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서야 고개를 들어 하은우를 보며 말했다. “은우 오빠, 저 결혼 안 해요.” 하은우는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하지석이 소리쳤다. “하은혜, 지금 그게 어르신 앞에서 할 소리야?”“너는 하씨 가문의 방계일 뿐이야. 진주 이씨 가문의 세자가 너를 안 싫어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길 판에 네가 무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을 싫어해?” 조연아는 매서운 눈초리를 하며 하은혜한테 소리쳤다. 하은혜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형님, 제 일은 제가 결정해요. 다른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 없어요.”짝!조연아는 하은혜한테 다가가 뺨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건방진 것! 불효를 저질러도 유분수지 어르신 말씀도 거역하겠다는 거야?”하은혜가 다른 사람한테 맞는 모습을 보자 문 앞에 서 있던 김예훈은 더 이상 이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김예훈은 화를 참으며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차갑게 말했다. “자기가 결혼을 안 하겠다면 안 하는 거지! 하은혜는 나 김예훈의 사람이야! 이 좁은 경기도 바닥에서 내 사람을 협박하는 사람이 있다니. 믿기지가 않은데?”작은 체구의 하은혜는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려 김예훈에게 말했다. “김 대표님, 어서 가세요. 대표님이 계실 곳이 아닙니다. 서울 하씨 가문은 대표님이더라도 상대할 수 없습니다.”하은혜가 이 일을 김예훈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는 서울 하씨 가문이 김예훈한테 화풀이를 할까 봐 그런 것이었다.서울 하씨 가문은 윗대부터 서울 10대 명문가 중 하나로 막강한 재산과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김예훈이 CY그룹의 대표고 김세자라고 불리더라도 하은혜가 보기에는 여전히 서울 하씨 가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김예훈은 하은혜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상대가 될지 안 될지가 중요한가요? 은혜 씨는 제 사람이고, 누구든 은혜 씨가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 가장 중요해요. 제가 만약 제 사람들조차 지키지 못하면 세자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아요.”“넌 또 누구야
“작은엄마, 이번 일과 김예훈은 관련이 없습니다. 그냥 보내주시죠.”하은혜는 김예훈이 다른 사람에 의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아 앞을 가로 막아섰다. 작은엄마라고 불린 중년 여성은 하은혜의 새엄마 이연희이다. 하은혜의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이연희는 명목상 하은혜의 혈육이다.이연희는 분에 못 이겨 욕설을 퍼부었다.“계집년, 내가 작은엄마라는 걸 알긴 알아? 왜? 내가 네 내연남을 때려서 마음이 아프니? 지아비 닮아서 쪽팔린 것도 모르고 교양도 없이 매일같이 나가서 불륜이나 저지르고!”말이 끝난 후 이연희는 김예훈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 입으로 세자라면서 여자 뒤에 숨기나 하고 말이야. 듣던 대로 쓸모없는 놈이잖아.”김예훈은 이연희의 눈을 잠시 동안 쳐다보며 하은혜를 자신의 뒤로 오게 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처리하면 돼요.”김예훈과 하은혜의 앳된 부부 같은 모습을 보니 이연희는 화가 치밀어 올라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우리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애정 행각을 하는 걸 보니까 네 녀석들은 쪽팔린 게 뭔지도 모르는구나. 우리는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한 거니?”조연아는 차가운 얼굴로 비꼬며 말했다.김예훈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만약 은혜 씨의 가족이란 사실을 배제하면 은혜 씨한테 그런 말들을 한 당신들 이미 죽었어.” “아, 별 능력은 없어 보이는데 큰소리치는 재주는 있구나? 이 좁은 경기도에서 감히 누가 우리 서울 하씨 가문 사람들을 건드릴 수 있는지 내가 한 번 두고 볼게. 경기도 일인자인 하정민도 우리 서울 하씨 가문 턱밑도 못 오는데 세자라고 떠들어 대는 네가 도대체 뭔데!”조연아는 김예훈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빈정거렸다.“됐다.”이때 홀 정중앙에서 염주를 들고 있던 하씨 가문 큰 어르신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큰 어르신께서 입을 열자 노발대발하던 조연아나 겉과 속이 다른 이연희나 모두 겁에 질려 찍 소리 않고 가만히 있었다.하은우만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는 것 외에 모든 하씨 가문 사람
김예훈은 앉지 않았다.하은우 역시 개의치 않고 앞에 놓인 차를 마시며 말했다. “큰 어르신이 원래 이래, 큰 어르신 눈에 들지 않은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으셔. 하은혜는 원래 엄청 아끼는 손녀였는데 너 때문에 서울 상류층에서 웃음거리가 됐어. 이제 이번 일을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지 말해봐.”김예훈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나랑 은혜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우리는…”김예훈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은우는 키득거리며 웃었다.“김예훈, 우리 다 남자야. 내가 꼭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 해? 비서가 말이 좋아 비서지, 할 일 있을 때는 비서고 할 일 없을 때는 방에서 둘이 무슨 일을 하겠어? 아. 이거 내가 한 말 아니다.”하은우의 말을 듣고 김예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일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 할 말이 없었다.하은혜는 우물쭈물거리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은우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둘 사이에 무언가 있는 건 너희가 인정했지만 난 너희가 무슨 관계든 간에 관심 없어. 