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 입찰 당일이 다가왔고, K그룹은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며 입찰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이 두 프로젝트를 위해 프로젝트 부서는 반년 동안 바쁘게 움직였고 정유진 역시 뒤늦게 합류하고 두 달 동안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따내자, K그룹의 모든 사람들이 매우 흥분했다.저녁에는 K그룹 맞은편의 호텔에서 축하 연회가 열렸다.정유진은 사람들과 함께 떠나지 않았다. 이런 행사에는 반드시 강지찬과 함께 참석해야 했다.두 사람은 늦게 도착해 오래 머물지 않고 일찍 떠났다.강지찬이 곁에 있으면 모두가 즐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직원들을 배려하여 프로젝트 책임자와 몇 잔 마시고는 정유진을 끌고 자리를 떠났다.임우연은 이미 다른 곳에 그들을 위한 장소를 예약했다. 도착해보니 장소 전체를 빌리고 양초며 와인이며 이미 준비되어 있을 만큼 과장되었다.정유진은 멍하니 입구에 서 있었다. 레스토랑은 조명이 비교적 어두워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했다.“멍해서 뭐 해, 빨리 와서 앉아.”강지찬은 의자를 빼며 정유진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정유진은 약간 어리둥절했다.“임우연에게 이렇게 준비하라고 시켰어요?”“아니, 걔가 자기 마음대로 준비한 거야. 나는 그냥 너랑 밥 한 끼 같이 먹고 싶었던 것뿐이야.”강지찬은 무심하게 말했다.정유진은 불편한 마음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자리에 앉은 후 레스토랑 매니저가 와서 주문을 도와주었다.강지찬은 바로 풀 코스를 시켰다.그가 오늘 기분이 좋다는 것이 티가 났다.요리가 차례대로 나오기 시작하지 강지찬은 사람을 시켜 와인을 두잔 따르게 했다.두 사람의 기억 속에서 이렇게 둘이 밥을 먹은 적은 없는 것 같았다.최소한 강지찬이 보기에는 둘이 마치 데이트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런 느낌이 좋았다.정유진 역시 강지찬의 성격이 정말 변했다고 느껴졌다. 그녀가 변호사를 찾아 이혼 소송을 준비하려던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따지지 않았다.“오피스텔은 찾았어?”정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인테리어 시작됐어
강지현의 모습에 정유진은 깜짝 놀랐다.“왜요? 어디 아파요?”“아니요, 어제 회식 때문에 술을 마셔서 잠을 잘 자지 못하였어요.”정유진의 시선에 거지로 감싼 손에 머무른 것을 보고 주먹을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어제 치우다가 유리에 긁혔어요. 별일 아니에요.”정유진이 말을 했다.“아프면 집에서 쉬어요. 몸이 좋아졌을 때 그림을 골라도 늦지 않아요.”강지현은 손에 든 티켓을 흔들며 말했다.“전시회는 절 기다리지 않아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에요.”정유진은 오랫동안 국내에서 전시회를 보지 않았다. 이번에 돌아오고 나서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스펙타클한 반년을 지내왔다.전시회를 기획한 화가는 국내에서 이름을 꽤 알렸다. 강지현의 눈에 들어온 유화는 3억이 넘었다는 작품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주문했다.두 사람은 한 바퀴 둘러보고 그림을 사고 바로 떠났다.여기는 상록수 별장과 멀지 않았기에 강지현은 정유진을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려 했다.정유진이 조금 망설였다. 그녀는 오랜만의 휴일이라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강지현이 말을 꺼냈다.“이미 저녁 식사 준비하라고 지시했어요. 조금 있다가 기사님한테 아저씨, 아주머니를 태우고 와서 같이 식사라도 해요.”이렇게 말하자 정유진은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강지현의 집에 도착하니 매우 조용했다.정유진은 마음속으로 의구심이 들었다. 음식을 대접한다고 해놓고서 주방에 아무런 소리가 없고 하인들도 여유로워 보였다.정유진도 묻기에 애매했다. 그 찰나에 강지현이 물을 갖다주었다.정유진이 깼을 때 차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는데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그녀는 뒷좌석에서 일어나 운전 중인 강지현을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강지현이 물에 약을 탔다. 그녀는 그 물을 마시고 그와 대화를 나누다 점차 잠에 들었다.“깼어요?”강지현이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정유진은 방금 깬 탓에 몸이 아직 나른했다.“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모르겠어요.”강지현이
“오빠, 노인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대?”그녀와 강홍식은 사이가 평범했다. 아마 강지찬과 강홍식의 사이만도 못했을 것이다.강지찬은 온 강씨 집안의 책임을 떠안고 있었지만, 강수아는 아니었다.“모르겠어.”강지찬은 짜증이 밀려왔다.강홍식은 미소를 지으며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다가오는 어머니 기일에 대해 무슨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불렀어.”남매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눈에서 의아함을 내비쳤다.올해가 10이 끼는 것도 아닌데 무슨 계획이 있겠는가? 예전처럼 남매가 묘지에 가서 인사만 하고 오면 되는 거 아니었나?