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동생 때문에 시에서 가장 호화롭고 선진적인 의료 장비를 갖춘 요양원을 만들었다니, 역시 이런 일은 강지찬같은 재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일반인에게는 꿈도 못 꿀 일이지.신안이라... 이 이름도 지아에게서 따온 것일까?정유진은 살짝 난감해졌다.하지만 예원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신안의 사장이 강 대표님이라고요? 역시 강 대표님 사랑이 대단하시네요, 존경스러워요!”강지찬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정유진만 바라보고 있었다.“정 사장님 계속하시죠!”정유진은 그런 강지찬을 한 대 때려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예원은 끊임없이 유진에게 눈짓을 보냈다.‘입원 동이 자그마치 3채야! 중요한 거래라고, 두 달이나 매진한 일이잖아!’강지찬과 함께 온 사람 중에 신안 요양원과 작업실 사이의 소통을 책임지던 책임자도 와있었지만, 발언권은 없었고 옆에 앉은 채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그제야 정유진은 왜 날아갔던 계약이 다시 돌아왔는지 알아챘다. 분명 강지찬이 수를 쓴 것이었다.다만, 지금 강지찬은 내가 지아를 꼬집었다고 의심하고 있지 않나?왜 다시 신안의 프로젝트를 나에게 맡긴 거지?유진은 말없이 가방을 내려놓은 후 키키에게 어제 다시 수정한 설계도를 보여주라고 부탁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이 계약서를 쓰러 오셨으니 다시 한번 방안에 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계약서에 견적도 적혀있으니 확인해보시죠.”키키는 아침에 다시 인쇄해 낸 계약서를 테이블에 올려놨고 강지찬은 일어서며 답했다.“그래요, 그럼 우리 정 사장님의 방안을 한번 들어봅시다.”입으로는 진지한 태도로 말하고 있었지만, 정유진에게 꽂힌 시선은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마치 정유진이 방안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노래라도 한 소절 불러주는 듯한 모습이었고 차가운 눈빛에 한 줄기 웃음기가 서려 있어 보기만 해도 얄미웠다.강지찬이 자리를 옮겨 앞으로 앉았다.오늘 흑백 패턴의 드레스를 입은 유진은 넓게 퍼지는 치마단 덕에 허리가 유난히 가늘어 보였다. 실제로도 허리가 상당히 가는
강지찬이 일부러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이 차단당했다는 걸 알고 일부러 저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정유진은 그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귀한 블랙 카드의 비밀번호가 이토록 쉽게 설정된 것일까?어쩔 수 없이 다시 이 사람을 차단 상대에서 옮겼고 휴대폰 번호 뒤 6자리를 입력했다.그 결과에 유진은 멍해졌다. “...”실제로 비밀번호가 맞았다.강지찬은 계약서를 보지도 않아 인테리어 비용조차 모르는 채로 계약을 마치고 모든 금액을 지불했다.그래, 부자한테 이 오십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귓가에는 강지찬의- 차가운 말이 들렸다.“벌써 세 번째네요, 다음번에 정 사장님에게 연락할 때 연락이 통했으면 좋겠어요.”“...” 역시 일부러 저런 것이다. 듣기에도 살짝 미묘한 말이었고 하필 예원이도 일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었다.“저기, 계약서도 마무리했으니 앞으로의 공사는 저와 시공부서 부장님이 함께 책임지겠습니다. 한 부장님, 이쪽으로 와서 시공 관련 사항에 대해 논의하시죠.”한 부장은 기다렸다는 듯 예원을 따라 시공부서 부장의 사무실로 향했다.예원은 한술 더 떠 유진에게 당부했다.“유진아, 방금 캡슐이 도착했던데, 대표님에게 커피라도 내려드려.” 그러고는 강 건너 불구경 하는 키키도 내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어제 옷값을 돌려줬으니 앞으로는 어떠한 일로도 엮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강지찬의 번호가 어느새 또다시 휴대전화에 저장돼있었다.사람이 없어지자 강지찬은 본모습을 드러냈다.“다시 날 차단한다면 어떻게 응징할지 기대해요.”협박을 가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당당하게 물었다.“당신 사무실은 어디죠?”정유진은 자신의 심정을 명확하게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이 남자만 보이면 왠지 모르게 짜증이 밀려왔다.“전 마음이 바르지도 못한 여자인데, 왜 저랑 계속 협력하는 거죠?”강지찬은 그녀를 한 눈 보더니 계속 그녀의 사무실을 찾았다.“도대체 어디에요
