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찬이 일부러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이 차단당했다는 걸 알고 일부러 저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정유진은 그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귀한 블랙 카드의 비밀번호가 이토록 쉽게 설정된 것일까?어쩔 수 없이 다시 이 사람을 차단 상대에서 옮겼고 휴대폰 번호 뒤 6자리를 입력했다.그 결과에 유진은 멍해졌다. “...”실제로 비밀번호가 맞았다.강지찬은 계약서를 보지도 않아 인테리어 비용조차 모르는 채로 계약을 마치고 모든 금액을 지불했다.그래, 부자한테 이 오십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귓가에는 강지찬의- 차가운 말이 들렸다.“벌써 세 번째네요, 다음번에 정 사장님에게 연락할 때 연락이 통했으면 좋겠어요.”“...” 역시 일부러 저런 것이다. 듣기에도 살짝 미묘한 말이었고 하필 예원이도 일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었다.“저기, 계약서도 마무리했으니 앞으로의 공사는 저와 시공부서 부장님이 함께 책임지겠습니다. 한 부장님, 이쪽으로 와서 시공 관련 사항에 대해 논의하시죠.”한 부장은 기다렸다는 듯 예원을 따라 시공부서 부장의 사무실로 향했다.예원은 한술 더 떠 유진에게 당부했다.“유진아, 방금 캡슐이 도착했던데, 대표님에게 커피라도 내려드려.” 그러고는 강 건너 불구경 하는 키키도 내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어제 옷값을 돌려줬으니 앞으로는 어떠한 일로도 엮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강지찬의 번호가 어느새 또다시 휴대전화에 저장돼있었다.사람이 없어지자 강지찬은 본모습을 드러냈다.“다시 날 차단한다면 어떻게 응징할지 기대해요.”협박을 가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당당하게 물었다.“당신 사무실은 어디죠?”정유진은 자신의 심정을 명확하게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이 남자만 보이면 왠지 모르게 짜증이 밀려왔다.“전 마음이 바르지도 못한 여자인데, 왜 저랑 계속 협력하는 거죠?”강지찬은 그녀를 한 눈 보더니 계속 그녀의 사무실을 찾았다.“도대체 어디에요
정유진은 강지찬 덕에 화가 폭발할 것 같았다. 이토록 뻔뻔하고 무례한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저리 비켜요, 사람 부르기 전에!”강지찬은 비키기는커녕 문까지 걸어 잠갔다.“불러요, 신경 쓰지 않으니까.”정유진은 화가 나 호흡이 거칠어지며 두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아까부터 쭉 그녀의 입술에 고정됐던 강지찬의 시선은 어느샌가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깨달은 정유진은 그대로 강지찬을 차버리고 싶은 생각이었다.“변태예요? 뭔 생각 하는 거예요?”강지찬도 유진을 더는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결국, 한발 물러나 유진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뭘 무서워해요, 여기서 당신을 안을 만큼 미치진 않았거든요.”정유진은 문을 열고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하지만 강지찬은 의자 하나를 끌어오더니 그대로 앉으며 말했다.“화내지 말아요, 날 화나게 했으면서, 내가 좀 놀리는 건 안 돼요?”유진은 생각할수록 미친놈이라는 생각에 대꾸했다.“내가 언제 화나게 했죠?”강지찬은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쳐다보며 답했다.“어제, 4번이나요.”“...” 도대체 누가 누굴 화나게 했단 말인가?강지찬은 하나하나 예를 들어가며 유진에게 설명해줬다.“첫 번째는, 나 몰래 다른 남자한테 꼬리친 거.”정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누구한테 꼬리를 쳤다고 그래요? 아니, 내가 다른 남자한테 꼬리를 치든 말든 당신이랑 아무런 상관도 없거든요!”강지찬은 말을 이었다. “둘째는, 일부러 대꾸하면서 날 화나게 한 거.”“...” 정유진은 더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세 번째는, 옷값을 돌려준 거. 나 강지찬이 한번 선물한 물건을 다시 돌려받는 건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서요.”“..”“네 번째는, 또 나를 차단한 거.”정유진은 이제 깨달았다. 지찬의 눈에 유진이 얼마나 괴롭히기 좋았으면 집요하게 그녀만 잡고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또 있어요? 한꺼번에 말해요.” 말하고 당장 꺼지라는
