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가 침묵하자 도윤은 계속 말했다.“내가 전에 너에게 상처 주는 짓을 많이 한 건 사실이니까 네가 나와 헤어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네 전남편일 뿐 아니라 두 아이의 아빠인데, 소송을 하더라도 아이들의 양육권이나 만날 권리는 있지 않아? 말 한마디로 내 모든 권한을 빼앗는 게 정말 정당하다고 생각해?”이 한마디에 지아의 표정이 급변했다.“나한테서 아이를 뺏어갈 생각이야?”정말 둘이 법정으로 간다면 조건상 도윤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지아의 담담한 얼굴이 그 자리에서 조금 무너져 내렸다.“지아야, 불안해하지 마. 비유를 든 거지 양육권을 뺏으려는 게 아니야.”도윤은 서둘러 지아를 진정시키려 했다.“나는 단지 네가 다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나도 너와 아이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얘기를 하는 거야. 넌 섬에서 마음 놓고 병 치료하고, 아이들도 자유롭게 클 수 있어. 다 안전할 거라고.”지아는 눈을 내리깔고 한참을 생각했다.“좋아, 그렇게 해.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말해.”“민아가 지금 감정적으로 큰 상처를 받았어. 데리고 가서 쉬게 하고 싶어. 서로 돌봐줄 수도 있고.”“알았어, 내가 준비할게.”도윤은 지아의 바닥을 향한 시선에서 승리의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너무 익숙한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지 지아는 처음부터 도윤의 의도를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한 가지 더, 강욱 씨 만나고 싶어요.”도윤의 눈빛에서 불쾌함이 엿보였다.“지아야, 그날 밤이 특별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 사람을 살려줬을 것 같아? 그런 사람을 만날 때 내 기분은 생각해 봤어?”“강욱 씨가 아직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알았어, 내가 데려다줄게.”도윤이 계산을 하고 나왔을 때는 이미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가로등 아래 흩날리는 눈은 유난히 낭만적으로 보였다.도윤이 지아를 병원에 내려주고 하빈은 복도를 지켰다.“아가씨 오셨어요.”지아가 날카롭게 물었다.“강욱 씨는 좀 어때요?”“어젯밤 투석을
눈이 점점 많이 내리자 도윤은 차의 속도를 적절히 줄였다.뒤로 다른 차들이 뒤따라오면서 눈 내리는 밤의 풍경이 만들어졌다.늦은 겨울밤, 설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고, 작은 색색의 불빛들이 사방에 걸려 있는 세상은 조용하고 온화했다.차 안은 조용했고 도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반면에 지아는 창밖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곧 코너를 돌기 전 도윤은 미리 속도를 늦추었다.바로 그 순간, 다른 도로의 차 한 대가 도윤이의 차를 노리고 거칠게 달려들었다.갑작스러운 변화에 도윤은 급하게 핸들을 꺾어 차를 피하고자 도로 옆으로 핸들을 돌렸다.이미 반응 속도가 매우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상대 차량은 도윤의 차량 운전석 가장자리를 스쳤다.중형 트럭이라 강한 힘으로 도윤의 차를 대각선으로 들이받았다.문이 닫힌 가게의 유리문이 앞으로 다가왔을 때 차는 통제 불능 상태였다.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지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도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조심해.”지아의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이윽고 고막이 깨질 것 같은 큰 충돌음이 들렸다.지아는 눈을 질끈 감고 귓가에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언제 다가왔는지 도윤이 단단한 몸으로 지아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앞유리는 물론 문에 달린 유리마저 사방으로 깨졌고, 지아의 손에 유리가 박혔다.많이 아팠다.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틈도 없이 차가 심하게 흔들리고 에어백이 터지면서 지아를 단단히 감쌌다.잠시 후 차가 움직임을 멈추자 지아는 따뜻한 액체가 볼에 흐르는 것을 느꼈다.눈을 뜨자 코앞에 있는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도윤은 이마를 다쳐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리며 지아의 뺨에 떨어졌다.피였다. 지아는 공포에 질려 눈을 번쩍 떴다.머릿속에 미연이 죽던 모습이 다시 한번 떠올랐고 도윤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남자는 이마를 다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지아의 동공은 커졌고, 도윤은 얼굴 상처보다 등에 고슴도치처럼 많은 유리 파편이 박힌 게 더 심각했
곧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진봉은 비극적인 장면을 보고 충격에 휩싸여 이렇게 외쳤다.“대표님!”도윤의 이마에는 고통으로 흘린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고 입술은 하얗게 변했지만 도윤은 그럼에도 이렇게 말했다.“지아부터 구해.”조수석 문은 벽에 눌려서 열리지 않았고, 왼쪽에는 커다란 화물차 한 대가 있었다.진봉은 깨진 차 지붕의 유리창을 따라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대표님, 조금만 버티세요.”지아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도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얼굴에는 눈물이 굵은 방울로 흘러내렸다.도윤은 지아를 향해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지아야, 네 말대로 됐어. 난 널 위해 내 목숨을 바칠 운명인가 봐.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내가 죽으면 더 이상 너와 애들을 지켜줄 사람이 없을까 봐 두려워. 미안해, 그동안 좋은 아빠, 남편이 되지 못해서 너와 아이들을 많이 힘들게 하고 다치게 했어... 콜록...”기침을 하자 입가에 피가 나기 시작했다.