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찬과의 더 큰 충돌을 피하고자 강지현이 먼저 자리를 떴다.병실에 정유진만 남아있는 것을 보고 지찬이 물었다.“왜 아직도 안 갔어요?”지아는 이미 깊은 잠에 빠졌고 유진은 그녀의 손을 이불 안으로 밀어 넣은 뒤 병실을 나오고 나서야 대답했다.“바로 갈 거예요.”강지찬은 병실 문을 닫으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그의 뜻은 유진을 내쫓으려는 게 아니었는데 말투가 퉁명스럽다 보니 누가 들어도 사람을 내쫓는 것 같아 보였다.유진이 가방을 가지려 하자 갑자기 손목이 턱 잡혀버렸고 지찬은 큰 힘으로 유진을 품에 끌어안았다.강지찬은 유진을 꽉 끌어안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말아요.”“이거 놔요!” 정유진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에 온몸으로 저항했다.마치 뭍에 올라온 활어처럼 무의식적으로 미친 듯 발버둥 쳤다.“손대지 말아요! 이거 놔!”상당히 격한 유진의 반응에 강지찬도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그녀를 놓아줬다.유진은 바로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고 호흡이 거칠어지며 가슴팍이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렸다.강지찬은 결국 한발 뒤로 물러났다.“뭔 짓을 하려는 게 아니라, 가지 말라고 한 거였어요.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요?”정유진은 여전히 살기등등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기가 차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찬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난 그냥 지아가 깨어나서 또 소란을 피울까 봐 걱정돼서 그랬어요. 유진 씨도 봤잖아요, 지아가 당신만 알아보는 거. 나도 못 알아보는 데 말이에요.”경계심 가득한 유진의 모습을 보며 강지찬이 뒤로 한 발 물러났다.“약속할게요, 손대지 않기로.”말을 하면서도 강지찬은 화가 스멀스멀 올라왔다.“안는 게 뭐 어때서 그래요”정유진도 지아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강지찬과 단둘이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지찬과 말도 섞고 싶지 않아 차라리 병실에 들어가 있기로 했다.강지찬은 늑대를 경계하듯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유진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어이가 없었다.지아만 당신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나 강지찬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정유진은 확실히 키도 작고 뚱뚱했으며 못생기기까지 했다.하지만 강지찬의 말은 얄밉기 그지없었다.“내가 예쁘든 못생기든 뚱뚱하든 날씬하든 강 대표님이랑 상관 없을 텐데요?”강지찬이 그녀의 얼굴을 흘겨보며 대답했다.“왜 상관이 없죠? 지금 나랑 마주 보고 밥을 먹고 있는데, 그래도 지금 얼굴이 밥 넘기기엔 더 좋네요.”“...” 정유진은 더는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강지찬은 대화가 흥미진진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전에 지아가 언니를 찾아오라 소리칠 때 둘이 전에 만난 적 있지 않을까 의심했었어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정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전 만난 적이 없는데요.”강지찬같은 남자를 유진이 만난 적 있었다면 반드시 생각이 났을 텐데 말이다.강지찬이 그런 유진을 쳐다보며 대답했다.“당신은 날 만난 적 없겠죠. 그때 잠들어 있었으니까. 지아를 진정시키고 감사를 전하려고 찾아가니 이미 떠나고 없더라고요.”당시 하도 다급하게 움직였던 터라 지아를 산에서 업어내려 온 후 바로 탈진해 잠이 들었던 것이다.깨고 나서는 경찰 조사에 기록을 남기고 다급히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왔었다.그땐 아직 어려서 좋은 일을 하고도 나서지 않는 미풍양속을 따라 사건을 더 알아보지 않고 그대로 떠났었다.근데 이렇게 만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정유진은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아 반 공기에 국만 홀짝이고는 배가 불렀다.식사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아가 잠에서 깼고 강지찬은 서둘러 의사를 불러왔다.지아는 눈을 뜨고 유진을 바라보더니 희미하던 시선이 차츰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언니?”작은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지며 흥분한 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유진도 그런 지아의 두 팔을 안고는 크게 이상이 없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의사의 진찰이 끝났고 병세가 그나마 안정이 됐다는 결론을 내렸다.인간의 두뇌는 자기보호 기능이 있어 안 좋은 일들은 지아가 선택적으로 잊는다고
