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의 가게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어 마유구가 어떻게 죽었는지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대표님, 저도 cctv를 봤는데 정말 큰 사고였어요. 그 남자가 소희의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 한 명이 마음에 들었는데 그 직원은 남자 친구가 있었어요. 똑같이 가게의 직원이었고요.”사건 당일 마유구는 가게로 가 그 직원을 찾으려 하다 그분의 남자 친구와 다투게 되었다.마유구는 인터넷에서 나대는 것에 익숙해지고 또 돈 몇 푼 있다고 안중에 뵈는 것이 없었다. 가게의 소화기를 들고는 그 남자를 죽이겠다고 설쳤다. 상대가 피한 후 마유구가 힘을 조절하지 못해 바로 목욕탕 4층에서 굴러떨어졌다.Cctv에는 매우 똑똑히 찍혔다. 바로 그가 소화기로 사람을 죽이려다 오히려 자기가 굴러떨어져서 죽은 것이다. 상대방은 그 사람의 옷깃조차 스치지 않았다.장형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악인은 반드시 하늘의 저주를 받는다.강지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경찰 쪽에서는 뭐라고 하나?”“마유구의 죽음은 우연이긴 하지만, 마유구의 신원이 확인됐고 소희의 구역에서 죽은 것이니, 이 문제는 사람들의 오해의 소지를 사기 쉽습니다. 경찰은 아직 그 직원에게서 무언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아직 수사 중입니다.”강지찬은 손을 흔들어 장형준을 내보냈다.아래층에서 정유진이 커피를 들고 오자 소미가 핸드폰을 들고 쿵쾅거리며 다가왔다.“정 대표님, 물타기 조직의 두목이 죽었대요.”정유진은 핸드폰을 받아 들고 기사를 보았다. 기사는 비교적 간결하게 목욕탕 추락 사건이라고만 보도를 했다.고인의 신원은 ‘열성 네티즌’이 추적한 것이다. 기사에서는 경찰 조사 후 고인이 우발적으로 죽은 것으로 분명하게 말했지만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음모론’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소미는 작은 입으로 중얼거렸다.“이놈 죽은 게 참 의외야. 누군가 고의적으로 죽였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어.”말을 하며 목을 쓸어내리는 동작을 하였다.정유진은 영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목욕탕 이름에 주목했는데
정유진이 다급히 들어올 때 강지찬은 사무실에서 직원들을 혼내고 있었다. 법무부의 상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정유진을 보자 마치 구원주라도 본 듯한 눈빛이었다.정유진은 입구에서 얼어붙었다.임우연이 문밖에 있었다. 사무실에 사람이 있는데도 말리지를 않는다니.“꺼져!”강지찬은 정유진을 흘끗 쳐다보더니 법무부 직원 몇 명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차갑게 말했다.“만약 또 같은 실수가 있으면 그땐 알아서 꺼져.”서둘러 발걸음을 돌리던 그 사람들은 정유진에게 감사함을 느꼈다.“사모님, 안녕하세요.”“사모님, 안녕하세요.”강지찬은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쇼핑백을 보고 여유로운 말투로 말했다. 방금의 차가운 모습과는 정반대였다.“뭘 그렇게 다급히 와. 악세사리에 문제라도 있어?”정유진은 물을 닫았다.“이걸 저한테 왜 주는 거예요?”강지찬은 턱을 치켜들며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원래 널 위해 산 건데, 너한테 안 주면 누구한테 줘?”“제 뜻은...”강지찬은 그녀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어서 듣지도 않았다.“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 내가 내 아내한테 악세사리 좀 사주는 게 어때서? 나 강지찬의 아내는 악세사리 낄 자격도 없어?”정유진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아니면 우리 진짜 이혼할 때, 그때 돌려줄래?”마음속에 감춰둔 일들 때문에 정유진은 떳떳하지 못했다. 감히 그와 겨룰 여유도 없어 쇼핑백을 들고 갈 수밖에 없었다.가져가라면 가져가지 뭐. 혹시 연회에 참석하거나 할 때 끼고 가도 되고.아니면 이혼하고 돌려주지 뭐.퇴근하고 나서 정유진은 먼저 잠깐 집으로 가 악세사리를 두고 다시 연우 인테리어로 갔다.강지현은 벌써 도착하여 이미 키키랑 쇼파와 램프 등 몇 가지 골라놓았다.정유진을 보고 강지현은 웃으며 말했다.“다른 건 다 선택했는데, 카펫 몇 개를 봐뒀는데 결정을 못 하겠어요. 키키는 이 몇 가지 카펫 모두 순수 수제 양모 카펫이라 다 좋다고 하던데. 유진 씨는 저희 집이 회색이
강지현은 흥분하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마유구의 죽음은 한빈을 겨냥하고 있었고 한빈 역시 그의 사람이니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그는 확실히 다른 사람의 의심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아무리 경찰이 의심하더라도 증거를 따져야 했다.그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정유진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뿐이었다.“인터넷 뉴스를 보고 저를 의심하셨을 텐데요. 유진 씨, 저에게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대화가 다시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지 정유진의 눈이 흔들렸다.“당신 자신도 깨닫지 못했죠? 사실 마음속 깊이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지찬의 편이었어요. 