강홍식은 이때까지 한 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강지찬은 아버지를 차갑게 바라보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강수아는 입이 빨라 이미 말을 한가득 늘어놓았다.“노인네 이런 건 왜 물어요? 갑자기 양심이라도 찔려서 엄마한테 용서를 구하고 싶은 거예요?”강홍식의 표정이 변하며 어색하게 기침했다.“그냥 물어보는 거야.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집사한테 준비하라고 하려고.”강지찬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10년 동안 묻지도 않더니, 올해는 갑자기 생각나셨나 봐요? 드문 일이네요.”강홍식은 이런 것을 물을 생각을 못 했는데 고세연이 물어보라고 시켜서 묻는 것이었다.강지찬이 배 속의 아이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기에 이런 방식으로나마 관계를 완화하려던 것이었다.강지찬은 이 노인네가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챘다.이 사람은 팔자가 좋아서 평생 자기가 직접 신경 써서 일을 처리할 줄 몰랐다. 비위를 맞추는 것도 제대로 못 한다니.참 부러울 지경이었다.강지찬은 콧방귀를 끼며 차갑게 말했다.“저희 엄마 일에 대해 당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감히 저희 엄마를 앞세우지 마세요. 그럴 자격이나 있어요?”이 말은 너무나도 직설적이었고 강홍식은 머리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크게 분노하며 말했다.“네 이놈의 자식, 아버지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너희들 눈에는 아직 내가 친아버지로 보이기는 해?”강수아는 입을 삐죽거리며
지도를 보니 앞에 휴게소가 있어 정유진이 말을 꺼냈다.“앞에서 잠깐 세워줘요. 화장실 가고 싶어요.”강지현은 의외로 순순히 정유진의 요구를 들어주었다.“좋아요.”한밤중인 데다 명절도 아니었기에 휴게소에는 차가 적었다.정유진은 화장실에 갔는데 핸드폰이 없었다. 강지현에게 빼앗겼거나, 강지현 집에 떨어뜨렸거나 둘 중 하나였다.원래 다른 사람에게 휴대전화를 빌려 전화하려던 참이었지만 여자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녀는 한참 동안 기다리다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강지현은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언제부터 담배 피웠어요?”강지현은 기나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꽤 됐어요. 근데 자주 피지는 않아요.”정유진이 말했다.“꺼요. 원래 몸도 안 좋은데.”강지현은 그녀를 그윽이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좋아요.”강지현은 바로 쓰레기통 쪽으로 가서 담배를 껐다.“배고프죠. 멀지 않은 곳에 도시가 있으니 오늘 밤은 거기서 지내요.”정유진은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차가 서울과 이미 몇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강지현은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잡았다.스위트룸은 침실이 두 개였지만 정유진은 여전히 불편함을 느꼈다.강지현은 정유진이 좋아하는 것들로 호텔 측에 야식을 주문했다.그는 정유진에게 국을 떠주며 말했다.“유진 씨, 우리 한번 해봐요.”정유진이 얼어붙었다.“뭘 해봐요?”강지현은 침착하게 자신의 국을 뜨며 말했다.“저와 함께 있는 순간을 느껴봐요. 강지찬이 연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할 수 있는지 봐요.”“지현 씨...”정유진은 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대체 무슨 뜻이에요? 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제가 하고 싶었던 건 항상 분명했어요. 전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이번에는 강지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다.그는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늘 좋은 사람인 척만 해서는 정유진의 마음을 살 수 없었다.“유진 씨, 당신이 지금 또 강지찬에게 마음이
정유진은 문을 열지 않고 문틈으로 밖에 있는 강지현에게 말했다.“자려던 참이에요. 무슨 일 있으면 내일 얘기해요.”밖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정유진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가 침대에 눕자마자 방문이 열리고 강지현이 걸어들어왔다.정유진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강지현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항상 온화하고 예의 바른 신사의 이미지였기에 이런 무례한 짓을 저지를 거라고는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그는 잠옷 차림에 버리는 반쯤 말라 전체적으로 금욕적인 분위기가 풍겼다.옆의 매트리스가 갑자기 움푹 꺼지면서 정유진은 충격에서 정신을 차렸다.그녀가 일어나기도 전에 강지현의 팔이 그녀를 감싸며 베개로 눌렀다.“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요!”정유진의 두피가 저릿해나며 마치 겁에 질린 작은 동물처럼 도망가고 싶을 뿐이었다.강지현은 갑자기 뒤이어서 그녀를 지그시 품으로 끌어안았다.“유진 씨, 저희 해보기로 했잖아요.”정유진은 머쓱하면서도 두피가 저릿해 왔다.“저는 당신과 해보고 싶지 않아요. 전 이때까지 당신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알아요.”강지현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심취해서 말했다.“근데 이렇게 빌게요. 나에게도 기회를 줘요. 