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통로에는 지아와 도윤 두 사람밖에 없었다. 지아는 이미 그 막 뒤의 소란스러운 음악소리와 사회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곳은 무슨 행사 현장이었다.그녀는 도윤이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온 이상, 왜 아직도 이렇게 신비롭게 구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도윤을 바라보면서 지아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대체 무슨 행사인데. 미리 나에게 말해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거 아니야.”위쪽에는 등불이 있었는데, 남자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을 비추자, 그의 모든 날카로움과 싸늘함을 지워버렸다.“무슨 행사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우리 함께 참여했다는 거야.”밖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아래에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는데, 지아는 이곳이 영화제의 시상식이란 것을 판단할 수 있었다.이는 지아로 하여금 도윤의 신분에 대해 더욱 궁금해졌다. ‘도윤은 어느 큰 프로젝트의 공사장 책임자가 아니었어?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지?’깨어난 요 며칠, 지아는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도윤의 신분을 알 수 있었지만 누가 자신의 남편을 제1재벌로 생각하겠는가?이때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저희는 오늘 특별히 YH그룹 대표님과 그의 부인을 현장에 초대했는데, 모두들 큰 박수로 두 분을 환영하시길 바랍니다.”지아는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자신의 남편이 뜻밖에도 대표님이라니?비록 도윤은 확실히 매우 바빠 보였지만, 매일 집에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하는 대표님이 또 어디 있을까?지아는 팔꿈치로 도윤을 쿡쿡 찔렀다.“뭐야, 왜 나에게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어!”“네가 이씨 집안의 사모님이란 것을 알리고 싶었는데,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지아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그럼 이렇게 한 이유가…….”도윤은 지아의 손을 빈틈이 없을 때까지 조금씩 꽉 잡았고,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난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내 아내란 것을 알려주고 싶어.”막이 올라가자, 모든 라이트와 카메라는 지아와 도윤의
지아는 머리가 좀 어지러웠고 심장도 아주 빨리 뛰고 있었다.마치 이 장면을 오랫동안 기대했던 것 같다.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도윤을 바라보았는데, 만인의 주목을 받은 남자는 지금 반짝반짝 빛이 났다.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애정이 흘러넘쳤다.“과거의 저는 제 아내를 너무 사랑했고, 심지어 제 아내를 숨겨 그녀의 모든 빛을 가리고 싶을 정도로 집착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영광을 다시 아내에게 돌려주고 싶어요.”도윤은 최선을 다해 지아를 숨겼고, 오직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그녀를 상처투성이로 만든 사람은 자신이었다.그래서 도윤은 다른 방식으로 지아를 지키고 싶었다. 전의 잘못을 메우고 싶어서 그런 것이든 그녀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든 상관없었다.만약 이것이 지아가 원하는 것이라면, 도윤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녀를 만족시키고 싶었다. 그는 더 이상 지아를 숨기고 싶지 않았고, 당당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지아가 바로 자신의 아내라고 말하고 싶었다.마이크는 도윤의 목소리를 곳곳으로 전달했고, 지아는 심장이 거의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녀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도윤은 부드럽게 지아의 손을 잡았다.“오늘 저의 부부가 초대를 받고 영화계의 선배님들에게 상을 수여할 수 있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도윤은 마치 시상하러 오기 위한 게 아니라 애정을 과시하러 나온 것 같았다.그의 고백을 듣고, 모든 카메라는 그들 두 사람을 겨누었고, 일시에 영화 주인공의 인기를 덮어버렸다.유진도 오늘 초대를 받은 게스트 중 하나였다. 그녀는 힘들게 도윤이 오늘 이 자리에 나올 것이란 것을 알아냈고, 수많은 시간을 들여 그와 만날 기회를 만들었는데, 자다 깨어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샴페인색 드레스를 입은 지아는 도윤의 곁에 서 있었는데, 드레스로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그려냈다. 도윤의 넥타이도 마침 지아의 드레스 색깔과 맞추었고, 두 사람은 고귀하면서도 잘 어울려 그야말로 한 쌍의 선남선녀였다.유진은 화
