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효가 덤덤하게 말했다.“앞을 봐, 뭐가 보여?”지아는 앞을 향해 몇 걸음 걸어 절벽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숲을 에둘러 멀리 산이 겹겹이 이어져 있고 눈 덮인 산이 웅장하게 보였다.“자유요.”“그래, 이 협곡을 넘어 앞쪽으로 가면 자유가 기다리고 있어.”하지만 도윤에게 여러 번 말렸던 지아는 이제 용기가 나지 않았다.지아는 두려웠다. 또 잡혀서 끝없는 어둠의 심연 속으로 들어갈까 봐 두려웠다.“마음 정리가 안 된 거야?”지아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난... 두려워서요.”“뭐가 두려운데?”“실패해서 전효 씨까지 난처하게 만들까 봐 두렵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두려워요. 지금도 눈만 감으면 미연이의 죽음이 생각나요.”전효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두려워할 거 없어. 넌 가장 힘든 시기를 이겨냈잖아. 사람은 현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돼. 예전과 같은 삶을 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싫어요. 변하고 싶어요. 강해지고 싶어요. 미연이의 복수를 하고 싶어요.”지아는 손을 뻗어 눈송이를 잡았고, 눈송이는 금방 녹아서 손바닥에 물이 고였다.눈송이들은 자신들이 떨어져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름에서 수백만 개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단 한 개의 눈송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전효 씨, 나 좀 데려가 줘요.”“알았어. 하지만 며칠만 시간을 줘.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그리고 소망이도 데려와야 해요.”“나한테 맡겨. 민이에게 데려오라고 하면 돼. 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여기 있어, 사흘 후에 출발할 테니까.”“알았어요.”전효는 무기를 꺼냈다.“어떻게 사용하는지 기억나?”“기억해요.”“네 스스로를 지키는 데 써. 오두막 뒤 소나무 숲에 내가 파놓은 토굴이 있으니 위험하면 아이를 데리고 그 안에 숨어. 미리 엄호할 곳도 만들어 놓았으니 쉽게 발각되지 않을 거야.”지아는 전효의 지시에 순순히 따라 오두막 안에 머물렀다.이곳은 추웠지만 경치가 유난히 좋았다.활발한 남자아이였던 해경이는 일어나자마
도윤은 팔짱을 낀 채 미간에 우울한 기색을 드러낸 채 서 있었다.“소망이만 데려가고 싶은 게 아니라 지아도 있어. 지아도 오랫동안 나를 떠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지금이 딱 좋은 시기일 거야.”“그럼 어떻게 할까요? 지금 막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 능력으로 정말 사모님을 데려가면 저희는 제대로 조사할 수도 없습니다.”전효는 원래 음지에서 살던 사람이었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방법이 많았다.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던 도윤은 갈등하고 있었다.자신이 지아에게 너무 큰 트라우마를 주었고 그럴 치유하는 데는 평생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억지로 다시 데려오면 그녀의 마음속 그림자가 더 짙어지고 가뜩이나 안 좋은 두 사람의 관계가 더 악화될 뿐이었다.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기엔 지금이 도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지아를 직접 볼 수 없다는 것, 그녀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매 순간 그의 가슴을 할퀴었다.“돌아오게 해야지. 하지만 우리가 개입할 수는 없어.”“사모님은 지금 갈 생각이 확고한데 돌아오지 않으시면 저희 쪽에서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지아가 가장 아끼는 게 뭐야?”진환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작은 아가씨와 작은 도련님이요. 지금 아가씨에게 손을 쓰기엔 너무 늦었어요. 그렇다고 일부러 아가씨를 납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중에 일이 드러나면 사모님은 분명히 화를 내실 겁니다.”도윤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다른 사람이 있어, 김민아.”“맞아요. 사모님에게는 가족이 없고 강미연이 죽은 뒤에는 가장 친한 친구인 김민아만 남았죠. 사모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에요!”“요즘 김민아를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만 봐도 그 여자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지.”하지만 진환은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그런데 김민아 씨가 협조하지 않고 사모님 편에 설까 봐 걱정이에요.”“협조하지 않아도 방법도 있어.”지아만 아니면 누구라도 해칠 수 있다는 불길한 빛이 도윤의 눈을 스쳐 지나갔다.“김민
민아는 의아한 얼굴로 도윤을 쳐다보았다.“도대체 무슨 꿍꿍이에요?”도윤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지아가 날 떠나고 싶어 해.”“당신 같은 악마를 보면 나였어도 도망쳤을 거예요.”“내가 과거에 나쁜 짓을 많이 한 건 부정하지 않지만, 지금은 지아를 지키고 싶을 뿐이지 소유하려는 게 아니야. 지아는 밖에 아주 강한 적이 있어.”“얼마나 강한데요?”도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지금까지 정체를 알 수 없었고, 세 번이나 암살자를 매수해 지아를 공격했어. 2년 전 지아가 조산하던 날 밤에는 수백 명의 암살자를 보냈고, 그 비 오는 날 밤에 지아는 죽을 뻔했다.”이 모든 일들을 지아는 단 한 마디로 가볍게 스치듯 말했기에 민아는 그 과정을 알지 못했다.도윤으로부터 지아와 연락이 끊긴 2년 동안 지아가 수많은 위험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지아가 죽은 척했을 때 이미 알아차렸지만 무척 갈등했어.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때 깨달았지. 지아를 데려오는 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이라는 걸. 