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어르신에게서 환희 아가씨의 행방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고, 도윤 역시 바다에서 바늘을 건지는 것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힘들게 단서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어르신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환희 아가씨? 난 네 할머니 밖에 모르는데. 네 이 녀석 지금 날 모함하지 마라. 만약 네 할머니가 이 말을 듣고, 내가 다른 아가씨의 이름을 불렀다고 오해한다면, 오늘 밤 관에서 기어나와 나랑 따질지도 모른다.”“할아버지, 농담 아니에요. 방금 확실히 지아의 손을 잡고 환희 아가씨라고 부르셨어요.”어르신은 콧방귀를 뀌었다.“넌 어째서 점점 둔해진 것이야? 치매 걸린 노인이 한 말을 믿다니, 그럼 내가 울트라맨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까지 믿을 거야?”어르신은 젊은 시절에 비해 성격이 많이 활발해져서 도윤은 견딜 수가 없었다. 말을 할 때 마치 개구쟁이와 같았다.그러나 어르신은 곧 도윤을 무시하고 지아의 손을 잡았다.“이전에 그렇게 너희들더러 돌아오라고 했는데. 그 A시가 뭐가 그리 좋다고. 이곳은 경치도 좋고 바다와 인접해 있어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몇 십년은 더 살 거 같구나. 심지어 너희들은 쌍둥이까지 낳을 수 있을 거야.”지아도 웃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네, 앞으로 이곳에 정착해 공부할 생각이에요.”“그래, 공부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사람은 늙을 때까지 배워야 해. 하지만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어쩜 이리 마른 것이냐. 도윤 그 녀석이 밥을 제대로 해주지 않은 것이냐? 도윤 할머니가 안다면 오늘 밤 바로 관에서 나올 것이다.”지아는 어르신의 말투에서 넘치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어르신은 정말 그녀를 친손녀처럼 대했던 것이다.“여기에서 지내는 동안 필요한 것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라. 네 시어머니와 거리 좀 두고. 그 아이는 여기에 문제가 좀 있어.”어르신은 지아의 손을 놓은 다음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그러나 나도 때로는 정상적이고 때로는 치매가 발작하니까, 이 집안에 정상인이라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낳을 의사가 없는 것을 보고, 어르신은 비록 마음이 급했지만, 이런 일은 당사가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 그도 재촉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려고 했고, 잠시 이 화제를 돌렸다.“그래, 낳고 싶지 않으면 그렇게 해라. 하지만 이제 곧 내 생일이 다가오고 있구나. 너희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나는 더 이상 생일을 보내지 않았어. 올해 너희들이 다 있으니까 제대로 모여보자꾸나. 이 일은 지아에게 맡기마.”지아는 이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어머님도 계신데,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아요. 게다가 저는 처음 이런 것을 하는 거라 잘 모르니 실수할지도 몰라요.”어르신의 생신잔치는 아무 레스토랑에 가서 간단하게 식사하는 게 아니었다. 손님을 초대하는 것부터 모든 디테일을 도맡아야 했는데, 아무튼 엄청 번거로운 일이었다.이씨 가문처럼 대단한 가문이 만약 조금의 실수라도 한다면,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될 것이다.도윤은 눈살을 찌푸렸다.“할아버지, 꼭 생일잔치를 차려야 하나요? 저희 가족들끼리 모여 식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어르신은 호되게 그에게 딱밤을 날렸다.“이 녀석이, 내가 평생 팔순 잔치를 몇 번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생일 지나면 내려가서 네 할머니를 찾아갈지도 모르는데, 이 늙은이 기분 좀 즐겁게 해줄 순 없는 것이냐?”“자, 이 일은 이렇게 정했으니까 와서 같이 아침 먹자꾸나.”어르신은 두 사람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억지로 그들을 끌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그 사이, 도윤은 낮은 소리로 설명했다.“할아버지는 이 기회를 빌어 사람들에게 네 신분을 공개하시려고 그러는 거야. 앞으로 네가 바로 우리 가문의 여주인이니까.”지아는 눈썹을 찌푸렸고, 속으로 가문의 여주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네 어머니도 건강하시니, 내 차례가 될 리가 없잖아.”지아가 이씨 집안과 관련된 일을 계속 거절하는 것을 보고 도윤은 참을
“너희 두 사람 사이가 참 좋구나. 잠깐 못 봤다고 서로가 보고 싶은 것이냐.”어르신이 갑자기 나타났다.지아는 얼굴을 붉히며 도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고, 마치 학창 시절 쑥스러움을 타던 소녀와 같았다.“자, 자, 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어째서 아직도 소녀처럼 부끄러움을 타는 것이냐. 나도 농담 그만 하마. 너희들이 이렇게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 너희 할머니도 안심할 수 있겠구나. 도윤아, 넌 와서 나와 바둑 몇 판 좀 두지.”“네, 할아버지.”두 사람은 그제야 헤어졌다. 도윤은 어르신의 뒤를 따라갔는데,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 어르신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너와 지아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별일 없어요.”