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찬은 정유진이 자기를 죽도로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음이 아프고 자책하고 있기에 강지현을 상대할 틈도 없다.유치원에서 누군가 안팎으로 협조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경찰은 어린이집 통제에 나섰고 원장부터 청소부까지 남아 심문했다.정유진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강지찬과 함께 사람들을 데리고 연우의 교실로 갔다.교실은 매우 크다. 수업하는 곳, 활동하는 곳, 그리고 잠자는 곳과 식사하는 곳으로 나뉜다.정유진은 아이의 안전만 생각했다. 1분 1초 모두 아이의 생각뿐이다.강지현이 물 한 병을 건네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서두르지 마세요. 연우를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예요.”정유진이 말을 잇기도 전에 강지찬은 사람을 끌어안았다.두 사람 사이의 기 싸움을 정유진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고마워요. 여기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아요. 먼저 돌아가요.”강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경찰이 어린이집 직원 전원을 차례로 뒤질 때까지 이렇다 할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정유진이 원장실에서 나올 때 날은 이미 저물었다. 연우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오후 내내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강지찬은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며 말했다.“괜찮을 거예요. 나를 믿어요.”정유진의 참고 참았던 화가 이 순간 폭발했다. 그녀는 강지찬을 밀쳐내며 말했다.“다섯 살 아이예요. 한 번도 가족을 떠나본 적이 없는 아이가 분명 놀랐을 거예요. 강지찬 씨, 우리한테서 좀 떨어져 주면 안 돼요? 우리를 그냥 놓아줄 수는 없는 거예요?”강지찬은 굳은 얼굴로 여자를 강제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우선 집에 데려다줄게요.”“안 갈 거예요. 상관하지 마세요.”이런 상태로 집에 돌아오면 이명자와 정명학만 놀래킬뿐이다. 게다가 집에 앉아 기다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경찰은 연우의 반 선생님에게 연우의 습
경찰은 대량의 경찰력을 동원하여 조사하고 있지만 하룻밤이 지나도록 아무 정보도 찾지 못했다.정유진은 밤새 잠을 못 자서 안색이 안 좋다.강지현이 죽 한 그릇을 앞에 놓고서야 반응을 보였다. 이 사람도 어젯밤에 돌아가지 않았다.“좀 씻고 와요. 건강이 중요하니까.”강지현이 세면도구를 건넸다.“고마...”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앞에 있던 세면도구와 죽을 모두 다른 사람이 가져가 쓰레기통에 버렸다.강지찬은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며 차갑게 말했다.“내 마누라는 신경 쓸 필요 없어.”이런 상황에 싸우고 싶지 않은 정유진은 어쩔 수 없이 강지현에게 말했다.“돌아가요. 여기 있어봤자 소용없어요.”강지현도 밤새 잠을 못 자서 얼굴이 더 안 좋아 보였다.그는 별다른 말 없이 은근한 눈빛으로 강지찬을 힐끗 쳐다보기만 했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근처 호텔로 가서 샤워하게 한 후 아침 식사를 가져다줬다.정유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강지찬이 샤워가운을 입은 채 전화를 받고 있었다. 방금 옆방에서 샤워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아있었고 얼굴은 아주 진지해 보였다.“누구 전화예요, 연우에게서 연락이라도 왔어요?”“아니요.”강지찬은 식탁을 가리키며 말했다.“아침 식사를 사 왔어요. 일단 식사하세요.”아이의 소식이 없이는 정유진은 입맛도 없었다. 죽 몇 숟가락만 떴을 뿐이지만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나온 강지찬은 몇 숟가락만 뜬 것을 보고 의자를 잡아당겨 그녀 옆에 앉히고 숟가락을 들고 그녀의 입에 갖다 댔다.“뭐 하는 거예요?”“먹여 주는 거잖아요.”“배불러요.”숟가락이 입가에 있어 안 먹으면 안 된다.“내가 알아서 먹을게요.”강지찬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앞에 그릇을 놓았다.마음속에 그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정유진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먹었다.경찰서에 돌아왔을 때, 새로운 심문이 시작되었다.어린이집에 일이 생겨서 며칠째 폐원 상태인데 어린이집 대표까지 나서서 강지찬과 정유진에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선 정유진은 이명자가 심장이식을 해야 한다는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지금처럼 절망하고 무력한 적이 없었다. 아이의 행방이 묘연하고 어머니의 생사도 예측할 수 없다. 