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이라니요? 아들이 감옥에 갔고 3년이 지나야 나와요. 제가 3년을 더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소희는 그동안의 억울함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오랫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아이까지 낳아줬는데 지금은 명분조차 없어요. 왜요, 아직도 내가 기다리기를 원해요? 그럴 가치나 있는 사람이냐고요!”귀염둥이 아들이 이렇게 욕을 먹자 오성연은 듣기 싫었다. 두 사람은 싸우기 시작했다.“소희야, 생각하고 말해. 우리 한빈이 아니었으면 서울에서 이렇게 많은 사업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지금 한빈이 곤경에 처하니까 너는 바로 이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노인네를 내쫓으려 하고! 너 이러다 벌 받을 거야!”소희는 피식 웃었다.“벌은 당신들이나 받아야죠! 한빈 씨가 벌 받은 거예요. 정유진에게 했던 그 업보! 그리고 나더러 당신을 돌보라고요? 그럼 왜 그동안 당신 아들과 결혼시키지 않았어요? 만약 결혼했다면 당신은 나의 시어머니이고 나는 당연히 당신을 돌봐야 할 의무가 있어요. 하지만 지금, 내가 왜 당신을 부양해야 하는 거죠? 고작 몇 년 동안 당신을 어머니라고 부른 것 떄문에요?”오성연은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한빈은 소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강지현을 따라 재기하면 소희보다 좋은 조건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며칠도 안 되어 감방에 들어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오성연은 너무 후회되었다. 소희가 고향으로 가라고 했지만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겠는가?기어가서 소희의 다리를 껴안으며 애걸복걸했다.“내 수양딸아. 이 어머니를 쫓아내지 마. 나 아직 젊어. 앞으로 집안일을 내가 다 떠맡을게. 그러니까 제발 쫓아내지 마.”소희는 발로 그녀를 걷어찼다.“꺼져! 지긋지긋해요. 혼자 말고 아이도 같이 데리고 꺼져요. 사실대로 말할게요. 나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거예요. 아이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오성연은 차마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너의 핏줄이야. 네가 낳은 딸도 버리겠다는 말이냐
소희는 보모에게 딸의 옷을 챙겨 오성연에게 건네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한빈의 핏줄만 데려가면 돼요. 나머지는 신경 쓰지 마세요.”오성연 화가 나서 허벅지 두드렸다.“독한 년, 친자식은 놔두고 잡종을 키우려 하다니!”이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이 잡종 혹시 바깥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 낳은 거야? 하느님, 이 무정한 년을 당장이라도 죽여주세요!”소희는 상대하기 귀찮아 시어머니와 아이의 짐을 문밖으로 내팽개쳤다.그녀야말로 이 잡종을 키우고 싶겠는가?애초에 귀신에게 홀려 큰 골칫거리를 만들었다. 소희도 매우 우울해했다.다만 이 아이는 법원이 그녀에게 양육해야 한다고 판결했기에 반드시 키워야 했다. 다시 유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게다가 그녀와 혈연관계가 없다. 고양이와 강아지를 키운다고 치면 된다. 친자식도 아니기에 이제 막 사귄 남자친구와도 상관없다.오성연은 옆에 있는 여자아이를 세게 밀었다.“봤지? 너의 친어머니가 잡종을 키우더라도 너를 안 키우겠다고 하니 앞으로 이 늙은이 따라다니며 살면 돼. 공부도 그만하고 새 옷도 그만 입어, 알겠지?”이 말을 듣고 있던 소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그렇다. 그녀는 마음이 독한 여자다.그녀는 올해 서른네 살로 한빈보다 나이가 많다. 한빈이 나오면 서른일곱 살이다.서른일곱, 그녀의 청춘은 한빈 때문에 낭비되었다. 이제라도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이대로 늙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녀 자신을 이런 것은 용서할 수 없다.그리고 한빈이 나온다고 해도 그녀와 결혼할 보장이 없지 않은가?소희도 딸을 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나 원망하지 마. 원망하고 싶으면 너의 아빠나 원망해.”소녀는 반대편 소년을 죽어라 쳐다봤다. 두 눈은 증오에 가득 차 있다.이 사람은 그녀의 엄마를, 그녀의 큰 집을,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아직 어리지만 할머니의 말을 알아들었다.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다는 것을 알았다.TV에서 봤던 것처럼 잘 먹지 못하고 못 입고 못 배
