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막 잠에 든 순간 어쩐 일인지 놀라서 깨어났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다도 크게 출렁거리지 않았고 소리도 없는데 왜 잠에서 깼을까?늦은 시간, 지아가 방문을 열자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모습을 얼핏 보았다.함께 지내온 시간 동안 강욱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그는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복도의 불빛이 너무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고 몸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눈에 보이는 것은 손끝의 선홍빛 반짝임과 가느다란 손가락뿐이었다.남자의 분위기는 평소와는 정반대로 검은 안개에 가려진 차가운 달처럼 신비롭고 위험한 기운이 스며들어 있었다.지아를 본 순간 남자는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겨내자 붉은빛이 어두운 밤 포물선을 그리며 바닷속으로 떨어졌다.“아가씨, 왜 그래요? 잠이 안 와요?”강욱이 서둘러 다가왔다.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잘못 본 게 아닐까 생각할 만큼 무해한 표정이 남아 있었다.“왜 아직 방으로 안 돌아갔어요?”지아는 다소 의아했다. 왜 이 시간에 아직도 저기 나와 있는 걸까. 설마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묵묵히 자신을 지키고 있었던 걸까.“혹시 몰라서요. 어차피 전 잠도 없고 방에 돌아가도 못 자요. 왜 나왔어요?”“바람 좀 쐬러 나왔어요.”지아는 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이 편치 않았다.“걱정 마세요, 선장님께 연락했으니 곧 돌아올 거예요.”강욱은 지아의 표정을 살폈다. 할 말을 망설이는 듯한 모습인데 혹시 조금 전 총소리에 겁먹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가씨, 무서우시면 제가 방에 들어가서 같이 있어 드릴게요. 제가 있으면 조금 더 마음이 놓이지 않겠어요?”“그래요.”지아는 그의 제안에 동의하고 그를 방으로 들여보냈다.침대에 누웠고, 그녀와 3미터 정도 떨어진 바닥에 앉아있는 강욱 덕분에 마음이 놓였다.이때 어느샌가 술을 마셔 얼굴이 빨개진 선장이 조그만 아이 둘을
남자아이의 얼굴에는 몇 군데 긁힌 상처가 있었고 곳곳에 흔적이 가득한 열 손가락은 핏자국이 남루해 보는 사람까지 마음이 아팠다.약을 문지르는 동안 이 아이는 눈에서 눈물이 고였지만 울음을 참으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맹국영은 한참 동안 그 남자아이를 바라보면서 왠지 모르게 어딘가 낯익은, 누군가를 닮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아이들을 씻긴 후 맹국영이 몇 번 더 물었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여자아이는 닭이 밥을 쪼아 먹듯 먹고 마시다가 몇 분 만에 잠이 들었고, 남자아이는 졸렸지만 정신을 다잡고 맹국영을 노려보았다.“무서워할 필요 없어, 난 너희를 해치지 않아. 이름이 뭐야? 혹시 엄마 아빠를 잃어버린 거야?”여자아이는 계속해서 말이 없었고, 자신에 대해 조금도 알려주지 않았다.맹국영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경계하는 아이는 처음 보네. 그래, 더 묻지 않을 테니 피곤하면 쉬어. 우린 여기 하루 더 있을 거니까 내일 엄마 아빠 찾아줄게.”그는 두 아이에게 침대를 내주고 자신은 소파 반대편에 누웠다.남자아이는 자정까지 버티다가 잠이 들었다.아침이 밝고 맹국영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의 부모를 찾아 돌아다녔다.그가 떠나자마자 어두운 그림자가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침대에 누워 있던 남자아이는 경계심을 가지고 눈을 번쩍 떴고, 찾아온 사람을 보자 두 눈을 반짝였다.“아빠.”“쉿.”남자가 움직였다.아이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지만 옷에 묻은 피를 보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다.“피.”아무것도 모를 어린 나이임에도 그 피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았다.“괜찮아.”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사람의 피야. 밖은 바람이 세니까 여기 숨자.”남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부터 남자는 남자아이와 여동생을 데리고 숨어 다녔다.그들이 어느 곳을 가든 며칠 평온한 나날을 보내기 바쁘게 그놈들이 쫓아왔다.원래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왔는데, 그 고양이도 눈앞에서 죽었다.사람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는 그들을 거두어 줄