“별일 없어? 너 지금 내 머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내 눈에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 내가 그렇게 많은 일을 언급했는데 지아는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거야? 왜 그동안 두 사람은 아이조차 없는 거냐고? 분명히 3년 전에 너를 위해 그렇게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왜 3년 후가 지난 지금, 오히려 원하지 않는 거야?”어르신은 비록 때로는 정신이 있고 때로는 많은 일을 잊어버렸지만, 여전히 예전처럼 예민했다.도윤은 더 이상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저희 사이에 확실히 문제가 좀 생겼지만 저는 이미 다 해결했어요.”어르신의 얼굴은 더 이상 지아를 볼 때처럼 부드럽지 않았고, 어두운 표정은 극히 엄숙했다.“너 스스로 말할 거야 아니면 내가 직접 조사할까? 넌 내가 키운 아이인데, 너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를 줄 알았어?”도윤은 사건의 경과를 다시 한번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아무튼 저희는 이미 화해했…….”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어르신은 그의 얼굴에 뺨을 내리쳤다.어르신은 비록 나이가 많지만, 힘은 여전했다. 그는 손에 힘을 주었고, 도윤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붓기 시작했다.“멍청한 자식!”어르신은 벌컥 화를 냈다
도윤도 그런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그의 마음속 깊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이 약은 효과가 매우 안정적이어서 지아에게 기억할 기회를 주지 않을 거예요.”“이 세상에 절대적인 일은 없어. 어쨌든 먼저 백채원의 일을 잘 처리해라. 이 시점에 나와서 두 사람 관계를 방해하지 못하게. 일이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제때에 그 문제들을 해결해, 아니면 될수록 빨리 지아를 임신시킬 수밖에 없구나.”도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지아는 연이어 두번이나 조산해서 몸을 다쳤으니 임신할 확률이 크지 않아요.”“몸이 좋지 않으면 조리 좀 해줘. 여자는 감성을 중시하잖아. 넌 지아가 과거에 네가 한 일들을 떠올리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도윤은 지금 지아가 기억을 잃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방비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지금 지아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망설임 없이 떠나겠죠.”“그래, 지아는 떠날 거야. 지아에게 있어 지윤은 네가 백채원과 바람을 피워 낳은 아이지. 넌 지아와 두 사람 만의 아이를 가질 필요가 있어. 여자는 아이가 생기면 너와 어떤 모순이 있더라도 아이를 봐서 너와 계속 함께 할 거야. 지아는 내가 인정한 손자며느리이자 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가장 귀여워했던 사람이니, 난 네가 지아를 잃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도윤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할아버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이 일은 내가 안배하마. 반드시 가능한 한 빨리 지아를 임신시켜야 해.”도윤은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고 눈빛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었다.지아를 가장 깊이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 두 번의 조산이었다. 지난번 조산을 한 것도 겨우 몇 달 전의 일이었으니, 이 짧은 시간 동안 도윤은 지아를 임신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르신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아이가 바로 두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였다.‘지아를 다시 임신시킨다고?’“할아버지, 저에게 질문이 하나 더 있어요.”“말해.”“정
지아가 말을 마치자, 유진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불만을 느끼며 심예지에게 애교를 부렸다.“예지 이모, 얘 좀 봐요! 어쩜 이렇게 교양이 없는 거죠? 저는 호의로 타일러 준 건데…….”심예지는 줄곧 가만히 앉아 그녀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유진이 자신을 끌어들일 줄은 몰랐다.“호의?” 그녀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손에 든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우아하게 입을 닦았다.“난 왜 네 호의를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입만 열면 남을 비꼬던데.”유진은 믿을 수 없단 듯이 심예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심예지와 함께 있어 주면서, 지금 심예지가 뜻밖에도 지아를 감쌀 줄은 몰랐다.“예지 이모, 저도 다 이모를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소지아 씨는 며느리로서 이모를 모시지 않고 매일 이렇게 늦게 일어나는데, 지금 그녀의 눈에 이모라는 시어머니가 전혀 없잖아요.”심예지는 눈을 드리우며 그녀를 보았다.“지아의 눈에 없다면, 내가 누구 눈에 있는 거지?”이 말이 나오자 유진은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거렸다.