정유진은 강예중으로부터 한빈이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지 뉴스를 보니 역시나 성원이 현지 뉴스 검색어에 오르내렸다.강지현과 조예원의 법정 출두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두 사람은 분주한 모습이었다.정유진은 한순간 세상이 어둡다는 느낌을 받았다.강예중은 지원서류를 한 무더기 들고는 머뭇거리며 말했다.“정 대표님, 예담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우리 회사에 오려고 하는데 한 번...”정유진이 바로 말했다.“그쪽 상황은 어때?”강예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안 좋아요. 성원에 연루된 후 수주가 없어요. 지금은 기존 프로젝트로 겨우 회사 문을 열고 있기는 한데 나간 사람들이 이미 꽤 많아요. 이제 며칠 됐다고... 우리가 떠난 지 1년도 안 됐는데...”정유진이 말했다.“저쪽은 네가 잘 아니까 알아서 해, 쓸 만한 사람은 오라고 하고.”예담 스튜디오의 일부는 초기 회사 창립멤버들이다. 정유진이 하나씩 가르친 셈이다. 마침 연우 인테리어도 구직 중이네 사람이 있으면 남기고 싶었다.정유진은 한 계약서를 확인하다가 문득 추호가 떠올랐다. 어젯밤에 추호에게 배웅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오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이 자식은 원래부터 빈둥빈둥 놀러 온 것이다. 출퇴근 시간에 맞춰주길 바라진 않지만 인사도 없이 무단결근을 하니 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결국 추호는 하루 종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날 오전, 추호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정유진은 상대방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대체 무슨 상황이에요?”“개자식하고 싸웠어요.”“누구?”“누나는 몰라요. 서경시에서 왔어요.”정유진은 별다른 질문 없이 관심 조로 말했다.“어디 다쳤습니까? 힘들면 집에 가서 쉬세요.”추호의 눈이 반짝였다.“누나, 나 걱정하는 거예요?”정유진의 안색이 이내 어두워졌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추호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정유진의 책상 위에 서류 뭉치가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보낼 서류가 있어요?”추호는 다른 일은 잘 못 하다
다시 성원으로 간 강지찬은 정유진 대신 최의현과 장형준만 데려갔다.강지현이라는 사람은 서울의 울타리 안에서 전혀 존재감이 없고 친구도 없다.그러다 보니 최의현에게 미움을 사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친분이 없으니 미움을 사는 것쯤은 개의치 않았다.최의현은 아니꼬운 태도로 말했다.“강지현 씨, 허세가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보통 사람들은 얼굴도 못 보겠네요.”강지현은 화를 내지 않고 말했다.“죄송해요. 형과만 얘기하고 싶어서요.”최의현이 말했다.“저희가 제시한 가격은 보셨죠. 더 할 말이 있습니까? 서울 전체에서 K그룹 말고는 아무도 강지현 씨 대신 빚을 갚을 능력이 없을 거예요. 안 그래요?”강지현이 대답했다.“그쪽도 얘기했다시피 서울에서만 없을 뿐이죠.”그 말뜻인즉슨 서울 밖에는 있다는 것이다. 고남준이 분명 좋은 조건을 제시했음이 틀림없다.최의현은 강지찬을 힐끗 바라봤다. 표정이 아주 차가웠다. 마치 이번 협상이 안중에도 없는 듯 말이다.강지찬이 입을 열지 않자 최의현이 다시 말했다.“그렇다면 조건을 말해 보세요.”강지현의 시선은 강지찬의 얼굴에 꽂혔다.다만 입을 열기도 전에 강지찬은 벌떡 일어나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최의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얼른 따라갔다.강지현도 얼떨떨해하다가 이내 알아차렸다. 강지현이 요구하는 조건이 결국 정유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강지찬도 짐작하고 듣기도 귀찮아 바로 거절한 것이다.강지현은 서두르지 않았다. 강지찬이 성원을 원한다면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다.차에 오르자 최의현은 그제야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아무것도 못 알아봤는데 왜 벌써 가? 대표님,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강지찬은 장형준에게 지시했다.“고남준을 조사해 봐. 전에 고남준 아버지와 이야기해 보니 해외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었어. 서울에 올 계획이 없었어. 갑자기 온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장형준은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다음날 확실한 소식이 전해졌다.“대표님, 고남준이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서 서울