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도윤의 머릿속에는 지아밖에 없었다.“울, 울지 마. 다신 널 해치지 않겠다고 했잖아.”하지만 손바닥에 묻은 피 때문에 닦아줄수록 지아의 얼굴은 점점 피로 번졌다.지아는 울먹이는 것 말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오직 도윤이가 살길 바라는 생각뿐이었다.밖에서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다행히 도윤은 누군가 지아를 암살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정예 요원들을 많이 배치해 두었다.그리고 그들이 들이박은 가게가 엄폐물을 만들어 주었기에 진봉과 다른 사람들이 달려가 구출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총격전은 10분 동안 지속되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서야 잦아들었다.조용하고 긴 거리에 경찰차 사이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도윤도 가까스로 구출되었지만 등에 유리가 가득 박혀 있었고 진봉은 차마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119를 불렀다.팔에 상처를 입은 진환은 다친 팔을 가리고 침착하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먼저 안전하게 모실게요, 이 사람들은 킬러가
지아가 도윤의 혈액형을 정확히 모르자 진봉은 이렇게 설명했다.“대표님은 희귀 혈액형인 P1이에요.”이 혈액형을 들은 지아는 눈앞이 시커멓게 변해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지아는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혈액형이 얼마나 희귀한지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P 혈액형 체계는 ABO 혈액형 체계, RH 혈액형 체계와 구분되는 혈액형 체계로, P1, P2, P1k, P2k, p 등 다섯 가지로 나뉜다.가장 흔한 혈액형은 P1과 P2이고, 마지막 세 가지 혈액형은 더 희귀했다.하지만 단순히 P형 혈액만으로는 구하기도 어려운 데다 도윤은 부상으로 많은 양의 수혈이 필요한 상황에서 그 정도로는 부족할 가능성이 높았다.“어떻게 이럴 수가...”지아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고, 진봉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 것이다.‘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면 차라리 내가 다쳤을 텐데.’“사모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늘 건강하셨던 분이라 괜찮을 겁니다. 그 파편들이 전부 사모님께 날아갔어도 가벼운 정도로 얼굴을 다쳤을 테지만 이미 지병이 있으셨으니 대표님은 옳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지아는 진봉의 소매를 붙잡고 손바닥에 식은땀을 흘렸다.“여분의 혈액이 있나요?”“분명 있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대표님 혈액형이 워낙 특별해서 진작 다 준비했을 겁니다. 정 안 되면 또...”그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스크를 쓴 의사가 안쪽에서 나왔고, 지아 역시 그의 눈빛에서 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지아는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의사는 지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간호사에게 지시했다.“미셸은 아직 안 왔어?”“소령님은 작전 수행하러 가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알려 드렸으니 곧 오실 겁니다...”쾅- 큰 소리와 함께 누군가 비상구 문을 걷어찼다.지아는 군복을 입은 영국인처럼 보이는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비상구를 빠져나오는 것을 보았다.엘리베이터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는지 여자는 옥상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늘 차분했던 얼굴이 지금은
진봉은 얼른 사람을 시켜 지아에게 붕대를 감아주었다. 지아는 모든 생각이 도윤에게 집중되어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수술실 문이 열리고 미셸이 걸어 나왔다.들어갈 때만 해도 당당했던 미셸이 나올 때는 입술까지 하얗게 변해 부축을 받고 있었다.‘피를 많이 흘렸나 봐. 그래서 손과 발에 힘이 없는 거야.’미셸은 왔을 때는 너무 급한 나머지 지아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이제야 발견하고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그건 지아도 마찬가지였다.미셸은 지아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봤다.도윤의 마음속에 항상 있던 사람.미셸도 방금 전의 수술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고 도윤의 능력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엄폐물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다쳤다고 해도 그렇게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다.등 전체가 엉망이 되었다는 건 딱 하나, 다른 누군가를 막아주었다는 뜻이다.도윤이 온몸으로 보호하고 있던 여자는 누구였을까? 짐작할 필요도 없었다.미셸은 지금 이미 힘이 다 빠진 상태였지만, 여전히 당당한 걸음걸이로 지아를 향해 걸어왔다.지아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미셸은 손을 들어 지아의 얼굴을 때렸다.진봉도 이렇게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미셸을 막으러 달려가면서 이렇게 말했다.“누나, 뭐 하는 짓이야?”미셸은 진봉을 무시하고 지아를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굶주린 늑대처럼 지아를 갈기갈기 찢어 배속으로 삼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당신이 대체 뭔데, 목숨 걸고 지킬 가치가 있기는 해? 당신 같은 사람 만 명이 죽어도 저 안에 있는 사람 목숨값도 안 돼!”한창 도윤에 대한 걱정에 빠져 있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때리자 지아는 황당했다.여자의 입에서는 악랄하다고 할 수 있는 극도로 불쾌한 말까지 내뱉고 있었다.지아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내가 누구든 당신이 알 것 없고, 저 사람이 무슨 선택을 하든 그것도 당신과 상관없죠.”도윤의 사랑이 용기를 가져다준다면 미셸은 이 점에서
