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은 어리둥절했다. 할머니는 왜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걸까?“왜 그렇게 쳐다봐, 연기라도 하는 거야?”조원주는 비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꺼져, 내 집 더럽히지 말고.”말하며 조원주는 무무의 눈을 가렸다.“보지 마, 눈만 버려.”미셸은 흠뻑 젖은 채로 돌아서서 욕설을 퍼부었다.“무슨 저런 까다롭고 이상한 할망구가 다 있어! 안 구해 주면 말지 대체 나한테 뭘 끼얹은 거야, 무슨 냄새가 이렇게 고약해?”진봉은 코를 막으며 멀리 피했다.“누나, 멀리 있는 게 좋겠어. 오랫동안 묵혀둔 오줌 같은데 괜히 보스한테 피해주지 마.”미셸은 울고 싶었다.“오줌? 어떻게 나한테 소변을 뿌릴 수 있어!”우서진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이곳에선 오줌으로 악을 쫓아.”“아니, 나는 살아있는 사람인데 오줌으로 날 쫓아요?”“이게 다 네 말도 안 되는 소리 때문이잖아.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 네가 약혼녀라고 한 순간부터 태도가 달라졌어.”“평생 데려가는 사람 없어서 정신병이라도 걸린 거 아니야? 드라마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부탁하면 그 마음에 감동해서 구해주던데, 이럴 줄 누가 알았겠어?”동정을 받기는커녕 오줌을 뒤집어쓰고 말았다.이렇게 비참할 수가!“저기 개울이 있으니까 일단 가서 씻고 와서 다시 생각해 봐야지. 이젠 되돌릴 수 없어. 보스한테 하루밖에 안 남았어.”진환은 똥오줌을 맞을 각오를 하더라도 조원주에게 부탁해야겠다고 결심했다.구할 수 있든 없든, 시도라도 해보는 것이 지금처럼 죽음을 바라보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형, 나도 같이 가. 난 낯짝이 두꺼워서 맞아도 괜찮아.”우서진도 뒤를 따르자 양요한은 방에 혼자 남았다.그는 고통스러워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도윤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총 한 방이면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을 그 얼굴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하다니.“당신이 이곳에서 죽어도 그 여자는 알지도 못해요.”도윤은 온몸의 기관이 독의 영향을 받아
이를 본 양요한은 다급하게 물었다.“꼬마야,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겠니?”무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스처를 취했고 양요한은 일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너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은 할 수 있다고?”무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누구, 할머님?”무무는 고개를 저으며 이번에는 양요한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제스처를 취했다.“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 네 엄마야?”무무는 고개를 끄덕였다.양요한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그럼 엄마는 지금 어디 계셔?”무무는 또 다른 제스처를 취했다.“멀리 가셔서 언제 돌아오실지 모른다고? 이걸 어떡하지, 보스에겐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무무야,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게 시간을 연장할 방법이 없을까?”무무는 도윤을 바라보았다. 도윤은 청각도 영향을 받아 양요한의 목소리가 귀에 닿는 데 몇 초가 걸렸고 마치 가공된 소리처럼 들렸다.도윤은 모든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이번엔 가망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큰 손이 무무의 손을 다시 잡았다.괜찮아, 그냥 조용히 죽기만 기다리면 되겠지.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입술에 액체가 떨어지자 도윤은 무의식적으로 혀를 내밀어 핥았다.양요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무무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없겠냐고 물었을 뿐인데 무무는 칼로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 도윤이 피를 마시게 했다.판타지 소설에서나 일어날 장면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너무 신기했다! 잠시 꿈을 꾸는 것 같았다.겨우 목소리를 되찾은 양요한이 물었다.“이렇게 하면 독이 퍼지는 걸 늦출 수 있어?”무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문 앞에서 조원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무야!”무무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숨기려는 듯 조원주를 두려움에 떨며 바라보았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린 네가 다치면 네 엄마한테 뭐라고 설명하겠니?” 조원주는 서둘러 출혈을 멈추기 위한 약과 지혈을 위한 붕대를 가져왔다.양요한은 황급히 말했다.“할머님, 무무가 방금 자기 엄마가 사람
