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자리에서 지아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이랬다.“하루는 잘 지내요?”“잘 지내요. 친구에게 맡겼으니 잘 돌봐줄 겁니다. 임 선생님이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제대로 챙기지 못할까 봐 저보고 여기 와서 돌봐달라고 하셨어요.”“정말 고생이 많네요.”지아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방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착각일까?헤어져야만 했던 사람과 다시 재회한 지아는 기쁜 대신 묘한 감정이 들었다.마치 이 사람이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것 같은데, 또 강욱이 온 이유는 이해가 되었다.지아의 직감이 자신에게 이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었다.속을 모르는 사람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강욱을 피하고 싶었다.그 후 며칠 동안 지아는 항상 방에 틀어박혀 식사조차 밖에서 하지 않았다.강욱이 식사를 가져다주면 지아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문을 닫았고, 그 외엔 하루 동안 별 대화를 하지 않았다.강욱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지아가 소원해졌다고 해서 늦장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일 세 끼 식사를 제시간에 챙겨주고, 오후에는 신선한 차와 과일을 준비해 오는 것은 물론, 사과도 지아가 먹기 좋게 껍질을 깎고 썰어서 가져다주곤 했다.겉보기엔 거친 사람 같았지만 속은 의외로 섬세했다.지아는 강욱이 가져온 포도를 만지작거리며 두 눈에 깊은 사색의 흔적이 역력했다.옛날에는 아주머니가 음식을 만들어 주었는데, 지아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싫어서 아주머니에게 자신의 취향을 말하지 않았다.그래서 밥이든 과일이든 아주머니가 주는 대로 먹었다.건우가 지아를 돌봐줬을 때도 지아가 나서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한 적은 없었고, 건우 역시 이를 몰랐다.하지만 배에 오른 후부터 식사부터 과일까지 매일 다양하게 준비된 것들은 모두 지아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아주머니마저 가끔 지아가 싫어하는 요리를 한두 가지 만들어 주었는데, 지난 며칠 동안 배에서 지내면서 놀랍게도 싫어하는 요리는 하나도 없었다.확률적으로도 말도 안
저녁 식재료는 대부분 신맛이 강한 편이었고, 지아는 싫은데도 불구하고 모두 한 입씩 먹어보았다.다음 날도 신맛 나는 음식이 많아지자 지아는 먹다 토할 뻔한 뒤 강욱을 불렀다. “흠, 요즘 신 음식이 너무 많아서 좀 질리네요.”“알겠습니다, 지아 씨. 뭘 좋아하는지 알려주면 기억했다가 주방 사람들에게 만들어 달라고 할게요.”지아는 강욱의 표정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했는데, 그의 행동이나 말투가 이도윤과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이도윤이 아무리 자신을 잘 안다고 해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자신의 곁을 지킬 수는 없었다.게다가 고고하신 대표님께서 언제부터 남의 시중을 들었단 말인가.지아는 며칠 동안 관찰했지만 별다른 낌새가 없자 그제야 마음을 내려놓고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강욱을 대했다.바다 위에서의 나날은 확실히 지루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 일출과 일몰도 오래 보고 있으면 따분했다.지아는 갑판 위에 앉아 있었다. 저녁노을은 이맘때가 가장 아름다웠다.저녁 바람은 살랑살랑 불었고, 지아는 모자를 쓰지 않았다. 전혀 자신의 모습에 개의치 않았다. 가끔씩 선원 한두 명을 만나 그들의 시선이 자신의 대머리에 향해도 덤덤히 받아들였다.그녀의 두피에는 키위처럼 솜털이 잔뜩 자라기 시작했다.강욱의 시선이 지아의 머리 위로 스치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아가씨, 저녁 바람이 좀 찬데 모자라도 쓰실래요?”“아뇨, 괜찮아요.”지아는 옆자리를 두드렸다.“나랑 같이 앉아 얘기 좀 해요.”요즘 유심히 관찰한 결과, 강욱에게 의심스러운 부분은 찾지 못했기에 지아도 한층 편하게 대했다.“얘기나 해요.”바다는 너무 지루했고, 며칠을 참다 보니 사람이 상당히 우울해져 있었다.강욱은 곧바로 다가가 알아서 화제를 찾았다.“아가씨, 다음 지점이 뭔지 압니까?”지아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네요.”“이글랜드 해협.”지아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지리책이나 여러 소셜 플랫폼에서 들어본 적이