오늘 밤 일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진환은 그 여파로 정신없이 바빴다.지아 옆에는 진봉만 홀로 남았다.지아는 차 안에서 두꺼운 패딩을 벗었던 터라 얇은 니트만 입고 있었다.복도에는 난방이 되지 않아 찬 바람이 차갑게 불었다.지아는 이렇게 추위에 서서 도윤을 기다리던 몇 년 전 그날 밤이 떠올랐다.진봉은 그다지 세심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지아의 뒷모습이 조금은 불쌍해 보였다.특히 지나가던 구급대원들이 모두 일부러 지아에게 못되게 굴었다.“비켜요, 길 막지 말고.”더 이상 바쁘지도 않았지만 그저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지아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도윤이 그렇게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테니까.그들의 눈에 지아는 도윤에게 그저 짐일 뿐이었다.털털한 진봉도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군 병원에 있는 의사들은 대부분 계급장을 달고 최전방에 있었던 사람들이라 뼛속까지 오만해서 지아의 신분이 어떻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지아도 마음속 깊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상처받지 않았다.‘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다른 사람들 눈치를 봐.’언젠가 지아 자신도 남들이 만만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될 거라 다짐했다.지아는 이 순간, 애초에 한 남자 때문에 공부를 포기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달았다.만약 자신이 공부를 제대로 마치고 뛰어난 의사가 되었다면, 꽃병 취급이나 받으며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 시달렸을까?지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언젠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영광을 되찾겠다고 남몰래 다짐했다!지아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무시한 채 허리를 곧게 펴고 서서 결과를 기다렸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난 줄 알았던 미셸이 다시 돌아왔다.옷을 갈아입으러 돌아간 미셸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도 여전히 용감해 보였고, 군인은 태생부터 일반인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자리에 서 있는 지아는 나약한 버드나무처럼 동정받아야 할 존재로 보였지만 미셸은 버드나무를 거꾸로 세운 여자 영웅 같은 인상을 주었다.옅은 화장을
몇 시간의 수술 끝에 도윤의 몸속에 있던 유리 파편은 모두 제거되었고 당분간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부상을 당하면 마취를 할 텐데, 도윤은 고통을 견뎌내고 있었다.그 몇 시간은 지옥 같았다.도윤은 항상 깨어 있는 상태로 지아를 만나기만 기다렸다.미셸이 가장 먼저 도윤에게 달려갔다.“오빠, 괜찮아?”도윤은 손등에 턱을 괴고 모든 힘을 소진한 채 통증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이미 기운이 빠지기 직전이었지만, 도윤은 문이 열린 후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도윤이 처음 본 사람은 미셸이 아니라 지아였다.미셸의 인사를 무시한 채 도윤은 미약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아야.”지아가 그제야 도윤에게 천천히 다가가자 도윤이 손을 내밀었고 지아가 맞잡았다.도윤의 손바닥은 더 이상 마르지 않았고 땀이 배어 있었다.“살아서 수술실에서 나가겠다고 약속했잖아.”이 말을 한 후에야 도윤은 기절했지만 지아를 붙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그 행동에 미셸은 따귀를 맞은 것 같이 얼굴이 화끈거렸다.도윤의 사랑은 지아의 최대 무기였다.진봉이 급히 물었다.“선생님, 우리 보스는 괜찮나요?”우 박사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운이 좋았어. 유리 조각이 심장에 박힐 뻔했는데 다행히 몇 센티미터 정도 간격이 있었어. 여름이었으면 바로 죽었을 텐데 겨울이라 옷이 두꺼워서 다행이지.”“그럼 보스는 이제 괜찮다는 거죠?”“왜 힘든 걸 자초하는지 몰라. 마취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버텼어. 요즘엔 약도 잘 갈아주어야 해. 감염되면 큰일 나니까.”“감사합니다 선생님.”우 박사는 손을 흔들었다.“일단 이틀 동안 병동에서 관찰해 보죠.”도윤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는지 우 박사도 조금은 안도한 듯 표정이 전처럼 차갑지 않았다.도윤은 고집스레 지아를 놓지 않았고, 지아는 침대 가장자리를 붙잡고 병동까지 도윤을 밀고 가야 했다.우 박사는 미셸을 흘끗 쳐다보았다.“너도 참, 왜 남의 부부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거야? 저놈 성격을 모르
