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얼굴에 붙은 얇은 막을 떼어내자 입체적인 그의 오관이 고스란히 거울에 비쳤다. 몇 달 동안 햇빛을 보지 않은 탓에 원래도 하얀 피부가 핏기가 전혀 없었고, 셔츠 앞섬이 다소 열려 있었다.중세기 뱀파이어처럼 우아하고 고귀한 모습이었다.그는 맨발로 피어오르는 물안개의 열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샤워기의 물이 쏟아지며 검은 액체가 흘러나왔다.그가 다시 걸어 나왔을 때, 그에게서 풍기는 권위적인 기운을 숨길 수 없었다.가면 단추를 채우고 제복을 입은 후 지휘실로 곧장 걸어갔다.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다들 길을 비키며 군인 자세로 똑바로 서서 경례했다.“장관님.”이도윤이 큰 보폭으로 걸어 들어오자 평소 호탕하게 굴던 진봉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장관님, 해적선은 침몰했고 해적들 중 일부는 구명뗏목을 타고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습니다.”“단 한 명도 남기지 마.”“네.”“화물선 상황은 어때?”“저희 형님이 방금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모두 안전하게 지킬 겁니다.”도윤은 울타리 옆에 있던 작은 꼬맹이를 떠올리며 걱정과 불안이 교차했다.당시 그 상황에서 다른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아의 안위에만 정신이 팔렸었다.아이가 살아있다는 생각에 그는 행복하면서도 다소 긴장했다.조금 전 일부러 떠보았을 때 지아가 그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으려는 걸 보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자신을 미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그런 지아가 자신이 두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놔둘 리 없었다.치열한 전투 끝에 해적들은 모두 생포되거나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고, 단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했다.맹국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느님, 부처님께 비느라 바빴다. 오늘 정말 운이 좋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목숨은 끝장났을 것이었다.화물 빼앗기는 건 둘째 치고, 해적이 배에 오르면 모두 죽을 운명이었을 테니까!일찍이 배를 운영할 때 해적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 악마들의 수법을 겪은 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오늘 운 좋게 군함
도윤이 군함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지아는 고열에 정신이 혼미한 채 온몸이 뜨거우면서도 춥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군의관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관님, 소지아 씨에게 이미 약을 먹였지만, 현재 특별한 상황이라 열이 내리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다행히 군함에는 의료 장비가 가득했고, 도윤은 지아의 곁을 지키며 열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아직 날이 밝지 않아 밖은 여전히 회색빛이 감돌았고, 바다의 포효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도윤은 옷을 덮고 지아 옆에 누워 안쓰러운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그동안 두 사람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도윤은 항상 다른 사람인 척해야 했고, 지아를 똑바로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않아서 그녀의 의심을 여러 번 샀다.다행히도 도윤은 굳건한 멘탈로 잘 숨길 수 있었다.도윤은 손을 뻗어 조용히 잠든 지아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피부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체온은 펄펄 끓고 있었다.솜털처럼 삐쭉 솟은 그녀의 머리를 바라보며 이도윤은 더욱 자책했다.그는 나지막이 속삭였다.“지아야...”지아는 무슨 꿈을 꾸는지 이마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어눌한 말을 내뱉었다.도윤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무서워하지 마, 내가 여기 있으니까.”지아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자신은 김민아와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났던 그 해로 돌아갔다.그때 두 사람은 젊고 활기차고 기운이 넘쳤으며, 세계의 아름다운 곳을 여행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다짐했다.그날 밤, 바다는 풍랑과 폭풍우가 몰아쳤고, 호화 유람선은 난파되어 바다에 빠져버렸다.지아는 공포에 질려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바로 그때 하늘에서 군복을 입은 한 남자가 내려와 자신의 귓가에 속삭였다.“겁내지 마, 나 여기 있어.”남자의 팔은 강하고 힘차게 자신의 허리를 꽉 움켜잡고 있었다.지아는 당황한 나머지 남자의 목을 껴안고 그와 함께 떠올랐다.분명 낯선 사람이었지만 자신에게 강한 안정감을 주었다.