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금세 지나갔고 방은 추웠으며 이불만으로는 지아를 따뜻하게 해줄 수 없었다.지아는 잠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를 안고 있으니 마음이 놓여 금세 잠이 들었다.해경은 작은 히터처럼 팔에 달라붙어 지아에게 끊임없이 온기를 공급했다.지아는 초원에서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자유롭게 뛰어노는 꿈을 꿨다.도윤은 길 끝에 서서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지아야...”지아가 눈을 번쩍 떠보니 밖은 이미 동이 트였고 전효는 방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커튼이 없는 창문으로 바깥이 훤히 보였고, 밤새 내린 눈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하얗게 덮여 있었다.지아는 조용히 해경의 곁을 떠나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그녀를 맞이했다.설경은 많이 봐왔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깜짝 놀랐다.너무 아름답다!하얀색이 온 세상을 감싸며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고 새하얀 눈만 남았다.쌓인 눈 속에는 작은 동물이 남긴 발자국이 있었고, 작은 다람쥐 두 마리가 나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는데, 지아가 발견하자마자 바로 뛰어내렸다.공기는 차가웠지만 상쾌했다.주변을 살피고 돌아온 전효는 문에 기대어 있는 지아를 보았다.지아는 모자를 쓰고 있지 않아 1센치 되는 짧은 머리카락이 그대로 드러났다.어젯밤에는 몰랐던 전효는 지금 이 순간에야 눈치챘다.“네 머리...”지아가 웃었다.“전에는 항암치료 때문에 빠졌지만 이제 새로 자랄 테니 상관없어요. 어차피 천천히 자랄 거예요.”지아는 아이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미리 가발을 썼다.“이제 좀 괜찮아 보이죠?”지아의 밝은 미소에 전효는 동정심이 들었다.‘떨어져 지내는 동안 무슨 일을 겪었을까.’전효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방에 건빵이 있어. 급하게 도망치느라 먹을 걸 준비할 시간이 없었네. 일단 그걸로 허기를 달래.”건빵과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 지아는 포만감을 느꼈다.“어젯밤 당신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으면 난 벌써 시체가 되었을 텐데, 그러면 이런 과자를 먹기나 했겠어요
전효가 덤덤하게 말했다.“앞을 봐, 뭐가 보여?”지아는 앞을 향해 몇 걸음 걸어 절벽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숲을 에둘러 멀리 산이 겹겹이 이어져 있고 눈 덮인 산이 웅장하게 보였다.“자유요.”“그래, 이 협곡을 넘어 앞쪽으로 가면 자유가 기다리고 있어.”하지만 도윤에게 여러 번 말렸던 지아는 이제 용기가 나지 않았다.지아는 두려웠다. 또 잡혀서 끝없는 어둠의 심연 속으로 들어갈까 봐 두려웠다.“마음 정리가 안 된 거야?”지아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난... 두려워서요.”“뭐가 두려운데?”“실패해서 전효 씨까지 난처하게 만들까 봐 두렵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두려워요. 지금도 눈만 감으면 미연이의 죽음이 생각나요.”전효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두려워할 거 없어. 넌 가장 힘든 시기를 이겨냈잖아. 사람은 현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돼. 예전과 같은 삶을 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싫어요. 변하고 싶어요. 강해지고 싶어요. 미연이의 복수를 하고 싶어요.”지아는 손을 뻗어 눈송이를 잡았고, 눈송이는 금방 녹아서 손바닥에 물이 고였다.눈송이들은 자신들이 떨어져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름에서 수백만 개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단 한 개의 눈송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전효 씨, 나 좀 데려가 줘요.”“알았어. 하지만 며칠만 시간을 줘.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그리고 소망이도 데려와야 해요.”“나한테 맡겨. 민이에게 데려오라고 하면 돼. 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여기 있어, 사흘 후에 출발할 테니까.”“알았어요.”전효는 무기를 꺼냈다.“어떻게 사용하는지 기억나?”“기억해요.”“네 스스로를 지키는 데 써. 오두막 뒤 소나무 숲에 내가 파놓은 토굴이 있으니 위험하면 아이를 데리고 그 안에 숨어. 미리 엄호할 곳도 만들어 놓았으니 쉽게 발각되지 않을 거야.”지아는 전효의 지시에 순순히 따라 오두막 안에 머물렀다.이곳은 추웠지만 경치가 유난히 좋았다.활발한 남자아이였던 해경이는 일어나자마