시상식을 마친 도윤은 지아를 데리고 두 사람의 전용 좌석에 앉았다. 불빛이 어두워지자, 지아는 그제야 그의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어? 나 방금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었단 말이야. 무대에 서 있을 때 완전 바보 같았다고.”지아의 원망을 듣고 도윤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서프라이즈 해주고 싶어서.”“뭐야, 난 정말 놀라 죽는 줄 알았다고. 지금 손에 땀까지 쥐었으니 화장실에 다녀올게.”“좋아.”지아가 일어나자마자, 도윤은 눈짓을 했고, 진환은 즉시 사람을 데리고 지아를 따라갔는데, 적절한 거리에서 그녀를 보호했다.도윤은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어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눈빛은 차가웠다.주머니 속의 핸드폰은 끊임없이 울렸고, 몇 번 끊었지만 상대방은 여전히 끈질기게 전화를 했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지아는 시상식이 끝난 후, 여전히 꿈을 꾸는 것만 같았는데, 심정은 아주 복잡했다.한 편으로는 마침내 소원을 이뤄서 만족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달갑지가 않았다.그녀도 자신에게 왜 이런 감정이 있는지 몰랐다.멍을 때리는 사이, 지아는 부주의로 한 사람과 부딪쳤고,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미안해요.”남자는 고급스럽지만 일부러 매칭이 되지 않는 정장을 입고 있었고, 위에는 장미 도안이 있었다. 그는 브릿지 염색을 한 은색의 짧은 머리에, 왼쪽 귀에는 장미 모양의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있었다.남자는 아주 과감하게 차려입었고, 얼굴은 여자보다 더 정교했다. 그는 좁고 긴 눈을 드리우며 대부분의 동공을 가렸고, 유난히 차갑고 싸늘해 보였다.‘착각인가? 이 사람 낯이 좀 익은 것 같아.’남자는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아인 것을 보고 즉시 멈추었다.“소지아 씨?”지아는 그를 쳐다보았다.“나 알아요?”‘설마 과거에 알고 지낸 사람이기 때문에 방금 익숙하다고 느낀 건가?’“우리는 만난 적이 없지만, 지아 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어요. 내 여동생의
유진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지아는 천천히 휴지로 손을 닦은 다음 유유히 핸드크림을 발랐다.“유진 씨, 난 당신이 내 앞에서 무엇을 증명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 도윤과 소꿉놀이를 한 거? 아니면 당신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그 집안? 사랑이란 게임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진 거죠. 게다가 도윤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 분식 파는 할머니를 향한 관심조차 당신보다 많을 거예요.”지아는 핸드크림을 내려놓았다.“만약 내가 당신이라면, 창피해서 숨어 다녔을 텐데, 어떻게 오히려 사람 앞에 나타나서 날뛸 수 있는 거죠?”“소지아, 그럼 우리 두고 보자. 누가 진 사람인지. 우리 곧 다시 만날 거야.”유진은 원래 모진 말을 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지아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지아가 지금 자랑스럽다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그녀에 대한 도윤의 사랑 때문이었다.도윤이 없으면 지아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도윤을 가진 지금, 지아는 전 세계를 가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지아는 유진의 협박에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만약 도윤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지아는 다른 여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남자가 만약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울고 떼를 써도 소용없을 것이다.그래서 다른 여자는 중요하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의 진심이었다.지아는 하이힐을 신은 채 도도하게 떠났고, 유진이 뒤에서 무슨 망언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그러나 한 모퉁이에서 귀를 찌르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이 드레스가 얼마나 비싼지 알아? 내가 이 옷을 빌리려고 어떻게 브랜드를 설득했는데! 이런 고급스러운 옷감은 물을 묻힐 수 없다는 거 아예 모르는 거야? 너 같은 거지가 배상할 돈이나 있는 거냐고?”멀리서 블루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치맛자락을 들고 한 청소부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그 남자는 키가 컸지만 지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죄송합니다.”“죄송, 죄송 그놈의 죄송! 죄송하다