당시만 해도 순박하고 착했던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가벼운 소리는 도윤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았다.황급히 지아에게서 떨어진 도윤.‘뭐 하는 거야, 지아가 자고 있는데 그런 짓을 하다니!’지금 지아가 깨어났다면 아무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도윤은 잘생긴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띤 채 재빨리 문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야?” 진봉은 눈을 비볐다.‘착각인가? 왜 그의 얼굴이 빨개진 것 같을까?’“그... 의사가 해열제를 가져다드리라고 해서요. 사모님께 먹이세요.”“그래.”도윤은 조용히 건네받았다.“그 사람 찾았어?”“밤에는 바닷바람이 많이 불어서 드론을 조종할 수 없어요. 아직 행방을 찾지 못했지만, 어린 도련님과 함께라면 멀리 갈 수 없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알았어. 무슨 소식 있으면 알려줘.”“알겠습니다.도윤은 문을 다시 닫고 지아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지아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마에 손을 얹어도 열이 내릴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도윤은 손에 든 해열제를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열제를 먹여야 할까?’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도윤은 약을 으깨서 지아의 입에 조심스럽게 넣어주었다.지아는 처음엔 낯선 이물감에 거부감을 드러내다가 점차 약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마침내 약을 삼킨 것을 확인한 도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아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이제 도윤과 지아의 관계는 아는 사이일 뿐 서로 만나고 싶지는 않은 사이였다.다른 방으로 걸어가면서 도윤은 포대기를 두른 어린아이를 바라보았다.지윤의 얼굴에 익숙했던 도윤은 똑같은 그 얼굴을 여자아이가 하고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손가락으로 작고 말랑한 소망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도윤은 혹여 힘으로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웠다.지아는 깃털처럼 아주 작았다.서서히 작은 속눈썹이 가볍게 떨려오며 도윤이 미처 떠나기도 전에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의아함이 가득한 소망의 눈빛에 도윤이의 마음은 감정에 격렬하게 휘둘리고 있었다.“아가, 그동안 많이 고생 했지?”‘고생?’고생이 뭔지 몰랐던 소망이는 아빠, 오빠와 함께 있으면 행복하다는 것만 알았다.“참, 배 안 고파?”도윤은 서둘러 맛있는 음식과 음료를 가져다주었다.역시나 어린아이였던지라 두 눈이 단번에 반짝거렸다.소망은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 찬 식탁을 바라보며 막 밝아지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오빠.”도윤은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걱정하지 마. 이미 사람을 보내서 오빠를 데려올 테니 곧 오빠랑 만날 수 있을 거야. 얼른 먹어. 오빠가 오면 또 줄게.”소망이는 분명 배가 고팠지만 그렇다고 허겁지겁 먹지 않는 걸 보아 태생적으로 귀티가 났다.외모는 자신과 닮았지만 행동은 엄마의 우아함을 물려받은 듯했다.도윤은 소망을 바라볼수록 마음이 들떴고, 당분간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더라도 아이가 살아있고 옆에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음식을 한참 먹던 소망은 남자가 먹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자 살갑게 도윤 앞에 과자를 내밀었다.“삼촌도 먹어요.”그 간단한 행동에도 도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다시 한번 도윤이 아이를 품에 안았다.“착하기도 하지.”소망은 삼촌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싫지는 않았다.도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이.‘삼촌 잘생겼다.’이윽고 도윤은 차분하게 생선 가시를 발라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이야기를 들려주며 곧 오빠가 올 거라고 안심시켰다.사탕까지 가져다주는 삼촌을 소망이는 무척 좋아했다.하늘이 밝아지고 바다는 다시 잔잔해졌다.폭우가 그치고 드디어 하늘이 맑아졌다.지아는 열이 내렸다가 오르기를 반복하며 며칠 동안 앓았다.마침내 배가 정박해 한 섬에 멈췄다.더 이상 배가 흔들리지 않자 지아는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눈을 뜨자마자 창밖으로 눈 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지아는 손을 뻗어 눈을 가렸다.지