절대 당신에게 다른 걸 강요하지 않고 이렇게 안고만 있을게요, 네?”정유진은 분노에 몸을 떨며 말했다.“강지현 씨, 미쳤어요?”그녀는 강지현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강지현의 손과 발이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다.“유진 씨, 움직이지 마요.”몸 뒤의 남자는 숨이 거세지며 헐떡였다.“내가 당신을 몇 년이나 원한 거 알잖아요. 아직 이성이 남아있을 때 제발 움직이지 마요.”정유진은 마치 벼락에 맞은 듯이 더는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움직이지 않았고 강지현도 움직이지 않았고 두 사람은 얼어붙은 채로 있었다.잠은 못 잘 게 뻔했다. 정유진은 계속 눈을 뜨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강지현의 숨이 고르러 지고 정유진이 움직이자마자 강지현의 팔은 마치 의식이 있는 듯이
한바탕 찾아본 후, 강지찬은 정유진이 어젯밤부터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강지현도 함께 사라졌다.대표의 안색이 안 좋아지자, 경호원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장형준은 대표님의 안색을 무릅쓰고 보고를 진행했다.“사모님과 강지현 씨가 그림 전시회를 본 후 상록수 별장으로 향했는데, 그 후로부터 사모님과 강지현이 나온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해수가 사람을 데리고 상록수 별장으로 가서 물었는데, 사모님과 강지현 씨는 안 계신다고 했답니다.”이미 점심쯤 되었는데 정유진이 계속 상록수 별장에 머무를 리가 없었다.게다가 강지현은 이미 정명학과 이명자 쪽에 미리 말을 마쳤기 때문에 이 사건은 강지현이 미리 계획해 둔 것이라는 뜻이었다.강지찬은 이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4년 전 강지현과 함께 떠났던 정유진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또다시 물밀듯 밀려왔다.“정유진, 네가 감히?”이때, 경은우가 찾아왔다.“형님, 형수님이 또 사라지셨어요?”강지찬은 얼굴을 굳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분위기는 매우 침울했다.장형준은 하는 수 없이 말했다.“대표님, 제가 생각하기에, 이 일은 매우 수상쩍습니다. 사모님이 이미 사무실 계약까지 마친 것을 봐서는 분명히 회사를 확장하려는 것입니다. 근데 이런 때에 굳이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습니다.”경은우도 서둘러 말했다.“맞아요. 그리고 형수님이 이미 현 변호사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이혼 소송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떻게 강지현이랑... 형님, 이건 다 강지현이 벌인 소동일 수도 있어요.”강지찬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말들이 귀에 들어갔을는지도 모른다.경은우는 말을 덧붙였다.“사람을 찾아야 해요. 장형준과 부하들만으로는 절대 못 찾아요. 아무래도 경찰 쪽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장형준은 연이어 머리를 끄덕였다.“신고를 하지 않으면 CCTV 확인하기가 좀 번거롭습니다.”강지찬은 장형준을 흘겨보고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신고해. 내 아내가 실종됐다고.”장형준
고세연은 무의식적으로 배를 막으며 강홍식의 뒤로 몸을 숨겼다.그녀는 강지찬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마치 그가 배 속의 아이를 쳐다보면 아기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거실에는 섬뜩한 정적이 흘렀고 강홍식은 꾸짖고 싶었지만 자신마저도 강지찬의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첩을 대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결국 강홍택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지찬아, 말이 심했다. 우리 모두 가족인데, 어디로 나간다는 말이냐? 수아가 말한 유진이가 실종됐다는 일은 지현이랑은 상관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자꾸나. 내가 지금 지현이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마.”말을 끝내고 강홍택은 휴대전화를 꺼내 강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전원이 꺼져있었다.강홍택은 점차 마음이 불안해지며 굳은 미소를 지었다.“전원이 꺼져있네. 지현이도 요즘 꽤 바쁜가 봐.”이 말은 믿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한낮이고 평일인데, 전원이 꺼져있다고?류선도 마음이 불안해졌다. 강지현은 얼마 전 금방 구소원이랑 사이가 어긋났는데 요즘 코빼기도 안 보이고, 설마 정말 정유진 그년을 납치한 건가?그 생각에 류선은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사실이라면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강지찬은 그렇다 쳐도 바깥사람들이 뭐라고 수군대겠는가?형수를 납치해서 도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강지현은 끝장이었다.아니, 안돼. 이 일은 절대 아들이 짊어져서는 안 돼.류선은 그렇게 많이 따질 처지가 못 되자 다리를 치며 울부짖었다.“정유진이 또 사라지고 우리 아들 전화도 안 통하네. 지찬아, 내가 정유진 그 여자가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잖니. 이것 봐라, 계속 도망 다니는 것 좀 봐라. 네 체면을 바닥에 깔아뭉개는 것도 유분수지. 우리 지현이마저 나쁜 물 들이고. 이걸 어쩌면 좋니. 이후에 우리 강씨 집안이 어떻게 서울에서 입지를 다지겠니. 사람들이 수군거릴 게 뻔하다 뻔해.”강홍택은 류선을 힐끔 쳐다보면서도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지금 정유진과 강지현이 함께 실종되어 둘째 집안이