무무가 입술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조원주는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불쌍한 아이야, 애초에 네 엄마가 떠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걸 알아야 해. 너희 모녀가 아직 살아 있는 걸 알면 분명히 네 엄마를 다시 가둬버릴 거야, 그러길 바라?”무무는 고개를 저었다.“그럼 모르는 척해야지. 어차피 네 엄마는 이 마을에 없으니까 저 남자가 이걸 이겨낼 수 있을지는 본인한테 달렸어.”조원주는 한숨을 쉬었다.“네 어머니는 과거에 고생도 많이 했고, 특히 너를 낳을 때는 목숨까지 걸었어. 지금이라도 어머니께 감사하고 어렵게 얻은 이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무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상하게도 도윤은 무무의 피를 마신 후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눈과 귀가 맑아지고 간단한 음절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뻗어나가던 붉은 선이 피를 마신 이후 더 이상 심해지지 않고 멈춘 듯 보였다.“보스, 몸은 좀 어떠세요?”도윤은 놀랍게도 혼자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많이 좋아졌어. 어떻게 됐어?”“상황이 좋지 않아요. 어린애 엄마가 보스를 구할 수 있다는데 이미 마을을 떠났고, 여기에는 외부와 연락할 수단도 없어요. 몸속에 있는 독을 잠시 멈춘 것뿐이지 아이 엄마가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진봉은 말을 하기 싫은 듯 말끝을 흐렸다.도윤은 오히려 태연했다.“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지.”“그래도 보스는 다르잖아요!”“크게 다르지 않아.”도윤은 나지막이 기침을 했다.정말 이게 마지막이라면 죽기 전에 지아와 아이들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이 있었다.도윤은 천천히 일어나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나갔다.방금 씻고 온 미셸이 도윤을 부축해 주려 달려왔다.“오빠, 막 움직이지 마.”“저리 비켜.”도윤이 미셸의 손을 뿌리치는데 그 간단한 동작에 온 힘을 다 써서 넘어질 뻔했다.진봉은 도윤을 부축하기 위해 달려갔다.도윤은 덤덤하게 말했다.“날 데리고 그 아이한테 가서 고맙다고 전해야겠어.”아이 덕분에
특히 무무의 맑은 눈동자는 10여 년 전 지아를 처음 봤을 때,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맑은 눈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해하던 때와 똑같았다.그 생각은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가 금세 사라졌다.이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이 있는 게 정상인데, 전에 암살한 여자도 지아와 비슷하지 않았던가?게다가 지금쯤이면 소망이는 다섯 살, 여섯 살이 넘었을 텐데 어떻게 지아가 초록 눈동자를 가진 아이를 낳을 수 있었을까?괜한 생각이겠지.도윤은 자신의 얼굴에 새겨진 붉은 선에 어린아이가 겁을 먹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래서 표정을 가다듬고 부드럽게 말했다.“무무야, 네가 날 구해줬지? 고맙다.”무무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놓으면 도윤이 쓰러질까 봐 두려운 듯 놓지 않았다.“말을 못 해?”무무는 고개를 끄덕였다.도윤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는지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졌다.“삼촌이 큰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해 줄게.”마을 사람들은 독을 해독하는 데는 능했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병은 도구로 치료해야 했다.무무가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본 도윤은 다시 웃었다.“삼촌은 너를 해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무서우면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해줘. 삼촌의 말은 언제든 유효해. 삼촌이 죽더라도 꼭 치료해 줄 사람이 있을 거야.”무무는 속상한 마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도윤은 이 자세가 너무 힘들었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헐떡거렸다.무무는 불편한 표정을 짓는 삼촌을 보며 다시 피를 뽑아주고 싶었다.도윤은 손을 뻗어 칼을 만지는 무무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고맙지만 네 피로 치료할 수 없어. 결국 삼촌을 살릴 수 없으니 낭비하지 마.”지금 마신 피로는 기껏해야 하루 반 정도만 생명을 지연시킬 수 있고, 무무의 피를 빼서 열흘, 한 달을 지연시켜도 결국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무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도윤은 남은 시간 안에 이 마을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도윤은 아직 정신
