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쪽 교외의 한 폐창고.두식은 바지를 추켜올리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안방에서 나왔다.“형님, 저 여자가 말하길 며칠 후에 남쪽에서 행사한다고 해요. 그러면 우리가 경호원으로 분장해 서울을 떠날 수 있어요.”두식이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남자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지난번 리츠에서 강원훈과 함께 구석에 앉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햇빛 아래에 있으니 사람이 점잖게 보였다.서른쯤 되어 보여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눈두덩이가 깊게 팬 데다 안경까지 끼고 있어 눈 밑의 정서가 잘 보이지 않았다.“믿을 수 있는 정보야?”두식은 코웃음을 쳤다.“저 여자가 아직도 강씨 집안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아들도 강씨 집안 씨고요. 아들이 우리 손에 있는 한 수작을 부리지 못할 겁니다.”잠시 후, 옷을 다 입은 주연지가 방에서 나오더니 눈물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보스, 절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게요. 강원훈은 이제 못 나와요. 내 아들과 나를 생각해 줘야 하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당신들을 데리고 서울을 떠날 방법을 찾을 거니까.”보스라는 사름은 주연지를 힐끗 보았다.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주연지의 눈망울은 보기만 해도 애틋한 마음을 자아냈다.두식은 자기 형님이 다른 생각이 있는 줄 알고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형님, 이 여자가 밖에 있는 여자보다 훨씬 괜찮아요. 한 번 테스트...”“꺼져!”큰 형님은 냉혹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어리둥절해 하던 두식은 손짓하여 동생을 불러냈다.“저 여자 내보내.”짐승들이 그녀를 놓아준 줄 알고 마음을 놓았으나 이내 두식이의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시간이 다 되면 연락 올 거야, 그리고 강씨 집안 쪽도 힘 좀 써봐. 강지찬이 돈을 주지 않으면 우리 사람들의 수고비는 네가 낼 수밖에 없으니.”주연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창고를 떠났다.두식이는 ‘퉤’ 하고 침을 뱉은 뒤 말했다.“강원훈 그놈, 우리를 이렇게 팔아먹을 줄이야, 우리가
강홍식은 강지찬의 여유로운 얼굴에 전혀 초조한 기색이 전혀 없자 대뜸 소리를 질렀다.“미연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라?”“알아요. 어젯밤 납치범들의 메시지를 받았어요.”강지찬의 말에 강홍식이 눈을 부릅떴다.“그런데도 아내와 아이랑 같이 아침밥을 먹을 기분이 나?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는 가던?”“아니면요? 내가 어르신도 아니고. 아내와 아이가 나에게 제일 중요해요. 다른 사람의 생사는 경찰이 있는데 나와 무슨 상관인데요?”강홍식은 화가 나서 기절할 뻔했다.“미연이 뱃속에 우리 장씨 집안 장손이 있는데도 전혀 신경 안 쓰인다고?”“내가 뭘 신경 써야 하는데요? 돈으로 사람이라도 사서 해결해야 해요?강홍식은 화가 나서 탁자를 쳤다.“당연히 돈을 주며 사람 풀어달라고 해야지. 얼마를 요구하든 준비하고 부족하면 내가 보탤게.”강지찬은 침울한 눈빛으로 강홍식을 바라보았다.“뭘 멍하니 있어? 얼마를 달라고 하는데?”“그때 엄마와 지아가 납치됐을 때 지금의 10분의 1만큼 긴장했어도 엄마는 죽지 않았고 지아는 미치지 않았을 거예요.”