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치료하던 백아영은 움찔하더니 애써 눈물을 참으며 이 악물고 말했다. “유기견을 주워서 집에 데려간다고 해도 넌 절대 안 데려갈 거야.”용서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 말속에서는 백아영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이성준은 벽에 기대어 그윽한 눈빛으로 마음 약해진 백아영을 바라봤다. “아영, 우리 여기서 나가면 아이 한 명 더 낳자. 응?”유산된 아이는 그녀에게 큰 상처였지만 이성준이 이렇게 말하니 마치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온 듯 덜 고통스러웠다.백아영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싫어.”이성준은 시종일관 웃음을 머금었다.“현무가 여동생 있었으면 좋겠대. 여동생 만들어줄까? 어때?”“싫다고.”“만약에 둘째가 딸이면 공주처럼 애지중지하며 키울 거야. 아들이면 현무랑 같이 비즈니스 배우게 하면 되고.”“애들이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물어보기는 했어? 다 너처럼 사업하는 걸 좋아한다고 착각하지 마.”이성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애틋한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봤다.“현무랑 둘째가 사업하고 싶지 않다면 셋째, 넷째, 다섯째까지 낳아야지. 낳다 보면 적성에 맞는 아이가 있지 않을까?”백아영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넷째? 다섯째? 아예 나한테 축구팀을 만들어달라지 그래?”이성준은 웃음이 터졌다.“그럼, 둘째 낳는 걸 동의하는 거지?”백아영은 순식간에 이성준의 꾀에 넘어간 자신을 발견하고선 경악했다.그녀는 화를 내며 이성준을 노려봤다.“이성준!”“듣고 있어.”그는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난 네가 성준이라고 불러주는 게 더 좋아.”그의 밝은 웃음은 매혹적이고 눈부셨다.봄바람처럼 따스한 이성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망 속에 휩싸여 심란하던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이성준의 고집스러움을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와 함께 있는 1분 1초를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성준아, 나 기분 좋게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얼른 쉬어. 아무 데도 안 가고 옆에 있을게.”
이성준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장담은 못하겠어.”만약 똑같은 상황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성준은 변함없이 모든 걸 숨길 생각이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상처를 백아영에게 말할 자신이 없을뿐더러 그녀에게 이렇게 큰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스스로 감당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이성준이다.“하지만...”이성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고쳐볼게.”...평화로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성준은 또 끌려갔다.“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으면 이제 그만해. 이거 놔! 놓으라고!”백아영의 몸부림과 비명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그녀는 이성준이 끌려가는 걸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가 다시 돌아왔을 땐 백아영이 치료해 줬던 상처마저 모두 찢겨졌고, 또 다른 상처까지 더해져 피투성이가 된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멘탈이 무너진 백아영은 당장이라도 모든 사람을 죽여버리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도대체 언제까지 괴롭히려는 거야...”이성준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그녀를 위로했다.“괜찮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죽느니만 못한 고문을 언제까지 견뎌야 한다는 말인가?“성준아, 협상하는 게 어때? 원하는 걸 주고 여기서 떠나.”온씨 가문은 이성준의 권력을 원하고 있으니 순순히 내어준다면 협상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그러나 이성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난 너랑 같이 나갈 거야.”설사 권력으로 거래한들 스스로 떠나게 될 뿐 백아영은 여전히 이곳에 남게 된다. 지금까지 이 막강한 고통을 참아냈던 건 백아영과 함께 떠나려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기회는 반드시 찾아올 거야.”흐르는 눈물은 멈출 줄 몰랐고 마치 목구멍에 젖은 솜뭉치를 쑤셔 넣은 것처럼 숨이 막혀온 백아영은 괴로움에 말 한마디도 못 했다.