또 대화가 싸움으로 번졌다.어찌 됐건 강지찬은 그녀의 고객이었으니 정유진은 친히 그를 배웅해줬다.지찬이 차에 오르려고 하자 유진이 그제야 말을 꺼냈다.“지아는 고세연 씨가 꼬집은 거에요. 제가 직접 봤어요.”강지찬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깊고도 차가워 보였다.어르신이 고세연을 점 찍어둔 며느릿감이라 했으니 이 사람의 여자친구겠지?어찌 됐건 유진의 말은 사실이었으니 믿고 말고는 지찬에게 달려 있었다.지아 생각에 정유진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덧붙였다.“지아를 위해 제일 호화로운 요양원을 지어주면서 왜 좀 더 같이 있어 주지 않나요? 어떻게 지아 옆에 붙인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란 걸 확신할 수 있죠?”강지찬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더니 물었다. “날 의심하는 건가요?”정유진은 그의 오만한 태도를 가장 싫어하는 터라 그대로 반문했다.“의심하면 안 되나요? 당신이 한 모든 말과 내린 모든 결정이 옳은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내가 고세연을 지적한 게 못마땅해서겠지? 여색을 즐기지 않는다던 소문은 역시 가짜였어.’ 유진이 생각했다.강지찬은 상당히 불쾌한 듯 답했다. “당신이 참견할 정도는 아니에요.”말을 마치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떠나버렸다.강지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유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유진은 강지찬이 조금은 무서웠다.형준도 유진의 말을 듣고는 지찬에게 물었다. ”대표님, 요양원으로 갈까요? 자택으로 갈까요?”강지찬이 목소리를 낮추며 답했다. “요양원으로 가.”오빠가 또 오자 지아도 몹시 기뻐했다. 강지찬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차갑지 않은 말투로 얘기했다.“약 잘 먹었어?”“다 나았다니까. 약 안 먹어도 돼.”강지아는 강지찬이 또 자신을 보러오자 기분이 좋았다. 고세연의 말이 맞았다. 역시 아프니 오빠가 매일 그녀를 보러 왔다.강지찬은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하는 편이었다. 보기만 해도 그리 쉬운 성격이 아니었고 수법이
예원과 신안의 한 부장이 대화를 마치자 이미 점심이 됐고 유진은 배달음식을 시켰다.“부자는 다르더라고요. 50억 원이나 되는 돈을 말 한마디에 바로 긁다니. 뭐 50만 원 긁는 것처럼 말이에요.”감탄하면서도 예원은 가십거리도 잊지 않았다.“너랑 강지찬은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 사람이 널 맘에 들어 한 거야?”정유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은 여자친구가 있어.”“그럴 리 없어!” 예원은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분명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다니까.”정유진은 살짝 멈칫했다. “...”전에 강지찬의 등장은 한빈에게 맞서기 위함이었다면 지금은?거기에다 오늘 사무실에서 한 말들까지 생각해보면...정유진은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당시에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든 강지찬 때문에 정신이 없어 그가 여자친구가 있다는 일조차 잊고 있었다.그때 예원이 테이블을 탁 내리치더니 말했다. “어머! 설마 한빈을 따라 배우려는 건 아니겠지?”정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속에서 신물이 나는 듯했다. “앞으로 만날 기회는 없을 거야. 거리를 둘거거든.”예원은 멈칫하더니 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그, 유진아, 한 부장님 말로는 이틀 뒤 신안의 착공식에 강 대표님도 오신다던데. ““...” 유진은 말문이 막혔다.강지찬이 이토록 한가한 사람이었나?k 그룹이라는 큰 회사를 운영하면서 자리에 앉아있을 필요도 없는지 의문이었다.예원은 근심 걱정이 가득한 채 물었다. “그 사람 혹시 그냥 너랑 자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지?”“꿈도 꾸지 말라고 해!”계약서에 사인도 했겠다, 금액도 지급했겠다, 이 일은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었다.그들에게는 위약금으로 물어줄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예원이 밥도 넘어가지 않는 모습에 유진이 말했다.“일은 일이니 신경 쓸 거 없어. 신안의 착공식은 좀 웅장하게 진행하자. 매체들도 참석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그 말에 예원은 또다시 흥분한 듯 물었다.“그럼 우리 작업실이 뉴스에 오르는 거야? 우리도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기에 유진은 어쩔 수 없이 강지찬과 나란히 섰다.강지찬이 살짝 몸을 돌렸고 기자가 서둘러 그들의 사진을 찍으려 셔터를 눌러댔다.사진 촬영이 끝난 줄 알고 돌아가려는 그때, 유진의 어깨가 갑자기 무거워졌다.강지찬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며 친밀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강지찬을 쳐다봤고 강지찬 역시 그녀에게 시선을 맞췄다.귀에는 앞쪽에서 들려오는 셔터음밖에 들리지 않았다.이 망할 놈의 남자가 또 무엇을 하려는 거지?강지찬이 그녀를 향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몇 장 더 찍어요.”