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여우가 말한 바와 같이, 폴라리스란 조직은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실 전부 싸움을 잘 하진 않았다. 어떤 사람은 정보요원에 해당하는데 조직 중 일부분은 정보 수집을 책임지고 나머지 일부분은 미션을 수행했다.곧 마 매니저는 통제되었고, 도윤의 협박에 일부 사실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도윤은 겨우살이도 지금 이 도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도련님, 저의 가장 큰 권한이 바로 그 사람과 연락하는 것이니 그 사람은 절대로 저와 만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도 단지 중간에 끼어있을 뿐,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도윤은 즉시 진환과 눈을 마주쳤고, 진환은 바로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그 사람이 이 도시에 있는 한, 그들은 전화를 통해 그의 구체적인 위치를 확정할 수 있었으니 그를 잡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진환은 즉시 기계를 준비했고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도윤은 주사약을 들고 마 매니저에게 접근했다.“지금 뭐 하려는 거예요?”“내가 시키는 대로 해. 만약 날 배신하면, 난 절대로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너의 그 아직 보름도 채 되지 않은 아이도 같이 죽여버릴 거야.”“알겠습니다.”“가능한 한 통화 시간을 끌어. 1분 이내로 끊긴다면, 난 바로 널 죽여버릴 거야.”“네, 네, 도련님.”이런 교활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었다. 그들은 용병처럼 입이 그렇게 무겁지 않았고 눈치가 빨라 남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며 또 상황 파악을 아주 잘 했다.모든 장치를 연결한 다음, 마 매니저도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마 매니저의 말에 따르면, 겨우살이의 전화번호는 늘 변하는데, 한 번호를 기껏해야 두 주일 정도 쓴 다음 즉시 폐기시켰다. 운 좋게도 그들은 마침 며칠 전에야 금방 연락한 적이 있었다.“뚜뚜뚜…….”전화가 연결되었다.진환은 지금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줄곧 주모자를 조사했는데, 이제 마침내 꼬리를 잡았으니 곧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단 생각에 진환은
도윤은 손을 들며 말했다.“출발해. 일 있으면 수시로 연락하고.”“알겠습니다.”진봉은 경호원을 데리고 바로 사라졌지만 도윤은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계속 냉정함을 유지했다.상대방에게 여러 번 당하고 나니, 도윤은 주모자가 아주 치밀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이 승리하려면 반드시 만전을 기해야 했다.“진환, 그 사람이 사는 곳을 자세히 조사해 봐. 무슨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네, 대표님.”진환은 재빨리 키보드를 두드렸고, 잠시 후, 그는 구체적인 위치를 알아냈다. 지도를 확대하니 그곳은 해변의 별장으로서 주위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대표님, 바로 이 장원입니다.”“건물주가 누구인지 알아내.”“지금 바로 알아볼게요.”도윤은 마우스로 건물을 자세히 관찰했다.“뒤쪽은 밀림이고 앞쪽은 바다이니 그 사람 쉽게 도주할 수도 있어.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봐.”“네, 진봉에게 바로 전달하겠습니다.”도윤은 결혼반지를 어루만졌다. 지금은 주모자를 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였기에 그는 절대로 놓치면 안 됐다.‘이 사람을 해결하기만 하면 앞으로 지아와 지윤이는 안전해질 거야.’‘이번만큼은 절대로 질 수 없어.’3분 후, 진봉은 이미 장원 근처에 도착했고, 도윤은 블랙 여우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이제 네 차례야. 말조심해야 한다는 거 꼭 기억해.”이번에도 블랙 여우는 전화를 세 번 걸었고, 상대방은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음.”“보스, 접니다.” 블랙 여우는 평소와 다름없이 목소리를 낮추었고, 진환은 줄곧 컴퓨터 스크린을 주시하면서 상대방의 위치에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상대방은 지금 베란다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 그들은 파도 소리와 하늘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헬리콥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진봉은 이미 장원의 위쪽에서 착륙할 예정이었기에 블랙 여우는 그의 주의력을 끌어야 했다.“내일이 바로 이씨 가문 어르신의 생신잔치이니 그때가 되면 틀림없이 사람들