정유진은 강지찬 덕에 화가 폭발할 것 같았다. 이토록 뻔뻔하고 무례한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저리 비켜요, 사람 부르기 전에!”강지찬은 비키기는커녕 문까지 걸어 잠갔다.“불러요, 신경 쓰지 않으니까.”정유진은 화가 나 호흡이 거칠어지며 두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아까부터 쭉 그녀의 입술에 고정됐던 강지찬의 시선은 어느샌가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깨달은 정유진은 그대로 강지찬을 차버리고 싶은 생각이었다.“변태예요? 뭔 생각 하는 거예요?”강지찬도 유진을 더는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결국, 한발 물러나 유진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뭘 무서워해요, 여기서 당신을 안을 만큼 미치진 않았거든요.”정유진은 문을 열고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하지만 강지찬은 의자 하나를 끌어오더니 그대로 앉으며 말했다.“화내지 말아요, 날 화나게 했으면서, 내가 좀 놀리는 건 안 돼요?”유진은 생각할수록 미친놈이라는 생각에 대꾸했다.“내가 언제 화나게 했죠?”강지찬은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쳐다보며 답했다.“어제, 4번이나요.”“...” 도대체 누가 누굴 화나게 했단 말인가?강지찬은 하나하나 예를 들어가며 유진에게 설명해줬다.“첫 번째는, 나 몰래 다른 남자한테 꼬리친 거.”정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누구한테 꼬리를 쳤다고 그래요? 아니, 내가 다른 남자한테 꼬리를 치든 말든 당신이랑 아무런 상관도 없거든요!”강지찬은 말을 이었다. “둘째는, 일부러 대꾸하면서 날 화나게 한 거.”“...” 정유진은 더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세 번째는, 옷값을 돌려준 거. 나 강지찬이 한번 선물한 물건을 다시 돌려받는 건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서요.”“..”“네 번째는, 또 나를 차단한 거.”정유진은 이제 깨달았다. 지찬의 눈에 유진이 얼마나 괴롭히기 좋았으면 집요하게 그녀만 잡고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또 있어요? 한꺼번에 말해요.” 말하고 당장 꺼지라는
또 대화가 싸움으로 번졌다.어찌 됐건 강지찬은 그녀의 고객이었으니 정유진은 친히 그를 배웅해줬다.지찬이 차에 오르려고 하자 유진이 그제야 말을 꺼냈다.“지아는 고세연 씨가 꼬집은 거에요. 제가 직접 봤어요.”강지찬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깊고도 차가워 보였다.어르신이 고세연을 점 찍어둔 며느릿감이라 했으니 이 사람의 여자친구겠지?어찌 됐건 유진의 말은 사실이었으니 믿고 말고는 지찬에게 달려 있었다.지아 생각에 정유진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덧붙였다.“지아를 위해 제일 호화로운 요양원을 지어주면서 왜 좀 더 같이 있어 주지 않나요? 어떻게 지아 옆에 붙인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란 걸 확신할 수 있죠?”강지찬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더니 물었다. “날 의심하는 건가요?”정유진은 그의 오만한 태도를 가장 싫어하는 터라 그대로 반문했다.“의심하면 안 되나요? 당신이 한 모든 말과 내린 모든 결정이 옳은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내가 고세연을 지적한 게 못마땅해서겠지? 여색을 즐기지 않는다던 소문은 역시 가짜였어.’ 유진이 생각했다.강지찬은 상당히 불쾌한 듯 답했다. “당신이 참견할 정도는 아니에요.”말을 마치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떠나버렸다.강지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유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유진은 강지찬이 조금은 무서웠다.형준도 유진의 말을 듣고는 지찬에게 물었다. ”대표님, 요양원으로 갈까요? 자택으로 갈까요?”강지찬이 목소리를 낮추며 답했다. “요양원으로 가.”오빠가 또 오자 지아도 몹시 기뻐했다. 강지찬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차갑지 않은 말투로 얘기했다.“약 잘 먹었어?”“다 나았다니까. 약 안 먹어도 돼.”강지아는 강지찬이 또 자신을 보러오자 기분이 좋았다. 고세연의 말이 맞았다. 역시 아프니 오빠가 매일 그녀를 보러 왔다.강지찬은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하는 편이었다. 보기만 해도 그리 쉬운 성격이 아니었고 수법이
예원과 신안의 한 부장이 대화를 마치자 이미 점심이 됐고 유진은 배달음식을 시켰다.“부자는 다르더라고요. 50억 원이나 되는 돈을 말 한마디에 바로 긁다니. 뭐 50만 원 긁는 것처럼 말이에요.”감탄하면서도 예원은 가십거리도 잊지 않았다.“너랑 강지찬은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 사람이 널 맘에 들어 한 거야?”정유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은 여자친구가 있어.”“그럴 리 없어!” 예원은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분명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다니까.”정유진은 살짝 멈칫했다. “...”전에 강지찬의 등장은 한빈에게 맞서기 위함이었다면 지금은?거기에다 오늘 사무실에서 한 말들까지 생각해보면...정유진은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당시에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든 강지찬 때문에 정신이 없어 그가 여자친구가 있다는 일조차 잊고 있었다.그때 예원이 테이블을 탁 내리치더니 말했다. “어머! 설마 한빈을 따라 배우려는 건 아니겠지?”정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속에서 신물이 나는 듯했다. “앞으로 만날 기회는 없을 거야. 거리를 둘거거든.”예원은 멈칫하더니 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그, 유진아, 한 부장님 말로는 이틀 뒤 신안의 착공식에 강 대표님도 오신다던데. ““...” 