근데 우리 서울 하씨 가문은 채면을 매우 중요시해. 그럼 이제 어떻게 처리할 건지 말해봐. 우리 하씨 가문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한다면 앞으로 우리가 네가 승승장구하게 도울지 누가 알아. 근데 그렇지 않고 명문가의 원한을 사면 어떻게 되는지는 김세자, 넌 똑똑하니까 알겠지.”하은혜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은우 오빠, 진짜 오해예요. 저랑 김 대표님은 남녀 사이가 아니라 사이가 좋은 상사와 부하 직원일 뿐이에요.”“그럼 은혜야. 너는 왜 이장우를 거절하는 거야? 우리 같은 사람한테 혼인은 스스로 져야 할 책임이야. 하씨 가문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누리면서 이런 일을 거절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하은혜는 반박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명문가가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하은혜의 표정을 본 하은우는 한숨을 쉬며 덤덤히 말했다. “너한테 두 개의 선택지를 줄게. 첫째, 너희 둘이 한 달 안에 결혼하고 김예훈은 서울 하씨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는 것. 둘째, 이장
“은혜야, 내가 예전부터 말했잖아. 김예훈은 야심이 너무 커. 이런 사람은 남 밑에서 견디지를 못 해. 김예훈을 선택하면 이번 생은 고생 좀 할 거야.”하정민은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정민은 김예훈의 실제 정체를 알기 때문에 김예훈을 마음에 들어 했다. 비록 서울 하씨 가문이 김세자라는 정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지만 만약 진짜 정체가 알려진다면 서울 하씨 가문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하정민은 자신의 손녀가 계속해서 김예훈과 엮이길 원치 않는다. “할아버지 말 잘 새겨듣거라. 은혜야. 네가 선택해야 할 쪽은 이장우 아니면 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다른 사람이야. 설령 거지라고 해도 너만 괜찮다면 할아버지는 그 누구든 높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단다. 하지만 김예훈은 안된다.”하은혜는 차갑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일전에 약속한 거 잊으신 거 아니죠? 지금 이런 말씀 하시는 건 약속을 어기시려는 건가요?”하은혜의 고집 있는 모습을 보며 하정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어차피 15일에 한 약속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네가 그를 데리고 올 수 있는지 없는지 한 번 두고 보겠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땐 인정해 줄게”...성남대호텔 로얄 스위트룸.하씨 가문의 큰 어르신은 양반다리를 하고 방석 위에 앉아 불경을 염송하고 있다.그녀의 앞에 하은우는 미소를 머금고 머리를 숙이고 서있다.30분 정도가 지나자 하씨 가문 큰 어르신은 눈을 뜨고 천천히 말했다.“일은 어떻게 됐니?”하은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큰 어르신의 뜻은 이미 다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김예훈 이 녀석 자존심이 세서 아마 첫 번째 조건은 절대 승낙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조건은 제가 이해가 잘 안됩니다...”큰 어르신은 무덤덤하게 말했다.“어느 부분이 이해가 안 된다는 건가?”하은우는 소리를 낮춰 말했다.“한국 10대 명문가에서 우리 하씨 가문의 서열은 10위입니다. 만약 진주 이씨 가문과 우리 하씨 가문이 혼인을 맺는다
CY그룹, 대표 사무실.하은혜의 부재로 대표 사무실은 어딘가 텅텅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동안 깔끔하게 정리된 테이블도 지금은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이에 김예훈은 쓴웃음을 지었다.솔직히 말하면 그는 여태껏 일만 시켰지 실무를 해본 적이 없어서 하은혜가 대체 얼마나 많은 업무를 처리했는지 감이 안 왔다.텅 빈 하은혜의 자리를 보며 김예훈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안심해요. 이 세상에서 은혜 씨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진주 이씨 가문은 물론 서울 하씨 가문이라도 불가능하죠.”약 30분 후, 대표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송준이 공손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왔다.“알아냈어?”김예훈이 물었다.송준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네, 조사는 했습니다만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사람을 보낸 탓에 정체가 탄로 났나 봅니다.”“괜찮아, 자료 줘.”김예훈이 무덤덤하게 말했다.송준에게 부탁하는 순간 그는 이미 정체가 탄로 날 거라는 사실을 예상했지만, 지금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곧이어 송준은 김예훈에게 파일을 넘겼고, 한국에서 가히 극비에 속하는 자료를 보면서 김예훈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한국에는 10대 제일의 명문가가 있는데, 서울 하씨 가문이 10위에 올랐다.그동안 김예훈은 한국 10대 제일의 명문가는 부와 영향력, 권력을 기반으로 선정한다고 여겼다.하지만 이 자료들을 보고 나서야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한국은 대통령을 제외하고 9대 장관이 있는데, 각각 하나의 체계를 담당하고 있다.예를 들면, 국방부 장관은 한국 국방부 본부와 9대 국방부를 책임지고 국방부에서 최고의 발언권을 갖고 있다.또한, 국방부 장관이 속한 가문은 10대 제일의 명문가 중에서 서열 2위이다.물론 한국 대통령의 집안은 10대 제일의 명문가 중 서열 1위이다.하씨 가문이 10대 제일의 명문가 중 일원이 된 것도 9대 장관 중에서 꼴찌인 사람이 서울 하씨 가문 출신이기 때문이다.이는 또한 하정