도윤은 기사를 재촉했다. 비록 밤이 이미 깊었지만 그는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이 장본인만 잡으면 앞으로 지아와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단 생각에 도윤은 지체없이 인해로를 향했다.차는 어두운 밤에서 질주했다. 수십 대의 차와 수백 명의 경호원이 인해로를 향해 달려갔고 그 장원을 물샐틈없이 둘러쌌다.도윤은 급히 차에서 내려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짜고 떫은 바닷바람은 피비린내와 뒤섞여 덮쳐왔고 곳곳에서 도윤의 사람을 찾아볼 수 있었다.“상황은?”도윤이 다급하게 물었다.염경훈은 군중 속에서 걸어 나오며 대답했다.“대표님, 그 사람은 부상을 입은 후 궁지에 몰려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진봉은 이미 사람을 데리고 쫓아갔습니다.”도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 이렇게 많은 준비를 했지만 결국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어디야.”마치 운명이 장난치는 것처럼, 지난번에는 지아가 핍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이번에는 그 사람이었다.“그 사람 어떻게 생겼는지 못 봤어?” 도윤이 묻자 염경훈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안색이 많이 안 좋았다.“그동안 저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겨우살이는 사실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습니다.”“여자라고?”“네, 그리고 제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 겨우살이의 뒷모습은…….”“뒷모습이 왜?”“아가씨의 뒷모습과 많이 닮았습니다.”도윤은 안색이 어두워졌다.“뭐라고?”“물론 그 사람이 바로 아가씨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키와 몸매로 판단하면 아가씨와 많이 비슷했는데, 얼굴은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도윤은 두 주먹을 꽉 쥐었고, 손등에 핏줄이 드러났다. 눈을 감으면 머릿속은 온통 지난번 산에서 이예린과 헤어진 장면이었다.이예린은 도윤을 등진 채 말했다.“이제 그냥 나란 동생이 없다고 생각해. 난 이미 돌아갈 수 없으니까.”‘대체 왜?’‘전에 청소부로 위장하여 내 곁에 있었던 것은 날 지켜주기 위해서였는데. 만약 정말 이예린이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면, 나까지 죽이고 싶었던 거야?’도윤은
심예지는 지아에게 자신과 같은 스타일의 예복을 골라주었다. 그녀가 입은 하엽색과 달리, 달빛처럼 하얀 드레스에 주얼리는 진주, 그리고 또 이씨 가문 며느리를 상징하는 팔찌까지 매치해 무척 우아했다.그리고 처음으로 여주인의 신분으로 이씨 가문 만찬에 참가한 임수경은 마치 주얼리를 홍보하는 모델처럼 차려입었는데, 행여나 사람들이 그녀에게 돈이 많다는 것을 모를까 봐 팔찌와 목걸이를 줄줄이 달아 자신의 재력을 과시했다.이씨 가문은 아직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았지만 소문은 이미 널리 퍼졌다.심예지는 버림받은 후, 줄곧 이씨 가문에서 휴양하고 있었는데, 지금 어르신은 연세가 있어서 자신의 아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그럼 임수경은 이 집안 진정한 며느리와 다름없었고, 심예지는 비록 명분이 있는 이씨 가문의 며느리였지만 결국 이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심예지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홀에는 이미 각종 사람들이 모였다.임수경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아부를 받고 있었다. 비록 최근 몇 년간 어르신은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임수경은 밖에서 여전히 자신을 이씨 가문 사모님이라고 사칭했다.다만 전에 사람들은 모두 뒤에서 그녀를 남의 가정이나 파괴하는 내연녀라고 비웃었다.이제 진정한 사모님으로 ‘승진하니’ 임수경은 그야말로 갖은 위세를 부렸다. 심지어 전에 그녀가 꼴 보기 싫던 사람들도 모두 진심으로 탄복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고생을 했으니 이제 결국 출세를 한 셈이었다.“이 부인, 대체 그동안 관리를 어떻게 했대? 어쩜 이렇게 젊은 거지? 우리는 다리미로 다려도 주름이 사라지지 않잖아, 호호호.”임수경은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했다.“장 부인, 겸손하긴. 왜 말을 그렇게 과장하게 하는 거야? 사실 나도 그냥 항상 유쾌함을 유지하고 또 자주 운동을 해서 그래. 그럼 자연히 혈색이 좋아질 거야. 난 얼굴에 손대는 거 제일 싫다니깐. 주사 같은 거 많이 맞으면 얼굴이 굳어지잖아.”“그래, 우리 이 부인은 원래 미모가 타고난 데다 이 선생님의