강홍식은 갑자기 목이 멘 듯 말을 하지 못했고 답답한지 얼굴이 빨개지며 얼버무렸다.“그, 그때는 어리석어서...”“아니요. 어리석은 게 아니라 무관심이죠. 사랑이 없었고요. 아들과 손자는 본인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아내와 딸은 소용이 없잖아요. 생사를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요.”강홍식은 화를 벌컥 냈다.“아니야! 어른의 일은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없어. 그러니 빨리 가서 미연이를 구해와. 너의 아들이야!”강지찬은 연민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한평생 어리석게 살았는데 아직도 남들이 뭐라고 해도 다 믿어요? 임미연 배 속의 아이가 내 아이라고 누가 말했는데요?”강홍식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무, 무슨 뜻이야?”강지찬은 일부러 설명하지 않고 돌아섰다.병원 입구에 도착하니 주연지가 정유진을 막아섰다.생각보다 빨리 온 주연지가 정유진을 다독였다.“납치범들이 인간성이 없다고 그러던데... 사람
주연지는 한참 후에야 반응을 보였다.“아이가 강원훈의 아이라고?”주연지는 무의식적으로 부인했다.“아니야, 강원훈의 아이일 리가 없어. 분명히 너의 아이야. 너의...”강지찬은 담담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머리 회전이 빠른 주연지는 무슨 일인지 잠시 알 수 없었지만 강지찬의 표정을 보고 이미 마음속으로 그 아이가 강지찬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강지찬의 것이 아니기에 정유진은 임미연의 존재 자체를 개의치 않은 것이다.“강원훈의 아이라니. 두 사람은 별로 만난 적이 없어.”주연지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강원훈이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본인 핏줄을 소중히 여긴다.본인이 사생아이기 때문에 밖에 여자가 아무리 많아도 사람 목숨과 관련된 일은 없다.이 부분 만큼은 주연지는 자신했다.강지찬이 귀띔했다.“정말 만난 적이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차 사고 후에 강원훈이 뭘 했는지 셋째 숙모는 아시잖아요? 그때 임미연도 있었어요.”주연지는 순간 벼락을 맞은 것 같다.강원훈이 한 짓을 강지찬이 알고 있었다는 것도 비로소 깨달았다.임미연과 아이를 미처 생각할 새가 없이 얼굴은 창백해졌다.“다 알면서 왜 말하지 않은 거야?”강지찬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왜 말 안 했느냐고요? 살인 미수면 몇 년 만에 풀려날 테니까요. 나는 평생 감옥에 넣을 테니까.”지금 마당에 아무도 없기에 강지찬도 여기서 주연지에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셋째 숙모와 지호는 죄가 없어요. 그래서 두 사람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고요.”주연지는 지금 완전히 넋이 나갔고 강지찬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무슨 뜻이야?”“임미연이 납치됐다고 신고했을 때 셋째 숙모의 일거수일투족도 내가 다 확인하고 있었거든요. 셋째 숙모, 그 사람들이 셋째 숙모에게 연락했죠? 그들은 지명수배자예요. 지명수배자의 도피를 돕고 은폐하는 것이 무슨 죄목인지 알아요?”두 다리에 힘이 빠진 주연지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강지찬더러 돈을 준비해 임미연을 구하라고 권유했지만 결국 3분 만
