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찬은 강원훈의 아내와 아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상대방이 먼저 그에게 인사하지 않으니 그도 당연히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강지호는 족보에 오르지 못하면 강씨 가문의 지문을 받지 못한다. 매달 용돈도 강지찬 마음에 달렸다. 그러니 강지찬이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회사에 도착하자 최의현이 뒤따라왔다.“너희 집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강원훈에게 아들이 여덟 살 아들이 있다며?”강지찬이 힐끗 바라봤다.“한가해?”“궁금해서 너만 기다렸잖아. 강지현은 대체 무슨 일인데?”“몰라. 십중팔구는 류선의 걸작이겠지.”“쯧쯧, 역시 친엄마야.”최의현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신경 좀 써. 고남준이 또 강지현과 에이프릴 홀에서 술을 마셨대. 둘이 모이면 좋은 일이 있겠어?”강지찬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남준은 이용하기가 쉽지 않아. 강지현이 너무 과소평가한 거야. 두 사람은 협력할 수 없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우연이 황급히 들어왔다.“강 대표님, 둘째 도련님이 회사에 오시더니 바로 프로젝트팀에 갔습니다. 주주로서 프로젝트 개발에 참여해야 한다면서요.”강지찬의 눈빛이 갑자기 싸늘해졌다.최의현은 소리쳤다.“거봐, 여우가 드디어 꼬리를 드러내네. 너는 이미 정유진과 결혼까지 했는데 아직도 들러붙는 거야?”더 화가 나는 것은 강지현은 현재 K그룹의 주주이다. 프로젝트 개발에 참여하겠다는 말에 아무도 반기를 들 수 없다.하지만 오늘 정유진은 K그룹에 오지 않았다. 신혼여행이 끝나자마자 먼저 연우 인테리어로 갔다.강지찬은 강지현을 상대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회의가 있다. 신혼여행 때문에 봐야 할 서류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바빠서 강지현을 상대할 시간이 없다.하지만 강지현의 이런 행동은 정말 역겹다.저녁에 강지찬은 야근을 해야 했기에 정유진이 아이를 데리러 갔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연우가 달려갔다.“둘째 삼촌!”강지현은 연우를 번쩍 안아 들었다.“왜 갑자기 둘째 삼촌이라고 불러?”연우는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
금요일 오후 정명학과 이명자에게 연우를 데리고 지엘 별장으로 갔다. 강지찬도 토요일 아침 일찍 회사로 갔다. 정유진은 편안하게 늦잠을 잤다. 밥을 먹은 후 회사에 가서 야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신혼여행 때문에 일이 많이 밀려 한동안 좀 바쁠 것 같았다.막 나가려는데 조예원이 왔다.“오늘 산부인과 예약을 했는데 혹시 너...”조예원은 주눅이 든 듯 두 손을 꼭 잡았다.“나와 같이 병원에 가줄 수 있어?”정유진은 바로 강지현에게 물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은 입가에만 맴돈 채 끝내 내뱉지 못했다.그리고 조예원과 같이 갔다. 운전기사 태안병원까지 데려다줬다.초음파 검사를 하니 결과가 좀 안 좋게 나왔다. 태아 뇌에 작은 물혹이 발견되었다. 그것도 양쪽 모두에 있었다.조예원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정유진은 검사결과를 보았지만 이해하지 못했다.당시 연우를 임신했을 때 산부인과 검사는 늘 문제가 없었다.“의사가 아이의 머릿속에 뭐가 있대.”조예원이 눈시울을 붉혔다.사실 그녀는 아이를 매우 갖고 싶어 했다.“우선 조급해하지 말고 의사에게 물어보자.”예전엔 온미정을 피하기 위해 조예원은 늘 다른 의사들을 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온미정을 찾아왔다.온미정은 초음파 검사를 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보통 아기가 크면서 물혹이 저절로 흡수돼.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만약 유전적으로 이런 것이 발생한 거라면 추가 검사를 해봐야겠지.”“무슨 검사요. 다 할게요!”조예원이 급해하자 온미정이 말했다.“양수천자 같은 것들... 여기 간호사가 자세히 설명해 줄 거야. 일단 먼저 정확히 알아보고 어떤 걸 할지 결정해.”조예원은 온미정의 비서를 따라 옆 진료실로 갔다.온미정이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왜? 이제 친한 친구가 아니라 아예 동서지간이 되기로 결정한 거야?”정유진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일부러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너는 마음이 너무 약해서 탈이라니까. 분가해서 나와 사시는
레스토랑은 이미 예약했다. 정유진은 없지만 강지현은 그래도 조금의 양심은 남아 있었던 듯 조예원을 데리고 갔다.나온 음식을 보고 있는 조예원의 마음속은 씁쓸하기만 했다.대부분 해산물인 데다가 게 두 접시에 게살 순두부찌개까지 있었다.강지현은 지금까지 아이가 어떤지 물어보지 않았다.아기의 머릿속에 있는 종양이 생각나 조예원은 한 입도 먹을 수 없다.강지현은 게살 순두부찌개 한 그릇을 떠주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최근 K그룹의 프로젝트에 주주로 참여한 것도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니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이 사람의 연기력은 아주 뛰어나다. 말투도 너무 부드럽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면 분명 믿었을 것이다.하지만 믿거나 말거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그녀는 여전히 천박하지 않는가?