시간은 마치 이 순간 멈춘 것 같았다. 정말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존재하다니.하나는 봄꽃처럼 부드러웠고, 하나는 가을의 달빛처럼 차갑지만 고귀했다.샴페인을 들고 있던 이남수는 손가락에 힘을 주더니 이 순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여자가 바로 내가 아는 그 심예지라고?’머릿속에는 심예지가 물건을 부수며 울부짖는 소리, 가지 말라고 떼를 쓰며 임수경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는 장면이 나타났다.지금의 심예지는 도도하고 차가웠고, 마치 하늘의 여신처럼 여유롭게 사람들을 바라보았지만 유독 그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마치 자신과 그녀는 이미 남이 된 것 같았고, 심예지의 눈빛은 무척 낯설었다.그리고 이유민은 거의 지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이 여자가 아주 예쁘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뜻밖에도 간단한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정말 몰랐다. 마치 여신 비너스처럼 도도하게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 모습은 왠지 모르게 남자의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어르신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며느리가 등장하는 순간, 모두의 눈길을 끌었다.지금의 심예지는 모두들이 생각하는 그 미친 여자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특히 어르신 곁에 서 있으니 마치 자신이야말로 이씨 가문의 며느리라고 선고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모님이라고 사칭하던 임수경은 어르신의 곁에 다가가지도 못했다.임수경은 화려하게 차려입었고 심지어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다듬었지만 심예지가 등장하자, 재벌 집 큰 아가씨의 타고난 카리스마는 순식간에 그녀의 모든 것을 깔아뭉갰다.심예지를 마주하니, 가장 비싼 예복을 입고 몸에 여러 가지 주얼리를 차고 있던 임수경은 마치 지나치게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와 같았다.어르신이 나타나자, 모두들 순간 입을 다물었다.임수경은 이남수가 심예지를 보자마자 넋을 잃은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질투에 이를 갈았다.자신이 바로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임수경은
이유민인 것을 보고 지아는 고개를 들어 차갑게 그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이지?”남자는 오늘 새하얀 양복을 입었는데, 잘생긴 외모까지 더하니 남들은 그를 성격이 훈훈한 재벌 집 도련님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직 지아만이 이유민의 얼굴 아래에 감춰진 마음이 얼마나 악랄한 지를 알고 있었다.“왜 이렇게 쌀쌀맞게 굴어? 지금 형수님 관심하고 있잖아.”“앞으로 또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한다면, 네 턱을 부수겠다고 했을 텐데?”이유민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목을 만졌다.“형수님은 차분해 보이지만 꽤 성질이 있어. 그런데 나도 너무 궁금한 게 있는데, 형수님은 침대에서도 이런 반전 매력이 있는 거야?”말이 떨어지자, 지아는 컵에 든 뜨거운 물을 이유민의 얼굴을 향해 뿌렸다.비록 그녀는 큰 소란을 피우지 않았지만, 그들 몇 사람은 이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줄곧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그렇게 물을 뿌리자마자, 사람들은 즉시 의론을 하기 시작했고, 임수경은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지아야,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내 아들이 뭘 어쨌길래 사람들 보는 앞에서 그를 난처하게 하는 거지?”임수경은 전에 날뛰는 모습을 감추더니 억울한 기색을 드러냈다.“엄마, 형수님 탓하지 마세요. 형수님의 안색이 좀 이상한 것 같아서 걱정되는 마음에 관심을 좀 했는데, 형수님이 무슨 오해를 한 것 같아요.”지아는 원래 위가 아팠는데, 이 사람들이 또 쇼를 하자 그녀는 위가 더 아팠다.“거짓말!”“그게 관심이 아니라면 뭐지? 설마 내가 또 무슨 다른 말을 했나?”이유민 역시 억울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지아가 자신이 한 말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뻔뻔했지만, 지아는 여전히 이씨 집안의 체면을 고려해야 했다.지아는 마침내 윗물이 맑지 않으면 아랫물도 흐리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유민은 임수경의 수단을 그대로 배웠고, 일부러 연약한 모습을 보여 사람들의 동정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임수경은 즉시 울며 하소연하
