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단지 기억을 잃었을 뿐, 바보가 아니었다. 진환은 미리 이 복도를 깨끗이 정리했으니 어떻게 이유 없이 기자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그리고 메이크업이 정교하고 비싼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또 어떻게 공교롭게 치마를 밟고 넘어졌을까?그녀는 일부러 기자를 불러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한 게 분명했다.천박한 수단이었지만 효과가 있었다.다만 지아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도윤은 비록 집안이 괜찮지만, 그저 회사에서 연봉을 꽤 많이 받는 직원일뿐, 그 여자는 이런 수단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그리고 도윤은 또 어떻게 그 여자를 대처할까?’지아는 자신이 생각만큼 괴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심지어 도윤의 반응을 지켜보려고 침착하게 기다렸다.여린 여자가 넘어지면, 남자는 말한 것도 없고, 아마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그녀를 안아줄 것이다.도윤은 전화 중이었는데, 이때 그의 늘씬한 그림자는 불빛에 길게 드리워졌고, 제자리에 훤칠하게 서 있었다.처음부터 끝까지 도윤은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는데, 여자가 품에 안겨 들려오려는 순간, 도윤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도윤은 이미 자신의 본능을 훌륭하게 통제할 수 있었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넘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혹여 누군가 그 자리에서 자살한다 하더라도 그는 그 사람의 피가 자신의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담담하게 뒤로 물러설 것이다.지아는 여자가 넘어지기 전의 표정을 정확히 포착했다.충격, 당황,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눈빛.‘지금 뒤로 후퇴한 거야?’여자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산했고, 기자들도 이 순간 그녀의 계획대로 셔터를 눌렀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오로지 그녀가 낭패하게 쓰러지는 사진만 찍혔다.이 긴 복도에는 카펫을 깔지 않아 여자는 그대로 땅에 넘어졌다.지아는 멀리서도 여자가 쿵 하고 넘어진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엄청 아프겠다.’여자는 눈물을 머금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도윤 오빠…….”분명히 남자의 이름을 불렀
유진 앞으로 내민 손은 매우 하얗지만 굳은살이 가득했고 평소에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사람들은 손이 여자의 두 번째 얼굴이라고 한다. 그 손을 보자, 유진은 도윤이 지아에게 잘해주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굳은살이 이렇게 많이 박혔으니 평소에 집안일 많이 했겠지?’유진은 자신의 손을 내밀었고, 어릴 때부터 응석받이로 자란 그녀는 매주 피부관리를 꾸준히 받아서 손은 아주 보기 좋았다.뼈마디가 분명하고 가늘고 길쭉하며 손바닥은 하얗고 부드러워 손톱까지 깔끔했다. 네일 아트는 심지어 빛을 반짝였는데, 마치 쇼윈도에 진열된 사치품과 같았다.이렇게 비교하니, 유진은 마음속으로 우월감을 느꼈다.‘이번은 내가 이겼어.’“고마워요.” 그녀는 지아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고, 두 손이 닿자, 그녀는 오히려 자신과 지아의 차이를 보여 주려고 했다.유진은 백년의 역사를 가진 귀족 가문의 아가씨였기에 집안까지 파산한 지아는 자신과 비교할 가치가 없었다.손이 닿은 순간, 유진은 딱딱한 무언가를 느꼈다.그녀는 그제야 지아가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를 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반지는 화려하고 과장하지 않지만 디자인이 독특해서 더욱 특별해 보였다.시선을 위로 옮기자, 유진은 그제야 지아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전에 지아는 기자들에게 정면으로 찍힌 적이 없었고, 후에 도윤은 또 그녀에 관한 모든 기사를 내렸기에 유진은 지아의 사진조차 찾아내지 못했다.서미나는 그때 돌아와서 지아에 관한 얘기를 했지만, 대부분 지아에 대한 욕설이었다. 그녀가 못생겼다니, 유진의 손가락보다도 못하다니.그래서 오늘은 유진과 지아의 첫 만남이었다.지아는 이목구비가 정교해서 화장을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예뻤다. 지금 화장을 하고 나니, 지아는 사람들과 거리감이 생길 정도로 아름다웠다.외모에 줄곧 자신이 넘치던 유진도 지금 좌절감을 느꼈다.지아는 감정이 평온했고 날뛰거나 기세등등하지 않았다. 특히 눈 밑의 반짝이는 은색 빛깔은 그녀를 선녀처럼 같이 돋보이게
