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연을 남겨둔 이유는 그를 방패막이로 삼기 위한 것이다. 강지현이 성유 쪽의 상황을 알고 있으니 직접 만나 성유에 관해 이야기해도 상관없다.식사를 마친 임우연은 음식을 치우고 밖으로 나갔다.강지현이 직접 커피 한 잔을 타갖고 왔다. 오후 내내 정유진은 쉴 틈이 없어 커피가 필요한 상황이었다.정유진은 커피를 받으며 인사했다.“고마워요. 무슨 일 있어요?”강지현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내가 도울 일이 없는지 해서요.”“저 혼자 할 수 있어요.”그녀는 분명히 거부하는 태도였지만 강지현은 화를 내기는커녕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유진 씨, 나에 대해 적개심은 없어도 돼요. 난 유진 씨에게 상처 주는 짓은 안 하니까.”하지만 지금 정유진은 강지현과 대화할 시간이 없다.“그런 말을 하는 것조차 역겨워요. 애한테 문제가 있는 것은 알아요? 조예원이 아이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기나 해요?”조예원만 언급하면 강지현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여자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그 말에 정유진은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그건 불가능해요. 강지현 씨. 지금 강지현 씨 너무 낯설어요. 이만 가세요. 일해야 하니까.”강지현이 떠난 후 정유진은 일에 몰두했고 저녁에는 석식까지 생겼다.K그룹에 온 후 처음으로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다. 그전의 몇 번은 최의현이 갔고 오늘 최의현은 또 다른 중요한 술자리가 있어서 정말 몸을 뺄 수가 없다.시간이 되자 임우연과 소미는 그녀를 데리고 석식 자리에 갔다.룸에 들어가 보니 테이블에 고남준이 있었다.이 테이블에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세 명 있었고 모두 40대 사업가로서 정유진과는 아는 사이지만 친하지는 않다.차례로 악수하고 나서 한 여성 사업가 옆에 앉았다.이 사람들은 모두 K그룹과 협력하고 싶어 했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강지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이런 사람들과의 첫 접대 자리라 임우연이 술을 막아주었지만 많이 마셨다.다행히 주량이 좋은 정유진은 취하지 않았지만 취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옆에
고남준 손에 든 휴대폰이 있는 것을 본 정유진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말했다.“고 대표님 무슨 말씀이시죠?”고남준은 웃으며 말했다.“별 뜻은 없어요. 정 대표님 긴장하지 마세요. 저는 좋은 사람이에요.”이렇게 파렴치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하지만 고남준과 입씨름을 할 틈이 없다. 추호가 자꾸 만지작거리고 있었다.“고 대표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시간이 지나면 다들 알게 될 겁니다.”정유진은 다가오는 추호의 얼굴을 밀치며 진지하게 말했다.“고 대표님도 보셨겠지만 제가 지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 얘기를 오래 못 나누겠네요.”말을 마친 후, 추호의 멱살을 잡고 여자 화장실 문을 걷어찬 뒤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리고 추호의 머리를 세면대에 밀어 넣고는 수도꼭지를 틀었다.차가운 물을 머리에 끼얹자 추호는 꽥꽥 소리를 질렀다.정유진은 그를 못 일어나게 누르며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내 경호원과 소미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주저앉은 추호를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정 대표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정유진은 경호원에게 말했다.“얼른 병원에 데려다주세요.”그러고는 옷을 정리하고 다시 룸으로 돌아갔다.맞은편에 앉은 고남준은 웃는 듯 아닌 듯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앉자마자 술잔을 들었다.“정 대표님, 저는 K그룹과 아주 협력하고 싶습니다.”그리고 정유진을 향해 잔을 들며 말했다.“그럼 미리 축배를 들까요... 잘 부탁드립니다.”렌즈 뒤에 있는 임우연은 눈을 반짝이더니 방금 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바로 깨달았다.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잔은 더더욱 안 들었다.임우연이 앞에 있는 술잔을 들고 일어나며 말했다.“고 대표님. 죄송합니다. 우리 정 대표님이 좀 취하셔서 이 잔은 제가 대신 마시겠습니다. 건배.”별수 없는 고남준은 빙그레 웃으며 잔을 비웠다.식사가 끝난 뒤 차에 올라탄 정유진은 곧바로 운전 기사더러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임우연은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경위를 들은 임
