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유일하게 걱정되는 건 해경이었다.전효가 그곳에 있긴 했지만, 그렇게 서둘러 탈출했고 당시 비도 많이 왔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하지만 마음속으로 걱정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미 일이 꼬여 버렸으니 A시로 돌아간 후에도 한동안 전효와 연락이 닿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잘 알았다.“알았어요, 그럼 당분간 여기 있을게요.”아이는 이미 자신의 곁에 있고, 전효는 분명 연락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지금은 우선 몸을 돌봐야 할 때였다.고생을 많이 했던 소망이는 조금도 편식하지 않았고, 그 나이대 또래보다 조금의 심술이나 투정도 없었다.지아는 매일 아이와 함께 있어 행복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원래 얌전한 아이는 속사정이 있기 마련이었다. 고생을 하지 않고서 아이가 이렇게 철이 들 수 있을까?원래 산전수전 다 겪은 아이만이 이토록 얌전하고 어른스러웠다.지아는 전효를 원망하진 않았다. 전효 덕분에 아이를 구할 수 있었고, 덩치 큰 남자가 아이 둘을 키운 것만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지아는 그에게 매우 고마워했다.지아는 단지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진 아이에게 일어난 일에 가슴이 아팠을 뿐이다.앞으로는 매일 아이를 더 열심히 돌보려고 노력할 생각이었다.“엄마.”멍하니 있는 지아의 눈앞에서 아이가 손을 흔들었다.그제야 추억을 회상하다 정신을 차린 지아가 말했다.“응, 엄마 여기 있어.”지아는 손을 뻗어 소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끌어당겨 애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배고파?”소망이는 괜히 지아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배고픈지 아닌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지아의 표정을 먼저 살폈다.“소망아, 먹고 싶으면 걱정하지 말고 먹어. 배고프거나, 목마르거나, 춥거나, 덥거나 엄마한테 말만 하면 돼. 이제부터 넌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엄마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소망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큰 눈을 깜빡였다.“엄마 말은 언제든 울고 떼를 써도
지아는 어렴풋이 떠올렸다. 어렸을 적 일찍 엄마가 곁을 떠나고 그녀는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늘 다정했던 아빠는 일상생활에서나 심적으로 자신에게 후한 사랑을 베풀어 밝고 착하게 키웠다.하지만 아빠가 해줄 수 없는 일도 많았다. 학교에서 학부모 운동회가 있을 때마다 엄마와 아빠가 함께 해야 하는 행사가 가득했다.어려서부터 지아는 다른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다니고, 엄마가 해준 요리를 먹고, 엄마가 골라준 옷을 입는 것을 보며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엄마가 있는 아이를 남몰래 부러워했다.그래서 미래에 자녀가 생기면 자신은 한부모가정이 되지 않도록 책임감을 갖고 잘 키워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지아는 도윤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고, 두 사람도 처음엔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봤다.남편이 믿을 만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어린 나이에 결혼했지만, 결국 지아는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아이에게 완전한 가족을 선물하지 못했다.“엄마!”소망은 지아를 보고 신이 나서 손을 흔들었다.“소망아, 아침 먹어.”도윤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자 햇빛아래 지아는 긴 생머리는 아니지만 매번 그를 문밖까지 데려다주던 그 모습과 똑같이 온화한 표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도윤은 오랫동안 그 미소를 그리워했다.“엄마가 몸이 안 좋아서 어려운 건 못하고 간단하게 만들었어, 나중에 몸 다 나으면 맛있는 밥 해줄게.”소망은 미소를 지으며 지아를 바라봤다.“고마워요 엄마.”편식하지 않았던 아이는 엄마가 만든 음식이라면 더더욱 무엇이든 행복했다.지아는 특별히 도윤에게 따로 음식을 내밀었다.“이건 그쪽 거예요. 애 돌보느라 힘들잖아요.”자신의 것까지 준비해 줄 줄 몰랐던 도윤은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머리를 긁적였다.“안 힘들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고마워요, 지아 씨.”지아의 손맛이 담긴 음식을 오랜만에 먹는 도윤은 한 입 한 입 조심스럽게 음미하며 맛있게 먹었다.도윤은 두 사람이 막 결혼했을 때, 매일 일찍 일어나 그날 입을 옷을 준비해 주고 부엌에서