유진은 말문이 막혔다.강지찬이 이토록 한가한 사람이었나?k 그룹이라는 큰 회사를 운영하면서 자리에 앉아있을 필요도 없는지 의문이었다.예원은 근심 걱정이 가득한 채 물었다. “그 사람 혹시 그냥 너랑 자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지?”“꿈도 꾸지 말라고 해!”계약서에 사인도 했겠다, 금액도 지급했겠다, 이 일은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었다.그들에게는 위약금으로 물어줄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예원이 밥도 넘어가지 않는 모습에 유진이 말했다.“일은 일이니 신경 쓸 거 없어. 신안의 착공식은 좀 웅장하게 진행하자. 매체들도 참석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그 말에 예원은 또다시 흥분한 듯 물었다.“그럼 우리 작업실이 뉴스에 오르는 거야? 우리도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기에 유진은 어쩔 수 없이 강지찬과 나란히 섰다.강지찬이 살짝 몸을 돌렸고 기자가 서둘러 그들의 사진을 찍으려 셔터를 눌러댔다.사진 촬영이 끝난 줄 알고 돌아가려는 그때, 유진의 어깨가 갑자기 무거워졌다.강지찬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며 친밀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강지찬을 쳐다봤고 강지찬 역시 그녀에게 시선을 맞췄다.귀에는 앞쪽에서 들려오는 셔터음밖에 들리지 않았다.이 망할 놈의 남자가 또 무엇을 하려는 거지?강지찬이 그녀를 향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몇 장 더 찍어요.”많은 사람 앞에서 강지찬의 체면을 깎을 수는 없었는지라 유진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어깨를 잡힌 채 몇 장 더 찍을 수밖에 없었고 강지찬은 한술 더 떠 사람들을 향해 설명했다.“우리 정 디자이너는 저랑 친구 사이입니다. 기자님들 잊지 말고 사진을 제 비서에게 보내주세요.”조금 전까진 말조차 귀찮아서 꺼내지 않던 사람이 고작 사진 몇 장을 위해 입을 열다니.진짜 친구 사이처럼 간단한 관계일까?기자들의 눈빛이 번뜩이며 둘 사이의 관계가 간단하지마는 않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챘지만, 함부로 묻지는 못했다.강지찬은 평소에도 상당히 바빴고 인터뷰에 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오늘 강지찬을 인터뷰할 기회가 생긴 지라 기자들은 흥분되면서도 행여나 잘못된 질문으로 이 큰 인물의 심기라도 건드릴까 봐 조심스러운 마음이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당연히 잊지 말아야죠.”정유진은 온 힘을 쥐어짜내 꾹꾹 참고 나서야 무대 위에서 강지찬과 싸우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사진을 찍은 후 쏜살같이 무대를 내려왔고 예원이 건네주는 물을 받아 꿀떡꿀떡 마시며 정신을 진정시켰다.“갑자기 또 무슨 미친 짓인지 모르겠네.”유진은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예감으로는 지금 나가지 않으면 강지찬이 또 언제 무슨 수를 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여긴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 조금 있다가 난 먼저 가볼게.”유진의 말에 예원
강지찬은 소매를 걷더니 탄탄한 팔뚝을 드러냈다. 그가 부숴야 할 곳은 이미 표기를 해놓았고 한 무리의 기자들이 에워싸더니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다.강지찬은 망치를 들더니 쿵 하고 내리찍었고 벽에는 구멍 하나가 뚫렸다.모두 박수를 보냈고 정유진은 아무도 자신을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예원에게 눈짓하고는 몰래 자리를 떠났다.그런데 차에 시동을 걸기도 전에 조수석의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차가운 냉기가 훅 풍겨왔다.유진은 갑자기 차에 등장한 남자를 쳐다보고는 어이가 없었다.“날 피하는 거예요?” 강지찬이 당당하게 물었다.유진은 크게 심호흡하며 지금 이 사람은 손님이고 손님이 왕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아니에요, 여긴 예원이가 있으면 돼요. 전 얼른 돌아가 설계도를 만들어야죠.”강지찬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내려요, 보러 갈 사람이 있어요.”정유진은 경계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누군데요?”강지찬이 대답했다. “지아요.”지아를 보러 가는 일은 유진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왠지 모르게 매번 달콤한 목소리로 언니라 부르는 지아를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가슴이 아파왔다.지아가 살고 있는 지역은 여기서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고 유진은 차를 운전해 가기로 했다.강지찬은 그녀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만나러 가는지 묻지 않을 거예요?”정유진은 도로를 주시하느라 지찬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고 답했다.“내가 가겠다고 한 건 지아를 보고 싶었을 뿐이지 당신이랑 상관없어요.”강지찬이 눈썹을 꿈틀거렸다.한 가지 질문에 답변을 내릴 수 없었다.“수많은 여자가 내가 한 눈 봐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왜 당신만 나한테 이런 태도인 거죠?”정유진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답했다.“좋은 태도를 바라면 그 여자들이나 찾아가요. 우린 지금 협력관계인데 내가 웃음을 팔 필요가 없잖아요.”강지찬은 그런 그녀를 흘겨봤다. “나 같은 중요고객한테도 웃는 얼굴은 안 보여주는 거예요?”“...” 정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차로 이동하니