이성준은 이 지옥에 백아영을 혼자 두고 떠날 수 없었고 백아영은 그가 죽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그렇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함이 밀려왔으나 백아영은 애써 울음을 참으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또라니? 저번에 도망갔던 사람은 너잖아.”이성준은 목이 메어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진작에 혼인신고를 했을 거야.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어. 여기서 나가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결혼식을 선물해 줄게. 어때?”결혼식? 이성준과 결혼하는 건 백아영의 단 하나뿐인 소원이자 이뤄질 수 없는 꿈이다.여기서 나갈 수가 없으니까...“그래.”백아영은 그의 옆에 머리를 기댔다.“이번에 또 약속을 깨는 사람이 있다면 서로 평생 용서하지 말자. 다시는 사랑하지 말고 그리워하지도 말고 각자 새로운 삶을 사는 거야.”“그건 안돼.”이성준은 단칼에 거절했다.“난 절대 손 놓을 생각 없어. 네가 약속을 어긴다면 아무 데도 못 가게 가둬놓을 거야. 그러면 영원히 내 옆에 있을 수 있잖아.”백아영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떠올리며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때쯤이면 온전한 시체조차 남아있지 못할 수도 있다....죽느니만 못하는 하루하루가 반복되었고 이성준의 상태는 나날이 악화하고 있었다.몸에 난 상처보다 더 괴로운 건 밤마다 찾아오는 악몽과 점점 더 억제하기 어려워지는 그의 난폭함이었다.시도 때도 없이 짜증이 밀려왔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마저 생겼다.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을 때조차도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고 마치 마음속에 있는 시한폭탄이 곧 터질 것만 같았다.쿵!어둠 속에서 그는 주먹으로 벽을 세게 내리쳤고, 순간 손등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깜짝 놀라서 잠에서 깬 백아영은 다급하게 그의 팔을 껴안았다.“왜 그래?”난폭함이 가시기는커녕 오히려 백아영을 밀어내고 싶었지만 의지력으로 간신히 버텼다.그는 어둠 속에서 백아영을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아영아, 나 이상해. 계속 화내고 싶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고, 눈에 보이는 건 뭐든지
마지막 날.오늘따라 이성준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평소와 달리 백아영을 등진 채 구석에서 벽을 마주 보며 서 있었다.“다가오지 마.”이성준은 쉰 목소리로 호통쳤고 잔뜩 긴장한 듯한 모습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불안감이 밀려온 백아영은 걱정스레 물었다.“성준아, 왜 그래?”“오지 말라고!”“상처 치료해야지...”“어차피 내일이면 또 갈라질 텐데 치료하나 마나 똑같아.”그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고 바닥은 순식간에 피로 빨갛게 물었다.백아영은 가슴이 미어졌지만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후 초조하게 구급상자를 들고 발만 동동 굴렀다.“일단 진정해. 나중에 치료할게.”이성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치 내면의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듯 몸을 떨더니 잠시 후 주먹으로 벽을 세게 내리쳤다.벽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고 이성준은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듯 계속 내리쳤다.그 소리는 백아영에게 천둥번개처럼 크게 다가왔고 가슴이 찢길 듯 고통스러웠다.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달려가서 이성준의 팔을 끌어안았다.“성준아, 제발 그만해. 더 이상 다치면 안 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아영은 이성준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됐고 흉악하고 사나운 모습은 마치 악마 같았다.백아영을 바라보는 눈빛도 싸늘하기 그지없었는데 그 속에서 언뜻 살기가 느껴졌다.“죽어!”기다란 손가락이 백아영의 목을 향했다.목덜미의 뜨거운 감촉을 느끼자 그는 더없이 흥분했고, 빨갛게 충혈된 눈에는 살인의 쾌감으로 가득 찼다.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던 광기가 마침내 풀리자 이성을 통제할 수 없었다.‘죽어! 죽어버려!’백아영은 숨이 막히고 목이 으스러질 듯한 아픔까지 덮쳐 눈앞에 캄캄해졌다.이성준의 상태가 나날이 악화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통제 불능의 지경에 이르러도 자신만큼은 공격하지 않으리라 굳게 믿었다.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다.백아영은 칼에 베