제가 그와 싸우겠다고 생각하고 제가 그에게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강지현은 마침내 참지 않고 그녀를 잠에서 깨우려는 듯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고 흔들었다.“왜요? 이혼하기 싫은 거예요? 당신은 늘 그를 떠나고 싶어 했잖아요? 왜 나보다 그를 더 믿는 건데요?”“저는...”정유진은 말을 잇지 못했고 강지현의 말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그녀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강지현이 성원의 대표라는 사실이 드러난 이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강지현이 강지찬을 상대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 때문에 여전히 강지현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찬의 편을 들기로 선택한 건가?정말 그런 건가?“저는...”정유진은 한참 후 입을 열었다.“저는 강지찬의 편에 서 있지 않습니다. 마유구라는 사람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무슨 죄를 지었든 그를 처벌하는 법이 있지만 지금 그는 죽었고,소희의 가게에서 죽었습니다...”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고, 그녀는 이 사건이 강지현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정말 믿을 수 없었다.정유진은 자신의 가치관이 심한 충격을 받은 것만 같았다.“내가 한 게 아니라고 경찰이 이미 확인했고, 마유구의 죽음은 사고였어요.”“내 말을 믿지 않더라도 경찰의 말은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강지현은 정유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조예원의 주량은 강지현보다 좋았고 강지현은 정말 취해버렸다.호텔로 도착해서도 강지현은 깨지 않았다.오늘 그녀는 성원에서 회의에 참석하느라 강지현이 정유진을 찾으러 간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가 정유진을 찾아간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을 했다.방안의 등불은 어두웠지만 강지현의 이목구비는 매우 뚜렷했다.조예원은 영원히 강지현을 처음 보았을 때의 장면을 잊지 못했다.그는 인테리어를 마치지 않은 마당에 서있었는데 트렌치코트를 입고 등을 길게 늘어뜨린 채 있었다. 마치 중세 시대에서 걸어 나오는 신사 같았다.잠시 침대 머리맡에 서있다가 그녀는 욕실로 가 샤워를 했다.저번에 그녀는 해도 되냐고 물었다가 무정하게 거절당하고 이번에는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처음에 아예 반응이 없다가 한참 지나서야 강지현이 그녀의 키스에 잠에서 깼다.정신이 말짱해진 것은 아니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깬 것이었다.그는 유진 씨라고 하며 조예원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조예원은 처량하게 웃었지만 마음속으로 조금은 기뻤다.다음날 조예원이 먼저 눈을 떴다. 온몸이 욱신거렸다.강지현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고 얼굴이 약간 창백해 보였는데 어젯밤 마신 술 때문일 것이다.조예원은 혹시라도 그가 깰까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샤워를 하러 갔다.샤워를 마친 후 침대 머리맡에 앉아있었던 강지현의 시선과 부딪혔다.조예원은 나름 침착했고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이 단지 잠깐 멈칫한 것뿐이었다. 그리고서는 쇼파의 옷을 주어서 강지현의 앞에서 하나씩 입었다.그녀가 옷을 다 입고 나서 강지현이 말했다.“나한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알고 있어요.”조예원은 그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의 마음속에는 정유진이 있고 집에서는 명문가의 따님들을 소개해 주죠. 저는 당신의 마음속이든 신변이든 제가 설 자리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잘 알고 있으면 다행이고.”조예원은 핸드폰과 가방을 들고 불편함을 참으며 자리를 떠났다.이날 정유진은 현 변
현 변호사와 대화를 나눈 후 정유진은 약간 혼란스러웠다.그보다 더 어이없었다.그녀는 항상 마음속으로 강지찬이 놓지 않는 한 이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한참 커피숍에 앉아 있는데 강민아의 전화가 걸려 왔다.민아는 그녀의 부모님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방문하고 싶었다.정유진은 감히 그녀를 집으로 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노부부가 친척 집에 잠깐 가있어서 집에 없다는 핑계로 강민아를 막았다.강민아도 요즘 주얼리 쇼의 디자인을 맡을 정도로 바빴다. 정유진과 그녀는 대화를 오랫동안 나누며 전화로 한바탕 토론을 했다.정유진은 쇼 디자인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쇼를 본 적이 있고 다지인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이어서 강민아에게 여러 가지 귀중한 조언을 해주었다.통화가 끝나고 3시가 조금 넘었을 때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는데, 낯선 번호였다.정유진이 전화를 받자 저번에 한규진의 생일파티에서 한번 뵌 부 사모님이었다.솔직히 그날 정유진이 알게 된 사람이 너무 많이 어떤 사람들은 미처 연락처도 저장하지 못했다. 