아했던 강유진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기분 안 좋아?”“그날이라서 피곤해.”유지민이 핑계를 대자 강유진도 더는 묻지 않고 이불을 여며주었다.자기 전에 늘 낮에 있었던 일을 되새기는 강유진은 오후에 사인했던 부동산 서류를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부동산 서류 어딨어? 뭐 문제없나 한번 봐야겠어.”그 말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 유지민은 그를 빤히 보며 물었다.“진짜 볼 거야?”어딘가 긴장한 듯한 그녀의 표정에 미간을 찌푸리던 강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지민은 서랍에서 서류를 가져오며 그에게 건네주려 했는데 그 순간 울리는 핸드폰에 강유진은 먼저 전화부터 받았다.“오빠, 고정우가 또 와서 문 두드리면서 욕하는데 나 너무 무서워요! 빨리 좀 와줘요...”난폭하기 그지없는 윤연서의 전남편을 떠올린 강유진은 서둘러 옷을 걸치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유지민이 그런 그를 불러세웠다.“이혼한 그 동생이 또 찾는 거야?”사실대로 말하려던 강유진은 밤에 또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일부러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말했다.“응, 전남편이 칼 들고 문 앞에서 소리 지른대. 혹시라도 안전에 이상이 생길 수 있으니까 가보려고.”유지민은 그냥 조심하라는 말만 하고는 강유진을 보내주었다.그가 떠난 뒤에도 잠에 들수 없었던 유지민은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들었다가 우연히 윤연서가 올린 인스타를 보게 되었다.며칠 전에 몰래 추가했던 그녀가 올린 인스타는 일출을 담고 있었는데 감탄을 하며 카메라를 돌리던 그 장면에 강유진의 모습도 언뜻 보였다.[어두웠던 과거는 이제 지나갔으니까 새로운 미래를 맞아야지.]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그 문장을 본 유지민은 저도 모르
밥을 먹고 유지민은 아직 처리해야 할 자료들이 있는데 작동이 되지 않는 노트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유진의 노트북을 빌려 쓰고 있었다.그런데 문건을 보내는 사이에 강유진의 카카오톡으로 문자가 오자 유지민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클릭해보았다.[유진아, 저녁에 회식 있는데 여자친구도 좀 데려와.]그 문자를 본 유지민은 순간 손이 떨려왔다.3년 동안 결혼 사실을 숨기고 있어 다들 강유진이 솔로인 줄로만 알고 있었고 그래서 유지민이 로펌에 이혼하겠다고 찾아갔을 때도 그녀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그랬던 강유진이 이번에는 과연 데려갈까?유지민은 확신할 수도 없었고 감히 그러길 바랄 수도 없었다.문자를 받은 강유진은 자연스레 유지민을 쳐다보았는데 미묘하게 변한 그녀의 표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강유진의 시선을 느낀 유지민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나 데려갈 거야?”3년이나 됐는데 이제는 공개할 때고 되지 않았냐라는 뜻의 질문이었지만 강유진은 입술만 달싹일 뿐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그 모습이 또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혀버렸지만 유지민은 그 고통을 애써 참으며 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나 저녁에 약속 있어서 당신이 나 데려간다 해도 내가 못 가줘.”강유진은 그제야 표정을 풀며 다시 느슨해진 말투로 답을 했다.“그럼 나중에 너 시간 될 때 같이 가자.”그 말에 유지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저 속으로 묵묵히 되뇌고만 있었다, 우리에게 다음은 없다고.저녁에 혼자 회식 자리에 나간 강유진은 바로 술 취한 동료들에게 붙잡혀버렸다.“너는 3년 동안 어떻게 여자친구를 한 번도 안 데리고 나와?”“우리한테 제수씨도 안 보여주고, 대체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거야?”동료들의 재촉에 강유진은 어쩔 수 없이 연락처를 키고는 고민했다.윤연서와 유지민 둘 중 누구에게 문자를 보내야 할지.결국 그는 윤연서를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연서가 회식 자리에 도착하자 다들 강유진의 안목을 칭찬하며 분위기도 금세 화기애애해졌다.그렇게 다들 신나게 술