한 달 가까이 섬에서의 나날은 소박하고 아름다웠다.지아의 몸은 눈에 띄게 점점 좋아지고 있었고, 몸속 종양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시한폭탄 같았지만, 적어도 숨이 간당간당한 것보다는 많이 나았다.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도윤과의 관계도 더욱 가까워졌다.몸이 따라주지 못해 대부분 소망과 도윤이 함께 지내면서 세 사람이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지금 소망이는 워터파크에 가고 싶어 했다.지아도 아이를 당해내지 못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지아가 물에 들어가지 않고 옆에만 앉아 있자 소망이는 도윤에게 말했다.“삼촌, 나랑 놀아요.”요즘 도윤이는 줄곧 물놀이를 거부했다. 그는 지금 일시적으로 피부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도 피부색을 바꿀 수 있는 특수 식물즙을 바르고 있었다.하지만 단점은 물에 닿으면 안 되고, 일단 젖으면 색이 바래진다는 것이다.도윤이 지금까지 감출 수 있었던 건 피부색이 변한 것도 있었지만, 지아가 죽었다는 가짜 소식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많이 야위었기 때문이었다.지아는 몇 년 동안 도윤과 함께 살면서 예전 모습이 뇌리에 박혀 있었기에 감추기 위해선 습관, 체형, 피부색, 억양, 외모를 바꾸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몸에 난 상처도 지아가 다 알고 있는데 물속에 들어가 몸을 드러내면 지아가 눈치챌 것 같았다.도윤은 멀리 서서 아이와 지아가 노는 걸 지켜만 봤다.지아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던 소망이는 충분히 놀지 못했고, 지아 역시 도윤을 돌아보았다.“애랑 잠깐 놀아줄래요?”도윤은 시계를 보는 척했다.“오늘 아침에 과일 주문했는데 왔을 거예요. 확인하러 가볼게요.”지아는 남자가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 조금 놀랐다.생각해 보면 남자는 자신을 구한 그날 밤을 제외하고는 물 근처에는 한 번도 가지 않고 줄곧 물을 멀리하고 있었다. ‘물을 무서워하나?’누구나 자신만의 약점이 있었기에 지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지아는 물가에서 아이와 물총놀이를 계속했고, 소망은 조금 아쉬워했지만 금세
지아는 개인 수영장인 데다 강사나 안전요원도 없어 무슨 일이 생기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해서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다.그때 도윤이 불쑥 나타나 한 손으로 아이를 들어 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 지아의 허리를 감쌌다.아이를 물가에 내려놓고 지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아 씨, 괜찮아요?”“다리, 다리에 쥐가 났어. 잠시만요.”“알았어요, 날 안아요.”지아는 그 순간 이성이라는 것도 잊고 도윤의 목을 두 손으로 꼭 감싸며 다리의 불편함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도윤은 서두르지 않고 아이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지아를 기다렸다.10초 정도 지나자 종아리에 있던 경련이 서서히 사라졌다.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지아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자의 몸에 몸을 밀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리가 심하게 욱신거려 저도 모르게 남자에게 기댄 것이었다.설상가상으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도윤의 가슴에 눌려 있었다.너무 고통스러웠던 탓에 그녀가 힘을 주어 바싹 붙어있자 아름다운 곡선이 드러났다.남자는 그녀가 미끄러질까 봐 한 손으로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허리를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도윤의 뜨거운 체온이 지아에게 계속해서 전달되었다.두 사람은 누가 봐도 야릇할 정도로 은밀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지아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손을 놓았다.하지만 물속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이윽고 그녀의 몸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도윤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다행히도 물은 2미터 남짓으로 깊지 않았고, 도윤은 재빨리 팔로 지아의 허리를 감싸서 위로 끌어올렸다.지아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몸부림치는 대신 순순히 남자의 몸에 달라붙어 일단 위험에서 벗어나길 기다렸다.도윤은 얇은 긴팔 셔츠만 입고 있었는데 지아가 손을 뻗을 때 얼떨결에 남자의 탄탄한 허리와 복부에 닿았었다.지난번 바다에서 도윤에게 구조됐을 때도 몸이 괜찮다고 느꼈지만, 이번엔 더 가까이 닿아보니 괜찮은 정도가 아
다 씻은 지아의 기분도 서서히 진정되었다.한편으로는 도윤과 오래전에 이혼했고, 지금 재혼을 한다고 해도 도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와 조금 닿은 게 뭐가 문제야, 평생 과부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지아가 소망이를 데리고 함께 나가는데 소망이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있는 연보라색 액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엄마, 이거 봐요.”지아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야?’오디즙 같아 보이는데 그들은 오늘 오디를 먹지도 않았다.청소부가 아침 일찍 청소를 끝냈을 텐데 왜 문에 이런 흔적이 남아있지?문을 열어보니 문 앞 바닥에 물걸레질을 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직원은 바닥이 미끄럽다며 조심해서 걸어가라고 당부했다.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평소에는 아침저녁으로 청소했는데 오늘은 왜 한낮에 청소하세요?”“좀 전에 직원이 음식을 나르다가 실수로 넘어졌어요. 여기저기 다 묻어서 저희가 다시 청소했어요.”“네, 알겠어요.”지아는 다른 사람이 실수로 주스 몇 방울 흘린 거라고 생각했다.