어느 한쪽이라도 일이 생기면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다.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으려 할 때 강지찬이 얼른 다가가 강제로 품에 안았다.“다 내 잘못이에요, 아이도 우리 어머니도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맹세해요!”정유진은 그를 째려봤다.“맹세요? 맹세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데? 당장 아이를 만나게 해 줘요. 엄마가 내 앞에 건강하게 서 있게 해 줘요. 할 수 있어요?”강지찬의 그윽한 눈동자가 물결치는 듯했다.신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다.아무 말을 하지 않자 정유진은 갑자기 미친 듯이 그의 가슴을 쳤다.“강지찬! 당신 정말 미워 죽겠어! 내가 왜 당신을 만나서 이런 것들을 겪어야 하나고! 왜 당신을 만나게 한 거냐고!”아마 많이 급했던 모양이다. 한참을 발버둥 쳐도 그의 품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정유진은 화가 나 강지찬의 팔을 덥석 물었다.강지찬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품에 안긴 여자를 밀쳐내지 않고 물게 가만히 내버려 뒀다.강지찬은 셔츠를 입었다. 이가 셔츠를 찢지는 않았지만 그 안의 살을 물어뜯었다.잠시 후 네이비 셔츠 소매에 큼직한 핏자국이 났다. 피가 났지만 티가 많이 나지 않았다.“대표님...”장형준은 와서 제지하려다가 강지찬이 눈짓하자 멈추었다.정유진은 입이 뻐근할 때까지 팔을 꽉 물었다. 가슴속의 분노가 가라앉자 그제야 입을 뗐다.강지찬은 자신의 팔을 미처 살피지 못하고 그녀의 턱을 주물렀다.“세게 물었는데 턱은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다운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정유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강지찬은 또 그 틈을 타서 사람을 품에 안으며 달래다.“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를 찾을 거예요. 그리고 어머니도 사람을 시켜서 맞는 심장을 알아보라고 했으니 모두 괜찮을 거예요. 나를 믿으세요.”
정유진은 강지찬을 심하게 물었다. 물림 자국이 꽤 깊이 박혔다..온미정은 상처를 치료해주면서 욕을 했지만 강지찬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최근 또 누군가와 원수를 졌어? 아니면 또 어떤 여자를 건드린 거야? 연우와 할머니 중 어느 쪽이든 일이 생기면 네놈은 끝장이야. 너에게 대체 뭐라고 하면 좋을까? 정유진은 전생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너 같은 자식을 만나 이렇게 바람 잘 날 없이 사는지 몰라.”강지찬이 잠자코 있자 온미정은 손에 들고 있던 면봉으로 상처에 세게 눌렀다.강지찬은 너무 아파 온몸을 떨었다.“아픈 것은 알아? 유진이가 너를 물어 죽여야 했는데.”강지찬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병원에 계속 있을 수 없으니 유진이와 장모님, 잘 부탁합니다.”“꺼져, 꺼져. 널 보면 화가 나, 빨리 아이나 찾아. 벌써 하루가 지났어. 연우도 분명 많이 놀랐을 거야.”온미정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연우는 그가 직접 받고 기른 아이이다. 연우를 특별히 좋아했다.중환자실 밖에는 정명학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강지찬이 다가오자 그제야 일어났다.“여기는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빨리 가서 아이를 찾아.”“네, 지금 가보겠습니다.”강지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원을 나섰다.차에 오르자 강지찬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장형준이 한마디 했다.“대표님, 고남준 씨가 요즘 연회 객을 끌어모으느라 바빠 보입니다.”강지찬은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둘째네와 영감 쪽은?”“둘째 할아버지 세 식구 모두 외국에 나가 있어서 별 이상이 없습니다. 어르신 쪽은 요즘 고 사모님과 같이 외출을 거의 안 합니다. 외출도 다른 사람과 미용 약속이나 쇼핑만 하고요. 정상으로 보입니다. 강지현 쪽은 고남준을 제외하고는 평소 거의 상록수 별장에 머물러요.”강지찬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장형준에게 운전하라고 지시했다. 머릿속이 매우 빨리 돌아갔다.최근 몇 년 동안 그는 많이 수그러들었다. 비즈니스업계에서도 적을 만들지 않았다. 가장 많이 미움을 산 사람이라면 강지