강욱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여긴 악마들의 뒷마당 같은 곳입니다. 이 바다에서 마음껏 악행을 일삼고 온갖 짓을 저지르며 사람들을 강탈하고 죽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이 단속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완전히 순조롭게 진행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미리 대비를 해야 합니다.”지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위험한데 왜 이쪽으로 가요?”“사람들은, 특히 상인들은 도박 심리가 있어요. 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면 보름이 더 걸리고, 게다가 다른 항로도 위험해요. 암초에 부딪힐 위험도 있고, 비용 부담도 커지고, 해적들도 몇 년 전부터 덜 나타나고 있어서 다들 마음 놓고 지나가고 있죠.”강욱은 차근차근 설명했지만 지아는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느꼈다.“다른 생각이라도 있으신가요?”“모든 일에는 최악의 상황이 있어요. 특히 악랄한 악당 집단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강욱은 고개를 돌려 진지함이 가득한 지아의 얼굴을 보고는 곧바로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 “무서워요? 미안해요. 전 그냥 미리 알려주고 싶었어요.”지아는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우리의 운이 그렇게 나쁘진 않을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안 만났는데 우리만 만나지는 않겠죠.”“걱정하지 마요. 그렇게 불행한 일은 없을 겁니다. 여긴 악마의 해연이고, 극락지경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요?”지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건 들어본 적 없는데 말해줘요.”“좋아요, 극락지경은...”어느새 어둠이 깃들고, 지아는 강욱이 가장 지식이 많은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통찰력은 가장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설명을 들으며 지아는 마치 자신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 이렇게 위협적이면서도 놀라운 곳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이 모든 곳을 다 가봤다고요?”“네, 젊었을 때 돈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해보느라 여행도 많이 다녔거든요.”강욱은 두 팔을 등 뒤에 가져가 몸을 지탱하며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바다 위 별빛이 예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산업공해
지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조금이라도 조심하는 게 낫죠. 그냥 배에 있을게요.”강욱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아가씨, 위험을 무릅쓰고 밀입국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애초에 건강도 좋지 않고, 국내에 가족도 별로 없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로 돌아가는 건가요?”“음, 일이 좀 있어서요.”지아는 입을 꾹 다물고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강욱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럼 일찍 쉬세요.”화물선이 정박한 후 보급품을 재보급하고 배를 수리하는 데 반나절이 걸렸지만, 지아는 배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계속해서 방에만 머물렀다.그녀는 달력을 빨간 펜으로 그으며 점점 A시와 가까워지는 날들을 바라보았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곧 두 아이를 볼 수 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 선원이 와서 알렸다.“아가씨 죄송해요. 배에 작은 문제가 생겨서 지금 기술자들이 정비 중인데 오늘 안에 출항이 어려울 것 같아요.”“연착은 얼마나 걸리나요?”“빠르면 하루, 늦으면 2, 3일 걸립니다. 현재 수리 때문에 다들 야근을 하고 있는데, 선장님이 특별히 배에서 심심하면 섬을 한 바퀴 돌아도 된다고 저를 여기로 보내 알려드리라고 하셨어요.”“네, 알겠어요.”지아는 섬의 풍경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터라 덤덤하게 대답했다. “감사하지만 됐어요.”“괜찮습니다. 선장님과 다른 분들은 선술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있으니 아가씨께서는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로 연락해 주세요.”“네.”항구에 가까워지자 밤은 시끄러운 파도 소리 없이 고요해졌다.지아는 몸을 뒤로 젖히고 갑판에 앉아 별을 바라보는 것이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습관이 되었다.어느새 누군가 그녀를 위해 망토를 씌워주었고 강욱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전례 없이 그는 맥주 캔을 손에 들고 있었다.“선술집에 가서 한잔하지 그래요? 바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힘들지 않아요?”