정유진도 청첩장을 받았을 때 의아했다. 고남준과는 단 한 번 만난 인연으로 그날 성원에서는 말도 나누지 않았다.하지만 이내 알아차렸다. 상대방은 강지찬의 체면을 봐서 그녀를 초대했을 것이다.추호가 힐끗 보고 물었다.“누구에게서 온 초대장이에요? 고씨 성을 가진 사람이면... 이 인간은 서울에 온 지 불과 보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서울의 유명인사들과 친한 척하네요.”정유진은 그의 말투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그의 얼굴에 남아있는 상처를 가리키며 물었다.“설마 고남준이랑 싸운 건 아니죠?”추호는 입을 삐죽거리며 부인하지 않았다.정유진은 매우 의아했다.“왜요? 추호 씨에게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추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움켜쥐었다.“물어보지 마세요. 어쨌든 누나의 전남편하고는 상관없어요. 개인적인 원한이에요. 그건 그렇고 리셉션에 전남편도 가겠죠? 그럼 나는 같이 가지 않을게요. 괜히 또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원래 데려갈 생각도 없었어요.”사실 정유진 자신은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K그룹의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줘야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정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강지찬과의 관계는 한마디로 결론을 지을 수 없다. 어렵게 이혼을 했지만 아직도 헷갈린다.어떻게 해도 강지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그 인간은 항상 그녀를 꼼짝 못 하게 가둘 방법이 있다.리셉션에서 강지찬과 다시 커플인 척 연기할 수밖에 없다. 에이프릴 홀에 도착해서야 고남준이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리셉션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각 집안의 상속자들이다. 온씨 가문에서는 온유한이 왔다. 강지아를 데리고 왔다.한규진도 초대자 명단에 포함됐다.최의현은 강지찬에게 불평을 토로했다.“고씨 집안, 정말 별일 다 하네. 올 사람은 다 왔어. 서울에서 사업 좀 한다는 사람은 거의 다.”온유한이 미소를 지었다.“서울에서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착각하게 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점점 사람이 많아졌다. 강지찬 주위에 사
강지찬이 오늘 밤 고남준의 연회에 중요한 역할이다.고남준은 술잔을 권했고 강지찬과 연을 맺고 싶어 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고남준의 서경시 배경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것은 서경시이고 서울에서는 강지찬이 진짜 원탑이다.술 몇 잔 마신 강지찬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듯했다.그런데 고남준이 옆에서 쳐다보자 멈출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지금 경쟁 관계이다. 암암리에 서로 기 싸움을 하고 있다.“우리 집 어르신이 강 대표 이야기를 많이 꺼냈어요. 강 대표님을 따라 배워야 한다면서 여러 번 얘기했고요. 이제 막 온 새내기이니 강 대표님 잘 부탁드립니다. 자, 한 잔 더 받으세요.”눈앞에서 술잔이 가득 차는 게 빤히 보였다. 강지찬이 안 마실 수 있을까?K그룹이 지금 고남준과 성원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마시지 않는다면 인색해 보이지 않을까?잔을 들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얇고 가는 작은 손이 그 잔을 들었다.정유진은 강지찬 옆에 앉아 고남준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제가 대신 고 대표님과 한잔하겠습니다. 고 대표님, 잘 부탁드립니다.”고남준은 정유진과 강지찬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정말 부러워요. 강 대표님, 두 부부 사이가 이렇게 좋으니 말이에요. 강 대표님이 계속 마시면 정 대표님이 가슴 아파할 것 같네요.”강지찬은 정유진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며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주량이 약해서 웃음거리가 됐네요.”다른 사람들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별말씀을요. 부럽기 그지없네요.”“강 대표님과 정 대표님, 너무 부럽습니다.”정유진이 잔을 비우자 더 이상 강지찬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강지찬은 그윽한 눈동자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녀를 쳐다봤다.이미 약간 취했지만 필름이 끊기기에는 아직 멀었고 머리도 매우 맑다.“나 걱정해 주는 거예요?”정유진은 그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주며 말했다.“술에 취해 아이를 놀라게 할까 봐 그래요.”강지찬은 약간 득의만만해하며 입을 뗐다.“걱정되면