분위기는 어색해졌고, 유진은 숨을 크게 쉬며 기선제압을 하려 했다.“그때 오빤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가 있죠? 두 사람은 언제 결혼했어요? 왜 나한테 말하지도 않고.”이 말이 나오자, 지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도윤을 바라보았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도윤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나와 너와 친구도 가족도 아니니, 결혼 소식을 굳이 알려줄 필요가 있었을까? 그리고 내가 너와 결혼하겠다고 말한 일, 혹시 어렸을 때 너희들에게 억지로 끌려가 소꿉놀이를 하다, 널 거절하면 우리 엄마한테 이르겠다고 협박한 것을 가리키는 건가?”간단한 말 한마디에, 유진은 온갖 체면을 잃었다. 그녀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도윤이 뜻밖에도 이렇게 매정하게 변할 줄은 몰랐다.서미나가 도윤도 이렇게 그녀를 대했다는 것을 생각하자, 유진은 곧 마음이 풀렸다.보아하니 도윤은 누구에게나 이런 태도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동안 지아의 정체를 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정말 미안해요. 난 도윤 오빠가 우리와 아주 즐겁게 놀았다고 생각했는데. 난 아주 어릴 때부터 줄곧 도윤 오빠를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오빠에게 이렇게 많은 불쾌한 추억을 가져다줄 줄은 정말 몰랐어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미안한 표정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언니, 정말 미안해요. 내가 도윤 오빠를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질투하는 건 아니죠? 도윤 오빠는 줄곧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지 않았기에 난 오빠가 독신인 줄 알았어요.”지아는 드라마에서나 이런 불여우를 보았는데, 현실에 이런 사람이 없을 줄 알았다. ‘어떻게 이런 역겨운 사람이 있을 수가 있지?’그러나 현실은 잔혹했고, 지아는 오늘 처음으로 불여우를 만났는데, 똥을 씹은 것보다 더 징그러웠다.‘자신이 징그럽게 생겼으면 그만이지, 굳이 나대다니.’지아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도윤의 손을 잡고 그의 팔을 흔들며 유진의 목소리를 흉내 냈고, 간드러지게 물었다.“도윤 오빠, 유
도윤은 말을 마치자마자 분노를 느낀 유진을 남겨둔 채 지아를 끌고 훌쩍 떠났다.이 남자는 그녀가 어렸을 때보다 더 인정사정을 몰랐고, 그야말로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다.두 사람이 손을 잡고 떠나는 장면을 보면서 유진은 이가 깨질 것만 같았다.이때 그녀는 차갑게 웃더니, 마치 눈에 어둡고 푸른빛을 뿜어내며 차가운 혀를 내밀고 있는 어두운 곳에 숨은 뱀과 같았다.지아는 고개를 돌려 도윤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을 알아차린 도윤은 눈을 드리웠다.“왜? 궁금한 거 있으면 그냥 물어봐.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확실히 궁금한 게 있는데, 너 그때 정말 유진 씨의 가족들을 죽일 생각을 한 거야?”“응.”도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어머니는 정신적인 질병이 있어 어릴 때 날 거의 돌본 적이 없었어. 그때 막내 이모는 가족이라며 나를 데려갔고, 바로 그때 유진과 알게 되었어. 그녀는 이웃집의 아이였지만 자꾸 나와 함께 놀자고 졸랐어. 그때 난 소꿉놀이를 싫어했는데, 유진은 내가 좋아하는 게임 하겠다고 소리쳤고.”지아는 호기심이 생겼다.“넌 무엇을 좋아했는데?”“사격, 복싱, 펜싱, 승마, 스키, 잠수…….”“그 후에는?”“유진은 사격장에서 총도 쏘지 못하고 심지어 모기에 물렸고, 나와 격투할 때 한방에 쓰러지더니 코피가 났어. 그리고 말을 타다 직접 말에게 차였고…….”“잠깐.” 지아는 손을 내밀었다. “그 여자는 확실히 얄밉지만, 코피를 흘리게 한 것은 일부러 그런 거지?”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도윤은 더욱 머리가 아팠다.“아니, 그건 그 여자가 봐주지 말라고 소리친 거야. 게다가 유진도 연습한 적이 있었고, 봐주는 것은 그녀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아무렇게 주먹을 휘둘렀어. 그런데 그런 간단한 공격조차 피하지 않고 심지어 얼굴로 받을 줄은 정말 몰랐어. 그때 그녀의 코피는 내 온몸에 튀어서 얼마나 짜증이 났던지.”도윤의 불평을 듣자, 지아는 배를 안고 웃었다.