고남준은 휴대전화에 담긴 동영상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추호 그놈이라니.”이 이름을 들은 옆에 있던 엄제후는 대본을 내던지며 말했다.“그 자식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걸.”하지만 고남준은 쉽게 생각을 접지 않았다. 겨우 정유진의 꼬투리를 잡았는데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쓰겠는가?“나중에 추호의 얼굴만 가리면 돼.”엄제후가 경고했다.“추호는 절대 그런 수작에는 넘어가지 않으니 스스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엄제후가 고남준과 만나던 초기 추호에게 크게 당한 적이 있다.녀석은 호랑이처럼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건드리는 순간 큰 골칫거리가 된다.고남준은 엄제후에게 추호와 정유진이 가깝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추호가 만만한 상대였다면 이 영상으로 충분히 정유진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다른 사람과 상의 좀 해야겠어.”고남준이 나가서 전화 한 통 하고 들어왔다.비딩 날짜가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어 이사회는 거의 매일 미팅을 진행했다.이날 회의에서 강원훈은 고남준의 회사를 중점적으로 언급했다.여러 주주들이 하룻밤 사이에 말을 맞춘 듯 모두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서울에 온 지 1년이 채 안 됐지만 배후에 고씨 집안의 지원이 있어 우리가 협력하면 K그룹에는 절대 해가 되지 않을 거예요.”“고씨 집안의 고 회장님이 아들이 하나뿐이라고 했는데 체면을 세워줘야 하지 않겠어요.”“고씨 가문과 협력하는 것은 분명 강강연합이에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강지찬을 옹호하는 몇몇 주주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강지찬의 부재 때문에 정유진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고 표정만 보아도 고씨 가문과 협력하면 K그룹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정유진은 계속 입을 열지 않은 채 절차대로 하자고만 했다.이상하게도 강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회의가 끝난 후 강원훈이 그녀의 사무실로 찾아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요 몇 년 동안 이 사무실에 잘 안 왔었는데 지찬이의 인테리어 스타일이 음... 나는
커피를 뒤집어쓴 강원훈은 화도 내지 않았다.담담한 얼굴로 휴지를 뽑아 얼굴을 닦으려 할 때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침울한 얼굴로 걸어 들어온 강지현은 강원훈의 옷에 커피가 묻은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멱살을 잡고 한 방 먹였다.얻어맞은 강원훈은 강지현과 정유진을 번갈아 보고 말했다.“이봐, 너에게 남자가 이렇게 많은데 나 하나 더 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그 말을 들은 강지현은 다시 달려들어 때리려 했지만 강원훈은 미리 준비하고 바로 피했다.“지현아, 우리도 마찬가지야. 뭘 그렇게 화를 내? 잊지 마. 우리야말로 강씨 집안의 사람이고 K그룹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꺼져!”강지현은 너무 화가 났는지 창백했던 얼굴이 시뻘게졌다.강원훈은 그제야 얼굴에 묻은 커피를 닦은 뒤 옷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정유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3일의 시간을 줄게. 고남준과 협력하면 영상을 돌려줄게.”말을 마친 뒤 온몸이 엉망진창인 채로 쿨하게 떠났다.강지현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요? 유진 씨, 무슨 일 있어요?”정유진은 지금 이 사람도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차갑게 대했다.“강지현 씨도 이만 가세요.”강원훈이 초라하게 대표이사실을 나왔다는 말은 이내 최의현과 임우연의 귀에 들어갔고 두 사람은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괜찮아요. 다툼이 좀 있었던 것뿐이에요.”정유진은 그런 일을 쉽게 입에 담기 어려워 가볍게 설명했다.최의현과 임우연은 눈을 마주치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저녁에 최의현과 한규진은 임우연까지 불러 술을 마셨다.이미 호텔 CCTV를 확보한 임우연은 한규진과 경은우에게 보여주었다.추호가 갑자기 찾아와 정유진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CCTV에 그대로 포착되었다.오해인 줄은 알지만 이런 일은 여자들에게 아무래도 좋지 않은 것이고 정유진이 추호을 완전히 밀어낸 것도 아닌 데다가 CCTV가 멀리 있어 두 사람 사이가 애매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쉽지 않겠는데.”한규진이
중요한 시점에 터진 엄제후의 스캔들 때문에 결국 남우주연상은 다른 사람이 받게 되었다.현장 카메라에 잡힌 엄제후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매니저가 주의를 줘서야 정신을 차렸다.엄제후는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떴고 차에 오른 그는 얼굴빛이 완전히 굳었다.비서는 조심스럽게 휴대전화를 건네며 말했다.“형,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어요.”휴대전화 너머의 사람은 추호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추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다시는 너희들과 엮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고남준이 요즘 내 눈에 너무 띄어. 엄제후, 한 배우가 일생에 몇 편의 대히트작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해? 남우주연상을 뺏겼으니 화 많이 나지? 지금 황제처럼 떠받들려 살다가 하루아침에 지하실로 옮기면 아마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할 거야!”엄제후는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 작은 만두와 간단한 냉채로 끼니를 때우던 생각만 하면 눈앞이 캄캄해졌다.그러나 추호가 겁내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당시 고남준을 꼬시기 위해 다른 커플을 갈라놓은 것은 사실이었고 온갖 떳떳하지 못한 수단을 동원한 것을 추호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이 일이 터지면 그는 절대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추호가 전화를 끊자 엄제후는 바로 고남준에게 전화를 걸어 한바탕 말다툼을 벌였다.