내일 출근도 해야 하니 정유진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새벽쯤 되었을까 새된 비명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살려주세요!”“엄마!”유진은 황급히 일어나 불을 켰다.지아는 두 손을 허공에서 휘적거리며 두 눈을 크게 뜨고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보아하니 아직 깨진 않은 채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정유진은 다급히 지아를 안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지아야 무서워하지 마. 언니가 있잖아, 그러니 괜찮을 거야...”지아는 한동안 깨지 못했고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엄마만을 외치고 있었다.정유진은 이런 환자는 본 적이 없었다. 아직 어리고 예쁜 아이가 악마의 구렁텅이에 빠진 듯 예쁜 두 눈에 소름 돋는 공포만을 담고 있었다.“지아야, 지아야 일어나 봐! 언니야, 언니가 있으니 괜찮을 거야. 괜찮아, 지아야.”“지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요?”강지찬이 뛰어 들어오더니 이불째로 정유진과 강지아를 함께 품에 껴안았다.“악몽을 꿨나 봐요. 깨울 수가 없어요.” 정유진은 조급한 채 눈물을 터뜨리기 일보 지전이었다.강지찬은 익숙한 듯 답했다.“정상이에요. 이 정도면 많이 상태가 양호한 편이에요, 예전엔...”과거를 회상할 새도 없이 강지찬이 말했다.“다시 시도해봐요, 깨우기만 하면 돼요. 안되면 내가 의사를 불러올게요.”의사가 온다 한들 진정제만 투여할 뿐이었고 강지찬은 지아가 진정제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정유진의 노력 끝에 지아가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다.“내, 내가 또 놀라게 한 거야?”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죄책감 가득한 모습이었다.“미안해, 고의가 아니었어.”지아는 자신이 또 발작했음을 눈치채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이렇게 자주 아픈 모습을 보인다면 언니가 싫어하지 않을까?친척들처럼 미친년 취급하면서 영영 보러오지 않으면 어떡하지?오빠만이 날 싫어하지 않고 있어...지아는 와락 정유진을 껴안으며 말했다.“언니, 지아를 싫어하지 말아줘. 앞으로 최대한 발작도 안 하고 미친 짓도 않도록 노력할게. 날 싫
”강 대표님, 지아가 잠들었어요. 당신도 얼른 돌아가서 쉬어요.”정유진은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지아에게 이불을 덮어줬다.오늘 밤은 유진이 수고를 해줬기에 강지찬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아니면, 나도 여기서 잘게요.”“...” 정유진이 멈칫했다.강지찬은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지아가 조금 이따 또 악몽을 꿀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정유진은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지아가 악몽을 꾸길 바란다는 거예요?”강지찬이 대답했다. “전에도 수많은 밤을 자지도 못하고 지아만 지킨 적이 많았어요.”오늘 밤은 유진이 있기에 그와 지아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정유진은 가슴이 미묘하게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강지찬은 지아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여기서 버티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당신이 안 가면 내가 갈게요.” 정유진은 말을 하며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온 밤 고생해줬는데 더는 유진을 건드릴 수 없었던 지찬이 한 발 물러났다.“그래요, 내가 갈게요. 얼른 쉬어요, 무슨 일 있으면 부르고요.”정유진은 대꾸하지도 않았고 지찬은 방 한가운데 선 채 불쾌한 표정이었다.“왜 날 보지 못하는 거예요?”잠든 지아까지 있으니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강 대표님, 나가실 때 문 닫아주세요.” 유진이 말을 돌렸다.“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내 등에 마구잡이로 손자국 내던 거 잊었어요?” 강지찬이 짓궂게 받아쳤다.유진은 성이 난 채로 노기등등하게 지찬을 노려보며 말했다.“도대체 언제 나갈래요?”둘의 시선이 드디어 얽혔고 강지찬은 그제야 흡족한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다행히 지아는 더는 깨지 않았고 유진은 해가 뜰 때까지 잠을 잘 수 있었다.얼른 출근길에 나서야 했기에 깨자마자 세수를 하고 옷부터 갈아입었다.지아는 아직도 자고 있었고 옆 방에 있는 강지찬에게 인사나 하고 가려던 참에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강지찬의 아버지, 고세연, 그리고 처음 보는 남