그래서 내 힘이 닿는 선에서 지아를 보호했고, 묵묵히 지켜봤어. 김민아, 정말 다시는 지아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할게.”도윤의 얼굴에는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이기적인 마음에 도와달라는 게 아니라, 지아에겐 아직 완치되지 않은 병도 있고 몸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있는데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 자신을 지킬 수 있겠어?”민아는 이토록 비굴한 도윤을 본 적이 없었다.4년 전 도윤과 만났을 때는 매번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였다.“당신은 지아의 가장 친한 친구고 당연히 지아의 안전부터 걱정하겠지. 내가 지아를 해칠 생각이었으면 지금 당장 데려오면 되는데, 왜 이렇게 애걸복걸하며 당신에게 부탁하겠어?”도윤은 진심이 최고의 필살기라고 생각했고, 협박 대신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을 썼다.민아는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당신과 지아의 우정이 참 부러워. 지아는 당신을 돕기 위해 며칠 동안 아
전효가 없는 동안 지아와 해경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해경은 소망보다 언어 발달이 훨씬 빨라 한두 문장 정도는 서술할 수 있었다.화목한 시간을 보내면서 지아는 아이의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을 보며 앞으로의 날들을 기대하기 시작했다.이때 민아의 전화가 걸려 왔고 지아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민아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아야, 나 살려줘.”“민아야, 무슨 일이야?”지아는 단번에 조바심이 들었다.“말하자면 복잡해. 만나서 얘기하자.”“근데...”민아가 다급하게 물었다.“왜, 혹시 만날 수 없어? 나 지금 몸이 힘들어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민아의 안타까운 목소리를 들은 지아는 민아의 집안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민아는 이곳에 가족도 없고, 친구도 거의 없고, 유산한 지 얼마 안 돼서 몸도 많이 허약할 것이다.지아는 민아가 자신을 돌봐주던 옛날을 떠올리며 고민 끝에 재빨리 대답했다.“어디야? 내가 너한테 갈게.”민아는 아마 세찬의 집에서 도망쳤는지 지아에게 다른 주소를 보냈고, 지아는 밖에 세워진 자동차를 보았다. 조금 낡긴 해도 운전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전효에게 편지와 연락처를 남기고 지아는 해경과 함께 출발했다.자신도 고통을 겪어봤으니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이를 돕고 싶었다.화장을 하지 않은 민아를 다시 보니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전보다 훨씬 더 수척해져 있었다.“지아야, 드디어 왔구나.”지아는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민아를 보고는 안타까운 마음에 얼굴을 쓰다듬었다.“울지 마, 나 여기 있어.”민아는 지아를 먼저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꾹 참았던 지난번과 다르게 감정이 폭발한 것 같았다.지아를 껴안고 한 시간 동안 세찬을 욕하던 민아는 지아가 입을 막지 않았다면 세찬이 침대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시간까지 뱉어냈을 것이다.옆에서 의아해하는 해경을 바라보며 민아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미안 미안, 실수할 뻔.”“그 폭탄 같은 성격은 여전하구나. 이제 좀 나아졌어?”지아는
이제 막 멈추었던 민아의 눈물이 다시 흘렀다.“지아야... 나 진짜 힘드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안아줘.”지아가 부드럽게 등을 두드렸다.“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처음 만났을 때는 내가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오늘은 내 안전을 위해 그 사람 대신 나보고 오라고 한 거지?”“멍청아, 다 알았으면서 왜 돌아왔어?”몸을 뗀 지아는 민아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많은 것을 경험한 만큼 생각은 민아보다 훨씬 성숙해져 언니처럼 민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나도 널 구하고 싶었으니까. 널 구할 유일한 기회였으니까.”도윤에게서 며칠 전 지아가 한 일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아가 자기 몸 하나 챙기기도 힘든 상황에서 자신까지 걱정할 줄은 몰랐다.“전에는 연락이 안 되던데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세찬을 언급하자 민아는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다 내 잘못이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엔 다른 사람의 장난감이 되어 버렸어.”지아는 한숨을 쉬었다.“너에 대한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의 신분이나 미래만큼 중요하지 않은 거야. 그 정도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비슷한 집안의 아내를 원하지, 사랑이 있든 없든 상관없어.”“그래, 처음엔 그 사람도 분명 결혼은 집안의 강요로 하겠지만 앞으로도 나랑 이런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내 자리만 빼고 뭐든 줄 수 있다고 했어. 하지만 내가 아무리 돈을 좋아한다고 해도 결혼한 사람 내연녀가 될 수는 없잖아?”“그럼 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민아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난 그 사람 결혼 망칠 생각 없었고 진작 사직서도 제출했어. 그동안 일한 거랑 옛날에 영업 사원이었을 때 벌어둔 돈도 있고, 그 사람이 워낙 통이 큰 데다가 내가 돈을 막 쓰는 성격도 아니라서 조금씩 모아두었던 돈이면 남은 생은 충분히 먹고 놀 수 있어. 싱글맘이 될 준비까지 했는데 그 사람 결혼 상대 여자가 수작을 부려서 아이를 잃게 됐어.”민아는 목이 메었다.“아기를 잃고 출혈로 죽을 뻔했어. 의사 선생님은 내가