유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정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빨리 이혼을 진행하려는 압박일 뿐 그와 깊은 대화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누가 이혼 증서를 받고 전 남편과 뜬금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겠냐고!’ ‘보통 이런 순간엔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며 새출발을 축하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항상 말한 대로 잘 지키는 그녀였지만 오늘 같은 기분 좋은 날에는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핑계를 댔다. “그런 말은 한 적 있긴 한데 지금 당장 얘기하자고 한 건 아니잖아? 나중에 시간이 나면 얘기하자.” 강유진은 손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저번에 네가 이혼 서류로 날 속이고 서명하게 하고는 아무 말 없이 사라졌잖아. 그때 일 덕분에 이제 네 말은 믿기가 어려워. 연락처도 바꿔놓고 오늘 떠나고 또 연락이 안 되면 그때 난 어디서 너를 찾아 약속을 지켜?” 변호사답게 억양이 굳고 강한 말투였기에 유지민은 왠지 모르게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포착하고 계속해서 부드럽게 접근하는 전략을 펼쳤다. “네가 이혼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원했던 건 아니지만 결국 네 뜻대로 했어. 시간을 좀 끌었지만 결국 너에게 맞춰준 거야. 난 이렇게 네 의견을 존중했고 네가 전에 나를 속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지금 그냥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 하고 싶은건데 그 기회도 안 줄 거야?” 이혼 증서를 받은 후 유지민의 마음은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수했던 차가운 태도를 깡그리 잊어버렸다. 한편 강유진이 그녀 앞에서 이런 자세로 자기를 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괜히 연약해지는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알았어. 연락처 줄게. 근데 전처럼 메시지 보내며 귀찮게 하지 마. 말도 예의 바르게 해야 해. 만나는 일은 나중에 보자.” 강유진은 그녀가 반응하기 전에 재빠르게 연락처를 추가하고는 그제
불과 10분 만에 유지민은 수집한 정보와 대조해 모든 서류를 찾아냈다. 서류를 꼼꼼히 확인한 후 서류봉투를 들고나와 보니 강유진이 문 앞에 축 늘어진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생각했다. ‘또 뭐 하는 거야?’ ‘설마 아픈 척해서 이혼을 미루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간 그녀는 경계심이 가득한 어조로 의심하며 물었다. “몸이 안 좋아?” 그 말에는 걱정보다도 의심이 가득했다. 강유진이 그걸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 문을 짚고 일어서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 가자.” 그가 문을 열고 나서자 유지민은 그제야 경계를 풀고 그 뒤를 따라나섰다. 구청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유지민은 계속해서 시계를 확인하며 시간을 계산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그의 손을 붙잡고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강유진은 결혼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그녀는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잔뜩 초조해하며 그를 재촉했었다. 그때 그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서두르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고 결혼에 대한 두려움도 조금은 사라졌었다. 하지만 이제 3년이 지난 오늘. 그들이 같은 건물을 다시 찾아온 이유는 이혼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구청 대기실에는 이혼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는 이혼이라는 게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지민이 말한 대로 그들의 결혼이 실수라면 여기서 끝내면 되는 거다. 실수를 여기서 멈춰야 그는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는 결혼이라는 울타리로 그녀를 붙잡고 싶지 않았다. 이혼하면 이제 다른 신분으로 그녀의 곁에 다시 서면 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그녀에게 자신의 진심을 증명해야 할 차례였다. 자신이 그녀에게 기회를 줬던 것처럼 그녀도 자신에게 다시 기회를 줄지 안 줄지는 몰라도 더 이상 헷갈리지 않았다.
