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도 도윤에게 무슨 계획이 있는지 몰라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에 각종 화장품을 바르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그녀를 칭찬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어머, 피부가 어쩜 이렇게 좋아요? 딱 봐도 대표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신 거 같네요.”“어디 피부뿐이겠어요, 얼굴도 예뻐서 흠이라곤 없다니까요? 제가 그렇게 많은 연예인들에게 화장을 해봤지만, 자연 미인이든 성형 미인이든 이렇게 완벽한 얼굴을 찾기 힘들다니까요.”지아는 쏟아지는 칭찬에 어쩔 바를 몰라 작은 소리로 물었다.“저기, 다 꾸민 다음 어디로 가는 거죠?”메이크업은 살짝 놀랐다.“대표님께서 말씀하지 않았어요? 그럼 저희도 말하면 안 되겠네요. 이건 대표님의 서프라이즈니까요.”진환은 미리 그들에게 입단속 잘 하라고 당부했고, 그들은 어떤 말을 할 수 있는지, 또 어떤 말을 하면 안 되는지 몰랐기에 하나하나 입을 다물고 조용히 지아에게 화장을 해주었다.이때 문밖에서 갑자기 귀를 찌르는 소리가 울렸다.“내가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이유가 로라에게 스타일링을 맡기려고 한 건데. 그런데 이게 뭐야?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아?”“미나 아가씨, 정말 죄송해요. 로라는 이미 다른 예약이 있어서요. 저희 숍의 다른 디자이너도 아주 유명하니까 사람을 바꾸시는 건 어때요?”“싫어, 로라 아니면 안 돼. 까짓 거 돈 주면 되잖아? 내가 두 배로 줄게.”“아가씨, 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야 이 병신들아, 돈 받고 일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나불대? 빨리 가서 로라 불러와.”한참 동안 설득했지만 상대방은 여전히 성질을 부렸고, 로라가 나오기도 전에 오히려 자신이 먼저 들어왔다.“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로라를 불러간 거야?”지아는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상대방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지만, 옷을 입는 스타일은 아주 전위적이었다.이렇게 큰 눈이 내리는 날씨에 그녀는 뜻밖에도 맨다리에 긴 구두를 신고 있었다.비록 실내에 있으면 춥진 않겠지만 지아는 여전히 이런 스타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아는 도윤의 표정에서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방금 그 여자의 날뛰는 태도를 생각하면, 유진이란 사람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도윤은 자아가 쓸데없는 생각할까 봐 두려운 듯, 전에 먼저 설명을 해본 적이 거의 없던 남자는 몸을 굽히더니 지아의 손을 잡았다.그는 그렇게 반쯤 쪼그리고 앉았고, 훤칠한 몸은 앉아 있는 지아보다 조금 낮았다. 그러나 도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그는 고개를 들어 진지하게 설명했다.“지아야, 내가 어릴 때 막내 이모네 집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었거든. 유진네 집안은 서씨 집안과 서로 아는 사이였고, 연회 때 우리는 아이들끼리 함께 모여 몇 번 놀았을 뿐이야.”지아는 도윤이 이렇게 진지하게 설명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쑥스러움을 느꼈다.“나도 널 의심하지 않았어.”도윤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난 네가 상관없는 사람들 때문에 불편해하는 거 원하지 않아. 만약 불편하다면 꼭 나에게 말해줘.”도윤의 다정한 고백에 주위의 여자들도 마음이 설렜다.‘이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남자가 있을까?’지아는 쑥스러워서 도윤을 밀어냈다.그녀에 대한 도윤의 사랑은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라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사실 지아는 도윤을 의심하지 않았고 단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안정감 넘치는 대답에, 지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날이 어두워지자, 지아는 드레스를 입고 거울 속 몸매가 가녀린 자신을 바라보았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그녀는 줄곧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화려하게 꾸미니 지아 자신도 깜짝 놀랐다.주위 사람들의 칭찬도 확실히 사실이었다. 지아 자신도 조금의 흠도 찾지 못했으니까.그녀가 문을 열고 나오자, 도윤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을 때 멈칫했다.‘우리 지아는 정말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예뻐.’도중에 도윤은 입이 아주 무거워 지아에게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다.도윤도 머리를 약간 다듬고 정장을 갈아입었는데, 넥타이와 가슴에 꽂은 꽃은 모두 지아의 드레스와 같은 색이었고, 중요한