도윤은 팔짱을 낀 채 미간에 우울한 기색을 드러낸 채 서 있었다.“소망이만 데려가고 싶은 게 아니라 지아도 있어. 지아도 오랫동안 나를 떠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지금이 딱 좋은 시기일 거야.”“그럼 어떻게 할까요? 지금 막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 능력으로 정말 사모님을 데려가면 저희는 제대로 조사할 수도 없습니다.”전효는 원래 음지에서 살던 사람이었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방법이 많았다.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던 도윤은 갈등하고 있었다.자신이 지아에게 너무 큰 트라우마를 주었고 그럴 치유하는 데는 평생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억지로 다시 데려오면 그녀의 마음속 그림자가 더 짙어지고 가뜩이나 안 좋은 두 사람의 관계가 더 악화될 뿐이었다.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기엔 지금이 도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지아를 직접 볼 수 없다는 것, 그녀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매 순간 그의 가슴을 할퀴었다.“돌아오게 해야지. 하지만 우리가 개입할 수는 없어.”“사모님은 지금 갈 생각이 확고한데 돌아오지 않으시면 저희 쪽에서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지아가 가장 아끼는 게 뭐야?”진환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작은 아가씨와 작은 도련님이요. 지금 아가씨에게 손을 쓰기엔 너무 늦었어요. 그렇다고 일부러 아가씨를 납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중에 일이 드러나면 사모님은 분명히 화를 내실 겁니다.”도윤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다른 사람이 있어, 김민아.”“맞아요. 사모님에게는 가족이 없고 강미연이 죽은 뒤에는 가장 친한 친구인 김민아만 남았죠. 사모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에요!”“요즘 김민아를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만 봐도 그 여자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지.”하지만 진환은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그런데 김민아 씨가 협조하지 않고 사모님 편에 설까 봐 걱정이에요.”“협조하지 않아도 방법도 있어.”지아만 아니면 누구라도 해칠 수 있다는 불길한 빛이 도윤의 눈을 스쳐 지나갔다.“김민
민아는 의아한 얼굴로 도윤을 쳐다보았다.“도대체 무슨 꿍꿍이에요?”도윤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지아가 날 떠나고 싶어 해.”“당신 같은 악마를 보면 나였어도 도망쳤을 거예요.”“내가 과거에 나쁜 짓을 많이 한 건 부정하지 않지만, 지금은 지아를 지키고 싶을 뿐이지 소유하려는 게 아니야. 지아는 밖에 아주 강한 적이 있어.”“얼마나 강한데요?”도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지금까지 정체를 알 수 없었고, 세 번이나 암살자를 매수해 지아를 공격했어. 2년 전 지아가 조산하던 날 밤에는 수백 명의 암살자를 보냈고, 그 비 오는 날 밤에 지아는 죽을 뻔했다.”이 모든 일들을 지아는 단 한 마디로 가볍게 스치듯 말했기에 민아는 그 과정을 알지 못했다.도윤으로부터 지아와 연락이 끊긴 2년 동안 지아가 수많은 위험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지아가 죽은 척했을 때 이미 알아차렸지만 무척 갈등했어.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때 깨달았지. 지아를 데려오는 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이라는 걸. 그래서 내 힘이 닿는 선에서 지아를 보호했고, 묵묵히 지켜봤어. 김민아, 정말 다시는 지아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할게.”도윤의 얼굴에는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이기적인 마음에 도와달라는 게 아니라, 지아에겐 아직 완치되지 않은 병도 있고 몸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있는데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 자신을 지킬 수 있겠어?”민아는 이토록 비굴한 도윤을 본 적이 없었다.4년 전 도윤과 만났을 때는 매번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였다.“당신은 지아의 가장 친한 친구고 당연히 지아의 안전부터 걱정하겠지. 내가 지아를 해칠 생각이었으면 지금 당장 데려오면 되는데, 왜 이렇게 애걸복걸하며 당신에게 부탁하겠어?”도윤은 진심이 최고의 필살기라고 생각했고, 협박 대신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을 썼다.민아는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당신과 지아의 우정이 참 부러워. 지아는 당신을 돕기 위해 며칠 동안 아
