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숲, 큰 뱀, 그리고 여자아이.머리 위 거대한 나무에서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내려와 아이의 몸에 바로 닿았다.아이의 피부는 새하얗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고 작은 얼굴은 섬세하고 예뻤으며 더욱 특별한 것은 눈이 녹색이었다! 이목구비는 입체적이었고 외국인과 매우 흡사했다.몸에는 옛날 색동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신발이 없는 맨발이었다.발목에는 오색으로 엮은 발찌 두 개가 있었는데 위에는 방울까지 달려 있었다.서양인 얼굴에 고대의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내는 극도로 아름다운 소녀였다.소녀는 큰 붉은 뱀의 몸 위에 높이 앉아 있었고, 얼굴에는 앳된 기색 없이 내려다보는 모습이 여신처럼 신성했다.특히 어깨에 내려앉은 빛줄기는 소녀를 더욱 거룩하게 보이게 했다.마치 소설 속 성녀 같았다.소녀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치 여기서 뭐 하려는지 묻는 것 같았다.우서진은 서둘러 설명했다.“꼬마야, 여기 심한 독에 걸린 환자가 있어 독을 치료하기 위해 마을에 들어가야 길 좀 안내해 줄래? 우리는 악의도 없고, 해칠 생각도 없어.”소녀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뱀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큰 붉은 뱀은 즉시 소녀의 뜻을 알아듣고 들것에 실린 도윤을 향해 다가왔다.진봉은 말할 것도 없고, 진환도 소름이 돋아 뒷걸음질 쳤지만 책임감 때문에 감히 반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다.뱀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 거대한 몸집에 불같은 붉은 비늘을 가진 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잔뜩 공포에 질렸다.소녀는 뱀에서 뛰어내려 도윤의 옆으로 걸어왔다.도윤의 몸도 보호복으로 단단히 싸여 있었고, 고글 너머로 굳게 감긴 두 눈이 보였다.진봉은 서둘러 도윤의 옷을 살짝 들어 올려 몸에 있는 붉은 자국을 드러냈다.“우리 집 보스가 구심독에 걸렸는데 이제 고작 하루 남았습니다. 구해내지 못하면 살아날 희망이 없어요. 아가씨, 제발 마을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저희는 해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소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대한 뱀의 머리를 쓰
어린 소녀는 비록 작았지만 이곳에서 지위가 높은 게 분명했다.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이 앞장서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진환은 그들이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똑바로 서서 공손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아가씨.”소녀는 부드럽게 고개만 끄덕일 뿐 입을 열지 않았다.일행은 소녀를 따라 대나무 숲으로 향했고, 소녀는 그들에게 잠시 멈춰서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이윽고 혼자서 대나무 숲으로 걸어 들어갔는데 대나무 숲 옆에는 돌다리가 있는 작은 개울이 무척 고즈넉해 보였다.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수백 년을 살아온 고목이었다.나무에는 빨간 리본이 매달려 있었고, 리본 끝에는 작은 방울이 달려 있어 바람이 불면 딸랑딸랑 울렸다.이곳은 화려한 장식은 없었지만 마음이 무척 편안했다.미셸이 작게 말했다.“저 아이 말 못 하는 건가?”우서진은 차갑게 바라보았다.“닥쳐,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어?”진환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붉은 색을 가리켰다.미셸은 초록색 눈동자에 등골이 오싹해나며 식은땀이 흘렀다. 숲에서 봤던 뱀이 줄곧 따라오던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목조 주택에서 걸어 나오자 우서진이 서둘러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아, 아주머니, 저 우진입니다. 그때 저를 살려주셨는데 기억하세요?”보통 그 나이가 되면 눈도 침침하고 귀도 안 들릴 텐데 조원주는 나이가 들었지만 손발이 날렵했고, 눈빛은 또렷했다.조원주가 입고 있던 옷은 어린 소녀의 옷과 비슷했고, 흰색의 긴 머리가 나무 비녀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무척 정정해 보였다.“서진이구나. 어느새 40년이 지났네. 넌 예전과 똑같네. 이젠 키가 안 클 테지?”우서진의 나이 든 얼굴이 붉어졌다. 당시 우서진은 심한 독살을 앓고 있었고, 선생님이 그를 데리고 왔을 때 겨우 10대였다.당시 조원주는 마흔을 갓 넘긴 나이였고,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해 또래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성격도 털털해서 우서진을 치료해 준 뒤