사무실이 완전히 완성되면서 연우 인테리어는 계속해서 이사할 짐들을 옮겼다.정식 오픈은 정유진이 직접 좋은 날을 골랐다. 호텔에서 연회석도 몇 개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연회에는 여러 사람이 참석했다. 연우 인테리어의 파트너를 비롯해 강지찬, 온유한, 한규진 등 축하객들이 꽃바구니를 선물했다.강지찬은 일찍 와서 정유진의 체면을 세워줬다.오후까지 바쁘게 지내던 강지현이 꽃다발을 들고 회사로 찾아왔다.새로 이사한 연우 인테리어는 총 2층으로 구성되었고 매우 크다.그는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갔다. 지금 정유진만 있었고 강지찬은 이미 K그룹으로 돌아갔다.“유진 씨, 축하해요.”정유진은 강지현이 올 줄 몰랐다.꽃을 받아 소미에게 건네고 소미에게 차를 내오라고 했다.“미안해요. 방금 이사 와서 지저분하니 편하게 앉으세요.”강지현은 앉지 않고 창가 앞에 섰다. 멀지 않은 곳의 K그룹 빌딩이 한눈에 들어왔다.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정유진을 곁에 두고 싶어 안간힘을 썼지만 상대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왜일까?그녀에게 고분고분 순종하고 강요한 적이 없지만 왜 그녀는 결국 강지찬을 선택했을까?강지현은 마음속으로 솟아오르는 악한 감정을 억누르고 돌아서서 정유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서울의 금융중심지에 있어 위치도 아주 좋네요. 경치도 좋고요.”“감사합니다.”정유진은 왜 이곳을 새 회사로 택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할 말이 없어 사실 어색했다.저번에 조예원과 술 마신 것이 생각나 참지 못하고 물었다.“예원이가 지현 씨를 많이 사랑해요. 이왕 같이 있기로 한 김에 잘 대해줬으면 좋겠어요.”강지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시선을 내리고 차를 두 모금 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조예원이 나를 좋아하는 거 알아요. 나처럼 바라만 보는 게 싫어서 받아줬어요.”정유진은 어리둥절했다. 강지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에 몰랐다.강지현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일까? 조예원이 진짜로 자기를 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강지현은 흠칫 놀라는 얼굴이었다. 정유진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했다.“유진 씨, 내가 연우를 데려갔다고 의심하는 거예요?”강지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의 수척한 모습은 큰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렸다.정유진은 자신이 함부로 넘겨짚었다는 것을 알고 핸드폰과 차 키를 찾으며 황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연우가 없어져서 먼저 유치원에 가봐야겠어요.”“나도 같이 갈게요.”정유진은 말릴 마음도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밖에 있는 추호를 불러 차를 몰게 했다.유치원에 도착하니 다른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유치원의 선생님들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고 경찰도 일찍 도착했다.“정연우, 정연우는요?”강지찬은 다가와 정유진을 품에 안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독였다.“진정해요. 진정해요. 우리 딸 별일 없을 거예요.”아직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한 선생님이 경찰에게 말했다.“유치원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어요. 연우는 평소 착하고 철이 들어 혼자 숨는 법이 없어요. 아까 줄을 섰을 때 분명 무슨 일이 생겼을 거예요.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어요. 우리도 보지 못했고요.”정유진은 강지찬의 품을 벗어나며 말했다.“CCTV는요. 어린이집 곳곳에 CCTV가 있잖아요.”한 경찰이 말했다.“CCTV를 확인했는데 줄을 서서 교실을 나갈 때 아이가 있었는데 운동장에 도착하니 아이가 사라졌어요. 일부가 사각지대였고요.”오늘 당직 교사는 울며 말했다.“저 모퉁이가 사각지대라 아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대열이 흐트러져 멈춰 서서 대열을 정비해요.”이어 방금 말했던 경찰이 또 입을 열었다.“반에서 아이가 물컵을 깜빡하고 놓고 와서 교실로 돌아갔다고 했어요. CCTV를 보니 아이 혼자 들어온 게 맞아요. 그런데 교실에 들어갔는데 나오지 않았어요.”당번 선생님은 더 심하게 울었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다른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연우를 미처 주의하지 못했어요.”이 유치원에서 어떤 아이를 잃어도 그들은 배상할 수 없다.
