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감에도 잠에 들지 못했던 유지민은 고개를 베개에 파묻고 있었는데 그때 허리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그리고 등 뒤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숨결에 유지민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강유진의 입맞춤을 피했다.결혼 3년 내내 항상 먼저 관계를 요구하던 유지민이 자신이 처음 내민 손을 뿌리쳤다는 게 의아했던 강유진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기분 안 좋아?”“그날이라서 피곤해.”유지민이 핑계를 대자 강유진도 더는 묻지 않고 이불을 여며주었다.자기 전에 늘 낮에 있었던 일을 되새기는 강유진은 오후에 사인했던 부동산 서류를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부동산 서류 어딨어? 뭐 문제없나 한번 봐야겠어.”그 말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 유지민은 그를 빤히 보며 물었다.“진짜 볼 거야?”어딘가 긴장한 듯한 그녀의 표정에 미간을 찌푸리던 강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지민은 서랍에서 서류를 가져오며 그에게 건네주려 했는데 그 순간 울리는 핸드폰에 강유진은 먼저 전화부터 받았다.“오빠, 고정우가 또 와서 문 두드리면서 욕하는데 나 너무 무서워요! 빨리 좀 와줘요...”난폭하기 그지없는 윤연서의 전남편을 떠올린 강유진은 서둘러 옷을 걸치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유지민이 그런 그를 불러세웠다.“이혼한 그 동생이 또 찾는 거야?”사실대로 말하려던 강유진은 밤에 또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일부러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말했다.“응, 전남편이 칼 들고 문 앞에서 소리 지른대. 혹시라도 안전에 이상이 생길 수 있으니까 가보려고.”유지민은 그냥 조심하라는 말만 하고는 강유진을 보내주었다.그가 떠난 뒤에도 잠에 들수 없었던 유지민은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들었다가 우연히 윤연서가 올린 인스타를 보게 되었다.며칠 전에 몰래 추가했던 그녀가 올린 인스타는 일출을 담고 있었는데 감탄을 하며 카메라를 돌리던 그 장면에 강유진의 모습도 언뜻 보였다.[어두웠던 과거는 이제 지나갔으니까 새로운 미래를 맞아야지.]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그 문장을 본 유지민은 저도 모르
밥을 먹고 유지민은 아직 처리해야 할 자료들이 있는데 작동이 되지 않는 노트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유진의 노트북을 빌려 쓰고 있었다.그런데 문건을 보내는 사이에 강유진의 카카오톡으로 문자가 오자 유지민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클릭해보았다.[유진아, 저녁에 회식 있는데 여자친구도 좀 데려와.]그 문자를 본 유지민은 순간 손이 떨려왔다.3년 동안 결혼 사실을 숨기고 있어 다들 강유진이 솔로인 줄로만 알고 있었고 그래서 유지민이 로펌에 이혼하겠다고 찾아갔을 때도 그녀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그랬던 강유진이 이번에는 과연 데려갈까?유지민은 확신할 수도 없었고 감히 그러길 바랄 수도 없었다.문자를 받은 강유진은 자연스레 유지민을 쳐다보았는데 미묘하게 변한 그녀의 표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강유진의 시선을 느낀 유지민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나 데려갈 거야?”3년이나 됐는데 이제는 공개할 때고 되지 않았냐라는 뜻의 질문이었지만 강유진은 입술만 달싹일 뿐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그 모습이 또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혀버렸지만 유지민은 그 고통을 애써 참으며 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나 저녁에 약속 있어서 당신이 나 데려간다 해도 내가 못 가줘.”강유진은 그제야 표정을 풀며 다시 느슨해진 말투로 답을 했다.“그럼 나중에 너 시간 될 때 같이 가자.”그 말에 유지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저 속으로 묵묵히 되뇌고만 있었다, 우리에게 다음은 없다고.저녁에 혼자 회식 자리에 나간 강유진은 바로 술 취한 동료들에게 붙잡혀버렸다.“너는 3년 동안 어떻게 여자친구를 한 번도 안 데리고 나와?”“우리한테 제수씨도 안 보여주고, 대체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거야?”동료들의 재촉에 강유진은 어쩔 수 없이 연락처를 키고는 고민했다.윤연서와 유지민 둘 중 누구에게 문자를 보내야 할지.결국 그는 윤연서를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연서가 회식 자리에 도착하자 다들 강유진의 안목을 칭찬하며 분위기도 금세 화기애애해졌다.그렇게 다들 신나게 술
