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에 이성준은 손목을 들어 자신의 시계를 확인했고 동시에 백아영이 차고 있던 은색의 팔찌에서 ‘띠딕’ 소리가 들려왔다. 폭탄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날 배신한 대가는 죽음이야!”백아영은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시한 폭탄에는 4:59이라고 떠 있었다.이제 5분도 안 남았다.잠깐의 두려움을 끝으로 그녀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대회장에서 민우진을 보지 못했을 때 백아영은 이런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다.“성준아.”백아영은 간절한 눈빛으로 이성준을 바라봤다.“난 얼마 못 살 것 같으니까 내 아이 좀 돌봐줄 수 있어? 정말 말도 안 되는 부탁이긴 하지만 나도 이제 어쩔 수가 없네.”이제 다른 사람인 척 연기를 안 해도 되니 백아영은 마음 편히 말했다. 예전과는 다른 요염하고 매혹적인 얼굴을 하고 있어도 그 속에서는 여전히 청순함과 순수함이 느껴졌다.이성준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고 설렘을 느끼는 동시에 걱정이 앞섰다.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백아영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팔찌를 바라보며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처리해!”이성준이 내뱉은 말에서 싸늘함이 느껴졌다.“죽여!”곧바로 대회장 사방에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이 수백 명이 몰려오더니 제갈연준을 향해 사납게 돌진했고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제갈연준은 이성준이 뇌 연구 프로젝트의 규칙을 무시한 채 이곳에서 손을 쓰게 될 줄은 전혀 몰랐기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입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그러나 경호원들은 일찌감치 입구를 막았고 그렇게 양측을 서로 죽일 듯이 싸웠다.혼란스러운 장면을 지켜보던 백아영은 마음이 착잡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제갈연준같이 세상에 해로운 존재는 죽는 게 맞아.”그녀는 말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창가로 걸어갔다.13층에 달하는 아득한 높이에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곧 터질듯한 시한 폭탄을 보며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죄없는 사람까지 해칠 수는 없었기에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성준아,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내 아들한
이성준이 폭탄을 제거할 수 있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백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놀라움과 별개로 걱정이 더 앞섰다.“4분밖에 안 남았어.”팔찌로 만들어진 폭탄은 일반 폭탄에 비해 훨씬 정교했기에 해체하는 것도 수십 배 어려웠다. 그것도 짧은 시간에 해체하는 건... 성공할 가능성이 극히 낮다.이성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엄숙한 표정으로 직접 손을 쓰기 시작하더니 재빨리 팔찌 표면을 떼어냈고 곧이어 안에 들어있던 폭탄이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폭탄을 이대로 제거하는 순간 터질 게 분명했다.“그거 한번 작동하면 제거할 수도, 멈출 수도 없는 특수 제작한 폭탄이야. 폭발이 유일한 방법이지.”제갈연준은 경호원에게 이끌려 가는 와중에도 비아냥을 멈출 수가 없었고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백아영을 바라보며 원망했다.“백아영, 내가 말했지! 날 배신하는 순간 죽음뿐이라고!”그녀는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지난 몇 년간 제갈연준과 함께 지내면서 그가 얼마나 변태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악마인지 알고 있었기에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게 의외는 아니었다.제갈연준은 자신이 갖지 못하는 건 무조건 파괴하는 미친놈이었다.1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보며 백아영은 애써 웃음 지으며 이성준의 손을 살며시 잡아당겼다.“성준아, 고마운데 이제 그만해. 얼른 가, 너까지 다치게 만들고 싶지 않아.”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며 이성준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갈연준의 말에도 전혀 흔들림 없는 그의 손은 멈출 줄 몰랐고 폭탄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했다.“성준아.”그런 이성준의 모습에 백아영도 당황하기 시작했다.지난 몇 년 동안의 삶은 죽는 것보다 더 고달팠고, 이제 죽음이라는 결말을 맺어야 할 때가 왔다. 비록 두렵고 겁났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고 특히나 이성준한테는 더 싫었다.“폭탄은 제거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이제 포기하고 그만해. 얼른 가라고, 진짜 시간 얼마 안 남았