강지아의 인터뷰는 아주 재미있었다. 사회자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화령이 차를 우리면서 잡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러면서 강지아의 다도 실력도 선보이게 되었다.녹화가 끝난 후 점심시간이 되어 화령이 강지아에게 점심을 사주기로 했다.“얼마 전에 온씨 집안이 떠들썩했던 거 알아?”강지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화령이 말을 이었다.“나도 금성 씨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아직 외부로 알려지진 않은 것 같아.”국물을 한 모금 마신 강지아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화령이 말하는 것을 제지하지도 않았다.“두 가지 일이 일어났어. 첫 번째는 최신애가 온씨 가문에서 며느리에게 물려줄 가보를 현채영이 훔쳤다면서 누명을 씌웠지. 그래서 경찰까지 불렀대. 온유한이 최신애와 싸우고 나서 경찰이 갔고 현채영은 별일 없었대. 두 번째 일은 어젯밤 온유한이 현채영을 위해 최신애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임유희를 온씨 저택에서 쫓아냈고 최신애는 한밤중에 화를 내며 병원에 입원했대.”강지아는 국물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잘됐네. 두 사람 다 힘든 것보다 낫네. 적어도 현채영 씨는 힘들지는 않으니까.”강지아가 별 반응이 없자 화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온유한이 많이 변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강지아가 말했다.“좋은 사람을 만났나 보지 뭐. 현채영 씨, 괜찮잖아.”화령은 온유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작업실로 돌아온 강지아는 커피 한 잔을 끓였다.서랍을 열어보니 서원준에게 선물할 넥타이를 아직 전달하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나중에 기회를 봐서 그에게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휴대폰이 울려서 수신자를 보니 진수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새집을 찾았기에 명성 빌딩에서 묵지 않겠다고 했다.월세도 내지 않고 강지아의 집에 산 것에 대해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남자친구 데려가도 돼?”“당연하지. 단골 술집에서 만나. 사장님더러 십몇 년 동안 간직해온 술을 오픈하라고 해야겠네.”“그래.”강지아
순간 임유희는 오늘 밤 온유한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천천히 다가가 온유한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던 임유희였다.임씨 가문이 온유한을 몰아세우면 그녀는 온유한 앞에서 이해심 많은 모습을 보여주며 그에게 점수를 딸 생각이었다.임근우와 장희수도 잘 협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변고가 생겼다.“콜록... 유한 오빠... 그게...”“봤냐니까?”온유한은 다시 한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 표정이 매우 사나워 보였다.“아니, 아니...”임유희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물을 흘렸다.“방금 본 건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네네, 알겠어요!”임유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이 순간 온유한의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미칠 지경이었다.온유한이 한참 후에야 손을 뗐고 임유희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졌다.하마터면 온유한의 손에 죽을 뻔했다.이 남자는 더 이상 3년 전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다.지금의 온유한은 강지아를 위해 미쳐버린 상태였다.그는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지'자를 문신했다.미친 거 아닐까?너무 무섭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온 목적은 분명했다.강지아를 위해서라면 친엄마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다.이런 남자를 그녀가 어떻게 옆에 둘 수 있겠는가?감히 엄두도 못 낼 것이다.임유희는 기다시피 하며 온유한의 방을 뛰쳐나갔다.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혹시라도 온유한이 따라올까 봐 서둘러 문을 닫은 뒤 방문을 잠갔다.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한 뒤 거울을 보니 목에 빨간 자국이 생겼다.온유한이 진짜로 그녀를 목 졸라 죽일 뻔했다!침대에 몸을 웅크린 뒤 장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다.“엄마, 온유한이랑 결혼하기 싫어. 집에 가고 싶어.”장희수는 지금 한창 신이 난 상태였다. 최신애가 장희수와 친해지기 위해 카드도 많이 양보했다.“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장희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
“진짜 열받아 죽겠어. 정말!”화가 난 최신애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엄마인 나를 점점 안중에도 안 두는구나. 같이 지옥에 가자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온혁진은 이런 최신애가 너무 귀찮았다. 낮에 임씨 가문 사람들과 만나면 그들은 온유한과 임유희의 혼사를 언제 치를 것이냐고만 물었다.지금 이런 상황에서 온유한이 임유희와 약혼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애초에 임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우리가 오히려 발목이 잡혔어.”온혁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임씨 가문 사람들에게 어떻게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유한이 결혼에 대해 나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 경고하는데 당신도 좀 똑똑하게 굴어, 나중에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되지 말고. 임씨 가문 사람들도 속셈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최신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속셈이가 있어 봤자 무슨 속셈이가 있겠어요? 