밤바람을 맞으며 운전하던 유지민은 아까부터 계속 윤연서와 나란히 서 있던 강유진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이미 너무 많이 상처받고 아팠던 터라 더 이상의 고통은 없었지만 그저 숙려기간인 30일이 너무 긴 것 같아 지쳐가고 있었다.정신을 놓고 운전을 하다가 불법 후진을 하는 차를 보지 못한 유지민은 그대로 차를 들이 받아버렸고 찌그러진 문에 다리가 끼인 그녀는 피가 철철 나는 다리를 보며 식은땀이 흘렀고 의식도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그래도 정신력으로 버티며 간신히 119에 신고한 덕에 유지민은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다.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그저 작은 수술만 하고 병실에 온 유지민은 가족들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에 먼 곳에 있는 부모님 대신 강유진에게 연락을 해보았다.하지만 몇 통이나 걸었는데 강유진은 단 한 통의 전화도 받지 않고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짝사랑하던 상대도 옆에 끼고 있는데 원하는 걸 다 가져서 신난 그가 이 상황에 자신의 전화를 받을 리가 없을 것 같아 유지민은 결국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간호사는 할 수 없이 물었다.“남편분은 진짜 못 오시는 거예요?”그 질문에 유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태연하게 답했다.“이혼했어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정말 남남이에요.”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던 간호사는 잠시 당황하다 다시 물었다.“그래도 아직은 숙려기간이잖아요, 와서 사인하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간호사의 말에 자신의 지난 3년을 떠올린 유지민은 순간 감개가 무량해지는 것 같았다.저녁 한 끼를 같이 먹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기다렸는데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야근 때문에 못 들어온다는 문자 하나였고 강유진과 조금의 접점이라도 만들기 위해 법을 공부했건만 돌아오는 건 아마추어라는 자신감을 꺾어버리는 말뿐이었으며 그를 기쁘게 하려고 준비했던 생일파티마저도 힘들다는 강유진의 한마디에 빛도 못 보고 접어야만 했다....처음부터
강유진이 돌아올 줄은 몰랐어서 놀라긴 했지만 유지민은 마침 곁에 있는 지서연을 가리키며 말했다.“서연이가 이혼한대.”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지서연은 바로 무슨 상황인지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아, 네. 저 이혼하려고요, 이미 절차 밟고 있어요.”평소 유지민과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던 강유진은 당연히 지서연과도 얼굴 몇 번 본 게 전부였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서 저 말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그럼 바로 저한테 오시지 그러셨어요.”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강유진의 말에 할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던 지서연이 당황해하자 유지민이 바로 말을 이었다.“그때 당신이 연서 씨 이혼 건으로 바빴어서 그냥 다른 분한테 부탁했어.”윤연서를 언급하자 마찬가지로 당황한 강유진은 더 캐묻지 않고 말했다.“그럼 앞으로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와.”어떻게 잘 속이긴 했지만 유지민은 전혀 다행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직업 특성상 여러 번 생각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습관이 되어있는 강유진이 이 모든 일이 짜고 친 것처럼 어색하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윤연서 얘기만 나오면 그는 고장 난 장난감처럼 삐걱대고 있었다.그리고 윤연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강유진은 모든 걸 뒤로 제쳐두고 그녀에게로 달려가곤 했다.윤연서를 대하는 강유진의 모습을 보니 사랑에 눈이 먼다는 말이 무엇인지 유지민은 점점 알 것 같았다.지금도 강유진은 유지민의 병실에 앉아 핸드폰을 든 채 초조하게 타자를 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며 유지민은 그가 언제 일어날지 속으로 세고 있었는데 그 수가 열에 다다를 때 강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핑계를 대고는 병실을 빠져나갔다.“지민아, 로펌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언제 퇴원해? 그때 데리러 올게.”어차피 거짓말인 걸 알았지만 유지민은 그저 날짜를 알려주었다.“5일 뒤에 퇴원해.”퇴원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다렸지만 역시나 나타나지 않는 강유진에 유지민은 인스타에 들어가 봤는데 마침 윤연