조원주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미셸이 서둘러 말했다.“할머님, 아는 사람이에요?”조원주가 미셸과 도윤을 번갈아 보았다.“둘은 무슨 사이야?”미셸은 진환 일행이 말하기 전에 서둘러 대답했다.“이 사람 약혼녀예요. 제발 살려주세요! 저한테 무척 중요한 사람이라 없으면 안 돼요. 필요하시면 제 피를 뽑아가셔도 돼요. 혈액형이 같거든요.”진환 일행은 모두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식으로 무턱대고 대답하는 게 옳지 않은 것 같았지만 도윤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런 것까지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많이 사랑하니?”조원주는 계속 물었다.우서진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원주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네, 오랫동안 이 사람을 사랑해 왔고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할 거예요.”“명이 고달픈 부부구나.”조원주는 손을 탁 칠 뻔했다.“안타깝지만 내 능력이 부족해서 구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알아봐야겠네.”그렇게 말하며 조원주는 손을 흔들며 사람들을 쫓아내려고 했다.소녀는 도윤의 그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조원주의 옷깃을 애원하듯 잡아당겼다.조원주는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무무야, 이 사람은 우리가 구할 수 없으니 이만 보내.”도윤은 무언가를 감지한 듯 힘겹게 눈을 떴지만 독 때문에 눈앞이 흐릿했다.어렴풋이 할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고 떠나고, 아이가 돌아보았지만 아이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우서진은 조원주의 달라진 태도에 황급히 쫓아갔다.“아주머니, 제발 살려주세요. 이대로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서진아, 도와주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너도 의학을 배웠으니 구심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잖아. 게다가 이미 독에 감염돼 저 지경으로 됐는데 내가 뭘 해줄 수 있겠니?”“아주머니, 방법이 있을 거예요. 아직 하루가 남았으니 시도해 볼 수도 있잖아요.”“시도해? 난 못한다.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내가 무슨 수로 갚아주겠어? 됐다, 우리 촌에서 외부인은 환영하지 않으니 너희도 시간 낭비
미셸은 어리둥절했다. 할머니는 왜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걸까?“왜 그렇게 쳐다봐, 연기라도 하는 거야?”조원주는 비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꺼져, 내 집 더럽히지 말고.”말하며 조원주는 무무의 눈을 가렸다.“보지 마, 눈만 버려.”미셸은 흠뻑 젖은 채로 돌아서서 욕설을 퍼부었다.“무슨 저런 까다롭고 이상한 할망구가 다 있어! 안 구해 주면 말지 대체 나한테 뭘 끼얹은 거야, 무슨 냄새가 이렇게 고약해?”진봉은 코를 막으며 멀리 피했다.“누나, 멀리 있는 게 좋겠어. 오랫동안 묵혀둔 오줌 같은데 괜히 보스한테 피해주지 마.”미셸은 울고 싶었다.“오줌? 어떻게 나한테 소변을 뿌릴 수 있어!”우서진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이곳에선 오줌으로 악을 쫓아.”“아니, 나는 살아있는 사람인데 오줌으로 날 쫓아요?”“이게 다 네 말도 안 되는 소리 때문이잖아.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 네가 약혼녀라고 한 순간부터 태도가 달라졌어.”“평생 데려가는 사람 없어서 정신병이라도 걸린 거 아니야? 드라마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부탁하면 그 마음에 감동해서 구해주던데, 이럴 줄 누가 알았겠어?”동정을 받기는커녕 오줌을 뒤집어쓰고 말았다.이렇게 비참할 수가!“저기 개울이 있으니까 일단 가서 씻고 와서 다시 생각해 봐야지. 이젠 되돌릴 수 없어. 보스한테 하루밖에 안 남았어.”진환은 똥오줌을 맞을 각오를 하더라도 조원주에게 부탁해야겠다고 결심했다.구할 수 있든 없든, 시도라도 해보는 것이 지금처럼 죽음을 바라보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형, 나도 같이 가. 난 낯짝이 두꺼워서 맞아도 괜찮아.”우서진도 뒤를 따르자 양요한은 방에 혼자 남았다.그는 고통스러워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도윤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총 한 방이면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을 그 얼굴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하다니.“당신이 이곳에서 죽어도 그 여자는 알지도 못해요.”도윤은 온몸의 기관이 독의 영향을 받아