지아는 단지 기억을 잃었을 뿐, 바보가 아니었다. 진환은 미리 이 복도를 깨끗이 정리했으니 어떻게 이유 없이 기자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그리고 메이크업이 정교하고 비싼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또 어떻게 공교롭게 치마를 밟고 넘어졌을까?그녀는 일부러 기자를 불러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한 게 분명했다.천박한 수단이었지만 효과가 있었다.다만 지아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도윤은 비록 집안이 괜찮지만, 그저 회사에서 연봉을 꽤 많이 받는 직원일뿐, 그 여자는 이런 수단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그리고 도윤은 또 어떻게 그 여자를 대처할까?’지아는 자신이 생각만큼 괴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심지어 도윤의 반응을 지켜보려고 침착하게 기다렸다.여린 여자가 넘어지면, 남자는 말한 것도 없고, 아마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그녀를 안아줄 것이다.도윤은 전화 중이었는데, 이때 그의 늘씬한 그림자는 불빛에 길게 드리워졌고, 제자리에 훤칠하게 서 있었다.처음부터 끝까지 도윤은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는데, 여자가 품에 안겨 들려오려는 순간, 도윤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도윤은 이미 자신의 본능을 훌륭하게 통제할 수 있었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넘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혹여 누군가 그 자리에서 자살한다 하더라도 그는 그 사람의 피가 자신의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담담하게 뒤로 물러설 것이다.지아는 여자가 넘어지기 전의 표정을 정확히 포착했다.충격, 당황,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눈빛.‘지금 뒤로 후퇴한 거야?’여자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산했고, 기자들도 이 순간 그녀의 계획대로 셔터를 눌렀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오로지 그녀가 낭패하게 쓰러지는 사진만 찍혔다.이 긴 복도에는 카펫을 깔지 않아 여자는 그대로 땅에 넘어졌다.지아는 멀리서도 여자가 쿵 하고 넘어진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엄청 아프겠다.’여자는 눈물을 머금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도윤 오빠…….”분명히 남자의 이름을 불렀
유진 앞으로 내민 손은 매우 하얗지만 굳은살이 가득했고 평소에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사람들은 손이 여자의 두 번째 얼굴이라고 한다. 그 손을 보자, 유진은 도윤이 지아에게 잘해주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굳은살이 이렇게 많이 박혔으니 평소에 집안일 많이 했겠지?’유진은 자신의 손을 내밀었고, 어릴 때부터 응석받이로 자란 그녀는 매주 피부관리를 꾸준히 받아서 손은 아주 보기 좋았다.뼈마디가 분명하고 가늘고 길쭉하며 손바닥은 하얗고 부드러워 손톱까지 깔끔했다. 네일 아트는 심지어 빛을 반짝였는데, 마치 쇼윈도에 진열된 사치품과 같았다.이렇게 비교하니, 유진은 마음속으로 우월감을 느꼈다.‘이번은 내가 이겼어.’“고마워요.” 그녀는 지아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고, 두 손이 닿자, 그녀는 오히려 자신과 지아의 차이를 보여 주려고 했다.유진은 백년의 역사를 가진 귀족 가문의 아가씨였기에 집안까지 파산한 지아는 자신과 비교할 가치가 없었다.손이 닿은 순간, 유진은 딱딱한 무언가를 느꼈다.그녀는 그제야 지아가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를 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반지는 화려하고 과장하지 않지만 디자인이 독특해서 더욱 특별해 보였다.시선을 위로 옮기자, 유진은 그제야 지아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전에 지아는 기자들에게 정면으로 찍힌 적이 없었고, 후에 도윤은 또 그녀에 관한 모든 기사를 내렸기에 유진은 지아의 사진조차 찾아내지 못했다.서미나는 그때 돌아와서 지아에 관한 얘기를 했지만, 대부분 지아에 대한 욕설이었다. 그녀가 못생겼다니, 유진의 손가락보다도 못하다니.그래서 오늘은 유진과 지아의 첫 만남이었다.지아는 이목구비가 정교해서 화장을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예뻤다. 지금 화장을 하고 나니, 지아는 사람들과 거리감이 생길 정도로 아름다웠다.외모에 줄곧 자신이 넘치던 유진도 지금 좌절감을 느꼈다.지아는 감정이 평온했고 날뛰거나 기세등등하지 않았다. 특히 눈 밑의 반짝이는 은색 빛깔은 그녀를 선녀처럼 같이 돋보이게