이틀 만에 정상인이었던 도윤은 모든 장기가 손상되고 서서히 감각을 잃어가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지아와의 추억을 떠올리던 도윤은 3년여의 별거 기간 동안 지아를 볼 수 없었고, 추억만이 그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도윤은 매일 여러 가지 일로 바쁘게 지내면서 지아에 대한 사랑을 희석시키고 있었다.하지만 틈만 나면 그 생각은 가시덩굴이 단단히 감싸는 것처럼 정신과 마음 구석구석을 미친 듯이 덮쳐왔고, 몸부림칠수록 마음은 더 아팠다.보이지 않는 신체 부위가 온통 찔려서 고통스러웠다.고통에 잠식되었을 때도 자신이 죽으면 지아 곁으로 날아가 한 번 더 지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했다.당시 지아는 암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그런 지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지아는 해마다 긴 세월을 견뎌냈지만 자신에게는 고작 이틀에 불과했다.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팠고, 천 번을 회개해도 지아가 겪은 고통을 보상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지아야...꿈에도 잊지 못할 사람이었다.영원히 잃어버린 지아를 어쩌면 이번 생에서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도윤은 펜과 종이를 꺼내 유언장을 쓰기 시작했다.이씨 가문을 물려받은 사람은 지윤이고, 자신의 모든 재산은 자녀와 전처에게 남겨준다는 것 말고 할 말이 없었다.이씨 가문은 재산이 워낙 많아서 분배하는 데만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시간이 흘러 해는 서서히 지고, 도윤은 하늘의 석양이 지평선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도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꼈다.“보스, 좀 쉬다가 쓰세요.”“아니, 곧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을 텐데, 더군다나 펜을 잡을 힘조차 없을 것 같아 두려워.”정신이 멀쩡할 때 적어야 한다.미셸은 절대 쓰러지지 않을 신처럼 보이던 도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나약함을 보았다.마치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도윤의 삶이 끝나가는 것 같았다.신은 왜 그에게 이런 짓을 한 걸까? 도윤이
도윤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이상하게도 오이 같은 과일에서 은은한 향기가 나면서 입맛이 돌았다.도윤은 몇 입 베어 물었고, 주스는 진하고 달콤했으며 주스가 흐르는 부위는 놀랍게도 다소 개운하고 통증이 많이 완화되었다.“이거 약이야?”도윤이 무무에게 물었다.무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일인지 채소인지도 모르는 생전 처음 보는 과일을 몇 개 더 가져다주었다.도윤은 서둘러 먹었고, 비록 독을 치료할 수는 없었지만 먹은 덕분에 체력도 좀 생기고 몸 상태도 조금 나아졌다.“고마워, 무무야.”도윤은 다시 손을 뻗어 무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네 부모가 누구였기에 너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았을까?”무무는 눈을 깜빡였다. 소망 언니와 너무 닮았는데, 정말 아빠가 아닐까?생각에 잠겨있을 때 도윤이 손을 뗐다.“미안, 삼촌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 아껴야 해. 너랑 못 놀아줄 것 같네.”이 아이는 비록 말하지는 못했지만, 어린 나이에 일찍 철이 들어 어른스럽고 의술도 조금 알고 있었던 터라 도윤은 아이와 놀아주고 싶었다.이제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웠고,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도윤은 저녁 식사 후에도 유언장을 계속 써야만 했다.도윤은 밤새도록 쉬지 않았고, 무무의 피로 연장했던 수명이 서서히 다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여러 가지 감각이 다시 무뎌지기 시작했고, 다행히 유언장을 다 써서 남은 시간을 지아와 아이들에게 쓰고 싶었다.이 정도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진 않았을 텐데, 계속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이 더 빨리 퍼졌다.도윤은 먼저 지윤에게 편지를 썼는데 잘 자라달라고, 좋은 아빠가 되지 못했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주지 못하며 이씨 가문의 무게를 짊어지게 했지만 아빠는 항상 지윤이를 사랑했고 더는 곁에 있어 주지 못한다는 내용들을 주로 썼다.그다음은 어머니, 어릴 적부터 가깝게 지내지 않은 모자 사이라 할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에게 아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것과 나중에 지아를 만나면 지
