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조예원은 강지현의 얼굴을 씻어주고 핏자국을 닦아준 뒤 정성껏 손톱을 깎아주고 머리까지 빗겨주고는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흘릴 눈물도 없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강지현이 살아있을 때 이런 작은 일들은 그녀가 해준 적이 없었다.할 기회가 없었다.매번 침대에서의 거사가 끝나면 강지현은 샤워를 하러 갔고 그녀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실제로 관계 횟수도 턱없이 적었다.평범한 아내처럼 그에게 하루 세끼를 챙겨주고 차도 마시며 책도 읽어주는 꿈을 꿨지만 한 번도 이뤄지지 못했다.강지현의 몸이 점점 굳어지는 바람에 어렵게 옷을 갈아입혀 줬다.얼굴에 핏기가 없는 것만 빼면 강지현의 모습은 마치 잠든 것 같았다.“다음 생에 빨리 정유진을 만나길 기대하죠? 소원이 이뤄지길 바랄게요. 그래서 다음 생에 우리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마요. 강지현 씨, 절대 다시 만나지 마요.”강지현의 하관 날은 날씨가 무척 흐렸고 장례식 내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조예원의 품에 안긴 강형원은 마치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듯 맑은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장례식을 마치고 강씨 저택으로 강지현이 생전에 유서를 남긴 변호사가 찾아왔다.그는 조예원에게 유언장을 건네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강지현 씨는 하나뿐인 아들 강형원 씨에게 모든 주식을 물려주었고 강지찬 씨가 대리로 관리하다가 강형원 씨가 성년이 된 후 돌려주면 됩니다. 만약 강형원 씨가 그사이에 의외의 사고로 사망한다면 주식은 현금화한 후 전부 자선단체에 기부합니다. 그리고 강지현 씨 명의의 부동산은 전부 조예원 씨 명의로... 여러분 이의가 없으면 서명하세요.”사람들은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것 같았다.강홍택이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이내 송지윤에게 붙잡혔다.강지현의 유언장에 강홍택이라는 친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없자 강홍택은 매우 불쾌했다.하지만 그가 발작을 일으키기 전에 송지윤이 말했다.“지현이 유언장에 이의 없습니다. 여보, 사인해요.”강홍택은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는 조예원은 요 며칠 동안 잠을 잘못 자서 다크써클이 턱 밑까지 내려왔다.착시현상인지 평소보다 더 조용했고 왠지 예전보다 조금 더 차분해진 듯한 모습이었다.“그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계속 묻고 싶었는데 이제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조예원은 정유진을 바라보며 한마디 더 했다.“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강지현의 마지막 한마디는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유진 씨, 다음 생에 내가 먼저 만나면 절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을 거예요.’이 말을 조예원에게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정유진이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조예원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조예원은 한숨을 내쉬었다.“모든 재산을 나와 아들에게 물려주었지만 마음은 너에게 주었네. 마지막 한마디는 분명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겠지?”정유진은 부인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강지현이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깊은 마음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목숨을 빚졌어.”정유진은 가슴이 답답해서 숨도 못 쉴 것 같았다.“다음 생에도 이 빚은 못 갚을 것 같아.”조예원은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너, 나, 강지찬, 강지현, 우리 서로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았어.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야. 강지현도, 나도, 다.”“예원아?”정유진은 조금 놀랐다. 오늘따라 조예원이 너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조예원은 깊은 눈빛으로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예원아 라고 부른지 너무 오랜만이네.”조예원은 힘껏 눈을 깜빡이며 북받치는 감정을 꾹 눌렀다.“강지현에게 병 치료하러 가자고 여러 번 말했어. 나와 아들을 버리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전혀 듣지 않았어. 확진 판정을 받은 후부터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 같았어. 본인이 강지찬과 더 이상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이 사람이 살아 있는 목적은 오롯이 너 하나 때문이었어. 그리고 죽음마저도 너를 위해 죽었으니
