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비록 많은 음식을 시켰지만, 사실 다 먹지 않았고 그저 가볍게 맛보았다. 그러나 워낙 작은 위 때문에 지아도 많이 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배가 불렀다.심예지는 어이가 없었다.“못 먹겠으면 먹지 마. 한 끼 낭비한다고 이씨 집안이 파산하는 거 아니니까. 설령 파산한다 하더라도 우리와 상관없어.”지아는 멍해졌다. 심예지는 그녀의 상상과 매우 달랐다.“죄송해요, 저는…….” 지아는 입을 오므리며 사실을 말하려 했지만 심예지는 그녀가 다 하지 못한 말을 이어서 말했다.“내가 너를 괴롭힐 것이라 생각하고, 저녁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까 봐 미리 밖에서 먹은 거잖아.”“네, 죄송해요.”“사과할 필요 없어, 난 확실히 널 괴롭히려고 했으니까.”지아는 어이가 없었다.‘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 많이 다르잖아.’이 말에 지아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사실 나도 너 때문에 입맛 없을까 봐 미리 먹었어. 만약 배고프지 않으면 나와 함께 걸으면서 소화 좀 하지 그래.”심예지가 먼저 요청을 했기에 지아도 거절할 수 없어 얼른 입을 닦고 일어섰다.“네.”수많은 음식을 차린 큰 식탁에는 도윤 혼자만 남았다. 그는 심예지가 단독으로 지아와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것을 보고 세 살 때의 트라우마가 떠올라 즉시 지아를 감쌌다.“왜, 내가 네 와이프 잡아먹을까 봐 걱정이야?”“어머니가 지아를 위층에서 밀어낼까 봐요.’“엄마한테 이렇게 말하는 아들이 어딨어? 이럴 줄 알았으면 널 다시 내 배 안으로 집어넣을 걸 그랬어.”“저도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요.”어릴 때부터 심예지가 도윤을 죽이려 했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예전에 확실히 잘못을 저질렀지, 인정해. 그때 엄마가 아팠으니까. 지금 난 이미 다 나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야.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너도 동행해도 돼.”지아는 이렇게 두 모자의 버림을 받았고 다시 앉아서 과일을 조금 먹었다.이때 고용인은 공손하게 그녀의 곁으로 다
도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심예지를 바라보았다.“저희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소식이 참 빠르시군요.”그와 눈을 마주치려면 심예지는 고개를 살짝 들어야 했다. 이 말을 듣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감개무량했다.“내 기억 속에서 너는 줄곧 내 뒤를 따르는 꼬마였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네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어.”그녀는 도윤의 얼굴을 쓰다듬으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나 닿기도 전에 동작을 멈췄다.도윤에 대한 심예지의 감정은 복잡했다. 처음에 그녀는 이 아이가 태어나길 바랐고, 도윤을 이용해 그 남자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매정한 이남수는 그들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심예지는 차츰 도윤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녀는 단 하루도 어머니 노릇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도윤이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조차 낯설다고 생각했다.심예지는 겸연쩍게 손을 거두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너와 예린이는 틀림없이 나를 원망하고 있을 거야. 난 너희들을 사랑한 적이 없으니까.”“지금 이런 말씀을 하시면 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아버지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그렇게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식을 낳아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되었죠.”도윤은 말을 할 때 심예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만약 이전의 심예지였다면 진작에 미쳐버렸겠지만, 오늘 그녀는 무척 평온했다.심예지는 완쾌한 게 분명했다. 그녀의 화를 돋구게 하는 사람을 언급해도 심예지는 오히려 평온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깨닫게 되는 법이지. 내가 전반생을 이런 사람 때문에 헛되이 보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치가 없더라고. 이 2년 동안 나는 묵묵히 너를 주시하고 있었어. 그래서 예린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거야. 그 당시 내가 예린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예린은 분명히 나란 어머니를 몹시 원망했을 거야. 그래서 분명히 살아있는데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 거겠지.”도윤은 자기가 생전에 심예지의 참회를 들을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번에 저를 부르신 이유가 유진을 만나게 하기 위해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인정이 없는 것 같지만, 세 살짜리 아이를 위층에서 던진 모진 어머니로서는 너무 정상이었다.심예지는 자신의 자식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 남의 자식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보면 심예지와 이남수는 사실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이기적인 데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을 철저히 무시하는.