이 통로에는 지아와 도윤 두 사람밖에 없었다. 지아는 이미 그 막 뒤의 소란스러운 음악소리와 사회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곳은 무슨 행사 현장이었다.그녀는 도윤이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온 이상, 왜 아직도 이렇게 신비롭게 구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도윤을 바라보면서 지아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대체 무슨 행사인데. 미리 나에게 말해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거 아니야.”위쪽에는 등불이 있었는데, 남자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을 비추자, 그의 모든 날카로움과 싸늘함을 지워버렸다.“무슨 행사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우리 함께 참여했다는 거야.”밖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아래에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는데, 지아는 이곳이 영화제의 시상식이란 것을 판단할 수 있었다.이는 지아로 하여금 도윤의 신분에 대해 더욱 궁금해졌다. ‘도윤은 어느 큰 프로젝트의 공사장 책임자가 아니었어?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지?’깨어난 요 며칠, 지아는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도윤의 신분을 알 수 있었지만 누가 자신의 남편을 제1재벌로 생각하겠는가?이때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저희는 오늘 특별히 YH그룹 대표님과 그의 부인을 현장에 초대했는데, 모두들 큰 박수로 두 분을 환영하시길 바랍니다.”지아는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자신의 남편이 뜻밖에도 대표님이라니?비록 도윤은 확실히 매우 바빠 보였지만, 매일 집에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하는 대표님이 또 어디 있을까?지아는 팔꿈치로 도윤을 쿡쿡 찔렀다.“뭐야, 왜 나에게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어!”“네가 이씨 집안의 사모님이란 것을 알리고 싶었는데,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지아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그럼 이렇게 한 이유가…….”도윤은 지아의 손을 빈틈이 없을 때까지 조금씩 꽉 잡았고,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난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내 아내란 것을 알려주고 싶어.”막이 올라가자, 모든 라이트와 카메라는 지아와 도윤의
지아는 머리가 좀 어지러웠고 심장도 아주 빨리 뛰고 있었다.마치 이 장면을 오랫동안 기대했던 것 같다.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도윤을 바라보았는데, 만인의 주목을 받은 남자는 지금 반짝반짝 빛이 났다.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애정이 흘러넘쳤다.“과거의 저는 제 아내를 너무 사랑했고, 심지어 제 아내를 숨겨 그녀의 모든 빛을 가리고 싶을 정도로 집착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영광을 다시 아내에게 돌려주고 싶어요.”도윤은 최선을 다해 지아를 숨겼고, 오직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그녀를 상처투성이로 만든 사람은 자신이었다.그래서 도윤은 다른 방식으로 지아를 지키고 싶었다. 전의 잘못을 메우고 싶어서 그런 것이든 그녀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든 상관없었다.만약 이것이 지아가 원하는 것이라면, 도윤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녀를 만족시키고 싶었다. 그는 더 이상 지아를 숨기고 싶지 않았고, 당당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지아가 바로 자신의 아내라고 말하고 싶었다.마이크는 도윤의 목소리를 곳곳으로 전달했고, 지아는 심장이 거의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녀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도윤은 부드럽게 지아의 손을 잡았다.“오늘 저의 부부가 초대를 받고 영화계의 선배님들에게 상을 수여할 수 있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도윤은 마치 시상하러 오기 위한 게 아니라 애정을 과시하러 나온 것 같았다.그의 고백을 듣고, 모든 카메라는 그들 두 사람을 겨누었고, 일시에 영화 주인공의 인기를 덮어버렸다.유진도 오늘 초대를 받은 게스트 중 하나였다. 그녀는 힘들게 도윤이 오늘 이 자리에 나올 것이란 것을 알아냈고, 수많은 시간을 들여 그와 만날 기회를 만들었는데, 자다 깨어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샴페인색 드레스를 입은 지아는 도윤의 곁에 서 있었는데, 드레스로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그려냈다. 도윤의 넥타이도 마침 지아의 드레스 색깔과 맞추었고, 두 사람은 고귀하면서도 잘 어울려 그야말로 한 쌍의 선남선녀였다.유진은 화