지아는 불안한 얼굴로 급히 손을 뻗어 도윤의 소매를 붙잡았다. “뭐라고요? 누가 어디로 데려갔어요?”“지아 씨, 일단 진정하세요. 천천히 말씀드릴게요.”도윤은 감시카메라 영상을 꺼내 보여주었다.“여기, 이 남자가 데려갔는데 영상 보면 해경이가 원해서 데려간 것 같아요. 아는 남자인 것 같은데.”도윤의 말에 겨우 진정한 지아는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배경이 흐릿했지만, 아이가 원해서 간 게 맞았고 데려간 사람은 전효였다.아이를 데려간 사람이 전효라는 것을 알고 지아는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어쨌든 당시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전효는 자신이 배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소망을 구하기 위해 뛰어내렸으면 두 아이를 모두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분명 누군가가 아이를 구하러 내려간 것을 보고 몰래 배에 올라탔을 텐데, 끔찍한 결말을 피하고자 소망을 뒤로하고 해경을 데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아이를 찾았지만 곧바로 이별의 아픔을 마주한 지아의 감정은 매우 복잡했다.“그럼... 그...”도윤은 덧붙였다.“여자애 이름은 소망입니다.”“소망이.”지아는 부드럽게 중얼거렸다.처음엔 많은 이름을 생각하다가 아기를 조산한 탓에 결국 이름을 짓지 못했다.전효가 소망과 해경이라는 좋은 이름을 지어준 줄은 미처 몰랐다.“아이 어디 있어요?”“옆 방에요. 데려다줄게요.”지아는 허약한 몸을 잊은 채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다행히 도윤이 재빨리 잡아줬고, 지아는 그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도윤의 품에 안겼다.머리가 어지러웠던 지아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없었다.“지아 씨,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요. 제가 안아서 데려다줄게요.”지아는 딸을 빨리 보고 싶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알았어요. 그럼 부탁드릴게요.”몇 달 만에 의식 있는 상태에서 남자와 가장 가깝게 맞닿은 순간이었고, 지아의 눈에 그는 여전히 정직하고 장난기 섞인 임강욱이었다.낯선 남자의 품에 안
소망은 지아를 한 번도 본 적 없어도 타고난 혈연은 끊을 수 없었다.전효가 지아의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사진 속 지아는 따뜻한 미소를 지은 채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뼈만 앙상하고 수척했던 지금과는 달랐지만 소망은 그래도 바로 엄마를 알아봤다.지아도 도윤과 같은 반응을 보이면서 눈물을 흘리며 소망을 꼭 껴안았다.재회의 기쁨에 눈물이 났고, 아이를 안으니 지아는 아이를 낳던 날 겪었던 고통이 떠올랐다.평생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아이가 이렇게 커서 말랑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나.소망은 의아했다. 며칠 전만 해도 잘생긴 삼촌이 자신을 껴안고 울었는데, 이젠 엄마도 그렇게 운다.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소망은 지아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호호 불었다.“울지 마요.”전에 아플 때마다 전효가 이렇게 불어주면 아이는 울음을 그치곤 했었다.지아는 손을 들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섬세한 눈망울이 도윤과 쏙 닮았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웠다.“이름이 소망이 맞지?”어린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소망이에요.”전효는 오빠가 타오르는 태양처럼 밝고 찬란하고, 동생은 하얀 달처럼 고결하고 순수하기를 바랐다.지아는 멈췄던 눈물을 다시 흘리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을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눈매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그래, 아주 예쁜 이름이네.”소망은 이해할 수 없었다.‘왜 예쁘다면서 우는 걸까?’소망이는 작은 손을 내밀어 지아의 솜털 같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지아는 황급히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엄마가 아파서 머리가 다 빠졌어. 나중에 다시 자랄 거야.”지아는 아이를 다시 품에 안았다.“앞으로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알았지?”소망이 덧붙였다.“오빠.”“그래, 엄마가 오빠를 찾으면 우리 가족 다시 만나게 될 거야.”이 말을 들은 소망이는 웃다가 그날 도윤이 오빠를 찾아주겠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삼촌.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생각에 지아는 아이를 더욱 꽉 잡았다.힘들게 되찾은 아이들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호해야 했다.지아는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이제 그녀가 할 일은 자신의 몸을 잘 돌보고 몰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었다.범인이 잡히지 않는 한 숨어야 했고,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두 아이까지 위험에 처할 것이다.‘하지만 내 잘못도 아닌데 왜 숨어야 하는 걸까?’그녀는 결백한데 왜 아이들은 평생 빛을 보지 못한 채 길거리 쥐새끼처럼 숨어 다녀야 하나.모든 사건의 원흉이 자신의 결혼 생활을 파탄 내고, 가족들을 죽이고, 아이들과 헤어지게 하며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다.강미연의 죽음이 결코 잊히지 않았다.지아는 그 사람을 찾아내서 예전에 당한 고통을 천 배로 갚아주겠다고 다짐했다!도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제가 선을 넘었네요.”