“오늘 검사를 했는데 아이의 머리에 뭐가 들었대요.”조예원의 말에 강지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지킬 수 있으면 될수록 아이를 지켜.”말투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그의 찌푸린 미간으로 보아 아직도 이 아이에 대한 불만이 많은 것 같다. 아이가 왜 건강하게 잘 자라지 않고 번거로움만 더해주는지에 대한 불만이다.조예원도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를 떠보는 것은 이제 굴욕을 자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앞에 있는 게살 순두부찌개는 한 숟가락도 먹지 않았다. 웨이터를 불러 새우와 옥수수죽 한 그릇을 달라고 했다.아이의 머릿속에 있는 종양이 저절로 없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알리지도 않았다. 어차피 신경 쓰지 않기에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강지현은 무슨 말을 하려다 조예원이 안색이 좋지 않자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어쨌든 조예원의 오늘 활약에 만족한다. 그래서 같이 식사라도 하는 것이다.정유진은 K그룹에 갔다.정신없이 일하던 강지찬은 아내를 본 순간 정신을 번쩍 차렸다.두 사람이 함께 점심을 먹을 때 정유진은 오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강지찬은 너무 기쁜 나머지 사무실 안 휴게실로 데려가 끌어안고 잠을 잤다.오후에 정유진은 일어
저녁에 늦게 퇴근한 강지찬은 샤워를 하고 다시 서재에 들어갔다.정유진이 커피 한 잔을 끓여 가져다줬다. 들어가 보니 영상을 보고 있었다.영상 속 여자는 기절할 정도로 울고 있었다. 아들을 찾아내라고 했다가 엄마를 되돌려달라고 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뭔 일이 생긴 거예요?”강지찬이 인터넷 영상을 볼 사람은 아니다. 이렇게 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 그와 관련이 있다.“일이 좀 생겼어.”강지찬이 핸드폰을 내려놓더니 정유진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동산시 쪽 쇼핑몰에서 큰 사고가 났어. 여론을 통제하기도 좀 어렵네. 여보, 나 가봐야 할 것 같아.”정유진은 깜짝 놀랐다.“지금요?”K그룹의 프로젝트가 곧 비딩을 앞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 좋지 않은 여론이 일 경우 K그룹과 신규 프로젝트 유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작은 쇼핑몰이지만 일이 생긴 이상 강지찬이 특별히 다녀와야 했다.강지찬은 눈을 감고 정유진의 목에 머리를 묻었다.정유진은 스트레스가 많은 그를 생각하며 위로하고 싶었지만 이 인간은 어느새 그녀의 입술을 침범했다.그러고는 서재에서 또 난리를 쳤다.다음날 정유진은 연우 인테리어에서 야근을 하다가 강지찬의 전화를 받았다. 동산시 쪽 담당자가 혼자 버티지 못하는 바람에 반드시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전화가 왔을 때는 이미 공항으로 가는 길이었다.저녁에 정유진은 아이를 데리러 지엘 별장으로 간 김에 그곳에서 저녁까지 먹었다.이명자는 어차피 강지찬이 집에 없으니 하룻밤 묵고 가라고 했다.하지만 정유진은 거절했다.“지찬 씨가 집에 없을수록 내가 더 있어야죠.”정명학은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이 말이 맞아. 부부는 일심동체니까.”요즘 강씨 저택의 사람들은 별 움직임이 없다. 강지찬이 출장을 갔으니 이제 움직임이 있을지도 모른다.연우를 재우자마자 방경숙이 다가오더니 주연지가 왔다고 했다.정유진은 웃으며 말했다.“제일 처음 올 줄 몰랐네요.”송지윤이 처음일 줄 알았다. 그동안 송지윤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다.이제
강지찬은 장형준과 비서 한 명만 데리고 나갔다. 요즘 회사 일이 많아 임우연이 회사에 남았다.집을 비운 사이 정유진은 늘 제시간에 연우를 하원 시켰다. 경호원도 추가했다. 혹시라도 연우에게 또 사고가 날까 봐 두려웠다.정유진은 왠지 모르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마음이 불안했다.다행히 강지찬이 간 후 일이 잘 처리되었다.알고 보니 동산시의 아이 실종은 원유쇼핑몰에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설이 지난 후 다른 곳에서도 세 건의 또 다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강지찬은 간 뒤 곧바로 4억 원을 기부해 경찰이 아동 납치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줬다. 이 돈은 경찰이 단서를 제공한 시민들에게 현상금으로 지급될 것이다.이 행동은 아이가 실종된 가족을 다독일 수 있었고 덕분에 K그룹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정유진이 거의 잠들기 직전 강지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라는 말 속에는 피곤함이 잔뜩 묻어있었다.“밥 먹었어요?”정유진이 물었다.“먹었어. 지금까지 일을 처리했어.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주경현 이 쓸모없는 인간.”가족들을 다독이는 것도 제대로 못 하니 강지찬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아동 실종은 사회적 이슈가 된다. 쇼핑몰에서는 경찰에 잘 협조하고 가족을 잘 타이르면 별일이 없다.그런데 주경현이 아이의 실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처음에는 이 사건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아 가족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다가 그 뒤에 할머니가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벌을 내리든 해고하든 상관없지만 화는 내지 말아요. 몸에 안 좋아요. 일찍 쉬어요.”정유진은 잠깐 생각한 후 말했다.“일 다 보고 일찍 돌아와요.”아이를 찾는 게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다. 강지찬도 계속 거기 있을 수 없다.“여보, 나 보고 싶어?”정유진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늘 그에게 차갑게 굴었던 정유진인지라 이런 말이 어색했다.“시간이 늦었으니 일찍 주무세요.”강지찬은 뾰로통해졌다.“왜, 자기 남자를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전에 왜 대신 칼을