심예지는 귓가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겼다.“그 아이는 2년 전부터 틈틈이 날 찾아왔어. 때로는 나랑 같이 산책을 했고, 때로는 내 다리까지 주물러줬고. 난 그 아이가 심심해서 그러는 줄 알고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어.”도윤은 어이가 없었다.“심심하신 사람은 어머니인 것 같은데.”심예지는 한번도 현모양처였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악역에 더 근접했다. 전에 이남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심예지는 그 불여우를 많이 괴롭혔다. 물론 마지막에 이남수는 갈수록 그녀와 멀어졌고, 두 사람은 이혼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심예지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전에 한 일을 회상했다. 그녀는 예전의 자신이 가소롭게만 여겨졌다. 한 남자를 위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니.“그래, 나도 확실히 심심했지. 하지만 누가 스스로 찾아온 장난감을 거절할 수 있겠어?” 심예지는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밝은 달이 구름과 안개를 뚫은 것처럼 즉시 하늘을 밝게 비추었다.도윤은 멍해졌다. 그동안 그는 종래로 심예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한때 그가 가장 바랐던 것이 바로 어머니가 자신에게 웃어주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심예지는 항상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거나 증오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확실히 납득하신 것 같네요.”“도윤아, 이 엄마를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심예지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어릴 적 그녀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자, 심예지는 뜻밖에도 부드럽고 많이 상냥해졌다.그러나 도윤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 심예지가 자기에게 한 짓을 잊지 않았다.심예지는 한숨을 쉬었다.“그래, 네가 이
도윤의 눈빛은 점점 예리해졌다.“또 무엇을 알고 계신 거죠?”“네 반응을 보니 내가 맞힌 것 같구나. 다른 뜻은 없어. 이번에 만나자는 것도 단순히 너희들이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나 조언 하나 해주지. 우리 집안의 사람들은 많은 결점이 있어. 한 사람을 좋아한다면 평생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양날의 칼이라 할 수 있지.”심예지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나와 너의 아버지는 모두 너에게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 도윤아, 나는 네가 우리처럼 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사랑은 결코 일방적인 일이 아니야. 엄마가 가장 후회되는 것이 바로 그때 네 아버지에게 한 그 일들 때문에 너와 예린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는 것이야.”도윤에게 있어 심예지의 말은 환상과 같았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저는 지아를 잘 챙겨줄 거예요.”잠시 망설이다 도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장미 부인을 아신다면, 저 대신 한 가지 일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어요? 지아의 신분에 관해서요.”“어?” 심예지는 깜짝 놀랐다.“지아는 소계훈의 딸이 아니에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장미 부인뿐이고요. 국내에 있을 때 누군가가 지아를 수차례 죽이려고 했는데, 저는 그 사람이 지아의 친부와 관련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어요.”“내가 대신 알아봐줄 테니까 이제 지아를 좀 보여줄래?” 심예지는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아는 씻고 나오자마자 침대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았다. 분명히 앉아만 있을 뿐인데, 지아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만 제자리에 몸이 굳어져버리고 말았다.“사모님.”심예지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이리 와.”지아는 천천히 심예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이미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녀는 심예지가 자기에게 돈을 주며 도윤의 곁에서 떠나라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도윤 정도의 남자라면, 그의 어머니도 돈을 아주 두툼하게 챙겨