지아는 처음엔 그러는 게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사람들은 선입견을 품고 있었고 자신도 이미 모두에게 나쁜 인상을 남겼다.오늘 여기서 도윤을 지키기 위해 서 있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무시할 것이다.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왜 굳이 신경 써야 하나?평소에도 몸이 약했던 지아는 오래 서 있다 보니 종아리가 아팠다.침대에 엎드리면 요통이 생길지도 모른다.“네, 다녀오세요.”지아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침대 쪽으로 갔고,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미셸이 화를 냈다.“당, 당신 뻔뻔하게 뭐 하는 거예요?”지아는 눈을 깜빡이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말했다.“보다시피 여우는 피곤해서 좀 쉬어야 해요.”“어떻게 저 남자랑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있어요?”미셸은 급한 마음에 펄쩍 뛸 지경이었다.지아는 어이가 없었다.“저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이 사람이 저를 안 놔주잖아요.”말을 하는 동안 지아는 옆으로 누우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리고 미셸 씨는 왜 그렇게 흥분하세요?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 말고도 더한 일도 했는데 그게 미셸 씨와 무슨 상관이죠?”그 말에 미셸은 말문이 막힌 채 또다시 같은 말만 반복했다.“당신들 이미 이혼했잖아! 예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아야지.”“미셸 씨, 뭘 잘 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우리 둘 사이에 얽혀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에요.”진봉은 이불을 챙겨 빠르게 달려왔다.“사모님, 이불 여기 있어요. 오늘 밤 피곤하실 테니 좀 쉬세요.”미셸은 이해할 수 없었다.“저 여자가 뭘 했길래 피곤해?”진봉은 지아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뒤돌아서서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모님은 이렇게 오래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야만인처럼 매일 싸움이나 하러 다니는 누나와 달라서...”진봉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미셸은 종아리를 걷어찼다.“누가 야만인이야? 다시 말해 봐! 그리고 이왕 챙겨올 거면 내 이불까지 가져와야지.”“커플 사이에 끼어서 뭐 하는 거야?”미
지아는 멍하니 서 있다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진봉을 바라보며 물었다.“성형?” “예, 성형수술이요.”지아는 그제야 소시월이 왜 자신과 닮았는지, 혹시 소임호와 관련 있는 사람인지 의심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되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손에 든 서류를 훑어보았다.소시월은 13살에 처음 성형수술을 했고, 이후 매년 한 가지씩 성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게다가 20대 중반 이후로는 유지와 보수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그 시절 소시월은 기숙 학교에 다녔기에, 사람들은 반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가 성장하며 부모를 닮아간다고 생각했을 뿐, 의술의 힘으로 얼굴을 바꿨다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아마 그들이 당시에 지아를 해치지 않은 이유도 그녀의 얼굴을 복제하려 했기 때문일 터.그 후, 지아가 쓸모없어지자 암살 계획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지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 가짜 얼굴을 한 꺼풀씩 다 벗겨내 주겠어!”“사모님, 만약 그 여자가 사모님을 계속 암살하려던 배후라면, 그 여자의 등에는 분명히 총상이 있을 겁니다. 그날 저희가 사람들을 데리고 갔을 때, 그 여자는 도망치면서 총을 한 발 맞았었죠.” “당장 알아봐!”지아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는데,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생지옥 같은 나날들이 떠오르는 듯했다.비록 도윤이 한때 지아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결국 그 모든 고통은 누군가가 뒤에서 지아의 삶을 철저히 망가뜨린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소시월은 내 자리를 차지하고, 내가 누려야 할 가족의 사랑과 따듯함을 즐겼어. 그것도 모자라서 나를 지옥 속으로 처참히 몰아넣었다고!’지아의 분노는 억누를 수 없을 정도였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반드시 모든 진실을 밝혀내겠습니다.” “그 여자를 감시할 사람을 찾아. 최근 움직임이 많아졌으니,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예.”지아는 머리를 짚으며
안타깝게도 지아가 이미 진실을 알아낸 상태였기에, 장민호의 소식은 늦은 셈이었다.“지금 어디에 계세요?”지아가 급히 물었다.‘민호 씨가 이 일에 연루되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Z국에 있어요. 최근 소씨 가문에 많은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 소식을 알아내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틈을 타서 지아 씨에게 위협이 되는 소시월을 제거할 테니까요.]지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아는 처음에 장민호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자신의 의도를 눈치챘을까 봐 걱정했지만, 장민호는 아직 그녀가 Z국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죽이면 안 돼요.”[왜요? 그 여자는 지아 씨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그런 위험한 존재를 살려두면 지아 씨에게 더 큰 위협이 될 거예요.]지아는 핑계를 댔다.“저는 이미 몇 번이나 그 사람한테 암살당할 뻔했고, 그 소씨 가문의 여섯째 딸이라는 사람과도 만났어요. 우리는 나이도 비슷하고, 국적도 달라서 아무런 원한도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저를 죽이려고 했겠어요?” “제 생각엔 누군가 소시월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단지 이용당하는 말일 뿐인 거죠. 그 사람을 죽이는 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그 배후의 사람이 진짜 목표니까요...” 지아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아니라 말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장민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강인했다.