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유진은 놀라서 멍해졌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환청을 했다고 느꼈다. 이것은 윗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란 말인가?“예지 이모, 제가 그렇게 싫으신 거예요? 하지만 이 2년 동안 분명히 절 귀여워해 주셨잖아요.”이 말을 할 때 유진은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행동은 심예지를 더욱 자극했다.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싸늘하게 말했다.“내 앞에서 불쌍한 척하지 마. 난 남자가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가장 미워하는 것이 바로 너처럼 툭하면 우는 여자야.”유진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그녀는 이 2년 동안 심예지를 모시면서, 비록 심예지는 성격이 냉담하여 말을 별로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지금 보면 그것은 전부 유진의 착각이었다.“예지 이모, 저를 이렇게 싫어하시는 이상, 앞으로 다신 방해하지 않을 게요. 약 드시는 거 꼭 잊지 마세요…….”유진은 일부러 떠나는 척하며 심예지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그러나 심예지는 그녀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자마자 임수경 그 천한 여자를 떠올렸다. 처음에 이남수는 사실 심예지에게 약간의 호의를 느꼈다. 그러나 임수경은 이런 수단으로 이남수의 마음속에 막 솟아오른 호의를 완전히 소멸했다.그리고 후에 임수경은 또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이며 심예지를 모함했고, 이남수는 심예지를 극도로 증오하게 되더니 심지어 죽어도 더는 보지 말자는 말을 하게 되었다.심예지가 가장 역겨워 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들 같은 사람이었다.“꺼지려면 빨리 꺼져, 여기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너 같은 여자, 한 번만 더 봐도 토가 나올 것 같군.”유진은 말할 것도 없고, 지아마저 놀라 멍해졌다. ‘우리 시어머니 정말 멋지셔!!’유진은 웃으며 들어와 울며 뛰쳐나갔고, 지아는 그녀가 떠나는 방향을 가리켰다.“그…… 아주머님은 유진 씨 체면을 봐주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일단 호칭부터 틀렸어. 넌 우리 집안의 며느리이니 앞으로 나를 어머님이라고 불러야 해. 그리고 그 아이처럼
지아는 심예지와 쇼핑을 할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시어머니와 함께 쇼핑을 했던 것이다.그리고 지아는 마침내 재벌들의 쇼핑 방식을 제대로 느낀 셈이었다. 분명히 집에 레벨을 뜯지 않은 옷이 가득 있었지만, 심예지는 손을 흔들더니 순식간에 또 수많은 옷을 샀고,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지아는 자신이 전에 돈을 이렇게 헤프게 썼는지 몰랐지만, 지금 이 가격들을 보니, 그녀는 마음이 좀 아팠다. 그러나 심예지는 오히려 침착했다.“마음대로 써. 지금 쓰지 않으면 앞으로 불여우에게 남겨주려고? 안심해, 이씨 집안이 가장 부족하지 않은 것이 바로 돈이야.”지아는 어색하게 웃었고, 심예지는 또 한마디 덧붙였다.“물론 우리 심씨 집안도 부족하지 않지.”지아는 심씨 집안에 대해 잘 몰랐지만, 당시 심예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이남수에게 시집가려 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이남수를 위해 그녀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죽마고우를 거절했고, 심씨 집안 어르신은 이 때문에 화가 단단히 났다고 한다.심씨 집안은 심예지가 시집가는 것을 막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집온 후, 그녀가 이씨 집안에서 잘 지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여러 번 그녀를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심예지는 그때 일편단심 이남수를 사랑했고, 그가 언젠간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며 끊임없이 극단적인 일을 저질렀다. 나중에는 심씨 집안사람들도 점차 인내심을 잃었다.그녀가 또 한번 손목을 베어 자살하자, 심씨 집안은 실망을 느끼며 심예지를 완전히 포기했고 그녀와 관계를 끊었다. 그래서 도윤도 심씨 가문의 사람들과 친하지 않았다.지아는 심예지가 심씨 집안이란 말을 중얼거릴 때, 쓸쓸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머니, 후회하신 적은 없어요?”“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난 한 남자를 위해 가족을 버리고 또 외국에서 홀몸으로 와 그에게 시집가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꿈과 같더라. 그렇게 20여 년이란 시간을 낭비했다니