모두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이 대표님의 아내가 쓸데없는 곳에 선심을 베풀 줄 몰랐는데. 청소부가 취약계층이라고 잘못을 저질렀으면 무작정 봐줘야 하는 건가? 그럼 만약 내가 롤스로이스와 부딪쳤는데, 돈이 없다고 하면 배상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야?”“이 대표님의 아내라면 돈도 많을 텐데, 고작 1억 가지고 남과 다툼을 벌이다니. 그냥 시원하게 대신 돈을 내주면 될걸 하필 이곳에서 그 배우를 난처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그러게, 전에 무대에 올라갔을 때, 대표님과 엄청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정말 별거 아니네. 우리와 같은 연예인들은 뭐 쉽게 돈을 버는 줄 아나 봐. 이런 드레스는 원래 빌리기 어려운 데다, 지금 물기가 묻었으니 바로 폐기된 거와 다름없잖아. 배상을 하는 것은 작은 문제지만, 드레스를 더럽히면 바로 브랜드의 블랙리스트에 들어갈 텐데. 이건 입만 놀리면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야.”“1억은 무슨, 2억을 달라고 해도 시원찮은데, 주아담은 그래도 양심이 있는 편이야.”모두들의 말을 듣고, 청소부는 다급하게 말했다.“아가씨, 저 상관하지 마세요. 제가 배상하면 되니까요.”주아담도 더욱 거만해졌다.“들었니? 아까 한 말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착한 척 그만 좀 해. 네가 대신 배상을 하든지 아니면 입 다물고 꺼지든지 해.”지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만 원 정도의 세탁비는 대신 낼 수 있거든요.”“세상에, 이 대표님 혹시 파산이라도 했어? 어쩜 아내가 이렇게 쩨쩨하지? 1억조차 내려 하지 않다니.”“대표님은 자신의 아내가 이렇게 쩨쩨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정말 이 여자 어디에 반했는지 모르겠어.”지아는 천천히 말했다.“모두들 조급해하지 마요. 만약 이 드레스가 진품이라면 1억은커녕, 100억이라도 난 낼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분명 짝퉁이에요. 남이 평생 고생해도 1억을 벌지 못할 텐데, 왜 짝퉁을 배상해야 하는 거죠?”“짝퉁? 에이 설마, 이 옷감 보니까 진품인 것 같은데.”“그저 아주 잘 만들었다
도윤은 재빨리 지아의 곁으로 걸어가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았다.“괜찮아?”“응, 지금 청소부가 이 여자의 괴롭힘을 받고 있어. 좀 도와주려고.”지아는 설명을 마치고 주아담을 바라보았다.“난 이 드레스를 구매한 영수증과 지금 우리 집 옷장에 걸려있는 사진을 보여줄 수 있는데. 주아담 씨는 무슨 증거를 제공할 수 있죠?”주아담은 지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계속 잡아뗐다.“이건 내 매니저가 대신 빌린 거라 나한테 그런 건 없어요.”“그래요, 그럼 지금 매니저 불러와서 한 번 물어봐요. 도대체 어느 작업실에서 빌려왔는지. 그래야 주아담 씨도 억울하게 당하지 않죠.”“아 참, 내 매, 매니저는 방금 일이 있다고 먼저 갔어요…….”“그래서 지금 당신은 근거도 없이 남을 모함하고, 또 배상 금액을 마음대로 정하고 있으니, 남의 돈을 사취하고 있는 거 맞죠?”주아담은 도둑이 제 발 버렸다.“사취라뇨? 함부로 말하지 마요. 됐어요, 사모님은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어서 내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이 일은 그냥 없던 걸로 할게요.”주아담은 감히 도윤과 맞서지 못하고 핑계를 대며 의기소침하게 떠났다.‘더 이상 일이 커지면 안 돼. 만약 사람들이 내가 입은 옷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끝까지 따진다면 난 정말 끝장이야.’지아는 한쪽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앞으로 조심해요. 다시 이런 일 만나면 절대로 쉽게 타협하지 말고요.”“네, 사모님. 이렇게 도와주셔서 정말 너무 고맙습니다.”청소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 다음 절뚝거리며 떠났다.지아는 그의 뒷모습을 살펴보며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이 세상엔 힘이 없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내가 일시적으로 도울 수 있다고 해도 평생 도울 순 없을 텐데.’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도윤과 떠날 준비를 했지만, 도윤의 눈빛이 여전히 그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도윤아, 그 사람 너무 불쌍해 보이지?”도윤은 표정이 복잡했고, 작은 소리로 응답했다.“이제 돌아가자.”“응.”예