많은 사람 앞에서 강지찬의 체면을 깎을 수는 없었는지라 유진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어깨를 잡힌 채 몇 장 더 찍을 수밖에 없었고 강지찬은 한술 더 떠 사람들을 향해 설명했다.“우리 정 디자이너는 저랑 친구 사이입니다. 기자님들 잊지 말고 사진을 제 비서에게 보내주세요.”조금 전까진 말조차 귀찮아서 꺼내지 않던 사람이 고작 사진 몇 장을 위해 입을 열다니.진짜 친구 사이처럼 간단한 관계일까?기자들의 눈빛이 번뜩이며 둘 사이의 관계가 간단하지마는 않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챘지만, 함부로 묻지는 못했다.강지찬은 평소에도 상당히 바빴고 인터뷰에 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오늘 강지찬을 인터뷰할 기회가 생긴 지라 기자들은 흥분되면서도 행여나 잘못된 질문으로 이 큰 인물의 심기라도 건드릴까 봐 조심스러운 마음이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당연히 잊지 말아야죠.”정유진은 온 힘을 쥐어짜내 꾹꾹 참고 나서야 무대 위에서 강지찬과 싸우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사진을 찍은 후 쏜살같이 무대를 내려왔고 예원이 건네주는 물을 받아 꿀떡꿀떡 마시며 정신을 진정시켰다.“갑자기 또 무슨 미친 짓인지 모르겠네.”유진은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예감으로는 지금 나가지 않으면 강지찬이 또 언제 무슨 수를 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여긴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 조금 있다가 난 먼저 가볼게.”유진의 말에 예원
강지찬은 소매를 걷더니 탄탄한 팔뚝을 드러냈다. 그가 부숴야 할 곳은 이미 표기를 해놓았고 한 무리의 기자들이 에워싸더니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다.강지찬은 망치를 들더니 쿵 하고 내리찍었고 벽에는 구멍 하나가 뚫렸다.모두 박수를 보냈고 정유진은 아무도 자신을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예원에게 눈짓하고는 몰래 자리를 떠났다.그런데 차에 시동을 걸기도 전에 조수석의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차가운 냉기가 훅 풍겨왔다.유진은 갑자기 차에 등장한 남자를 쳐다보고는 어이가 없었다.“날 피하는 거예요?” 강지찬이 당당하게 물었다.유진은 크게 심호흡하며 지금 이 사람은 손님이고 손님이 왕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아니에요, 여긴 예원이가 있으면 돼요. 전 얼른 돌아가 설계도를 만들어야죠.”강지찬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내려요, 보러 갈 사람이 있어요.”정유진은 경계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누군데요?”강지찬이 대답했다. “지아요.”지아를 보러 가는 일은 유진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왠지 모르게 매번 달콤한 목소리로 언니라 부르는 지아를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가슴이 아파왔다.지아가 살고 있는 지역은 여기서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고 유진은 차를 운전해 가기로 했다.강지찬은 그녀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만나러 가는지 묻지 않을 거예요?”정유진은 도로를 주시하느라 지찬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고 답했다.“내가 가겠다고 한 건 지아를 보고 싶었을 뿐이지 당신이랑 상관없어요.”강지찬이 눈썹을 꿈틀거렸다.한 가지 질문에 답변을 내릴 수 없었다.“수많은 여자가 내가 한 눈 봐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왜 당신만 나한테 이런 태도인 거죠?”정유진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답했다.“좋은 태도를 바라면 그 여자들이나 찾아가요. 우린 지금 협력관계인데 내가 웃음을 팔 필요가 없잖아요.”강지찬은 그런 그녀를 흘겨봤다. “나 같은 중요고객한테도 웃는 얼굴은 안 보여주는 거예요?”“...” 정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차로 이동하니
지아는 정유진이 있으니 오빠는 필요 없다는 듯 언니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놔주지 않았다. 끝까지 유진을 잡고는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고 어려서부터 게임에는 소질이 없었던 유진은 철권을 하면서도 번번이 지아에게 지고 말았다.강지찬은 그 모습을 보더니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한마디 했다.“저런 바보 같으니라고!”그러고는 유진의 뒤로 가 긴 팔을 뻗어 게임기의 스틱을 잡고는 유진을 도와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유진은 그의 품 안에 쏙 들어간 자세가 되었고 청량한 향기가 온몸을 휘감았다.그녀는 순식간에 석상처럼 굳어져 버렸고 강지찬은 그의 귓가에서 쉬지 않고 구시렁댔다.“보기에는 똘똘해 보이는데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거에요!”