부 사모님의 집은 문장사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정유진은 부 사모님이라는 분이 있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부 사모님이 전화한 목적은 집에 인테리어를 하는 작은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마침 정유진의 인테리어 회사가 생각나서 연우 인테리어와 협력하고 싶다는 것이었다.요즘 정유진은 업계에서 여러 주문을 받으니 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부 사모님은 그녀와 공사장에서 만나서 얘기하고 저녁에 다른 동업자들과 식사를 하자고 요청했다.정유진은 시간을 보고 키키를 불러 함께 갔다.가는 길에 키키는 매우 신나 보였다. 요즘 받는 주문의 질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고 이 프로젝트를 잘 끝낸다면 올해 실적은 반드시 좋을 것이라 했다.목적지는 외곽에 있어 조금 멀었다. 다행히도 아직은 낮이 길어 5시라도 어둡지 않았다.하차 후 키키는 어리둥절했다.“대표님, 저희... 잘못 온 건 아니죠?”눈앞에 실제로 건물이 있긴 했지만 짓다 만 폐건물처
정신을 차린 정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귀국한 후로부터 늘 운이 안 좋은 것 같았다. 단지 이번에는 누가 자신을 아니꼬와하는지 모를 뿐이었다.손이 너무 단단히 묶여 있어서 반나절 동안 풀지 못하고 고군분투하였다.금방 앉았는데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들어왔다.정유진은 눈을 부라리고 싶은 충동을 참고 말했다.“또 너야?”전태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맞아요. 당신이 아직 명성을 잃지 않고 멀쩡히 있는데 제가 당신을 그렇게 그냥 둘줄 알았어요?”정유진은 콧방귀를 뀌었다.“그 부 부인은 당신이 찾은 거예요?”“좋아, 이번엔 강지찬이 당신을 어떻게 구할지 두고 볼게요.”전태연은 이번 행동에 매우 만족했다.사실 문을 파는 부 부인은 진짜였지만 정유진에게 전화를 건 “부 부인”은 가짜였다.정유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전태연 씨, 이번 사태는 아마 회사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 같네요.”이 일만 말하면 전태연은 화가 났다. 정유진에게 넘겨준 인터넷 라이브 회사는 원래 전태연이 연습을 하기로 한 회사였다. 그런데 회사를 넘겨받지는 못하기는커녕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도 났다.전태연이 불쌍한 척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외국에 처박혀있었을 것이다.전태연은 속으로 정유진이 죽기를 바랐다.“오만하지 마요!”전태연이 악랄하게 말했다.“이번에는 전씨 가문을 통째로 잃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을 철저히 파멸에 이르도록 할 거예요!”그녀는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마치고 다시 방을 나갔다.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이 방의 조명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밖은 매우 조용했다. 마치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한두 번 들리는 것 같은 아주 낯선 고요함이었다.정유진은 그가 지금 외곽이나 시골에 갇혀있다고 의심했다.키키는 어떻게 됐을까. 전태연은 자기를 겨냥하는 것이니 키키는 괜찮겠지?이렇게 생각하니 조여오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놓을 수 있었다.정유진 앞에서 한참 과시하던 전태연은 더욱 화가 났다.옆방에는 고세연이 단아하게 앉아 있었다.전태연은 그녀를 보면
강지현은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려던 찰나에 의문의 사진을 받았다.사진 속 정유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묶여있었다.사진에는 주소와 함께 ‘경찰에 신고하면 안 됩니다. 혼자 오세요. 큰 깜짝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강지현은 그 문장을 잠시 생각한 후 문자 메시지의 주소로 곧장 달려갔다.다행히도 밤에는 차가 막히지 않아 9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이곳은 도시의 외곽에 있는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강지현의 차는 한적한 마을로 들어섰는데, 대부분의 집은 어두웠고 마을에는 가로등도 없었다.그는 이 지역에 대해 잘 몰랐다. 아마 이런 마을은 거의 대부분이 철거되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도시로 가서 살고 과부와 노인 몇 명만 마을에 남아있을 것이다.차가 마을로 들어선 후, 그는 정유진이 어디 있는지 몰라 속도를 늦췄다.한참을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 있던 사람이 손전등을 들고 흔들자 강지현은 차를 돌렸다.차는 한 마당에 섰다. 방안에는 희미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차를 내리자 마당에는 젊은이가 몇 명 서있었다.“강지현?”아까 손전등을 들고 있던 젊은이가 시시한 어조로 물었다.“네.”“핸드폰 꺼내.”강지현은 눈썹을 찌푸렸다.“정유진 씨는 안에 있어요?”“안에 있어. 그녀를 만나려면 쉬워. 핸드폰 꺼내.”강지현은 핸드폰을 상대방에게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그 사람은 핸드폰의 통화기록을 확인했다.“신고 안 했지?”“아니요.”강지현은 곧바로 방으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거실이었다. 집은 허름했고 소파와 테이블도 너덜너덜했다.강지현은 바로 왼쪽으로 꺾어 옆에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정유진이 손을 묶인 채 침대에 앉아 초조하게 방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여긴 왜 왔어요?”