지아는 정유진이 있으니 오빠는 필요 없다는 듯 언니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놔주지 않았다. 끝까지 유진을 잡고는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고 어려서부터 게임에는 소질이 없었던 유진은 철권을 하면서도 번번이 지아에게 지고 말았다.강지찬은 그 모습을 보더니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한마디 했다.“저런 바보 같으니라고!”그러고는 유진의 뒤로 가 긴 팔을 뻗어 게임기의 스틱을 잡고는 유진을 도와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유진은 그의 품 안에 쏙 들어간 자세가 되었고 청량한 향기가 온몸을 휘감았다.그녀는 순식간에 석상처럼 굳어져 버렸고 강지찬은 그의 귓가에서 쉬지 않고 구시렁댔다.“보기에는 똘똘해 보이는데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거에요!”지찬의 얼굴이 거의 그녀의 얼굴과 맞닿아 있었고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유진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그녀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고 지찬을 바로 밀어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한 입 와구 물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말랑하고 보드라운 유진을 품에 안고 있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찬은 품속에 안은 여인이 제정신을 차릴까 봐 두려웠다.그렇게 한편으로는 몰래 상황을 즐기며 다른 한편으로는 게임을 가르쳐주는 척 연기했다.“이 두 개는 공격 버튼이고, 이건 발차기에요. 두 손을 같이 조합해서 써야죠…”옆에 있던 지아가 갑자기 입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오빠가 언니를 안았어! 앗싸!”정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강지찬을 밀어내며 펄쩍 뛰었다.그러고는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휴대전화와 가방을 찾았다.“지아야, 언니는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다음에 또 보러 올게.”강지찬은 차가운 눈빛으로 강지아를 쳐다봤다. 다 된 밥에 재 뿌리지 말라는 뜻이었다.강지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럴 의도는 아니었으니 이제라도 빨리 잡으라는 뜻을 전했다.한 편으로는 유진에게 손을 저으며 답했다.“언니 꼭 날 보러 와야 해. 보고 싶을 거야.”정유진은 다
목욕을 하니 강지아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자신을 욕조에 가둔 채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강지찬이 온씨 집안과 끝장을 보기 위해 달려갔을 때 강지아는 이미 자리에 없었고 그곳에는 몇몇 하객들과 표정을 알 수 없는 최신애만 남아 있었다.“온씨 가문이 우리 강씨 일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 앞으로 완전히 인연을 끊죠.”강지찬은 최신애를 싸늘하게 바라봤다.“그다음은 아주머니 차례겠네요.”최신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너, 너 무슨 뜻이야?”강지찬이 코웃음을 친 뒤 정유진을 이끌고 자리를 뜨려 하자 온혁진이 얼른 뒤쫓아갔다.“지찬아, 지찬아. 우리 말로 하자... 이 아저씨의 체면을 봐서라도 앉아서 이야기하자... 화 풀어. 이 사람이 점점 머리가 어떻게 되는 것 같아. 내가 집에 가서 잘 얘기할게...”온미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최신애 씨!”새언니라고 부르지도 않았다.“온씨 가문이 대체 뭘 잘못했는데 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거예요? 오늘은 내 결혼식이에요. 온씨 가문과 내 체면은 안중에도 없어요?”화가 나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최신애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온미정이 계속 화를 내려 하자 백무영이 그녀를 말렸다.“됐어. 그만해.”백무영은 온미정을 품에 안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보고 있어. 진정해.”그러고는 이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다들 술 마시러 가시죠.”최의현과 한규진도 서둘러 상황 수습에 나섰다.한편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본 최신애는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이게 내 탓이야?”그녀는 옆에 있던 임유희를 덥석 잡으며 물었다.“유희야, 네가 말해봐. 도대체 누가 잘못했냐?”임유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서 줄곧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던 온유한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그만 하세요!”최신애는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제 만족해요?”온유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이제 만족하냐고요?”“내