도윤은 지아가 돌아오자마자 민아로부터 전화가 올 줄은 몰랐다.“지아가 당신을 만나겠대요.”도윤은 한숨을 쉬었다.“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았어.”눈발이 흩날리던 저녁, 지아는 도윤을 다시 만났다.죽은 척한 이후 여러 뉴스에서 도윤을 봤지만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가 얼마나 야위었는지 깨달았다.검은색 울 코트를 입고 차에 기대고 있던 도윤의 머리 위에는 1분도 지나지 않아 눈이 쌓였다.지아는 도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차에서 기다리지.”도윤은 지아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지아의 마음 상태가 정서적으로 안정된 것을 확인한 도윤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빨리 보고 싶어서.”도윤은 다가와서 우산을 들고 눈을 막아주고 싶었지만, 지아가 싫어할까 봐 어쩌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차에 타서 얘기 좀 하자.”“그래.”도윤은 지아를 위해 손수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사적인 얘기였기에 도윤은 혼자 차를 몰고 왔다.도윤은 지아가 무슨 생각인지 몰랐기에 차에 올라도 시동을 걸지 않았다.모든 주도권은 지아에게 있었다.“밥은 먹었어?”“아니, 전화 받고 바로 왔어.”“나도 밥 안 먹었어. 명월당에 가자.”도윤은 서둘러 전화를 걸어 자리를 예약했다.명월당은 두 사람이 자주 가던 한식집이었다.도윤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차를 돌렸고, 지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윤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차 안은 조용했고,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도윤은 지아가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인 ‘운명'을 틀었다.가사는 지금 두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도윤은 천천히 차를 몰았고 지아는 노래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널 잊을 수 없어.오늘도 넌 내 마음속에 남아 날 괴롭혀.]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두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내가 살아 있는 건 언제 알았어?”지아가 먼저 물었다.도윤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오래전에. 적어도 내가 아는 너는 내가 없을 때 죽지 않을 거야. 장례식장
도윤은 붉게 물든 눈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말해 봐, 그 사람 사랑해?”지아는 오히려 되물었다.“언젠가 내가 정말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돼도 그게 뭐 어때서? 도윤 씨, 우린 이혼했어.”핸들에 올려진 도윤의 손은 아직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고, 그는 이 결혼이 끝났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지아야, 네 자유를 구속할 생각은 없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건 안 돼.”“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도윤은 분명하게 말했다.“죽여버릴 거야, 진짜로.”지아가 도윤에게 달려들었다.“이럴 줄 알았어. 당신이 강욱 씨한테 그런 짓을 했지, 벌써 죽었어?”도윤은 이런 식으로 전개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지아에게 자신이 무사하고 살아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더욱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도윤은 지아의 손을 낚아채며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그럼 오늘 다른 남자 때문에 날 만난 거야?”사실 마음속으로 후회했다. ‘지아야, 너한테 진심으로 화내는 건 아니야.’지아는 도윤이 너무 담담하게 강욱을 언급해서 마음속 의심을 떨쳐 버리던 참이었다.“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날 구해준 사람이고 잘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어.”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만나게 해줄게.”도윤은 다시 시동을 걸고 식당으로 향했고, 재빨리 우산을 들고 조수석으로 다가갔다.지아는 따뜻하게 입고 있었고 도윤은 검은 우산을 들고 눈보라를 막아주었다.두 사람은 막 결혼했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지아는 걸음을 멈추고 우산 아래로 날리는 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지아야, 왜 그래?”“옛날 생각 나서. 도윤 씨,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지아는 자신도 여전히 도윤을 사랑하고, 그 또한 자신에 대한 감정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아무리 서로 사랑해도 멀리 돌고 돌아 이생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음식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맛있었고, 주인은 그들을 알아보고 특별히 지아가 좋아하던 주스를 가져다주었다.그때