”저번에도 말했지만, 당신 아드님이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정유진은 누군가와 크게 싸울만한 일은 벌이지 않는 사람이었다.하지만 그의 존엄성을 짓밟는 일은 참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한 눈빛으로 쳐다봤다.“여기에 온 건 지아 때문이에요. 저도 얼른 출근해봐야 하니, 길 좀 비켜주세요.”그녀의 모습은 류선과 고세연 같은 사람들 눈에는 억지로 고고한 척하는 것 같아 보였다.수많은 여자들은 강 씨네 남자들을 보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강지찬과 강지현 같은 젊고 멋진 청년들은 둘째치고 강홍식과 강홍택은 인생의 반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질척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런데도 강지찬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그걸 믿을 사람이 있을까?고세연은 속으로 증오심을 불태우며 입을 열었다.“아버님, 전에는 멀쩡하던 지아가 갑자기 발작한 건 이 여자와 관계된 게 분명해요.”강홍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지아한테 뭔 짓을 한 거야?”류선도 거들었다. “지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곱게 보내주진 않을 거야!”정유진은 이 사람들과 더는 입씨름 하고 싶지 않아 말했다.“제가 뭘 했는지는 강지찬한테 물어보세요.”그러고는 류선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 “당신 아들한테 물어봐도 되고요. 자리에 있었으니.”류선은 움찔했다.“지현이가 왜 있었던거지? 너 세 형제한테 뭔 짓을 한 거야?”그 말에 정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자기 자신도 언제부터 이렇게 매력 있는 사람이 돼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류선은 강홍식보다 더한 사람임이 틀림없었다.거기다 대부분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하지 않던가.“이 천박한 년 내가 경고하는데, 지현이한테 뭔 짓이라도 했다간 서울에서 발붙일 수도 없게 해줄 거야!”정유진은 가슴이 찌릿찌릿했다.강지찬이 한빈을 대하는 수단을 직접 겪어봤으니 강 씨 집안의 능력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자신은 상관없었지만 아빠는 아직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고 예원과의 스튜디오도 이제 막 정상궤도에 진입한 상태
강지찬이 말을 마치자 자리에 있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정유진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녀는 두 귀를 의심했다.저 남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강지찬은 아침밥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어깨를 토닥거렸다.“여기선 먹지 못할 테니 회사로 가서 먹어요. 운전 조심하고요.”그는 기쁨과 흥분의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몸에 있던 스위치가 갑자기 켜진 듯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상당한 흥분감에 휩싸였다.지찬은 유진의 경악한 얼굴을 쳐다보며 그저 거칠게 입술부터 갖다 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그는 몇 배나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데려다줄까요?” 정유진은 완전히 어안이 벙벙해졌고 강지찬은 마른기침을 하더니 말했다.“저,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러더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운전 조심해요. 지아는 내가 보고 있으니 안심하고요.”병실에 아직 사람이 가득 있어 데려다줄 수 없었기에 그녀가 보는 앞에서 쿨하게 문을 닫았다.그제야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강지찬의 심장은 쿵쾅거리다 못해 터져 나올 것 같았다.방금 그가 내뱉은 폭탄 발언은 위력이 상당했다. 정유진뿐만 아니라 강씨 집안 사람들 모두를 멍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심지어 그 자신조차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살면서 처음 겪는 일에 강지찬은 문 앞에서 몇 초간 정신을 가다듬었고 문밖에 있던 유진도 잠시 멍해 있더니 아침을 들고 떠났다.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강홍식이었다.“저런 후레자식, 저번에 내가 했던 말을 귓등으로 들은 게냐? 내가 말했었지,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저 어중이떠중이 같은 여자는 우리 가문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강지찬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럼 절 집에서 쫓아내시죠.”쭉 말이 없던 강홍택이 입을 열며 훈계했다.“그게 아빠랑 말하는 태도냐? 지찬아, 작은 아빠가 널 뭐라 하는 게 아니라, 너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철들 때도 됐잖니. 우리 가족들 모두 널 위해 하는 말이야, 원수처럼 생각하지 말고.”강홍식은