지아의 눈에 들어선 건 낯선 얼굴이었다. 여자애의 이목구비는 정교했지만, 지아는 익숙한 느낌이 없었고, 그녀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마치 지아를 아는 것 같았다.“나 알아요?” 지아가 먼저 물었다.상대방의 표정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얼굴에는 웃음을 띠었다.“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죠.”그녀는 일어서서 우아하고 자신감 있게 지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난 소시월이라고 해요.”‘이 이름은…….’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소씨 가문의 사람이에요?”소시언이 그녀에게 준 명함은 아직 가방에 있었고, 뜻밖에도 짧은 시간 내에 또 다른 소씨 집안사람을 만나다니.“네, 우리 오빠가 전에 소지아 씨를 언급한 적이 있어요. 소지아 씨가 아니었으면 우린 영원히 언니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을 거예요. 줄곧 만나서 인사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여기서 만나다니. 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더 예쁘네요.”소시월은 살짝 웃었고, 웃으면 왼쪽 볼에 작은 보조개가 있어 무척 청순했다.지아는 도윤에게 물어봤지만, 도윤은 간단하게 그녀에게 사건의 경과를 알려주었다.“별일 아니니 너무 고마워할 필요가 없어요. 난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갈게요.”소시월은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고, 또 자신이 너무 당돌하다고 느껴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미안해요, 저기…… 연락처를 알려주면 안 될까요? 나도 마침 이 도시에 출장 와서 한동안 있다 떠날 계획이거든요. 떠나기 전에 식사 한 끼 정도 같이 하고 싶은데.”“마음만 받을게요. 사실 난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했어요. 그러니 밥 먹을 필요도 없을 것 같네요.”말이 끝나자 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점원을 따라 떠났다.그녀의 착각인지, 지아는 자꾸만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곧 모퉁이를 돌 때, 지아는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지아는 고개를 저었다.‘내가 착각이라도 했다봐.’그녀는 사이즈를 잰 다음 심예지를 찾아갔고, 그 주얼리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남다
지아는 분명히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심예지의 아무도 상대하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고 모든 호기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좀 지나갈게요.”여자는 오히려 다정하게 지아의 손을 잡았다.“네가 바로 지아구나, 전에 국내의 기사를 보았는데, 도윤과 너무 잘 어울리더라. 너희들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니 정말 선남선녀가 다름없어.”지아의 눈빛이 약간의 의혹을 띠고 있는 것을 보고 여자는 자신을 소개했다.“너무 반가워서 내 소개하는 것까지 잊어버렸네. 너 아직 나 모르는구나? 난 도윤의 이모인데, 날 수경 이모라고 부르면 돼.”이렇게 말하자, 지아는 즉시 여자가 누군인지 알게 되었다. 임수경, 이남수의 모든 사랑을 받은 여자이자, 남의 남자를 꼬신 불여우로서 이씨 집안에게 불행을 안겨준 사람이었다. 지아는 오늘 실물을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지아는 그제야 왜 심예지가 이런 태도인지를 깨달았다. 임수경이 일부러 그녀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호감을 얻고 싶을 뿐만 아니라 심예지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었던 것이다.그녀는 유진보다 훨씬 대단했다. 임수경은 얼굴에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만약 그녀가 과거에 한 일들을 몰랐다면 아마 쉽게 그녀에게 현혹될 것이다.그러나 지아는 단지 담담하게 웃을 뿐이었다.“아주머니, 좀 비켜주세요. 내가 지금 목걸이 좀 써 보고 싶거든요.”지아는 전혀 임수경의 말을 받지 않았고, 예의를 차렸지만 또 오히려 그녀를 멀리하며 임수경에게 발휘될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심예지는 임수경을 보자마자 소란을 피우던 성질을 고치고 지금은 아예 그녀를 공기처럼 무시했다.“자, 이 사파이어 목걸이가 네 피부와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심예지는 직접 지아에게 목걸이를 차 주었다.처음 만났을 때, 지아는 심예지가 겨울 밤의 밝은 달이라고 생각했고, 싸늘하지만 거리감이 있었다. 그러나 함께 지내보니 그녀는 자신의 시어머니가 사실 아주 솔직한 사람이란 것을 발견했다.