심예지를 만나기 전, 지아는 그녀가 아주 악독하고 미친 여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직접 만나보니, 지아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예지는 단지 평생 사랑을 받지 못한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전혀요, 사랑에 너무 집착하셔서 그래요.”지아는 비록 과거를 잊었지만 심예지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마치 그녀도 전에 이런 경험을 한 것처럼.“똑같지 뭐. 과거의 나는 정말 엄마 노릇을 잘 하지 못했어. 지금 이 나이가 되니 오히려 많은 일을 깨닫게 되었지. 넌 나보다 행복해. 도윤의 모든 사랑을 받았으니까. 그래서 너야말로 이 팔찌에 어울리는 사람이야.”지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래서 저희 두 사람을 반대하시지 않는 거예요?”“왜 반대해야 하지? 너희들은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하지만 나도 너에게 조언 하나 해주고 싶어. 도윤 이 아이는 비록 훌륭하지만, 이런 가정에서 자랐으니 성격에 심각한 결함이 있을 거야. 일반인들은 알아차릴 수 없지만 가까운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지.”“그 아이는 사람을 사랑할 줄 몰라. 하지만 넌 다르지. 네가 사랑으로 가득 찬 가정에서 자랐다고 들었다. 그래서 도윤이 너에게 끌릴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도 정상이지. 이씨 집안의 남자는 한 사람을 사랑하면 평생 변하지 않을 거야. 이것은 행복이자 동시에 재난이기도 해.”“얘야, 너희들은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갈 길이 아주 멀어. 난 앞으로 도윤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하든 네가 도윤의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거든. 우리의 불행이 너희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지아는 마음이 복잡하여 심예지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와 도윤은 이미 부부이고, 도윤은 또 그녀를 그렇게 사랑하니 지아도 마땅히 도윤을 아주 사랑해야 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자꾸만 누군가 그녀에게 도윤을 멀리하라고 훈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선뜻 대답하지 않자, 심예지는 지아의 손을 덥석 잡고 물었다.“너를 지아라고 불러도 되겠니?”“편하신 대로 부르시면 돼요.”“나
시어머니와의 만남은 의외로 순조로웠다. 심예지가 떠난 다음, 지아는 줄곧 그 아름다운 팔찌를 바라보았는데, 수많은 세월을 거쳐 이 팔찌는 더욱 아름다워졌다. 그러나 지아는 팔찌를 차지 않고 그저 자세히 살펴만 보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 팔찌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마음에 들어?” 도윤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자 지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너무 진지하게 보고 있어서 도윤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응, 아주 예뻐.”도윤은 팔찌를 들고 부드럽게 말했다.“내가 끼워줄게.”그러나 지아는 오히려 자기도 모르게 피했다.“나중에. 이렇게 진귀한 물건은 일반적으로 중요한 장소에 참석할 때에만 껴야 하지. 나도 평소에 주얼리를 차는 것이 그리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하거든.”도윤은 멈칫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좋아, 네가 편한 대로 하자.”지아는 비록 매일 그와 같이 지냈지만, 여전히 그에게 호감만 있을 뿐 그를 사랑하진 않았다.도윤은 지아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그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도윤은 드라이를 꺼내 지아의 젖은 머리를 꼼꼼히 말려주었다. 지아는 그의 손을 잡았다. 도윤의 손은 아주 예뻤다.“이런 손으로 내 머리를 말려주는 건 너무 낭비 아니야?”“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도윤은 지아의 손을 들어 가볍게 키스했다.“지아야, 사랑해.”그는 항상 그녀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했었다. 도윤의 눈과 마음속에는 오직 그녀 한 사람밖에 없었다.지아는 손으로 도윤의 매끄러운 볼을 어루만졌다.“도윤아, 예전에 우리는 어떤 사이였어?”“넌 나를 엄청 사랑했고, 나도 너를 많이 사랑했지.”지아의 손끝은 도윤의 눈썹과 눈을 스쳤다. 그녀는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 “널 보면 난 아주 익숙한 느낌이 들거든. 그러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사랑했는데, 무엇때문에 난 지금 너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
아침, 지아는 바깥의 새 울음소리에 깨어났다.따뜻한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지아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바깥의 테라스 돌기둥에 알록달록한 새 몇 마리가 앉아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새는 노래를 하고 있었고 어떤 새는 깃털을 정리하고 있었다. 먼 곳의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은 온 세상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지아는 눈을 비비며 잠시 멍을 때리고 나서야 자신이 이미 다른 나라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일년 내내 따듯하고 습윤했기 때문에 주변에 식물이 무성했다. A도시처럼 건조하고 춥지 않았다.지아는 이곳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씻으려 했다.매번 이 호화로운 별장을 바라볼 때마다, 지아는 자꾸만 자신이 성 안의 공주라는 착각을 하곤 했다. 이씨 가문은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재벌 집안이었다.그녀가 방을 나서자, 한 줄로 늘어선 고용인들이 웃으며 인사했다.“작은 사모님, 좋은 아침입니다.”지아는 우렁찬 소리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유리를 닦고 있는 고용인들, 바닥을 닦고 있는 고용인들, 꽃가지를 다듬는 고용인들까지 모두 그녀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전의 별장에는 장씨 아주머니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많은 고용인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하자 지아는 매우 어색했다.그녀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좋은 아침.” 이때, 다른 고용인들과 옷차림이 다른 한 고용인이 다가왔다.“작은 사모님, 아침식사가 이미 준비되었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도윤은?”“어르신을 뵈러 가셨습니다. 사모님은 저를 이 집사라고 부르면 됩니다.”이 집사는 자기소개를 했다. 말하는 태도나 행동은 무척 여유로웠다.지아는 사람들에게서 어르신이 전에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그도 A시를 떠났는데, 그 후 치매에 걸려서 치료받느라 요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다고 한다. 기왕 온 이상, 지아는 어르신을 뵈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