이를 본 양요한은 다급하게 물었다.“꼬마야,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겠니?”무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스처를 취했고 양요한은 일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너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은 할 수 있다고?”무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누구, 할머님?”무무는 고개를 저으며 이번에는 양요한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제스처를 취했다.“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 네 엄마야?”무무는 고개를 끄덕였다.양요한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그럼 엄마는 지금 어디 계셔?”무무는 또 다른 제스처를 취했다.“멀리 가셔서 언제 돌아오실지 모른다고? 이걸 어떡하지, 보스에겐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무무야,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게 시간을 연장할 방법이 없을까?”무무는 도윤을 바라보았다. 도윤은 청각도 영향을 받아 양요한의 목소리가 귀에 닿는 데 몇 초가 걸렸고 마치 가공된 소리처럼 들렸다.도윤은 모든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이번엔 가망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큰 손이 무무의 손을 다시 잡았다.괜찮아, 그냥 조용히 죽기만 기다리면 되겠지.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입술에 액체가 떨어지자 도윤은 무의식적으로 혀를 내밀어 핥았다.양요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무무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없겠냐고 물었을 뿐인데 무무는 칼로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 도윤이 피를 마시게 했다.판타지 소설에서나 일어날 장면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너무 신기했다! 잠시 꿈을 꾸는 것 같았다.겨우 목소리를 되찾은 양요한이 물었다.“이렇게 하면 독이 퍼지는 걸 늦출 수 있어?”무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문 앞에서 조원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무야!”무무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숨기려는 듯 조원주를 두려움에 떨며 바라보았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린 네가 다치면 네 엄마한테 뭐라고 설명하겠니?” 조원주는 서둘러 출혈을 멈추기 위한 약과 지혈을 위한 붕대를 가져왔다.양요한은 황급히 말했다.“할머님, 무무가 방금 자기 엄마가 사람
무무가 입술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조원주는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불쌍한 아이야, 애초에 네 엄마가 떠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걸 알아야 해. 너희 모녀가 아직 살아 있는 걸 알면 분명히 네 엄마를 다시 가둬버릴 거야, 그러길 바라?”무무는 고개를 저었다.“그럼 모르는 척해야지. 어차피 네 엄마는 이 마을에 없으니까 저 남자가 이걸 이겨낼 수 있을지는 본인한테 달렸어.”조원주는 한숨을 쉬었다.“네 어머니는 과거에 고생도 많이 했고, 특히 너를 낳을 때는 목숨까지 걸었어. 지금이라도 어머니께 감사하고 어렵게 얻은 이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무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상하게도 도윤은 무무의 피를 마신 후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눈과 귀가 맑아지고 간단한 음절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뻗어나가던 붉은 선이 피를 마신 이후 더 이상 심해지지 않고 멈춘 듯 보였다.“보스, 몸은 좀 어떠세요?”도윤은 놀랍게도 혼자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많이 좋아졌어. 어떻게 됐어?”“상황이 좋지 않아요. 어린애 엄마가 보스를 구할 수 있다는데 이미 마을을 떠났고, 여기에는 외부와 연락할 수단도 없어요. 몸속에 있는 독을 잠시 멈춘 것뿐이지 아이 엄마가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진봉은 말을 하기 싫은 듯 말끝을 흐렸다.도윤은 오히려 태연했다.“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지.”“그래도 보스는 다르잖아요!”“크게 다르지 않아.”도윤은 나지막이 기침을 했다.정말 이게 마지막이라면 죽기 전에 지아와 아이들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이 있었다.도윤은 천천히 일어나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나갔다.방금 씻고 온 미셸이 도윤을 부축해 주려 달려왔다.“오빠, 막 움직이지 마.”“저리 비켜.”도윤이 미셸의 손을 뿌리치는데 그 간단한 동작에 온 힘을 다 써서 넘어질 뻔했다.진봉은 도윤을 부축하기 위해 달려갔다.도윤은 덤덤하게 말했다.“날 데리고 그 아이한테 가서 고맙다고 전해야겠어.”아이 덕분에