도윤은 오후 내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지아도 그를 찾지 않았다.아이와 함께 해변의 일몰을 바라보는데 누가 봐도 아이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왜 기분이 안 좋아?”소망은 하늘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오빠 보고 싶어요.”둘은 태어날 때부터 함께 자랐고, 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빠는 항상 자신을 잘 돌봐줬었다.전효와 함께 도망 다니다 보면 가끔 먹을 것이 떨어지기도 했는데, 전효가 물고기나 산토끼를 잡으면 오빠는 자신에게 가장 부드러운 부위만 주곤 했다.대도시에 도착해서 어떤 맛있는 음식을 사더라도 늘 자신에게 먼저 주곤 했다.아빠는 오빠는 태양이고 자신은 달이라며, 달은 태양의 빛을 빌리는 존재이니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라고 했다.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면서도 소망은 하루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빠의 존재를 잊은 적이 없었다.지아는 아기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그녀도 아들이 그리웠다.섬에서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지아가 시간을 계산해 보니 강욱과 함께 시간을 보낸 지도 거의 반년이 되었다. 처음엔 조심스러워하던 두 사람도 강욱이 아빠가 되어 불평 없이 아이를 돌보는 모습을 보며 지아는 경계심을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그게...”지아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랐다.“괜찮아요. 저 입 무거워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지아는 아이를 흘끗 쳐다보았다.“이따 얘기해요.”“그래요.”도윤도 서두르지 않았다. 지아가 자신에게 털어놓기까지 반년 넘게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리는 것쯤이야.아이가 낮잠을 잘 때까지 도윤은 바깥 정원에 앉아서 기다렸다.지아가 나오자 도윤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아가씨.”“아니에요. 앉아서 얘기해요.”“네.”도윤은 친절하게도 주스를 준비해 주었고, 두 사람은 바닷바람이 살랑이는 파라솔 아래 앉아 있었다.지아는 갓 짜낸 레몬 감귤 주스를 한 모금 마셨는데, 약간의 산미가 느껴지는 아주 상큼한 맛이었다.“제 이야기 들어보실래요?”“저를 믿고 얘기해주시는 건 영광입니다.”지아는 주스를 내려놓고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모든 이야기는 저기 바닷가에서 시작됐죠...”도윤은 처음으로 지아의 입장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듣게 되었고, 지아가 자신이 그녀를 구해준 순간부터 남몰래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오히려 도윤이 자신에게 한 나쁜 짓은 일일이 얘기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얘기를 듣고 난 도윤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분명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인데 지아의 입으로 들으니 다시 한번 그녀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아 자신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전 그 사람과 이혼했지만, 전남편은 무척 고집스러운 사람이라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가려고 할 거예요. 제 존재를 들키면 아이와 함께 감금될지도 몰라요.”지아는 날카로운 단어를 썼다. 감금이라니...도윤은 고심해서 말을 꺼냈다.“얘기를 들어보면 전남편이 아가씨를 많이 사랑했을 것 같은데, 어쩌면 당신을 보호하고 싶
지아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도윤을 말문이 막히게 했다.그렇다. 자신이 그녀에게 그토록 많은 상처를 주었는데, 어떻게 감히 마음을 돌려 재결합 하기를 바랄 수 있겠나.전부 헛된 꿈이었다.도윤이 침묵하자 지아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미안해요. 내가 좀 이성을 잃었죠.”“아니요. 전남편 같은 사람은 백번 죽어도 아가씨의 상처를 보상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그냥 이번 생에서 다시 만나지 않고 이대로 늙어 죽었으면 좋겠어요.”도윤은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알겠어요. 이제 그 사람 몰래 A시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네. 그래서 전에 아저씨를 따라 몰래 돌아가려 했는데 해적을 만나 어쩔 수 없게 됐어요. 이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죠.”“걱정 말고 이 문제는 저한테 맡겨요.”단지 그에게 해결책을 생각해 달라고 부탁하려던 지아가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정말 그럴 수 있어요?”“오랜 세월 여러 나라 사람들과 섞여 살다 보니 차마 말 못 할 부분까지 알게 되더라고요.”도윤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아가씨, 저를 믿어도 돼요.”마주 보는 두 눈에서 지아는 도윤의 진지함을 느꼈다.렌즈를 껴서 원래의 동공 색을 덮은 탓에 지아의 눈에 그는 노란 눈동자였다.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지아의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도윤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들어 올리는데, 경박함 대신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이었다.