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이상하게도 오이 같은 과일에서 은은한 향기가 나면서 입맛이 돌았다.도윤은 몇 입 베어 물었고, 주스는 진하고 달콤했으며 주스가 흐르는 부위는 놀랍게도 다소 개운하고 통증이 많이 완화되었다.“이거 약이야?”도윤이 무무에게 물었다.무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일인지 채소인지도 모르는 생전 처음 보는 과일을 몇 개 더 가져다주었다.도윤은 서둘러 먹었고, 비록 독을 치료할 수는 없었지만 먹은 덕분에 체력도 좀 생기고 몸 상태도 조금 나아졌다.“고마워, 무무야.”도윤은 다시 손을 뻗어 무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네 부모가 누구였기에 너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았을까?”무무는 눈을 깜빡였다. 소망 언니와 너무 닮았는데, 정말 아빠가 아닐까?생각에 잠겨있을 때 도윤이 손을 뗐다.“미안, 삼촌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 아껴야 해. 너랑 못 놀아줄 것 같네.”이 아이는 비록 말하지는 못했지만, 어린 나이에 일찍 철이 들어 어른스럽고 의술도 조금 알고 있었던 터라 도윤은 아이와 놀아주고 싶었다.이제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웠고,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도윤은 저녁 식사 후에도 유언장을 계속 써야만 했다.도윤은 밤새도록 쉬지 않았고, 무무의 피로 연장했던 수명이 서서히 다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여러 가지 감각이 다시 무뎌지기 시작했고, 다행히 유언장을 다 써서 남은 시간을 지아와 아이들에게 쓰고 싶었다.이 정도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진 않았을 텐데, 계속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이 더 빨리 퍼졌다.도윤은 먼저 지윤에게 편지를 썼는데 잘 자라달라고, 좋은 아빠가 되지 못했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주지 못하며 이씨 가문의 무게를 짊어지게 했지만 아빠는 항상 지윤이를 사랑했고 더는 곁에 있어 주지 못한다는 내용들을 주로 썼다.그다음은 어머니, 어릴 적부터 가깝게 지내지 않은 모자 사이라 할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에게 아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것과 나중에 지아를 만나면 지
“무무야, 우는 거야?”도윤이 물었다.그러다 문득 웃음이 났다. 참 한심하다, 무무는 말을 할 수 없는데. 그도 이젠 장님이 되었다.“지금 몇 시지? 미안, 삼촌은 이제 앞이 잘 안 보여.”무무는 손을 잡고 손바닥에 6을 썼다.“벌써 6시야, 시간 참 빠르네.”도윤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밤을 새운 탓에 체력이 다 소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진봉.”도윤이 불렀다.진봉도 밤을 새우며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보스, 저 여기 있어요.”울먹이는 목소리에 도윤은 부드럽게 웃었다.“남자가 왜 울어? 내가 첫날에 이미 삶과 죽음은 각자의 운명에 달렸다고 했잖아.”“알아요, 하지만... 보스가 이럴 줄은 몰랐는데...”여기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도윤을 위해 총알을 맞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죽음이 온다면 도윤보다 먼저 죽었어야지, 도윤이 독에 맞아 이렇게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진환은 위로하는 의미로 진봉의 어깨를 꽉 쥐었다.“보스, 할 말 있으면 해요, 들어줄게요.”도윤은 손을 내밀었다.“테이블로 좀 옮겨줘. 마지막 한 마디를 써야겠어.”“네.”두 사람은 도윤을 의자에 앉히고 한 사람은 도윤의 손끝에 펜을 꽂아주고, 다른 한 사람은 도윤이 거리를 더 잘 판단할 수 있도록 편지지를 도윤의 손에 쥐여주었다.도윤의 손은 파킨슨병 환자처럼 떨려서 펜을 안정적으로 잡을 수가 없었다.바로 편지지에 마지막 몇 마디를 적었다.[지아야, 미안해, 사랑해.]봉투에 넣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몇 글자 쓰는 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한 것 같아서 종이를 접는 것조차 힘들었다.“보스, 제가 할게요.”진봉은 눈물을 흘리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나중에 지아를 만나면 꼭 직접 전해줘.”“네...”“진환아, 나 좀 도와줘. 곧 동이 트는데 마지막으로 일출 같이 보자. 앞으로는 못 볼 테니까.”진환은 뒤돌아 몰래 눈물을 훔쳤다.“네, 대표님.”도윤의 다리는 절뚝거렸고 걷는 능력도 점점 퇴화하고 있었다.마지막으로 진환은 도