강지아는 어른인 최신애가 이런 행동까지 할 줄 몰랐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얼굴은 오렌지 주스 범벅이 되었다.노란 오렌지 주스는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면서 온몸을 더럽혔다.10여 년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보냈지만 오늘만큼 초라한 적이 없었다.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온유한의 엄마가 그녀에게 이런 행동을 하다니...강지아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녀 앞에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은 이 여자가 과연 엄마처럼 그녀를 사랑한 적이 있을까?머릿속에 떠올린 장면들이 갑자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가정 교육이 부족하니 내가 네 엄마를 대신해서 가르쳐 주마!”컵을 테이블에 ‘탁’ 놓으며 한마디 외친 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했다.한편, 너무 큰 소란에 주위의 하객들이 잇달아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온유한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자 경은우가 그에게 귀띔했다.“저기 아주머니와 지아, 아니야?”강지아가 옷을 갈아입고 선캡을 썼기 때문에 경은우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개를 그쪽으로 돌린 온유한은 순식간에 안색이 나빠졌고 이내 쏜살같이 달려와 강지아를 품에 안았다.“또 무슨 소란을 피우는 거예요?”온유한이 최신애에게 큰 소리로 묻자 최신애는 강지아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얘가 어른을 어떻게 대했는지 물어봐. 온유한, 난 네 엄마야. 그런데 나에게 말투가 그게 뭐야?”하지만 온유한은 친엄마를 상대할 겨를이 없이 다급하게 강지아의 얼굴을 감쌌다.두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지아의 모습에 온유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강지아였지만 그 모습이 더더욱 온유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온유한은 마음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차라리 강지아가 큰 소리로 최신애에게 대들고 싸우기를 바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에 대한 마음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휴지가 없는 온유한은 얼른 옷소매로 강지아 얼굴의 오렌지 주스를 닦
온미정의 결혼식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결혼식은 피로연 외에 해변에서 파티도 열었다.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젊은 남녀들이다.최의현은 언제 젊은 미녀를 꼬셨는지 두 사람은 아까부터 함께 술을 마셨다.강지아도 흰색 롱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머리에 선캡을 썼다.햇빛이 딱 좋아서 매우 포근하게 느껴졌다.온유한은 다른 쪽에서 하객들을 대응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수많은 인파들을 뚫고 수시로 눈을 마주쳤다.“온 선생님과 사이가 정말 좋네요.”임유희가 어느새 강지아 옆에 와서 한마디 했다.강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임유희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강지아 씨, 왜 그렇게 쳐다봐요?” 임유희가 묻자 강지아가 바로 말했다.“임유희 씨도 유한 오빠를 좋아하는 거 알아요.”임유희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제가 심려를 끼쳐드렸네요. 죄송해요.”어떻게 보면 인정한 셈이다.강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심려를 끼치네요. 이 사람 마음속에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임유희 씨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네요. 주유정이라고 알아요? 임유희 씨는 주유정과 완전히 달라요. 나는 한 번도 주유정에 대해 신경 쓴 적이 없어요. 그런데 임유희 씨는 왠지 신경이 쓰이네요.”강지아의 솔직한 한마디에 임유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임유희보다 어린 강지아였고 천진난만한 모습이었지만 마음은 아주 섬세했다.