전효가 없는 동안 지아와 해경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해경은 소망보다 언어 발달이 훨씬 빨라 한두 문장 정도는 서술할 수 있었다.화목한 시간을 보내면서 지아는 아이의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을 보며 앞으로의 날들을 기대하기 시작했다.이때 민아의 전화가 걸려 왔고 지아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민아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아야, 나 살려줘.”“민아야, 무슨 일이야?”지아는 단번에 조바심이 들었다.“말하자면 복잡해. 만나서 얘기하자.”“근데...”민아가 다급하게 물었다.“왜, 혹시 만날 수 없어? 나 지금 몸이 힘들어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민아의 안타까운 목소리를 들은 지아는 민아의 집안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민아는 이곳에 가족도 없고, 친구도 거의 없고, 유산한 지 얼마 안 돼서 몸도 많이 허약할 것이다.지아는 민아가 자신을 돌봐주던 옛날을 떠올리며 고민 끝에 재빨리 대답했다.“어디야? 내가 너한테 갈게.”민아는 아마 세찬의 집에서 도망쳤는지 지아에게 다른 주소를 보냈고, 지아는 밖에 세워진 자동차를 보았다. 조금 낡긴 해도 운전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전효에게 편지와 연락처를 남기고 지아는 해경과 함께 출발했다.자신도 고통을 겪어봤으니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이를 돕고 싶었다.화장을 하지 않은 민아를 다시 보니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전보다 훨씬 더 수척해져 있었다.“지아야, 드디어 왔구나.”지아는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민아를 보고는 안타까운 마음에 얼굴을 쓰다듬었다.“울지 마, 나 여기 있어.”민아는 지아를 먼저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꾹 참았던 지난번과 다르게 감정이 폭발한 것 같았다.지아를 껴안고 한 시간 동안 세찬을 욕하던 민아는 지아가 입을 막지 않았다면 세찬이 침대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시간까지 뱉어냈을 것이다.옆에서 의아해하는 해경을 바라보며 민아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미안 미안, 실수할 뻔.”“그 폭탄 같은 성격은 여전하구나. 이제 좀 나아졌어?”지아는
이제 막 멈추었던 민아의 눈물이 다시 흘렀다.“지아야... 나 진짜 힘드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안아줘.”지아가 부드럽게 등을 두드렸다.“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처음 만났을 때는 내가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오늘은 내 안전을 위해 그 사람 대신 나보고 오라고 한 거지?”“멍청아, 다 알았으면서 왜 돌아왔어?”몸을 뗀 지아는 민아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많은 것을 경험한 만큼 생각은 민아보다 훨씬 성숙해져 언니처럼 민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나도 널 구하고 싶었으니까. 널 구할 유일한 기회였으니까.”도윤에게서 며칠 전 지아가 한 일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아가 자기 몸 하나 챙기기도 힘든 상황에서 자신까지 걱정할 줄은 몰랐다.“전에는 연락이 안 되던데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세찬을 언급하자 민아는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다 내 잘못이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엔 다른 사람의 장난감이 되어 버렸어.”지아는 한숨을 쉬었다.“너에 대한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의 신분이나 미래만큼 중요하지 않은 거야. 그 정도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비슷한 집안의 아내를 원하지, 사랑이 있든 없든 상관없어.”“그래, 처음엔 그 사람도 분명 결혼은 집안의 강요로 하겠지만 앞으로도 나랑 이런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내 자리만 빼고 뭐든 줄 수 있다고 했어. 하지만 내가 아무리 돈을 좋아한다고 해도 결혼한 사람 내연녀가 될 수는 없잖아?”“그럼 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민아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난 그 사람 결혼 망칠 생각 없었고 진작 사직서도 제출했어. 그동안 일한 거랑 옛날에 영업 사원이었을 때 벌어둔 돈도 있고, 그 사람이 워낙 통이 큰 데다가 내가 돈을 막 쓰는 성격도 아니라서 조금씩 모아두었던 돈이면 남은 생은 충분히 먹고 놀 수 있어. 싱글맘이 될 준비까지 했는데 그 사람 결혼 상대 여자가 수작을 부려서 아이를 잃게 됐어.”민아는 목이 메었다.“아기를 잃고 출혈로 죽을 뻔했어. 의사 선생님은 내가