지찬의 얼굴이 거의 그녀의 얼굴과 맞닿아 있었고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유진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고 지찬을 바로 밀어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한 입 와구 물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말랑하고 보드라운 유진을 품에 안고 있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찬은 품속에 안은 여인이 제정신을 차릴까 봐 두려웠다.그렇게 한편으로는 몰래 상황을 즐기며 다른 한편으로는 게임을 가르쳐주는 척 연기했다.“이 두 개는 공격 버튼이고, 이건 발차기에요. 두 손을 같이 조합해서 써야죠…”옆에 있던 지아가 갑자기 입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오빠가 언니를 안았어! 앗싸!”정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강지찬을 밀어내며 펄쩍 뛰었다.그러고는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휴대전화와 가방을 찾았다.“지아야, 언니는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다음에 또 보러 올게.”강지찬은 차가운 눈빛으로 강지아를 쳐다봤다. 다 된 밥에 재 뿌리지 말라는 뜻이었다.강지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럴 의도는 아니었으니 이제라도 빨리 잡으라는 뜻을 전했다.한 편으로는 유진에게 손을 저으며 답했다.“언니 꼭 날 보러 와야 해. 보고 싶을 거야.”정유진은 다
차에 오르자 유진은 그제야 자신이 또 강지찬 때문에 화가 나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발견했다.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았고 속에 있던 말들을 내뱉으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 것 같았다.강지찬이 앞으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신안의 계약 건은 다시 회수하려면 회수하라고 생각했다.지금 그녀에게는 그와 씨름할 기분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시간이 꽤 늦었고 회사도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유진은 엄마에게 미리 전화를 걸어 돌아가서 밥을 먹겠다 전하고는 가는 길에 잘 볼 거리가 있는지 물었다.이명자는 전화 반대편에서 기분 좋게 대답했다.“장 볼 필요 없어, 아빠랑 이미 다 사놨거든. 지금 만두를 빚고 있어, 마침 오는 길이네.”한빈과 헤어진 후 엄마아빠는 전보다 더 홀가분해진 듯한 느낌이었다.집에 도착하자 둘은 아직 만두를 빚고 있었다.명자는 주방에서 물을 끓이며 말했다.“방금 네 아빠랑 120개 정도를 싸서 얼려놨어. 내일 예원이한테 갖고 가.”“알겠어요.” 유진은 실내화로 갈아신으며 명자의 몸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그 모습에 명학이 웃으며 혼냈다.“다 큰 애가 몇 살이라고, 얼른 내려와,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명자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평소와 다른 유진의 기분을 알아챘다.“왜? 무슨 일 있어?”유진이 다급히 웃으며 답했다.“아니에요, 요즘 좀 바빠서 그래요. 요양원은 오늘 착공식을 진행했고 아직 그려야 할 설계도도 몇 개 있구요.”명자가 걱정했다. “얼마나 바쁘던 몸이 제일 중요하지.”“몸 건강하거든요. 걱정하지 마세요.”이내 손을 씻고 함께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저녁으로 만두를 먹고 난 후 엄마 아빠와 잠시 수다를 떨었고 예원이 전화를 걸어왔을 때 그녀의 기분은 이미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그, 기자들이 오늘 찍은 사진을 보내줬는데, 너도 필요해?”말하고는 쯧하고 혀를 찼다.“찍힌 게 좀 그렇긴 하더라. 기자들도 대단해, 차라리 연예계 파파라치나 해야 했어. 각도를 꽤 애매하게 선정했더
강우빈이 태어나던 해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인연을 완전히 끊었고 강지찬과 온유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도 기분이 나빴다.아들이 태어난 후 백일잔치도 하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끼리만 축하를 했다.어느덧 우빈이는 세 살이 되었고 강지아가 때마침 귀국했기에 못 해준 축하를 이제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번 강우빈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생일파티는 강씨 가문의 식장에서 열렸고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다.정유진과 강지아는 하객 대응을 맡았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강지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온씨 가문과 최씨 가문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화령은 강지아와 절친이었기에 생일잔치에 왔다.