강홍택과 류선은 떠났지만, 강홍식과 고세연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지아도 강홍식의 딸이었기 때문에 없는 사람 취급할 수는 없었다.그가 들어가서 보겠다고 하자 강지찬도 막지 않았다.지찬이 사 온 아침은 정유진이 모두 가져갔기에 형준을 시켜 다시 2인분을 사 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강홍식이 지아를 보러 들어가자 고세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지찬 오빠, 회사 일로 바쁜 데, 제가 남아서 지아를 볼게요.”강지찬이 고세연을 한 눈 훑더니 답했다.“필요 없어, 지아를 돌봐줄 사람은 있거든. 지아도 널 싫어하니 앞으로는 다시 오지 마.”정유진이 앞으로 지아를 보러 자주 올 수도 있었으니 둘을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세연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버렸다.“지찬 오빠, 그렇게 제가 싫은 거에요? 제가 뭘 잘못했길래 절 이렇게 싫어하세요?”강지찬은 눈앞의 여자와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네가 잘했든 못했든 나랑은 상관없어. 아까 한 말 못 들었니?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그러니 너도 앞으로 본가에 가지 말았으면 좋겠다. 강 씨 예비 며느리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전에는 일일이 신경 쓰기 싫었는데 앞으로는 알아서 잘 처신해.”강지찬이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 “꺼져!”고세연은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며 불쾌함을 온 얼굴로 티 내고 있었다.“아버님이 그렇게 두지 않을 거예요. 정유진을 갖고 노는 거라면 뭐라 할 순 없지만, 강 씨 가문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에요.”재벌 집 남자 중에 일편단심인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정유진 한 명 정도는 이해하려고 했다.강지찬이 지금은 좋아한다지만 남자의 호감은 유통기한이 냉장고 속 남은 잔반들보다도 짧았다.고세연은 한발 물러선 자신이 충분히 사려 깊고 마음이 넓어 보였고 이런 자신이 재벌 집 맏며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강지찬은 화를 누르며 말했다.“꺼지지 못해?”고세연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정유진은 그녀가 떠난 후 강지찬이 어떤 장면들을 마주했는지
정유진은 강지찬의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이제 진짜로 그가 두려워졌다.하지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전화를 계속했고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도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정유진은 밥도 넘어가지 않았지만 강지찬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그냥 알려주고 싶었어요, 아까 했던 말 진심이라고. 먼저 밥 먹어요, 저녁에 다시 잘 얘기해봐요.”“...”밥은 먹지 못할 게 분명했고 그와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강 대표님이 무슨 생각이든 상관없어요. 전 우리의 관계가 협력관계 그 이상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그럴 리는 없을 텐데요.”강지찬은 거리를 두는 유진의 태도에 화가 났다.“나 강지찬이 당신한테 자격 미달일 리는 없을 텐데요?”“제가 자격 미달이에요.”“당신이 자격 미달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요.”“...” 유진은 할 말을 일었다.젠장, 왜 이 남자는 왜 날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 거지?고세연도 있으면서?아니, 그와 고세연이 어떤 관계든 상관없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강 대표님, 감정은 둘 사이의 일인데 억지로 요구할 수 없겠죠? 외로워서 갖고 놀만 한 사람을 찾는 거라면 죄송한데 사람 잘못 찾으셨어요.”정유진이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계속 이렇게 귀찮게 구신다면 앞으로 지아를 보러 갈 수는 없을 것 같네요.”“날 위협하는 거예요?” 강지찬이 푸흡하고 옅게 비웃었다.“그럼 지켜보죠.”말을 마치고는 전화를 끊었고 정유진은 실로 어이가 없었다.그가 사준 아침밥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는 커피를 내리고 비스킷을 조금 먹었다.요 며칠 신안의 착공 업무에 열중하느라 손에 쌓인 일감이 점점 많아졌다.특히 상록수 별장의 설계도는 제때 완성해야 했다.오후 세 시, 눈 코 뜰 새 없이 돌아치고 있는데 키키가 노크하고 들어왔다.“누나, 밖에서 누가 찾는데요.”뒤이어 강홍식과 고세연이 사무실로 들어왔다.키키는 고객인 줄 알고 열성적으로 어떤 음료를 마실지 물어봤고 정유진이 담담하