도윤은 지아가 돌아오자마자 민아로부터 전화가 올 줄은 몰랐다.“지아가 당신을 만나겠대요.”도윤은 한숨을 쉬었다.“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았어.”눈발이 흩날리던 저녁, 지아는 도윤을 다시 만났다.죽은 척한 이후 여러 뉴스에서 도윤을 봤지만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가 얼마나 야위었는지 깨달았다.검은색 울 코트를 입고 차에 기대고 있던 도윤의 머리 위에는 1분도 지나지 않아 눈이 쌓였다.지아는 도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차에서 기다리지.”도윤은 지아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지아의 마음 상태가 정서적으로 안정된 것을 확인한 도윤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빨리 보고 싶어서.”도윤은 다가와서 우산을 들고 눈을 막아주고 싶었지만, 지아가 싫어할까 봐 어쩌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차에 타서 얘기 좀 하자.”“그래.”도윤은 지아를 위해 손수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사적인 얘기였기에 도윤은 혼자 차를 몰고 왔다.도윤은 지아가 무슨 생각인지 몰랐기에 차에 올라도 시동을 걸지 않았다.모든 주도권은 지아에게 있었다.“밥은 먹었어?”“아니, 전화 받고 바로 왔어.”“나도 밥 안 먹었어. 명월당에 가자.”도윤은 서둘러 전화를 걸어 자리를 예약했다.명월당은 두 사람이 자주 가던 한식집이었다.도윤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차를 돌렸고, 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윤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차 안은 조용했고,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도윤은 지아가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인 ‘운명'을 틀었다.가사는 지금 두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도윤은 천천히 차를 몰았고 지아는 노래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널 잊을 수 없어.오늘도 넌 내 마음속에 남아 날 괴롭혀.]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두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내가 살아 있는 건 언제 알았어?”지아가 먼저 물었다.도윤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오래전에. 적어도 내가 아는 너는 내가 없을 때 죽지 않을 거야. 장례식장
도윤은 붉게 물든 눈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말해 봐, 그 사람 사랑해?”지아는 오히려 되물었다.“언젠가 내가 정말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돼도 그게 뭐 어때서? 도윤 씨, 우린 이혼했어.”핸들에 올려진 도윤의 손은 아직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고, 그는 이 결혼이 끝났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지아야, 네 자유를 구속할 생각은 없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건 안 돼.”“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도윤은 분명하게 말했다.“죽여버릴 거야, 진짜로.”지아가 도윤에게 달려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당신이 강욱 씨한테 그런 짓을 했지, 벌써 죽었어?”도윤은 이런 식으로 전개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지아에게 자신이 무사하고 살아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더욱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도윤은 지아의 손을 낚아채며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그럼 오늘 다른 남자 때문에 날 만난 거야?”사실 마음속으로 후회했다. ‘지아야, 너한테 진심으로 화내는 건 아니야.’지아는 도윤이 너무 담담하게 강욱을 언급해서 마음속 의심을 떨쳐 버리던 참이었다.“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날 구해준 사람이고 잘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어.”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만나게 해줄게.”도윤은 다시 시동을 걸고 식당으로 향했고, 재빨리 우산을 들고 조수석으로 다가갔다.지아는 따뜻하게 입고 있었고 도윤은 검은 우산을 들고 눈보라를 막아주었다.두 사람은 막 결혼했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지아는 걸음을 멈추고 우산 아래로 날리는 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지아야, 왜 그래?”“옛날 생각 나서. 도윤 씨,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지아는 자신도 여전히 도윤을 사랑하고, 그 또한 자신에 대한 감정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아무리 서로 사랑해도 멀리 돌고 돌아 이생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음식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맛있었고, 주인은 그들을 알아보고 특별히 지아가 좋아하던 주스를 가져다주었다.그때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