지아가 서늘한 기색을 거두었다.“그쪽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에요.”지아는 어떤 설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가까이 지내지 않을수록 헤어질 때 덜 슬플 테니까.하지만 가족의 연은 끊을 수 없었다.지아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엄마랑 밥 먹을까?”“좋아요.”아이는 흔쾌히 답했다.지아가 손을 내밀자 소망이는 순순히 지아의 손바닥에 손을 얹었다.그 순간 지아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차마 힘도 주지 못하고 작고 말랑한 소망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며칠 밤낮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딸을 찾았다.지아가 너무 천천히 걷자 도윤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지아 씨, 제가 도와드리는 게 낫겠어요. 그러다 넘어져요.”지아는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기에 거절하지 않았다.“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별말씀을요.”도윤은 지아의 팔을 잡고 움직일 수 있도록 지지대 역할을 했다.그 순간 지아의 정신은 온통 아이에게 쏠려 있었고, 도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지아가 아이를 바라보는 동안 도윤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비록 서로를
지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유일하게 걱정되는 건 해경이었다.전효가 그곳에 있긴 했지만, 그렇게 서둘러 탈출했고 당시 비도 많이 왔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하지만 마음속으로 걱정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일이 꼬여 버렸으니 A시로 돌아간 후에도 한동안 전효와 연락이 닿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잘 알았다.“알았어요, 그럼 당분간 여기 있을게요.”아이는 이미 자신의 곁에 있고, 전효는 분명 연락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지금은 우선 몸을 돌봐야 할 때였다.고생을 많이 했던 소망이는 조금도 편식하지 않았고, 그 나이대 또래보다 조금의 심술이나 투정도 없었다.지아는 매일 아이와 함께 있어 행복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원래 얌전한 아이는 속사정이 있기 마련이었다. 고생을 하지 않고서 아이가 이렇게 철이 들 수 있을까?원래 산전수전 다 겪은 아이만이 이토록 얌전하고 어른스러웠다.지아는 전효를 원망하진 않았다. 전효 덕분에 아이를 구할 수 있었고, 덩치 큰 남자가 아이 둘을 키운 것만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지아는 그에게 매우 고마워했다.지아는 단지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진 아이에게 일어난 일에 가슴이 아팠을 뿐이다.앞으로는 매일 아이를 더 열심히 돌보려고 노력할 생각이었다.“엄마.”멍하니 있는 지아의 눈앞에서 아이가 손을 흔들었다.그제야 추억을 회상하다 정신을 차린 지아가 말했다.“응, 엄마 여기 있어.”지아는 손을 뻗어 소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끌어당겨 애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배고파?”소망이는 괜히 지아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배고픈지 아닌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지아의 표정을 먼저 살폈다.“소망아, 먹고 싶으면 걱정하지 말고 먹어. 배고프거나, 목마르거나, 춥거나, 덥거나 엄마한테 말만 하면 돼. 이제부터 넌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엄마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소망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큰 눈을 깜빡였다.“엄마 말은 언제든 울고 떼를 써도
아직 해가 지기 전인데도 짙고 무거운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곧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공기는 눅눅하고 묵직했다. 지아는 교외의 폐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다섯 걸음 간격으로 배치된 보초들을 보았다. ‘소시월이 이런 경비를 받다니 어떻게 보면 영광스러운 일이네.’보초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씨 가문과 부씨 가문에서도 파견되었다. 세 가문의 힘이 모여 별장을 완벽히 포위한 덕분에 파리 한 마리조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상황이었다. 차가 멈추자 진봉이 문을 열었고, 도윤은 무무를 안고 차에서 내렸다. 무무는 독립심이 강한 아이였지만, 도윤은 여전히 아이를 안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듯했다. “이 대표님, 사모님, 아가씨.”진봉은 차에서 내리는 세 사람을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는데, 지아와 도윤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겪은 수많은 고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제야 평온을 되찾은 모습이야. 