그날 밤, 이장우를 포함한 이들은 편지 한 장을 받았다.빨간색 편지지를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던 이장우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건방진 놈이 역시 눈에 보이는 게 없군. 지금 나한테 청혼을 취소하라고 강요하는 건가? 아, 아니군. 청혼을 취소하는 건 물론 진주 이씨 가문마저 짓밟으려고 하네? 그럴 능력은 있다고 생각하나?”맞은편에 앉은 김만태가 웃으면서 말했다.“김세자는 이번에 너무 섣불렀어요. 비록 손씨 가문과 홍인경을 처리했다고 하지만, 이 편지를 돌림으로써 나씨 가문을 포함한 3대 가문이 결국 우리 편에 서게 한 것과 다름없잖아요. 상황이 점점 더 흥미롭게 흘러가는데요?”이장우는 무심하게 말했다.“당연하지, 나성군을 비롯한 사람들이 이미 연락 와서 대책을 의논하겠다고 하더라. 이번에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면 우리는 어부지리로 덕만 보면 돼.”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선이 마주친 이장우와 김만태는 웃음을 터뜨렸다.사실 손씨 가문 사건 때문에 나머지 3대 가문은 하나같이 위축되어 차마 CY그룹을 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런 와중에 김예훈이 직접 세 가문을 그들의 편으로 만들어주지 않았겠는가! 인생은 정말 예측불허했다.이장우가 말을 이어갔다.“뭐, 이 얘기는 그렇다 치고, 그보다 방금 전해 들은 소식인데 한국 의학계 거장인 전남산 어르신이 3일 뒤에 귀국한대.”“네? 전남산 어르신이요? 이미 돌아가셨다는 소문도 있지 않아요?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나타났대요?”침착함을 유지하던 김만태도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전남산은 뛰어난 의술 때문에 저승사자의 천적이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그가 치료한다면 목숨이 간당간당한 사람마저 기사회생한다는 소문마저 무성했다.하지만 전남산은 5년 전에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려고 행방을 수소문한 소위 잘나간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다들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그런 분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모자라 무려 성남시에 온다니?김만태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한편, 성남 공항.VIP 통로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는데, 정지용과 정가을이 제일 앞에 있었다.다만 과거의 오만방자하던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어딘가 모르게 하인처럼 비굴해 보였다.두 사람의 뒤로 화려한 슈트 차림의 쌀쌀맞아 보이는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무덤덤한 말투로 말했다.“정지용, 정가을! 난 분명 기회를 줬다? 이번에 잘 좀 해서 전남산 어르신을 부산으로 모셔올 수만 있다면 우리 견씨 가문의 하인으로 받을 줄게. 만약 실패했다면 일찌감치 꺼져! 견씨 가문에 꼬붕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너희까지 필요한 건 아니야.”정지용은 굽신거리며 대답했다.“청오 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최선을 다할게요. 성남시는 우리 구역이라서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예요.”정가을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청오 도련님, 먼 길 오시느라 지쳤을 텐데 오늘 밤 확실하게 모실게요.”“찰싹!”견청오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여비서가 불쑥 다가와 정가을의 뺨을 내리치고는 싸늘하게 말했다.“개보다 못한 년이 어디서 나대는 거야?”“죄송합니다!”정가을은 감히 찍소리도 못하고 연신 허리를 굽히면서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정지용과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의 눈동자는 원망으로 가득했다.김예훈, 정민아! 우리가 다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너희를 짓밟아 뭉갤 수만 있다면 기꺼이 다른 사람의 하인이 될 테니까!...부산 견씨 가문을 제외하고 크고 작은 가문들이 속속 성남시를 방문했다.대체 누가 전남산 어르신의 귀국 소식을 퍼뜨렸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한국 상류층에서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의학계 거장 정도면 아무리 제일의 명문가라고 해도 거의 받들어 모시다시피 하는 귀한 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대통령마저 전남산 어르신에게 예의를 갖춘다고 했다.따라서 의학계에서 전남산 어르신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갔다.물론 이 일에 대해 논의하는 CY그룹 직원도 적지 않았다.어쨌거나 CY
“대표님, 대체 누구를 픽업하러 가시는데 허름한 차일수록 좋다는 거예요?”하은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김예훈이 대답했다.“그거 알아요? 그분은 취미가 툭 하면 전쟁터에 가서 허름한 차를 구경하는 건데, 고급 차를 끌고 가봤자 쳐다보지도 않을걸요?”비록 김예훈이 누굴 픽업하러 가는지 모르지만, 그가 부탁한 이상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곧이어 적어도 십여 년은 되어 보이는 봉고차 한 대가 CY그룹 정문에 나타났다.김예훈은 송준한테 운전을 부탁했고, 두 사람은 쏜살같이 성남 공항으로 향했다.하지만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송준은 눈앞의 광경에 깜짝 놀랐다.공항을 겹겹이 둘러싼 고급 차 행렬은 끝이 안 보일 정도였다.마이바흐, 벤틀리, 롤스로이스 등 없는 게 없었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고급 차를 전시하는 중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반면, 허름한 봉고차를 몰고 온 김예훈과 송준은 기사들의 경멸을 한 몸에 받았다.“저 사람은 뭐 하자는 거지? 오늘 무슨 날인지 모르나?”“오늘은 무려 전남산 어르신이 귀국하는 경사스러운 날이잖아. 오로지 어르신을 한번 뵙기 위해 여러 가문에서 찾아왔다고! 어떻게든 어르신의 눈에 띄려고 다들 제일 비싼 차를 끌고 오지 못해 안달인데, 고작 봉고차를 타고 온 사람이 있을 줄이야!”조수석에서 내린 김예훈이 허름한 봉고차에 ‘전남산 어르신이 성남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걸고 있을 때 누군가 그를 알아봤다.“하하하, 저 사람 정 씨 일가 데릴사위 김예훈 아니야? 역시나 별 보잘것없는 회사에 걸맞게 허름한 봉고차로 전남산 어르신을 픽업하러 왔네? 장난하나?”“하하하, 미쳤나 봐, 어쩌면 이렇게 멍청하지?”“다들 김예훈이라는 사람이 머리에 든 게 없는 데릴사위라더니, 그동안 안 믿었거든? 이제는 왜 그러는지 알겠네!”“역시 백문불여일견이군.”이윽고 정민아의 데릴남편이 봉고차를 끌고 전남산을 픽업하러 왔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사람들 틈에서