강지찬은 제시간에 성원에 도착했다. 고남준도 와 있었다.강지찬을 본 고남준은 피식 웃었다.“강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아, 오랜만에 뵙는데 강 대표님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지셨어요? 몸매 유지를 잘하시네요.”강지찬은 인사할 기분도 없이 강지현을 바라봤다.“그래. 직접 왔어. 무슨 조건인데? 말해봐.”고남준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강 대표님이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으니 저는 나가서 기다릴까요? 강 대표님, 시간이 없으니 통쾌하게 결정해 주세요.”뒤에 있는 ‘강 대표'는 강지찬에게 하는 말이다. 고남준은 자기가 데려온 사람을 데리고 옆 회의실로 갔다.보아하니 오늘은 결론을 낼 작정인 것 같다.고남준이 떠나자 강지현 사무실의 분위기는 금세 긴장감이 돌았다.최의현이 웃으며 말했다.“도대체 누가 통쾌하지 않은데? 지현 씨, K그룹이 제시한 조건을 고남준 씨가 맞춰줄 수 있나요?”강지현이 뜨거운 차 한 잔을 손에 든 채 강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맞아요. K그룹과 비슷한 조건이지만 당연히 고남준 쪽이 조금 모자라겠죠.”최의현이 다급한 듯 물었다.“그럼 뭘 망설이는 거죠?”강지현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말했다.“내가 돈이 많고 적음에 신경 쓸 것 같이요?”강지찬의 눈빛이 침울해졌다.최의현이 분개하며 말했다.“무슨 뜻이에요? 처음부터 성원을 우리에게 줄 생각이 없었던 거 아니예요? 강지현 씨, 지금 우리 놀리는 거예요?”강지현은 찻잔 속 맑은 찻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처음부터 말했어요. 정유진만 있으면 된다고.”최의현은 책상을 쾅쾅 걷어찼다.“X발, 너 왜 아직도 안 죽은 거야?”그동안 최의현은 성원을 인수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고 이제 강지현만 사인하면 된다. 그런데 이 인간이 돈이 아니라 여자 얘기를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게다가 강지찬의 여자를 뺏으려 한다. 본인의 병적이고 재수 없는 꼴은 안 보이나 보다.고남준만 옆방에 있지 않았으면 최의현의 성격상 분명 강지현
최의현은 어쨌든 강지찬과 함께 자랐기 때문에 조금만 머리를 써도 상대방의 뜻을 알 수 있다.“강 대표님, 연우의 실종이 고남준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하시는 건 아니죠?”장형준도 백미러를 통해 강지찬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연관성을 생각하는 듯했다.강지찬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연우가 실종된 지 며칠이 지났어. 살아있는지도 모르고... 정말 나의 원수라면 아무 소식이 없을 수 없어.”최이현이 말했다.“강지현일 수는 있을까? 너를 협박하기 위해 연우를 데려간 것이지. 예전에 정유진을 데려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그 자식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것 같아.”강지찬이 대답했다.“강지현은 아니야. 유진 씨와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 했어. 아이로 유진 씨를 협박하려 했다면 진작 했을 거야. 아이가 유진 씨의 가장 나약한 부분인 것을 알거든. 하지만 아이를 건드리는 것이 유진 씨를 건드리는 것보다 더 본인에게 더 안 좋다는 것도 알아. 그래서 강지현은 아니야.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해.”최의현은 그 분석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우 일이 고남준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놈이 그렇게 건방지게 굴 수 있을까? 감히 우리 땅에서 내 조카를 건드린다고? 미친 거 아니야?”강지찬이 코웃음을 쳤다.“사람마다 나약한 부분이 있어. 고남준은 바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고. 성원은 분명 고남준에게 매우 중요할 거야. 자기 사업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아버지와 담판을 지으려고 하는 거야. 내 추측에는 고씨 집안에서도 틀림없이 그 남자에게 무슨 짓을 했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고남준을 이토록 미치게 하지는 않았겠지.”말을 마치고는 이내 장형준에게 지시했다.“고남준과 그 남자의 자료를 고남준에게 보내.”장형준은 즉시 사람을 시켜 움직였다.강지찬은 또 경찰서에 갔다.이명자는 이미 깨어났고 병세가 잠시 안정되었다. 다만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심장이식을 하는 것이다.정유진은 요즘 병원과 경찰서만 오가고 있다.강지찬이 도착했을 때
경찰이 CCTV를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김숙희라는 이름의 청소부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김숙희는 연우 반을 전담하는 청소부로 서른다섯 살이다. 어린아이들은 숙희 이모라고 다정하게 불렀다.물컵을 들고 교실에서 나간 연우의 모습이 CCTV에 찍혔지만 교실 밖 작은 통로는 화장실과 아이들의 실내활동실, 그리고 낮잠을 자는 곳이어서 CCTV가 없었다.연우는 교실을 나온 후에 보이지 않았다.강지찬과 정유진은 경찰을 따라 현장을 찾았다. 어린이집은 곳곳에 CCTV가 설치돼 있었다. 일부 구석과 화장실만 없었다.화장실 안은 휑뎅그렁하고 아주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어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없다.