시상식을 마친 도윤은 지아를 데리고 두 사람의 전용 좌석에 앉았다. 불빛이 어두워지자, 지아는 그제야 그의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어? 나 방금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었단 말이야. 무대에 서 있을 때 완전 바보 같았다고.”지아의 원망을 듣고 도윤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서프라이즈 해주고 싶어서.”“뭐야, 난 정말 놀라 죽는 줄 알았다고. 지금 손에 땀까지 쥐었으니 화장실에 다녀올게.”“좋아.”지아가 일어나자마자, 도윤은 눈짓을 했고, 진환은 즉시 사람을 데리고 지아를 따라갔는데, 적절한 거리에서 그녀를 보호했다.도윤은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어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눈빛은 차가웠다.주머니 속의 핸드폰은 끊임없이 울렸고, 몇 번 끊었지만 상대방은 여전히 끈질기게 전화를 했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지아는 시상식이 끝난 후, 여전히 꿈을 꾸는 것만 같았는데, 심정은 아주 복잡했다.한 편으로는 마침내 소원을 이뤄서 만족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달갑지가 않았다.그녀도 자신에게 왜 이런 감정이 있는지 몰랐다.멍을 때리는 사이, 지아는 부주의로 한 사람과 부딪쳤고,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미안해요.”남자는 고급스럽지만 일부러 매칭이 되지 않는 정장을 입고 있었고, 위에는 장미 도안이 있었다. 그는 브릿지 염색을 한 은색의 짧은 머리에, 왼쪽 귀에는 장미 모양의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있었다.남자는 아주 과감하게 차려입었고, 얼굴은 여자보다 더 정교했다. 그는 좁고 긴 눈을 드리우며 대부분의 동공을 가렸고, 유난히 차갑고 싸늘해 보였다.‘착각인가? 이 사람 낯이 좀 익은 것 같아.’남자는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아인 것을 보고 즉시 멈추었다.“소지아 씨?”지아는 그를 쳐다보았다.“나 알아요?”‘설마 과거에 알고 지낸 사람이기 때문에 방금 익숙하다고 느낀 건가?’“우리는 만난 적이 없지만, 지아 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어요. 내 여동생의
유진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지아는 천천히 휴지로 손을 닦은 다음 유유히 핸드크림을 발랐다.“유진 씨, 난 당신이 내 앞에서 무엇을 증명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 도윤과 소꿉놀이를 한 거? 아니면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그 집안? 사랑이란 게임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진 거죠. 게다가 도윤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 분식 파는 할머니를 향한 관심조차 당신보다 많을 거예요.”지아는 핸드크림을 내려놓았다.“만약 내가 당신이라면, 창피해서 숨어 다녔을 텐데, 어떻게 오히려 사람 앞에 나타나서 날뛸 수 있는 거죠?”“소지아, 그럼 우리 두고 보자. 누가 진 사람인지. 우리 곧 다시 만날 거야.”유진은 원래 모진 말을 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지아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지아가 지금 자랑스럽다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그녀에 대한 도윤의 사랑 때문이었다.도윤이 없으면 지아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도윤을 가진 지금, 지아는 전 세계를 가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지아는 유진의 협박에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만약 도윤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지아는 다른 여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남자가 만약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울고 떼를 써도 소용없을 것이다.그래서 다른 여자는 중요하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의 진심이었다.지아는 하이힐을 신은 채 도도하게 떠났고, 유진이 뒤에서 무슨 망언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그러나 한 모퉁이에서 귀를 찌르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이 드레스가 얼마나 비싼지 알아? 내가 이 옷을 빌리려고 어떻게 브랜드를 설득했는데! 이런 고급스러운 옷감은 물을 묻힐 수 없다는 거 아예 모르는 거야? 너 같은 거지가 배상할 돈이나 있는 거냐고?”멀리서 블루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치맛자락을 들고 한 청소부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그 남자는 키가 컸지만 지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죄송합니다.”“죄송, 죄송 그놈의 죄송! 죄송하다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