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본인이 말 잘하는 걸로 유명하던데 오늘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대한민국 무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으면 분명 믿었을 거야. 그런데 입만 번지르르하고 배신에 익숙한 일본인이 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곧 죽을 나이가 된 건 맞지만 알건 다 알아. 남양국과 대한민국 간의 분쟁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 그런데 만약 언젠가 일본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 남양국도 좋은 날이 없을 건 확실해. 공과 사를 불문하고 내가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설득에 실패한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덤벼. 지옥으로 보내줄 거니까.”아마미네 토시로는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속으로는 김예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진주·밀양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예훈을 죽이지 않았다간 앞으로 일본인이 진주·밀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불가능할 텐데? 지금은 물론 전성기 시절에도 나를 죽이지 못했을 거야. 나를 죽이려면 아마 야마자키파 전 수장인 야마모토 타케시를 모셔 와야 할 거야.”양상철은 태연하기만 했다.“넌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분은 더 이상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너 같은 잡것들이 어르신을 방해하지 않게 내가 노력할 수밖에.”아마미네 토시로는 또 알약을 하나 삼켰다.알약을 삼키자마자 그는 근육이 수축하면서 눈동자가 새빨개지기 시작했다.다음 순간 양상철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양상철은 넓은 소매를 휘둘러 비수를 한쪽으로 내팽개쳤다.펑.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숲속에 불꽃이 튀겼다.이 모습에 양상철은 속으로 일본인이 정말 뻔뻔하다고 욕했다.‘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옆길로 샐 궁리만 한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공격을 피한 양상철은 앞으로 나
오륜 사찰 금지구역.아마미네 토시로는 복부 상처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그는 곧 알약 하나를 삼키고는 절벽 끝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아래쪽 상황을 지켜보았다.잠시 후 그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혜선 스님이 아직 저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니. 역시 여자 등이나 처먹는 기생오라비가 맞았어. 여자들마다 아까워서 죽이지 못하잖아.”아마미네 토시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곳에 남긴 흔적을 없애고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재빨리 거즈로 상처를 감싸고는 검을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1분 1초가 흘러가면서 주변 공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이 순간은 1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마침내 숲속에서 어떤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서히 걸어 나왔다.그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마미네 토시로를 쳐다보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맞은편에 있는 노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남양 무신 양상철?”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를 알아봤으면 너의 아들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한 말도 들었을 텐데. 지금 보니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 모양이군. 왜. 10년 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냈더니 나를 잊은 거야?”남양 무신 양상철을 알고 있는 아마미네 토시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남양국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섬라국과 화국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도, 심지어 동해 해역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양상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전해지기로는 대한민국 출신인 그의 조상님이 남양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이 나라를 일궈냈다고 했다.남양 무신은 남양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양국을 쥐락펴락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간단히 말해서 남양국에는 무신이 한 명뿐이지만 단 한 명으로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적어도 아마미네 토시로는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총사령관님은 젊고 멋있는 분이야. 포스까지 장난 아니라고.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무슨 염치로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하는 거야?