지아는 얼른 설명했다.“어르신, 정신 차리세요. 저는 지아라고 합니다. 환희 아가씨가 아니에요.”어르신은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손에 힘을 꽉 주었다.“그럴 리가 없어, 너는 분명히 환희잖아. 날 속일 생각하지 마. 지아는 또 누구야.”지아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 집안의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어쩜 할아버지든 손자든 머리가 멀쩡한 사람이 없는 거야.’지아가 어쩔 바를 몰라 할 때, 도윤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는 앞으로 다가가서 어르신의 손을 떼었다.“할아버지,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 사람을 잘못 보셨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 환희가 어떻게 네 아내야? 그리고 이 자식아, 지금 날 뭐라고 불렀어? 할아버지라니? 난 아들도 없는데 손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도윤은 그런 노인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어릴 때부터 어르신은 비록 도윤을 아주 엄격하게 대했지만 또 그에게 모든 사랑을 쏟았다.할아버지는 도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예전에 회사에서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던 사람이 지금은 자신의 가족도 못 알아보는 처지가 되었다. 도윤은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어르신은 또 지아의 손을 잡으려 했다.“환희야, 내가 드디어 너를 찾았구나.”지아는 놀라서 도윤의 뒤로 숨었다. 도윤은 갑자기 무엇을 의식한 듯 할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그녀를 아는 거예요? 그녀는 누구죠?”“그녀는.”어르신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하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아 무척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할아버님, 괜찮으세요?” 지아는 잔뜩 긴장하며 말했다.“의사를 불러와야 하는 거 아니야? 할아버님이 많이 괴로워하시는 것 같던데.”“지아야.”어르신의 눈빛은 전처럼 맑아졌다.“지아구나, 정말 오랜만이야.”그는 지아와 도윤의 손을 놓아준 다음 아주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너희들 금슬이 좋은 모습을 보면 네 할머니도 하늘에서 안심할 수 있을 거야.”“할아버지, 다 생각나셨군요
소임호는 눈앞의 광기 어린 조경선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조경선, 그동안 정말 행복했니? 그렇게 애써 계획해서 네가 얻은 건 뭐지?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든 우리는 모두 패배자라고!” “틀렸어.”조경숙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그 당시의 나는 얼굴도 망가지고, 족보에서 제명되고, 가족들에게도 내쳐졌어.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데, 조경숙은 왜 모든 걸 가져야 해? 시골에서 돌아온 한낱 촌뜨기가 어떻게 나를 대신할 수 있었냐고!” “그래, 난 패배자야. 하지만 너희도 내 시체 위에 서서 잘난 척할 수는 없을걸? 우리 두 쪽 다 망가지는 게 내 승리니까!” 조경선이 고개를 숙여 소임호를 살펴보며 말했다.“당신 꼴을 좀 봐. 떠돌이 개랑 다를 게 뭐야? 참 안쓰럽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야.”“곧 소씨 가문은 완전히 망가질 거야. 나는 당신을, 그리고 소씨 가문을 반드시 파멸시키고 말 거야!” “너 정말 미쳤구나.”“그래, 난 미쳤어.”“하지만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젠 내가 겪었던 고통을 당신이 똑똑히 느껴야 할 차례야.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경숙은 이제 심세호의 여자가 됐어. 정말 가슴 아프지 않아?” “참, 그건 모르지? 소씨 가문의 노친네는 이미 죽었고, 당신 아들들도 곧 당신과 함께 무덤으로 갈 거야!” “조경선, 너는 진짜 인간 말종이야!” 소임호는 극도로 분노하며 몸부림쳤고, 쇠사슬은 그의 몸부림으로 인해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조경선은 소임호의 턱을 잡고 비웃으며 말했다. “왜, 불만이야? 그럼 나한테 빌어봐. 그러면 그 자식들한테 고통 없는 죽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꿈 깨.”소임호가 냉소하며 말했다.“죽어도 너한테 무릎 꿇을 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 당신을 죽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당신이 죽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참히 망가지는지 보여줄 수 없잖아. 당신 자식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거고,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조경숙은 눈이 멀어 다른 남
