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환은 특별히 도윤이 등을 기댈 수 있도록 나무 한 그루를 찾았다.한눈에 봐도 허약해진 도윤의 몸은 흔들리는 촛불 같았다. 촛대를 타고 흐르는 촛농이 마지막 한 방울을 흘릴 때 촛불도 꺼질 것이다.산들바람이 불자 도윤은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진환아,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건 그때 백채원의 무리한 부탁에 응해서 소씨 가문 문제를 지아에게 넘긴 거야. 나만 아니었으면 그토록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각자 떨어져서 가정도 이루지 못한 채 아이들을 만나지도 못하고.”“보스도 나름대로 고초가 있었잖아요. 그런 말씀 마세요.”“허, 고초라, 옛날에 나도 그 핑계로 스스로를 속였지. 그런데 어떻게 고초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해칠 수 있겠어?”도윤이 덤덤하게 말했다.“어렸을 때 아버지가 미웠고,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사랑을 가장한 채 뼛속까지 상처를 줬어. 잘못인 줄 알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지아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된 것도 누굴 탓할 게 아니라 다 내가 자초한 거야.”인생의 끝자락에 이르러 유난히 정신이 또렷해지며 미래가 보이지 않자 과거에 집착했다.그 기억은 마치 노인이 하얗게 씻은 손수건으로 돈을 감싸고 세는 것과 같았다.“됐어, 지금 와서 얘기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인과응보인걸. 지아의 말처럼 우린 다시 만날 수 없고 죽음 앞에서 날 배웅해 줄 아내도 자식도 없네.”진환은 도윤의 손을 잡았다. 마디가 분명하고 긴 성인 남자의 손이 늙은이의 손처럼 떨리고 있었다.“보스, 제가 있잖아요.”진봉도 끼어들었다.“저도 있어요.”“그래, 아직 나를 배웅해 줄 형제들이 있으니 죽어도 후회는 없겠지.”도윤은 죽음을 앞두고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사실 나는 진작에 죽었어야 했는데 전림이 목숨을 선물해 주었지. 이젠 저승으로 가서 사과해야겠어. 내가 큰 빚을 졌거든. 아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아들은 태어나기도 전
도윤이 그 말을 들은 건 10초 뒤였다.오래전 도윤은 지아에게 일출을 보러 산에 함께 가자고 약속했다.당시 너무 바빴던 탓에 정말 같이 가고 싶어도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그렇게 영원의 시간이 흘렀다.지아야, 너와의 약속을 어긴 나를 죽기 전에 다시는 볼 수 없도록 신이 벌을 주는 건가.도윤은 나이 든 노인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눈앞이 캄캄한 것이 아니라 눈앞에 어떤 색도 보이지 않는 것이 실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 허무함 속에서 도윤은 황금빛을 본 것 같았다.해가 떴다.눈을 멀게 할 것만 같았던 색이 도윤의 눈에는 필터를 씌운 것 같았다.그것은 마치 바람에 의해 꺼지기 직전의 불빛처럼 너무도 약하고 희미했다.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감각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도윤은 말을 할 듯 말 듯 입을 벙긋했다가 다시 다물었다.딸랑딸랑-모든 감각을 잃기 전 마지막 방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그래, 어린 소녀가 있었지.무무.도윤은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감각에만 의지해 무무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온몸이 떨렸고 몸을 움직이는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도 인생에서 가장 큰 사치가 되었다.하지만 도윤은 포기하지 않고 모든 감각이 사라지기 전까지 단 한 가지 생각만 했다.배웅해 줄 자식이 없다는 건 신의 뜻인지도 모르겠다.무무는 그래도 지아를 닮았기에 도윤은 죽기 전에 무무를 딸처럼 여기고 안아주고 싶었다.독이 몸의 장기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지만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했다.진봉의 빨갛게 부어 있었다.“보스가 뭐 하려는 걸까?”“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둬.”진환이 진봉을 말렸다.산바람이 두 사람의 눈물을 말려버렸지만 도윤은 느끼지 못했다.무릎이 심하게 떨렸고, 움직일 때마다 온 힘을 다했다.그래도 도윤은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무무는 빛 속에 서 있었고 곧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1초면 분명히 걸을 수 있는 거리를 도윤은 수십 초, 아니 그 이상이 걸렸다.뒤돌아 있던