K그룹의 새 프로젝트 총괄 디자이너는 여전히 서정호와 정유진이 맡았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이번 사업은 관광레저숙박사업을 하나로 만든 것으로 K그룹이 최근 몇 년간 공들여 준비한 주요 사업이다. 일선 도시에서 진행되면 전국은 물론 전 세계로 뻗어 나갈 것이다.멀리 동산시에 있는 강지찬은 화상으로밖에 참석할 수 없었다.정유진과 서정호가 웃고 떠들며 회의실로 들어서자 앉아 있는 강지현이 눈에 들어왔다.강지현을 본 후 모두가 두 사람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본인은 정작 아무런 표정이 없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불편함을 전혀 보지 못한 듯했다.정유진과 서정호가 자리에 앉자 비서가 다가와 물을 건넸다.이때 강지현이 입을 열었다.“오늘 날씨가 추우니 정 대표에게 커피 한 잔 갖다 주세요.”웅성거리던 회의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모두의 시선이 정유진에게 쏠렸다.정유진은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물이면 돼요.”회의 담당 비서는 정유진을 바라본 뒤 현명하게 커피를 들고 오지 않았다.강지현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이자 옆에 앉은 프로젝트 총책임자에게 말했다.“시작해도 될까요?”담당자가 유진을 쳐다보자 정유진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제야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됐다.강지찬도 영상으로 연결했다. 검은 셔츠를 입은 채 아직 호텔에 있었다.불과 이틀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정유진은 영상 속 남자를 보며 문득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저도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찡그렸다.회의실 카메라는 비서가 조정했다. 바로 정유진을 센터로 잡았다.그녀의 입술을 본 강지찬은 눈썹을 찡그리며 살짝 헛기침했다. 하마터면 ‘여보’라고 소리칠 뻔했다.“다 모였나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강지찬은 의자에 기대어 정유진만 쳐다봤다.옆에 있는 강지현도 무시당했다.회의가 끝나자 동영상 속의 남자는 고개를 숙이더니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이내 정유진의 휴대전화
정유진은 요즘 너무 바쁘다. 점심도 소미가 사무실에 갖다 줘서야 먹었다.밥을 먹은 후 강지찬의 휴식실에 가서 30분 동안 잤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일을 시작했다. 연우를 데리러 갈 시간도 없이 강지아에게 전화해 부탁했다.아이가 안전하게 집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은 후 밤 11시가 넘을 때까지 야근을 하고 나서야 집에 돌아왔다.한밤중에 비가 내려서 바깥을 보니 강지현이 우산을 쓰고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너무 피곤해서 상대방과 이야기할 기분조차 없다.“유진 씨.”집에 들어가기 전에 강지현이 그녀를 불렀다.마당에는 경호원도 있고 현관에는 하인도 있다. 정유진은 그와 정말 싸우고 싶지 않았다.너무 안 좋게 보이기 때문이다.“일 얘기는 내일 회사에서 해요.”강지현은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일 얘기 아니에요. 오늘 회의에서 제기한 문제와 해결방안들이 너무 좋았어요.”정유진의 업무 능력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강지현도 마찬가지이다.“별일 없으면 들어가 볼게요.”정유진이 돌아서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강지현은 더 이상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한참 기다린 이유가 단지 한마디 칭찬을 하기 위한 것처럼 말이다.정유진이 샤워를 마쳤을 때쯤 강지찬의 전화가 걸려왔다.베개에 기대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전화를 받았다. 귓가에선 강지찬의 농담이 들렸다.“내일 돌아온다고요?”정유진은 잠깐 정신을 차렸다.“이쪽 일은 다 처리했어.”하지만 강지찬은 그녀의 말투가 불만이었다.“왜, 내가 일찍 돌아가서 싫어?”“아니요. 그게 아니라 날씨를 보니까 요즘 며칠 동안 비가 많이 와서 비행기가 취소되거나 지연되는 게 많더라고요. 지장이 없을지 모르겠네요.”강지찬은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그럼 어떡해, 밤에 와이프 없으면 잠도 안 오는데.”너무 졸린 정유진은 그의 헛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다음날 일어나 보니 휴대전화는 진작 꺼졌다.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연우를 유치원에 보낸 후 더 많이 내렸다.동산시 쪽의 날씨를 확인해