강수아는 생각할수록 강홍식과 고세연의 행동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그녀는 다가가 고세연의 손을 잡고 강홍식의 뒤에서 그녀를 끌고 나왔다.“당신이 한 거죠?”강홍식은 정유진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옆에서 바람을 넣지 않는 한, 절대 강지찬에게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세연은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얼굴에는 두려움으로 가득했다.“수아야, 그게 무슨 말이야? 잘 모르겠어, 손 놓아줘.”말하며 강홍식에게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영감!”강홍식은 강수아를 가리켰다.“너 얼른 손 떼. 배 속의 아이한테 문제라도 생기면 절대 가만 안 둬!”강수아는 강홍식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고세연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작은오빠랑 무슨 합의 봤어요? 흥, 저번에 언니가 납치될 때도 당신 흔적이 있었어요. 오빠가 추궁하지 않는다고 마음 놓지 마세요. 언젠간 끝장을 볼 테니까요.”고세연은 마음이 불안해졌지만, 표정은 점점 억울해 보였다.“수아야, 난 억울해. 정말 내가 한 게 아니야.”“그런지 아닌지는 당신이 말한 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강수아도 그녀에게 구역질이 나 고세연을 한쪽으로 내던졌다.할 말은 이 꼬맹이가 다 했기 때문에 강지찬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온 강지찬은 안색이 조금 되돌아왔다.원래 화가 너무 나서 정유진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아까 강수아의 분석을 듣고 좀 진정이 되었다.둘이 촛불 만찬을 즐긴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정유진이 그를 대하는 태도도 분명 좋아졌는데, 갑자기 실종될 리가?그리고 그녀의 새 회사도 아직 인테리어 중인데, 일편단심으로 사업에 임하는 그녀가 어렵게 쌓아온 시장을 내버려두고 도망갈 리가 없다.온유한도 말했다.“이번 형수님이 실종된 일은 정말 수상해요. 조사를 꼼꼼히 하고 나서 다시 말하죠.”경은우도 덧붙였다.“이번 일은 다 실마리가 있어요. 형수님이 이혼 소송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아마 강지현이 자극받았을 거예요. 그리고 요즘 형수님과 형이 다시 같이 일하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임유희 부모님의 안색도 매우 어두웠다.임유희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3년 동안 좋아했던 온유한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온유한은 주위 사람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현채영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온씨 집안 하인들도 현채영을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근우가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 집 사람들은 내 딸이 안중에도 없나요?”최신애가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긴 했지만 임근우가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온혁진은 참을 수 없었다.애초에 임씨 가문이 대놓고 온씨 가문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더라면 온씨 가문은 임씨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 모든 일은 최신애가 저지른 것이었기에 온혁진은 최신애에게 이 난장판을 넘기고 본인은 찻잔을 들고 빠져나왔다.최씨 가문 식구들도 마찬가지로 좌불안석이다. 보다 못한 최금성의 엄마 황은숙이 최신애를 도와 상황 수습에 나섰다.타이르고 위로하느라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임유희가 일어서더니 온유한에게 다가갔다.그나마 안색은 조금 전에 비해 한결 누그러졌다.“유한 오빠, 나가서 얘기 좀 해요.”온유한이 다리를 꼰 채 말했다.“우리가 할 얘기가 있나? 그리고 그쪽과 같이 나가면 우리 채영이가 질투할 거야.”옆에 있던 현채영이 한마디 했다.“가봐, 질투 안 할 테니.”온유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정말 질투 안 할 거야?”현채영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내가 질투할지 말지는 가보면 알 거 아니야?”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임유희를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주먹을 꽉 쥔 임유희는 기가 막혀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임유희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죠? 날 난처하게 하고 어머니와 맞서는 이유, 다 강지아 씨 때문이죠?”온유한은 피식 웃었다.