분위기는 어색해졌고, 유진은 숨을 크게 쉬며 기선제압을 하려 했다.“그때 오빤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가 있죠? 두 사람은 언제 결혼했어요? 왜 나한테 말하지도 않고.”이 말이 나오자, 지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도윤을 바라보았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도윤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노려보았다.“나와 너와 친구도 가족도 아니니, 결혼 소식을 굳이 알려줄 필요가 있었을까? 그리고 내가 너와 결혼하겠다고 말한 일, 혹시 어렸을 때 너희들에게 억지로 끌려가 소꿉놀이를 하다, 널 거절하면 우리 엄마한테 이르겠다고 협박한 것을 가리키는 건가?”간단한 말 한마디에, 유진은 온갖 체면을 잃었다. 그녀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도윤이 뜻밖에도 이렇게 매정하게 변할 줄은 몰랐다.서미나가 도윤도 이렇게 그녀를 대했다는 것을 생각하자, 유진은 곧 마음이 풀렸다.보아하니 도윤은 누구에게나 이런 태도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동안 지아의 정체를 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정말 미안해요. 난 도윤 오빠가 우리와 아주 즐겁게 놀았다고 생각했는데. 난 아주 어릴 때부터 줄곧 도윤 오빠를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오빠에게 이렇게 많은 불쾌한 추억을 가져다줄 줄은 정말 몰랐어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미안한 표정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언니, 정말 미안해요. 내가 도윤 오빠를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질투하는 건 아니죠? 도윤 오빠는 줄곧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하지 않았기에 난 오빠가 독신인 줄 알았어요.”지아는 드라마에서나 이런 불여우를 보았는데, 현실에 이런 사람이 없을 줄 알았다. ‘어떻게 이런 역겨운 사람이 있을 수가 있지?’그러나 현실은 잔혹했고, 지아는 오늘 처음으로 불여우를 만났는데, 똥을 씹은 것보다 더 징그러웠다.‘자신이 징그럽게 생겼으면 그만이지, 굳이 나대다니.’지아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도윤의 손을 잡고 그의 팔을 흔들며 유진의 목소리를 흉내 냈고, 간드러지게 물었다.“도윤 오빠, 유
도윤은 말을 마치자마자 분노를 느낀 유진을 남겨둔 채 지아를 끌고 훌쩍 떠났다.이 남자는 그녀가 어렸을 때보다 더 인정사정을 몰랐고, 그야말로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다.두 사람이 손을 잡고 떠나는 장면을 보면서 유진은 이가 깨질 것만 같았다.이때 그녀는 차갑게 웃더니, 마치 눈에 어둡고 푸른빛을 뿜어내며 차가운 혀를 내밀고 있는 어두운 곳에 숨은 뱀과 같았다.지아는 고개를 돌려 도윤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을 알아차린 도윤은 눈을 드리웠다.“왜? 궁금한 거 있으면 그냥 물어봐.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확실히 궁금한 게 있는데, 너 그때 정말 유진 씨의 가족들을 죽일 생각을 한 거야?”“응.”도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어머니는 정신적인 질병이 있어 어릴 때 날 거의 돌본 적이 없었어. 그때 막내 이모는 가족이라며 나를 데려갔고, 바로 그때 유진과 알게 되었어. 그녀는 이웃집의 아이였지만 자꾸 나와 함께 놀자고 졸랐어. 그때 난 소꿉놀이를 싫어했는데, 유진은 내가 좋아하는 게임 하겠다고 소리쳤고.”지아는 호기심이 생겼다.“넌 무엇을 좋아했는데?”“사격, 복싱, 펜싱, 승마, 스키, 잠수…….”“그 후에는?”“유진은 사격장에서 총도 쏘지 못하고 심지어 모기에 물렸고, 나와 격투할 때 한방에 쓰러지더니 코피가 났어. 그리고 말을 타다 직접 말에게 차였고…….”“잠깐.” 지아는 손을 내밀었다. “그 여자는 확실히 얄밉지만, 코피를 흘리게 한 것은 일부러 그런 거지?”그때의 일을 생각하니 도윤은 더욱 머리가 아팠다.“아니, 그건 그 여자가 봐주지 말라고 소리친 거야. 게다가 유진도 연습한 적이 있었고, 봐주는 것은 그녀를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아무렇게 주먹을 휘둘렀어. 그런데 그런 간단한 공격조차 피하지 않고 심지어 얼굴로 받을 줄은 정말 몰랐어. 그때 그녀의 코피는 내 온몸에 튀어서 얼마나 짜증이 났던지.”도윤의 불평을 듣자, 지아는 배를 안고 웃었다.