“주유정 씨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요.”임유희는 솔직히 말했다.“미안해요. 내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나면 안 된다는 거 너무 잘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어요. 지난번에 온 선생님이 목숨을 바쳐 나를 구한 후부터 온 선생님에 대한 제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요.”강지아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임유희 씨는 똑똑한 여자예요.”강지아가 맑은 눈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임유희는 왠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두세 살 어린 여자아이에게 마음을 들켰다.역시 여자를 아는 건 여자뿐이다.임유희는 다른 커플 사이에 끼고 싶지
“고모, 유한 아저씨와 또 싸웠어요?”“어떻게 알았어?”“싸울 때마다 나한테 달라붙으니까요! 휴.”사실 온유한과 싸우지 않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강지아는 온유한과의 현재 관계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방경숙이 연우를 데리고 밥을 먹으러 가는 바람에 혼자 있는 강지아는 갑자기 지루해졌다.아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상하게 외로웠다.그녀는 최신애와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정말 싫었다. 게다가 최신애는 마음에 드는 예비 며느리를 자기 옆에 데리고 있었다.이럴 때마다 강지아는 자신이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지루해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더니 방으로 이끌고 갔다.문이 쾅 닫히자 깜짝 놀란 강지아는 눈을 감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나야.”온유한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쉿'하는 손짓을 했다.오늘 하객 접대를 너무 오래 했더니 다리가 뻐근하고 아팠다.“뭐 하는 거야?”비명을 지르려다가 멈춘 강지아는 눈을 뜨고 나서야 앞에 있는 사람이 온유한임을 알아봤다.온유한은 웃는 얼굴로 서운한 척하며 말했다.“얘기 좀 해. 우리 애기가 요즘 나와 말을 안 섞으려고 해.”“내가 언제.”강지아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바빴잖아?”“아무리 바빠도 여자친구와 함께 있을 시간은 있어.”강지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온유한은 가쁜 숨을 내몰아 쉬며 말했다.“지아야, 보고 싶었어.”“조금 전에 너 보자마자 안고 싶어서 혼났어.”강지아는 눈앞 남자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두 사람은 어느새 처음에 사귀기로 확정했을 때처럼 뜨겁게 키스를 나눴다.어찌나 격렬하게 했는지 온유한이 사람을 시켜 드레스를 다시 보내 달라고 한 후 강지아가 화장을 수정하고 나서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드레스마저 커플룩이었다.정유진은 강지찬의 허리를 꼬집으며 말했다.“저기 봐, 두 사람 화해했어.”코웃음을 친 강지찬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결혼식이 시작되었다.백무영은 가장 친한 친구와 연출 감독, 제작자,
강지아는 곧 국내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갔다.그녀의 인스타를 보고서야 비행기에 탔다는 것을 안 서원준은 입을 삐죽거리며 ‘양심 없는 녀석’이라고 욕을 했다.인스타를 끄려고 할 때 강지아가 올린 글을 보고 멍해졌다.[비행기에 타니까 그래도 마음이 편안해지네.]무슨 뜻이지?서원준은 그 문구에 눈을 가늘게 떴다.귀국 후 그는 강지아를 만난 적이 없다. 남자 친구가 있는 사람이고 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매우 바빴다.그동안 강지아는 온유한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진짜로 그들 사이에 금이 갔단 말인가?강지아의 스토리를 본 온유한은 무의식적으로 강지아의 이 문구가 그와 함께 있었을 때의 답답함을 표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얼마 전까지는 주유정이었다가 이번에는 임유희, 강지아도 당연히 피곤했을 것이다.관자놀이를 만지작거린 온유한은 본인도 이런 상황이 힘들다고 생각했다.그 후 20일 동안, 강지아와 온유한이 페이스 톡한 횟수는 10번을 넘기지 않았다. 매일 페이스 톡을 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요 며칠 타이밍이 맞지 않은 듯했다.가끔은 온유한이 받기 불편한 상황이었거나 또 어떤 때는 강지아가 바빠 받지 못한 적도 있었다.예전에 매일 하던 자기 전 통화도 채팅으로 바뀌었다.내용은 대부분 ‘오늘은 피곤해서 먼저 잘게’ 등이었다.그러면 온 유한도 ‘잘자’라고 단답형으로 대답했다.어느 날 한밤중에 강지아가 느닷없이 한마디 보냈다.[보고 싶어.]온유한이 막 답장하려 할 때 강지아가 보낸 메시지를 삭제했다.온미정의 결혼식은 남쪽 지방에서 성대하게 차려졌다.연우는 겨울방학을 맞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같이 미리 이곳에 와서 지냈고 강지아는 이틀 전에 도착해 연우와 같이 놀았다.결혼식 날 강씨 가문 식구들이 모두 참석했고 정유진도 강지찬의 팔짱을 끼고 참석해 온미정의 체면을 세워줬다.온미정이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정유진은 처음 봤다.이들은 로맨틱한 서양식으로 결혼식을 했다. 온미정은 한평생 웨딩드레스를 입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예전