온유한이 일부러 맞서는 것을 최신애는 알 수 있었다.어젯밤에 온유한에게 보여주려 했던 사진을 그의 앞에 던지며 말했다.“그럼 네 눈으로 봐! 이 여자와 결혼할 거야?”온유한은 힐끗 보고 말했다.“안 될 것도 없죠.”“개자식아! 너 요즘 이런 여자와 어울리느라 매일 늦게 들어온 거야? 집안 상황을 몰라서 그래?”“그래서 뭐요?”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현씨 가문이 지금은 파산했지만 예전에 잘나갈 때는 가장 바랐던 며느릿감 아니었어요?”“예전은 예전이고! 예전에는 현씨 가문 딸이었지만 지금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여자야. 그때와 지금이 같아?”온유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어요.”“무슨 뜻이야?”최신애는 순간 멍해졌다.“설마 진짜로 데리고 올 것은 아니지?”“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당연히 안 되지!”최신애는 화가 나서 테이블을 쳤다.“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여자를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일 수는 없어. 잘 들어, 오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 오늘 유희와 결혼 날짜 잡을 거야. 이것은 임씨 가문에 대한 우리의 약속이기도 해. 잊지 마. 임씨 가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온씨 가문도 없었을 테니.”“그래요?”온유한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온씨 가문과 강씨 가문의 인연을 끊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런데 지금 나더러 임유희와 결혼하라고요? 내 인생이에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쉽게 말을 들을 사람처럼 보여요? 순진하네, 온 여사. 더 이상 강요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밥도 먹지 않은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한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저녁 식사에 그녀는 온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최씨 가문 사람들까지 초대했다.최신애는 온유한을 설득하기 위해 최금성도 불렀다.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도착했지만 온유한만 오지 않았다.최신애는 끊임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
3년 후.밖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오늘은 그나마 이른 편이다.문이 열리더니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하인이 얼른 가서 그의 손에 있는 차 키 등을 받은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도련님, 사모님이 아직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오늘 저녁, 온유한은 평소보다 덜 취했기에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어머, 온 여사가 나를 기다린다고?”비틀비틀 걸어간 온유한은 실크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 그를 노려보는 최신애를 발견했다.“온 여사님, 오늘 또 나를 혼낼 건가요?”‘온 여사'라는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났다. 온유한이 강지아와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또 술 마신 거야? 온유한, 넌 서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흉부외과 의사였어. 기억나?”“의사?”온유한이 허탈하게 웃었다.“메스를 든 지가 언제인데요? 3년 전 일이에요.”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 최신애는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기억하고 있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해 놓고 여자 때문에 너 자신을 다 망치다니.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이게 다 온 여사 덕분이잖아요?”온유한이 최신애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지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다시 수술 못 하는데 그래도 지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팠다.“너 정말!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너 스스로를 망친 거야? 미쳤어?”“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온유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왼쪽 손을 최신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주 멀쩡해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고요. 아들이 이런 모습이어도 잘난 척할 건가요?”‘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애가 온유한의 뺨을 후려갈겼다.“개자식,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3년이 지났다.그 사이 강지아는 여러 번 돌아왔지만 온유한을 만나주지 않았다.처음에는 미친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