도윤은 허공에 쓰러졌고 바닥에 힘없이 떨어지는 대신 누군가가 그의 몸을 붙잡았다.도윤은 이미 오래전에 의식을 잃었고, 그의 긴 몸은 그저 다가온 사람에게 기대어 있었다.딸랑딸랑-무무는 너무 행복해서 방방 뛰었고 말은 못 했지만, 눈가에는 행복이 적혀 있었다.진봉과 진환은 슬픔도 뒤로한 채 어느새 나타난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그 여성은 검은색 파워 슈트를 입고 발에는 무거운 마틴 부츠를 신고 있었다.짧은 가죽 상의는 그녀의 완벽한 허리와 몸의 곡선을 드러내면서 완전히 현대적인 스타일로 이 고풍스러운 오두막집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우아한 목을 타고 올라가면 귀티 나는 얼굴이 보였다.추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기품 있는 얼굴은 예쁘다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저런 여자가 어떻게 저런 혼혈아를 낳았을까?여자는 한 손으로 도윤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어린 소녀의 머리를 만졌다.무무가 다급하게 손짓을 하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다 알고 있어.”진환은 서둘러 말했다.“당신이 구심독을 해결할 수 있는 명의인가요?”“할 수 있죠.”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차가웠으며 아주 간결하게 말했다.여자는 도윤의 몸을 내려놓고 먼저 숨결을 살펴보더니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곧바로 옷을 벗긴 여인은 안에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귀찮아 칼을 들고 옷을 찢어버렸다.간결한 움직임에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도윤의 가슴팍이 드러났다.둘은 빠른 칼날에 깜짝 놀랐다.칼이 옷이 아니라 사람의 피부에 닿았다면 아마 두 동강이 났을 것 같았다.붉은 핏줄은 마치 도시를 포위한 병사들처럼 보였는데, 이제 막 포위하려는 지점에 와 있었다.마지막 성채를 점령하면 맹독은 승리를 거둔다.“명의님, 살릴 수 있을까요?”“심장은 아직 손상되지 않았으니 너무 늦지는 않았어요.”여인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무무야, 네 피를 좀 빌려야겠다.”무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른 손을 들었고, 그제야 손바닥에 감긴 붕대를 본 여자는 무
무무는 말을 하지 못했기에 연신 얼굴을 비비며 좋아하는 마음을 몸으로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착하지, 엄마 왔어.”다시 오두막집으로 돌아와 보니 미셸도 잠에서 깨어 있었다.어젯밤, 진환은 우는 미셸이 도윤이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그녀를 그냥 때려서 쓰러뜨렸다.진봉의 등에 업힌 사람을 보고는 울면서 다가왔다.“오빠, 어떻게 됐어? 어떻게 날 두고 떠날 수 있어? 나도 같이 데려가.”그때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속 울 거면 나가요. 시끄러우니까.”입을 벙긋하며 울려던 미셸이 여자의 말에 울지 않으려는 모습이 너무 우스워 보였다.그제야 함께 온 낯선 여자를 발견하고 물었다.“누구야?”“누나, 이분은 보스를 치료해 줄 명의셔. 예의를 지켜.”진봉은 또다시 미셸의 고약한 성미가 드러날까 얼른 제지했다.미셸은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했지만 도윤에게 좋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진심이 있었다.하여 곧바로 표정을 바꾸었다.“명의였군요. 저희 오빠 잘 부탁드려요.”진봉은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도윤이 미셸에게 ‘우리 오빠’가 되었지?그때 조원주가 문 앞에 나타났다.“왔구나.”“할머님.”“이제 막 돌아와서 아직 모를 테니 내가 소개해 주마. 이분들은 치료를 받으러 왔는데 나와 서진이의 40년 전 인연으로 하룻밤 묶게 되었어. 저 남자는 구심독에 걸렸고 저 여자는 약혼녀란다.”조원주는 약혼녀라는 단어를 강조했다.여자는 덤덤하게 대답했다.“알겠어요. 여러분은 저 사람을 뒤쪽 동굴로 데려가세요. 무무야, 네가 앞장서. 저는 치료에 필요한 물건을 준비할게요.”여자는 민첩하게 움직였고, 몇몇 사람들은 그녀가 말을 바꿀까 봐 서둘러 움직였다.여자가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돌아가자 조원주가 따라 들어왔다.“먼지가 잔뜩 묻은 걸 보니 급하게 왔나 보네.”“무무를 못 본 지 꽤 오래되어서 보고 싶어서요.”“무무 때문이야, 전남편 때문이야?”여자의 손이 멈칫했고 조원주는 말을 계속했다.“내 눈을 속일 생각하지 마