정유진은 깜짝 놀라며 강지현의 뒤를 바라보았다.“혼자 왔어요?”강지현은 급히 달려왔다.“유진 씨, 괜찮아요? 다치지는 않았어요?”정유진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혼자 왔어요? 신고 안 했어요?”강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누군가 저녁밥을 넣어주었다.이미 한밤중이 되어 정유진은 배가 고팠지만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강지현이 도시락을 열어보자 꽤 깔끔하고 냄새도 좋았다.그는 젓가락을 정유진에게 건네며 말했다.“먼저 뭐라도 먹어요.”“걱정 안 돼요?”그가 조금도 경계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정유진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강지현은 그녀를 흘끗 쳐다보고는 다른 도시락도 열고 슬쩍 웃었다.“뭘 걱정해요? 당신만 괜찮으면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어요.”정유진은 밥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태연이 보낸 음식을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 여자는 미쳤다. 그녀가 밥에 무엇을 넣을지 누가 알고?강지현은 그녀의 걱정을 보고 다시 도시락을 닫고 먹지 않았다.밖은 매우 조용했고 강지현이 온 지 꽤 되었지만 전태연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제일 안절부절못하는 전태연은 원래대로라면 와서 한바탕 조롱했을 것이다.강지현은 문을 두드리며 바깥을 향해 외쳤다.“물 있어요?”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잠시 후 누군가가 문틈을 통해 물 두 병을 던졌다.강지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문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사장 불러와요.”물을 갖다주던 문신남이 웃었다.“우리 사장님이 당신이 오라면 오는 사람이야? 가만히 있어.”말을 끝내자마자 다시 문을 잠갔다.강지현은 정유진에게 물을 한 병 건네며 말했다.“사람이 적지는 않네요. 제가 들어올 때만 해도 대여섯 명은 봤어요. 이 마을에는 사는 사람도 적어서 찾기 힘들었을 거예요.”정유진은 걱정에 가득 찼다.“그들이 키키를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어요.”강지현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고 싶었지만, 그는 손을 뻗던 도중에 멈췄다.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자연스럽기만 하던 행동마저도 가볍게 할 수가 없었다.정유진의 미움을 살까 봐 두려웠다.강지현은 물을 두 모금 먹고 위로를 했다.“아버님, 어머님도 이쯤이면 당신이 사고가 난 줄 알고 신고를 했을거예요.”정유진이 걱정하는 것
“집에 돌아올 줄은 알아?”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을 본 최신애는 더욱 화를 냈다.“지금 몇 시인지 좀 봐! 하루 종일 무엇을 하기에 점점 늦게 들어오는 거야?”하지만 오늘 심하게 취한 온유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그저 눈앞의 사람이 귀찮다고 생각했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저 입은 벌렁거릴 때마다 섬뜩하게 느껴졌다.“누구야, 비켜! 막지 마.”운전기사는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는 온유한을 붙잡으며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이 많이 취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내일 하세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화가 났다.“얘 오늘 어디 간 거야?”“최의현 도련님의 약혼식에 참석했다가 끝나고 에이프릴로 갔습니다.”“거기서 여태껏 술을 마셨다고?”“네...”최신애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얼른 방으로 데려가 눕혀... 아줌마, 내일 유한이에게 해장국을 끓여줘...”온유한을 방에 눕힌 뒤 최신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일찍 잠이 든 온혁진을 본 최신애는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때려 그를 깨웠다.“아들이 이 꼴인데 잠이 와요?”온혁진은 싫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무슨 뜻이에요?”그 말에 화가 난 최신애는 모든 불만을 온혁진에게 쏟아냈다.“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아버지로서 유한이를 위해 한 게 뭔데요?”온혁진은 더 이상 잘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아들 일, 관여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온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평생 의사로 살 수는 없잖아. 왜 그렇게 유한이를 핍박하는 거야? 죄만 안 짓고 사고만 안 치면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당신도 신경 쓰지 마. 예전의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하지만 최신애는 다른 일을 생각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를 회수한 후 임씨 가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유희가 3년째 유한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우리 아들도 이제 서른 다섯이에요. 