그 후 며칠 동안 강지찬과 장형준은 보이지 않다가 어느 날, 두 경찰이 강지호를 데려왔다.주연지는 집에 없었고 세 집에는 하인들만 남아 있었다.안주인 정유진이 가정부더러 강지호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했다.평소에 활발했던 아이는 많이 놀랐는지 집에 돌아오자 열이 났다.정유진은 강씨 집안의 의사를 불렀고 한참 후에야 강지호의 열도 내렸다.마당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오더니 어색한 얼굴로 있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어르신이 나를 찾는다고?”정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홍식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며느리 앞에서 한껏 폼을 잡았다.“방금 셋째 집안사람이 돌아왔다고?”“예, 지호가 병이 났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강홍식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임미연의 뱃속 아기가 강원훈의 것이야?”강홍식이 알아맞히는 것이 정유진에게도 의외였지만 숨기지 않았다.“네.”강홍식은 분개하는 얼굴로 말했다.“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이렇게 큰일을 왜 나한테 숨겼어? 옆에 숨어서 내 우스운 꼴을 보고 싶었던 거야?”옆에 있던 집사조차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참지 못하고 설득했다.“어르신, 임미연 씨 일을 대표님이 숨기는 데는 분명 일리가 있을 겁니다. 사모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어떻게 상관이 없어? 본인만 착한 척하고. 셋째 집안일에 네가 왜 그렇게 적극적으로 뛰는데?”어르신이 감히 강지찬을 찾지 못해 그녀에게 화풀이하러 왔음을 정유진은 알아챘다.기왕 이렇게 된 이상 그녀도 맞장구치기 귀찮았다.“어르신, 지찬 씨가 돌아오면 직접 설명하라고 할게요. 나도 잘 모릅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강홍식의 말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잠시 멍하니 있던 강홍식은 정유진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저, 저게 무슨 태도야?”또 하루가 지나고 강지찬이 돌아왔다. 임미연도 구조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만 많이 놀라 병원에서 쉬고 있었다.주연지도 돌아와 자기와 아들을 마당에 가두고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았다.강지찬은 어디도 다치지 않은 채 집
강씨 일가는 며칠째 온 가족이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강지찬과 정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아이를 데리고 출근했다.강원훈의 체포 소식이 전해지자 강지찬에 대한 평가는 더욱 나빠졌다.자세한 내막을 알든 모르든 강지찬 얘기만 나오면 다들 표정이 굳어졌다.감히 건드릴 수도 미움을 살 수도 없었다.둘째 집안의 유선이 방금 감옥에 갇힌 상태에 강원훈도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첫 재판이 진행될 때는 이미 8월 중순이 되었고 주연지는 법정에서 강원훈과의 파혼을 요구했다.수갑을 찬 강원훈은 마지막 결과를 태연하게 받아들인 듯했고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강지찬을 바라봤다.다만 무기징역이라는 말에 강원훈은 갑자기 미친 듯이 웃었다.강원훈은 항소하지 않았고 주연지는 K그룹 주식을 강지찬에게 전부 팔아 재산을 처분한 뒤 돈을 챙겨서 강지호와 함께 출국했다.아주 깔끔하게 떠났기에 서울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예전부터 강씨 집에서 투명인간처럼 산 강원훈이었지만 셋째 집이 비자 고택은 더 휑뎅그렁해 보였다.고세연은 강홍식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한탄했다.