“나는 이곳을 떠날 거야.”조예원은 아주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그냥 떠나는 거야.”“어디 가려고?”“저 멀리.”조예원은 정유진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강지현이 없으니 나도 이제 모든 것을 다 놓을 수 있어.”그녀는 이곳을 떠나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이 아이에게...”조예원은 아들을 보지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물려줄 게 없어. 강지현이 나에게 남긴 재산들 모두 이 아이 앞으로 돌려줘. 유진아, 내가 못 된 년이라고 생각해. 미안해.”말을 마친 조예원은 캐리어를 끌고 그대로 가버렸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정유진은 미처 조예원을 말리기도 전에 강형원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빼앗겼다. 조예원은 그사이 차를 몰고 떠났다.하인이 와서 한마디 했다.“사모님, 사람을 시켜서 따라가라고 할까요?”정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요.”강지현은 어쩌면 진작 이런 날을 예상했기에 처음부터 조예원에게 그녀가 원하는 결혼을 할 줄 생각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어쩌면 이게 최선일지도 모른다.정유진이 강형원을 안고 돌아오자 강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다행히 집에 방이 많아 정유진은 하인에게 임시로 한 방을 치워달라고 한 뒤 강형원의 물건을 정리하고 동시에 강형원을 돌봐줄 하인을 모두 구했다.집에 갑자기 아이가 하나 더 생기는 바람에 방경숙은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가 오더니 어르신이 부른다고 했다.강홍택과 송지윤도 그 자리에 있었다. 조예원이 아이를 두고 떠났다는 건 모두가 이미 알았을 것이다.강홍식의 얼굴이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우리 강씨 가문이 대체 무슨 벌을 받았기에 누구는 감옥살이를 하고 누구는 죽는 거냐고.”아무도 이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강홍식은 강홍택을 가리켰지만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는 바로 형원이를 너의 집으로 데려간 거야? 친할아버지가 이렇게 뻔히 살아
연우는 강형원이 오니 날듯이 기뻐했다.이미 철이 든 연우는 굳이 어른들이 말하지 않아도 둘째 삼촌이 그녀를 구하면서 죽은 것을 알고 있었다. 녀석은 강형원을 친동생처럼 돌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형원아, 앞으로 우리는 한 가족이야, 이 누나가 지켜줄게.”강형원은 하품을 하더니 곤히 잠들었다.연우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잠이 든 후에야 자리를 떴다.서재에 있는 장형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대표님, 경찰이 아무리 고문을 해도 두식이가 사주한 사람을 얘기하지 않아요. 그 누구의 사주도 받지 않았다고 딱 잡아떼요. 어르신이 아가씨를 데리고 외출한 것을 보고 갑자기 대표님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거라고 하네요.”강지찬이 물었다.“그럼 너는 어떻게 생각해?”장형준이 말했다.“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연치곤 너무 이상해요. 절대 아가씨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 어르신인데 딱 한 번 데리고 나간 날 만났어요. 게다가 며칠 동안 경찰이 서울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어서 피해 다닐 겨를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우연히 어르신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강지찬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두식이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어. 나에게 골칫거리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앞으로 우리 와이프와 아이들의 안전에 각별히 주의해줘.”“알겠습니다.”에이프릴 홀.화령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당신 같은 악랄한 부자들, 정말 질투 나요.”강지아는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뭘 질투해요?”화령은 혀를 찼다.“여기 탄산수 하나에 3만 원이에요. 정말 어이가 없죠. 에이프릴 홀 같은 곳에 강지아 씨가 아니었다면 나 같은 짐승은 죽어도 들어오지 못했을 거예요.”“그만 하세요. 술 너무 많이 마셔서 허풍이 심해졌네요?”기분이 좋지 않은 강지아가 가만히 있을 때 뒤 테이블에 있던 몇 사람이 다가왔다.요즘 서울에서 가장 핫한 화제는 단연 강지현에 관한 것이다.“강씨 가문 둘째 도련님이 정말로 죽었대요. 이제 30대 초반이죠