정곡을 찌르는 지아의 말에 도윤은 침묵만 지켰다.“처음에는 당신도 동생에게 속았다는 걸 알지만, 소씨 가문에 일어난 일도,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준 것도 사실이야. 동생을 지키기 위해 내 손목을 부러뜨리던 모습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해.”“지아야, 미안해.”“그렇게 거듭되는 일들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미안해, 난 이 오래된 원한을 잊고 다시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평온한 지아의 말은 마치 오래된 친구와 얘기를 나누듯 어떤 흥분도 담겨 있지 않았다.“우리 사이에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데 왜 손을 놓지 않는 거야? 다시 함께하는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고, 또다시 나와 심지어 내 아이에게도 상처를 주는 것이야.”도윤은 무덤덤하게 말하는 지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아기를 보고 싶어.”“그럴 필요 없어. 아이들한테는 이미 아빠가 죽었다고 했어. 애들을 보살펴 줄 수 없다면 애초에 만나지 않는 게 낫지.”지아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미워했어. 그러면서도 당신은 여러 번 위험에서 나를 구해 주었어. 이젠 더 이상 과거의 원한도 누구의 잘잘못인지도 잴 수 없어. 칼을 겨누는 대신 서로 헤어지고 잊는 것이 가장 좋은 결말이지 않겠어?”무거워진 도윤의 마음과 반대로 지아의 마음은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평온해졌다.모든 것에 무뎌진 지아는 속세에 해탈한 신처럼 침착하고 절제된 태도를 보였다.하지만 도윤은 마가 씐 악마처럼 계속해서 두 사람의 과거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다.지금껏 많이 양보한 이유는 아직 인내심의 한계까지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 선을 돌파하면 도윤은 모든 통제를 벗어나 완전히 야수로 변할 것이다.도윤은 지금 지아를 또다시 놀라게 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자신의 야수적인 본성을 제대로 숨기고 있었다.“내가 못 하겠다고 하면? 이혼하더라도 너와 아이를 볼 권리가 있지 않나?”도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앞으로 지아를 볼 수 없다면 자신은 분
지아는 멍하니 서 있다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진봉을 바라보며 물었다.“성형?” “예, 성형수술이요.”지아는 그제야 소시월이 왜 자신과 닮았는지, 혹시 소임호와 관련 있는 사람인지 의심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되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손에 든 서류를 훑어보았다.소시월은 13살에 처음 성형수술을 했고, 이후 매년 한 가지씩 성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게다가 20대 중반 이후로는 유지와 보수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그 시절 소시월은 기숙 학교에 다녔기에, 사람들은 반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가 성장하며 부모를 닮아간다고 생각했을 뿐, 의술의 힘으로 얼굴을 바꿨다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아마 그들이 당시에 지아를 해치지 않은 이유도 그녀의 얼굴을 복제하려 했기 때문일 터.그 후, 지아가 쓸모없어지자 암살 계획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지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 가짜 얼굴을 한 꺼풀씩 다 벗겨내 주겠어!”“사모님, 만약 그 여자가 사모님을 계속 암살하려던 배후라면, 그 여자의 등에는 분명히 총상이 있을 겁니다. 그날 저희가 사람들을 데리고 갔을 때, 그 여자는 도망치면서 총을 한 발 맞았었죠.” “당장 알아봐!”지아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는데,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생지옥 같은 나날들이 떠오르는 듯했다.비록 도윤이 한때 지아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결국 그 모든 고통은 누군가가 뒤에서 지아의 삶을 철저히 망가뜨린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소시월은 내 자리를 차지하고, 내가 누려야 할 가족의 사랑과 따듯함을 즐겼어. 그것도 모자라서 나를 지옥 속으로 처참히 몰아넣었다고!’지아의 분노는 억누를 수 없을 정도였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반드시 모든 진실을 밝혀내겠습니다.” “그 여자를 감시할 사람을 찾아. 최근 움직임이 많아졌으니,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예.”지아는 머리를 짚으며
안타깝게도 지아가 이미 진실을 알아낸 상태였기에, 장민호의 소식은 늦은 셈이었다.“지금 어디에 계세요?”지아가 급히 물었다.‘민호 씨가 이 일에 연루되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Z국에 있어요. 최근 소씨 가문에 많은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 소식을 알아내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틈을 타서 지아 씨에게 위협이 되는 소시월을 제거할 테니까요.]지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아는 처음에 장민호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자신의 의도를 눈치챘을까 봐 걱정했지만, 장민호는 아직 그녀가 Z국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죽이면 안 돼요.”[왜요? 그 여자는 지아 씨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그런 위험한 존재를 살려두면 지아 씨에게 더 큰 위협이 될 거예요.]지아는 핑계를 댔다.“저는 이미 몇 번이나 그 사람한테 암살당할 뻔했고, 그 소씨 가문의 여섯째 딸이라는 사람과도 만났어요. 우리는 나이도 비슷하고, 국적도 달라서 아무런 원한도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저를 죽이려고 했겠어요?” “제 생각엔 누군가 소시월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단지 이용당하는 말일 뿐인 거죠. 그 사람을 죽이는 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그 배후의 사람이 진짜 목표니까요...” 지아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아니라 말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장민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강인했다.