드디어 내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아.’“소시월은 좀 어때?” “예린 아가씨께서 안에 계십니다. 저희를 들어가진 못하게 하셨지만...”진봉은 잠시 말을 멈추고 머뭇거리며 덧붙였다.“아마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밖에서도 비명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이고, 예린 아가씨께서도 워낙 가차 없는 분이셔서...”그 말에 지아는 깊이 공감했다.예린이 과거 자신에게 가했던 방식으로 시월을 다루고 있다면, 과연 시월이 그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도 알고 싶군.’지아가 무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아가, 엄마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아빠랑 밖에서 기다려 줄래?” 무무는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아이였지만, 지아에게 있어 무무는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어두운 세상을 보게 할 순 없어.’ 무무는 고개를 저으며 도윤의 품에서 벗어났고, 손짓으로 지아에게 말했다. “소시월의 몸에는 독벌레가 있어요.” 무무는 이전에도 지아에게 경
지아는 가족과의 상봉만으로도 아주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소임호가 이렇게 큰 선물을 준비할 줄은 몰랐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으면서 어렵게 찾은 가족이야. 나는 가족과의 정이 중요하지 재산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지아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오빠들이 다가와 위로했다.“부담 갖지 마. 이건 아버지와 우리 모두의 마음이야.” 시후는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 네가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했고, 네가 자라는 모습도 지켜보지 못했어.” 시하는 지아를 꼭 안으며 말했다.“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너한테는 이제 가족이 있잖아.” 지아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결국 ‘가족’이라는 한 마디였기에, 되려 오빠들을 끌어안으며 그동안 참아 왔던 눈물을 흘렸다. 지아는 자신이 이제 강해졌다고 믿었는데, 요즘 들어 자꾸만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세상일이 아무리 엉망이라지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 부장경은 지아가 가족의 품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멀찍이 서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A시에서 지내던 동안 지아는 부씨 가문과 재회했지만, 부장경은 지아에게 여전히 무언가 아쉬움이 남아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오늘, 소씨 가문과의 재회를 통해 그 아쉬움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한편, 소임호가 소씨 가문과 완전히 결별하겠다고 선언한 일은 모두에게 예상 밖의 일이었다.비록 이 모든 상황은 소임호가 오랜 시간 준비한 것이었지만, 그조차도 아내가 그 과정에서 희생될 줄은 몰랐다. 소임호는 여러 경로를 통해 조경숙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심세호는 철저히 가짜 신분을 사용했기에 단서를 찾기 어려웠다. 이제 남은 유일한 희망은 소시월이었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시월은 폐별장에 감금되어 있었고, 소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소상현이 저지른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빴다. 그 사이 지아는 먼저 시월이 감금된 폐별장으로 향했다. 차
본래 악랄한 자는 더 악랄한 자가 상대해야 하는 법이었다. 시월은 자신을 예린에게 넘긴다는 말을 듣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저 여자는 완전 미친 사람이야!’ ‘소씨 가문 사람들은 아무리 나를 증오한다고 해도 인간적인 동정심을 느낄 거야. 하지만 이예린이면 말이 달라질 거라고!’ 예린은 독충에서 연구를 할 때부터 가장 잔혹하고 무자비한 인물로 악명이 높았다. 게다가 시월은 시후를 해친 데다가 예린을 속인 적도 있으니, 예린이 시월을 가만두지 않을 것은 뻔했다. 예린은 심문 전문가보다도 더 가혹할 것이었고, 예린에게 붙잡힌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정도의 고통을 겪을 게 분명했다. “안 돼요! 아빠, 오빠들, 우린 그래도 한 가족이었잖아요. 제발 이예린한테 저를 넘기지 말아주세요. 저 여자는 악마예요! 정말이라고요!” 소씨 가문 사람들은 잠시 망설였지만, 시월이 이토록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고 곧 결정을 내렸다. 예린은 마치 유령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한 걸음씩 시월에게 다가갔다. 시월은 황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긴 팔과 다리를 가진 채 온몸에서 서릿발 같은 살기를 뿜어내는 부장경에게 그대로 붙잡히고 말았다. 부장경은 키도 크고 체격도 우람하여,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아우라로 시월을 집어삼키려 했다. 