지아는 아파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심예지는 원래 앉아서 임수경이 쇼하는 것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이 모자가 뜻밖에도 지아를 괴롭힐 줄은 몰랐다.보아하니 그들은 이 기회를 틈타 지아 등 사람을 쫓아내려는 것 같았다.“이남수, 그렇게 사과받길 좋아한다면 앞으로 네 무덤 위에 사과나무 하나 심지 그래?”이남수는 불쾌해하며 심예지를 바라보았다.“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니 입 다물어.”심예지는 지아를 뒤로 감싸더니 이남수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너나 입 닥쳐, 이 미친 X자식아!”순간 이남수와 임수경, 그리고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멍해졌다.이때, 유독 어르신이 간단하게 목청을 가다듬었다.“며늘아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말조심해. 네 시어머니는 속이 좁아서 오늘 저녁 무덤에서 나와 널 때릴 것 같구나.”사실 전에 심예지는 화가 날 때 임수경을 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응석받이로 자란 아가씨였기에 욕을 해도 더러운 말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더욱 용맹해졌고 무슨 말이든 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다.“이남수, 네 코에 달린 그 두 구멍은 대체 뭐 하는데 쓰이는 거지? 호흡 전용? 눈이 없으면 그래도 머리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내 며느리는 멀쩡하게 여기에 앉아서 그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고, 이 녀석이 먼저 와서 건드렸는데. 아무도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한 상황에서 넌 네 아들의 편을 들다니. 내 며느리는 미치지도 바보도 아닌데, 왜 사람들이 지켜보는 이런 자리에서 물을 뿌렸을까?”심예지의 말에 이남수는 매우 뻘쭘해져서 눈썹을 찌푸렸다. ‘하늘의 달은 무슨, 이 여자의 성질은 분명히 예전보다 더 거칠어졌는데!’“유민이가 무슨 말을 하겠어? 그저 간단하게 관심을 했겠지. 심예지, 나도 네가 나를 미워한다는 거 알고 있지만 우리가 돌아왔다고 해서 아무도 당신들의 자리를 빼앗지 않을 거야. 네 아들은 영원히 이 집안의 도련님이니 당신들 굳이 수경과 유민이를 상대할 필요가 없어.”지아는 심하게 아픈
임수경은 울먹이며 말했다.“여보, 난 오빠가 언니와 이혼한 후, 내가 유민이를 잘 키우고 가정을 잘 꾸려나가기만 하면 언젠가는 아버님께서 날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러나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아버님은 여전히 우리를 남이라 여기시다니, 우리 그냥 가자. 여기는 우리가 있을 자리가 아니야.”심예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남수는 이미 임수경의 말에 자극을 받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유민을 부축하며 입을 뗐다.“당신이 왜 가? 떠나야 할 사람은 이 사람들이야!”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바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심예지가 요 몇 년 동안 고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실 이남수는 그녀를 쫓아내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심예지가 원한다면 여기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도 그는 상관이 없었다.그러나 화가 치밀어 오르자, 이남수는 자신이 이런 말을 내뱉을 줄은 정말 몰랐다.상처를 주는 말을 내뱉기만 하면, 이는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남의 가슴을 쿡 찌를 것이다. 심지어 그 칼을 뽑아도 피가 끊임없이 흘러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하지만 이남수는 이미 습관이 되었기에 설령 자신이 좀 과분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는 사과할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를 굴리더니 나중에 심예지에게 보상을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어르신은 또 한 번 그의 말에 화가 나서 숨이 넘어갈 뻔했다.“난 아직 죽지 않았으니 아직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차례가 아니야. 여긴 원래 우리 며늘 아가의 집인데, 지금 어디로 내쫓으려는 게야?”“아버님, 화 좀 푸세요.”심예지는 심지어 침착하게 어르신에게 물을 따라주며 그를 위로했다. 그녀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차갑게 비웃었다.“그 사람은 아마 제가 이미 심씨 집안과 관계 끊은 것을 잊었을 거예요.”이 말은 마치 뺨처럼 이남수의 얼굴을 호되게 내리쳤고, 과거의 기억이 엄습했다.그렇다, 당시 심예지가 손목을 베고 나서 심씨 집안은 그녀를 데리고 떠나려고 했지만 그녀는 기어코 떠나려 하지 않았다.그래서 심씨 집안은 그녀로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