[제가 도울게요.]“위험하지 않겠어요? 너무 위험하다면 하지 마세요. 저는 민호 씨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 [지아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겁니다.]장민호는 마지막으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제 속죄라고 생각해 주세요.]전화를 끊은 후에도 지아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사건이 윤곽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지만, 주변 상황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특히 소씨 가문이 혼란스러운 지금은 지아가 신분을 밝히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소임호와 조경숙이 자기 친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지아
병원에서 사고를 당한 시언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아는 일찍이 자신과 시후의 계획을 모두 털어놓았다. 다만, 다른 사람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시후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고, 시언이 대외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즉, 두 사람이 안팎에서 호응하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 게다가 소임호 또한 차근차근 사건을 조사하며, 여러 정황으로 인해 배후의 흑막이 조경선이라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조경선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미끼로 삼았다. 하지만 비행기 사고 이후로 소임호와 시후의 연락이 끊겼고, 시언은 며칠 동안 마음을 졸이며 초조해했다. 그런데 조금 전, 다행히도 소임호의 행방을 알아낸 것이었다.시언은 즉시 이 소식을 지아에게 알렸다. 지아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자, 시언의 목소리를 듣고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순간적으로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 지아야?”시언은 지아의 침묵에 걱정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 지아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그냥...]하지만 말을 꺼내자 목소리에 눈물 섞인 떨림이 묻어나왔다.시언이 더욱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이 있다면 숨기지 마. 우리는 이미 네 의형제가 됐어. 우린 가족이라고. 소씨 가문에 이런저런 일이 생겼다고 해도, 난 널 지킬 거야.”시언의 ‘지킨다’라는 말이 지아의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했다.시언은 지아의 정체를 알지 못했음에도 여전히 이렇게 다정하고 따듯하게 대해주었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유대일 것이었다. 하지만 지아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왜 소씨 가문 사람들은 내 존재 자체를 몰랐을까?’ 현재 지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경숙은 여섯 번째 아이를 낳은 후 과다출혈로 크게 몸이 상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고 했다.‘가족이 내 존재를 모를 리가 없는데.’ ‘게다가 시영 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남은 건 소시월 뿐이야.’‘소시
소임호는 눈앞의 광기 어린 조경선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조경선, 그동안 정말 행복했니? 그렇게 애써 계획해서 네가 얻은 건 뭐지?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우리는 모두 패배자라고!” “틀렸어.”조경숙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그 당시의 나는 얼굴도 망가지고, 족보에서 제명되고, 가족들에게도 내쳐졌어.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데, 조경숙은 왜 모든 걸 가져야 해? 시골에서 돌아온 한낱 촌뜨기가 어떻게 나를 대신할 수 있었냐고!” “그래, 난 패배자야. 하지만 너희도 내 시체 위에 서서 잘난 척할 수는 없을걸? 우리 두 쪽 다 망가지는 게 내 승리니까!” 조경선이 고개를 숙여 소임호를 살펴보며 말했다.“당신 꼴을 좀 봐. 떠돌이 개랑 다를 게 뭐야? 참 안쓰럽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곧 소씨 가문은 완전히 망가질 거야. 나는 당신을, 그리고 소씨 가문을 반드시 파멸시키고 말 거야!” “너 정말 미쳤구나.”“그래, 난 미쳤어.”“하지만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젠 내가 겪었던 고통을 당신이 똑똑히 느껴야 할 차례야.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경숙은 이제 심세호의 여자가 됐어. 정말 가슴 아프지 않아?” “참, 그건 모르지? 소씨 가문의 노친네는 이미 죽었고, 당신 아들들도 곧 당신과 함께 무덤으로 갈 거야!” “조경선, 너는 진짜 인간 말종이야!” 소임호는 극도로 분노하며 몸부림쳤고, 쇠사슬은 그의 몸부림으로 인해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조경선은 소임호의 턱을 잡고 비웃으며 말했다. “왜, 불만이야? 그럼 나한테 빌어봐. 그러면 그 자식들한테 고통 없는 죽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꿈 깨.”소임호가 냉소하며 말했다.“죽어도 너한테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당신을 죽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참히 망가지는지 보여줄 수 없잖아. 당신 자식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고,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조경숙은 눈이 멀어 다른 남