심예지는 자신의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지아는 완쾌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심예지가 또다시 자극을 받을까 봐 잔뜩 긴장한 채 세 사람의 표정을 주시했다.이남수는 그제야 심예지도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눈빛이 그녀에게 잠시 떨어지더니 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좀 복잡해서 말로 형용하기가 어려웠다.그러나 심예지는 그를 보지 않았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정말 재수 없어.”그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아, 모든 사람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심예지는 즉시 점원을 불렀다.“내가 본 것만 포장해 줘.”점원은 좀 난처했다.“저…… 귀걸이는 사모님이 미리 예약하신 거라, 현재 저희 가게에는 남은 게 없습니다. 방금 그 목걸이를 맞춰 드리기 위해 제가 가져온 것입니다.”사모님. 정말 아이러니한 호칭이었다.임수경은 재빨리 말했다.“괜찮아요, 언니, 어차피 우리는 다 한 가족이니까, 그 귀걸이가 마음 들면 그냥 가져가요. 남수 오빠가 계산하면 되니까, 우리가 도윤을 위한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참, 오빠, 이 아가씨는 도윤의 아내인데, 아직 본 적 없지?”아무리 봐도 이해심이 많은 여자인 것 같았다. 지아는 그제야 심예지가 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심예지는 존귀한 재벌 집 아가씨였기에, 그녀는 남의 눈치를 살피며 아첨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가족들의 소중한 공주님이었다.설령 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심예지는 당당하게 고백을 할 것이고, 임수경처럼 눈치를 살피지 않을 것이다.이남수와 심예지는 모두 재벌 집안의 도련님과 아가씨였지만, 남자라면 당연히 자신에게 의지할 수 있는 부드러운 여자에게 마음이 갈 것이다.이남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지? 내 카드로 계산해.”줄곧 입을 열지 않던 심예지는 냉담하게 두 사람을 쳐다보더니 지아에게 말했다.“지아야, 이 귀걸이 마음에 들어?”지아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디자인과 색깔이 영 보통이네요. 자세히 보면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말하면서 지아는 얼른 목걸이를 벗어 원래의 곳에 놓았
도윤은 정말 이남수와 많이 닮았다. 특히 지금 얼굴에 별다른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기분을 파악할 수 없게 했다.그리고 멀리 떨어져서야 지아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괜찮으세요?”“나한테 무슨 일이 있겠어? 그 여자는 어쩜 예전과 변한 게 없을까. 정말 수준 떨어진다니깐. 아무튼 그런 말을 한 이유도 다 나를 화나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해.”무언가를 떠올린 듯 심예지는 가볍게 웃었다.“사실 그 여자는 결코 똑똑하지 않아. 단지 내가 그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용했을 뿐이지. 사랑할수록 더욱 쉽게 화를 내니까. 그 여자가 일부러 그런 거란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난 매번 걸려들어 한 번 또 한 번 오해를 받았어.”“오해인 이상, 제대로 설명하지 그러셨어요?”심예지는 지아를 끌고 옥상 레스토랑에 가서 앉았다. 찬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수저로 커피를 저었고 천천히 지아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만약 한 사람이 너를 사랑한다면, 네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사람은 널 믿을 거야.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면, 넌 존재 자체가 틀린 거지. 하필 그때의 난 고집이 셌고, 심지어 그이가 언젠간 그 여자의 정체를 똑똑히 알아본 다음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어. 난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손목을 베고 심지어 수면제를 먹고 바다에 뛰어들기까지 했어.”“모두들 내가 자신의 죽음으로 그이를 핍박하여 돌아오게 하려는 줄 알았지. 하지만 오직 나 자신만이 내가 자극을 받아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이가 준 상처는 내 마음속의 흉터로 되어 날 미치게 만들었지. 난 점점 더 화를 참지 못하고 점점 더 초조해져 결국 남들이 말한 그 미친 여자가 되었어.”심예지는 설탕을 조금도 넣지 않는 블랙 커피를 좋아했다. 말을 마친 후, 그녀는 몇 모금 마시며 감정을 가라앉혔다.“그런데 나야말로 그이의 진정한 아내이고 그가 당당하게 맞이한 여자란 말이야! 그때 아무도 나와 공감하지 않