민우진은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고함을 질렀고, 폭탄의 카운트다운 소리는 마치 머리 위에 매달린 작두처럼 느껴져 금방이라도 떨어져 죽을 것만 같았다.눈물로 눈앞이 흐려진 백아영은 가슴이 쓰라렸다.“성준아! 얼른 가!”백아영의 말투는 단호했다.“우리 아무 사이 아니잖아. 굳이 나랑 같이 죽을 필요 없어.”이성준의 진심이 듣고 싶었지만 더 이상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이성준을 밀어냈다.폭탄 제거에 집중하고 있었던 이성준은 방심한 채로 뒤로 물러났고 그 틈을 타 백아영은 재빨리 창가로 달려가 한쪽 발을 내디뎠다.이제 5초밖에 안 남았다.“성준아, 안녕.”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백아영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창밖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중심을 잃으려던 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끌어당기며 품 안에 안았다.백아영은 쇠붙이처럼 단단한 가슴에 부딪혔고 눈을 떠보니 이성준이 싸늘한 시선과 분노에 찬 얼굴이 보였다.“너 미쳤어? 왜 같이 죽으려고 하는 건데!”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이성준은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틈도 없이 그는 손을 뻗어 백아영을 잡았다.머릿속에는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더 이상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띠익-카운트다운 소리는 더 날카롭게 들려왔고 이제 3초밖에 안 남았다.두려움에 질린 백아영은 격렬한 몸부림을 치며 이성준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오히려 백아영을 꽉 껴안았다.정말로 미친 것 같았다!“백아영, 이대로 떠날 생각 하지 마. 나한테 빚진 거 갚아야지!”이제 2초밖에 안 남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안더니 대회장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의 행동에 깜짝 놀란 백아영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고, 사람 많은 대회장으로 향하는 이성준이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죽으려면 혼자 죽지! 정말 미쳤어!’띠익-마지막 1초를 남긴 백아영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눈을 감았고, 순간 바로 앞에서 끙끙대는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이성준이 누군가를 걷어차 넘어뜨린 것
백아영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이성준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며 설명했다.“아까 널 끌어당기면서 제갈연준이랑 가까워졌는데 그때 카운트다운이 조금 느려지는 걸 발견했어. 예전에 폭탄을 제거했던 경험이 있어서 확신할 수 있었지.”백아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정신없는 와중에 카운트다운이 느려져봤자 고작 0.001초일 텐데, 그걸 발견한 이성준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감탄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백아영의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우리 이제 돌아가자.”백아영은 이 상황이 믿지 않아 주춤했다. 4년 동안 감금을 당하면서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고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코끝이 찡해졌다.마침내 악마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그래!”백아영은 행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이성준과 함께 떠나려던 찰나 경호원에게 붙잡혀 있던 제갈연준이 손을 썼다.그를 잡고 있던 경호원은 순식간에 중독되어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았고 제갈연준은 날카로운 칼을 든 채 이성준을 향해 달려왔다.“죽어!”그는 독사처럼 악랄하고 사악했다.이성준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백아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막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그러나 이성준은 백아영보다 훨씬 빨랐고 앞을 가로막았을 때 다시 그녀를 끌어안으며 반 바퀴를 돌았다. 그렇게 날카로운 칼은 그의 등을 찔렀다.백아영은 순간 온몸이 저렸고 폭탄이 터질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숨막혔다.“이성준!”얼굴이 하얗게 질린 와중에도 그는 백아영을 위로하고 있었다.“괜찮아.”“제갈연준!”분노하는 소리와 함께 선우경진이 달려들었고 그들은 제갈연준을 바닥에 눕힌 채 기절할 정도로 사정없이 때렸다. “아영 씨, 괜찮아요?”민우진은 재빨리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고 걱정되는 듯 물었다.다행히 백아영은 다치지 않았지만 이성준은...너무 걱정된 나머지 백아영은 목소리마저 떨고 있었다.“일단 좀 봐봐.”제갈연준이 직접 손을 썼다는 건 100% 맹독이다.이성준은 창백해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