“지찬이가 정유진과 함께 있은 이후로 강씨 집안은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어요. 둘째 셋째 집안이 차례로 일이 생겨 모두 감옥에 들어갔잖아요. 어르신 그거 모르죠? 바깥에서 지금 얼마나 듣기 거북한 말이 도는지.”이 점은 강홍식도 잘 알고 있다. 사람들과 차를 마시러 나갈 때마다 옆에 노인들은 그가 오는 것을 꺼렸다.강홍식은 따돌림을 당했다고 느꼈지만 그 사람들은 감히 강지찬의 미움을 살 수가 없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외출도 하지 않았다.“흥, 다른 사람들은 좋은 아내를 맞으면 집안이 더 잘 나간다고 하는데 이 아이는 어디서 그렇게 불운한 사람을 데려왔는지. 딸도 다른 사람의 성을 따르게나 하고!”고세연은 능청을 떨며 달랬다.“어르신, 더 이상 참견하지 마세요. 부자 관계가 더 틀어지면 안 되잖아요. 지금 지찬이는 그 여자에게 완전히 빠졌어요. 정유진이 아직도 K그룹에서 안 나가고 있잖아요
임미연이 강원훈과 한통속이라는 것을 알게 된 강홍식은 그 후부터 그녀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얼굴도 보기 싫었다.결국 고세연이 임미연 만나러 나와 그녀의 배를 훑었다.평범한 사람처럼 평탄한 배를 보니 아이가 없어진 게 분명했다.경찰을 본 임미연은 깜짝 놀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산했다고 했다.아이가 어디로 갔는지는 임미연만이 잘 알 것이다.“여긴 왜 왔어?”고세연은 통쾌한 얼굴로 비아냥거렸다.“강씨 저택에 올 면목이 남아 있어? 지찬이를 찾으러 온 거야, 아니면 강원훈을 찾으러 온 거야? 강원훈을 찾는 거면 장소를 잘못 찾았어. 강원훈은 이제 강씨 집안 사람이 아니야.”임미연은 살이 좀 빠진 상태였다. 예전엔 얼굴에 어린 티가 좀 났었는데 지금은 성숙해졌고 더 요염해졌다.“강지찬을 찾으러 왔는데 지금 없다니 굳이 그쪽하고 얘기할 필요는 없겠네요.”임미연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나를 못마땅해하는 거 알지만 나는 그쪽과 많이 달라요. 어쨌든 강지찬은 나에게 목숨을 빚졌어요. 이것만으로도 평생 나에게 빚진 것이고요.”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고세연은 ‘퉤’하고 침을 뱉었고 손바닥이 빨개질 정도로 화가 났다.강지찬과 정유진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까지 임미연은 아직 가지 않았다.연우는 길에서 잠이 들었고 강지찬은 아이를 핑계로 위층으로 올라가 상황을 정유진에게 맡겼다.“지찬 오빠, 볼일이 있어요. 지찬 오빠?”“나와 얘기해.”정유진의 말에 임미연이 한마디 했다.“지찬 오빠와의 일이지 그쪽하고는 상관없어요.”정유진이 웃었다.“장형준 씨, 손님 배웅해드려요.”임미연이 미처 발작을 일으키기도 전에 장형준이 그녀를 강제로 내보냈다.정유진은 조금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에 들어가 샤워를 했고 밖으로 나왔을 때 강지찬은 이미 침대에 누워있었다.강지찬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썹을 치켜올렸다.“우리 정 대표님은 점점 더 기백이 넘치시네.”정유진은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그의 얼굴에 던지며 말했다.“어떻게든 임미연을 단념시키는 게 좋을
주유정의 작업실도 곧 인테리어가 완성되어 최신애와 함께 액세서리를 고르러 온 것이다.최신애 생일잔치 이후 강지아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고 오늘 이렇게 만난 이상 못 본 척할 수는 없어 최신애를 향해 걸어갔다.“아주머니, 유정 씨, 이런 우연도 있네요.”주유정이 웃으며 말했다.“지아도 공예품 보러 온 거야. 우연이네.”최신애는 싱겁게 ‘응’이라고 외쳤지만 강지아를 보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그동안 밖에서 생활하던 온유한은 지난번 그녀가 감기에 걸린 말을 듣고서야 그녀를 보러 갔다.