꼭 중세기 기사 같았다.“절대 배신하지 않을게요.”그것은 마치 주종 관계 이상의 다짐 같았다.당황한 지아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사람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무슨 뜻일까?’지아가 추측하기도 전에 도윤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준비할 테니 아마 며칠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요.”지아는 그의 손길이 닿은 곳과 뺨이 어렴풋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고백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예전이었다면 지아도 자신감을 가졌을
그런 방법이어야만 강욱의 이미지에 더 부합하고 지아의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 같았다.“그 배는 안전한가요?”“친구랑 미리 얘기했습니다. 우린 방에만 있고 그 사람들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돼요. 배에서 그 어떤 행위에도 참여하지 않고 그저 배만 타는 겁니다.”지아는 무의식적으로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 배를 타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돌아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좋아요.”“걱정하지 마요, 아가씨. 내가 지켜줄 테니까.”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향한 신뢰가 차츰 깊어졌다.섬에서 마지막 3일을 보내고 도윤은 지아를 위해 가발과 가면을 준비했다.“아가씨, 배에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의심을 살까 봐 걱정이니까 부부인 척하는 게 좋겠어요. 소망 아가씨는 어쩔 수 없죠.”도윤이는 잠시 머뭇거렸다.“저런 배에 일반 가정의 아이들은 없을 텐데... 화물이면 모를까.”햇볕이 들지 않는 그늘지고 구석진 곳은 더럽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며 지아가 이마를 찡그렸다.“알아서 준비해요.”출발 당일, 두 사람은 요트를 타고 거대한 호화 유람선으로 향했다.소망이는 캐리어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지아는 긴 머리 가발을 쓴 채 도윤과 함께 멋지게 차려입고 가면을 썼다.도중에 몇 명의 승객과 마주쳤는데, 가면 속 감춰진 두 눈으로 지아의 몸을 물건 살피듯 훑어보았다.가면으로 얼굴만 가릴 수 있을 뿐 인간성까지 감춰지지 않았다.지아는 당연히 그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노려보려는 순간, 갑자기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며 그대로 도윤의 단단한 품에 안겼다.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지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실례할게요.”지아는 그가 자신을 위해 이러는 걸 알았다. 상대에게 임자가 있다는 걸 알리는 행동이었다.단순하고 거친 방법에 상대는 흥미를 잃은 듯 눈을 돌렸다.그 와중에 몇몇 뻔뻔한 사람들이 다가와 음흉한 눈빛으로 지아를 훑어보며 말했다.“어이 형님, 오늘 여럿이
이예린은 비록 나이가 많지 않았지만, 노련한 태도로 전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새로운 곳에 와서 그런지 잠이 안 오네요. 좀 걸으려고요.” “네 오빠도 여기 있잖니. 그 아이가 네가 나가는 걸 보면 분명히...” 이예린은 곧장 심예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오빠가 제 손발이 이미 회복된 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오빠가 정말 저를 죽이고 싶었다면, 이미 3년 전에 끝냈을 거예요. 하지만 오빠는 누군가처럼 사랑에 눈이 멀어버리는, 마음 여린 사람이라고요.” 당시 도윤은 예린을 죽이지 않고, 단지 손과 발의 힘줄을 끊어버렸다. 그것만으로 지아를 위해 복수를 한 셈이었다.더구나 지아는 죽지 않았기에, 도윤은 더 이상 예린을 해치지 않았다.“너는 전혀 우리를 닮지 않은 모양이구나.”예린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러게요.”사실, 사랑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은 그들 가문에 흐르는 피와 같았다.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도윤도 그러했으며, 예린도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시후가 예린을 구해준 순간부터, 예린은 자신의 목숨이 영원히 시후의 것임을 알았다. “그래, 주변에서만 걸어 다니렴. 괜한 문제는 일으키지 말고.” “알겠어요.”예린은 몇 발짝 걸어가다가 멈추더니, 뒤돌아 심예지를 바라보았다.“엄마.”심예지는 온몸이 굳어버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예린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니?” 심예지는 지난 몇 년 동안 예린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었지만, 예린은 늘 과묵했으며,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예린은 태도마저 차갑고 무관심했기에, 심예지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저 여생 동안 속죄할 기회가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심예지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았는데, 예린의 입에서 나온 ‘엄마’라는 단어는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니는 듯했다.심예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이 차올랐고, 다시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뭐... 뭐라고?”“엄마.”이번에는 예린