“유한 씨,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아요.”욕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고 다름아닌 임유희의 목소리임을 강지아는 바로 알 수 있었다.침대 위에 있던 온유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자신에게 늘 엄격한 온유한인지라 아침이면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 이 시간이면 진작 깨어 있어야 했지만 어젯밤 술을 너무 마셔 아직 자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부르자 바로 깨어났다.“지아야?”온유한은 습관적으로 안경을 찾았고 침대 협탁을 더듬거렸지만 안경이 없었다.강지아는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카펫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 들어 건넸다.온유한은 안경을 쓰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방안을 살펴보니 이 방은 그의 방이 아니다. 한쪽 화장대 위에 여자 용품이 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카펫에 빈 술병이 없었고 공기 중에서도 고약한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강지아가 그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지아야!”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온유한은 이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어쨌든 재벌가 자식들에게 이런 일은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이때 욕실 문이 열렸고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임유희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강지아와 동하민을 발견했다.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식사에 초대한 게 아니라 나더러 간통현장을 잡으러 오라고 한 거였네.”강지아가 말하자 동하민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대표님, 어쩌면...”어쩌면 뭐?오해일지도 모른다고?동하민도 이런 위로가 가소롭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한 듯 방을 나섰다.“지아야, 내 말 좀 들어봐.”온유한이 힘겹게 한마디 하며 이불로 몸을 두르고 침대에서 내려와 강지아를 잡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그를 피했다.“만지지 마!”“지아야!”“나 만지지 마, 건드리지 마...”강지아는 미칠 지경이었다.“아무 사이 아니라며? 돌아가서 혼인신고부터 하자며? 온유한,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그런 게 아니야.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온유한은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이때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애써 눈을 떴지만 술에 취한 탓에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꺼져!”“나야, 네 엄마!”최신애는 그를 바닥에서 일으키려 했지만 온유한은 그녀를 뿌리쳤다.“어머니?”“우리 어머니! 하하...”하마터면 그에게 밀쳐 넘어질 뻔한 최신애는 휘청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최신애는 깜짝 놀랐다.“유한아, 왜 그래? 엄마 놀래키지 마.”“꺼져요!”온유한은 원수를 보듯 그녀를 바라봤다.“지아가 나와 헤어지재요. 이제 만족해요? 아니, 당신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비틀거리며 최신애를 밀어내려던 온유한은 어눌한 발음으로 소리쳤다.“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착하고 상냥한데! 당신은 악마야. 우리 어머니가 아니야, 꺼져, 꺼져...”무자비하게 쫓겨난 최신애는 조금 전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취중 진담이라고 했던가, 아들의 마음속에 그녀는 이미 악마로 변해있었다.모두 강지아의 탓이다!강지아만 없었다면 모자 관계가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최신애는 이를 갈았다.온유한은 최신애를 방에서 쫓아낸 뒤 계속하여 술을 마셨다. 옷이 물에 젖어 바깥에까지 술 냄새가 풍겼다.만취한 아들을 바라본 최신애는 순간 한 생각이 떠올랐다.온미정과 백무영의 결혼식 다음 날, 지난밤 온혁진, 온미정과 크게 싸운 최신애는 온미정을 찾아가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었고 강지아에게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그 말에 온미정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지아한테 사과하겠다고요?”최신애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네, 어젯밤에 그이와 싸운 뒤 방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확실히 잘못한 것 같아요. 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이 얼마나 오랜 친분을 쌓아온 집안인데요. 할아버지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니 절대 이렇게 쉽게 끝내면 안 되죠. 어제 확실히 내 생각이 짧았어요. 지아와 지찬이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한 것 같아 사과하고 싶어요.