부엌이 이 층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생물을 운반하는 배도 아닌데 어떻게 이유 없이 피 냄새가 날 수 있겠나.어젯밤 총격전을 떠올리며 강욱은 조금이라도 지아가 다칠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주위를 살폈다.지아를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한 강욱은 감시카메라를 확인하면 모든 답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재빨리 감시실로 갔다.감시 카메라를 지켜보는 장원철이 꿀잠에 빠져 있는 사이 강욱은 손쉽게 30분 전의 영상을 훑어볼 수 있었다.그의 손가락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지만, 감시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전혀 추적할 수 없었다.누군가 카메라에 손을 댔다.보아하니 배에 쥐새끼가 침투한 것 같았다.상대방이 지아를 노리고 온 게 아니어도 강욱은 그냥 놔둘 수 없었다.최대한 빨리 쥐새끼를 찾아야 한다.선장 맹국영은 하루 종일 수색에 나섰지만 섬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어떤 평범한 부모가 늦은 밤에 다친 두 아이를 절벽 끝에 내버려둘 수 있겠나.아이에게 부모에 대해 아무리 물어봐도 아무런 언급이 없자 맹국영은 일부러 아이를 버렸을 거라고 짐작했다.“우리 오늘 떠나는데 같이 갈래?”맹국영은 참을성 있게 두 아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아이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배에 있었고, 이 배로 남들의 눈을 피해 떠나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더 이상 거부감이 없었다.여자아이는 소심하게 오빠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불렀다.“오빠.”“말할 줄 아는구나. 이름이 뭐니?”그제야 소년이 입을 열었다.“해경이요.”“소망이요.”맹국영은 눈을 반짝였다.“해경이와 소망이라, 이름 예쁘다. 엄마 아빠는 어디 있니?”“죽었어요.”해경은 차분하게 말했다.맹국영은 한숨을 쉬었다. 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랐으면 이 두 아이가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다른 친척들은 있니?”“없어요.”아이들이 어려서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두 아이는 모두 맹국영을 따라나서기로 했다.“알았어, 일단 돌아가자.”이 섬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
악마의 바다로 들어가려는 순간, 강욱은 이 떠돌이 잡것을 제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이쯤 되면 상대방은 다용도실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강욱이 미리 알아본 결과, 이곳엔 도구만 가득하고 몇 달 동안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문이 열리자 불쾌한 냄새가 그를 덮쳤다.퀴퀴한 냄새와 함께 피 냄새도 섞여 있었다.곧 날이 어두워질 무렵이었고, 오늘은 비까지 와서 바다 전체가 어둡고 음침했다. 맨 밑층에 있는 이 방엔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선체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제외하면 방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강욱은 앞쪽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인간의 직감으로 상대가 지금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마치 독사가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가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서 물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하늘은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고, 바닷바람은 거세게 불어왔으며, 문과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지아 역시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어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창밖을 내다보니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며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심술궂은 악마가 입을 크게 벌리고 지나가는 사람과 배를 삼키려는 듯 전보다 더 잔인해진 악마의 바다에 들어섰다.파도가 배의 선체에 부딪히면서 배는 심하게 흔들렸다.때때로 파도가 몇 미터 높이까지 치솟아 무서웠다.태양 빛이 없는 어두운 바다는 더욱 섬뜩해 보였다.역시나 악마의 해역이었다.지아는 불안한 마음으로 창가에 서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비가 오면 바다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앞으로 수십 시간 동안 이런 큰 바다를 항해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아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또 한 번 큰 파도가 치고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지아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방 안을 몇 번이나 돌아다니며 나가서 강욱을 찾고 싶었다.적어도 강욱이 곁에 있으면 마음이 좀 더 편할 것 같았다. 함께 지내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의존하게 된 것이다.막 문을 열고 복도에 나오기도 전에 돌풍