전화를 받은 이예린은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말했다.[말씀만 해주세요.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겠어요.]이 대답은 시후가 예상한 대로였다. 과거에도, 그리고 얼마 전에 재회했을 때도, 예린은 시후를 볼 때마다 두려워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평소의 당당한 이예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시후는 연애 경험은 없었지만, 비즈니스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다양한 유형의 여성을 접해왔다. 그래서 예린이 단순히 자신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것 외에도, 깊은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예린이 이씨 가문의 아가씨라 할지라도, 시후 앞에서는 늘 자신감 없는 태도를 보였으니 말이다. 예린은 시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며, 늘 자격지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시후는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제가 선생님의 아버지를 구출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할 수 있겠어?”시후는 예린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예린은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어려울 순 있겠지만, 반드시 해낼게요.]예린은 나이가 어리지만 결단력이 있었다. 예린의 대답에 시후는 한결 안도했다.“뭐든 얘기해줘. 최선을 다해서 널 도울게.”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저 혼자로도 충분하니까요. 사람이 많아지면 오히려 적에게 이상한 낌새만 줄 뿐이에요.]시후는 곧 이예린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보게 되었다. 예린은 명석한 두뇌와 치밀한 계획, 냉혹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만약 예린이 적이었다면, 정말로 두려운 상대가 되었을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양지운이 시후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됐습니까?” “우리 사람들을 철수시켜.” “그 여자의 말을 믿으시는 거예요? 오랜 세월 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인데요.” 시후는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때로는 은혜 하나만으로도 평생 기억되는 법이지
이 말을 할 때 조경선의 얼굴은 거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고, 입가에는 미친 듯한 웃음이 번졌다.“꼭 살아남아서, 그 모든 걸 똑똑히 지켜보도록 해.” 조경선은 다시 소임호에게 영양제를 주사했다. 소임호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는데, 조경선과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남은 힘을 모두 소진한 것 같았다. 소임호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병약한 모습을 보자, 조경선은 결국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조경선은 수년간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계획해 왔다.조경선이 상상했던 장면은 소임호가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애원하며 사과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소임호를 붙잡고 나서도, 소씨 가문이 이렇게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임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살 시도까지 했으니, 조경선의 분노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날린 주먹이 솜사탕에 파묻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조경선의 가슴속은 분노와 억울함으로 가득 찼다. 그토록 오랜 시간 공들여 계획했지만, 조경선은 결국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조경선은 뼛속 깊이 소임호를 증오하면서도, 소임호가 그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소임호는 조경선이 평생 이루지 못한 소원이자,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소임호를 미워할수록 사랑도 더 깊어졌기에, 조경선은 소임호를 죽이기보다는 그가 자신에게 굴복하며 돌아오기를 원했다.해가 저물 무렵.조경선은 잠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별장 안팎에 놓인 꽃들과 각종 장식은 사실 특정한 용도로 설계된 것이었다. “침입자 발견! 침입자 발견!”기계음이 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조경선은 두 눈을 번쩍 뜨며 침대 옆 협탁에서 가면을 꺼내 얼굴에 썼고, 입가에 음흉한 웃음을 그렸다. “감히 여길 들어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지?”조경선이 손을 한 번 흔들자, 벽에 설치된 스크린에 실시간 CCTV 화면이 투사되