온유한이 재활 운동을 할 때 강지아는 창문 너머로 디자인을 보고 있었다. 또 출장 준비를 해야 했고 아마 온미정과 백무영이 결혼할 때가 되어야 돌아올 예정이었다.몇 바퀴 걷자 다리에 힘이 빠진 온유한을 본 재활 선생님은 그더러 쉬라고 했다.물까지 다 마셨지만 강지아는 온유한이 쉬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강지아는 헤드셋을 끼고 스튜디오 디자이너와 영상 회의에 집중하고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온유한은 천진난만하던 소녀가 어느새 성숙하고 예뻐진 것을 발견했다.이렇게 눈부실 정도로 예쁘니까 외국의 재벌 귀족들의 관심을 끌었나 보다.하지만 온유한은 강지아가 본인의 여자임을 당연하게 여겼다.어느 정도 프로젝트 논의를 마친 뒤 옆에 있던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려던 강지아는 커피가 없는 것을 보고 영상 통화 중인 디자이너에게 한마디 했다.“두 사람 중 누가 나와 함께 갈지는 두 분이 결정하고 한 사람은 작업실에 남아 주세요.”이때 누군가 물 한 병을 건네주자 강지아는 무의식적으로 인사했다.“감사합니다.”그 말에 온유한은 가만히 있었다.강지아는 화상 카메라에 비친 온유한을 보고 나서야 물을 건넨 사람이 그임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려 웃으며 물었다.“끝났어?”“아직. 잠깐 휴식 중이야.”“그래. 나도 마침 좀 더 할 게 남았으니까 끝나고 나서 같이 밥 먹자.”“그래.”강지아는 계속해서 부하직원들과 프로젝트를 논의했고 온유한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왠지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 손을 내렸다.점심에 강지아가 호텔 음식을 배달해 막 차려 놓았을 때 최신애가 온씨 가문 하인과 함께 점심 식사를 가져왔다.강지아가 주문한 요리는 여섯 가지로 아주 푸짐했다.최신애는 보온 통을 온유한 앞에 놓더니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다리가 아직 안 나아서 의사가 영양가 있는 음식을 위주로 먹으라고 했어. 기름진 음식은 피하고.”강지아가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으며 최신애에게 인사를 하지 않자 테이블 위의 음식을 훑
강지찬의 요청으로 최의현, 한규진, 온유한이 모여 서원준에게 식사를 대접했다.이 자리에서 강지찬은 서원준에게 보름 동안 강지아를 돌봐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테이블에 앉은 사람 중, 서원준과 강지찬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어색해했다.특히 온유한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강지찬의 이런 행동은 일부러 온유한을 난처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강 대표님, 저와 지아는 친구예요. 지아에게 일이 생겼는데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죠.”이 말은 그야말로 온유한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온유한이 전화를 받으러 나가자 최의현이 혀를 내둘렀다.“지찬아, 너 정말...”“내가 뭐? 이미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거야.”오랜 친구였기에 그나마 참은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강지찬은 진작 온유한에게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강지찬이 경은우와 잠깐 얘기하는 사이 서원준도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갔다.이때 온유한이 마침 전화를 끊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다리가 완전히 낫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기질은 여전했다.“내가 지아를 발견했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요?”서원준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묻자 온유한의 눈빛이 잔뜩 어두워졌다.그는 혹시라도 강지아가 다른 생각을 할까 봐 그날 일을 자세히 묻지 않았다.“얘기해 봐요.”서원준은 담배를 한 모금 빨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온몸은 침대에 꽉 묶여 있었고 입에는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어요. 눈만 부릅뜬 채 가만히 있는 모습은 진짜로 죽은 사람 같았고요.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표정은 지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온 선생님을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온유한은 누군가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서원준은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지아의 휴대전화에서 무엇을 봤는지 알아요?”“뭔데요?”서원준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온 선생님과 임유희 씨의 사진이요. 두 사람이 바닥에 누워서 당장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가까이 있었어요. 어찌나 애틋하던지.”온유한은