“벗겨낼 수 있는 거야?”이성준의 질문에 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이성준은 갑자기 손을 내밀었고 백아영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뭐 하는 거야?”“이 얼굴은 너무 못생겨서 거슬려.”그의 말에 백아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지금의 얼굴이 훨씬 정교하고 예쁜 미인상에 가까웠는데 못생겼다는 이성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눈이 잘못된 건가? 이게 안 예쁘다고?’백아영이 생각에 잠긴 틈을 타 이성준은 그녀의 가짜 얼굴을 조금씩 떼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아영은 진짜 본모습을 드러냈다.혈색 없이 창백한 얼굴에서는 여전히 청순함이 느껴졌고 심쿵한 그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는 이성준의 모습에 백아영은 정신을 못 차렸다.그녀는 멍하니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왜 웃어?”이성준은 그녀를 바라봤다.“좋아서.”다쳤는데도 기분이 좋다는 이성준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설마 머리를 다친 건가?’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백아영은 곧바로 물었다.“성준아, 내 아들은 지금 어딨어?”“오는 중이야. 내일이면 도착할 거야.”3년 동안 가슴에만 품고 있었던 아들을 드디어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백아영은 코끝이 찡해졌고 손꼽아 내일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차는 어느덧 이성준과 백아영이 살았던 별장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백아영은 멍하니 낯익은 집을 바라봤고 추억이 마치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드디어 인간 세상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에 감개무량하면서 긴장이 풀렸다.백아영은 이성준을 부축한 채 별장에 들어섰고, 선우경진은 정신 잃은 제갈연준을 등에 업고 뒤를 바짝 따라갔다.별장에 들어서자 익숙한 인테리어와 함께 뚱보 아줌마가 눈에 들어왔다.아줌마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고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사모님이라는 호칭에 백아영을 몸 둘 바를 몰랐다.하지만 오랜만에 만나 눈물을 글썽
이성준은 사람을 집어삼킬 듯한 그윽한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봤고 입술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백아영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던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민우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영 씨!”백아영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고 수줍은 듯 얼굴이 붉어졌다.“우... 우진 도련님.”백아영은 부끄러워 차마 이성준을 바라볼 수 없었다.“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방금 일어난 일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민우진은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 찼지만, 꾹 참고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그는 성큼성큼 백아영에게 다가가더니 부드럽게 말했다.“걱정돼서 따라왔어요. 이성준한테 약 발라주려고요?”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남녀 사이에 그러는 건 불편하니까 제가 대신 할게요.”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한 백아영은 심장이 진정될 줄 몰랐고, 민우진이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성준은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귀찮게 그럴 필요 없어. 난 다른 사람이 해주는 건 불편하거든.”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민우진의 표정도 좋지만은 않았다.부상을 명분으로 백아영에게 접근하려는 그의 모습이 달갑지 않았던 민우진은 시선을 돌려 선우경진을 바라봤다.“선우 도련님처럼 친분 있고 의술 좋은 사람이 치료해 주는 건 싫어하지 않겠지?”마침 제갈연준에게 수갑을 다 채운 선우경진은 고개를 들어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알아챘다.민우진 뿐만 아니라 그 역시도 이성준과 백아영이 가까워지는 게 신경 쓰였기에 곧바로 앞으로 나가 약을 들었다.“제가 할게요.”이성준의 표정은 또다시 어두워졌고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진정된 백아영은 몰래 이성준을 훔쳐봤고 표정이 안 좋은 그의 모습에 상처가 많이 아픈가 싶어 걱정이 앞섰다.민우진은 일부러 그녀와 이성준 사이에 끼어들어 시선을 차단했고,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아영 씨,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며칠 동안 많은 일이 있