유희 집안에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최의현의 약혼녀도 서울에서 유명한 재벌 집 딸로 이 결혼은 가문에서 맺어 준 것이었다.여자는 단아한 외모의 전형적인 재벌 집 숙녀로 최의현의 전 여자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최의현 같은 남자가 평소에 아무리 날라리라고 해도 배우자는 절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온유한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최의현은 그가 안 오는 줄 알았다.“한참을 기다렸잖아. 네 자리는 지찬이 옆인데 괜찮지?”최의현은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응.”강지찬과 한규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한 온유한은 본인 자리가 두 사람의 중간임을 알았다.정말 최의현다운 섬세한 배치였다.그 테이블로 다가간 온유한은 예전처럼 한 명씩 인사했다.“지찬아, 규진아, 은우야...”강지찬만 빼고 그의 인사를 다 받아줬고 온유한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한규진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요즘 뭐 해?”“별일 없이 바쁘기만 하지 뭐.”온유한은 말을 아꼈다.몇 년간 수술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병원은 다니고 있었다. 온혁진의 나이가 많아 온유한이 병원과 공장 양쪽 모두 돌봐야 했다.강지찬이 투자를 회수한 후 공장 건설이 하마터면 무산될 뻔했다.그러다가 최신애의 예상처럼 임씨 가문에서 투자를 한 덕분에 간신히 버텼다.다만 투자라는 것은 원래 접대도 많은 법, 온씨 부자는 매일 같이 각 투자자들을 접대했다.한규진이 온유한의 옆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아가 곧 온대.”깜짝 놀란 온유한이 손을 심하게 떨었다. 그 바람에 술잔에 든 술이 쏟아질 뻔했다.몇 초 후, 그는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래?”“서원준과의 관계를 명확히 발표한다는데 약혼하러 오는 것인지 모르겠어.”온유한은 계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아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시집갈 때가 되었지. 서원준 씨, 사람 괜찮은 것 같아.”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했기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강지찬은 온유한을 흘겨봤다.약혼식이 끝난 후 온유한
“온 선생님, 제발요. 주임님이 의사를 데려오기 전에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구원 의사를 찾으러 온 젊은 간호사는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간 뒤, 전성호의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따라와.”전성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예전에 응급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오늘 대형 교통사고 때문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모두들 바삐 돌아쳤다.온유한을 발견한 응급실 주임은 마치 구세주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온 선생님, 잘 왔어요. 흉부를 수술해야 할 환자가 생겼는데 온 선생에게 맡길게요.”늙은 주임 의사가 피 묻은 장갑을 벗자 조수가 급히 새 장갑으로 갈아끼워줬다. 그러고는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 안에는 보조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온 선생님, 수술대에 설 수 있겠어요?”전성호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온유한이 3년 동안 메스를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같이해.”“네?”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손을 씻고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무균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전성호는 온유한이 수술대에 선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환자는 이미 마취한 상태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며 모두가 온유한만 바라보고 있었다.온유한은 전성호를 보고 턱을 한 번 치켜들며 말했다.“이 수술은 네가 해.”“뭐라고요?!”전성호는 어안이 벙벙했다.“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주임님의 조수로만 해봤습니다.”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환자의 상태를 봤는데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할 거야?”“저...”전성호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외과 의사라면 언젠가는 큰 수술을 집도할 수 있어야 했다.온유한이 3년 동안 퇴폐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가장 우수한 학생인 전성호는 진작 수술대에 섰을 것이다.“내가 옆에서 도와줄게.”온유한의 말에 전성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머리를