진환은 특별히 도윤이 등을 기댈 수 있도록 나무 한 그루를 찾았다.한눈에 봐도 허약해진 도윤의 몸은 흔들리는 촛불 같았다. 촛대를 타고 흐르는 촛농이 마지막 한 방울을 흘릴 때 촛불도 꺼질 것이다.산들바람이 불자 도윤은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진환아,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건 그때 백채원의 무리한 부탁에 응해서 소씨 가문 문제를 지아에게 넘긴 거야. 나만 아니었으면 그토록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각자 떨어져서 가정도 이루지 못한 채 아이들을 만나지도 못하고.”“보스도 나름대로 고초가 있었잖아요. 그런 말씀 마세요.”“허, 고초라, 옛날에 나도 그 핑계로 스스로를 속였지. 그런데 어떻게 고초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해칠 수 있겠어?”도윤이 덤덤하게 말했다.“어렸을 때 아버지가 미웠고,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사랑을 가장한 채 뼛속까지 상처를 줬어. 잘못인 줄 알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지아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된 것도 누굴 탓할 게 아니라 다 내가 자초한 거야.”인생의 끝자락에 이르러 유난히 정신이 또렷해지며 미래가 보이지 않자 과거에 집착했다.그 기억은 마치 노인이 하얗게 씻은 손수건으로 돈을 감싸고 세는 것과 같았다.“됐어, 지금 와서 얘기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인과응보인걸. 지아의 말처럼 우린 다시 만날 수 없고 죽음 앞에서 날 배웅해 줄 아내도 자식도 없네.”진환은 도윤의 손을 잡았다. 마디가 분명하고 긴 성인 남자의 손이 늙은이의 손처럼 떨리고 있었다.“보스, 제가 있잖아요.”진봉도 끼어들었다.“저도 있어요.”“그래, 아직 나를 배웅해 줄 형제들이 있으니 죽어도 후회는 없겠지.”도윤은 죽음을 앞두고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사실 나는 진작에 죽었어야 했는데 전림이 목숨을 선물해 주었지. 이젠 저승으로 가서 사과해야겠어. 내가 큰 빚을 졌거든. 아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아들은 태어나기도 전
도윤이 그 말을 들은 건 10초 뒤였다.오래전 도윤은 지아에게 일출을 보러 산에 함께 가자고 약속했다.당시 너무 바빴던 탓에 정말 같이 가고 싶어도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그렇게 영원의 시간이 흘렀다.지아야, 너와의 약속을 어긴 나를 죽기 전에 다시는 볼 수 없도록 신이 벌을 주는 건가.도윤은 나이 든 노인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눈앞이 캄캄한 것이 아니라 눈앞에 어떤 색도 보이지 않는 것이 실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 허무함 속에서 도윤은 황금빛을 본 것 같았다.해가 떴다.눈을 멀게 할 것만 같았던 색이 도윤의 눈에는 필터를 씌운 것 같았다.그것은 마치 바람에 의해 꺼지기 직전의 불빛처럼 너무도 약하고 희미했다.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감각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도윤은 말을 할 듯 말 듯 입을 벙긋했다가 다시 다물었다.딸랑딸랑-모든 감각을 잃기 전 마지막 방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그래, 어린 소녀가 있었지.무무.도윤은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감각에만 의지해 무무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온몸이 떨렸고 몸을 움직이는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도 인생에서 가장 큰 사치가 되었다.하지만 도윤은 포기하지 않고 모든 감각이 사라지기 전까지 단 한 가지 생각만 했다.배웅해 줄 자식이 없다는 건 신의 뜻인지도 모르겠다.무무는 그래도 지아를 닮았기에 도윤은 죽기 전에 무무를 딸처럼 여기고 안아주고 싶었다.독이 몸의 장기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지만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했다.진봉의 빨갛게 부어 있었다.“보스가 뭐 하려는 걸까?”“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둬.”진환이 진봉을 말렸다.산바람이 두 사람의 눈물을 말려버렸지만 도윤은 느끼지 못했다.무릎이 심하게 떨렸고, 움직일 때마다 온 힘을 다했다.그래도 도윤은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무무는 빛 속에 서 있었고 곧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1초면 분명히 걸을 수 있는 거리를 도윤은 수십 초, 아니 그 이상이 걸렸다.뒤돌아 있던