강지아가 옷을 갈아입자 동하민이 그녀의 머리를 말려줬다.평소 털털한 성격의 동하민은 머리를 말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은 가스라이팅 당한 거예요.”조금 전, 강지아와 온유한의 말다툼을 동하민은 똑똑히 들었다.별 반응이 없던 강지아는 한참 만에 말했다.“내가 모를 줄 알아?”“그러면 왜...”“무슨 소용이 있어? 오빠 엄마인데.”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강씨 가문의 외동딸이 사람들 앞에서 욕을 먹었으니 동하민이었다면 바로 같이 싸웠을 것이다.어른이라는 사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트집을 잡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한편 옆방에 있는 강지찬은 이미 온씨 가문의 투자를 취소하기로 결심했고 앞으로 온씨 가문과 그 어떠한 비즈니스 거래도 하지 않기로 했다.온혁진이 아무리 애원하고 부탁해도 생각을 바꿀 기색이 없었다.“아저씨, 기회는 충분히 드렸어요. 지아가 계속 괴롭힘을 당하니 지아의 유일한 가족으로서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온혁진은 다급한 얼굴로 온유한에게 눈짓하며 한마디 하라고 했다.온유한은 못 들은 척하며 굳은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최의현은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한규진은 당연히 강지찬의 편이었다.“온 원장님, 방금 사모님의 행동은 정말이지...”한규진이 난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 지아를 이렇게 대하다니, 강 대표가 화를 낼 수밖에요.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누구인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다 집에서 귀하게 자란 자식이에요.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어요?”온혁진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 최금성 등 최신애의 친정 식구들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최신애와 싸웠을 것이다.결국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분위기가 안 좋은 상태로 얘기를 마쳤다.강지아는 오빠와 새언니를 따라 집으로 갔고 온씨 일가는 모두 호텔에 남았다.좋은 날 이런 일이 생기자 온미정은 최신애를 볼 때마다 화가 났고 첫날밤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최신애는 임유희의
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어리둥절했다.“지아야, 뭐라고?”강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농담 아니야. 유한 오빠, 우리 헤...”“안 돼!”온유한이 강지아의 말을 끊었다.“네가 서운한 것은 알아. 하지만 안 돼. 우리 돌아가서 혼인신고 하자. 나 결정했어. 우리 분가해서 살자. 응?”강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믿지 않았다.최신애도, 온유한도, 그녀 자신도 믿지 않았다.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동하민은 얼른 밖으로 나와 자리를 피해줬다.가운으로 몸을 감싼 채 벽에 기대어 있는 강지아는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보였다.머리는 축축하고 화장을 지워 안색도 창백했다.입술을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무서운 것 같았다.“지아야, 일단 옷부터 입고 우리 얘기 좀 할까? 응?”온유한이 손을 뻗어 그녀를 다시 품에 안으려고 하자 강지아가 온몸을 떨더니 큰소리로 외쳤다.“나 건드리지 마!”그녀도 이런 자신에게 놀란 듯 자리에 얼어붙었다.온유한의 손도 허공에서 굳어버렸다.의사인 온유한은 직업 특성상 강지아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지아야?”작은 소리로 강지아를 부르자 강지아는 그제야 마음을 가다듬더니 온유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유한 오빠, 나 방금... 뭐라고 했어?”“괜찮아.”강지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온유한은 이번에 그녀가 격한 반응을 하지 않자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아다.“우리 지아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이야.”온유한의 목소리는 어린 지아를 달래듯 유난히 부드러웠다.그러나 강지아는 그의 손을 밀치더니 다시 그에게서 떨어졌다.“난 괜찮으니까 오빠는...”강지아는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임유희 씨나 찾으러 가.”그 말을 들은 온유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지아야, 그런 말 하지 마. 나와 임유희, 아무 사이 아닌 거 알잖아.”온유한은 설명할 게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그 사진들 다... 다...”온유한이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있겠