집으로 돌아온 유지민은 이사를 서두르려 했지만 다리가 아직 다 낫지 않아 거동이 불편했기에 아예 기사님들을 집으로 불러 짐을 나르고 있었다.드나드는 인원이 많고 물건도 많다 보니 집 문도 다 열려 있었는데 마침 집에 들어온 강유진이 그 혼란스러운 장면을 보며 놀라서 묻자 유지민은 진작에 준비해두었던 멘트를 그대로 내뱉었다.“성운동 집 인테리어 끝나서 아예 거기로 옮기려고. 여기 일하는 데랑 멀잖아.”전에 사인했던 부동산 서류를 떠올린 강유진은 소파에 앉으며 새로 이사 갈 집에 베란다가 있는 걸 기억해내고는 시답잖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너 꽃 좋아하잖아, 이사가면 베란다에서 꽃 기르는 거 어때?”그 말을 들은 유지민은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나 이제 그거 안 좋아해.”테이블 위에 놓인 생기 가득한 백합을 보던 강유진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다시 권해보려 했지만 기사님들이 싸고 있는 택배 상자에 담긴 게 다 지기 물건인 걸 보고 나서 자연스레 화제를 바꿨다.“그런데 왜 다 내 물건이야? 네 짐은?”“이미 다 옮겼어.”빠르게 대답하는 유지민에 강유진은 짐을 새집에 옮겼다는 말인 줄 알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가 물을 마시더니 기사들을 보며 한마디 했다.“짐 옮길 때 라벨 잘 붙여주세요. 다른 방에 잘못 두지 마시고요.”그 말을 들은 유지민은 강유진을 바라보며 하고 싶었던 말을 또 삼켜냈다.틀릴 리가 없지, 새집에는 강유진 짐만 있을 테니까.짐 정리가 다 끝나자 강유진은 유지민을 부축하며 아래로 내려갔는데 때마침 올라오는 윤상우, 윤연서 남매를 마주치게 되었다.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강유진은 빠르게 유지민의 손을 놓고 앞으로 나아가며 그녀를 막아섰다.“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연서가 너희 집 와보고 싶대서, 나도 못 와봤잖아. 그래서 어머님한테 주소 받아서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왔지.”윤상우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신나서 떠들었지만 윤연서의 정신은 온통 유지민에게로 쏠려있었다.저번에 술집 앞에서 한 번, 로펌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유지민에게 연민의 감정이 생겨버린 윤연서가 말했다.“나도 그랬는데 이혼하니까 다 괜찮아졌어요. 유진 오빠가 꼭 언니 도와줄 거예요.”이혼의 가장 큰 난관인 사인을 강유진이 이미 해줬으니 큰 도움을 준 건 사실이었다.유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연서 씨 일도 유진이가 맡았다던데, 일을 아주 잘하나 봐요.”그 말을 들은 윤연서는 살짝 부끄러워하며 아까보다 한층 들뜬 말투로 답을 했다.“네, 유진 오빠가 저를 엄청 많이 도와줬었어요. 전남편의 외도증거도 같이 찾아주고 또 제가 다치지 않게 보호까지 해줬거든요. 오빠 아니었으면 저는 진작에 전남편 칼에 맞아 죽었을 거예요.”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강유진과 있었던 일들을 나열하는 윤연서에 유지민은 상황에 맞지 않은 질문을 저도 모르게 해버렸다.“유진이 좋아해요?”내 질문에 잠시 당황하던 윤연서는 한참 만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그냥 오빠로만 대해왔었는데 이렇게 저를 잘 챙겨주고 선물도 해주고 나 데리고 놀아주기도 하니까 조금 마음이 이상해요. 학교 다닐 때는 나 괴롭히는 사람들 혼내주면서 본인은 상처를 가득 달고 왔고 이번에도 이혼한다니까 가장 먼저 나서서 날 도와준 사람이에요 오빠는. 그리고 얼마 전에 저희 오빠 말 듣고 나서야 저는 오빠가 오랫동안 날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그렇게 차가워 보이기만 했던 사람이 나를 오랫동안 짝사랑했다는 게 너무 의외였어요. 도대체 내가 왜 그렇게 좋았는지도 모르겠고요.”과거 이야기를 하는 윤연서에 유지민은 점점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녀의 입을 통해 듣는 강유진은 자신이 알던 강유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강유진은 차가운 게 아니라 그저 유지민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고 주동적이지 않은 게 아니라 유지민이 그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뿐이었다.하지만 강유진에게 흠뻑 빠져 있었던 유지민인 이제서야 그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추억에 잠겨 있던 윤연서는 그런 유지민의 씁쓸한 표정을 보지