여자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넌 먼저 돌아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당분간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어요.”시월은 갑자기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물었다.“맞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그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흥, 끝까지 고집불통인 쓰레기 같은 남자. 내가 겪은 교통을 천배, 만 배로 되돌려줄 거야!” 시월의 얼굴에 찰나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엄마,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동안 아빠가 가족도 잃게 하고, 집안도 망가지게 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 꿈 깨! 이건 그 사람이 나한테 진 빚이라고!” 여자가 소시월의 옷깃을 꽉 잡으며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데, 나는 네 어미야. 네가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나는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엄마, 알겠어요, 나는 엄마의 딸이니까 당연히 엄마 편이에요.” 소시월은 여자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나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여자의 정서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사실, 그녀의 얼굴도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집착이 너무도 강한 그녀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 고통을 평생 기억하면서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한테 천 배, 만 배로 돌려줄 거야!!” 여자는 평생을 복수 계획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하지만 소시월이 보기에, 복수를 이루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소씨 가문은 지금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소시월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소시월이 떠난 후, 여자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는데, 여자가 자신의 지문을 입력하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여자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갔고,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는 손과 발이 묶인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광기 어린 집착이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소임호
소지훈이 폭로한 충격적인 사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아에게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출생 비밀을 찾아 헤매던 지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스스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 소씨 가문 사람들의 고충에 공감했던 지아는 이제 그들이 자기 혈육임을 알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천천히 미끄러졌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들이...” 하지만 더욱 지아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예전에 마주했던 그 시신이 자기 친언니였다는 사실이었다. ‘시영 언니는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 ‘심지어 나는 그걸 전혀 몰랐고, 언니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했어...’ 지아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지아야!”도윤은 지아를 안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침대에 누운 채 찡그린 표정을 한 지아를 보며 도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지아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어. 그런데 간절히 바랐던 가족마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다니.’ 무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아의 곁을 지켰다.도윤은 무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냥 과로한 상태에서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뿐이거든.” 한편, 소씨 가문의 황당한 해프닝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으며, 소영수의 장례식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들의 싸움의 장이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소지훈이 이긴 듯 보였으나, 사실 그로 인해 소씨 가문은 체면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시월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해가 뜨기도 전에 황급히 차를 몰아 오래된 별장으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까악까악’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섬뜩하게 들렸다. 장미 덩굴은 낡은 담벼락 위로 기어오르며, 삭막하고 부패한 세상에 한 줄기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햇살이 어둠을 찢으며 온 세상의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