목욕을 하니 강지아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자신을 욕조에 가둔 채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강지찬이 온씨 집안과 끝장을 보기 위해 달려갔을 때 강지아는 이미 자리에 없었고 그곳에는 몇몇 하객들과 표정을 알 수 없는 최신애만 남아 있었다.“온씨 가문이 우리 강씨 일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 앞으로 완전히 인연을 끊죠.”강지찬은 최신애를 싸늘하게 바라봤다.“그다음은 아주머니 차례겠네요.”최신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너, 너 무슨 뜻이야?”강지찬이 코웃음을 친 뒤 정유진을 이끌고 자리를 뜨려 하자 온혁진이 얼른 뒤쫓아갔다.“지찬아, 지찬아. 우리 말로 하자... 이 아저씨의 체면을 봐서라도 앉아서 이야기하자... 화 풀어. 이 사람이 점점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 같아. 내가 집에 가서 잘 얘기할게...”온미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최신애 씨!”새언니라고 부르지도 않았다.“온씨 가문이 대체 뭘 잘못했는데 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거예요? 오늘은 내 결혼식이에요. 온씨 가문과 내 체면은 안중에도 없어요?”화가 나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최신애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미정이 계속 화를 내려 하자 백무영이 그녀를 말렸다.“됐어. 그만해.”백무영은 온미정을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보고 있어. 진정해.”그러고는 이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다들 술 마시러 가시죠.”최의현과 한규진도 서둘러 상황 수습에 나섰다.한편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이게 내 탓이야?”그녀는 옆에 있던 임유희를 덥석 잡으며 물었다.“유희야, 네가 말해봐. 도대체 누가 잘못했냐?”임유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서 줄곧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던 온유한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그만 하세요!”최신애는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만족해요?”온유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이제 만족하냐고요?”“내
강지아는 어른인 최신애가 이런 행동까지 할 줄 몰랐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얼굴은 오렌지 주스 범벅이 되었다.노란 오렌지 주스는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면서 온몸을 더럽혔다.10여 년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보냈지만 오늘만큼 초라한 적이 없었다.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온유한의 엄마가 그녀에게 이런 행동을 하다니...강지아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녀 앞에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은 이 여자가 과연 엄마처럼 그녀를 사랑한 적이 있을까?머릿속에 떠올린 장면들이 갑자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가정 교육이 부족하니 내가 네 엄마를 대신해서 가르쳐 주마!”컵을 테이블에 ‘탁’ 놓으며 한마디 외친 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했다.한편, 너무 큰 소란에 주위의 하객들이 잇달아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온유한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자 경은우가 그에게 귀띔했다.“저기 아주머니와 지아, 아니야?”강지아가 옷을 갈아입고 선캡을 썼기 때문에 경은우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개를 그쪽으로 돌린 온유한은 순식간에 안색이 나빠졌고 이내 쏜살같이 달려와 강지아를 품에 안았다.“또 무슨 소란을 피우는 거예요?”온유한이 최신애에게 큰 소리로 묻자 최신애는 강지아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얘가 어른을 어떻게 대했는지 물어봐. 온유한, 난 네 엄마야. 그런데 나에게 말투가 그게 뭐야?”하지만 온유한은 친엄마를 상대할 겨를이 없이 다급하게 강지아의 얼굴을 감쌌다.두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지아의 모습에 온유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강지아였지만 그 모습이 더더욱 온유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온유한은 마음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차라리 강지아가 큰 소리로 최신애에게 대들고 싸우기를 바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에 대한 마음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휴지가 없는 온유한은 얼른 옷소매로 강지아 얼굴의 오렌지 주스를 닦
온미정의 결혼식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결혼식은 피로연 외에 해변에서 파티도 열었다.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젊은 남녀들이다.최의현은 언제 젊은 미녀를 꼬셨는지 두 사람은 아까부터 함께 술을 마셨다.강지아도 흰색 롱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머리에 선캡을 썼다.햇빛이 딱 좋아서 매우 포근하게 느껴졌다.온유한은 다른 쪽에서 하객들을 대응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수많은 인파들을 뚫고 수시로 눈을 마주쳤다.“온 선생님과 사이가 정말 좋네요.”임유희가 어느새 강지아 옆에 와서 한마디 했다.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임유희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강지아 씨, 왜 그렇게 쳐다봐요?” 임유희가 묻자 강지아가 바로 말했다.“임유희 씨도 유한 오빠를 좋아하는 거 알아요.”임유희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제가 심려를 끼쳐드렸네요. 죄송해요.”어떻게 보면 인정한 셈이다.강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심려를 끼치네요. 이 사람 마음속에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임유희 씨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네요. 