집으로 가는 동안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유지민에 강유진은 그녀를 힐끔힐끔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왜 그러냐고 묻지는 못한 채 요 며칠 있었던 일들을 되새겨보기 시작했다.그리고는 요즘 윤연서만 챙기느라 유지민에게 소홀해져서 그녀가 서운한 거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강유진은 미안한 마음에 먼저 제안했다.“곧 우리 3주년 결혼기념일인데 여행이나 갈까?”숙려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괜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유지민은 상처가 채 낫지 않았다는 핑계로 그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강유진은 또 다른 몇 가지를 제안하며 함께 기념일 보내자고 했다.그 많은 제안을 각양각색의 핑계를 대며 거절하는 유지민은 데이트라는 단어만 들어도 좋아하던 제가 알던 아내와는 사뭇 달랐기에 강유진은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표정을 보아낸 유지민은 혹시 그가 무언가를 눈치채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말을 바꾸며 말했다.“그럼 마침 주말이니까 나랑 학교나 같이 가줘.”왜 갑자기 옛 추억을 떠올리는 건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모처럼 한 제안이라 강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강유진의 대답을 끝으로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유지민은 다시 9월 7일에 이혼이라고 표기되어있는 달력을 꺼내 보았다.그 하루 전인 9월 6일은 그들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고 유지민이 강유진을 사랑한 지 10년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그런 의미 있는 날에 유지민은 첫 만남 장소인 학교로 돌아가 자신의 고달팠던 짝사랑에 온전한 마침표를 찍어주고 싶었다.곧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진 유지민은 가벼운 말투로 장난치듯 물었다.“이번에는 나 바람 안 맞힐 거지?”그 말에 강유진도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내가 또 언제 널 바람맞혔다고 그래. 나 모함하지마.”유지민은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강유진을 기다리던 수많은 날들을 떠올려보았다.윤연서와 바닷가에 가느라 유지민을 병원에 버려둔 일, 윤연서의 이혼증거를 모으느라 유지민의 생일도 그냥 지나쳐버린 일, 또 그전에는
강유진이 윤연서 때문에 또 자신을 버렸다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유지민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강유진이 떠올라 코웃음을 쳤다.유지민에게는 30분도 내어주지 못하는 사람이 윤연서에게만큼은 한없이 너그러웠다.유지민은 만약 그 몇 시간이 둘의 마지막임을 알게 된다면 그때는 강유진이 과연 후회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그 질문에 답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유지민 또한 이제 답 따위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그녀는 바로 인스타를 끄고 엄 변호사에게 연락을 했다.[엄 변호사님, 오늘이 숙려기간 마지막 날인데 제가 따로 로펌 찾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나요?]엄 변호사는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오늘만 지나면 이혼도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새 인생 시작하시게 된 거 축하드려요.]새 인생이라, 새 인생이긴 하지. 더는 강유진에게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니 유지민은 그저 인간 유지민으로서 더욱 빛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그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유지민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이혼까지 세 시간 남았을 때 그녀는 집에 조금 남아있던 자신의 물건들을 모조리 버렸다.두 시간 남았을 때는 오늘 찍은 사진들을 묶어 영상을 만들었고 마지막 한 시간에는 카메라 화면을 자신에게로 돌리며 강유진에게 전해줄 작별 영상을 찍었다.영상도 다 찍자 유지민은 메모리카드를 카메라에 꽂아 넣고 그것을 이혼 합의서와 함께 침대 머리맡 협탁에 올려두었다.오늘부로 유지민과 강유진은 진정으로 남남이 된 것이다, 이건 유지민에게도 강유진에게도 다 축하할 일이었다.짐을 다 정리한 유지민은 캐리어 하나만 달랑 든 채 집을 나서서 또 다른 도시로 향했다.그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목적지를 알리지 않은 채 미련 없이, 후회 없이 그곳을 떠났다.한편 윤연서가 건강을 회복하자 그제야 유지민이 떠오른 강유진은 그녀와 했던 약속을 지키고자 연락을 수십 통이나 해봤지만 계속 핸드폰이 꺼져있다는 안내음만 들렸고 문자에도 답장이 없었다.