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이렇게 되면 어머님에게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요?”“공평? 너 정말 단순한 아이구나. 어떤 사람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온갖 궂은일과 힘든 일을 하고 있지. 그 여자가 우뚝 솟은 그 고층건물을 올려다볼 때, 옥상에서 응애응애 울부짖는 아이가 바로 이 건물의 상속자이니 이 세상에 절대적인 공평이 어디 있겠어?”지아가 침묵하자 심예지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얘야, 넌 아직 어려서 많은 일들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아직 모를 거야. 내가 분명히 사실을 알면서 왜 그 여자를 내버려 뒀는지 아니?”“아저씨가 무서워서요?”“그가 무서워? 흥, 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할 때에만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신경을 쓰겠지. 그러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때, 그이는 지나가던 개보다도 못해. 내가 사실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그 여자의 욕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야.”심예지는 사랑에 희망을 품는 대신 무척 싸늘했다.“그 여자는 진정한 사모님의 자리를 원하는 거예요?”“똑똑하군. 당시 이남수는 그 여자에게 미쳐 어르신을 무척 화나게 했지. 그이는 기어코 나를 집안에서 쫓아내고 임수경을 데리고 들어오려 했어. 임수경도 자신이 아들을 낳은 데다 또 어르신이 정말 이남수와 관계를 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나 결국 어르신은 진짜로 이남수를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이의 모든 재산과 인맥을 끊었고 심지어 도윤이 자신의 유일한 상속인이라고 발표까지 했어.”지아는 그 친절한 노인을 떠올렸고, 그가 뜻밖에도 이렇게 박력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럼 나중에는요?”“이남수는 더 이상 가문에 남을 면목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임수경을 데리고 나가 다시 사업을 시작했지. 말하자면 참 웃겨. 그이가 사업을 시작할 때 들인 돈도 다 내가 낸 거야. 당시 난 그이를 붙잡기 위해 그 회사의 51% 의 주식을 차지했어. 다만 결국 난 그이를 조금이라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이는 오히려 이것을 무기로 삼아 나에게 상
심예지는 지아를 향해 바라보았다.“왜 그래? 어디 불편해?”지아는 손으로 위를 꾹 눌렀고 안색은 많이 괴로웠다.“위가 갑자기 좀 아프네요. 별일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찬 거 마시지 마. 이따 내가 가정 의사 불러서 검사 좀 해달라고 할게.”지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 국내에서 검사받은 지 얼마 안 됐거든요.”“이런저런 검사를 받았다고 해서 위까지 검사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만약 많이 아프면 전문적인 위 검사받아 봐.”심예지가 건의했지만 지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냥 위장병일 거예요. 커피가 너무 차가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죠. 아무튼 집에 가서 위장약 좀 먹으면 돼요. 이제 할아버님의 생일잔치를 준비해야 하니까 그때 끝나면 다시 디테일한 검사받을게요.”“그래.”심예지는 손을 흔들더니 경호원을 불러 위장약을 사 오라고 시킨 다음 또 지아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바꾸어 주었다. 관심을 받는 느낌은 그런대로 괜찮았기에 지아는 차츰 심예지를 천천히 받아들였다.두 사람은 점심을 먹으면서 생일잔치의 디테일을 상의했고, 지아는 머뭇거리며 물었다.“어머님, 이번 연회에 그분 초대하실 건가요?”심예지는 단호하게 말했다.“기억해, 앞으로 이씨 가문의 상속자는 단 한 사람 뿐이고, 그 사람이 바로 네 남편 이도윤이지.”“알았어요.”“이따 이 집사에게 초대할 사람들 리스트를 잘 정리해서 너에게 보내라고 할 테니 요 며칠 별일 없으면 일단 재벌 집 사모님들 이름부터 외워. 앞으로 넌 도윤과 함께 가문을 이끌고 나갈 거야.”지아는 거절하려고 했다. 의학을 배우는 것과 이씨 가문을 다스리는 것을 비교하면, 그녀는 차라리 공부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르신과 심예지는 모두 지아에게 가문을 관리하라는 뜻을 보였기에 그녀는 연회가 끝난 후 다시 똑똑히 설명하려 했다.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남수가 임수경의 허리를 안으며 들어왔다.지아는 사실 이남수와 같은 남자가 매우 대단하다고 느꼈다. 수십 년이 지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