이 통로에는 지아와 도윤 두 사람밖에 없었다. 지아는 이미 그 막 뒤의 소란스러운 음악소리와 사회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곳은 무슨 행사 현장이었다.그녀는 도윤이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온 이상, 왜 아직도 이렇게 신비롭게 구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도윤을 바라보면서 지아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대체 무슨 행사인데. 미리 나에게 말해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할 거 아니야.”위쪽에는 등불이 있었는데, 남자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을 비추자, 그의 모든 날카로움과 싸늘함을 지워버렸다.“무슨 행사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우리 함께 참여했다는 거야.”밖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아래에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는데, 지아는 이곳이 영화제의 시상식이란 것을 판단할 수 있었다.이는 지아로 하여금 도윤의 신분에 대해 더욱 궁금해졌다. ‘도윤은 어느 큰 프로젝트의 공사장 책임자가 아니었어?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지?’깨어난 요 며칠, 지아는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도윤의 신분을 알 수 있었지만 누가 자신의 남편을 제1재벌로 생각하겠는가?이때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저희는 오늘 특별히 YH그룹 대표님과 그의 부인을 현장에 초대했는데, 모두들 큰 박수로 두 분을 환영하시길 바랍니다.”지아는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자신의 남편이 뜻밖에도 대표님이라니?비록 도윤은 확실히 매우 바빠 보였지만, 매일 집에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하는 대표님이 또 어디 있을까?지아는 팔꿈치로 도윤을 쿡쿡 찔렀다.“뭐야, 왜 나에게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어!”“네가 이씨 집안의 사모님이란 것을 알리고 싶었는데,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지아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그럼 이렇게 한 이유가…….”도윤은 지아의 손을 빈틈이 없을 때까지 조금씩 꽉 잡았고,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난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내 아내란 것을 알려주고 싶어.”막이 올라가자, 모든 라이트와 카메라는 지아와 도윤의
지아는 머리가 좀 어지러웠고 심장도 아주 빨리 뛰고 있었다.마치 이 장면을 오랫동안 기대했던 것 같다.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도윤을 바라보았는데, 만인의 주목을 받은 남자는 지금 반짝반짝 빛이 났다.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애정이 흘러넘쳤다.“과거의 저는 제 아내를 너무 사랑했고, 심지어 제 아내를 숨겨 그녀의 모든 빛을 가리고 싶을 정도로 집착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영광을 다시 아내에게 돌려주고 싶어요.”도윤은 최선을 다해 지아를 숨겼고, 오직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그녀를 상처투성이로 만든 사람은 자신이었다.그래서 도윤은 다른 방식으로 지아를 지키고 싶었다. 전의 잘못을 메우고 싶어서 그런 것이든 그녀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든 상관없었다.만약 이것이 지아가 원하는 것이라면, 도윤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녀를 만족시키고 싶었다. 그는 더 이상 지아를 숨기고 싶지 않았고, 당당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지아가 바로 자신의 아내라고 말하고 싶었다.마이크는 도윤의 목소리를 곳곳으로 전달했고, 지아는 심장이 거의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녀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도윤은 부드럽게 지아의 손을 잡았다.“오늘 저의 부부가 초대를 받고 영화계의 선배님들에게 상을 수여할 수 있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도윤은 마치 시상하러 오기 위한 게 아니라 애정을 과시하러 나온 것 같았다.그의 고백을 듣고, 모든 카메라는 그들 두 사람을 겨누었고, 일시에 영화 주인공의 인기를 덮어버렸다.유진도 오늘 초대를 받은 게스트 중 하나였다. 그녀는 힘들게 도윤이 오늘 이 자리에 나올 것이란 것을 알아냈고, 수많은 시간을 들여 그와 만날 기회를 만들었는데, 자다 깨어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샴페인색 드레스를 입은 지아는 도윤의 곁에 서 있었는데, 드레스로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그려냈다. 도윤의 넥타이도 마침 지아의 드레스 색깔과 맞추었고, 두 사람은 고귀하면서도 잘 어울려 그야말로 한 쌍의 선남선녀였다.유진은 화
시하와 시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는데,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심지어 소시월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이걸... 오빠들은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 소시월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내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어. 절대 다른 사람이 내 계획을 망치게 둘 순 없어!’“단지 사진 한 장으로 뭘 증명한다는 거죠? 아빠와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빠는 비행기 사고로 시신조차 찾지 못했어요. 두 사람의 친자확인도 없이, 대체 무슨 증거를 내놓겠다는 거냐고요!”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했던 혈액형 검사야. 두 분은 모두 O형이야. 즉, 두 분은 O형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당신들 아버지는 B형이었어. 혈액형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아주 적다는 건 알고 있겠지? 과연 당신들 아버지가 그 예외일까?” 소지훈은 다시 다른 사진을 꺼냈다.“혈액형 이야기는 우선 접어두자고.”“이건 할아버지의 여러 아들들 사진이야. 