3년 후.밖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새벽 한 시가 되기 전, 오늘은 그나마 이른 편이다.문이 열리더니 비틀거리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하인이 얼른 가서 그의 손에 있는 차 키 등을 받은 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도련님, 사모님이 아직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오늘 저녁, 온유한은 평소보다 덜 취했기에 아직 멀쩡한 상태였다.“어머, 온 여사가 나를 기다린다고?”비틀비틀 걸어간 온유한은 실크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 그를 노려보는 최신애를 발견했다.“온 여사님, 오늘 또 나를 혼낼 건가요?”‘온 여사'라는 말에 최신애는 화가 났다. 온유한이 강지아와 헤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또 술 마신 거야? 온유한, 넌 서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흉부외과 의사였어. 기억나?”“의사?”온유한이 허탈하게 웃었다.“메스를 든 지가 언제인데요? 3년 전 일이에요.”몇 발짝 앞으로 다가간 최신애는 온유한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기억하고 있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게 공부해 놓고 여자 때문에 너 자신을 다 망치다니. 우리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이게 다 온 여사 덕분이잖아요?”온유한이 최신애를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지아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요? 이제 다시 수술 못 하는데 그래도 지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최신애는 가슴이 아팠다.“너 정말! 나에게 복수하려고 일부러 너 스스로를 망친 거야? 미쳤어?”“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온유한은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왼쪽 손을 최신애에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주 멀쩡해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다고요. 아들이 이런 모습이어도 잘난 척할 건가요?”‘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최신애가 온유한의 뺨을 후려갈겼다.“개자식,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온유한은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3년이 지났다.그 사이 강지아는 여러 번 돌아왔지만 온유한을 만나주지 않았다.처음에는 미친
강지아는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급하게 떠났다.작업실의 문은 닫지 않았지만 국내 업무는 모두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중요한 결정만 했다.“혼자 떠났고 서원준은 가지 않았어. 지찬이와 형수 외에는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넌 못 들었지?”최의현에 말에 온유한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못 들었어.”전화를 끊은 온유한은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며칠 전 강지아에게 계속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메시지도 발송이 안 되었다.강지아가 그를 차단했던 것이다.한참 생각하던 온유한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를 본 의사와 간호사는 깜짝 놀랐다.“온 선생님, 다리 괜찮아요? 저렇게 뛰면...”“무슨 일이지? 온 선생님 표정이 너무 무서워.”정유진이 저녁 먹을 준비를 할 때 하인이 들어와 온유한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이내 모직 코트 안에 흰 가운을 입은 온유한이 정유진 앞에 나타났다.“형수님, 지아를 만나게 해주세요.”정유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간 걸 알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온유한은 아픈 다리 때문에 땀범벅이 되었다.“진짜로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정유진은 온유한의 다리를 힐끗 본 후 말했다.“하지만 확실히 갔어요. 일단 저녁 먹고 병원에 다시 가세요.”온유한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왜 떠나는데요?”정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디 간 거예요?”정유진이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온유한이 혼자서 중얼거렸다.“나를 못 믿겠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네요.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는데 안 믿었어요.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진짜로 나랑 헤어지자는 것일까요?”정유진은 넋이 나간 온유한을 보고는 정명학에게 눈짓을 했다.정명학은 앞으로 걸어 나와 온유한을 잡아당겨 식탁에 앉혔다.“지아가 바람 쐬러 나갔다고 생각하고 일단 밥부터 먹어. 밥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서 다리부터 다시 검사