유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정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빨리 이혼을 진행하려는 압박일 뿐 그와 깊은 대화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누가 이혼 증서를 받고 전 남편과 뜬금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겠냐고!’ ‘보통 이런 순간엔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며 새출발을 축하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항상 말한 대로 잘 지키는 그녀였지만 오늘 같은 기분 좋은 날에는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핑계를 댔다. “그런 말은 한 적 있긴 한데 지금 당장 얘기하자고 한 건 아니잖아? 나중에 시간이 나면 얘기하자.” 강유진은 손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저번에 네가 이혼 서류로 날 속이고 서명하게 하고는 아무 말 없이 사라졌잖아. 그때 일 덕분에 이제 네 말은 믿기가 어려워. 연락처도 바꿔놓고 오늘 떠나고 또 연락이 안 되면 그때 난 어디서 너를 찾아 약속을 지켜?” 변호사답게 억양이 굳고 강한 말투였기에 유지민은 왠지 모르게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포착하고 계속해서 부드럽게 접근하는 전략을 펼쳤다. “네가 이혼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원했던 건 아니지만 결국 네 뜻대로 했어. 시간을 좀 끌었지만 결국 너에게 맞춰준 거야. 난 이렇게 네 의견을 존중했고 네가 전에 나를 속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지금 그냥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 하고 싶은건데 그 기회도 안 줄 거야?” 이혼 증서를 받은 후 유지민의 마음은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수했던 차가운 태도를 깡그리 잊어버렸다. 한편 강유진이 그녀 앞에서 이런 자세로 자기를 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괜히 연약해지는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알았어. 연락처 줄게. 근데 전처럼 메시지 보내며 귀찮게 하지 마. 말도 예의 바르게 해야 해. 만나는 일은 나중에 보자.” 강유진은 그녀가 반응하기 전에 재빠르게 연락처를 추가하고는 그제
불과 10분 만에 유지민은 수집한 정보와 대조해 모든 서류를 찾아냈다. 서류를 꼼꼼히 확인한 후 서류봉투를 들고나와 보니 강유진이 문 앞에 축 늘어진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생각했다. ‘또 뭐 하는 거야?’ ‘설마 아픈 척해서 이혼을 미루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간 그녀는 경계심이 가득한 어조로 의심하며 물었다. “몸이 안 좋아?” 그 말에는 걱정보다도 의심이 가득했다. 강유진이 그걸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 문을 짚고 일어서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 가자.” 그가 문을 열고 나서자 유지민은 그제야 경계를 풀고 그 뒤를 따라나섰다. 구청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유지민은 계속해서 시계를 확인하며 시간을 계산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그의 손을 붙잡고 급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강유진은 결혼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그녀는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잔뜩 초조해하며 그를 재촉했었다. 그때 그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서두르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고 결혼에 대한 두려움도 조금은 사라졌었다. 하지만 이제 3년이 지난 오늘. 그들이 같은 건물을 다시 찾아온 이유는 이혼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구청 대기실에는 이혼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는 이혼이라는 게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지민이 말한 대로 그들의 결혼이 실수라면 여기서 끝내면 되는 거다. 실수를 여기서 멈춰야 그는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는 결혼이라는 울타리로 그녀를 붙잡고 싶지 않았다. 이혼하면 이제 다른 신분으로 그녀의 곁에 다시 서면 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그녀에게 자신의 진심을 증명해야 할 차례였다. 자신이 그녀에게 기회를 줬던 것처럼 그녀도 자신에게 다시 기회를 줄지 안 줄지는 몰라도 더 이상 헷갈리지 않았다.