여자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넌 먼저 돌아가.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당분간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어요.”시월은 갑자기 한 가지 일이 떠올라 물었다.“맞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그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흥, 끝까지 고집불통인 쓰레기 같은 남자. 내가 겪은 교통을 천배, 만 배로 되돌려줄 거야!” 시월의 얼굴에 찰나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엄마,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동안 아빠가 가족도 잃게 하고, 집안도 망가지게 했잖아요.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 꿈 깨! 이건 그 사람이 나한테 진 빚이라고!” 여자가 소시월의 옷깃을 꽉 잡으며 으르렁거렸다.“경고하는데, 나는 네 어미야. 네가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나는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엄마, 알겠어요, 나는 엄마의 딸이니까 당연히 엄마 편이에요.” 소시월은 여자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나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여자의 정서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사실, 그녀의 얼굴도 치료를 통해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집착이 너무도 강한 그녀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 고통을 평생 기억하면서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한테 천 배, 만 배로 돌려줄 거야!!” 여자는 평생을 복수 계획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하지만 소시월이 보기에, 복수를 이루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소씨 가문은 지금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소시월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소시월이 떠난 후, 여자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는데, 여자가 자신의 지문을 입력하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여자는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들어갔고,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는 손과 발이 묶인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그를 향해 다가가며 광기 어린 집착이 서린 눈빛으로 말했다.“소임호
소지훈이 폭로한 충격적인 사실은 소씨 가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아에게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출생 비밀을 찾아 헤매던 지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스스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전에 소씨 가문 사람들의 고충에 공감했던 지아는 이제 그들이 자기 혈육임을 알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지아는 도윤의 품에서 천천히 미끄러졌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들이...” 하지만 더욱 지아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예전에 마주했던 그 시신이 자기 친언니였다는 사실이었다. ‘시영 언니는 너무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 ‘심지어 나는 그걸 전혀 몰랐고, 언니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했어...’ 지아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지아야!”도윤은 지아를 안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침대에 누운 채 찡그린 표정을 한 지아를 보며 도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지아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어. 그런데 간절히 바랐던 가족마저 이런 모습으로 드러나다니.’ 무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아의 곁을 지켰다.도윤은 무무를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엄마는 괜찮을 거야. 그냥 과로한 상태에서 큰 충격을 받아 기절한 것뿐이거든.” 한편, 소씨 가문의 황당한 해프닝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으며, 소영수의 장례식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들의 싸움의 장이 되고 말았다. 겉으로는 소지훈이 이긴 듯 보였으나, 사실 그로 인해 소씨 가문은 체면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시월은 마음이 조급해졌고, 해가 뜨기도 전에 황급히 차를 몰아 오래된 별장으로 향했다. 건물 꼭대기에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까악까악’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섬뜩하게 들렸다. 장미 덩굴은 낡은 담벼락 위로 기어오르며, 삭막하고 부패한 세상에 한 줄기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햇살이 어둠을 찢으며 온 세상의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