“예지 이모, 제가 도윤 오빠를…….”귓가에 가벼운 웃음이 들려왔고, 다음 순간, 심예지는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으로 유진의 턱을 들어 올렸다.“그럼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유진은 고개를 들어 심예지와 눈을 마주쳤는데, 그녀의 눈에서 살의를 느끼자 유진은 등골이 서늘해지더니 위험을 느꼈다.“저는…….”심예지는 또박또박 차갑게 덧붙였다.“난 남자에게 가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남자를 꼬시는 불여우가 제일 싫거든.”이 말은 마치 찬물처럼 유진의 온몸을 뿌렸고, 그녀는 소름이 돋았다. 유진은 그제야 심예지의 처지를 생각했는데, 지금 그녀는 심예지의 눈엣가시가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예지 이모,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저와 도윤 오빠는 죽마고우였으니 소지아 씨보다 훨씬 먼저 알았단 말이에요.”그녀는 설명하려 했다.심예지는 손을 떼더니 물티슈로 방금 유진의 얼굴에 닿은 곳을 닦았다.“만약
장난감?유진은 놀라서 멍해졌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환청을 했다고 느꼈다. 이것은 윗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란 말인가?“예지 이모, 제가 그렇게 싫으신 거예요? 하지만 이 2년 동안 분명히 절 귀여워해 주셨잖아요.”이 말을 할 때 유진은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행동은 심예지를 더욱 자극했다.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싸늘하게 말했다.“내 앞에서 불쌍한 척하지 마. 난 남자가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가장 미워하는 것이 바로 너처럼 툭하면 우는 여자야.”유진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그녀는 이 2년 동안 심예지를 모시면서, 비록 심예지는 성격이 냉담하여 말을 별로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지금 보면 그것은 전부 유진의 착각이었다.“예지 이모, 저를 이렇게 싫어하시는 이상, 앞으로 다신 방해하지 않을 게요. 약 드시는 거 꼭 잊지 마세요…….”유진은 일부러 떠나는 척하며 심예지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그러나 심예지는 그녀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자마자 임수경 그 천한 여자를 떠올렸다. 처음에 이남수는 사실 심예지에게 약간의 호의를 느꼈다. 그러나 임수경은 이런 수단으로 이남수의 마음속에 막 솟아오른 호의를 완전히 소멸했다.그리고 후에 임수경은 또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이며 심예지를 모함했고, 이남수는 심예지를 극도로 증오하게 되더니 심지어 죽어도 더는 보지 말자는 말을 하게 되었다.심예지가 가장 역겨워 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들 같은 사람이었다.“꺼지려면 빨리 꺼져, 여기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너 같은 여자, 한 번만 더 봐도 토가 나올 것 같군.”유진은 말할 것도 없고, 지아마저 놀라 멍해졌다. ‘우리 시어머니 정말 멋지셔!!’유진은 웃으며 들어와 울며 뛰쳐나갔고, 지아는 그녀가 떠나는 방향을 가리켰다.“그…… 아주머님은 유진 씨 체면을 봐주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일단 호칭부터 틀렸어. 넌 우리 집안의 며느리이니 앞으로 나를 어머님이라고 불러야 해. 그리고 그 아이처럼
지아는 심예지와 쇼핑을 할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시어머니와 함께 쇼핑을 했던 것이다.그리고 지아는 마침내 재벌들의 쇼핑 방식을 제대로 느낀 셈이었다. 분명히 집에 레벨을 뜯지 않은 옷이 가득 있었지만, 심예지는 손을 흔들더니 순식간에 또 수많은 옷을 샀고,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지아는 자신이 전에 돈을 이렇게 헤프게 썼는지 몰랐지만, 지금 이 가격들을 보니, 그녀는 마음이 좀 아팠다. 그러나 심예지는 오히려 침착했다.“마음대로 써. 지금 쓰지 않으면 앞으로 불여우에게 남겨주려고? 안심해, 이씨 집안이 가장 부족하지 않은 것이 바로 돈이야.”지아는 어색하게 웃었고, 심예지는 또 한마디 덧붙였다.“물론 우리 심씨 집안도 부족하지 않지.”지아는 심씨 집안에 대해 잘 몰랐지만, 당시 심예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이남수에게 시집가려 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이남수를 위해 그녀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죽마고우를 거절했고, 심씨 집안 어르신은 이 때문에 화가 단단히 났다고 한다.심씨 집안은 심예지가 시집가는 것을 막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집온 후, 그녀가 이씨 집안에서 잘 지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여러 번 그녀를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심예지는 그때 일편단심 이남수를 사랑했고, 그가 언젠간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며 끊임없이 극단적인 일을 저질렀다. 나중에는 심씨 집안사람들도 점차 인내심을 잃었다.그녀가 또 한번 손목을 베어 자살하자, 심씨 집안은 실망을 느끼며 심예지를 완전히 포기했고 그녀와 관계를 끊었다. 그래서 도윤도 심씨 가문의 사람들과 친하지 않았다.지아는 심예지가 심씨 집안이란 말을 중얼거릴 때, 쓸쓸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머니, 후회하신 적은 없어요?”“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난 한 남자를 위해 가족을 버리고 또 외국에서 홀몸으로 와 그에게 시집가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꿈과 같더라. 그렇게 20여 년이란 시간을 낭비했다니