유지민은 그를 믿지 않았다. 이건 강유진에게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믿지 않게 된 것은 모두 자신이 그녀의 신뢰를 천천히 깨뜨렸기 때문이며 그는 자책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마음속으로 여러 차례 예감했던 것이었기에 아직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내쉬며 더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 말이 다 진짜라는 걸 증명할게. 지민아, 다시 기회를 줘.” 차는 지하 주차장에 멈췄다. 유지민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며 짜증이 섞인 어투로 말했다. “이혼 증명서만 주면 너가 어떻게 증명하든 신경 안 써.” 말을 끝내고 그녀는 그의 반응도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대화의 주제가 결국 이혼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강유진은 그녀가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임을 확실히 알았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팔에는 선명한 핏줄이 보였다. 하지만 그 아픔을 풀 길은 없었고 그저 그녀의 뒤를 따르며 올라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지민은 고개를 숙인 채 방으로 들어갔고 신발을 갈아 신을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때 신발장 안에서 토끼 모양의 슬리퍼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가 예전 집에서 자주 신고 다녔던 그 슬리퍼와 똑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떠날 때 그 신발을 분명 쓰레기통에 버렸었다. ‘왜 같은 신발이 여기 있을까?’ 의문을 품고 고개를 들었을 때 방 안의 구조를 보고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커튼부터 컵, 옷장, 거실의 결혼사진까지. 방 크기만 다를 뿐 모든 것이 복사해 놓은 듯 예전 집 그대로였다. 시간을 넘나드는 듯한 이 광경을 보고 유지민은 결국 입을 열었다. “왜 집을 이렇게 꾸몄어? 똑같은 물건들은 다 어디서 산 거야?” 강유진은 같이 방 안을 둘러보며 추억에 잠긴 듯 아련하게 말했다. “난 네가 나랑 함께 새 삶을 시작할
정확히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에서 강유진은 차를 멈추고 무겁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맘에 안 드는 게 아니야. 네가 이혼을 원한다면 난 빈손으로 나가도 괜찮아. 협박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저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의 많아서 이대로 끝내기 좀 억울할 뿐이야.”강유진의 입에서 ‘억울하다'는 말을 들은 유지민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뭐가 억울한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이혼당해서 억울한 거야? 아니면 내가 먼저 이혼을 말해서 억울한 거야?”“둘 다 아니야. 지민아.”그녀의 의아한 표정을 보며 강유진은 잠시 씁쓸하게 웃고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에 알 수 없는 한숨을 섞어 답했다.“네가 나를 오해한 게 억울했어. 네가 아무 기회도 안 준 게 억울했고 우리가 이렇게 끝나게 된 게 억울했어.”이번엔 유지민이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그녀는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윤연서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나? 이혼한 후에는 바로 고백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이곳에서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 말투도 이렇게 애매하게?’ 그 침묵은 강유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주었다.“지민아, 그 영상 보고 나서 네가 왜 떠났는지 알았어. 내가 윤연서를 아직도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지?”“그렇지 않아?”유지민의 반문에 강유진의 가슴은 더욱 아려왔다. 그는 그 아픈 감정을 누르며 차분하고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사실 이런 얘기는 미리 해야 했는데 미루다 보니까 오해만 생기고 너를 그렇게 오랫동안 아프게 만들었어. 다 내 잘못이야. 정말 미안해. 지민아.”그 사과는 유지민이 듣기에는 너무 흐지부지하게 느껴졌다. 말이 연결되지 않은 듯 이상하게 끝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더 이상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마음속에는 이 모든 걸 빨리 끝내고 완전히 자유를 얻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다. 그의 늦은 사죄를 들을 인내심이 없었다.“넌 확실히 나한테 미안해해야 해. 내게