강욱의 긴 손가락이 펑 소리와 함께 고리를 당기고 두어 모금을 꿀꺽 삼킨 뒤 천천히 대답했다. “내 임무는 당신을 보호하는 건데, 월급을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의 두려움을 감지하고 급히 팔을 뻗어 안아주면서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동생아, 무서워하지 마.”남자아이는 동생의 두려움을 최대한 진정시키기 위해 여자아이의 귀를 손으로 가렸다. 어린 소년은 그만큼 용감하지 않았으니까.아버지도 저 고양이처럼 눈앞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자아이의 얼굴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여자아이는 무서웠다. 정말로 두려웠다.이 세상에 아빠와 오빠만 남았는데, 아빠가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바닷바람이 무모하게 춤을 추고 암초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매우 싫어하는 두 남매는 본능적으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여자아이는 감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화물선이 정박해 있었고, 파도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바닥에 누워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일어나 재빨리 펜스 쪽으로 걸어가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지아도 당연히 그 소리를 들었고, 그렇게 가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무슨 일이에요?”강욱은 진지한 표정을 한 채 서늘한 어투로 말했다.“긴장하지 마요.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으니까. 뭍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작은 섬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아서 가끔 시끄러운 일이 생겨요. 배에서 내리지 않는 한 우리는 안전합니다.”하지만 지아는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배에 이상이 생겨 출항 시간을 늦춰야 했다는 사실은 이미 나쁜 징조였다.이런 곳은 혼란스러웠고, 오래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랐다.“가서 배는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물어봐요. 언제쯤 떠날 수 있는지.”“알겠어요, 아가씨. 먼저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말아요. 일이 생기면 내가 먼저 당신을 데리고 여기 떠날게요.”마지막에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그는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았다.“나는 믿어도 돼
지아는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막 잠에 든 순간 어쩐 일인지 놀라서 깨어났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다도 크게 출렁거리지 않았고 소리도 없는데 왜 잠에서 깼을까?늦은 시간, 지아가 방문을 열자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모습을 얼핏 보았다.함께 지내온 시간 동안 강욱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그는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복도의 불빛이 너무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고 몸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눈에 보이는 것은 손끝의 선홍빛 반짝임과 가느다란 손가락뿐이었다.남자의 분위기는 평소와는 정반대로 검은 안개에 가려진 차가운 달처럼 신비롭고 위험한 기운이 스며들어 있었다.지아를 본 순간 남자는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겨내자 붉은빛이 어두운 밤 포물선을 그리며 바닷속으로 떨어졌다.“아가씨, 왜 그래요? 잠이 안 와요?”강욱이 서둘러 다가왔다.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잘못 본 게 아닐까 생각할 만큼 무해한 표정이 남아 있었다.“왜 아직 방으로 안 돌아갔어요?”지아는 다소 의아했다. 왜 이 시간에 아직도 저기 나와 있는 걸까. 설마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묵묵히 자신을 지키고 있었던 걸까.“혹시 몰라서요. 어차피 전 잠도 없고 방에 돌아가도 못 자요. 왜 나왔어요?”“바람 좀 쐬러 나왔어요.”지아는 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이 편치 않았다.“걱정 마세요, 선장님께 연락했으니 곧 돌아올 거예요.”강욱은 지아의 표정을 살폈다. 할 말을 망설이는 듯한 모습인데 혹시 조금 전 총소리에 겁먹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가씨, 무서우시면 제가 방에 들어가서 같이 있어 드릴게요. 제가 있으면 조금 더 마음이 놓이지 않겠어요?”“그래요.”지아는 그의 제안에 동의하고 그를 방으로 들여보냈다.침대에 누웠고, 그녀와 3미터 정도 떨어진 바닥에 앉아있는 강욱 덕분에 마음이 놓였다.이때 어느샌가 술을 마셔 얼굴이 빨개진 선장이 조그만 아이 둘을