유지민은 그를 믿지 않았다. 이건 강유진에게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믿지 않게 된 것은 모두 자신이 그녀의 신뢰를 천천히 깨뜨렸기 때문이며 그는 자책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마음속으로 여러 차례 예감했던 것이었기에 아직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더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 말이 다 진짜라는 걸 증명할게. 지민아, 다시 기회를 줘.” 차는 지하 주차장에 멈췄다. 유지민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며 짜증이 섞인 어투로 말했다. “이혼 증명서만 주면 너가 어떻게 증명하든 신경 안 써.” 말을 끝내고 그녀는 그의 반응도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대화의 주제가 결국 이혼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강유진은 그녀가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임을 확실히 알았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팔에는 선명한 핏줄이 보였다. 하지만 그 아픔을 풀 길은 없었고 그저 그녀의 뒤를 따르며 올라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지민은 고개를 숙인 채 방으로 들어갔고 신발을 갈아 신을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때 신발장 안에서 토끼 모양의 슬리퍼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가 예전 집에서 자주 신고 다녔던 그 슬리퍼와 똑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떠날 때 그 신발을 분명 쓰레기통에 버렸었다. ‘왜 같은 신발이 여기 있을까?’ 의문을 품고 고개를 들었을 때 방 안의 구조를 보고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커튼부터 컵, 옷장, 거실의 결혼사진까지. 방 크기만 다를 뿐 모든 것이 복사해 놓은 듯 예전 집 그대로였다. 시간을 넘나드는 듯한 이 광경을 보고 유지민은 결국 입을 열었다. “왜 집을 이렇게 꾸몄어? 똑같은 물건들은 다 어디서 산 거야?” 강유진은 같이 방 안을 둘러보며 추억에 잠긴 듯 아련하게 말했다. “난 네가 나랑 함께 새 삶을 시작할
정확히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에서 강유진은 차를 멈추고 무겁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맘에 안 드는 게 아니야. 네가 이혼을 원한다면 난 빈손으로 나가도 괜찮아. 협박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의 많아서 이대로 끝내기 좀 억울할 뿐이야.”강유진의 입에서 ‘억울하다'는 말을 들은 유지민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뭐가 억울한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이혼당해서 억울한 거야? 아니면 내가 먼저 이혼을 말해서 억울한 거야?”“둘 다 아니야. 지민아.”그녀의 의아한 표정을 보며 강유진은 잠시 씁쓸하게 웃고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에 알 수 없는 한숨을 섞어 답했다.“네가 나를 오해한 게 억울했어. 네가 아무 기회도 안 준 게 억울했고 우리가 이렇게 끝나게 된 게 억울했어.”이번엔 유지민이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그녀는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윤연서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나? 이혼한 후에는 바로 고백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이곳에서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 말투도 이렇게 애매하게?’ 그 침묵은 강유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주었다.“지민아, 그 영상 보고 나서 네가 왜 떠났는지 알았어. 내가 윤연서를 아직도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지?”“그렇지 않아?”유지민의 반문에 강유진의 가슴은 더욱 아려왔다. 그는 그 아픈 감정을 누르며 차분하고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사실 이런 얘기는 미리 해야 했는데 미루다 보니까 오해만 생기고 너를 그렇게 오랫동안 아프게 만들었어. 다 내 잘못이야. 정말 미안해. 지민아.”그 사과는 유지민이 듣기에는 너무 흐지부지하게 느껴졌다. 말이 연결되지 않은 듯 이상하게 끝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더 이상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마음속에는 이 모든 걸 빨리 끝내고 완전히 자유를 얻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다. 그의 늦은 사죄를 들을 인내심이 없었다.“넌 확실히 나한테 미안해해야 해. 내게