엄 변호사를 통해 유지민이 경북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강유진은 바로 그녀에게 만나자고 연락했지만 또 한 번의 단호한 거절만이 돌아왔다. 그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그를 찾아올 때까지 그저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그동안 그는 이혼 합의서와 재산 분할 합의서를 수도 없이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예전 저택의 구조를 떠올리며 가구와 장식품을 하나하나 다시 사들였다. 유지민이 혹시나 자신을 용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원래의 배치와 분위기를 되돌리려고 애쓰며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서 9월 말이 되었을 때 드디어 엄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유지민이 만나자고 약속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만남의 장소는 구청 앞이었다. 강유진의 한껏 부풀었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래도 그는 약속 장소로 나갔다. 물론 빈손으로. 유지민은 두 손이 텅 빈 그를 보고 한눈에 알아챘다. 이혼에 동의한다고 했던 건 그저 그가 둘러댄 거짓말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에 크게 화나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은근한 짜증이 배어 있었다. “이혼에 동의한다면서 이렇게 빈손으로 온 게 네 성의야?” 한 달여 만에 만나서 이혼 얘기부터 나오자 강유진은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유지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미련이나 슬픔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에게도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이 생길 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했다. 눈빛엔 생기가 돌았고 건강해 보였다. 오히려 이혼 전보다 한층 밝아 보였다. ‘그동안 힘들었던 건 나 혼자뿐이었나.’ 강유진은 가슴속에 바위라도 얹힌 듯 숨이 막혀왔다. “지민아,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좋아. 이혼 서류를 먼저 끝내면 그때는 무슨 얘기든 다 들어줄게.” 그녀는 한마디로 강유진의 미약한 희망마저 완전히 없애 버렸다. 그는 주먹을 움켜쥔 채 쉰
유지민이 떠난 지 일곱째 날. 강유진은 절박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뒤에는 깊은 나락이 기다리고 있었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그는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비록 이혼 숙려 기간은 끝났지만 아직 절차는 마무리되지 않았다. 이혼 증서를 발급받거나 소송을 제기하는 모든 과정에서 유지민은 반드시 돌아와야 했다. 이 점을 깨달은 강유진을 오랫동안 침울해 있던 기운을 떨쳐내고 다시 일어섰다. 그는 휴가를 끝내고 법률사무소로 돌아온 후 바로 엄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동안 엄 변호사는 그에게 여러 차례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고 그의 야위고 피곤한 모습을 마주하자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찰나 강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엄 변호사님, 그 사람에게 전해 주세요. 제가 이혼을 동의한다고요. 이혼 서류를 처리하러 돌아오라고 하세요.” 엄 변호사는 깜짝 놀라 입에 있던 차를 거의 뿜을 뻔했다. “이렇게 쉽게 동의하시겠다고요? 좀 더 붙잡을 생각은 없으세요? 그래도 3년이나 함께한 부부인데!” “그 사람은 계속 저와 대화하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뭘 더 할 수 있겠어요? 그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 주는 수밖에 없죠. 법정까지 갈 수는 없잖아요.” 엄 변호사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유지민 씨에게 바로 연락드릴게요. 유진 씨,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강유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는 의자에 앉아 오랜 긴장 상태에 있던 몸을 살짝 풀어주고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후속 절차에 대해 계획을 세웠다. 사실 강유진은 이혼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단지 유지민을 한 번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경북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는 직접 설명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0년간 자신을 사랑해 온 그녀였다. 아무리 오해가 있었더라도 그걸 풀면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엄 변호사가 보낸
유지민이 떠난 지 사흘째. 강유진은 그녀에게 연락하려고 아무리 방법을 찾아봐도 연락할 수 없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고 그의 마음속 불안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 며칠 동안 윤연서가 몇 번이나 그를 찾아왔지만 강유진은 매번 만남을 거절했다. 그러다 결국 그녀가 그를 찾아왔을 때 지쳐버린 그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눈엔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유진 오빠, 무슨 일이에요?” 이제 와서 윤연서가 다시 눈앞에 나타나자 강유진의 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윤연서에게 느끼던 그의 감정은 이미 오래전 사랑에서 가족애로 바뀌었지만 그것을 말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지내왔다. 하지만 유지민이 이 모든 걸 오해하고 떠난 지금.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연서야, 나 요즘 지민이랑 연락하려고 하고 있어.” “지민 언니요? 무슨 일인데요?” 윤연서의 얼굴에 놀람과 긴장감이 서렸고 강유진의 가슴은 더 죄책감으로 무거워졌다. “그녀가 사라졌어. 어디에도 없고 내가 찾아도 연락이 닿지 않아.” “네? 갑자기 왜요? 혹시 이혼 때문이에요? 