한 여경은 화장실을 한 바퀴 돌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른 반 화장실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팀장에게 보여주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다른 반 화장실에도 이런 청소 전용차가 있습니다.”그러자 뒤따르던 유치원 직원이 말했다.“이런 청소차는 학교에서 배치한 것입니다. 반마다 다 있습니다.”강지찬과 정유진은 얼른 다가가 봤다. 일부 쇼핑몰이나 마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청소차이다. 쓰레기를 수거할 수 있고 옆에 대걸레 통이 딸려 있었다.청소차는 높이가 무려 1미터가 넘는다. 의식을 잃은 아이를 충분히 안에 넣을 수 있었다.CCTV를 확인한 사람이 CCTV를 캡처 화면을 보여줬다.김숙희는 청소차를 끌고 유치원 내 운동장을 차분히 가로질러 유치원 후문으로 직행하는 모습이 포착됐다.그러자 직원이 말했다.“후문 밖은 어린이집 쓰레기 처리장입니다. 매일 아침 청소차가 와서 쓰레기를 싣고 갑니다.”그러니까 김숙희가 방과 후 청소차를 끌고 다니며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평범한 행동이라는 것이다.이 시각 유치원에서는 연우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난리가 났다.CCTV를 보던 정유진은 당장이라도 미칠 것 같았다.“아이가 청소차 안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그렇게 앳되고 어린 연우가 쓰레기처럼 청소차에 버려졌다
강지찬은 연우의 실종이 어쩌면 고남준이 관련이 있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조금 전의 통화를 통해 이 모든 것이 고남준의 소행임을 확신했다.고남준이 한 짓이니 적어도 사건의 발단은 확실히 그와 관련이 있다.정유진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나도 방금 확인...”“어떻게 할 예정이에요?”정유진이 물었다.강지찬은 어리둥절해졌다. 상대방의 표정이 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솔직히 말했다.“고남준의 비밀을 손에 넣었어. 연우와 맞교환할 생각이야.”“그 다음엔요?”정유진이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강지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정유진은 앞으로 몇 발자국 나와 강지찬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러고 나서 다 잊고 고남준과 협력하려는 거예요?”비즈니스 부분에서 강지찬은 고남준과 싸울 생각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자신의 의심을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만약 그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바랐다.어쨌든 고남준의 배후에는 서경시의 고씨 집안이 있었고 K그룹도 서경시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하지만 정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정유진은 강지찬의 비즈니스 스타일에 늘 이견이 있었다. 강지현 외에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해결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정유진은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강지찬은 경찰서에서 싸우고 싶지 않아 그녀를 다독였다.“이 일은 나에게 맡겨. 걱정하지 말고. 연우는 무사히 돌아올 거야.”말을 하면서 정유진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댔다.하지만 상대방은 이내 손을 뿌리쳤다.“무사할 거라고요? 벌써 5일이나 지났어요. 연우가 완전히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마주하면 마음속에 트라우마가 남을지 걱정은 안 돼요? 얼마나 무서울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그리고 우리 엄마는 아직도 병원에서 심장이식을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다고요. 만약 적당한 심장이 없으면 병원에서 나오지 못할 거예요!”자신을 아껴주는 엄마가 이대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유진은 당장이라도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최신애는 건강상의 이유를 대면서 임유희더러 온씨 저택에 머물라고 했다.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온유한과 자주 부딪히면서 정을 쌓으라는 것이었다.일찍 최신애의 이런 수법을 경험한 온유한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어머님이 편찮으시니 저도 남아서 모실게요.”현채영이 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람 많으면 시끌벅적한 게 좋지 뭐. 우리 어머니도 시끌벅적한 거 좋아하니까 승낙할 거야.”최신애는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싸늘하게 말했다.