지아는 멍하니 서 있다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진봉을 바라보며 물었다.“성형?” “예, 성형수술이요.”지아는 그제야 소시월이 왜 자신과 닮았는지, 혹시 소임호와 관련 있는 사람인지 의심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되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손에 든 서류를 훑어보았다.소시월은 13살에 처음 성형수술을 했고, 이후 매년 한 가지씩 성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게다가 20대 중반 이후로는 유지와 보수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그 시절 소시월은 기숙 학교에 다녔기에, 사람들은 반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가 성장하며 부모를 닮아간다고 생각했을 뿐, 의술의 힘으로 얼굴을 바꿨다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아마 그들이 당시에 지아를 해치지 않은 이유도 그녀의 얼굴을 복제하려 했기 때문일 터.그 후, 지아가 쓸모없어지자 암살 계획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지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 가짜 얼굴을 한 꺼풀씩 다 벗겨내 주겠어!”“사모님, 만약 그 여자가 사모님을 계속 암살하려던 배후라면, 그 여자의 등에는 분명히 총상이 있을 겁니다. 그날 저희가 사람들을 데리고 갔을 때, 그 여자는 도망치면서 총을 한 발 맞았었죠.” “당장 알아봐!”지아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는데,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생지옥 같은 나날들이 떠오르는 듯했다.비록 도윤이 한때 지아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결국 그 모든 고통은 누군가가 뒤에서 지아의 삶을 철저히 망가뜨린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소시월은 내 자리를 차지하고, 내가 누려야 할 가족의 사랑과 따듯함을 즐겼어. 그것도 모자라서 나를 지옥 속으로 처참히 몰아넣었다고!’지아의 분노는 억누를 수 없을 정도였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반드시 모든 진실을 밝혀내겠습니다.” “그 여자를 감시할 사람을 찾아. 최근 움직임이 많아졌으니,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예.”지아는 머리를 짚으며
안타깝게도 지아가 이미 진실을 알아낸 상태였기에, 장민호의 소식은 늦은 셈이었다.“지금 어디에 계세요?”지아가 급히 물었다.‘민호 씨가 이 일에 연루되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Z국에 있어요. 최근 소씨 가문에 많은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 소식을 알아내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틈을 타서 지아 씨에게 위협이 되는 소시월을 제거할 테니까요.]지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아는 처음에 장민호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자신의 의도를 눈치챘을까 봐 걱정했지만, 장민호는 아직 그녀가 Z국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죽이면 안 돼요.”[왜요? 그 여자는 지아 씨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그런 위험한 존재를 살려두면 지아 씨에게 더 큰 위협이 될 거예요.]지아는 핑계를 댔다.“저는 이미 몇 번이나 그 사람한테 암살당할 뻔했고, 그 소씨 가문의 여섯째 딸이라는 사람과도 만났어요. 우리는 나이도 비슷하고, 국적도 달라서 아무런 원한도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저를 죽이려고 했겠어요?” “제 생각엔 누군가 소시월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단지 이용당하는 말일 뿐인 거죠. 그 사람을 죽이는 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에요. 그 배후의 사람이 진짜 목표니까요...” 지아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아니라 말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장민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강인했다.[제가 도울게요.]“위험하지 않겠어요? 너무 위험하다면 하지 마세요. 저는 민호 씨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 [지아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겁니다.]장민호는 마지막으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제 속죄라고 생각해 주세요.]전화를 끊은 후에도 지아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사건이 윤곽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지만, 주변 상황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특히 소씨 가문이 혼란스러운 지금은 지아가 신분을 밝히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소임호와 조경숙이 자기 친부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지아