고남준도 실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추호가 엄제후의 남우주연상을 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도 친아버지에게 욕설을 들었다.엄청난 돈을 주고 실검을 내린 고남준은 화가 나서 휴대전화를 부쉈다.오늘 최의현과 시내에서 회의를 한 정유진은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추호가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비서를 통해 전해 들었다.녀석은 빳빳한 정장 차림에 매우 활기차 보였다.“누나, 이 일은 내가 해결했어요.”최의현은 ‘쓰읍’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확실히 고남준을 건드린 것 같은데 복수하면 어쩌려고요?”입을 삐죽거린 추호의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다.어찌 무섭지 않겠는가?하지만 정유진을 도운 것이기에 추민해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요즘 기분이 좋지 않은 강지아는 강지찬이 사고 난 후부터 계속 집에 숨어 있었다. 원래 하려던 스튜디오도 그만두고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몇 개의 큰 전시회도 연이어 미뤘다.정유진도 그녀에게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온 선생님과 싸웠어?”강지아의 말이라면 온유한은 전부 들어줬는데 말다툼이라니? 조금 놀라울 뿐이다.정유진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강지아는 무릎을 껴안고 그녀의 몸에 기대며 말했다.“새언니가 부러워요.”“내가 왜 부러워?”“오빠가 첫사랑도 없고 평생 언니 한 사람만 좋아하니까요.”그 말을 들은 정유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예전에 온미정이 그랬다. 강지찬은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고. 성격이 난폭하고 강해서 어렵게 마음이 움직여도 별 신경을 안 썼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그렇게 많은 오해와 갈등이 생겼다고 했다.정유진은 강지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소리야, 온유한이...”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는 강지아는 언급하기 싫은 모양이었다.날이 갈수록 강지찬은 점점 더 소식이 없다.하지만 정유진은 포기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사건 발생지 인근의 크고 작은 마을의 병원을 계속 찾아다녔다.강지찬을 찾지 못했지만 비딩 날짜는 결국 다가왔다.이사회는 고남준 때문에 다시 의견이 두 개로 나뉘었다. 강원훈을 대표로 하는 팀은 고남준과의 협업을 적극 지지했고 정유진 측은 당연히 반대했다.양측은 회의실에서 매우 심하게 말다툼했고 성격이 나쁜 한 어르신은 찻잔을 깨뜨렸다.그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정유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매우 신기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그들의 감정이 그녀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조예원이 그녀가 차갑고 무정하다고 했던가? 사실 맞는 말이다.지금 이 사람들이 싸우는 걸 보고 강원훈의 연기를 보면서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그 사람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그녀는 절대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회의가 끝난 후, 다른 주주들은 모두 떠났고 회의실에는 강씨
“모두 비켜요! 빨리, 구급차를 불러요!”강지현이 정유진을 안고 회의실에서 뛰쳐나오자 대표이사실 사람들은 당황했다.“정 대표님. 왜 그래요? 어떡해. 피가 많이 났어요!”“다들 멀리 비켜요. 빨리 엘리베이터를 타요. 119는 불렀어요?”“지금 부르고 있습니다. 119죠, 여기는...”정유진이 눈을 질끈 감자 한 경호원이 깨끗한 수건으로 그녀의 이마를 가려줬다.강지현이 너무 빨리 뛰어서 비서가 못 따라갈 뻔했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정유진을 우르르 에워싸고 내려왔다.회의실에서 최의현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는 강원훈을 가리켰다.이 사람이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왜 진작 몰랐던 것일까?그저 돈이 많고 한가한 바람둥이가 되려 한다고만 생각했지 이 사람이 이렇게 욕심을 부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강원훈 씨, 형수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같이 끝장내줄 테니 기다리세요.”최의현은 휴대전화를 들고 서둘러 쫓아갔다.태안 병원.조유진이 마침 검사 결과를 손에 든 채 나오고 있었다. 재검사에서 아기의 머릿속에 있던 낭종이 모두 흡수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기뻐서 울 뻔했다.초음파상 아기는 잘 크고 있었고 다른 검사 데이터도 모두 정상이었다.옅은 한숨을 내쉰 조예원은 드디어 아기를 안심하고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바로 그때 구급차 한 대가 건물 입구에 멈춰 섰다.강지현이 차에서 뛰어내리며 의사를 도와 정유진을 밀어냈다.“비켜요. 비켜요.”응급의료진이 몰려오자 조예원은 한쪽으로 물러섰다.강지현이 바퀴 달린 침대를 밀며 한눈도 팔지 않고 지나갔다.‘정유진이 다쳤네...’강지현은 정유진의 손을 꼭 잡은 채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조유진은 마치 공기처럼 아무런 존재감 없이 서 있었다.손에 쥔 보고서를 움켜쥔 조예원은 손톱의 날카로운 따끔거림에 겨우 냉정함을 유지했다.