살며시 그를 껴안자 백아영의 몸도 순식간에 피로 뒤덮였다.살을 에는 듯 차가운 피에 그녀는 몸이 굳어졌지만 애써 고개를 들고 웃으며 이성준을 바라봤다.“우리 오빠가 엄청 대단하신 정신과 의사를 알고 있거든? 나중에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거야.”치료될 가능성은 있겠지만 현재의 이성준은 이미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은 이렇게 정신을 되찾았다 하더라도 내일 백아영을 공격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없었다.그는 온몸이 굳어지더니 또다시 난폭함이 밀려오는 듯 눈빛이 사납게 변했고 주먹을 꽉 쥔 채 고통스러워하며 마음속의 살의를 억제했다.“저리 가!”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백아영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손을 뻗어 살며시 그의 목을 감쌌다.그녀는 이성준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성준아, 이제 이 고통도 곧 끝날 거야.”백아영은 조심스럽게 이성준에게 입을 맞췄고 그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다.“약속 어긴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않기로 했던 거 기억하지?”이성준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와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렸으나 입을 열기도 전에 목덜미에 심한 압박감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백아영은 그를 껴안고 조심스레 바닥에 눕힌 후 능숙하게 구급상자를 가져와 그를 치료했다.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시는 상처 벌어질 일 없을 거야. 이제 다 끝났거든. 성준아...”백아영의 창백한 입가에는 해탈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잘 살아.”다음날 이성준이 평소와 같이 끌려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백아영도 끌려갔다.백발노인은 고문실에 앉아 싸늘한 눈빛으로 의자에 묶인 채 미쳐가는 이성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빨갛게 충혈된 두 눈과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이성을 잃은 그의 모습은 마치 좀비 같았다.“상태가 이런데 어떻게 협상하지?”백발노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심보라는 향 하나를 꺼냈다.“이 향을 피우면 서서히 이성을 되찾을 겁니다. 자신의 난폭함을 통제할 수 없다는 자책감에 시달려 멘탈이 무너지는 그때 협상
온시혁은 빠른 걸음으로 제약실에 도착했고 생화학 약품은 불과 그녀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냉동고에 있었다.그러나 그에게 업혀있는 탓에 생화학 약품이 눈앞에서 멀어지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지금 그걸 얻지 못한다면 온시혁에게 끔찍한 일을 당할 뿐만 아니라 이성준도 도망갈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의 병은 더욱 심각해져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백아영도 죽는 것보다 못한 경험을 겪게 된다.애가 탄 그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아! 배 아파. 너무 아파.”온시혁은 걸음을 멈춰 그녀를 힐끗 보고선 짜증 나는 듯 경고했다.“개수작 부리지 마.”“그게 아니라 정말 배가 너무 아파...”말을 이어가던 백아영은 이를 악문 채 배 위의 혈자리를 눌렀다.순간 사지를 찢는듯한 고통이 온몸에 퍼지면서 검붉은 피가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피납니다.”온유성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어떻게 된 일이지? 당장 의사 불러와.”“재수 없어.”온시혁은 싸늘한 표정으로 백아영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배도 아픈데 넘어지면서 몸까지 부딪히자 고통이 밀려와 눈앞이 캄캄해졌다. 의식을 잃을뻔했으나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로 혀끝을 세게 깨물었다.동시에 마지막 힘을 짜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의사가 다가오는 틈을 타 냉동고를 향해 돌진했다.쏜살같이 달려간 백아영은 다른 사람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냉동고에서 생화학 약품을 꺼냈고 온시혁이 그녀를 향해 다가가자 손을 높이 들어 올려 그들을 위협했다.“다가오면 부숴버릴 거예요.”그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공포에 찬 얼굴로 얼어붙었다.온시혁은 화를 내며 말했다.“백아영, 네가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건 해독할 수 없어. 부숴버린다고? 그럼 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백아영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거란 확신이 든 온시혁은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내가 죽는 걸 두려워할 것 같아?”백아영은 생