남자아이의 얼굴에는 몇 군데 긁힌 상처가 있었고 곳곳에 흔적이 가득한 열 손가락은 핏자국이 남루해 보는 사람까지 마음이 아팠다.약을 문지르는 동안 이 아이는 눈에서 눈물이 고였지만 울음을 참으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맹국영은 한참 동안 그 남자아이를 바라보면서 왠지 모르게 어딘가 낯익은, 누군가를 닮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아이들을 씻긴 후 맹국영이 몇 번 더 물었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여자아이는 닭이 밥을 쪼아 먹듯 먹고 마시다가 몇 분 만에 잠이 들었고, 남자아이는 졸렸지만 정신을 다잡고 맹국영을 노려보았다.“무서워할 필요 없어, 난 너희를 해치지 않아. 이름이 뭐야? 혹시 엄마 아빠를 잃어버린 거야?”여자아이는 계속해서 말이 없었고, 자신에 대해 조금도 알려주지 않았다.맹국영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경계하는 아이는 처음 보네. 그래, 더 묻지 않을 테니 피곤하면 쉬어. 우린 여기 하루 더 있을 거니까 내일 엄마 아빠 찾아줄게.”그는 두 아이에게 침대를 내주고 자신은 소파 반대편에 누웠다.남자아이는 자정까지 버티다가 잠이 들었다.아침이 밝고 맹국영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의 부모를 찾아 돌아다녔다.그가 떠나자마자 어두운 그림자가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침대에 누워 있던 남자아이는 경계심을 가지고 눈을 번쩍 떴고, 찾아온 사람을 보자 두 눈을 반짝였다.“아빠.”“쉿.”남자가 움직였다.아이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지만 옷에 묻은 피를 보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다.“피.”아무것도 모를 어린 나이임에도 그 피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았다.“괜찮아.”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사람의 피야. 밖은 바람이 세니까 여기 숨자.”남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부터 남자는 남자아이와 여동생을 데리고 숨어 다녔다.그들이 어느 곳을 가든 며칠 평온한 나날을 보내기 바쁘게 그놈들이 쫓아왔다.원래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데려왔는데, 그 고양이도 눈앞에서 죽었다.사람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는 그들을 거두어 줄
부엌이 이 층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생물을 운반하는 배도 아닌데 어떻게 이유 없이 피 냄새가 날 수 있겠나.어젯밤 총격전을 떠올리며 강욱은 조금이라도 지아가 다칠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주위를 살폈다.지아를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한 강욱은 감시카메라를 확인하면 모든 답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재빨리 감시실로 갔다.감시 카메라를 지켜보는 장원철이 꿀잠에 빠져 있는 사이 강욱은 손쉽게 30분 전의 영상을 훑어볼 수 있었다.그의 손가락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지만, 감시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전혀 추적할 수 없었다.누군가 카메라에 손을 댔다.보아하니 배에 쥐새끼가 침투한 것 같았다.상대방이 지아를 노리고 온 게 아니어도 강욱은 그냥 놔둘 수 없었다.최대한 빨리 쥐새끼를 찾아야 한다.선장 맹국영은 하루 종일 수색에 나섰지만 섬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어떤 평범한 부모가 늦은 밤에 다친 두 아이를 절벽 끝에 내버려둘 수 있겠나.아이에게 부모에 대해 아무리 물어봐도 아무런 언급이 없자 맹국영은 일부러 아이를 버렸을 거라고 짐작했다.“우리 오늘 떠나는데 같이 갈래?”맹국영은 참을성 있게 두 아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물었다.아이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배에 있었고, 이 배로 남들의 눈을 피해 떠나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더 이상 거부감이 없었다.여자아이는 소심하게 오빠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불렀다.“오빠.”“말할 줄 아는구나. 이름이 뭐니?”그제야 소년이 입을 열었다.“해경이요.”“소망이요.”맹국영은 눈을 반짝였다.“해경이와 소망이라, 이름 예쁘다. 엄마 아빠는 어디 있니?”“죽었어요.”해경은 차분하게 말했다.맹국영은 한숨을 쉬었다. 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랐으면 이 두 아이가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다른 친척들은 있니?”“없어요.”아이들이 어려서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두 아이는 모두 맹국영을 따라나서기로 했다.“알았어, 일단 돌아가자.”이 섬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