재빨리 약재를 손질하는 지아는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었다.침착하고 자립심이 강했으며, 이미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인하고 단단했다.소쿠리 촌은 가진 게 별로 없었지만 약초는 많았고, 조원주는 자신의 의술을 모두 전수해 주었다. 해독에 관한 한 지아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이미 세계 최고였다.지아는 필요한 것을 챙겨 동굴로 서둘러 들어갔다.들어오자마자 미셸이 또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짜인 것 같지는 않았다.미셸이 오랫동안 도윤을 좋아했다고 들었다. 그들은 같은 세계 출신이고 혈액형도 같아서 미셸이야말로 도윤에게 정말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지아가 조용히 다가오자 미셸은 그녀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명의님, 제가 이 사람과 혈액형이 같으니 수혈이 필요하면 제 피를 쓰세요.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줄 수 있어요.”지아는 그런 미셸을 가볍게 흘깃 쳐다봤다.“입 다물고 나가요. 필요할 때 알아서 부를 테니까.”“하지만...”지아는 다시 다른 사람들을 흘겨보더니 진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저 사람 빼고 다들 방해하지 말고 나가요.”“네.”미셸은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종종 문 쪽에서 목을 내밀어 들여다보았다.무무는 이 여자가 싫어서 피리를 꺼내서 연주하자 곧 커다란 붉은 뱀이 나타났다. 커다란 뱀의 몸통이 문을 향해 휘감아 돌자, 누구도 감히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동굴은 입구에 갈라진 틈이 있어 햇빛과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반개방형 동굴이었다.균열 아래에는 작고 맑은 웅덩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땅속에서 솟아나는 화산 샘이었고, 그 주변에는 이국적인 꽃과 허브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이 작은 샘은 몸에 영양을 공급하는 약효를 가지고 있었다.동굴 안에는 세 사람만 남았고, 드라마에서 고대인들이 목욕하는 모습처럼 흔한 도구와 커다란 목욕통이 있었다.도윤은 눈을 꼭 감고 동물 가죽 위에 누워 있었는데, 살짝씩 들썩이는 심장이 아니었다면 방금 죽은 사람 같았다.다행히도 독이 심장을 갉아먹지 않아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진환이 멍때리는 동안 지아는 재빨리 약초를 약을 지어 무무에게 끓일 약초를 건넸다.아이들 중 무무는 유일하게 특별한 체질로 태어나 의술을 물려받은 아이였다.3년 전 지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주원은 치료에 방해되지 않게 아이를 지우려 했다.지아는 주원의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다른 방법이 없자 주원은 지아를 소쿠리촌 조원주에게 보내는 궁여지책을 생각해 낸다.조원주는 약으로 태아를 키우는 비책을 알고 있었는데, 약으로 영양을 공급받은 태아는 배 속에 있는 동안 약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대신 산모인 지아의 몸도 추슬러야 했기에 지아는 밤낮으로 약재가 된 음식을 먹었다.이런 상황에서 지아는 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출산 당일 약간의 진통이 있었지만 아기는 무사히 나왔다.단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아이가 초록색 눈을 가지고 태어났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지아는 무무를 세계 최고의 전문의들에게 데려갔지만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다.검사 결과 모든 게 정상이었고 전문가들은 아이가 너무 작아서 조금만 더 크면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자폐증을 배제하는 한 지아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약을 먹고 자란 아이는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며, 말하지 못하는 것은 생명을 잃은 것에 비하면 작은 대가에 불과했다.또한 무무가 태어나던 날 하늘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며 대나무 집 주변에 새와 곤충, 물고기들이 모여드는 등 많은 동물들이 나타났다.무무는 동물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고, 독으로도 해를 입지 않았다.마치 하늘이 자신의 앞날을 열어줬다는 뜻으로 지아는 무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눈이 녹색인 이유는 부모 모두 녹색 눈 유전자를 가진 친척이 있거나, 엄마 뱃속에서 약물을 너무 많이 흡수해 유전자 변이를 일으켰거나,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지아는 강욱의 가족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친부모도 알 수 없었기에 아직은 무슨 원인인지 알 수 없었다.어쨌든 무무가 생명을 되찾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것만으로 지아는 이미 행복했다