병원에서 사고를 당한 시언을 진정시키기 위해, 지아는 일찍이 자신과 시후의 계획을 모두 털어놓았다. 다만, 다른 사람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시후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고, 시언이 대외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즉, 두 사람이 안팎에서 호응하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 게다가 소임호 또한 차근차근 사건을 조사하며, 여러 정황으로 인해 배후의 흑막이 조경선이라는 의심을 품게 되었고, 조경선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미끼로 삼았다. 하지만 비행기 사고 이후로 소임호와 시후의 연락이 끊겼고, 시언은 며칠 동안 마음을 졸이며 초조해했다. 그런데 조금 전, 다행히도 소임호의 행방을 알아낸 것이었다.시언은 즉시 이 소식을 지아에게 알렸다. 지아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자, 시언의 목소리를 듣고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순간적으로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 지아야?”시언은 지아의 침묵에 걱정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 지아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그냥...]하지만 말을 꺼내자 목소리에 눈물 섞인 떨림이 묻어나왔다.시언이 더욱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이 있다면 숨기지 마. 우리는 이미 네 의형제가 됐어. 우린 가족이라고. 소씨 가문에 이런저런 일이 생겼다고 해도, 난 널 지킬 거야.”시언의 ‘지킨다’라는 말이 지아의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했다.시언은 지아의 정체를 알지 못했음에도 여전히 이렇게 다정하고 따듯하게 대해주었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만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유대일 것이었다. 하지만 지아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왜 소씨 가문 사람들은 내 존재 자체를 몰랐을까?’ 현재 지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경숙은 여섯 번째 아이를 낳은 후 과다출혈로 크게 몸이 상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고 했다.‘가족이 내 존재를 모를 리가 없는데.’ ‘게다가 시영 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남은 건 소시월 뿐이야.’‘소시
소임호는 눈앞의 광기 어린 조경선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조경선, 그동안 정말 행복했니? 그렇게 애써 계획해서 네가 얻은 건 뭐지?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우리는 모두 패배자라고!” “틀렸어.”조경숙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그 당시의 나는 얼굴도 망가지고, 족보에서 제명되고, 가족들에게도 내쳐졌어.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데, 조경숙은 왜 모든 걸 가져야 해? 시골에서 돌아온 한낱 촌뜨기가 어떻게 나를 대신할 수 있었냐고!” “그래, 난 패배자야. 하지만 너희도 내 시체 위에 서서 잘난 척할 수는 없을걸? 우리 두 쪽 다 망가지는 게 내 승리니까!” 조경선이 고개를 숙여 소임호를 살펴보며 말했다.“당신 꼴을 좀 봐. 떠돌이 개랑 다를 게 뭐야? 참 안쓰럽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곧 소씨 가문은 완전히 망가질 거야. 나는 당신을, 그리고 소씨 가문을 반드시 파멸시키고 말 거야!” “너 정말 미쳤구나.”“그래, 난 미쳤어.”“하지만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젠 내가 겪었던 고통을 당신이 똑똑히 느껴야 할 차례야.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경숙은 이제 심세호의 여자가 됐어. 정말 가슴 아프지 않아?” “참, 그건 모르지? 소씨 가문의 노친네는 이미 죽었고, 당신 아들들도 곧 당신과 함께 무덤으로 갈 거야!” “조경선, 너는 진짜 인간 말종이야!” 소임호는 극도로 분노하며 몸부림쳤고, 쇠사슬은 그의 몸부림으로 인해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조경선은 소임호의 턱을 잡고 비웃으며 말했다. “왜, 불만이야? 그럼 나한테 빌어봐. 그러면 그 자식들한테 고통 없는 죽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꿈 깨.”소임호가 냉소하며 말했다.“죽어도 너한테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당신을 죽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참히 망가지는지 보여줄 수 없잖아. 당신 자식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고,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조경숙은 눈이 멀어 다른 남