부장경은 곧이어 시월을 가볍게 들어 올리더니 힘껏 탁자 위로 내던졌고, 시월은 탁자 위에 쌓여 있던 서류들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남자와 여자의 힘의 격차는 너무도 크기에, 시월은 자기 등이 아프다는 것만 느낄 뿐, 말 한 마디 할 힘조차 없었다. 부장경이 차가운 눈빛으로 시월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그, 그게...”시월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더듬거렸는데, 바로 그때 시월의 팔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시월은 고개를 돌렸고, 예린이 어느새 주사기로 자기 팔에 약물을 주입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하지만 이미 주사기 안의 모든 액체가 시월은 몸에 주입된 뒤였다. “이예린, 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소씨 가문 사람들은 마치 굶주린 이리 떼처럼 시월을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가 시월을 증오했지만, 당장 죽일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임호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살의를 억눌렀다. “시월아, 내가 원하는 건 네가 독충의 모든 은신처와 거점, 그리고 그동안 조경선이 해 온 짓거리를 낱낱이 밝히고, 조경선을 여기로 끌어내는 거야.” 이것이 바로 시월이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시월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저한테서 온갖 방법으로 모든 걸 빼앗아 갔으니 이제 전 빈껍데기나 다름없어요. 이제 와서 제가 말하는 말든 무슨 차이가 있죠? 결국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일 뿐이잖아요.” 시월은 주위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 본 듯 덧붙였다.“제 손에 독충과 관련된 모든 자료와 데이터가 있어요. 만약 저를 살려준다면 여러분한테 협조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요.” 총명한 사람은 어떤 궁지에서도 탈출구를 찾기 마련이다.시월 역시 그런 사람이었는데, 절벽 끝에 뿌리내린 한 줌의 씨앗처럼, 시월에게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위로 뻗어 나가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시월의 문제는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 있었고, 인간으로서의 도덕과 양심을 버렸다는 점에 있었다. 시월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괴물이 되어 있었다. 시하는 분노에 차서 시월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꿈 깨! 네가 그동안 저지른 악행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갈 구멍을 찾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집어 치워. 네가 스스로 모든 걸 털어놓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입을 벌리게 하고 말 거야.” 시월은 뺨을 맞아 입가에서 피가 흘렀지만, 예전처럼 울며 오빠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려 하지는 않았다. 예전의 시월이라면 사람들의 연민을 사기 위해 연약한 척하고 애교를 부렸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수법이 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것이었
시월은 목소리를 높였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외쳤다.“나는 너처럼 태어나면서부터 귀한 가문의 아가씨로 살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었어! 나 같은 사람이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발버둥 치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고. 내가 태어난 그 가난한 산골 마을을 네가 알기나 해?”“그곳 여자들은 소랑 말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가. 대부분의 아이는 십 대가 되기도 전에 부모에게 팔려 나가 늙은 노총각에게 시집가고, 아이를 낳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지. 조경선이 아니었다면 나도 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을 거야. 그 여자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으면, 난 이미 죽었을 거라고!”“하지만 당신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걸 가졌잖아. 손만 뻗으면 뭐든 가질 수 있었잖아! 그런데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했지?!” 지아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치를 떨며 외쳤다.“아직도 책임을 회피하고 동정을 사려는 거야?! 어린 나이에 그런 악랄한 수를 썼다는 건, 네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증거야! 태어난 환경이 잔혹함을 정당화하는 핑계가 될 순 없다고!” “너, 정말 네가 저지른 모든 죄를 몇 마디 말로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아는 지난 2년 동안 자신이 왜 어린 나이에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는지 철저히 조사했다. 