도윤은 허공에 쓰러졌고 바닥에 힘없이 떨어지는 대신 누군가가 그의 몸을 붙잡았다.도윤은 이미 오래전에 의식을 잃었고, 그의 긴 몸은 그저 다가온 사람에게 기대어 있었다.딸랑딸랑-무무는 너무 행복해서 방방 뛰었고 말은 못 했지만, 눈가에는 행복이 적혀 있었다.진봉과 진환은 슬픔도 뒤로한 채 어느새 나타난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그 여성은 검은색 파워 슈트를 입고 발에는 무거운 마틴 부츠를 신고 있었다.짧은 가죽 상의는 그녀의 완벽한 허리와 몸의 곡선을 드러내면서 완전히 현대적인 스타일로 이 고풍스러운 오두막집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우아한 목을 타고 올라가면 귀티 나는 얼굴이 보였다.추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기품 있는 얼굴은 예쁘다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저런 여자가 어떻게 저런 혼혈아를 낳았을까?여자는 한 손으로 도윤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어린 소녀의 머리를 만졌다.무무가 다급하게 손짓을 하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다 알고 있어.”진환은 서둘러 말했다.“당신이 구심독을 해결할 수 있는 명의인가요?”“할 수 있죠.”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차가웠으며 아주 간결하게 말했다.여자는 도윤의 몸을 내려놓고 먼저 숨결을 살펴보더니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곧바로 옷을 벗긴 여인은 안에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귀찮아 칼을 들고 옷을 찢어버렸다.간결한 움직임에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도윤의 가슴팍이 드러났다.둘은 빠른 칼날에 깜짝 놀랐다.칼이 옷이 아니라 사람의 피부에 닿았다면 아마 두 동강이 났을 것 같았다.붉은 핏줄은 마치 도시를 포위한 병사들처럼 보였는데, 이제 막 포위하려는 지점에 와 있었다.마지막 성채를 점령하면 맹독은 승리를 거둔다.“명의님, 살릴 수 있을까요?”“심장은 아직 손상되지 않았으니 너무 늦지는 않았어요.”여인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무무야, 네 피를 좀 빌려야겠다.”무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른 손을 들었고, 그제야 손바닥에 감긴 붕대를 본 여자는 무
무무는 말을 하지 못했기에 연신 얼굴을 비비며 좋아하는 마음을 몸으로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착하지, 엄마 왔어.”다시 오두막집으로 돌아와 보니 미셸도 잠에서 깨어 있었다.어젯밤, 진환은 우는 미셸이 도윤이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그녀를 그냥 때려서 쓰러뜨렸다.진봉의 등에 업힌 사람을 보고는 울면서 다가왔다.“오빠, 어떻게 됐어? 어떻게 날 두고 떠날 수 있어? 나도 같이 데려가.”그때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속 울 거면 나가요. 시끄러우니까.”입을 벙긋하며 울려던 미셸이 여자의 말에 울지 않으려는 모습이 너무 우스워 보였다.그제야 함께 온 낯선 여자를 발견하고 물었다.“누구야?”“누나, 이분은 보스를 치료해 줄 명의셔. 예의를 지켜.”진봉은 또다시 미셸의 고약한 성미가 드러날까 얼른 제지했다.미셸은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했지만 도윤에게 좋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진심이 있었다.하여 곧바로 표정을 바꾸었다.“명의였군요. 저희 오빠 잘 부탁드려요.”진봉은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도윤이 미셸에게 ‘우리 오빠’가 되었지?그때 조원주가 문 앞에 나타났다.“왔구나.”“할머님.”“이제 막 돌아와서 아직 모를 테니 내가 소개해 주마. 이분들은 치료를 받으러 왔는데 나와 서진이의 40년 전 인연으로 하룻밤 묶게 되었어. 저 남자는 구심독에 걸렸고 저 여자는 약혼녀란다.”조원주는 약혼녀라는 단어를 강조했다.여자는 덤덤하게 대답했다.“알겠어요. 여러분은 저 사람을 뒤쪽 동굴로 데려가세요. 무무야, 네가 앞장서. 저는 치료에 필요한 물건을 준비할게요.”여자는 민첩하게 움직였고, 몇몇 사람들은 그녀가 말을 바꿀까 봐 서둘러 움직였다.여자가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돌아가자 조원주가 따라 들어왔다.“먼지가 잔뜩 묻은 걸 보니 급하게 왔나 보네.”“무무를 못 본 지 꽤 오래되어서 보고 싶어서요.”“무무 때문이야, 전남편 때문이야?”여자의 손이 멈칫했고 조원주는 말을 계속했다.“내 눈을 속일 생각하지 마