지아의 눈에 들어선 건 낯선 얼굴이었다. 여자애의 이목구비는 정교했지만, 지아는 익숙한 느낌이 없었고, 그녀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마치 지아를 아는 것 같았다.“나 알아요?” 지아가 먼저 물었다.상대방의 표정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얼굴에는 웃음을 띠었다.“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죠.”그녀는 일어서서 우아하고 자신감 있게 지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난 소시월이라고 해요.”‘이 이름은…….’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소씨 가문의 사람이에요?”소시언이 그녀에게 준 명함은 아직 가방에 있었고, 뜻밖에도 짧은 시간 내에 또 다른 소씨 집안사람을 만나다니.“네, 우리 오빠가 전에 소지아 씨를 언급한 적이 있어요. 소지아 씨가 아니었으면 우린 영원히 언니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을 거예요. 줄곧 만나서 인사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여기서 만나다니. 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더 예쁘네요.”소시월은 살짝 웃었고, 웃으면 왼쪽 볼에 작은 보조개가 있어 무척 청순했다.지아는 도윤에게 물어봤지만, 도윤은 간단하게 그녀에게 사건의 경과를 알려주었다.“별일 아니니 너무 고마워할 필요가 없어요. 난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갈게요.”소시월은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고, 또 자신이 너무 당돌하다고 느껴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미안해요, 저기…… 연락처를 알려주면 안 될까요? 나도 마침 이 도시에 출장 와서 한동안 있다 떠날 계획이거든요. 떠나기 전에 식사 한 끼 정도 같이 하고 싶은데.”“마음만 받을게요. 사실 난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했어요. 그러니 밥 먹을 필요도 없을 것 같네요.”말이 끝나자 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점원을 따라 떠났다.그녀의 착각인지, 지아는 자꾸만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곧 모퉁이를 돌 때, 지아는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지아는 고개를 저었다.‘내가 착각이라도 했다봐.’그녀는 사이즈를 잰 다음 심예지를 찾아갔고, 그 주얼리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남다
소임호는 눈앞의 광기 어린 조경선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조경선, 그동안 정말 행복했니? 그렇게 애써 계획해서 네가 얻은 건 뭐지?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우리는 모두 패배자라고!” “틀렸어.”조경숙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그 당시의 나는 얼굴도 망가지고, 족보에서 제명되고, 가족들에게도 내쳐졌어.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데, 조경숙은 왜 모든 걸 가져야 해? 시골에서 돌아온 한낱 촌뜨기가 어떻게 나를 대신할 수 있었냐고!” “그래, 난 패배자야. 하지만 너희도 내 시체 위에 서서 잘난 척할 수는 없을걸? 우리 두 쪽 다 망가지는 게 내 승리니까!” 조경선이 고개를 숙여 소임호를 살펴보며 말했다.“당신 꼴을 좀 봐. 떠돌이 개랑 다를 게 뭐야? 참 안쓰럽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곧 소씨 가문은 완전히 망가질 거야. 나는 당신을, 그리고 소씨 가문을 반드시 파멸시키고 말 거야!” “너 정말 미쳤구나.”“그래, 난 미쳤어.”“하지만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젠 내가 겪었던 고통을 당신이 똑똑히 느껴야 할 차례야.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경숙은 이제 심세호의 여자가 됐어. 정말 가슴 아프지 않아?” “참, 그건 모르지? 소씨 가문의 노친네는 이미 죽었고, 당신 아들들도 곧 당신과 함께 무덤으로 갈 거야!” “조경선, 너는 진짜 인간 말종이야!” 소임호는 극도로 분노하며 몸부림쳤고, 쇠사슬은 그의 몸부림으로 인해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조경선은 소임호의 턱을 잡고 비웃으며 말했다. “왜, 불만이야? 그럼 나한테 빌어봐. 그러면 그 자식들한테 고통 없는 죽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꿈 깨.”소임호가 냉소하며 말했다.“죽어도 너한테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당신을 죽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참히 망가지는지 보여줄 수 없잖아. 당신 자식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고,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조경숙은 눈이 멀어 다른 남