주유정이라고 알아요? 임유희 씨는 주유정과 완전히 달라요. 나는 한 번도 주유정에 대해 신경 쓴 적이 없어요. 그런데 임유희 씨는 왠지 신경이 쓰이네요.”강지아의 솔직한 한마디에 임유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임유희보다 어린 강지아였고 천진난만한 모습이었지만 마음은 아주 섬세했다.“주유정 씨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요.”임유희는 솔직히 말했다.“미안해요. 내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나면 안 된다는 거 너무 잘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어요. 지난번에 온 선생님이 목숨을 바쳐 나를 구한 후부터 온 선생님에 대한 제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요.”강지아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임유희 씨는 똑똑한 여자예요.”강지아가 맑은 눈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임유희는 왠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두세 살 어린 여자아이에게 마음을 들켰다.역시 여자를 아는 건 여자뿐이다.임유희는 다른 커플 사이에 끼고 싶지
“고모, 유한 아저씨와 또 싸웠어요?”“어떻게 알았어?”“싸울 때마다 나한테 달라붙으니까요! 휴.”사실 온유한과 싸우지 않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강지아는 온유한과의 현재 관계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방경숙이 연우를 데리고 밥을 먹으러 가는 바람에 혼자 있는 강지아는 갑자기 지루해졌다.아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상하게 외로웠다.그녀는 최신애와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정말 싫었다. 게다가 최신애는 마음에 드는 예비 며느리를 자기 옆에 데리고 있었다.이럴 때마다 강지아는 자신이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지루해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더니 방으로 이끌고 갔다.문이 쾅 닫히자 깜짝 놀란 강지아는 눈을 감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나야.”온유한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쉿'하는 손짓을 했다.오늘 하객 접대를 너무 오래 했더니 다리가 뻐근하고 아팠다.“뭐 하는 거야?”비명을 지르려다가 멈춘 강지아는 눈을 뜨고 나서야 앞에 있는 사람이 온유한임을 알아봤다.온유한은 웃는 얼굴로 서운한 척하며 말했다.“얘기 좀 해. 우리 애기가 요즘 나와 말을 안 섞으려고 해.”“내가 언제.”강지아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바빴잖아?”“아무리 바빠도 여자친구와 함께 있을 시간은 있어.”강지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온유한은 가쁜 숨을 내몰아 쉬며 말했다.“지아야, 보고 싶었어.”“조금 전에 너 보자마자 안고 싶어서 혼났어.”강지아는 눈앞 남자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두 사람은 어느새 처음에 사귀기로 확정했을 때처럼 뜨겁게 키스를 나눴다.어찌나 격렬하게 했는지 온유한이 사람을 시켜 드레스를 다시 보내 달라고 한 후 강지아가 화장을 수정하고 나서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드레스마저 커플룩이었다.정유진은 강지찬의 허리를 꼬집으며 말했다.“저기 봐, 두 사람 화해했어.”코웃음을 친 강지찬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결혼식이 시작되었다.백무영은 가장 친한 친구와 연출 감독, 제작자,
강지아는 곧 국내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갔다.그녀의 인스타를 보고서야 비행기에 탔다는 것을 안 서원준은 입을 삐죽거리며 ‘양심 없는 녀석’이라고 욕을 했다.인스타를 끄려고 할 때 강지아가 올린 글을 보고 멍해졌다.[비행기에 타니까 그래도 마음이 편안해지네.]무슨 뜻이지?서원준은 그 문구에 눈을 가늘게 떴다.귀국 후 그는 강지아를 만난 적이 없다. 남자 친구가 있는 사람이고 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매우 바빴다.그동안 강지아는 온유한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진짜로 그들 사이에 금이 갔단 말인가?강지아의 스토리를 본 온유한은 무의식적으로 강지아의 이 문구가 그와 함께 있었을 때의 답답함을 표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얼마 전까지는 주유정이었다가 이번에는 임유희, 강지아도 당연히 피곤했을 것이다.관자놀이를 만지작거린 온유한은 본인도 이런 상황이 힘들다고 생각했다.그 후 20일 동안, 강지아와 온유한이 페이스 톡한 횟수는 10번을 넘기지 않았다. 매일 페이스 톡을 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요 며칠 타이밍이 맞지 않은 듯했다.가끔은 온유한이 받기 불편한 상황이었거나 또 어떤 때는 강지아가 바빠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예전에 매일 하던 자기 전 통화도 채팅으로 바뀌었다.내용은 대부분 ‘오늘은 피곤해서 먼저 잘게’ 등이었다.그러면 온 유한도 ‘잘자’라고 단답형으로 대답했다.어느 날 한밤중에 강지아가 느닷없이 한마디 보냈다.[보고 싶어.]온유한이 막 답장하려 할 때 강지아가 보낸 메시지를 삭제했다.온미정의 결혼식은 남쪽 지방에서 성대하게 차려졌다.연우는 겨울방학을 맞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같이 미리 이곳에 와서 지냈고 강지아는 이틀 전에 도착해 연우와 같이 놀았다.결혼식 날 강씨 가문 식구들이 모두 참석했고 정유진도 강지찬의 팔짱을 끼고 참석해 온미정의 체면을 세워줬다.온미정이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정유진은 처음 봤다.이들은 로맨틱한 서양식으로 결혼식을 했다. 온미정은 한평생 웨딩드레스를 입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