재빨리 약재를 손질하는 지아는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었다.침착하고 자립심이 강했으며, 이미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인하고 단단했다.소쿠리 촌은 가진 게 별로 없었지만 약초는 많았고, 조원주는 자신의 의술을 모두 전수해 주었다. 해독에 관한 한 지아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이미 세계 최고였다.지아는 필요한 것을 챙겨 동굴로 서둘러 들어갔다.들어오자마자 미셸이 또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짜인 것 같지는 않았다.미셸이 오랫동안 도윤을 좋아했다고 들었다. 그들은 같은 세계 출신이고 혈액형도 같아서 미셸이야말로 도윤에게 정말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지아가 조용히 다가오자 미셸은 그녀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명의님, 제가 이 사람과 혈액형이 같으니 수혈이 필요하면 제 피를 쓰세요.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줄 수 있어요.”지아는 그런 미셸을 가볍게 흘깃 쳐다봤다.“입 다물고 나가요. 필요할 때 알아서 부를 테니까.”“하지만...”지아는 다시 다른 사람들을 흘겨보더니 진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저 사람 빼고 다들 방해하지 말고 나가요.”“네.”미셸은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종종 문 쪽에서 목을 내밀어 들여다보았다.무무는 이 여자가 싫어서 피리를 꺼내서 연주하자 곧 커다란 붉은 뱀이 나타났다. 커다란 뱀의 몸통이 문을 향해 휘감아 돌자, 누구도 감히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동굴은 입구에 갈라진 틈이 있어 햇빛과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반개방형 동굴이었다.균열 아래에는 작고 맑은 웅덩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땅속에서 솟아나는 화산 샘이었고, 그 주변에는 이국적인 꽃과 허브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이 작은 샘은 몸에 영양을 공급하는 약효를 가지고 있었다.동굴 안에는 세 사람만 남았고, 드라마에서 고대인들이 목욕하는 모습처럼 흔한 도구와 커다란 목욕통이 있었다.도윤은 눈을 꼭 감고 동물 가죽 위에 누워 있었는데, 살짝씩 들썩이는 심장이 아니었다면 방금 죽은 사람 같았다.다행히도 독이 심장을 갉아먹지 않아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진환이 멍때리는 동안 지아는 재빨리 약초를 약을 지어 무무에게 끓일 약초를 건넸다.아이들 중 무무는 유일하게 특별한 체질로 태어나 의술을 물려받은 아이였다.3년 전 지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주원은 치료에 방해되지 않게 아이를 지우려 했다.지아는 주원의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다른 방법이 없자 주원은 지아를 소쿠리촌 조원주에게 보내는 궁여지책을 생각해 낸다.조원주는 약으로 태아를 키우는 비책을 알고 있었는데, 약으로 영양을 공급받은 태아는 배 속에 있는 동안 약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대신 산모인 지아의 몸도 추슬러야 했기에 지아는 밤낮으로 약재가 된 음식을 먹었다.이런 상황에서 지아는 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출산 당일 약간의 진통이 있었지만 아기는 무사히 나왔다.단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아이가 초록색 눈을 가지고 태어났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지아는 무무를 세계 최고의 전문의들에게 데려갔지만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다.검사 결과 모든 게 정상이었고 전문가들은 아이가 너무 작아서 조금만 더 크면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자폐증을 배제하는 한 지아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약을 먹고 자란 아이는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며, 말하지 못하는 것은 생명을 잃은 것에 비하면 작은 대가에 불과했다.또한 무무가 태어나던 날 하늘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며 대나무 집 주변에 새와 곤충, 물고기들이 모여드는 등 많은 동물들이 나타났다.무무는 동물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고, 독으로도 해를 입지 않았다.마치 하늘이 자신의 앞날을 열어줬다는 뜻으로 지아는 무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눈이 녹색인 이유는 부모 모두 녹색 눈 유전자를 가진 친척이 있거나, 엄마 뱃속에서 약물을 너무 많이 흡수해 유전자 변이를 일으켰거나,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지아는 강욱의 가족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친부모도 알 수 없었기에 아직은 무슨 원인인지 알 수 없었다.어쨌든 무무가 생명을 되찾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것만으로 지아는 이미 행복했다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