여자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넌 먼저 돌아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당분간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어요.”시월은 갑자기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물었다.“맞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그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흥, 끝까지 고집불통인 쓰레기 같은 남자. 내가 겪은 교통을 천배, 만 배로 되돌려줄 거야!” 시월의 얼굴에 찰나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엄마,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동안 아빠가 가족도 잃게 하고, 집안도 망가지게 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 꿈 깨! 이건 그 사람이 나한테 진 빚이라고!” 여자가 소시월의 옷깃을 꽉 잡으며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데, 나는 네 어미야. 네가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나는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엄마, 알겠어요, 나는 엄마의 딸이니까 당연히 엄마 편이에요.” 소시월은 여자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나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여자의 정서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사실, 그녀의 얼굴도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집착이 너무도 강한 그녀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 고통을 평생 기억하면서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한테 천 배, 만 배로 돌려줄 거야!!” 여자는 평생을 복수 계획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하지만 소시월이 보기에, 복수를 이루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소씨 가문은 지금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소시월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소시월이 떠난 후, 여자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는데, 여자가 자신의 지문을 입력하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여자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갔고,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는 손과 발이 묶인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광기 어린 집착이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소임호
소지훈이 폭로한 충격적인 사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아에게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출생 비밀을 찾아 헤매던 지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스스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 소씨 가문 사람들의 고충에 공감했던 지아는 이제 그들이 자기 혈육임을 알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천천히 미끄러졌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들이...” 하지만 더욱 지아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예전에 마주했던 그 시신이 자기 친언니였다는 사실이었다. ‘시영 언니는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 ‘심지어 나는 그걸 전혀 몰랐고, 언니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했어...’ 지아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지아야!”도윤은 지아를 안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침대에 누운 채 찡그린 표정을 한 지아를 보며 도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지아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어. 그런데 간절히 바랐던 가족마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다니.’ 무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아의 곁을 지켰다.도윤은 무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냥 과로한 상태에서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뿐이거든.” 한편, 소씨 가문의 황당한 해프닝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으며, 소영수의 장례식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들의 싸움의 장이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소지훈이 이긴 듯 보였으나, 사실 그로 인해 소씨 가문은 체면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시월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해가 뜨기도 전에 황급히 차를 몰아 오래된 별장으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까악까악’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섬뜩하게 들렸다. 장미 덩굴은 낡은 담벼락 위로 기어오르며, 삭막하고 부패한 세상에 한 줄기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햇살이 어둠을 찢으며 온 세상의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