잠시 후 조예원이 돌아서서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정유진은 이미 검사하러 들어갔고 강지현은 밖에서 기다리며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머리를 부딪친 탓에 정유진은 가벼운 뇌진탕으로 병상에 누워도 어지러움을 느꼈다.이마에 거즈를 감고 있는 곳이 지금은 매우 아프다.“유진 씨, 괜찮아요? 상처가 많이 아파요? 물 좀 드실래요?”정유진이 대답했다.“아니요. 고마워요.”이곳에 있던 최의현, 온유한 그리고 소미는 강지현의 남다른 관심에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약삭빠른 소미는 얼른 강지현을 밀어내며 말했다.“흑흑, 정 대표님. 깜짝 놀랐잖아요. 어떻게 가장 소중한 머리를 다쳐요. 흉터가 남으면 안 될 텐데...”“흉터가 남아도 상관없어요.”정유진이 너무 괴로워 눈을 감자 소미는 주위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여러분, 먼저 들어가세요. 여기에 있어도 도움이 되지 못하잖아요. 제가 정 대표님 옆에 있을 거예요.”이 큰 남자들이 여기에 있어봤자 확실히 소용이 없다. 회사 일이 많은 최의현이 먼저 자리를 떴다.아직 출근 중인 온유한은 이따가 다시 보러 오겠다고 했다.소미는 떠나기 싫어하는 강지현을 보고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그, 뭐, 정 대표님이 자고 싶어 하니 강 대표님도 먼저 가는 게 어떨까요?”강지현은 정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푹 쉬고 회사 일은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그가 간 후, 소미는 의자를 끌어당겨 침대 옆에 앉았다.핸드폰이 계속 울려서 꺼내 보니 K그룹 쪽에 있는 그녀의 친구가 보낸 메시지였다.내용을 본 소미는 말문이 막혔고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말해봐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정유진은 너무 힘들어 관자놀이를 주물렀고 속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소미는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K그룹 쪽의 그 말 많은 사람들이 또 헛소리를 하니까 그러죠.”오늘 강지현은 정유진을 안고 옥상에서부터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긴 했지만 로비에서 많은 이들의 눈에 띄었다.강지현이 정유진을 좋아한다는 것은 K그룹에서도 비밀이 아니다.정유진은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조금 궁금했다.“사람들이 뭐라고 하는데요?”소미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정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
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열받아 죽겠네. 유한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조금 전에 한 말 무슨 뜻이야? 밖에서 현채영과 자고 오겠다는 얘기야?”임유희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첫 만남 때 절친이 힘을 내라고 북돋우는 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가 있어요.”그때 강지아가 너무 부러웠다.지금의 온유한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어머님, 아니면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유한 오빠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안돼. 네가 가면 저 여자가 더 함부로 나댈 거야.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운전 기사에게도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 출퇴근 픽업을 책임질 거야.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 저런 여자와 넌 달라. 넌 네 할 일만 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 말에 임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정오에야 얼굴을 비쳤다.그 모습을 본 최신애는 현채영에게 눈을 희번덕인 뒤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유한아, 오늘 평일인데 병원에 안 가봐도 돼? 넌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라. 앞으로 온씨 가문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이야.”그러자 현채영이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어머님, 유한 씨를 잘 모르시나 봐요. 어제 저녁에 간 석식 자리가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에요.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서 하룻밤 묵은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저와 유한 씨 다 성인이고 집에서는 좀 불편한 것도 있어서.”그 말에 최신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무슨 뜻이지? 아들이 이 천한 년과 잤다는 뜻인가?이제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온유한인지라 이런 것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3년 전에 임유희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마 강지아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최신애는 짐작했다.그런데 이 뻔뻔한 천한 년과 잤다고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