[제가 도울게요.]“위험하지 않겠어요? 너무 위험하다면 하지 마세요. 저는 민호 씨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 [지아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겁니다.]장민호는 마지막으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제 속죄라고 생각해 주세요.]전화를 끊은 후에도 지아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사건이 윤곽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지만, 주변 상황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특히 소씨 가문이 혼란스러운 지금은 지아가 신분을 밝히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소임호와 조경숙이 자기 친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지아
병원에서 사고를 당한 시언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아는 일찍이 자신과 시후의 계획을 모두 털어놓았다. 다만, 다른 사람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시후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고, 시언이 대외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즉, 두 사람이 안팎에서 호응하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 게다가 소임호 또한 차근차근 사건을 조사하며, 여러 정황으로 인해 배후의 흑막이 조경선이라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조경선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미끼로 삼았다. 하지만 비행기 사고 이후로 소임호와 시후의 연락이 끊겼고, 시언은 며칠 동안 마음을 졸이며 초조해했다. 그런데 조금 전, 다행히도 소임호의 행방을 알아낸 것이었다.시언은 즉시 이 소식을 지아에게 알렸다. 지아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자, 시언의 목소리를 듣고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순간적으로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 지아야?”시언은 지아의 침묵에 걱정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 지아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그냥...]하지만 말을 꺼내자 목소리에 눈물 섞인 떨림이 묻어나왔다.시언이 더욱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이 있다면 숨기지 마. 우리는 이미 네 의형제가 됐어. 우린 가족이라고. 소씨 가문에 이런저런 일이 생겼다고 해도, 난 널 지킬 거야.”시언의 ‘지킨다’라는 말이 지아의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했다.시언은 지아의 정체를 알지 못했음에도 여전히 이렇게 다정하고 따듯하게 대해주었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유대일 것이었다. 하지만 지아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왜 소씨 가문 사람들은 내 존재 자체를 몰랐을까?’ 현재 지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경숙은 여섯 번째 아이를 낳은 후 과다출혈로 크게 몸이 상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고 했다.‘가족이 내 존재를 모를 리가 없는데.’ ‘게다가 시영 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남은 건 소시월 뿐이야.’‘소시
소임호는 눈앞의 광기 어린 조경선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조경선, 그동안 정말 행복했니? 그렇게 애써 계획해서 네가 얻은 건 뭐지?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우리는 모두 패배자라고!” “틀렸어.”조경숙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그 당시의 나는 얼굴도 망가지고, 족보에서 제명되고, 가족들에게도 내쳐졌어.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데, 조경숙은 왜 모든 걸 가져야 해? 시골에서 돌아온 한낱 촌뜨기가 어떻게 나를 대신할 수 있었냐고!” “그래, 난 패배자야. 하지만 너희도 내 시체 위에 서서 잘난 척할 수는 없을걸? 우리 두 쪽 다 망가지는 게 내 승리니까!” 조경선이 고개를 숙여 소임호를 살펴보며 말했다.“당신 꼴을 좀 봐. 떠돌이 개랑 다를 게 뭐야? 참 안쓰럽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곧 소씨 가문은 완전히 망가질 거야. 나는 당신을, 그리고 소씨 가문을 반드시 파멸시키고 말 거야!” “너 정말 미쳤구나.”“그래, 난 미쳤어.”“하지만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젠 내가 겪었던 고통을 당신이 똑똑히 느껴야 할 차례야.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경숙은 이제 심세호의 여자가 됐어. 정말 가슴 아프지 않아?” “참, 그건 모르지? 소씨 가문의 노친네는 이미 죽었고, 당신 아들들도 곧 당신과 함께 무덤으로 갈 거야!” “조경선, 너는 진짜 인간 말종이야!” 소임호는 극도로 분노하며 몸부림쳤고, 쇠사슬은 그의 몸부림으로 인해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조경선은 소임호의 턱을 잡고 비웃으며 말했다. “왜, 불만이야? 그럼 나한테 빌어봐. 그러면 그 자식들한테 고통 없는 죽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꿈 깨.”소임호가 냉소하며 말했다.“죽어도 너한테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당신을 죽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참히 망가지는지 보여줄 수 없잖아. 당신 자식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고,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조경숙은 눈이 멀어 다른 남