편집장으로 승진한 화령은 옛날의 풋풋함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미녀의 기질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여기 온 것을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강지아가 한마디 물었다.황은숙은 아직도 자기 아들 최금혁을 아프리카로 보낸 강지아와 화령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강지아의 말에 화령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시어머니는 무슨, 그리고 진짜 시어머니라고 해도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어.”“아이고, 우리 화령 편집장님 점점 폼이 나네. 어쩐지 최금성이 3년이나 아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강지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화령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전엔 얘기 안 했나? 작년에 유산했어.”“어?”“아기가 싫대.”화령이 최금성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지아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최금성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왜 싫대?”“난 그냥... 뭐랄,. 파트너니까. 애인 대역이라고 할 수도 없지.”화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
“당연히 아프지. 문신을 할 때보다 훨씬 아파. 지난주에도 예쁜 여대생이 왔는데 울면서 문신을 지웠어. 하도 울어서 눈이 다 부었어.”“아파서 우는 건 아닐 거야.”“그렇지. 헤어진 사랑 때문에 우는 거겠지. 나도 남자이긴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진짜로 못 돼 먹었다니까.”강지아는 잡지를 하나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네 사장님께 얘기해줘. 지금 작업 끝나면 내 다리 문신도 지워달라고.”“그래.”대답을 하고 난 뚱보는 그제야 반응했다.“뭐라고?”강지아가 말했다.“예쁜 그림 있어? 어디 좀 봐봐.”“응? 아!”뚱보는 멍한 얼굴로 노트 하나를 가져왔다.“이건 사장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야.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봐봐.”여기까지 말한 뚱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아니, 지아 누나. 무슨 일 있어?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응.”입이 무거운 진수혁이 보아하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물론 말을 했든 안 했든 강지아는 상관하지 않았다.검은 장미꽃 한 송이를 본 강지아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걸로 하자. 섹시해 보이네.”그러자 뚱보가 말했다.“이 그림은 몇 년 전 거야. 요즘 젊은 여자들은 흑장미 문신을 하지 않아.”“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이걸로 할게.”뚱보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30분이 지나자 진수혁의 하던 작업도 끝났다.강지아의 차례가 돌아오자 진수혁이 한마디 했다.“올 줄 알았어.”강지아도 한마디 했다.“걱정 마. 울지 않을 테니.”그녀는 정말로 울지 않았다. 지우는 게 정말 아팠지만 참고 견뎠다.“지우자마자 바로 다시 문신할 수 있어? 그림은 이미 선택했는데.”“안 돼. 약국에 가서 소염제 같은 걸 사서 매일 바르고 상처가 완전히 회복해야 다시 문신을 할 수 있어.”강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좀 이따 퇴근한 다음에 단골 술집에서 봐. 내가 한턱낼게.”진수혁이 말했다.“문신 지우자마자 술 마시면 안 돼.”강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안 마실게.”그녀를 힐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
최신애가 깨어났을 때 온유한과 현채영은 옆에 없었고 임유희만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유한이는?”“유한 오빠는...”임유희의 안색이 안 좋았다.“접대가 있다며 현채영 씨를 데리고 갔어요.”화가 난 최신애는 또다시 기절할 뻔했다.“친엄마가 기절했으면 병원에서 효도하고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또 그 천한 년을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다고?”최신애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어머님, 진정하세요. 유한 오빠 아마 중요한 술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일 거예요. 