언니의 전남편 때문인가요?” “이혼 때문이긴 해. 그리고 전남편 문제도 맞고. 더 정확히 말하면 나 때문이야.” 윤연서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의문을 보며 강유진은 용기를 내어 솔직히 털어놓았다. “내가 바로 지민이 전남편이야. 3년 전에 결혼했었고 그동안 너에게 숨겨왔어. 미안해, 연서야.” 이 사실은 윤연서의 가슴을 후려치는 듯한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동안 가끔 느꼈던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들이 결코 틀린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졌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왜 숨겼어요? 그게 지민 언니한테 공평하다고 생각해요?” 강유진은 말문이 막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마음속
유지민이 자신의 갤러리를 발견했다는 걸 알아차린 강유진은 그날 밤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그는 가만히 누운 채 유지민과 함께 보내던 날 들을 떠올렸다.유지민과 결혼하기 전에는 윤연서에게만 빠져 살았다지만 그녀와 결혼한 뒤로 강유진은 점차 윤연서를 놓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윤연서가 결혼할 때 강유진은 앞으로 그녀를 동생으로만 대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자신에게 계속 고백을 하는 유지민은 또 친구로만 대했다.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얻을 수 없는 처지는 같은 만큼 강유진은 늘 유지민한테 미안해하고 있었다.그러다가 3년 전 맞선자리에서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강유진은 유지민이 아직도 자신을 잊지 못했다는 걸 알아채고는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부모님이 결혼을 재촉한다고 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랑 그냥 같이 살아버리는 게 나을까, 아니면 자신을 오랫동안 좋아했던 유지민에게 기회라도 주는 게 나을까.그래서 강유진은 결국 유지민이 좀 더 힘들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와의 결혼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하지만 그때의 강유진은 얻었음에도 예상한 결과가 아니라면 유지민이 짝사랑할 때보다 더욱더 힘들어할 거라는 걸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누군가를 만족시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3년 전의 강유진은 너무 오만했었다.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고 자신은 곧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을 할 예정이었기에 그때의 강유진은 정말 반쯤 미쳐있었다.몸과 정신이 반으로 갈라진 듯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결혼 사실을 숨기자는 제안을 했는데 유지민은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수락해버린 것이다.그렇게 강유진은 한 사람을 어떻게 잊어야 하는지, 결혼생활은 어떻게 가꾸어 나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결혼을 해버린 것이다.결혼 후에 강유진은 윤연서와는 거의 만나지 않으며 가끔 모임에서 마주치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그 정도 사이를 유지해오고 있었다.그도 점점 자신의 집념을 떨쳐가고 있었지만 한 사람을 잊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
경북을 떠나기 위해 기차역으로 온 유지민은 아무 곳이나 손가는 데를 가리키며 그곳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예매했다.북방에서 남방으로 가는 열차라 점차 기온과 습도가 올라가고 있었다.그렇게 캐리어 하나만 챙긴 유지민은 낯선 도시 용성에서 자신의 첫 여행을 시작하기로 했다.호텔에 짐을 맡긴 뒤 유지민은 경북과 달리 작은 도시인 용성의 템포에 발을 맞춰 걸으며 길거리에 앉아 쌀국수를 먹으며 찬 음료수를 함께 마셨다.별거 아닌 건데도 힐링 되는 것 같은 이 느낌이 마냥 좋았었는데 갑자기 울리는 문자 수신음이 그녀를 다시 흔들어놓았다.새로 만든 계정을 아는 이는 얼마 없었기에 핸드폰을 확인한 유지민은 엄 변호사가 보낸 문자를 보게 되었다.[제수씨, 그래도 강변 와이프였으면 저한테는 알려주셨어야죠. 제가 연락처 안 준다고 강변이 아주 난리가 났어요. 편지 대신 전해달라고 해서 보내니까 한 번만 읽어봐요.]강유진이 화를 낼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편지를 쓰는 건 의외여서 엄 변호사가 보내온 파일을 열어보니 안에는 8천 자가 넘는 글자가 적혀있었다.이혼했다고 8천 자씩이나 되는 편지를 보내는 것도 우스웠고 어차피 그 안에 적힌 내용이 원망일 게 뻔해 유지민은 이 좋은 기분을 망치기 싫어 핸드폰을 진동 모드로 바꾸고는 쌀국수를 마저 먹었다.밥을 다 먹고 또 홀로 야시장을 거닐다 보니 찝찝했던 기분은 점차 식욕으로 변해갔고 다시 아까처럼 신나기 시작했다.저녁에 호텔에 돌아온 뒤에야 엄 변호사에게 감사하다는 답장을 한 유지민은 똑같이 파일 하나를 보냈다.유지민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기쁜 마음으로 파일을 열어보던 강유진은 그 안에 적힌 글자들을 본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너무 길어서 안 보고 싶어. 이미 이혼한 사이에 연락은 삼가해줘.]그 문장을 보고 차분히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들끓기 시작한 강유진은 하고 싶은 말을 빠르게 적어서 보내려고 했지만 이미 적힌 내용이 너무 길어서 혹시나 또 무시 당할까 싶어 힘을 주어 취소 버튼만 꾹꾹 누르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