유희를 우리 집 며느리로 들이고 싶은 것뿐이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유희가 유한이만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임씨 가문도 그저 말로만 재촉하는 것이니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나라고 상관하고 싶겠어요? 현채영 같은 여자가 강지아보다 훨씬 못한데 어떻게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이겠어요? 그런 여자를 들였다가는 서울의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온혁진은 골치가 아팠다. 말로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온유한이 진짜로 현채영과 결혼하려 한다면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래서 이 일은 최신애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이날 오후 최신애는 장희수와 함께 미용실에 갔다. 대화가 잘 통했는지 저녁에는 카드 놀이하러 함께 갔다.온유한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는 임유희만 있었고 현채영은 다른 일이 있어서 현씨 저택으로 돌아갔다.“유한 오빠, 아직 밥 안 먹었죠?”온유한이 ‘응’이라고 대답하자 임유희는 얼른 하인을 시켜 밥을 차리게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일이 있으셔서 밖에서 저녁 드시고 오겠대요. 아버님도 석식이 있으시다고 했고 현채영 씨도 저녁에 늦게
온유한이 회의를 마치자마자 전성호가 휴대전화를 들고 급히 사무실로 돌아왔다.“선생님, 집에 일이 생겼습니다!”온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마당에 경찰차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고 경찰에게 사건 경위를 말하고 있었다.“보석이 박힌 그 장신구를 지금 사람들은 잘 안 써요. 다만 온씨 가문 며느리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라 정말 돈이 급할 때 쓰기 위해 남겨둔 것이에요. 오늘 전문적인 청소 담당자를 불러서 청소를 할 때 금고를 깜빡하고 안 잠근 채 주방에 가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위층에 올라가 보니 가보와 장신구 몇 점이 보이지 않았어요. 몇천 만원 현금은 그대로 있었고요. 경찰분들, 아마 분명 이런 물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훔쳐 갔을 거예요. 현채영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집이 파산해 돈이 부족한 여자예요. 이 여자가 보석들을 방에서 가지고 나오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혹시나 인정하지 않을까 봐 동영상까지 촬영했어요. 증거까지 있는데 계속 발뺌할 수 있을까요?”경찰 몇 명은 서로를 쳐다봤다.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온씨 가문 사모님은 억울한 척하며 말했지만 말 한 마디마다 빈틈이 있었다.진짜로 규칙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면 이 집안사람 모두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 장신구들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사건의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온유한이 돌아왔다.현채영은 그가 돌아오자 웃음을 지을 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최신애는 흥분하며 앞으로 걸어갔다.“아들아, 마침 잘 왔어. 이 여자 손버릇이 아주 나빠. 빨리 내보내.”온유한은 경찰 몇 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두운 얼굴로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돌아오는 길에 대충 들었어요. 하지만 채영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채영이를 믿어요.”“또 이 여자를 감싸고 도는 거야?!”이렇게 좋은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가만히 있을 최신애가 아니었다.“이
현채영이 잠에서 깼을 때 최신애는 점심을 거의 다 먹은 상태였다.“어머니, 점심 먹을 때 부르라니까요. 왜 안 부르셨어요?”최신애는 우아한 모습으로 식사를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알아서 깼잖아?”“그래도 불렀어야죠. 그러다가 배를 곯으면 유한 씨가 어머님을 나무랄 거예요.”최신애는 테이블을 내리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현채영이 밥 먹으면서 음식 투정을 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야채가 너무 많네요. 이 음식은 아무 맛이 안 나요.”최신애는 겨우 화를 참았다.“내가 나이가 들어 입맛이 담백해졌어. 못 먹겠으면 이 집에서 꺼져도 돼. 널 불잡을 사람 아무도 없을 테니.”현채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유한 씨가 얘기했잖아요. 저는 짭짤하면서도 단 것을 좋아해요. 탕수육 같은 거 좋아하니까 다음번에는 그런 것으로 만들어 주세요.”하인은 최신애의 눈치를 살피며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현채영은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더니 한마디 했다.“왜요? 밥 먹는 것조차 어머님이 허락해야 먹을 수 있는 거예요?”현채영이 젓가락을 두드리는 소리에 최신애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테이블에 ‘탁’하고 놓았다.“네가 뭔데 감히 내 앞에서 테이블을 내리쳐!”최신애가 격노했다.“현씨 집안이 이 지경으로 전락한 게 다 이유가 있었어. 정말 교양이 하나도 없네!”그 말에도 현채영은 화를 내는 대신 ‘흥’하고 콧방귀만 뀌었다.“최씨 가문 식구들은 교양이 있어서 성격이 이렇게 모났나 봐요. 유일한 친아들마저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너 정말...”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여봐라, 어른은 안중에도 없는 이 여자를 쫓아내라.”“누가 감히 할 수 있는지 나야말로 보고 싶네요.”현채영은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어머님,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제가 여기에 있는 걸 힘들어하면 유한 씨도 같이 나간다고 했어요. 집도 이미 다 장만했어요.”“뭐라고?”최신애는 어리둥절해 했다.“너에게 집도 사줬어?