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혜선 스님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이유만으로도 난 네가 너무 싫어졌어. 오륜 사찰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규칙만 없었더라면 넌 오늘 살아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김예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인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네.”혜선 스님은 김예훈이 우상인 총사령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김예훈을 쫓아내. 저 자식이 원하든 말든 진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김예훈이 총사령관이라고 자칭하거나 진주·밀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륜 사찰에서 죽여버릴 거라는 공식적인 입장도 전해.”혜선 스님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다음 순간, 열몇 명의 오륜 사찰 제자들이 나타나 검으로 김예훈을 겨냥했다.그중 한 명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김예훈, 꺼져.”김예훈은 이들을 무시한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선 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선 스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해. 나를 오륜 사찰에서 쫓아내는 건 상관없는데 진주·밀양에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총사령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한마디만 물을게. 김현민이 곧 9대 국방부 총사령관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걔가 과연 전설 속 당도 부대 총사령관일까? 나이, 실력은 막론하고, 정말 김현민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해? 총사령관님은 유라시아 전쟁에서 5대 강국을 단숨에 제압하고 혼자 힘으로 일본의 수많은 검신, 음양 대가들을 물리치신 분이야. 총사령관님 같은 분이 굳이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자리를 탐내서 일본인에게 굽신거릴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민 같은 사람한테 총사령관이라는
“24시간 내로 진주에서 꺼져주시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따지지도 않을게요. 어쩌면 저희가 약간의 혜택도 드릴 수 있어요.”혜선 스님의 진지한 말투에 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성녀님, 저희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제가 정말 진주를 떠났으면 좋겠어요?”“네. 김예훈 씨가 진주에 오고부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요.”혜선 스님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가 건넨 차를 마시며 말했다.“안동 김씨 가문은 진주·밀양의 기둥과도 같아요. 김예훈 씨 존재만으로도 진주·밀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안동 김씨 가문을 위한, 진주·밀양을 위한, 김예훈 씨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 간단한 조건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혜선 스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김현민이 수장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있든 없든 수장 자리를 지켜낼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일로 제가 진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혜선 스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씨,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왜 진주를 떠나야 하는 거죠?”김예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자유 아닌가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륜 사찰이 아직 저한테 해명해야 할 것이 있는 건 둘째치고,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가 실수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꺼지라는 거예요? 혜선 스님, 장사를 너무 잘하시네요. 오히려 제가 그 보잘것없는 몸매를 보고 눈을 버릴 뻔했는데도요? 서로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괜찮은데 이걸로 저를 협박해서 진주에서 쫓아내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선 스님은 정말 선녀와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김예훈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제 목욕탕에 무단 침입했으니 김예훈 씨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에 선재 스님 사건 때 저희 오륜 사찰에 해명을 요구했었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혜선 스님.”오륜 사찰 여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성녀님의 알몸까지 봤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 선재 스님 사건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누가 손해 보는 거지?’이때 한 여제자가 무의식적으로 혜선 스님을 힐끔 쳐다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설마 오륜 사찰과 맨날 사이가 안 좋던 저 자식을 성녀님이 인정해버린 걸까?’김예훈은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잘못한 것이 있으니 천천히 목욕탕에서 나와 혜선 스님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향긋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한 제자가 말했다.