여자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넌 먼저 돌아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당분간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어요.”시월은 갑자기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물었다.“맞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그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흥, 끝까지 고집불통인 쓰레기 같은 남자. 내가 겪은 교통을 천배, 만 배로 되돌려줄 거야!” 시월의 얼굴에 찰나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엄마,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동안 아빠가 가족도 잃게 하고, 집안도 망가지게 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 꿈 깨! 이건 그 사람이 나한테 진 빚이라고!” 여자가 소시월의 옷깃을 꽉 잡으며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데, 나는 네 어미야. 네가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나는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엄마, 알겠어요, 나는 엄마의 딸이니까 당연히 엄마 편이에요.” 소시월은 여자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나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여자의 정서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사실, 그녀의 얼굴도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집착이 너무도 강한 그녀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 고통을 평생 기억하면서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한테 천 배, 만 배로 돌려줄 거야!!” 여자는 평생을 복수 계획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하지만 소시월이 보기에, 복수를 이루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소씨 가문은 지금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소시월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소시월이 떠난 후, 여자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는데, 여자가 자신의 지문을 입력하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여자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갔고,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는 손과 발이 묶인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광기 어린 집착이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소임호
소지훈이 폭로한 충격적인 사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아에게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출생 비밀을 찾아 헤매던 지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스스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 소씨 가문 사람들의 고충에 공감했던 지아는 이제 그들이 자기 혈육임을 알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천천히 미끄러졌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들이...” 하지만 더욱 지아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예전에 마주했던 그 시신이 자기 친언니였다는 사실이었다. ‘시영 언니는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 ‘심지어 나는 그걸 전혀 몰랐고, 언니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했어...’ 지아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지아야!”도윤은 지아를 안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침대에 누운 채 찡그린 표정을 한 지아를 보며 도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지아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어. 그런데 간절히 바랐던 가족마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다니.’ 무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아의 곁을 지켰다.도윤은 무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냥 과로한 상태에서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뿐이거든.” 한편, 소씨 가문의 황당한 해프닝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으며, 소영수의 장례식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들의 싸움의 장이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소지훈이 이긴 듯 보였으나, 사실 그로 인해 소씨 가문은 체면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시월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해가 뜨기도 전에 황급히 차를 몰아 오래된 별장으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까악까악’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섬뜩하게 들렸다. 장미 덩굴은 낡은 담벼락 위로 기어오르며, 삭막하고 부패한 세상에 한 줄기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햇살이 어둠을 찢으며 온 세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