엄 변호사를 통해 유지민이 경북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강유진은 바로 그녀에게 만나자고 연락했지만 또 한 번의 단호한 거절만이 돌아왔다. 그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그를 찾아올 때까지 그저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그동안 그는 이혼 합의서와 재산 분할 합의서를 수도 없이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예전 저택의 구조를 떠올리며 가구와 장식품을 하나하나 다시 사들였다. 유지민이 혹시나 자신을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원래의 배치와 분위기를 되돌리려고 애쓰며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서 9월 말이 되었을 때 드디어 엄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유지민이 만나자고 약속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만남의 장소는 구청 앞이었다. 강유진의 한껏 부풀었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래도 그는 약속 장소로 나갔다. 물론 빈손으로. 유지민은 두 손이 텅 빈 그를 보고 한눈에 알아챘다. 이혼에 동의한다고 했던 건 그저 그가 둘러댄 거짓말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에 크게 화나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은근한 짜증이 배어 있었다. “이혼에 동의한다면서 이렇게 빈손으로 온 게 네 성의야?” 한 달여 만에 만나서 이혼 얘기부터 나오자 강유진은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유지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미련이나 슬픔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에게도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이 생길 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했다. 눈빛엔 생기가 돌았고 건강해 보였다. 오히려 이혼 전보다 한층 밝아 보였다. ‘그동안 힘들었던 건 나 혼자뿐이었나.’ 강유진은 가슴속에 바위라도 얹힌 듯 숨이 막혀왔다. “지민아,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좋아. 이혼 서류를 먼저 끝내면 그때는 무슨 얘기든 다 들어줄게.” 그녀는 한마디로 강유진의 미약한 희망마저 완전히 없애 버렸다. 그는 주먹을 움켜쥔 채 쉰
유지민이 떠난 지 일곱째 날. 강유진은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뒤에는 깊은 나락이 기다리고 있었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그는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비록 이혼 숙려 기간은 끝났지만 아직 절차는 마무리되지 않았다. 이혼 증서를 발급받거나 소송을 제기하는 모든 과정에서 유지민은 반드시 돌아와야 했다. 이 점을 깨달은 강유진을 오랫동안 침울해 있던 기운을 떨쳐내고 다시 일어섰다. 그는 휴가를 끝내고 법률사무소로 돌아온 후 바로 엄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동안 엄 변호사는 그에게 여러 차례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고 그의 야위고 피곤한 모습을 마주하자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찰나 강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엄 변호사님, 그 사람에게 전해 주세요. 제가 이혼을 동의한다고요. 이혼 서류를 처리하러 돌아오라고 하세요.” 엄 변호사는 깜짝 놀라 입에 있던 차를 거의 뿜을 뻔했다. “이렇게 쉽게 동의하시겠다고요? 좀 더 붙잡을 생각은 없으세요? 그래도 3년이나 함께한 부부인데!” “그 사람은 계속 저와 대화하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뭘 더 할 수 있겠어요? 그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 주는 수밖에 없죠. 법정까지 갈 수는 없잖아요.” 엄 변호사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유지민 씨에게 바로 연락드릴게요. 유진 씨,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강유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는 의자에 앉아 오랜 긴장 상태에 있던 몸을 살짝 풀어주고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후속 절차에 대해 계획을 세웠다. 사실 강유진은 이혼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단지 유지민을 한 번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경북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는 직접 설명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0년간 자신을 사랑해 온 그녀였다. 아무리 오해가 있었더라도 그걸 풀면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엄 변호사가 보낸
유지민이 떠난 지 사흘째. 강유진은 그녀에게 연락하려고 아무리 방법을 찾아봐도 연락할 수 없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고 그의 마음속 불안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 며칠 동안 윤연서가 몇 번이나 그를 찾아왔지만 강유진은 매번 만남을 거절했다. 그러다 결국 그녀가 그를 찾아왔을 때 지쳐버린 그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눈엔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유진 오빠, 무슨 일이에요?” 이제 와서 윤연서가 다시 눈앞에 나타나자 강유진의 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윤연서에게 느끼던 그의 감정은 이미 오래전 사랑에서 가족애로 바뀌었지만 그것을 말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지내왔다. 하지만 유지민이 이 모든 걸 오해하고 떠난 지금.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연서야, 나 요즘 지민이랑 연락하려고 하고 있어.” “지민 언니요? 무슨 일인데요?” 윤연서의 얼굴에 놀람과 긴장감이 서렸고 강유진의 가슴은 더 죄책감으로 무거워졌다. “그녀가 사라졌어. 어디에도 없고 내가 찾아도 연락이 닿지 않아.” “네? 갑자기 왜요? 혹시 이혼 때문이에요? 언니의 전남편 때문인가요?” “이혼 때문이긴 해. 그리고 전남편 문제도 맞고. 더 정확히 말하면 나 때문이야.” 윤연서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의문을 보며 강유진은 용기를 내어 솔직히 털어놓았다. “내가 바로 지민이 전남편이야. 3년 전에 결혼했었고 그동안 너에게 숨겨왔어. 미안해, 연서야.” 이 사실은 윤연서의 가슴을 후려치는 듯한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동안 가끔 느꼈던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들이 결코 틀린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졌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왜 숨겼어요? 그게 지민 언니한테 공평하다고 생각해요?” 강유진은 말문이 막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마음속