온유한은 강지아가 본인에 대한 감정이 옅어진 것을 발견했다.유한 오빠는커녕 온 선생님이라고도 잘 안 부르고 있다.“오늘 뭐 해?”온유한은 흰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다리가 낫지 않아 수술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진료만 했다.“다친 데는 아직도 아파?”“괜찮아.”강지아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환자가 별로 없었기에 온유한도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한편 그의 진료실 문 앞에 있던 임유희는 그가 전화하는 것을 보고 진료실로 들어오지 않았다.온유한이 사무실 문 앞을 힐끗 보자 강지아는 바로 알아챘다.“일 봐. 이만 끊을게.”온유한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강지아가 전화를 끊었다.옆에서 가만히 있던 서원준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두 사람 사이 곧 끝장 날 것 같은데 그럼 나에게 기회가 생기는 거 아니야?”핸드폰을 옆으로 내려놓은 강지아는 소파에 앉더니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요 며칠 펀은 강지아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희귀한 사파이어 보석 하나만 보내왔다.그렇게 두 사람은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강지아도 별 반응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매일 그녀의 곁을 따라다니며 일을 하고 생활하는 것을 지켜본 서원준은 왠지 뭔가 이상한 것 같았다.얼마 후, 강지아와 서원준은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다.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온유한 것도 당연히 있었으며 심지어 정유진의 뱃속에 있는 아기 선물도 있었다.서울로 돌아온 강지아는 다시 예전의 그녀로 돌아온 것 같았다.“온 선생님?”재활 운동 중이던 온유한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내 문에 기대 빙그레 웃는 강지아를 발견했다.“왔어?”온유한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달려간 강지아는 옆에 재활 선생님이 있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온유한의 목을 껴안으며 키스를 했다.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재활 선생님은 이미 옆에 없었다.“돌아온다고 미리 말하지 그래? 그럼 공항으로 마중 나갔을 텐데.”이제 설 수 있는 온유한은 강지아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정유진의 말을 들은 서원준은 의사더러 강지아에게 외부에 긁힌 상처만 치료해 달라고 한 후, 다른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낯선 해외 환경이라 의사 치료 방법이 강지아에게 적합하지 않을 수 있었다.집에 돌아온 후 강지아는 이내 잠이 들었지만 깊이 잠들지 못했는지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서원준은 다시 차르에게 주먹을 날렸다.한편 차르는 풀이 죽은 채 맞아도 욕을 하지 않았고 미친 사람처럼 웃지도 않았다.그러다가 한참 후에야 서원준을 쳐다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내가 설마 우리 천사를 해쳤어?”그 말에 서원준은 또 한 번 그를 걷어찼다.“모른 척하지 마. 조금 전까지 미친놈처럼 날뛰더니 지금은 왜 갑자기 억울한 척하는 거야?”그러자 ‘차르’가 천천히 말했다.“진짜 내가 아니야. 난 지아를 해치지 않아.”“네가 아니면 누구야? 지아를 침대에 묶는 걸 내가 직접 봤어. 하마터면 지아에게 나쁜 짓을 할 뻔했다고! 이 짐승아!”서원준은 옷이 찢긴 채 절망적인 표정을 짓던 강지아를 떠올리면 이 자식을 한 손에 때려죽이고 싶었다.“나는...”지금 깊은 고민에 빠진 남자는 차르가 아니라 펀이다.펀은 자책하면서도 해명할 길이 없었다.펀이 누구를 좋아하기만 하면 차르가 와서 감정을 파괴했고 잔인한 수단으로 그의 애인과 친구를 갈라놓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믿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진짜 내가 아니야.”죄책감을 느낀 펀도 서원준에게 용서를 빌며 애원하지 않았다.강지찬이 의사를 데리고 왔을 때 강지아는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주위 사람들도 그제야 펀에게 조현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서원준은 펀을 풀어주기 전에 여러 번 물었다.“너 진짜 그 얼간이 펀 맞아? 짐승 같은 차르가 아니라?”“맹세할게. 나 진짜 펀이야.”서원준은 그제야 펀을 놓아줬다.풀이 죽은 펀은 잘생긴 얼굴마저 서원준에게 맞아 돼지머리처럼 퉁퉁 부었지만 화를 내지 않고 머리카락을 정리하더니 미안한 얼굴로 강지아를 바라보았다.“배고픈데 밥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