서원준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강지아는 2층 창문에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서원준은 일부러 한마디 했다.“그만 봐, 서울로 올라갔으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봐. 효자 노릇 하러 갔어.”창가에 가만히 서 있던 강지아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서원준, 밖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싶어.”서원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한편, 온유한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최신애는 이미 태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혈압 때문에 쓰러지면서 건물에서 떨어져 발목을 삐끗했고 골반 뼈가 부러졌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임유희가 그녀의 병실에 함께 있었다. 온유한은 병실에 들어오기도 전에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온유한이 코트를 손에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유한 오빠, 왔어요?”임유희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고 최신애도 마음이 뿌듯했다.시간을 계산해보니 그녀가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온유한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이 말인즉슨 친정엄마에게 일이 생기면 강지아도 제쳐두고 달려온다는 것이다.“거기 서서 뭐 해, 다리가 아직 안 나았잖아. 무리하지 말고 와서 앉아. 밥은 먹었니?”최신애의 말에도 온유한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웃고 떠드는 최신애를 보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장 주임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온유한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병실을 나가자 최신애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점 굳어졌다.“유희야, 봤니? 내가 미워서 저래.”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너희들을 맺어주려고 온씨 가문 사람들의 미움을 샀어. 나중에 우리 온씨 가문에 들어오면 이 시어머니께 효도해야 한다.”그 말에 임유희의 볼이 빨개졌다.“어머니. 유한 오빠가 어떻게 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오빠도 돌아왔으니 제가 더 노력할게요.”“역시 똑똑한 유희, 너무 마음에 들어.”최신애는 흡족해했다.최신애에게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온유한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온 선생님이 또 오신 것 같아요.”동하민이 강지아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정유진에게 말했다.“오지 말라고 전해, 지아는 만나지 않을 거야.”“네.”문에 기대어 서 있는 온유한은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온 선생님, 대표님이 온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동하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한은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마당의 나무 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는 강지아를 덥석 껴안았다.순식간에 몸이 굳어진 강지아는 코끝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지아야, 나도 이쪽에 집을 하나 샀어. 너만 괜찮으면 내가 여기에 와서 너와 같이 살게. 어때?”“이거 놔!”온유한은 강지아가 몸부림칠수록 더 꽉 껴안았다.깜짝 놀란 동하민은 얼른 다가와 온유한을 잡아당겼다.“온 선생님, 대표님 상처가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자극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동하민의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일부러 기억 잃은 척한다는 거 알아. 지아야, 나 진짜로 임유희와 아무 일도 없었어.”강지아는 몸부림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뭐? 이제 와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어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수모를 당했는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우리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나는 나야!”온유한이 다급히 소리쳤다.“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나에게 벌을 주지 말아줘.”“그건 오빠 엄마야!”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강지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그래서 우리 엄마 때문에 지금 나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강지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온유한, 이러면 우리 서로만 괴로워. 그만하자.”“하...”온유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네 마음속에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로운 거였구나.”강지아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여긴 왜 왔죠?”이때 멀리서 온유한을 발견한 서원준은 그와 싸우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