주아담은 연예계에 발을 들이기 전, 학교에서 이름을 날렸던 일진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주변을 괴롭히는 것에 익숙했으나, 이처럼 심한 모욕은 처음이었다.비록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주아담은 과감한 성격으로 돈 많은 남자를 많이 유혹했다.돈을 위해서라면, 주아담은 모든 일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고,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그러나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녀의 눈동자는 점점 커지더니 주아담은 겨우 소리를 내뱉었다.“이, 이유가 뭐야?”남자는 처음에 그렇게 약해 보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돌변할 수가?지금 남자는 차가운 살의를 뿜어내고 있었고, 더 이상 전의 그 평범한 청소부가 아니었다.“주아담 씨, 그냥 자신이 주제 넘게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단 것만 알면 돼요. 누군가가 당신의 목숨을 샀거든요.”주아담은 종래로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었기에 이 순간에야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대체 누가 법까지 무시하고 대담하게 길거리에서 사람을 죽이려는 거지?’“살, 살려줘요. 돈 줄게요. 내가 그동안 모은 거 다 줄 테니까 제발 살려줘요.”하지만 남자는 차갑게 웃으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고, 주아담은 숨이 막혀 얼굴이 빨개졌다.그녀는 끊임없이 몸을 떨며 발버둥 치고 있었고, 그제야 모자 아래에 숨겨진 남자의 눈을 보았다.그것은 보통 눈빛이 아니었고, 남자는 킬러였다.그렇게 질식으로 죽기직전, 주아담은 남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들었다.“다음 생에는 더 이상 남의 물건 빼앗지 마요. 남에게 빚진 물건은 언젠간 갚아야 하니까.”여자의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자, 남자는 주아담을 가차없이 땅에 내팽개쳤다.나뭇가지의 매화가 한창 아름답게 피었는데, 남자는 그중 하나를 꺾어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여자는 눈을 감지 않았고 땅바닥에 뻣뻣하게 누워 일그러진 표정으로 상공을 응시했다.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에 하얀 눈이 흩날리고 있었지만 여자는 더 이상 깨어날 수 없었다.“누구지?
진환은 마음이 좀 다급했는데, 이 일은 심각하지도 또 생각처럼 간단하지도 않았다.프로 킬러들은 일반적으로 사전답사를 해서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또 어떻게 시체를 처리하는지를 꼼꼼히 계획했으니 절대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며 또한 지문을 남기지도 않을 것이다.진봉은 성질이 꼼꼼하지 않은 바람에 오히려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대표님, 그 킬러는 장갑을 끼고 사람을 죽였기에 지문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감시 카메라가 없었고 진봉이 또 그렇게 공교롭게 사건 현장에 나타났으니 지금 인터넷에는 안 좋은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도윤은 결혼반지를 어루만졌다. 안절부절못한 진환에 비해 그는 지금 아주 냉정했다.“무슨 소문이지?”“오늘 연회에 있던 일이 누군가에 의해 인터넷에 올아와, 사모님이 권세를 믿고 사람을 함부로 괴롭힌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지금 주아담의 사망 소식까지 퍼져, 비록 그 여자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죽기 전에 이렇게 소란을 일으킨 데다 진봉이 사건 현장에 나타났으니 일이 점점 복잡해졌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저 주아담의 죽음이 우리와 관계가 있다고 의심을 했지만, 소문이 퍼진 이후로는 아예 우리가 한 짓이라고 확정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즉시 처리할까요?”도윤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가서 통지해, 잠시 이 루머를 처리하지 말라고.”“왜요? 이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이렇게 복잡해졌으니, 오래 끌수록 회사의 명성과 주가에 미치는 영향은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그 이유는 두 가지. 첫째, 일이 이미 커졌으니 만약 무조건 돈으로 해결한다면, 사람들은 그저 우리가 제 발 저린다고 생각할 뿐이야. 증거를 내놓기 전, 아무도 우리의 설명을 믿지 않을 테니까.”“둘째, 이 일이 도대체 일부러 계획된 것인지, 아니면 공교롭게 일어난 건지에 대해 우린 아직 모르고 있으니 무턱대고 반격을 한다면, 적들이 미리 만든 함정에 걸려들지도 몰라.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지옥으로 끌어들이겠지.”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