“그건 성녀님께서 몸 닦는 수건인데...”퍽.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선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앞으로 걸어가 김예훈의 가슴팍을 쳤다.퍽.김예훈은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뻘쭘한 마음에 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혜선 스님이 이미 수건을 빼앗아 간 후였다.혜선 스님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지면서 김예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이제 저희 오륜 사찰에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김예훈은 상대방의 분노를 느끼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가 칼을 빼 들고 죽일 것만 같았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가긴 가겠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늘 이 일이 정말 우연이라면 제가 해명해야 되겠지만...”김예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만약에 오륜 사찰이 일본인과 손잡고 저를 함정에
“성녀님? 도포? 오륜 사찰? 당신이 바로 혜선 스님이에요?”보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다 봐버린 김예훈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오륜 사찰의 성녀인 혜선 스님의 목욕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니 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성녀의 목욕탕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계획이었나? 정말 그의 계획이라면 김현민이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김현민 그 자식이 성녀 혜선 스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혜선 스님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갑자기 자기 목욕탕에 나타난 이 건방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때 혜선 스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뭐? 몇 번이고 우리 오륜 사찰의 얼굴에 먹칠하고 경매회까지 망친 그 김예훈?”“선재 스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3일 안에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어?”“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성녀님, 저 자식이 이곳에 나타난 건 성녀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욕이에요. 죽여야 한다고요.”오륜 사찰의 한 제자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곧장 달려들어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 했다.퍽.이때 혜선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검을 날려버리고는 뒤돌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진주에 어쩌다 천연 온천이 생겼는데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지.”제자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성녀님, 저희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지금 바로 저 자식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릴게요.”제자들은 검을 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직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김예훈을 째려보았다.‘계속 우리 오륜 사찰을 건들던 놈이 감히 성녀님 목욕탕에 뛰어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툭하면 죽이느니 마느니 하지 말고 제 설명 좀 들어보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욕탕에 뛰어들어 못 볼 꼴
쨕.아마미네 토시로는 옆으로 날아가더니 세게 바위에 부딪히면서 피를 뿜어냈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비록 처음부터 온갖 함정까지 파놓으면서 김예훈을 평생의 적으로 대했지만 김예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줄 몰랐다.연기까지 하면서 겨우 이곳까지 끌고 왔는데 김예훈을 죽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뺨 맞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정말 괴물이네.’퍽.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더니 말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칼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르고도 정확했다.김예훈도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김예훈은 절벽 끝에 서 있었고, 아마미네 토시로는 울창한 숲 변두리에 서 있었다.“대단한데?”아마미네 토시로는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같은 사람은 몇 년 더 지나면 아마 내가 너의 상대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자신 있었다면 왜 이런 꼼수를 부린 거지? 일본인은 무신 경지에 이르렀어도 결국엔 본성을 잃지 못하네. 네가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넌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너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네가 또 어떤 꼼수를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무 실망이네.”“실망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아마미네 토시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알려줄까?”아마미네 토시로는 검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쿵.격렬한 진동이 울리면서 김예훈이 서 있던 절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던졌다.“풉.”몸에 검이 제대로 꽂힌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후회되지 않는 듯 미친 듯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반면으로