서원준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강지아는 2층 창문에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서원준은 일부러 한마디 했다.“그만 봐, 서울로 올라갔으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봐. 효자 노릇 하러 갔어.”창가에 가만히 서 있던 강지아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서원준, 밖에 나가 바람 좀 쐬고 싶어.”서원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한편, 온유한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최신애는 이미 태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혈압 때문에 쓰러지면서 건물에서 떨어져 발목을 삐끗했고 골반 뼈가 부러졌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임유희가 그녀의 병실에 함께 있었다. 온유한은 병실에 들어오기도 전에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온유한이 코트를 손에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유한 오빠, 왔어요?”임유희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고 최신애도 마음이 뿌듯했다.시간을 계산해보니 그녀가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온유한이 달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이 말인즉슨 친정엄마에게 일이 생기면 강지아도 제쳐두고 달려온다는 것이다.“거기 서서 뭐 해, 다리가 아직 안 나았잖아. 무리하지 말고 와서 앉아. 밥은 먹었니?”최신애의 말에도 온유한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웃고 떠드는 최신애를 보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장 주임에게 상태가 어떤지 물어볼게요.”말을 마친 온유한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병실을 나가자 최신애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점점 굳어졌다.“유희야, 봤니? 내가 미워서 저래.”최신애는 임유희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너희들을 맺어주려고 온씨 가문 사람들의 미움을 샀어. 나중에 우리 온씨 가문에 들어오면 이 시어머니께 효도해야 한다.”그 말에 임유희의 볼이 빨개졌다.“어머니. 유한 오빠가 어떻게 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오빠도 돌아왔으니 제가 더 노력할게요.”“역시 똑똑한 유희, 너무 마음에 들어.”최신애는 흡족해했다.최신애에게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온유한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온 선생님이 또 오신 것 같아요.”동하민이 강지아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정유진에게 말했다.“오지 말라고 전해, 지아는 만나지 않을 거야.”“네.”문에 기대어 서 있는 온유한은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진 모습이었다.“온 선생님, 대표님이 온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냥...”동하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한은 그녀를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마당의 나무 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는 강지아를 덥석 껴안았다.순식간에 몸이 굳어진 강지아는 코끝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지아야, 나도 이쪽에 집을 하나 샀어. 너만 괜찮으면 내가 여기에 와서 너와 같이 살게. 어때?”“이거 놔!”온유한은 강지아가 몸부림칠수록 더 꽉 껴안았다.깜짝 놀란 동하민은 얼른 다가와 온유한을 잡아당겼다.“온 선생님, 대표님 상처가 아직 다 안 나았어요. 자극하지 마세요!”온유한은 동하민의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네가 일부러 기억 잃은 척한다는 거 알아. 지아야, 나 진짜로 임유희와 아무 일도 없었어.”강지아는 몸부림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뭐? 이제 와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 어머니에게 그렇게 많은 수모를 당했는데 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오빠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우리 어머니는 어머니이고 나는 나야!”온유한이 다급히 소리쳤다.“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나에게 벌을 주지 말아줘.”“그건 오빠 엄마야!”강지아의 말에 온유한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강지아를 품에서 놓아주었다.“그래서 우리 엄마 때문에 지금 나 쳐다보기도 싫은 거야?”강지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온유한, 이러면 우리 서로만 괴로워. 그만하자.”“하...”온유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네 마음속에 나와 함께 있는 게 괴로운 거였구나.”강지아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여긴 왜 왔죠?”이때 멀리서 온유한을 발견한 서원준은 그와 싸우기 위해