“유희야, 네가 잘못 짚은 거 아니야? 유한이가 현채영에게 점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아.”최신애는 분통을 터뜨렸다.“강지아에게도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저게 연기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일부러 강지아를 괴롭혔는데 전혀 반응이 없잖아.”임유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제 예상이 맞아요. 현채영은 유한 오빠가 저와 어머니를 상대하기 위해 일부러 데려온 거예요.”“그런데 강지아는 서원준과 사귀고 있잖아.”최신애는 임유희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온유한이 강지아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떻게 강지아보다 현채영에게 더 잘할 수 있겠는가?강지아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지켜보기만 한다고?온유한의 성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는 것은 참지 못할 것이다.“유희야, 일단 허튼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유한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고민해. 유한이가 너를 진짜로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나한테 화내는 거야. 너는 너무 착해. 현채영 그 여자를 봐, 하루 종일 유한에게 붙어서 별짓을 다 하잖아.”임유희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현채영처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온유한이 하루 종일 현채영과 붙어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힘들었다.다음 날 아침 현채영은 또 늦게 일어났고 온씨 가족이 식사가 끝난 뒤에야 방에서 나왔다.“아버님, 어머님, 임유희 씨, 굿모닝.”그러더니 온유한의 볼에 입까지 살짝 맞췄다.“유한 씨, 좋은 아침.”온씨 집안사람들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임유희는 입에 넣은 밥을 뱉어내고 싶을 정도였다.온유한이 현채영의 손을 잡더니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졸려서 밥 먹기 싫다며? 네 아침은 남겨놨으니 피곤하면 좀 더 자고 일어나서 먹어도 돼.”“출근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꿀을 탄 듯 달콤한 현채영의 목소리에 최신애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었다.“먹을 거야, 말 거야? 안 먹을 거면 꺼져, 아침부
“쇼핑 더 할 거야?”화령의 두 손에도 쇼핑백이 가득 들려 있었다.맞은편 가게에서 현채영이 치마를 입어보고 있었고 온유한이 그녀의 어깨끈을 고쳐주고 있었다.“이제 가자. 거의 다 샀어.”강지아가 말하는 순간 화령은 무슨 생각이 난 듯 한마디 했다.“곧 금성 씨의 생일이라 선물 좀 사야 할 것 같아. 같이 골라줘.”두 사람은 남성복 가게에 갔다.최금성은 항상 이 브랜드의 옷을 입었기에 가게에도 그의 옷 사이즈가 있었으므로 화령은 스타일만 고르면 되었다.양복과 셔츠 외에 화령은 넥타이도 골랐다. 총 2천만 원이 넘었다.“서 대표에게 뭐 안 사줘도 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는 멍해졌다.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필요 없을걸?”두 사람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강지아도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적응하지 못했다.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을 좋아하는 강지아지만 여자친구로서 주는 거라면... 왠지 이상했다.화령은 서원준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사람이 재미있기도 하고 강지아에게 일편단심이었다. 듣는 소문에 의하면 부모님의 인품도 좋다고 했다.“서원준에게 아무거나 하나 골라줘 봐. 요 몇 년 동안 일이 없을 때마다 날아가서 너와 같이 있어 주고 그랬잖아. 알 사람들은 다 알아.”화령의 말은 사실이었다.강지아는 어쩔 수 없이 서원준을 위해 은회색의 패셔너블한 넥타이를 골랐다.“괜찮아?”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는 것이었기에 강지아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잘 어울리겠지?”“당연히 잘 어울리지. 서 대표가 얼마나 스타일리쉬한데. 이런 컬러 잘 어울려.”강지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사기로 결심하고 종업원에게 건넸다.“이거 포장해 주세요.”뒤돌아선 순간 온유한과 현채영이 어느새 가게에 들어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현채영이 온유한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유한 씨, 넥타이 사기로 했잖아. 내가 골라줄게.”온유한이 ‘응’이라고 대답하며 강지아의 옆을 지나갔다.종업원은 강지아와 화령의 물건을 재빨리 포장했다. 이