이 가면의 주인은 다름 아닌 전효였고, 전효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눈앞의 키 큰 남자를 바라보았다.어딘지 모르게 이도윤과 닮았지만 이도윤의 몸은 이 남자보다 더 건장했다. 시선이 강욱에게 향하자 그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밋밋한 얼굴이었다.날 죽이러 온 사람이 아닌가?“날 알아?”맞다, 이 목소리.강욱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옷깃을 잡아당기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네가 왜 여기 있어?”전효는 이 남자의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만약 자신을 쫓는 무리였다면 지금쯤 이미 머리를 가격해 죽여버렸겠지,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했을까?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조금 전 강욱은 하필 발로 그의 상처를 가격했고,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옷을 물들였다.강욱이 더 묻기도 전에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선원들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해적이다! 해적이 왔다!”강욱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진짜 나타난 건가?이 쓰레기 같은 놈들.곧바로 밖은 빠르게 달리는 선원들의 소리로 가득 찼다. 일반 화물선이지만 비상사태를 막기 위해 선내에 물대포와 무기를 장착하고 있었다.오래전 바다가 혼잡할 때 모두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생존의 방법을 찾았지만, 평화로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오늘 또다시 해적과 마주친 것이다.강욱은 곧바로 전효를 묶어 옆으로 던지며 말했다.“얌전히 있어.”말을 마친 그는 성큼성큼 떠났다. 전효의 목적이 무엇이든 지아를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았고, 적어도 해적들보다 덜 위협적이었다.전효는 머릿속엔 두 아이들로 가득했다. 젠장, 왜 하필 이 시점에 해적이 나타나서는.방에서 두 아이와 즐겁게 놀던 맹국영은 두 아이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고 정신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천재네! 우리 해경이 천재야.”맹국영은 단지 시간을 때울 생각으로 장기를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해경이 그렇게 빨리 익히고 배울 줄은 몰랐다. 겨우 며칠이나 됐다고 세 살도 안 된 어
맹국영은 더 설명할 시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소망은 걱정스럽게 해경을 바라보았지만 해경은 소망을 쳐다보지 않고 아저씨가 보드 위에 내려놓은 마지막 조각만 쳐다보았다.양옆에 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뭘 해도 끝은 죽음이었다.“오빠...”해경은 전효로부터 해적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성도 없이 사람의 가죽을 쓴 사악한 괴물이었다.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기들은 바다의 패왕이라 불렸다.광물 원료를 운반하는 이 화물선은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들의 먹잇감이 되었다.국영 할아버지에게 큰일이 생긴 것 같았다.하지만 위험하다는 걸 알아도 막을 능력은 없었다.두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서둘러 전효를 찾아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전효가 자기들을 데리고 떠나는 것뿐이었다.이제 겨우 두 살이 조금 넘은 아이들이지만 삶과 죽음의 의미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아이들은 살아가는 이유를 몰랐다. 개미처럼 사는 게 버거워도 그저 꿋꿋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적어도 아직 어머니의 무덤에 가서 제사도 한 번 지내지 못했다.“가자.”해경은 소망의 손을 잡고 떠나기 전, 식탁보로 먹다 남은 케이크와 과자를 싸서 매듭지어 자신의 목에 걸었다.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도망 다니는 것에 도가 텄다.소망 역시 같은 마음으로 해경이 뭘 하려는지 알았다.“하지만 할아버지...”해경은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빠를 찾자.”전효는 이 배에서 그들을 곤경에서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두 아이가 문을 열자 선원들이 모이는 모습을 보았다.저 멀리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커다란 배 한 척이 보였다.망원경도 없고 불빛도 어두워 두 아이는 표지판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전효를 찾아다녔다.하지만 해적들은 두 아이가 멀리 가기도 전에 아무런 경고도 없이 배의 선체를 향해 강제로 총격을 가했다.쿠르릉-귀