다시 한번 천둥번개 소리가 들렸다. 휴대전화가 바닥에 떨어졌다.교통사고!그것도 심각한 교통사고라니!핸드폰 너머로 파출소의 경찰이 계속 말했다.“강지현 씨와 동행한 사람은 찾았습니다. 운전기사와 비서인 것 같아요. 지금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비서도 중상을 입었지만 의식은 회복했어요. 이미 대량의 인원을 보내 수색 중이지만 비가 너무 많이 내리고 강의 물살이 세서... 여보세요. 정 여사님, 듣고 계신가요? 정 여사님?”정유진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저, 저... 곧 갈 테니 구체적인 위치 좀 보내주세요...”머릿속이 윙윙거렸다. 강지찬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마음속으로는 잘 알면서도 술에 취한 듯 멍하니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연우 인테리어에서 K그룹까지 가는 짧은 거리를 가면서도 하마터면 사람과 차를 칠뻔했다.K그룹에 도착한 후 차에서 내려 우산도 쓰지 않고 빗속을 걸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정 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정유진은 곧장 대표이사 전용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임우연을 찾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정, 정 대표님? 이렇게 큰비가 내리는데 우산도 안 쓰셨어요?”정유진은 아무 말 없이 강지찬의 사무실로 직행했다.임우연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내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따라갔다.“임 비서님, 지찬 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아직 찾지 못했대요.”늘 침착하던 임우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요?”말을 하는 정유진은 입술마저 떨고 있었다. 이상한 눈빛과 단호한 말투는 오히려 듣는 사람을 안타깝게 했다.“차 좀 배정해 주세요. 사람도 몇 명 더요. 당장 가봐야겠어요. 지금 다른 거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간단한 말 한마디였지만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임우연 역시 강지찬이 거금을 주고 스카우트한 인재답게 금세 마음을 추스르고는 말했다.“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정 대표님, 우선 잘 상의해야 한다고 생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
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열받아 죽겠네. 유한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조금 전에 한 말 무슨 뜻이야? 밖에서 현채영과 자고 오겠다는 얘기야?”임유희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첫 만남 때 절친이 힘을 내라고 북돋우는 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가 있어요.”그때 강지아가 너무 부러웠다.지금의 온유한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어머님, 아니면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유한 오빠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안돼. 네가 가면 저 여자가 더 함부로 나댈 거야.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운전 기사에게도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 출퇴근 픽업을 책임질 거야.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 저런 여자와 넌 달라. 넌 네 할 일만 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 말에 임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정오에야 얼굴을 비쳤다.그 모습을 본 최신애는 현채영에게 눈을 희번덕인 뒤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유한아, 오늘 평일인데 병원에 안 가봐도 돼? 넌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라. 앞으로 온씨 가문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이야.”그러자 현채영이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어머님, 유한 씨를 잘 모르시나 봐요. 어제 저녁에 간 석식 자리가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에요.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서 하룻밤 묵은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저와 유한 씨 다 성인이고 집에서는 좀 불편한 것도 있어서.”그 말에 최신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무슨 뜻이지? 아들이 이 천한 년과 잤다는 뜻인가?이제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온유한인지라 이런 것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3년 전에 임유희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마 강지아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최신애는 짐작했다.그런데 이 뻔뻔한 천한 년과 잤다고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