“강지아 씨, 이 치마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지아 씨처럼 피부가 뽀얀 사람들만 소화해낼 수 있을 거예요.”종업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평소 이런 색상을 거의 입지 않은 강지아마저도 꽤 마음에 드는 듯했다.“그래요. 이걸로 살게요.”이때 옆에 있던 임유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치마가 정말 예쁘네요. 마음에 들어요.”그러자 최신애가 말했다.“그럼 사.”임유희를 본 종업원은 미안한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죄송합니다. 이 치마는 저희가 새로 출시한 한정판 신상품이라 사이즈별로 한 벌씩밖에 없어요. 고객님도 S사이즈시죠? S사이즈는 더 없습니다. 대신 다른 스타일로 추천해 드릴게요. 저희 가게에...”“다른 스타일 말고 저걸로 줘.”최신애의 말에 종업원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강지아는 상대하기 귀찮았다. 두 집안이 이미 인연을 끊었기에 굳이 인사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드레스 룸에 가서 다른 치마로 갈아입었다.한편 최신애는 아직도 종업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내가 이 가게 VIP야. 지금 이 치마가 마음에 들어서 입어보겠다고 하잖아.”종업원은 골치가 아팠다.한편 다른 치마로 갈아입고 나온 강지아와 화령은 최신애가 없는 셈 치고 즐겁게 계속 쇼핑을 했다.강지아가 옷을 잔뜩 골라 종업원에게 주며 포장해달라고 했다.최신애는 빨간 치마를 뺏어오기로 마음먹은 듯 종업원이 포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빼앗아서 임유희에게 건넸다.“유희야, 입어 봐.”임유희가 치마를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가려 하자 강지아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와서 말했다.“이 치마는 제 거예요.”임유희도 물러서지 않았다.“아직 돈을 내지 않았잖아요. 그럼 당연히 강지아 씨의 것이 아니죠.”“내가 먼저 결정한 것이고 이미 사겠다고 얘기도 끝났어요. 대학교수면 누가 먼저인지 기본 도리는 알지 않나요?”“강지아 씨보다 내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단아한 분위기의 임유희에게 빨간 치마가 더 잘 어울린다고?강지아는 피식 웃었다.“본인이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아
해장국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던 임유희는 외출하려던 온유한과 마주쳤다.“유한 오빠,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는 거예요?”온유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본 후 바로 무시해 버렸다.명성 빌딩.늦게 집에 들어온 진수혁은 거실 소파에 검은 그림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재빨리 불을 켰다.“왜 또 왔어?”자기 집이 아니었기에 진수혁도 함부로 비밀번호를 변경할 수 없었다.하지만 온유한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은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게다가 온유한은 술까지 마셨다.온유한의 발 옆에는 이미 여러 개의 맥주 캔이 놓여 있었고 손에도 캔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지아의 발목 문신도 그쪽이 지운 거야?”“응.”진수혁이 그를 쳐다보며 대답했다.“문신 지울 때 많이 아파?”“어떨 것 같은데?”“지아가 울었어?”“울진 않았어.”온유한이 맥주를 계속 마시자 진수혁도 마시고 싶은 마음에 냉장고를 열었지만 한 캔도 남아 있지 않았다.진수혁이 화가 나서 말했다.“내 싸구려 맥주가 그쪽 같은 부자들이 마신다니 참으로 영광이네.”온유한이 계속 말했다.“가게가 어디야?”“뭐?”진수혁은 어리둥절했다.두 사람이 연락처를 교환한 뒤 진수혁은 가게 위치를 온유한에게 보냈다.주소를 확인했음에도 온유한은 집에 가지 않은 채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잠들기 전 진수혁에게 한마디 했다.“내가 여기 있다고 지아에게 말하지 마.”진수혁은 어이가 없었다.재벌가들의 사랑싸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며칠 후 강지아는 서원준과 함께 진수혁을 찾으러 갔다.빨갛게 부어오른 피부가 다 낫자 흉터가 다시 드러났다.서원준은 옆에서 문신을 하는 아가씨가 아파소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는 강지아를 잡고 말했다.“그냥 안 하는 게 어때? 흉터가 크지 않아서 별로 티도 안 나. 진짜로.”진수혁이 서원준을 쳐다보며 말했다.“이분은...”“지아의 남자친구 서원준이에요.”“안녕하세요.”진수혁은 별다른 말 없이 강지아를 향해 물었다.“할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