강지아는 술을 좀 많이 마셨지만 지난번에 취해서 사고가 날 뻔한 이후로 잘 모르는 곳에 가서는 술을 마실 엄두를 못 냈다.에이프릴 홀의 대표님들은 그녀와 잘 아는 사이였고 그녀가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보고 특별히 부하들을 시켜 그녀와 화령을 집에 데려다주라고 했다.“열심히 돈 벌어서 다음에, 내가 살게요!”곤드레만드레 취한 화령은 월급이 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새 발의 피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다음에 만나는 잘생긴 남자는 반드시 키가 185 이상이고 초콜릿 복근이 있어야 할 거야.”“그래, 호랑이 같은 남자로!”화령은 달려들어 강지아를 껴안았다.“지아 씨, 다음에 술 마실 때 잊지 말고 나 불러요. 부르면 바로 갈 테니.”“그럼요, 우리는 좋은 친구니까.”화령의 머리를 쓰다듬는 강지아는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차에 오르려는데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어? 이게 누구야? 지아 아니야?”강지아가 고개를 돌렸을 때 에이프릴 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가운데 바로 온유한의 사촌 동생 최금혁이 있었다.“최금혁 씨, 이렇게 예쁜 동생도 알아요? 우리는 왜 모르는데?”“최금혁, 이 사람 누구야?”서울이라는 곳은 아주 재미있는 곳이다. 함께 노는 사람들도 대부분 비슷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다.예를 들어 강지찬은 대부분 대가족의 준 상속인이라든가, 가문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젊은 인재들과 같이 어울리고 최금혁 같은 사람은 대부분 가문에서 소외된 나이가 어린 사람들과 같이 어울린다.무리와 무리 사이에 교류는 별로 없다.최금혁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기 옆에 있는 건달 친구들에게 말했다.“너희들 몰라? 강씨 집안 아가씨, 강지찬 동생 강지아잖아!”“뭐, 강지아라고? 이렇게 예뻐?”“강지아가 바보 아니었어?”“강지아 씨, 이렇게 생겼구나. 최금혁이 강씨 집안 사람들과 알고 지낼 줄은 몰랐네.”최금혁은 기세등등한 얼굴로 말했다.“어이, 내 사촌 형이 강지찬과 어릴 때
강지아는 사장님이 직접 집까지 배웅하라고 지시한 사람이었기에 경비원은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었다.특히 이 사람은 호의를 갖고 다가온 것이 아닌 것 같다.경비원은 가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최진혁에게 차 키를차키를 돌려달라고 했다.그러나 최금혁은 경비원을 밀치며 말했다.“네가 뭔데! 상관하지 마.”이쪽이 소란스러워지자 화령도 가까이 다가왔다.“누구세요. 자꾸 지아 괴롭히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최금혁의 건달 친구들은 이런 소란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화령이 정말로 핸드폰을 꺼내자 그중 한 명이 나서서 그녀의 핸드폰을 빼앗아 바닥에 떨어뜨렸다.새로 바꾼 휴대전화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본 화령은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당신들! 너무한 거 아니야.”술을 많이 마신 여기 사람들은 지금 2차 장소로 옮겨 계속 분위기를 즐기려던 참이었다.강지아를 감히 건드리지 못하던 찰나에 마침 예쁘고 어린 여자가 왔고 평범한 차림의 화령은 건드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아이고! 손이 미끄러웠네. 미안해. 내가 배상할게.”화령은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누가 당신들의 더러운 돈을 받겠대?”고조된 분위기에 도취한 한 재벌 집 도련님은 드디어 새로운 재미를 찾은 듯 최금혁을 향해 말했다.“최금혁, 강지아 씨 잘 돌봐. 두 예쁜이와 같이 놀자고.”누군가가 화령에게 손을 대기 시작했다.“예쁜이, 지금 입은 옷 좀 봐. 나와 있으면 매일 명품만 사줄 수 있어.”“오빠가 내일 가방 사줄게.”겉으로는 센 척한 화령이였지만 사실 속은 이미 겁을 먹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은 쉽게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강지아 쪽으로 다가갔다.강지아도 한창 최금혁 때문에 짜증이 난 상태였다. 요즘 기분이 안 좋아서 오늘 화령이랑 술 마시러 나왔는데 뜻밖에도 최금혁이라는 이런 무뢰한을 만났으니 말이다.그녀는 화령을 뒤로 감싸며 손에 든 가방으로 최금혁을 가리켰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당신 같은 사람 몰라요. 그러니까