“아니야. 유희만 있어도 돼.”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어려워하지 마세요. 임유희 씨는 일도 나가야 하잖아요. 저는 시간이 많으니 어머니와 같이 쇼핑도 하고 꽃도 기를게요. 모르시겠지만 제가 차도와 꽃꽂이, 그리고 장기까지 다 배웠어요. 참,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칠 줄 알아요. 답답하시면 피아노 한 곡 쳐 드릴게요.”최신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뻔뻔한 여자는 처음이라 최신애는 순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유한은 최신애가 뭐라고 하기 전에 옆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를 내렸다.“뒤에 있는 두 객실을 치워 주세요. 당분간 임유희 씨와 현채영 씨가 묵을 거예요.”하인은 최신애의 눈피를 살폈고 최신애는 이내 화를 냈다.“온유한,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온유한이 최신애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니면 채영이는 나와 같은 방 쓰게 할까요?”“너 정말!”최신애가 임유희를 집에 남겨두겠다고 하는 한 온유한도 현채영을 집에 남겨둘 것임을 주위 사람들은 이내 알아챘다.최신애는 화가 났지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의 부모님은 화가 나서 밥도 먹지 않고 가버렸지만 임유희는 온유한의 집에 남겨 뒀다.결국 최씨 가문 사람들만 온씨 저택에 남아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최신애는 여전히 최금성이 온유한을 설득하기를 바랐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형더러 와서 나를 타이르라고 하는 거야?”최금성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몰라.”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
3년 후.밖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오늘은 그나마 이른 편이다.문이 열리더니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하인이 얼른 가서 그의 손에 있는 차 키 등을 받은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도련님, 사모님이 아직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오늘 저녁, 온유한은 평소보다 덜 취했기에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어머, 온 여사가 나를 기다린다고?”비틀비틀 걸어간 온유한은 실크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 그를 노려보는 최신애를 발견했다.“온 여사님, 오늘 또 나를 혼낼 건가요?”‘온 여사'라는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났다. 온유한이 강지아와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또 술 마신 거야? 온유한, 넌 서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흉부외과 의사였어. 기억나?”“의사?”온유한이 허탈하게 웃었다.“메스를 든 지가 언제인데요? 3년 전 일이에요.”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 최신애는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기억하고 있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해 놓고 여자 때문에 너 자신을 다 망치다니.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이게 다 온 여사 덕분이잖아요?”온유한이 최신애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지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다시 수술 못 하는데 그래도 지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팠다.“너 정말!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너 스스로를 망친 거야? 미쳤어?”“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온유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왼쪽 손을 최신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주 멀쩡해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고요. 아들이 이런 모습이어도 잘난 척할 건가요?”‘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애가 온유한의 뺨을 후려갈겼다.“개자식,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3년이 지났다.그 사이 강지아는 여러 번 돌아왔지만 온유한을 만나주지 않았다.처음에는 미친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