짧은 시간에 암이 그 정도로 형성되려면 몹시 어려운 조건이 필요했는데, 지아는 어릴 적부터 소계훈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귀한 딸이었다.설령 소계훈 가문이 몰락하고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아주 힘들었다고 해도, 그렇게 단기간에 병이 악화될 리 없었다. 결국 단 하나의 결론이 남았다.‘누군가 오래전부터 나한테 암을 유발하는 약물을 썼던 거야.” 결혼 문제로 인한 혼란은 단지 발단에 불과했다. 그때만 해도 이서가 조금만 더 일찍 검진받았다면 병을 더 일찍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마침 그 시기에 소계훈 가문이 몰락했고, 그의 치료비만으로도 생활이 빠듯했던 지아는 자신의 건강을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쓰러져 검사받고 나서야 병이 이미
시월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자신이 아주 완벽하게 숨겨왔다고 생각했지만, 지아는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심지어 시월의 얼굴뿐만 아니라 과거까지 말이다. 지아는 시월에게 한 무더기의 성형 기록을 내던지며 차갑게 말했다. “정말 끈질긴 노력을 했더라? 하지만 어릴 적부터 그렇게 많은 성형을 해서 나랑 비슷한 얼굴을 만들면 뭐 해? 가짜는 어디까지나 가짜이고, 아무리 얼굴을 바꾼다 해도 진짜가 될 수는 없는 법인데. 마치 네 신분처럼 말이야!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진짜가 될 수 없다는 걸 이젠 알겠니?” “언제부터 알았던 거지?”“그게 그렇게 중요해? 소씨 가문이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소영수 어르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만 돌지 않았으면, 나도 끝까지 속았을 거야. 평생 네 거짓말에 속아 살았을 거라고.” “소시월, 우리 소씨 가문에 그렇게 많은 악행을 저질러 놓고 후회한 적은 없니?” 지아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넌 몇 번이고 나를 죽이려 했고,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죽였고, 심지어 내 배 속의 아이까지 해치려 했어.” 시언도 입을 열었다.“내 손, 시하의 다리, 그리고 시영이의 목숨까지... 그 모든 걸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지?!” 시하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네가 우리 친동생이 아니라는 건 잘 알겠어. 하지만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우리 남매들은 너를 친딸, 친동생처럼 대했어.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줬고, 넌 우리 소씨 가문에서 호강하며 자랐다고. 그런데 어떻게 이런 악랄한 짓을 할 수 있어? 시영이 죽음도 네가 벌인 짓이지?” 시월은 담배를 비벼 끄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무슨 소용이죠?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죄인이 되는 법인 걸요. 난 이미 패배자가 됐다고요.” “아니, 시영이 일만큼은 명확하게 말해! 시영이는 당시 이상한 죽음을 맞이했어. 그 사건, 네가 벌인 짓 아니야?” “그래요, 내가 벌인 짓이에요. 하지만
“형님,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형님은 우리 형님입니다. 그건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에요.”“형수님께 무슨 일이 생겼다고 들었어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만 해주세요.” 소재호와 소윤성이 격앙된 채 말했으나, 소임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자, 이만 돌아가거라. 나는 아직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 소재호와 소윤성은 부장경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고, 그저 소상현 가족만이 큰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도 이만 가 봐.”소상현은 마음이 착잡했다.마치 자신이 패배한 것 같았고, 소임호의 회사를 손에 넣지는 못했으나 결국 소씨 가문 전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상현이 이겼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기에, 마음 한구석에는 기쁨이 아닌 허탈함만이 가득했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어...’‘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고.’소상현이 원했던 건 소임호를 소씨 가문에서 몰아내고, 소임호가 절망한 채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굴욕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소임호는 소씨 가문을 흔쾌히 넘기고 떠나려 하고 있었다. “당신, 그런다고 내가 고마워할 것 같아? 나는...” 소상현은 본심을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또다시 가시 돋친 말이었다. “아버지, 그러지 마세요.”소지훈이 소상현의 팔을 살짝 당기며 만류했다. 소임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훈아, 앞으로 소씨 가문에선 네가 아버지를 잘 보살펴드려야 해. 소씨 가문은 네 할아버지께서 평생을 들여 이루어진 가문이야. 절대 그분을 실망하게 하지 않아야 해.” “큰아버지...”소지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지금껏 자신이 연예계에서 위기를 넘길 때마다 도와준 사람이 소임호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 깊은 곳에서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왔다. “정말 죄송합니다.”소임호는 한숨을 쉬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모두 나가봐.” 소지훈은 망설임