어머님의 혈압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어요.”“내가 죽어야만 나를 엄마라고 생각할 것 같구나!”임유희도 그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본인도 매우 슬펐기 때문이다.그녀도 아무런 명분 없이 온씨 저택에 머무른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녀와 현채영이 한집에 사는 것을 아는 외부 사람들이 뒤에서 어떻게 비웃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중요한 것은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자주 띄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현채영 같은 여자와 비교당한 생각만 하면 임유희는 속이 울렁거렸다.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현채영에게 졌다는 것이다.강지아에게 진 것은 인정할만했다. 막강한 강씨 가문이고 온유한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채영은?집안이 망해 명예도 없는데 온유한은 그녀를 보물처럼 아끼고 어디나 데리고 다닌다.임유희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서울의 명망 있는 대갓집 규수들은 거의 다 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왔고 한규진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아역 배우였던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최의현은 약혼녀를 데리고 왔고 최금성은 당연히 화령을 데리고 왔다.온유한이 현채영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 자리에 현채영의 옛 애인도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온유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
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열받아 죽겠네. 유한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조금 전에 한 말 무슨 뜻이야? 밖에서 현채영과 자고 오겠다는 얘기야?”임유희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첫 만남 때 절친이 힘을 내라고 북돋우는 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가 있어요.”그때 강지아가 너무 부러웠다.지금의 온유한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어머님, 아니면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유한 오빠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안돼. 네가 가면 저 여자가 더 함부로 나댈 거야.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운전 기사에게도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 출퇴근 픽업을 책임질 거야.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 저런 여자와 넌 달라. 넌 네 할 일만 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 말에 임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정오에야 얼굴을 비쳤다.그 모습을 본 최신애는 현채영에게 눈을 희번덕인 뒤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유한아, 오늘 평일인데 병원에 안 가봐도 돼? 넌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라. 앞으로 온씨 가문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이야.”그러자 현채영이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어머님, 유한 씨를 잘 모르시나 봐요. 어제 저녁에 간 석식 자리가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에요.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서 하룻밤 묵은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저와 유한 씨 다 성인이고 집에서는 좀 불편한 것도 있어서.”그 말에 최신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무슨 뜻이지? 아들이 이 천한 년과 잤다는 뜻인가?이제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온유한인지라 이런 것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3년 전에 임유희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마 강지아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최신애는 짐작했다.그런데 이 뻔뻔한 천한 년과 잤다고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