“무무야, 우는 거야?”도윤이 물었다.그러다 문득 웃음이 났다. 참 한심하다, 무무는 말을 할 수 없는데. 그도 이젠 장님이 되었다.“지금 몇 시지? 미안, 삼촌은 이제 앞이 잘 안 보여.”무무는 손을 잡고 손바닥에 6을 썼다.“벌써 6시야, 시간 참 빠르네.”도윤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밤을 새운 탓에 체력이 다 소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진봉.”도윤이 불렀다.진봉도 밤을 새우며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보스, 저 여기 있어요.”울먹이는 목소리에 도윤은 부드럽게 웃었다.“남자가 왜 울어? 내가 첫날에 이미 삶과 죽음은 각자의 운명에 달렸다고 했잖아.”“알아요, 하지만... 보스가 이럴 줄은 몰랐는데...”여기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도윤을 위해 총알을 맞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죽음이 온다면 도윤보다 먼저 죽었어야지, 도윤이 독에 맞아 이렇게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진환은 위로하는 의미로 진봉의 어깨를 꽉 쥐었다.“보스, 할 말 있으면 해요, 들어줄게요.”도윤은 손을 내밀었다.“테이블로 좀 옮겨줘. 마지막 한 마디를 써야겠어.”“네.”두 사람은 도윤을 의자에 앉히고 한 사람은 도윤의 손끝에 펜을 꽂아주고, 다른 한 사람은 도윤이 거리를 더 잘 판단할 수 있도록 편지지를 도윤의 손에 쥐여주었다.도윤의 손은 파킨슨병 환자처럼 떨려서 펜을 안정적으로 잡을 수가 없었다.바로 편지지에 마지막 몇 마디를 적었다.[지아야, 미안해, 사랑해.]봉투에 넣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몇 글자 쓰는 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한 것 같아서 종이를 접는 것조차 힘들었다.“보스, 제가 할게요.”진봉은 눈물을 흘리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나중에 지아를 만나면 꼭 직접 전해줘.”“네...”“진환아, 나 좀 도와줘. 곧 동이 트는데 마지막으로 일출 같이 보자. 앞으로는 못 볼 테니까.”진환은 뒤돌아 몰래 눈물을 훔쳤다.“네, 대표님.”도윤의 다리는 절뚝거렸고 걷는 능력도 점점 퇴화하고 있었다.마지막으로 진환은 도
진환은 특별히 도윤이 등을 기댈 수 있도록 나무 한 그루를 찾았다.한눈에 봐도 허약해진 도윤의 몸은 흔들리는 촛불 같았다. 촛대를 타고 흐르는 촛농이 마지막 한 방울을 흘릴 때 촛불도 꺼질 것이다.산들바람이 불자 도윤은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진환아,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건 그때 백채원의 무리한 부탁에 응해서 소씨 가문 문제를 지아에게 넘긴 거야. 나만 아니었으면 그토록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각자 떨어져서 가정도 이루지 못한 채 아이들을 만나지도 못하고.”“보스도 나름대로 고초가 있었잖아요. 그런 말씀 마세요.”“허, 고초라, 옛날에 나도 그 핑계로 스스로를 속였지. 그런데 어떻게 고초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해칠 수 있겠어?”도윤이 덤덤하게 말했다.“어렸을 때 아버지가 미웠고,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사랑을 가장한 채 뼛속까지 상처를 줬어. 잘못인 줄 알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지아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된 것도 누굴 탓할 게 아니라 다 내가 자초한 거야.”인생의 끝자락에 이르러 유난히 정신이 또렷해지며 미래가 보이지 않자 과거에 집착했다.그 기억은 마치 노인이 하얗게 씻은 손수건으로 돈을 감싸고 세는 것과 같았다.“됐어, 지금 와서 얘기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인과응보인걸. 지아의 말처럼 우린 다시 만날 수 없고 죽음 앞에서 날 배웅해 줄 아내도 자식도 없네.”진환은 도윤의 손을 잡았다. 마디가 분명하고 긴 성인 남자의 손이 늙은이의 손처럼 떨리고 있었다.“보스, 제가 있잖아요.”진봉도 끼어들었다.“저도 있어요.”“그래, 아직 나를 배웅해 줄 형제들이 있으니 죽어도 후회는 없겠지.”도윤은 죽음을 앞두고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사실 나는 진작에 죽었어야 했는데 전림이 목숨을 선물해 주었지. 이젠 저승으로 가서 사과해야겠어. 내가 큰 빚을 졌거든. 아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아들은 태어나기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