온유한을 바라보는 강지아의 눈빛은 아주 낯설었다. 마치 눈앞의 남자를 정말 모르는 듯했다.다른 사람들도 강지아가 정말로 기억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몰라 서로만 쳐다보았다.“지아야, 이러지 마.”온유한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강지아가 온유한에게서 손을 빼더니 정유진을 향해 말했다.서원준은 온유한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밖으로 끌고 나갔다.“봤어요? 지아는 그쪽을 기억하지 못해요.”온유한은 의사를 찾으러 갔다.“기억 상실이라고요?”베테랑 의사가 안경을 위로 밀며 말했다.“기억 상실일 리가 없을 텐데...”MRI 사진을 들고 온유한과 한참을 얘기한 베테랑 의사가 한마디 했다.“이상하네요. 진짜로 기억을 잃었다고요?”온유한은 바로 알아챘다.기억 상실이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강지아가 깨어나자 강지찬은 서울로 올라갔고 정유진과 그녀의 엄마 아빠가 이곳에 남아 강지아의 병간호를 했다.온미정과 백무영은 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여행을 갈 예정이었지만 강지아의 사고로 일정을 취소했다.온미정도 신혼여행 갈 기분이 아니었기에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이삿짐을 정리했다.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사이다. 모든 물건을 차에 실어 온혁진의 집에 있던 그녀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새언니가 잘못했다고 해서 굳이 집을 나갈 필요는 없잖아?”온혁진의 표정은 보기 안 좋았다. 서울로 올라온 후, 강지찬은 투자를 빠른 속도로 회수하기 시작했다.정유진과 친한 온미정이었는데 이젠 온미정이 이사를 갔으니 강씨 가문과 사이좋게 지낼 사람마저 없어졌다.온미정은 최신애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나에게 새언니 따위는 없어요. 나는 나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을 제일 증오해요. 그런데 최신애는 나를 바보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내 감정을 이용했어요. 이런 정신 나간 미치광이를 더 이상 내 새언니로 인정할 수 없어요.”물건을 차에 다 실은 뒤 온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오빠, 유한이 좀 더 지켜봐 주세요. 나보다 백배는 더 힘들 거예요. 그
꿈은 정말 깨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강지아와 같이 웃으며 놀았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깨어난 온유한은 호텔에 누워있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끼고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유한 오빠, 깼어요?”침대 옆에 엎드려 밤새도록 그를 지켰던 임유희도 깼다.온유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배고프죠? 아침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게요.”“꺼져.”임유희는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물 한 잔 따라 놓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호텔 직원이 아침 식사와 해장국을 가져다주었다.온유한도 먹지 않은 채 또 한참을 누워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거울을 보니 눈두덩이가 움푹 패였고 수염이 길게 나 있어 아주 초라해 보였다.온유한은 수염을 깎고 머리를 정리한 후 옷을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강지아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상태였다.늦은 시간, 병원에는 정유진과 온미정 그리고 화령이 강지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화령은 일 때문에 최금성과 같이 온미정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다. 그런데 강지아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세 여자는 온유한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유한도 주위 사람을 못 본 듯 곧장 강지아의 침대 옆으로 가더니 강지아의 손을 잡았다.보다 못한 온미정이 나가서 죽 한 그릇을 사 왔다.“와서 일단 밥부터 먹어.”온미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온유한은 강지아만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모습에 온미정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이런 꼴로 곁에 있으면 지아가 마음을 돌리겠어? 지아는커녕 나도 널 용서 못 해.”온미정은 화가 났지만 혹시라도 강지찬이 올까 봐 목소리를 낮췄다.대신 온유한의 팔을 잡고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어. 굶어 죽고 싶은 거야?!”온유한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굶어 죽으면 용서해 줄까요?”온미정은 이 자식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바로 이때 병실에 들어온 강지찬과 서원준이 강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온유한을 발견했다. 서원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