가쁜 숨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지아는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있어 본 게 오랜만이었다.남자가 입 밖으로 부른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지아의 몸이 살짝 굳어졌다.이미 결혼 약속을 맺은 다른 사람이 있지 않았나?진환은 그 광경에 깜짝 놀랐고, 혹시나 이 명의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화가 난 그녀가 더 이상 치료를 해주지 않을까 두려워 얼른 설명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보스가 의식이 흐릿해서요.”“네.”지아는 도윤을 통 가장자리로 부축한 다음 지시했다.“옷 벗기고 안에 들여보내요.”지아는 약재를 다듬으려 등을 돌렸고 진환은 멍하니 다시 물었다.“전부 다요?”“네.”지아는 낮게 대답했다.말을 마친 지아의 머릿속에는 도윤의 몸이 떠올랐고, 수없는 밤을 함께 뒹군 남자의 몸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떠났을 때와 비교하면 도윤의 몸은 훨씬 더 탄탄해졌고, 팔로 허리춤만 감싸도 근육의 탄력과 라인이 선명하게 느껴졌다.지아는 도윤의 옷을 벗기면서도 가슴에 있는 몇 개의 상처를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도윤이 지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때 지아는 그의 움직임을 은밀히 알고 있었다.도윤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지아와 마주칠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지아는 일부러 그를 피했다.이제 도윤의 삶에서 벗어났으니 깨끗하게 사라지고 싶었다.도윤이 구심독에 걸렸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지 못했다면 그렇게 서둘러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바네사, 다 됐습니다.”“불 지켜보면서 30분 동안 안에 있게 해요.”지아는 담요를 가져왔다.“이거 둘러줘요.”땀을 흘려서 도윤의 몸속에 있는 독을 조금이라도 없애고 싶었던 것이다.도윤은 VIP 찜질방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무무는 작은 부채로 불을 부채질하며 약을 끓이고 있었는데, 작은 체구의 모습이 유난히 귀여워 보였다.나비 몇 마리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지아는 무무에게 다가가 무무를 무릎에 안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살살 닦아주었다.“엄마가 하면 돼. 양손
지아는 동물 가죽을 다시 정리하고 작은 담요를 가져왔다.진환이 말했다.“바네사, 좀 도와줄래요? 나 혼자서는 못 꺼내겠어요.”문제는 도윤이 의식이 없는 상태라 혼자서는 사람을 옮기기 어렵다는 것이었다.지아는 짜증이 밀려왔다. 진봉이 호들갑만 떨지 않았어도 내보내지 않았을 텐데.스스로 자초한 것 같으니 그냥 평범한 환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그래요.”두 사람은 계단에 서서 힘겹게 도윤을 꺼내려 애썼고, 지아의 눈은 감히 주위를 둘러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도윤은 온몸에서 약인지 땀인지 모를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안색도 전보다 조금 나아진 상태였다.“조심해요.”진환은 조심스럽게 도윤을 내려주었다.지아도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길이 고르지 않아 발밑을 조심하지 않은 진환이 그만 도윤의 몸을 놓치고 말았다.도윤은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벌거벗은 채 시체처럼 지아를 동물의 가죽 위에 눌렀다.하필 입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지아야.”진환은 얼굴을 붉히며 머쓱해했다.“죄송합니다, 제 탓입니다.”지아는 화가 났지만 낼 곳이 없었기에 힘겹게 도윤을 옮기고 담요를 덮어주었다.지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도윤 때문에 젖은 옷을 털어냈다.“얼른 약 먹여요.”“네.”진환이 막 한 입 먹였지만 도윤은 삼킬 생각이 없었고, 약이 입가에 조금씩 흘러내렸다.진환은 약을 낭비할 수 없었기에 지아에게 얼른 물었다.“바네사, 보스가 독 때문에 감각이 무뎌져 지금 약을 마실 줄 모르는 것 같은데 이 약을 어떻게 먹여야 할까요?”지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병원에 있으면 먹지 못하는 인후암 환자처럼 몸에 구멍을 뚫고 기구를 이용해 배 속에 넣으면 약을 먹이기 편할 텐데...이곳의 낙후한 의료 환경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무무의 피는 독의 발병을 늦출 수 있을 뿐 치료할 수는 없었고, 이렇게 시간을 끌면 해독제가 있어도 도윤을 살릴 방법이 없었다.“약혼자 있지 않아요? 이리 들어와서 입으로 먹이라고 해요.”“안 돼요.”진환은 황급히 거절했고 지아는 눈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