지아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보통 이 시간이면 강욱이 과일을 가져다주곤 했는데 오늘은 어디 갔을까?어스름한 빛 속에서 그녀는 빗방울이 대각선으로 날아가 유리에 부딪히는 것을 보았다.비가 내리고 있다.지아는 이런 날씨가 너무 싫어서 잠을 청할 생각도 없는 듯 침대에 기대어 헤드폰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얼마나 지났을까 배가 심하게 흔들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뜨게 되었다.‘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설마 해적이 온 걸까?’지아가 서둘러 헤드폰을 벗자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정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지아는 문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조심스러웠고, 감히 함부로 뛰어다니지 못한 채 조용히 강욱의 소식을 기다렸다.하지만 강욱은 생각보다 빨리 들어오지 않았고, 지아는 긴장감을 참지 못하고 재빨리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지아는 불이 달린 배가 아닌 앳된 목소리에 이끌렸다.“사람 살려!”아주 작은 아이의 목소리였다.‘대체 어디서 온 아일까?’지아는 모성 본능에 어느 집 아이인지, 함정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앞을 향해 돌진했다.모퉁이를 돌아보니 한 소년이 작은 손을 죽기 살기로 잡아당기는 모습이 보였고, 시선을 돌리자 난간 바로 너머에 어린 소녀가 매달려 있었다.맙소사!지아는 자신의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이 순간 해경은 이미 온몸의 힘을 다 써버린 상태라 소망을 잡아당길 수 없었고, 손바닥에서 조금씩 빠져나가는 소망의 작은 손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오빠!”“안 돼, 하지 마!”소망이 내려가려는 순간, 공중에 나타난 큰 손이 소망의 작은 손을 잡아 떨어지려는 몸을 때마침 멈춰 세웠다.해경은 어안이 벙벙한 채 자신의 옆에 나타난 잠옷 차림의 여자를 바라보았다.몸의 절반이 난간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고, 특히 소망을 잡아당기는 손은 피부와 뼈만 남은 마른 체구였다.지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잡았다.어린 소녀는 고개를 떨군 채 온몸이
소망이 바다에 빠지는 모습을 본 지아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이 어린 여자아이를 구하려 했는데, 신은 왜 이렇게 나에게 잔인한 걸까?’바로 그때 옆에 있던 해경이 울부짖었다.“소망아!”시선을 돌린 지아는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이성을 잃었다.한가지 생각이 지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처 사실 확인하기도 전에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바로 참지 못하고 난간을 뛰어넘었다.머릿속엔 3년 전 임신했을 때 봤던 4D 영상이 가득했다. 얌전한 쌍둥이였다.이도윤과 닮은 여자아이는 밝고 활발하고 잘 웃었고, 자신의 얼굴과 닮은 남자아이는 얌전한 성격이었다.이 두 아이가 설마 자신의 아들딸일까?지아는 사랑하는 사람과 재회한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이별의 슬픔에 휩싸였다.모든 걸 뒤로 하고 해경을 향해 달려갔다.‘아가야, 그거 알아? 엄마는 오랫동안 너를 그리워했단다.’‘제발 무사해다오.’첨벙 물속으로 뛰어드는 소리는 시끄러운 배 위에서 마치 작은 돌멩이를 물속에 던진 것처럼 파문을 일으키지 못했다.강욱은 그 일이 있고 난 뒤 가장 먼저 지아의 방으로 달려갔다.방 안은 거센 바람으로 가득 찼고 사람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지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표정이 확 굳어진 강욱이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모퉁이에서 겁에 질린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소리를 따라가 보니 바닥에 앉아있는 작은 소년의 목에 뭔지 모를 물건이 매달려 있었다.“무슨 일이야?”해경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말했다.“동생, 아줌마, 바다에!”강욱은 알 듯 말 듯한 그 말에 다시 한번 되물었다.“혹시 이 정도 키에 아주 마르고 하얀 아주머니 봤어? 머리가 없어.”해경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바다를 가리켰다.“떨어졌어요, 떨어졌어요! 동생이 빠졌어요.”“동생이 물에 빠졌는데 아줌마가 동생 따라 뛰어들었다고?”“맞아요.”강욱은 미치기 직전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지아의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