유지민이 자신의 갤러리를 발견했다는 걸 알아차린 강유진은 그날 밤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그는 가만히 누운 채 유지민과 함께 보내던 날 들을 떠올렸다.유지민과 결혼하기 전에는 윤연서에게만 빠져 살았다지만 그녀와 결혼한 뒤로 강유진은 점차 윤연서를 놓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윤연서가 결혼할 때 강유진은 앞으로 그녀를 동생으로만 대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자신에게 계속 고백을 하는 유지민은 또 친구로만 대했다.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얻을 수 없는 처지는 같은 만큼 강유진은 늘 유지민한테 미안해하고 있었다.그러다가 3년 전 맞선자리에서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강유진은 유지민이 아직도 자신을 잊지 못했다는 걸 알아채고는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부모님이 결혼을 재촉한다고 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랑 그냥 같이 살아버리는 게 나을까, 아니면 자신을 오랫동안 좋아했던 유지민에게 기회라도 주는 게 나을까.그래서 강유진은 결국 유지민이 좀 더 힘들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와의 결혼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하지만 그때의 강유진은 얻었음에도 예상한 결과가 아니라면 유지민이 짝사랑할 때보다 더욱더 힘들어할 거라는 걸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누군가를 만족시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3년 전의 강유진은 너무 오만했었다.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고 자신은 곧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을 할 예정이었기에 그때의 강유진은 정말 반쯤 미쳐있었다.몸과 정신이 반으로 갈라진 듯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결혼 사실을 숨기자는 제안을 했는데 유지민은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수락해버린 것이다.그렇게 강유진은 한 사람을 어떻게 잊어야 하는지, 결혼생활은 어떻게 가꾸어 나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결혼을 해버린 것이다.결혼 후에 강유진은 윤연서와는 거의 만나지 않으며 가끔 모임에서 마주치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그 정도 사이를 유지해오고 있었다.그도 점점 자신의 집념을 떨쳐가고 있었지만 한 사람을 잊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
경북을 떠나기 위해 기차역으로 온 유지민은 아무 곳이나 손가는 데를 가리키며 그곳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예매했다.북방에서 남방으로 가는 열차라 점차 기온과 습도가 올라가고 있었다.그렇게 캐리어 하나만 챙긴 유지민은 낯선 도시 용성에서 자신의 첫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호텔에 짐을 맡긴 뒤 유지민은 경북과 달리 작은 도시인 용성의 템포에 발을 맞춰 걸으며 길거리에 앉아 쌀국수를 먹으며 찬 음료수를 함께 마셨다.별거 아닌 건데도 힐링 되는 것 같은 이 느낌이 마냥 좋았었는데 갑자기 울리는 문자 수신음이 그녀를 다시 흔들어놓았다.새로 만든 계정을 아는 이는 얼마 없었기에 핸드폰을 확인한 유지민은 엄 변호사가 보낸 문자를 보게 되었다.[제수씨, 그래도 강변 와이프였으면 저한테는 알려주셨어야죠. 제가 연락처 안 준다고 강변이 아주 난리가 났어요. 편지 대신 전해달라고 해서 보내니까 한 번만 읽어봐요.]강유진이 화를 낼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편지를 쓰는 건 의외여서 엄 변호사가 보내온 파일을 열어보니 안에는 8천 자가 넘는 글자가 적혀있었다.이혼했다고 8천 자씩이나 되는 편지를 보내는 것도 우스웠고 어차피 그 안에 적힌 내용이 원망일 게 뻔해 유지민은 이 좋은 기분을 망치기 싫어 핸드폰을 진동 모드로 바꾸고는 쌀국수를 마저 먹었다.밥을 다 먹고 또 홀로 야시장을 거닐다 보니 찝찝했던 기분은 점차 식욕으로 변해갔고 다시 아까처럼 신나기 시작했다.저녁에 호텔에 돌아온 뒤에야 엄 변호사에게 감사하다는 답장을 한 유지민은 똑같이 파일 하나를 보냈다.유지민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기쁜 마음으로 파일을 열어보던 강유진은 그 안에 적힌 글자들을 본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너무 길어서 안 보고 싶어. 이미 이혼한 사이에 연락은 삼가해줘.]그 문장을 보고 차분히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들끓기 시작한 강유진은 하고 싶은 말을 빠르게 적어서 보내려고 했지만 이미 적힌 내용이 너무 길어서 혹시나 또 무시 당할까 싶어 힘을 주어 취소 버튼만 꾹꾹 누르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