화가 난 민우진은 표정이 일그러졌다.이성준이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당장 백아영을 데려갈 수 없었던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아영 씨, 폭탄 제거하는 방법을 제가 꼭 찾을게요. 이건 제 핸드폰이에요.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요.”이성준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곳까지 매번 찾으러 올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백아영은 핸드폰을 건네받았고 이성준은 그녀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한참 노려보다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졸려.”그는 곧바로 손을 들어 불을 껐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방안에서 백아영은 그저 멍하니 침대 옆에 서 있었다.혼자라면 어둠 속에서도 밖으로 나갈 수 있었겠지만 제갈연준과 너무 멀리 떨어지면 안 되는 상황에 하필 그는 정신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어떡하지?’망설이는 동안 이성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침대 위로 끌어당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서 자.”백아영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거절할 겨를도 없이 이성준은 말을 이었다.“새벽에 혹시라도 아프면 어떡해. 지금은 널 찾으러 갈 힘조차 없어.”자신을 위해 칼을 맞은 이성준을 생각하며 그녀는 죄책감을 느꼈고 마음이 약해졌다.“그래. 오늘 밤은 여기 있을게.”그때 선우경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남녀 단둘이 같이 자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제갈 연준은 사람이 아닌가요?”이성준은 그의 말에 반박했고 마음 같아서는 그들 모두 내쫓아 백아영과 단둘이 있고 싶었다.“그래도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안 되죠.”어렵게 찾은 선우 일가의 보물이었기에 쉽사리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럼 밤새 여기 앉아있으라고 할까요?”선우경진은 말문이 막혔다. 뇌 연구 프로젝트 때문에 5일동안 맘 편히 쉬지도 못하고 고생했을 백아영을 생각하면 밤새 앉아있으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고 선우경진도 그걸 원하지는 않았다.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그럼, 저도 오늘 여기 있을게요.”이성준의 목소리는 싸늘했다.“그러시든가.”뻣
백아영은 순식간에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고 막 일어나려던 순간에 이성준이 눈을 떴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듯한 어색한 분위기를 풍겼다.백아영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그게,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좋은 아침.”이성준은 목이 잠긴 듯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고 마치 첼로의 G 음율처럼 짙고 감미로웠다.순간 정신이 멍해진 백아영은 심장이 마구 뛰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운 이성준의 모습에 비하면 그녀의 당황스러움은 터무니없어 보였다.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고 뻣뻣하게 몸을 일으켰다.“좋은 아침.”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성준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아침 뭐 먹고 싶어?”자연스러운 그의 말투는 마치 신혼부부를 연상케 했고 백아영은 어색한 듯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아무거나.”얼마 지나지 않아 뚱보 아줌마는 아침을 가져다주었고, 소파에서 하룻밤을 잤던 선우경진도 눈을 떴다.그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더니 그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식사하던 중 선우경진은 착잡한 눈빛으로 줄곧 백아영을 응시했고 불편함을 느낀 그녀는 입을 열었다.“도련님, 저한테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는 건가요?”눈이 반짝였던 선우경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었다.“신분과 관련된 일이야.”백아영은 멈칫했다. 4년 전, 그녀는 가족을 찾으려다가 선우 일가를 건드리게 되었고 그러다가 ‘가짜 엄마’ 허수빈까지 등장했다.결국 제갈연준에게 붙잡혀 4년 동안 고문당한 것도 모두 이 일 때문이었고, 그녀가 만약 가족을 찾지 않았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백아영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허수빈이 친엄마가 아닌 건 저도 알고 있어요. 이제 더 이상 가족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네요. 저에게는 아들이라는 가족 한 명이면 충분하고 그냥 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요. 도련님의 호의는 너무 고마운데 제 신분에 대해서는 말씀 안 하셔도 돼요.”백채영을 착각하지 않았더라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