강지아도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예의만 차렸다.“그럼 방해하지 않을 테니 천천히 보세요.”말을 마치고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한쪽으로 갔다.“제가 주문한 작품 다 적어주세요. 다 살 테니.”점원에게 당부하자 점원은 서둘러 공책과 펜을 챙겨오더니 눈을 반짝이며 강지아를 바라봤다.강지아는 흰 사슴 조각상 앞에 서서 조금 고민했다.이 사슴은 모양과 공예가 모두 훌륭하고 선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아름답다.이 디자인이 매우 마음에 들지만 그녀의 작업실 스타일과 좀 어울리지 않았다.이때 주유정과 최신애도 사슴을 발견했고 순간 주유정은 눈이 번쩍 뜨였다.“이 사슴은 영기가 넘치네요.”점원이 서둘러 영업 멘트를 날렸다.“이건 저희 사장님이 새로 내놓은 작품입니다.”주유정은 하얀 장갑을 낀 채 사슴뿔 애지중지 만지작거리다가 뒤따르던 점원에게 말했다.“이 사슴 제가 살게요.”두 점원이 눈을 마주치자 주유정은 그제야 반응했다.“아 미안. 지아가 찜한 거야?”강지아는 이 사슴이 마음에 들었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주유정이 마음에 든다고 하니 양보하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이때 옆에 있던 최신애가 말했다.“방금 장 보듯 한 뭉치 샀는데 그거 하나쯤은 없어도 돼. 유정아, 이 사슴은 재물을 뜻해. 문을 열고 장사하는 사람에게 사슴 한 마리가 뛰어든다는 좋은 의미를 담고 있어.”말을 마치자마자 점원을 향해 한마디 했다.“이 사슴 우리가 살게요.”이에
사실 강지아는 그동안 온유한을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 사람은 요즘 많이 바쁜지 보름 동안 외국에 있다가 귀국 후에는 학술 세미나에 참석하느라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그저 잠깐 시간을 내 강지아와 밥을 몇 번 먹었을 뿐이다.두 사람의 관계는 줄곧 매우 어색했다. 예전처럼 그렇게 자연스럽지 못했다.그런데 최신애의 입에서 남자를 꼬시는 여자가 되다니?“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강지아는 완강하게 말했다.강홍식처럼 억지를 부리는 아버지가 있는 그녀로서 비슷하게 억지를 부리는 어른을 대할 때 늘 대립각을 세웠다.“한 번도 먼저 유한 오빠를 찾아간 적이 없어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니 아주머니도 아들을 잘 돌보시면 되겠네요.”집에서 고집이 센 최신애는 누군가가 자기에게 이렇게 말할 줄 몰랐다.게다가 말하는 사람 역시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강지아이니 기절할 뻔했다.주유정은 불난 집에 부채질은 차마 하지 않았고 그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지아야, 그만해. 이 사슴 내가 양보하면 되잖아.”강지아는 그 말에 구역질이 나서 죽을 지경이다.“양보라니요? 원래 내가 먼저 찜한 거예요.”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최신애는 화를 벌컥 냈다.“오늘 이 사슴은 내가 사야겠어. 유정아, 이 사슴은 내가 사서 너의 개업 선물로 줄게.”말을 마친 후 직접 손을 들어 옮기려고 하자 두 영업사원이 깜짝 놀라 얼른 다가가서 막았다.‘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흰 사슴이 바닥 위에서 산산조각이 났다.강지아는 눈썹을 치켜떴고 주위 사람들은 일제히 어리둥절해졌다.가장 빨리 반응한 사람은 주유정이다.“죄송해요. 우리가 배상할게요.”“뭐 하는 겁니까?”콧수염을 기른 40대 중반의 남자가 와서 바닥에 파편이 박혀 있는 것을 보고 화를 냈다.“이것은 지난 3개월 동안 겨우 만들어 낸 만족할 만한 작품인데 깨버리다니요!”주유정은 서둘러 배상하겠다고 말했다.“누가 당신들의 더러운 돈을 원한대요? 이것은 나의 피와 땀으로 만든 거라고요. 당신들 고소할 거예요!”