“정확히 말하면 소씨 가문의 숨겨진 사업 중 하나였지.” 소임호는 이 한마디로 소지훈이 모든 상황을 깨닫게 했다. 소지훈은 그동안 자신이 실력으로 연예계에서 승승장구했다고 믿어 왔으나, 훌륭한 매니저를 만난 것도, 첫 출연작이 최고 등급의 작품이었던 것도 모두 우연이 아니었다.세상에 그렇게 많은 우연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것은 소임호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 당신이...”소지훈은 충격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그토록 오랜 시간 자신을 지켜 주고 보호해 준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을 무시해 왔던 큰아버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소지훈이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허, 당신이 만성의 대표였다니, 이제서야 알게 된 나도... 정말 바보 같군요.” “지훈아, 너도 연예계에서 몇 년간 몸담았으니 그 업계의 룰을 잘 알고 있을 거야. 만성은 너한테 맡기게 된 건 내가 너를 믿기 때문이야. 이건 네 할아버지와 상의한 끝에 정한 일이기도 해.” 소지훈은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손가락으로 옷깃을 세게 쥐고 있었고, 머릿속은 복잡한 감정으로 어지러웠다. 소지훈도 소상현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세워온 가치관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안 돼, 이런 식이면 안 된다고...’소지훈이 생각하던 큰아버지는 권위적이고 독단적이며,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이렇게 조용히 자신을 보호해 왔다는 건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소지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소상현을 바라보았다.“도훈이는 오래전부터 제 곁에서 일을 배워 온 사람이에요. 제가 하나하나 가르쳐 키운 인재나 다름없죠. 앞으로 소씨 가문의 사업 관련 문제는 도훈이에게 넘기겠습니다. 도장, 주요 문서가 들어있는 서랍 열쇠, 금고 비밀번호 등 모든 것을 도훈이에게 위임할 테니 믿고 맡기셔도 됩니다.” “너...!”소상현은 입을 열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답답하게 한숨만 내쉬었다. 소임호는
소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이게 말이 돼? 아버지께서 형님을 얼마나 아끼셨는데,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으셨다고?’ 소상현이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버지가 당신한테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을 리 없어! 그리고 당신이 어떻게 그런 유언장에 동의할 수 있지? 그 유언장은 분명 가짜일 거라고!” 소임호는 담담하게 설명했다.“물론 아버지는 내게 유산을 나눠 주고 싶어 하셨지만, 내가 거절했어. 나도 그동안 나름대로 많은 재산을 모았고, 소씨 가문의 것은 탐낸 적이 없으니까. 그래, 난 소씨 가문의 것을 탐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소임호는 미리 준비해 둔 수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2조야. 아버지께서 보유하셨던 20% 지분에 대한 금액인데, 현재 시가로 따지면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 아버지께서 투자하신 400억에 비하면 수십 배로 늘어난 금액이야. 그동안 소씨 가문이 우리 가족에게 베풀어준 보살핌에 대한 감사의 뜻이란다.” 가볍게 내민 수표 한 장은 보이지 않는 강렬한 손바닥으로 소상현의 얼굴을 내리친 것과 같았다.소재호와 소윤성은 즉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형님, 저희도 형님이 오랜 세월 동안 소씨 가문을 지탱해 오셨다는 걸 압니다. 이 돈을 절대 받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고 해도 절대 받지 않으셨을 거고요.” “맞습니다. 형님은 어머니의 아들이니 당연히 유산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형님은 아버지께서 가장 아끼신 자식이었잖아요. 그런데 유산을 거부한 걸로도 모자라 저희에게 주시다니요!” 소영수가 살아 있을 때도 그들이 이 돈을 받을 리는 없었지만, 지금 이 돈을 받는 것은 소임호와 소씨 가문의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는 뜻이었다. 소임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언제나 너희를 친동생으로 생각해 왔어. 딴마음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더구나.”“상현이가 나와 우리 가족을 내쫓기 위해 이런 극단적인 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