이성준은 수갑을 풀자마자 향을 내놓으라는 듯 손을 뻗었다.“이리 줘.”간절함에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은 마약중독자와 다름없었다.백발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인은 이성준에게 향을 건네줬고, 향을 손에 넣은 그는 곧바로 코끝에 대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백발노인은 주의 깊게 그를 살폈다.향을 들이마신 후 이성준은 정신을 조금 차린듯 보였으나 이미 이성을 잃어 아무런 반항 없이 깔끔하게 계약서에 사인했다.그렇게 그의 모든 재산과 권력은 백발노인의 소유가 되었다.“비밀키는 금고 안에 있어.”핵심 기밀은 비밀키가 있어야 열 수 있었고, 금고의 비밀번호는 이성준만 알고 있다.“사람 시켜서 가져오라고 할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비밀키를 줄 테니까 포뮬러 시트 넘겨줘.”이성준의 조건을 들은 백발노인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시원시원한 그의 행동을 보고 저도 모르게 의심이 들었다.밖으로 나온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심보라에게 물었다.“백아영이 사고를 치자마자 계약서에 사인했어.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해.”의심하는 그의 모습에 심보라는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렸다.계획대로 이성을 잃게 된 건 맞으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꼬리를 내린 이성준을 보며 한편으로 불안했다.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온씨 가문은 이성준의 돈과 권력을 손에 넣자마자 무자비하게 그를 죽일 수도 있다.이성준의 정신은 90% 파괴되었다. 설사 그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을 헤쳐 나가지 못할 것이다.이제 비밀키만 넘겨준다면 심보라는 이성준과 함께 떠날 수있다.“단향의 약효가 극에 달했으니 곧 무너질 겁니다.”심보라의 답을 들은 백발노인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후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사악한 눈빛으로 이성준을 바라봤다.“향 원해? 대신 조건이 있어.”그 시각 백아영은 혹시 모를 기습 공격을 피하고자 생화학 약품을 들고 구석 한쪽에 서 있었다.마지막 기회를 손에 넣은 그녀는 신중하고 조심
심보라는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강철처럼 강인하던 이성준도 무너지는 정신력 앞에서는 별수 없었고 끝내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백아영을 배신했다.앞으로 이 죄책감은 영원히 이성준의 가슴에 남아 악마처럼 그를 괴롭힐 것이며 백아영과 재결합하는 건 불가능이나 다름없다.이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심보라에게 조종당하는 삶이다. 곧 몇 시간 후면 심보라와 함께 이곳을 떠나게 되고 온전히 그녀의 소유가 된다.두 시간 후.백발노인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일부러 소리높이 말했다.“시혁이 아직도 안 나왔어?”“도련님 체력이 좋으신 편인가 봅니다.”백발노인은 만족스러운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니 곧바로 험상궂게 이성준을 바라봤다.“아직도 버티고 있는 걸 보면 대단한데?”이성준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손수 다른 남자의 침대로 보냈다.극도로 침울한 어둠에 휩싸인 그는 향을 꼭 쥐고 있었고 그 향은 마치 절벽에서 떨어진 사람이 유일하게 잡을 수 있는 덩굴 같았다.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는 모두가 이기적으로 변한다. 물론 이성준도 예외는 아니다.“어르신, 손님 오셨습니다.”위정이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처참한 이성준의 모습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사장님,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까?”온몸이 상처로 뒤덮여 있었고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은 사람보다 짐승에 더 가까웠다.“빌어먹을 온씨 가문!”위정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를 바득바득 갈았고 죽일듯한 눈빛으로 온씨 가문을 째려봤다.이성준은 의자에 기대앉아 힘없이 말했다.“금고는?”“사장님, 정말로 비밀키를 내어주실 생각입니까? 이건 이씨 가문의 전부나 다름없다고요.”이성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렇지 않으면 어떡할 건데? 이대로 죽을까?”위정은 할 말이 많았으나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목숨에 비하면 돈과 권력은 아무것도 아니니까.그는 비통한 한숨을 쉬며 가져온 금고를 이성준 앞으로 끌고 갔다.이성준이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