현채영은 입꼬리만 올리며 말했다.“내가 왜 그쪽 체면을 세워줘야 하죠? 누구신데요?”그 사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채영을 바라봤다. 가뜩이나 못생긴 눈이 이상하게 변해 더 못 생겨 보였다.“현채영, 네 주제 파악 좀 해.”그 남자는 옆에 있던 온유한을 쳐다보더니 일부러 도발적으로 말했다.“온유한 부원장이 얼마를 줬는데? 내가 두 배 줄 테니 하룻밤만 나와 같이 있는 거 어때?”현채영이 앞에 놓인 술을 그의 얼굴에 뿌리자 그 남자는 온몸이 젖었다.안 그래도 멀리서나마 현채영과 온유한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자 더욱 그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천한 년, 감히 나에게 술을 뿌려?”창피를 당한 그 남자는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현채영을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다.그러나 주먹이 현채영에게 닿기도 전에 옆에 있던 온유한이 그를 잡았다.그 남자는 술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쓱 닦은 후 말했다.“온유한 부원장님, 이 여자 편을 드나 봐요?”말없이 그를 응시하는 온유한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강지찬과 친할 때 아무도 함부로 그에게 덤비지 못했다.그들은 서울에서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들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났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들을 도발하지 못했다.이제 그 무리를 벗어난 온유한인지라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이전과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몇 초가 지난 후에야 온유한이 입을 열었다.“내 여자에게 집적거리는데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말을 마친 온유한은 그 남자를 옆으로 홱 뿌리쳤다.큰 소동에 달려온 강지찬과 정유진 그리고 강지아 모두 이 말을 들었다.온유한은 현채영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끌어당긴 뒤 그 남자를 향해 말했다.“꺼져!”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창피를 당한 것을 강지찬과 그 가족이 봤으니 그 남자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했다. 이 또한 강지찬에게 충성을 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온유
현채영을 데리고 온 온유한은 연우와 우빈에게 준비한 선물을 정유진에게 직접 건넸다.“그냥 오면 되지 이렇게 비싼 선물까지 왜 사 갖고 와요.”정유진은 단아한 자태로 평범한 친구 맞이하듯 그를 대했다.“작은 성의로 봐주세요.”온유한이 대답했다.한편 온유한이 왔다는 말에 신이 나서 찾아온 최의현은 현채영을 본 순간 얼굴이 파랗게 질렸고 이를 악물며 겨우 한마디 했다.“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지아가 돌아왔다고.”그러더니 팔을 번쩍 들며 자랑하듯 말했다.“봤지? 커프스. 지아가 준 거야.”고개를 옆으로 돌린 온유한은 강지찬과 경은우 모두 지아가 준 커프스를 착용한 것을 발견했다.서원준도 같은 커프스를 하고 있는 모습에 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예쁘네.”온유한의 표정을 본 최의현은 순간 재미가 없어졌다.“지찬이에게 인사하러 안 갈래?”온유한이 말했다.“됐어, 난 꼬맹이 보러 온 거야.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겠지?”온유한의 얼굴을 본 최의현은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그냥 강우빈을 보러 온 거라고?많은 시선들이 온유한과 현채영에게 쏠렸다.그런 눈빛에 익숙해진 현채영은 웃으며 말했다.“매번 나와 같이 오니까 사람들이 어려워하잖아. 그래서 혼자 가라고 한 건데 내 말 안 듣고 말이야.”“미안해.”온유한이 말했다.“난 괜찮아. 이까짓 게 뭐라고?”현채영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우리 집안에 일이 생겨서 그렇지 뭐. 그래서 내가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하지. 내 옷 안에 카드를 넣으며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는 사람도 있어.”온유한도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현채영의 난처한 상황을 지켜본 적도 있었다.두 사람은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자리에 앉자마자 잘 차려입은 남자가 술잔과 술병을 들고 다가왔다.번지르르한 얼굴의 그 남자를 온유한도 잘 알고 있었다. 졸부의 아들이며 집안에서는 강지찬에게 빌붙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우빈이 태어나던 해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인연을 완전히 끊었고 강지찬과 온유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도 기분이 나빴다.아들이 태어난 후 백일잔치도 하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끼리만 축하를 했다.어느덧 우빈이는 세 살이 되었고 강지아가 때마침 귀국했기에 못 해준 축하를 이제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번 강우빈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생일파티는 강씨 가문의 식장에서 열렸고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다.정유진과 강지아는 하객 대응을 맡았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강지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온씨 가문과 최씨 가문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화령은 강지아와 절친이었기에 생일잔치에 왔다.편집장으로 승진한 화령은 옛날의 풋풋함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미녀의 기질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여기 온 것을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강지아가 한마디 물었다.