“풉!”핏덩이를 토해낸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역시 대단해. 어린 나이에 탑 무신 급 경지에 이르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일본의 귀족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난 널 살려줄 마음이 없어. 요트에 있을 때 이미 이 구역 통신을 차단하라고 했거든.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방금 나 몰래 보낸 메시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야.”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이 살짝 굳으며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몇 분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발신 실패로 떠 있는 것이다.“이런 제기랄!”이 순간 아마미네 토시로는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정말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받아라! 불사참!”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리쳤다.칼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김예훈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아마미네 토시로가 이 기세를 몰아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예훈을 스쳐 지나 산꼭대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김예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공격하는 척하면서 또 도망쳐?’“아마미네 토시로, 그만 도망치지?”김예훈이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그만 쫓아오지?”아마미네 토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울창한 숲을 이용해 김예훈을 따돌리려 했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전혀 급할 거 없이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쫓아가는 것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듯했다.곧 두 사람은 산 정상에 가까운 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먼저 땅에 발이 닿은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에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다음 순간 그는 땅을 구르더니 미리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무신, 황실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명 눈치가 있는 놈이었다.오늘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까지 불러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질 줄 몰랐다.이런 상황에서 아마미네 토시로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아서 김예훈과 맞서 싸울 일은 없었다.그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부하의 뺨까지 때리고, 부하의 시체로 요트 엔진을 고장 내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다.게다가 도망치는 경험까지 풍부해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김예훈은 요트 위에 남아있는 잔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어떤 신념이 완전히 무너진 듯했다.이들과 말 섞기도 싫은 김예훈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아마미네 토시로가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갔다.어쨌든 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었기에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김예훈은 오늘로써 한 방에 끝내고 싶었다.아니면 어딘가 숨어서 언제 또 습격할지 몰랐다. 김예훈은 상관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 했다.아마미네 토시로도 김예훈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속도를 내 바닷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진주 태산 뒷산으로 진주 상류 인사들이 휴양하는 곳이라 절대 개발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곳은 산짐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진주에서 보기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아쉽게도 지금의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했더니 마침내 절벽 끝에 오래 방치된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그런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숲속에서 김예훈이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김예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 요트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는 부족했어? 왜 하필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몰라?”아마미네 토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