여자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넌 먼저 돌아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당분간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어요.”시월은 갑자기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물었다.“맞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그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흥, 끝까지 고집불통인 쓰레기 같은 남자. 내가 겪은 교통을 천배, 만 배로 되돌려줄 거야!” 시월의 얼굴에 찰나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엄마,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동안 아빠가 가족도 잃게 하고, 집안도 망가지게 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 꿈 깨! 이건 그 사람이 나한테 진 빚이라고!” 여자가 소시월의 옷깃을 꽉 잡으며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데, 나는 네 어미야. 네가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나는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엄마, 알겠어요, 나는 엄마의 딸이니까 당연히 엄마 편이에요.” 소시월은 여자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나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여자의 정서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사실, 그녀의 얼굴도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집착이 너무도 강한 그녀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 고통을 평생 기억하면서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한테 천 배, 만 배로 돌려줄 거야!!” 여자는 평생을 복수 계획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하지만 소시월이 보기에, 복수를 이루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소씨 가문은 지금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소시월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소시월이 떠난 후, 여자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는데, 여자가 자신의 지문을 입력하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여자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갔고,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는 손과 발이 묶인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광기 어린 집착이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소임호
소지훈이 폭로한 충격적인 사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아에게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출생 비밀을 찾아 헤매던 지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스스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 소씨 가문 사람들의 고충에 공감했던 지아는 이제 그들이 자기 혈육임을 알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천천히 미끄러졌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들이...” 하지만 더욱 지아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예전에 마주했던 그 시신이 자기 친언니였다는 사실이었다. ‘시영 언니는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 ‘심지어 나는 그걸 전혀 몰랐고, 언니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했어...’ 지아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지아야!”도윤은 지아를 안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침대에 누운 채 찡그린 표정을 한 지아를 보며 도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지아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어. 그런데 간절히 바랐던 가족마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다니.’ 무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아의 곁을 지켰다.도윤은 무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냥 과로한 상태에서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뿐이거든.” 한편, 소씨 가문의 황당한 해프닝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으며, 소영수의 장례식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들의 싸움의 장이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소지훈이 이긴 듯 보였으나, 사실 그로 인해 소씨 가문은 체면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시월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해가 뜨기도 전에 황급히 차를 몰아 오래된 별장으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까악까악’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섬뜩하게 들렸다. 장미 덩굴은 낡은 담벼락 위로 기어오르며, 삭막하고 부패한 세상에 한 줄기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햇살이 어둠을 찢으며 온 세상의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