황은숙은 아직도 자기 아들 최금혁을 아프리카로 보낸 강지아와 화령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강지아의 말에 화령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시어머니는 무슨, 그리고 진짜 시어머니라고 해도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어.”“아이고, 우리 화령 편집장님 점점 폼이 나네. 어쩐지 최금성이 3년이나 아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강지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화령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전엔 얘기 안 했나? 작년에 유산했어.”“어?”“아기가 싫대.”화령이 최금성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지아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최금성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왜 싫대?”“난 그냥... 뭐랄,. 파트너니까. 애인 대역이라고 할 수도 없지.”화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
“당연히 아프지. 문신을 할 때보다 훨씬 아파. 지난주에도 예쁜 여대생이 왔는데 울면서 문신을 지웠어. 하도 울어서 눈이 다 부었어.”“아파서 우는 건 아닐 거야.”“그렇지. 헤어진 사랑 때문에 우는 거겠지. 나도 남자이긴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진짜로 못 돼 먹었다니까.”강지아는 잡지를 하나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네 사장님께 얘기해줘. 지금 작업 끝나면 내 다리 문신도 지워달라고.”“그래.”대답을 하고 난 뚱보는 그제야 반응했다.“뭐라고?”강지아가 말했다.“예쁜 그림 있어? 어디 좀 봐봐.”“응? 아!”뚱보는 멍한 얼굴로 노트 하나를 가져왔다.“이건 사장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야.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봐봐.”여기까지 말한 뚱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아니, 지아 누나. 무슨 일 있어?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응.”입이 무거운 진수혁이 보아하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물론 말을 했든 안 했든 강지아는 상관하지 않았다.검은 장미꽃 한 송이를 본 강지아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걸로 하자. 섹시해 보이네.”그러자 뚱보가 말했다.“이 그림은 몇 년 전 거야. 요즘 젊은 여자들은 흑장미 문신을 하지 않아.”“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이걸로 할게.”뚱보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30분이 지나자 진수혁의 하던 작업도 끝났다.강지아의 차례가 돌아오자 진수혁이 한마디 했다.“올 줄 알았어.”강지아도 한마디 했다.“걱정 마. 울지 않을 테니.”그녀는 정말로 울지 않았다. 지우는 게 정말 아팠지만 참고 견뎠다.“지우자마자 바로 다시 문신할 수 있어? 그림은 이미 선택했는데.”“안 돼. 약국에 가서 소염제 같은 걸 사서 매일 바르고 상처가 완전히 회복해야 다시 문신을 할 수 있어.”강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좀 이따 퇴근한 다음에 단골 술집에서 봐. 내가 한턱낼게.”진수혁이 말했다.“문신 지우자마자 술 마시면 안 돼.”강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안 마실게.”그녀를 힐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
최신애가 깨어났을 때 온유한과 현채영은 옆에 없었고 임유희만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유한이는?”“유한 오빠는...”임유희의 안색이 안 좋았다.“접대가 있다며 현채영 씨를 데리고 갔어요.”화가 난 최신애는 또다시 기절할 뻔했다.“친엄마가 기절했으면 병원에서 효도하고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또 그 천한 년을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다고?”최신애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어머님, 진정하세요. 유한 오빠 아마 중요한 술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일 거예요. 어머님의 혈압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어요.”“내가 죽어야만 나를 엄마라고 생각할 것 같구나!”임유희도 그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본인도 매우 슬펐기 때문이다.그녀도 아무런 명분 없이 온씨 저택에 머무른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녀와 현채영이 한집에 사는 것을 아는 외부 사람들이 뒤에서 어떻게 비웃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중요한 것은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자주 띄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현채영 같은 여자와 비교당한 생각만 하면 임유희는 속이 울렁거렸다.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현채영에게 졌다는 것이다.강지아에게 진 것은 인정할만했다. 막강한 강씨 가문이고 온유한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채영은?집안이 망해 명예도 없는데 온유한은 그녀를 보물처럼 아끼고 어디나 데리고 다닌다.임유희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서울의 명망 있는 대갓집 규수들은 거의 다 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왔고 한규진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아역 배우였던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최의현은 약혼녀를 데리고 왔고 최금성은 당연히 화령을 데리고 왔다.온유한이 현채영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 자리에 현채영의 옛 애인도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온유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