우리 아버지와 삼촌, 작은삼촌은 할아버지와 60% 이상 닮았지만, 네 아버지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지아는 소임호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형 스크린에 비춰진 소임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지아는 이성을 잃고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많이 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똑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오직 서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임호가 부남진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부남진은 나이가 들어 얼굴이 많이 변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젊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임호는 분명히 부남진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닮은 모습이었다. “설마...”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진실이 이렇게 갑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시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그의 손이 여전히 멀쩡했다면, 지금쯤 소지훈의 뺨을 때렸을 것이었다. 시월과 심장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아는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저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야?” 도윤은 고개를 숙이고 지아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이 사진 속 사람을 한 번 봐봐.” 도윤은 핸드폰 속 사진을 열어 서른쯤의 매혹적인 여성을 지아에게 보여주었다. 지아는 그녀의 눈가에 있는 검은 점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잖아!” 흑백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환희의 모습이 컬러로, 게다가 훨씬 선명한 화질로 나타난 것이었다. “맞아.”지아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혹시 할머니의 행방을 알아낸 거야?” 도윤이 논쟁으로 가득 찬 현장을 보며 말했다.“아마 저 사람들이 답을 줄지도 몰라.” 소지훈의 폭로는 현장을 술렁이게 했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지훈 도련님께서 파문을 일으킬 만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하죠, 아무리 무례한 사람이라도 이런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할 순 없으니까요!” “어머, 정말 흥미진진한데요?”시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오빠, 시언 오빠와 오해가 있는 건 알지만, 그런 거짓말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은 할아버지를 배웅해 드리는 날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할아버지? 허,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 적당히 좀 하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웃기는 건 너희 같은 잡종들이지!”소지훈이 손뼉을 치며 준비된 프로젝터를 가리켰다.“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에서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고, 소씨 가문의 족보를 깨끗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죽어서도 소씨 가문에 매달리려는 사람이 없도록 말이죠!” “도대체 숨
밤이 깊어지자, Z국에서 전통적인 가족 고별 의식이 시작되었다.지아는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소씨 가문의 방대한 자손들과 그들의 복잡한 계보를 바라보았다. 소영수의 직계 자손들 외에도 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 등의 곁가지 후손들까지 합쳐져, 효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별 의식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첫 번째로 향을 올리는 순서는 원래 장남의 몫이었지만, 장남이 사고를 당하면서 그 역할은 둘째에게 넘어갔다. 다른 자손들도 각자 자신의 향을 챙기러 움직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언과 시하를 대신해 시월이 나서서 향을 가지러 갔다. 하지만 소시월이 향에 손을 대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지훈이었다.“오늘은 가족을 위한 작별의 자리야.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언이 즉각 반응했다.“소지훈,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여긴 할아버지의 영정이 모셔진 자리야. 할아버지께서 편히 눈감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야?” ‘예전의 작은 다툼은 다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오늘처럼 외부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저렇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시하는 상대적으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는 이 상황이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연예계에서 단련된 소지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저런 말을 했을 리 없어. 뭔가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해.’ 시하가 둘째 삼촌인 소상현을 바라보았다. 소상현은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소명담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소상현은 자기 친아들이 이토록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백발의 노인이 흑발의 자식을 보내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소상현은 소지훈의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을 연 사람은 소상현의 부인인 오연희였다.“시언아, 너무 흥분하는 거 아니니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