특히 무무의 맑은 눈동자는 10여 년 전 지아를 처음 봤을 때,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맑은 눈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해하던 때와 똑같았다.그 생각은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가 금세 사라졌다.이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이 있는 게 정상인데, 전에 암살한 여자도 지아와 비슷하지 않았던가?게다가 지금쯤이면 소망이는 다섯 살, 여섯 살이 넘었을 텐데 어떻게 지아가 초록 눈동자를 가진 아이를 낳을 수 있었을까?괜한 생각이겠지.도윤은 자신의 얼굴에 새겨진 붉은 선에 어린아이가 겁을 먹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래서 표정을 가다듬고 부드럽게 말했다.“무무야, 네가 날 구해줬지? 고맙다.”무무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놓으면 도윤이 쓰러질까 봐 두려운 듯 놓지 않았다.“말을 못 해?”무무는 고개를 끄덕였다.도윤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는지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졌다.“삼촌이 큰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해 줄게.”마을 사람들은 독을 해독하는 데는 능했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병은 도구로 치료해야 했다.무무가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본 도윤은 다시 웃었다.“삼촌은 너를 해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무서우면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해줘. 삼촌의 말은 언제든 유효해. 삼촌이 죽더라도 꼭 치료해 줄 사람이 있을 거야.”무무는 속상한 마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도윤은 이 자세가 너무 힘들었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헐떡거렸다.무무는 불편한 표정을 짓는 삼촌을 보며 다시 피를 뽑아주고 싶었다.도윤은 손을 뻗어 칼을 만지는 무무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고맙지만 네 피로 치료할 수 없어. 결국 삼촌을 살릴 수 없으니 낭비하지 마.”지금 마신 피로는 기껏해야 하루 반 정도만 생명을 지연시킬 수 있고, 무무의 피를 빼서 열흘, 한 달을 지연시켜도 결국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무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도윤은 남은 시간 안에 이 마을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도윤은 아직 정신
이틀 만에 정상인이었던 도윤은 모든 장기가 손상되고 서서히 감각을 잃어가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지아와의 추억을 떠올리던 도윤은 3년여의 별거 기간 동안 지아를 볼 수 없었고, 추억만이 그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도윤은 매일 여러 가지 일로 바쁘게 지내면서 지아에 대한 사랑을 희석시키고 있었다.하지만 틈만 나면 그 생각은 가시덩굴이 단단히 감싸는 것처럼 정신과 마음 구석구석을 미친 듯이 덮쳐왔고, 몸부림칠수록 마음은 더 아팠다.보이지 않는 신체 부위가 온통 찔려서 고통스러웠다.고통에 잠식되었을 때도 자신이 죽으면 지아 곁으로 날아가 한 번 더 지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했다.당시 지아는 암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그런 지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지아는 해마다 긴 세월을 견뎌냈지만 자신에게는 고작 이틀에 불과했다.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팠고, 천 번을 회개해도 지아가 겪은 고통을 보상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지아야...꿈에도 잊지 못할 사람이었다.영원히 잃어버린 지아를 어쩌면 이번 생에서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도윤은 펜과 종이를 꺼내 유언장을 쓰기 시작했다.이씨 가문을 물려받은 사람은 지윤이고, 자신의 모든 재산은 자녀와 전처에게 남겨준다는 것 말고 할 말이 없었다.이씨 가문은 재산이 워낙 많아서 분배하는 데만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시간이 흘러 해는 서서히 지고, 도윤은 하늘의 석양이 지평선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도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꼈다.“보스, 좀 쉬다가 쓰세요.”“아니, 곧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을 텐데, 더군다나 펜을 잡을 힘조차 없을 것 같아 두려워.”정신이 멀쩡할 때 적어야 한다.미셸은 절대 쓰러지지 않을 신처럼 보이던 도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나약함을 보았다.마치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도윤의 삶이 끝나가는 것 같았다.신은 왜 그에게 이런 짓을 한 걸까? 도윤이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