강지아는 손바닥을 펼쳐서 온유한에게 보여주었다.빨개진 것을 보면 얼마나 힘 있게 때렸는지 알수 있었다.“안 아파?”이때 옆에 있던 최금혁이 엄살을 부렸다.“형, 나한테 아프지 않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은 그제야 동생이 데려온 무리를 쳐다보았다.이들은 온유한이 무서운지 시선도 마주치지 못했다.이때 최금혁이 눈치없이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다.“형, 나 봐봐. 이렇게 잘생긴 얼굴에 상처 났잖아. 할머니랑 고모가 알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겠어.”마침 이마에 난 상처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려 소름 끼칠 정도였다.옆에 있던 경찰이 말했다.“에이, 그냥 가죽이 벗겨진 걸 가지고. 걱정되시면 병원에 가서 파상풍 주사라도 맞던가요.”최금혁이 강지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이대로 끝낼 순 없어요. 저 사람을 신고할 거예요.”경찰이 콧방귀를 뀌었다.“고소하겠다고요? 오히려 저분이 당신을 성희롱으로 고소할지도 모르는데요? CCTV를 이미 확인해 보았는데 당신들이 먼저 건드린 거 똑똑히 찍혔어요.”이곳에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온유한은 바로 사인하고 이 사람들을 데리고 경찰서에서 나왔다.최금혁이 불만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이대로 끝이라고? 형, 나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고. 피도 나잖아. 내가 얼굴 망쳐서 장가 못 가면 강지아가 책임진대?”온유한이 뒤돌아 차가운 얼굴로 최금혁에게 삿대질했다.“그 입 닥치고 꺼져!”최금혁은 이런 온유한의 모습에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이런 모습을 처음 봐서 그런지 어릴때의 트라우마가 다시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최금혁은 침을 삼키고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형, 나야말로 형 동생이잖아. 강지아는...”온유한이 그에게 삿대질하면서 말했다.“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그러고서 강지아를 이끌고 차에 올라탔다.화령은 그제야 안심하고 택시를 잡아 이곳을 떠났다.최금혁 일행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로 마주 볼 뿐이다.“온유한 형님이랑 강지아 씨 사이, 이
회진을 마치고 돌아온 온유한은 강지아가 베개를 끌어안고 쿨쿨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이불 밖에 나와 있는 하얀 팔다리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그리고 그 티도 강지아한테는 커서 후줄근했지만 아무리 엎드려 있다고 해도 몸매를 감출 수 없었다. 흰색 속옷까지 보일락말락 할 정도였다.온유한은 에어컨 온도를 높여주고는 후다닥 휴식실을 벗어났다.심정은 복잡미묘하기만 했다.이때 전성호가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선생님, 야식 드실래요?”그는 말하면서도 온유한의 휴식실 안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아쉽게도 문이 닫혀있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아니.”“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다른 분이 사신 거예요.”온유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너희들 먹어. 난 다이어트를 해야 해서.”사람들은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온 전성호를 에워쌌다.“어때요. 보셨어요? 온유한 선생님 침대에 누워계시는 분이 강지아 씨에요 아니면 첫사랑이에요?’온유한이 여자를 데리고 휴식실로 왔다길래 다들 궁금한 모양이다.전성호가 고개를 흔들었다.“이미 잠들어버려서 못 봤어요.”“온유한 선생님은 뭐 하고 계시는데요?”“책을 보고 계셨어요.”몇몇 여자들이 혀를 끌끌 찼다.“침대에 눕혀놓고 책을 읽는다고요? 설마... 남자구실을 못 하는 거 아니에요? 32년동안 싱글의 몸으로 살아온 중년남성이 가만히 있었다고요?”“온유한 선생님더러 넘사벽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선생님이 추구하시는 게 무엇인지 우리는 이해하지도 못할 거예요.”전성호는 치킨을 한입 베어 물고는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맛있네요!”온유한은 새벽이 되어서야 소파에 앉아 눈을 붙이게 되었다.6시쯤 응급상황이 발생하여 또 응급실로 달려갔다.두둥!한참 잘 자고 있던 강지아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벌떡 일어나게 되었다.“뭐지?”눈을 떠보니 방문이 열려있었고, 최신애가 입구에서 놀라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이다.강지아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분명 잘 자고 있었는데 왜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타난 거지?’“강지아!”최신애가 힘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